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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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국가론인가?

 

유시민의 글을 접하고 이 시대에 웬 국가론이람? 하고 뜬금없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문을 누구나 품고 있으리란 걸 알면서도 유시민은 짐짓 내색하지 않고 논의를 풀어나가다 글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유를 슬몃 밝힌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극우 세력을 위해 썼다고 말이다. 과거에는 독재자의 철권 정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폭민정치랄까, 어리석은 다수의 배타적 신념이 더 문제인 시대가 되었다. 그들은 당연히 개인의 자유와 권리, 행복보다는 국가 유기체의 이익과 기풍을 중시하는 국가주의적 국가관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사고와 행동방식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극단적 정신세계를 갖고 있기도 하다. 유시민은 이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국가론의 얼개를 파악할 수 있도록 계몽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듯하다. 국가에 대해 자신과는 상충되는 요구와 기대를 가진 사람들도 존재함을 내심 받아들일 수 있어야 생각의 차이를 넘어 양보와 타협, 더 나아가 통합의 가능성도 열리기 때문이니 말이다. 다양한 국가론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와 그것의 성격 및 필요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자기들만의 누에고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낯선 것에 대해 경계심과 적의를 품게 되는데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려면 그것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특성에 대한 지적 파악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래야 극단적인 배제와 증오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유시민이 한 쪽 관점에만 치우치지 않고 다양하게 전개되는 국가론을 개론서 집필하듯 소개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유시민은 이런 연유에서 국가주의적 국가론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러 국가론을 톺아보고 있다. 자유주의 국가론, 사회주의 국가론을 살핀 다음 안보, 발전, 민주와 복지국가를 아우르는 국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가치중립적인 이론 소개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성향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여러 번에 걸쳐 커밍아웃하고 있다. 군데군데 내비치는 면모로 볼 때 그의 좌표는 민주와 복지 사이 어디쯤에 해당하는 것 같다. 굳이 명명하자면 진보자유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자유주의 국가론을 바탕으로 하되 정의로운 국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좌표축에서 보자면 중도에서 약간 좌 클릭한 것이라 하겠다. 유시민은 자신은 결코 순수 진보주의자가 될 수 없는데 왜냐면 그들의 속성이 지나치게 신념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책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너무 안이하고 방법론도 혁명적 변혁만 생각하지 정치적 조정과 타협이라는 과정은 무시하고 있어 현실적 대응이 서투르다 보고 있다. 자유지상주의도 개인주의에만 함몰되어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무책임한 처세라 본다. 하여 그는 이 둘 사이쯤에 발을 딛고 있다 하겠다.

 

