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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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자니 왜 이리 서늘해지는 걸까? 곱씹어보니 일관성 없는 상념들이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었다. 너무 시원시원 읽힌다는 것, 그러면 쌈박해야 할 건데 기분이 영 찜찜한 게 도무지 불편하여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온 몸의 맥이 다 풀린 듯 착 가라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기분은 대체 뭐람 하는 생각이 들어 [강남몽]을 집어 들고 몇 부분 다시 살폈지만 좀처럼 가닥이 잡히질 않았다. 종잡을 수 없게끔 난처한 이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애초부터 [강남몽]이 너무 쉽게, 아무 저항 없이 읽히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소개 글을 통해 강남 형성사에 관한 작품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못 심각할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터여서 약간 허탈하달 정도로 말이다. 진입장벽을 거치고 심리적 동요를 겪은 후에 비로소 작품 세계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으리라 예단했던 것이다. 혹시 이게 모든 걸 대수롭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엮어나가는 작가의 몰가치적 관점과 고저장단 없이 밋밋한 문체 탓인가 하고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렸는데 어느 순간 연유가 선하게 그려지는 걸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 김진이나 박선녀, 심지어 조폭 보스인 홍양태, 강은촌 같은 이들의 행동방식이 결코 파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 여기,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바로 우리 속에 꿈틀대고 있던 탐욕스런 본능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어느새 꼭두각시처럼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져 버린 게 그들이란 말이다. 한 때 부동산에 기웃거리고 증권 투자, 펀드 가입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낯익은 얘기니 자연 쉽게 읽힐밖에.

그러면서 석연찮았던 불쾌감의 발원지가 어딘지도 알 것 같았다. 황석영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우리, 아니 나의 천민적인 실상을 에둘러 포장하지 않고 직방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적나라한 면모 그대로를 만천하에 까발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모습이었구나,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참담한 마음에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말이다. 바로 내 안에 들어있던 동물적 속성을 고스란히 그려 보이고 있었으니 어찌 가슴 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 순간 [강남몽]에서 유일하게 분별력을 발휘하던 심남수의 말이 뇌리에 비수처럼 꽂히는 듯 했다. 그는 이미 모든 걸 꿰고 있었다.

글쎄 맨손으로 일어나기는 좋았는데 말이지. 아무래두 여긴 정신이 없어서, 혼을 빼놓고 살아야 할 것 같아. 앞으로 수십 년은 그렇게 흘러갈 거야.(49쪽)

한국 사회에서 제정신 챙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할 뿐이었다. 제주 4.3항쟁 시 양민과 무장 세력의 분리를 주장하며 무고한 시민들을 초토화시키라는 지시에 반대하다 결국 권부에 의해 축출당한 김익창 중령처럼 강직하고 줏대 있는 자가 소신을 펼 수 있는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지경에서 버텨나가려면 천민, 아니 동물이 되어야 할밖에. 꿈틀대는 탐욕을 스스럼없이 실현한 이들만이 내면에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연명하고 득세하는 사회구조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일제 때 친일 행각으로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오로지 일신의 영달만 꾀하던 이들이 해방 후 신생 조국에서 심판을 받기는커녕 고급 관료나 경찰로 자연스레 등용되는 어이없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던 것이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배신과 변절이 너무 횡행한 탓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페르소나를 바꿔나갔던 것이다. 홍양태와 강은촌 같은 조폭의 세력 다툼에선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이들을 실컷 이용해먹곤 범죄와의 전쟁이란 명목으로 일망타진하여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정권 담당자도 있었다. 또 박선녀 같이 앳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착실하게 한푼 두푼 저축하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온전한 일자리보단 손쉽게 거금을 쥘 수 있는 유흥업소 쪽으로 빠지는 게 정규 코스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밤 문화가 워낙 창궐했던 탓에 꽃다운 아가씨들 부기지수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남들 다 하는 일이라 생각해서인지 주저하고 망설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다 자연스레 매춘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고. [강남몽]에서 가장 분별력 있는 인물로 그리고 있는 심남수조차 부동산 업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크게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천지가 넋이 나가 있었다. 광기에 휘둘려 어찌 돌아가는지 살필 안목이나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광란의 바벨탑을 쌓아 왔다. 그러다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상징되는 파국을 맞고 만 것이고. 외형은 그렇게 파괴되었지만 의식은 여전히 탐욕의 노예였던 우리에게 제대로 정신 차리라는 듯 IMF가 닥쳤고 또 그걸 남의 일로만 여기던 뉴욕 월가 펀드매니저들도 결국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 동반 금융 위기에 직면하고서야 겨우 자신과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온 천하가 어디 한 군데 예외 없이 광란의 도가니였던 것이다.

