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구로타케 요의 그리고 숙청의 문을을 펼쳐 읽는 내내 굉장하다!”는 감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상당히 잔혹하다. 피가 낭자하고, 살육이 펼쳐진다. 그것도 존재감 없던 다소 어리바리하던 여교사에 의해 벌어지는 살육의 현장이기에 도리어 이러한 위화감에서 오는 공포가 존재한다.

 

소설은 어느 평범한 여교사의 변신에서부터 시작된다(여교사의 변신은 유일한 가족이자 혈육인 사랑하는 딸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엄마와 함께 먹을 케이크를 사서 돌아오던 길, 폭주족들에 의해 사고를 당하고 죽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들을 향한 복수의 문이 열린 것.). 문제 학생들이 가득한 학교, 이미 학교는 배움의 터전이 아닌, 사회의 암적 존재들인 범죄자들을 안전하게 피신하게 하는 장소요, 안전하게 숨어 범죄자로 성장케 하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런 문제아들이 가득한 학교, 그런 학교 중에서도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교실 D. D반 학생들은 이제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어쩐 일인지 전원이 학교에 출석하였다.

 

그런 학생들의 담임인 곤도 아야코는 뭔가 평소와 다르다. 자신을 철저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아이들의 온갖 조롱을 피하는데 급급하던 아야코가 어쩐지 당당하다. 굼뜨던 행동은 절제된 동작에 알 수 없는 활기와 함께 속도감도 있고. 이런 아야코가 드디어 일을 저지른다. 반 학생들 전원 29명을 인질로 잡은 채 아이들 하나하나의 죄목을 들먹거리며 처형을 시작한 것.

 

아야코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학교 건물에 폭발물도 설치하고, 교실로 진입하는 복도에는 최고성능의 초소형카메라까지 설치해놓았다. 자신은 총과 칼로 무장하고. 칼질과 총질 역시 허투른 동작 하나 없이 잘 훈련된 느낌의 아야코.

 

이런 아야코의 변신에 처음엔 학생들도 반발을 하지만, 반발하는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척결당한다. 29명의 반원 전원을 인질로 잡고 여리기만 하던 여교사의 숙청의 문이 열린 것.

 

소설은 시작부터 독자의 마음을 휘어잡는다. 한껏 긴장감으로 흥분된 마음으로 몰입하게 되며 소설에서 결코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지만, 결코 느슨하지 않고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로 마지막까지 몰아간다.

 

여교사와 범죄아들을 모아놓은 학생들간의 대치, 그리고 범죄자가 되어버린 여교사와 이를 막기 위해 출동한 특대본부 반장 겐마 이하 대원들 간의 대치, 여기에 끼어들게 되는 학교 관계자, 학부모들, 그리고 방송. 이런 대립구도 가운데서 소설은 시종일관 몰아붙이는데, 과하다 싶으면서도 전혀 과하지 않게 몰입하게 만든다.

 

마치 만화처럼 여리기만 하던 여교사가 갑자기 여전사로 등장하는 부분이 현실감 없지만, 이런 현실감 없음이 도리어 소름 돋게 만든다.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한 여전사의 탄생으로 말이다. 게다가 끔찍하게 벌어지는 살인의 행위들, 그런데도 끔찍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죽어야만 하는 이들의 죄악상에 가슴을 무겁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서는 안 됨에도 통쾌하게도 만든다. 어쩌면 이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가 통쾌하다기보다는 죄에 대한 단죄가 통쾌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아울러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건, 소설 속 온갖 죄로 가득한 학생들의 모습이 어쩌면 오늘 우리네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이기도 하다.

 

학생이란 신분 뒤에 교묘하게 숨어서 온갖 끔찍한 만행들을 저지르는 녀석들. 인간성이라고는 이미 찾아볼 수 없는 녀석들. 자신들의 행위가 죄악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며, 그저 하나의 놀이라고 여기는 녀석들. 이 녀석들은 21세기가 낳은 괴물들이다. 그런 괴물들을 낳고 기른 부모의 시선 역시 평면적이지 않게 절묘하게 드러내주며 묘사하고 있어 소름 돋는다.

 

소설 뒤편에는 두 가지의 반전이 도사리고 있어 이 부분 역시 소름. ! 간만에 엄청난 소설을 읽었다. 저자 구로타케 요란 이름을 깊이 각인해 본다.

 

요즘 세상에는 타인의 마음속 아픔을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농담의 한도를 모르고, 무슨 문제가 생기든 자신에게는 관대하며, 천박하게도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을 다른 사회에서 찾고, 자신은 끊임없이 반성과 사죄의 테두리 바깥에 서려고 한다. 직접 단호하고 분명하게 일러주면 무자각한 인간들도 조금은 깨닫지 않을까. 이러한 강경책이라도 쓰지 않으면 머저리 같은 녀석들의 눈은 영원히 뜨이지 않을 테니까. 반쯤이라도 뜨면 피해를 입는 사람이 확실히 줄어든다.(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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