그럼 나에게 이 책은 무엇인가?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는 사뭇 도전적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시사하는 것들을 토대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돌아보게 만든다. 우선 다양한 국가론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과학적, 객관적 국가 이해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좌와 우의 성격과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의 경고처럼 우파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좌파는 이념 과잉에 따른 미숙함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지형을 파악하고 선거나 투표과정에서 선택의 근거로 삼고자 한다. 또한 이념 성향이 진보에 우호적인 입장인 나로서는 좌파의 지리멸렬 분열된 상황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제시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진보 진영의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동원 가능한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통합을 이루어야 혁명이라는 극단적 방법이 아닌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한 진보 세력의 집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그 가능성을 다양한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후보연합, 선거연합, 정치연합을 넘어 연합 정당을 결성하기까지의 과정을 개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주도할 지도자는 베버의 책임윤리와 칸트의 도덕법칙, 그리고 베른슈타인의 점진적 민주적 방법론을 이해하고 실천할 역량과 심성을 지닌 자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극 공감하고 그런 방법론과 지도자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해야하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이번 선거 국면에서 미덕을 두루 지닌 진보 진영 지도자가 나와서 진영을 아우르고 국민들에게 어필하여 민주적인 정부 수립에까지 이르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하여 이 책은 계몽서로도 읽히고 진보진영 집권 지침서로도 다가오기도 한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방점이 다르게 찍히겠지만 누구에게나 나름의 유의미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값진 저작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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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혹은 여행처럼 - 인생이 여행에게 배워야 할 것들
정혜윤 지음 / 난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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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 말미에 보면 칸이 폴로에게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자네는 다른 사신들과 똑같이 먼 고장을 다녀왔는데도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저녁에 집 현관 앞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쐴 때 찾아드는 생각 같은 게 전부일세. 그렇다면 자네의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은 꼭 폴로를 향해 던진 것만은 아닐 듯합니다. 우리, 아니 나에게 먼저 확인하고 싶은, 내가 꼭 짚어보고 싶은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왜 굳이 여행을 떠나느냐고요? 폴로의 담담한 얘기가 이어집니다. “긴 여행 도중 흔들리는 낙타 등이나 정크 선에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폐하께서는 지나간 추억들을 모두 하나씩 곱씹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돌아오실 때면 폐하의 늑대는 다른 늑대가 되고 폐하의 누이동생은 다른 누이동생이 될 것이며 폐하의 전투는 다른 전투들이 될 것입니다.” 이 무한한 세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작은 발걸음을 그렇게나 내딛는지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다른 영혼이 되어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말입니다. 이제부터 폴로에게 저작권을 지불하고 나도 그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아니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때 말하는 여행은 풍경을 감상하고 풍물에 심취되는 여정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영혼은 이런 외적 환경보다 자아와 타인의 교감, 내면의 소통에서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지혜로운 사람, 아니 모든 아름다운 여행자를 만나려고 애써야 할 테지요. 살아 움직이는 세계의 신비로운 육체를 말입니다. 이를테면 티티카카 호수 허름한 숙소에서 밤에 오줌을 누러 나갔다가 코에 쾅 부딪히는 느낌에 고개를 든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게 하늘과 가까운 땅에서나 맞볼 수 있는 별빛이었다는 걸 알아보았다면 그에게서 얼마나 깊이 있고 경탄에 찬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또 페루 해변에서 생의 여정을 마감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새떼들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본 자라면 더 좋겠지요. 하지만 그런 이색적인 얘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내 삶의 폭과 깊이를 한껏 늘려줄 충만함을 지닌 분들도 많이 있답니다.

 

이를테면 평생을 문맹으로 지내다 한글을 깨우치고 이제 시 창작 교실에 다니고 있는 한충자 할머니 같은 분 말입니다. 세상에 막 글을 깨우친 분이 이런 편지를 다 쓰다니요.

 

“당신을 군대에 보내놓고 그 뒤에 편지가 와서 읽을 수도 없어 가슴이 얼마나 답답한지 슬퍼서 울 때, 살고 싶지도 않았죠.(중략)내 마음 문을 열고 한글학교 문을 두드렸습니다. 힘이 된 것은 당신의 사랑이지요.(중략)당신에게 그동안 사랑한다는 말 한 번도 써보지 못했고 이제야 당신께 사랑이란 말을 씁니다. 당신을 이 세상 끝까지 사랑할 겁니다. 여보, 고맙습니다.”

 

이런 결곡한 편지를 쓰고 가슴의 내밀한 말들을 시로 엮어내는 할머니, 부끄러워 얼굴 붉히면서도 보물처럼 시를 간직하는 할머니에게서 별빛이 코에 부딪히는 느낌보다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 하지 않을 울림이 느껴진답니다.

 

‘희망 버스’를 기획했던 송경동 시인의 상경기는 또 어떻고요. 공사판 막노동 가운데서도 시적 감수성을 키워나가며 인간의 관계를 응시하던 시인, 그 시인의 안목에 대해 얘기를 듣고 어찌나 부끄럽던지요? 시 ‘당신은 누구인가’에서 “학부모로서 학교 폭력은 안 되지만, 한 남성으로 원조 교제는 싫지 않다 ...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하고 일갈하는 시가 바로 나를 향한 것 같았거든요.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벌이며 다문화 밴드 ‘스톱 더 크랙다운’의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소모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에서도 정의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그의 이야기는 나를 정말 돌아보게 만들었지요.