그 미친바람은 나도 피해가지 않았다. 아니 내가 기꺼이 바람 속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그 대열에 동참하여 아등바등 설쳐대었으니. 사리 분별없이 덩달아 춤추던 그 꼬락서니가 어땠을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아파트 담보 대출 자금으로 더 큰 평수를 분양받는 갈아타기를 시도하여 신분 상승을 꾀한 듯 우쭐거렸고 한번은 등기 전 전매로 시세차익을 노리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분양 신청이 쇄도하던 터여서 당첨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 분양가에 속칭 p(프리미엄)을 얹어서 입주권을 전매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 되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막차 중의 최고 막차를 탄 듯 IMF 외환위기에 딱 걸리고 말았다. 집값은 곤두박질치고 이자율은 하루가 멀다 하고 팽팽 오르는 통에 결국 감당하지 못해 프리미엄은커녕 분양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입주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선 한참 시간이 흘러 겨우 마음을 추스른 후인 것 같다. 아내와 이 문제로 얘기를 나누다 아찔해졌다. 한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며 그 동안 전혀 의식 않던, 아니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내 일그러진 모습이 또렷이 드러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연실색 했달 밖에.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지, 그런 터무니없는 욕심을 내다니 하는 개탄이 나오고, 스스로 너무 한심하게 여겨져 한참이나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적어도 나는, 아니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는 김진에게, 또 박선녀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을 것  같다. 그럴 자격을 갖춘 몇몇을 빼곤 말이다. 오히려 돌 맞을 자리에 서야 할 자가 누군지 빤하기에.

하여 이제 정말 알겠다. [강남몽]이 가슴 서늘하도록 시원하게 읽힌 게 주변에서 보아오던, 아니 내가 늘 행하던 익숙한 일이어서 별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는 걸 말이다. 그런 광풍에 분별없이 휩쓸려 눈 못 뜨고 탐욕의 행각에 동참했다는 뒤늦은 자각에 분열이 일어나 맥이 빠졌다는 것까지도. 어쩌면 나 때문에 피눈물 흘린 이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아득해지기만 한다. 광주대단지에서 못 가진 설움을 톡톡히 겪었던 정아네 가족사를 떠올려보면 상대적으로 가진 자들이 얼마나 미안해하고 더 베풀어야 할지 절로 알 것 같기에 말이다.

황석영은 특별히 강조하지도, 애써 방점을 찍지도 않고 담담하게 한국 현대사의 한때를 지배했던, 아니 실은 여전히 도도하게 불고 있는 광풍을 오롯이 그려내었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도 희생양이 되라고 지탄을 퍼붓지 않았다. 돌아보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김진과 박선녀, 홍양태와 강은촌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게 한 바탕 꿈이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버젓한 현실이고 더 심각한 건 좀처럼 바뀔 가망이 없다는 것. 다시 가슴께가 묵직해지더니 저릿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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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카르마
이상민 지음 / 푸른물고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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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유의 영화를 너무 많이 보아서인지 추리에다 스릴러까지 곁들여진 미스터리물을 기대했었다. 그리고 카르마, 업보를 걱정할 정도로 살육이 난무하는 그래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서사 구조, 파악하기 힘든 플롯 때문에 쩔쩔맬 것이라는 예단이 앞섰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전설 따라 삼천리를 방불케 하는 귀신 이야기였다.

숙주, 영매, 채널 그리고 부적 따위의 빙의 현상이 이야기의 주조를 이루고 있고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인위적 사건 설정이 그 앞뒤를 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희에게 사적인 앙심을 품고 있던 효진이 정희의 제안으로 친구들과 더불어 캠핑을 갖다가 결국 정희를 파멸로 몰고 간 뒤,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심령 현상에 휘둘린다는 이 이야기 소재는 잘 엮기만 한다면 귀신 시리즈로 빠지지 않고 수준 높은 미스터리 스릴러물로 만들 수 있을 건데 결국 이런 방식으로 끌고 가버려 많이 안타까웠다. 나름대로 인과 관계를 엮는다고 애는 썼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서사 전개에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하겠다.

