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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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첫 번째 노벨문학상(1968)의 기쁨을 안긴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산소리(1954)란 작품을 만났다. 1995년에 번역 출간된 책인데, 금번(2018) 삼판으로 새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읽어야만 한다는 의무감 반 좋은 작품을 만난다는 설렘 반의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은 어렵지 않은데, 묘하게 집중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분명 16개의 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인데, 내용이 연결되면서도 묘하게 단절된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왜 그럴까? 마치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소설을 다 읽은 후, 소설 뒤편에 실려 있는 작품 해설을 읽어보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소설 산소리16개의 장이 하나로 연결되는 장편소설이지만, 각 장은 하나하나 다른 곳에서 발표된 단편소설이었던 것. 그래서 묘하게 단절된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래서 소설을 읽기 전 작품 해설을 읽는다고 하나보다(, 난 여전히 작품 해설은 마지막에 읽던지 말든지 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은 전후(戰後) 일본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한 가정의 모습을 통해. 아니 어쩌면 한 나이든 가장의 입장에서 전후 일본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62세 오가타 신고는 어느 날 산에서 울리는 듯한 산소리를 들으며, 이 소리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신고의 집엔 한 살 연상의 아내 야스코, 아들 내외인 슈이치와 기쿠코, 이렇게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일견 평범한 가정처럼 보이는 이 가정엔 남모를 고민이 있다. 60이 넘은 부부에게 고민이라면 자녀들의 가정일 게다. 그렇다. 소설 속 신고의 고민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함께 사는 슈이치와 기쿠코 내외에겐 감추고 싶은 어두움이 있다. 아들 슈이치의 타락한 생활 때문. 슈이치는 전쟁에 참전한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듯 싶다. 전쟁에 참전하여 사람을 죽였던 이들, 그로 인한 고민과 갈등, 번뇌, 이러한 것이 타락한 생활로 이어지게 된다. 슈이치가 그렇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헌신적인 아내를 둔 슈이치는 아내보다는 바깥에서 전쟁미망인과의 밀회를 즐긴다(이 불륜적 만남 역시 아름다운 사랑이라기보단 사랑을 빌미로 또 하나의 성폭력적 관계이기도 하다.).

 

아들의 문제만 있는 건 아니다. 시집 간 딸 역시 두 손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다. 사위는 마약중독자이며 어느 여인과 동반자살을 시도함으로 신문에 기사화되기까지 한다. 이런 남편을 둔 딸은 남편을 버리고 집에 왔다기보다는 버림받고 집으로 온 느낌이다. 여기에는 딸의 못생긴 외모가 한 몫 한다. 소설 속 신고는 외모에 집착한다. 이런 신고의 모습을 통해 탐미주의를 옹호하려는 건지, 외모지상주의를 고발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신고는 소설 내내 여성의 외모에 집착한다(특히, 첫 사랑의 의미를 갖고 있는 처형의 외모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이 처형의 외모에 대한 집착은 며느리에게로 전이된다.).

 

이런 집착은 며느리 기쿠코와의 관계에서도 이어진다. 소설 속 며느리 기쿠코와 시아버지 신고 간의 관계는 각별하다. 서로를 챙겨주고 위하는 모습이 유별날 정도다. 너무 이상적인 관계라고 할까? 그런데, 그 관계를 넘나드는 위험한 아슬아슬함이 소설을 지배한다. 신고의 시중을 드는 것은 아내 야스코가 아니라 며느리 기쿠코이며, 아기 중절수술을 하고 그 상처로 친정에 갔던 기쿠코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 역시 시아버지 신고의 전화 한 통 때문이다. 이렇게 둘의 관계는 각별하다. 옆에서 보기 아슬아슬할 정도로. 실제 신고는 며느리 기쿠코에게 며느리로서의 사랑만이 아닌 여성으로서의 감정 역시 느끼기도 한다. 정말 느낀다. 그리고 후회의 자책을 하면서도 또 느끼고...

 

이렇게 소설은 탐미와 성에 대해 말한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주제는 죽음이다. 소설 전반에서 신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품기도 하고, 다양한 죽음을 만나기도 한다(친지의 묘한 죽음들이 등장한다.). 이런 죽음이 예사롭지 않은 건, 단순히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해 품게 되는 보편적 두려움만이 아닐지 모르겠다. 어쩌면 전쟁 이후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하여 보여주는 건 아닌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탐미도, 성도, 죽음도, 그리고 꿈도(소설 속에서 신고는 여러 꿈들을 꾸고, 이 꿈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소설의 중요한 주제이겠지만, 소설을 보며, 제일 많이 든 생각은 다른 데 있다.

 

인생이란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특히, 자녀의 인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다소 우유부단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주인공 신고가 그려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신고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녀들의 문제에 이런저런 접근들을 하며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여전히 우유부단함은 있지만 말이다. 이런 노력에도 신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자녀들의 삶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네 인생이 이런 것임을 작가는 말하려던 거였을지도.

 

그랬기에 소설을 읽으며 연로하신 부모님이 거듭 떠올랐다. 자녀들의 인생이 자신들의 인생인양 헌신하며 살아오신 부모님. 여전히 부모님들은 자식의 문제로 고민하고 아파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신다. 이런 부모님의 모습이 소설 속 주인공 신고의 모습에 겹쳐져 특별한 느낌을 갖게 했다.

 

16개의 장이 하나하나의 단편으로 썼다니 다시 한 번 각각의 장을 독립된 단편소설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럼 또 다른 느낌이 들지도. 아무튼 노벨문학수상자의 작품을 읽었음에 자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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