 

이런 이들을 만나 진솔한 얘기를 듣는 게 그 어떤 멋진 풍경을 맛보고 특이한 풍물을 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그 분들을 만나고 돌아올 때면 내 가슴 먹먹하면서도 꽉 찬 충일감에 떨리지 않을까요. 진실한 여행이란 이런 것임을 일깨워준, 여행의 진면목을 맛보게 해 준 정혜윤 님을 생각하며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 어울리는 백창우 님의 시 한편 붙이고 싶습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어둑한 겨울을 거슬러 성큼성큼 해를 찾아가는

눈 맑은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가슴속에 고운 씨앗 한 개 품고 있는

가슴 저 깊은 곳에 빛나는 칼 하나 마련해둔

(중략)

 

그립다

날마다 푸른 별처럼 타오르는

가슴 따뜻한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중략)

 

 

첫 아침 맑은 바람 몰고 다니는

고운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백창우,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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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 인생도처유상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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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면 으레 답사 일정 한 둘쯤은 끼워 넣을 정도로 이제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게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처음엔 멋도 모르고 이런 추세에 편승하여 지인들 몇몇과 문화유산 답사 길에 오르곤 했다. 그런데 매번 의아했던 게 남들은 다 알아보는데 왜 내겐 문화유산이 지니고 있는 깊은 맛이, 남다른 의미가 두드러지게 다가오지 않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의문은 금세 풀리고 말았다.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읽자마자 절로 무릎을 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너무 식상해져버린 유한준 선생의 글“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를 인용한 대목에서 말이다. 알아야 보인다는 얘긴데 까막눈에게 값진 것의 의미가 들어올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내게 몹시도 수치스럽게 다가왔던 것 같다. 언젠가 예의 지인들과 경주 답사를 나섰다가 불국사 가는 길에 들른 구정동 삼층석탑 앞에서 나는 그만 고꾸라지고 말았다. 도심에 떡 하니 자리 잡은 석탑을 보니 조형미가 그럴 듯한 게 아름답게 보여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하여 나름대로 안목도 과시할 겸 내 미학적 느낌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했더니 지인 한 분이 한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혀를 차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고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봐도 처음 눈에 들어왔던 것 이상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넌지시 일러주는데 탑의 좌우 균형이 맞지 않고 상하 비례도 자연스럽지 않으며 석재의 재질과 색깔도 부위마다 다르니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정말이었다. 조금 전까지 까맣게 몰랐던 탑의 어설픈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탑이 조잡하게 보였다. 지인은 이 모든 게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 탑, 저 탑의 부재들을 조합하여 정체불명의 탑을 인위적으로 급조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 순간 나는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지인이 대단해 보이면서 한편으론 나의 처참한 감식안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기에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나름의 안목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에 제대로 한방 먹은 셈이어서 달아오른 얼굴이 한동안 식지 않았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만 자기도 유홍준 교수의 책에서 읽은 거라고 얘기해주었다. 다음 날 바로 서점에 들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 2권을 샀을 밖에.

 