하여 카르마는 빙의를 소재로 한 납량 시리즈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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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가제 독고다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가미가제 독고다이 김별아 근대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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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의 잔상이 남아있어서인지 [가미가제 독고다이]를 읽는 내내 이건 영락없는 드라마 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여 이 장면에선 이런 캐릭터의 인물을 캐스팅하여 살짝 비틀면 되겠구나, 더러는 자못 진지하기만 한 우스꽝스런 원리주의자의 모습을 부각시키면 딱이겠구나 하며 나름대로 콘티를 짜보기도 하였다. 그런 구상이 꼬리를 물고 막 떠오른 건 김별아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이 더도 덜도 아닌 우리네 삶의 진솔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뻔하디 뻔한 천편일률적 스토리가 아니라 전인미답의 새로운 틈새를 파고든 신선한 얘기여서 신세대들의 감성에도 톡톡히 어필이 될 듯 보이니 말이다. 시대 배경이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태평양전쟁 말기이고 가미가제 특공대를 소재로 한 것이며 계층과 신분이 충돌하는 가문의, 취향이 극과 극인 형제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기에 자칫 비분강개형으로 흐르기 십상이고 심각한 의미 지향적 경향을 보이게 마련이라고 누구나 넘겨짚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김별아는 이런 예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투적인 선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박제된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생기발랄하고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갖은 군상들이 부딪히고 넘어지며 겨우겨우 살아내는 진짜 이야기를 생중계하듯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드라마로 만들면 누구라도 맞아 맞아 하며 공감할밖에.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장편소설은 캐릭터가 인상적이고 스토리 라인이 재미있어야하며 문체도 매력적이어야 독자를 끝까지 붙박아둘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가미가제 독고다이]는 흡인력이 매우 강한 작품이라 하겠다. 우선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작위적인 설정 같으면서도 자연스럽고 친화력 있게 다가온다. 지지부진하게 삶을 낭비하고 있지만 사랑을 알고 순정을 이해하는 윤식과 어두침침한 면회실 안에서도 등불처럼 빛나던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경식 형, 그리고 형의 연인이었다가 윤식의 마음에 홈빡 들어와 버린 현옥, 그녀는 너무도 화-안하여 퀭한 모습까지 눈부실 정도로 태양인 형의 광선을 반사하는 빛나는 달과 같았다. 주인공 윤식이 그녀를 본 순간 심장으로부터 뻗친 불덩이가 쏜살같이 머리끝까지 치솟는 묘한 감정으로 떨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쇠날이 할아버지와 올미 할머니까지 다들 선이 굵고 색깔이 뚜렷한 이들이었으니 이야기의 폭과 깊이가 어떨지 절로 그려지게 된다 하겠다. 특히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진면목을 오롯이 보여준 윤식의 내면은 정말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쳤다.

피할 수 있다면 끝까지 피하려 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리 둘러대고 저리 꿰맞추어 궤변으로나마 이유를 댈 수 있지만 현옥에게는 뭐라고도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차라리 비난을 들을지언정 감사나 보답의 말 같은 걸 듣고 싶지는 않았다. 형의 행복과 현옥의 행복을 바라는 건 사실이지만 형과 현옥이 함께 나눠 갖는 행복에 대해서는 여전히 상상하는 일조차 버거웠다. 그렇다고 내 마음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죽음의 문전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삶터에서 뿌리내려야 할 사람의 발목을 잡챌 수 있겠는가? 죽음과 삶은 잇닿아 있으면서도 가장 먼 둘이자 하나였다. (267쪽)

이야기 전개도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지며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게 한눈 팔 겨를을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설화 같은 결혼 얘기에서 시작하여 갑자기 서울로 상경한 아버지가 부를 축적하더니만 신여성 어머니를 맞은 거 하며, 형제가 하나는 강고한 주의자로 다른 놈은 완전 놈팽이로 빠지는가 싶더니 삼각관계 러브 라인으로 얽히고설키며 이야기는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우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의 어처구니없고 생뚱맞고 기막힌 필연이 자주 언급될 정도로 기기묘묘한 일들의 연쇄가 작가의 철저한 구성 속에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급기야 형을 대신해 가미가제 독고다이에 지원한 윤식의 일본 병영 얘기에서 화룡점정을 찍게 된다. 빠르면서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서사 구조를 정밀하게 교직해낸 작가의 내공이 도대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작가의 독특한 칼라가 녹아있는 문체도 압권이었다. 별별 희한한 표현이 등장하고 구어체의 질퍽한 말들이 생뚱맞은 것 같으면서도 착착 달라붙게 다가온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말해요! 말해! 어떤 년에게 홀라당 넋을 뺏겼냐고? 젖통 큰 양년? 발에 환장한 김에 전족한 뙤년에게라도 꽂혔나? 아니면 냄새나고 촌스러운 조선년인 거야?” 

(중략)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것 같은 통증에 나는 소금 세계를 받은 미꾸라지처럼 용틀임했다. (204쪽)  

게이샤 요네하치의 왁살스러운 손길이 윤식의 중요 부위를 콱 움켜잡은 순간을 리얼하게 그린 대목인데 너무 실감이 나서 나까지 통증으로 징해지는 것 같았다. 다양한 우리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의 어휘력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평소의 좌우명이 ‘남의 일에 신경 끄자’인 내가 어쩌자고 남의 신념과 사랑에 흥야항야하는가. 더구나 상대는 소고집으로 앙버티는 허름한 계집애에 불과하지 않은가. (151쪽)

그렇게 열지 말라고 열지 말라고 제우스가 입다짐을 했는데도 뇌를 쏘삭쏘삭 간질이는 호기심에 결국 홀라당 상자를 열고 만 판도라도 치마를 두른 여자였겠다! 나는 오랜만에 선수다운 능력이 발휘된 데 대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뻔했으나, 웬일인지 그마저도 현옥 앞에서는 백치같이 헤벌쭉한 웃음으로 삐져나오고 말았다. (중략) 그 간질간질한 행복의 순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좋았으련만. (192쪽) 

그러다가 급기야 하나님까지 불러내고 만다.

그런데 하나님, 오랜만에 갑자기 불러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어렸을 적 마리아 선생에게 혼나가며 열심히 성경을 외운 덕에 하늘이 아직 날 보우하시는지 어쨌는지,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 꽃잎처럼 하얀 무언가가 날아와 현옥의 이마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이었다. (226쪽)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부르고선 간만에 불러서 죄송하다니? 이 무슨 불경스런 짓. 심각한 순간을 살짝 비트는 이 절묘한 위트라니. 또 적나라한 성애 장면은 없지만 묘한 상황 설정에 절로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목도 허다했다. 하여간 서너 쪽마다 한 번씩이랄 정도로 빵빵 터지며 배꼽 잡게 만드는 통에 몰입률 백 퍼센트였다 하겠다.

하여 김별아의 [가미가제 독고다이]는 잘 읽히는 소설, 그러면서도 삶의 의미와 인간의 심원한 내면을 오롯이 살려낼 수 있는 작품이 되려면 어떤 미덕을 갖춰야 할지 잘 보여준 전범이라 하겠다. 독자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받으면서 문학적 생명력도 긴 그런 작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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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외에는>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죽음 이외에는 머독 미스터리 1
모린 제닝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피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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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외에는]은 일반적인 추리물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우선 플롯이 얽히고 설킨 듯 복잡다단하게 꼬인 게 아니라 스토리 전개에 따라 순차적으로 사건의 실마리가 자연스레 드러나고 윤곽도 대략 잡히게 되어 있다. 하여 다른 미스터리 시리즈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범인이 누군지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맞추지 못하고 엉뚱한 인물을 지목하여 범인이 밝혀진 다음 내 머리가 이것밖에 안되냐며 쥐어뜯고 싶었던 경험이 있던 터라 추리물을 읽을 때면 잔뜩 긴장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비교적 쉽게 읽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낮은 지능을 탓하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시대 배경이 소설 저변에 잔뜩 깔려 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 캐나다 토론토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할 것인데 친절하게 역사적 맥락이나 지리적 환경이 잘 그려져 있어 그 시대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가능할 정도라 할 수 있었다. 

스토리는 아름다운 소녀 테레즈 러포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추운 겨울 토론토 거리에서 발가벗겨진 채 죽음을 맞은 소녀에 대한 사건을 수사하게 된 머독 형사는 로즈 가의 인물들과 접하면서 온갖 추한 몰골을 하고 있는 가족들의 사생활과 직면한다. 하여 관련있는 가족 구성원 대부분이 범인인 듯 보이기 시작했고. 의사 로즈부터, 아들인 의대생 오언, 가정부 부부, 마굿간 관리자 조, 그리고 오언의 약혼자 헤리엇 셰프컷과 그의 아버지 셰프컷 의원 등 모두 어두운 구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상대하는 머독 형사 역시 그늘이 드리운 내면을 지니고 있기는 마찬가지 였고. 

결론은 싱겁게도 테레즈가 우연히도 부패 타락한 이들의 일시적 광란의 희생양이 된 것으로 밝혀지게 된다. 하여 좀 더 복잡한 플롯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문화인류학적 접근이라 할 정도로 당시 생활상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계층 및 인종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 등은 다른 추리물에서 맛볼 수 없는 것으로 독자들이 누릴 수 있는 값진 보너스라 하겠다. 

머독 미스터리 시리즈의 다음 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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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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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들 그렇게 태어났을까, 아니 살아왔을까? 그런 소설같이 파란만장한 스토리 없이 곱게는 살 수 없었을까? 어찌 하나 같이 그토록 곡절 많은 생을 영위했기에 겹겹트라우마에 휘둘려 있었을까? 

하산 아저씨에게 입양되기 전 골수 문제아로 낙인찍혔던 주인공, 마음에만 그친 게 아니라 몸에도 깊게 상처가 새겨져 있던 아이. 

터키인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쟁 통에 살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공포와 광기의 순간에 사람의 살점까지 먹은 죄책감에 평생 신음하는 하산 아저씨. 그는 반발심인지 자포자기인지 이슬람에서 금지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파는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스인 야모스 아저씨, 그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눌러앉은 인물이다. 그리스 내전 당시 사촌 일가를 죽인 일로 정신줄을 한쪽을 놓아버린 듯한 그의 한국 생활도 순탄치 않다. 안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충남식당 위층 다락방에 기거하며 밥을 겨우겨우 빌어먹을 정도로 말이다. 

머리 아저씨도 전쟁의 상처로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아픔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군복을 입고, 군가를 부르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은 바로 우리 아버지 세대의 자화상 같다. 

안나 아주머니도 매한가지. 그녀는 폭력 남편을 피해 도망치듯 나와 살고 있는 형편이다.  

주인공의 친구들인 유정과 맹랑한 녀석도 마찬가지였고. 

하여 다들 상처를 끌어안고 위악을 일삼는, 아니 더러는 자학으로 스스로를 소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이런 이들을 위무하고 아우르는 이가 바로 안나 아주머니이다. 그녀는 어느 날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와도 같은 소풍을 기획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조금씩이나마 이웃을 의식하게 되었고 서로 간 닫혔던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게 된다. 자연 상처도 어느 정도는 치유 받게 되었고.  

이런 결말은 주인공이 잡지나 신문에서 사람 얼굴을 오려 스크랩을 한 다음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여 큰 지도로 만드는 모습에서 이미 암시했던 대로이다. 인종이나 국가, 종교 등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아니 각자 상처의 이유 때문에 질시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야기는 하산 아저씨가 기력을 잃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된 순간 절정에 이르게 된다. 주인공 나는 그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사랑한다.’고 심중에 아껴두었던 그동안 차마 발설하지 못했던 진심을 말하고만 것이다. 

상처는 상처 입은 자들이 먼저 알아보는 법이고, 그 상처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이들은 어느새 알아차린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깊었던 상처도 아물게 된다는 것까지 말이다. 

[이슬람 정육점]은 이렇게 상처 입은 영혼들의 구원 기록이라 하겠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의 그렇고 그런 얘기에 실은 우리 생의 심원한 비의를 담겨 있다 하겠다. 상처가 어디서 비롯되었고 어떻게 해야 아무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 것이기에 말이다. 이런 깨달음을 준 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특히 하산 아저씨에겐 주인공을 그렇게나 보살펴주고 결국은 따뜻한 심성을 회복시켜 주기까지 해서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꼭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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