이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인생도처유상수-을 읽고도 한 동안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누질 못했다. 대부분 내가 들렀던 곳인데도 유홍준 교수가 간곡하게 말하는 대목마다 거의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아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인 전정에 깔린 박석에 관한 부분이 압권이었다. 내가 보기는 봤나 싶을 정도였다. 역시 알아보는 눈이 있어야 보이는 법. 화려한 건축물만 눈에 들어왔지 바닥에 깔린, 그것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게 아니고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박석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의 진수를 발견하고 있었다. 경탄을 연발하면서 말이다. 조각보를 잇듯 자연스레 어우러진 박석이 높은 월대와 우람한 건축물, 또 건물 처마의 가녀린 곡선과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학적 가치뿐 아니라 실용적 쓰임새까지 거론할 때는 먹먹할 정도로 울림이 깊었다. 표면이 우툴두툴하여 미끄럼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빛깔도 회색과 잿빛이어서 난반사를 막아 눈부시지 않도록 배려하였으며 이음새를 타고 빗물이 흐르도록 하여 유속을 줄이는 측면까지 짚어내고 있었으니. 인생도처유상수가 따로 없었다. 이런 눈 밝은 이가 상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순천 선암사에 관한 부분에서도 이건 뭐! 하는 감이 들었다. 이 곳 역시 지인들과 선암사에서 송광사 쪽으로 넘어가며 살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금시초문이 태반이었다. 선암사 진입로로 새로 조성된 반듯한 길을 걸어올라 강선루 아래를 지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무지개 아치형의 승선교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오래 되어서 가물가물한가 하고 골똘히 되짚어 봐도 여전히 감감했다. 조금 읽어가다 보니 연유가 선하게 그려졌다. 옛 길을 따라 걸어야 승선교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래야 다리가 물속에 비친 그림자와 어우러져 둥근 원을 만들고, 다리 아치 사이에 강선루가 들어있는 듯한 절경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왜 그리 허겁지겁 산만 보고 올랐는지 후회막급이랄 밖에. 아름다움의 진면목을 살피고 찾아내려 애써야 했는데 그런 눈을 갖지 못하고 그냥 걷기만 했으니 이런 무지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선암사 경내의 삼인당 연못에 대한 얘기도 인상적이었다. 미학적 가치는 별개로 치더라도 홍수 조절을 위한 실용적 기능까지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니 뭔 이런 조그만 연못을 인공적으로 설치했는가 하고 지나쳤던 기억이 났다. 깊은 산 속, 깊은 절처럼 내공이 깊어야 뭐든 제대로 보이는 법, 얕디얕은 나의 눈에 그 소중한 것들이 그냥 스쳐지나갔다는 생각을 하니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득 자책만 하고 있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깜냥이 그게 다인데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눈과 귀는, 내면은 활짝 열어두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상수들을 향해 안테나를 맞추고서 말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내 부족한 구석을 메우는 게 결코 흠이 되지는 않을 테니. 주제를 모르고 아등바등 뛰어봤자 남는 건 열등감과 자탄 밖에 없을 것이므로 이제 안분자족하고 상수들에게 한 수 가르침을 전수받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도움이 될 듯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처에 자리하고 있는 상수들을 길라잡이 삼아 고요히 나아가고자 하는데 문화유산 답사에 관한 한, 그 상수 중의 앞자리는 당연히 유홍준 교수 몫이 될 거라 여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일정을 따라가다 혹 유홍준 교수가 놓친 걸 발견해내는 행운을 내가 누릴지 또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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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 현장의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 캠페인
구효서 외 지음 / 경향미디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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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만이 진리요, 미덕인 이 물신숭배의 시대에 인문학의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돌이켜보면 급속한 경제 성장 추진 과정에서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자리잡으며 이런 경향이 짙어진 것 같다. 시대가 이러니 작은 일에도 심사숙고하며 지혜를 궁구하고자 하는 인문학적 행동방식은 비효율의 극치라 폄하되며 뒷전으로 밀려나게 될밖에. 철학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문화를 다루는 분야는 GDP를 증가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완전히 논외로 치부되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는 거의 40여 년 이상 일관되게 지속되어 왔다. 그리하여 오늘 여기 인문학이 겪고 있는 극단적인 상황은 아무런 위기 징후도 없다가 어느 순간 우연히 벌어진 게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고 대중들과 유리되게 된 데는 이런 외적 여건 탓도 크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철학자를 비롯한 인문학 종사자들 내부의 체계적 준비 미흡과 적절한 대응 전략 부재도 한 몫 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을 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 그들만의 암호 같은 체계 하에서 내부 재생산에만 급급해온 것이 그 동안 학계의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하니 갈수록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고 급기야 백안시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될 때까지 내부에서 자기 갱신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지적 특권의식에 매몰되어 있었달 밖에. 하여 이런 상황은 인문학계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길 위의 인문학]은 이런 비관적 상황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반성적 성찰과 새로운 모색 요구에 대한 적절한 응답인 듯 보인다. 외면하는 대중들만 탓할게 아니라 그들의 눈높이에 맞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이쪽에서 먼저 기울여야겠다는 인문학자들의 뒤늦은(?) 깨달음 같다. 의미심장함에만 매몰되어 재미와 감동을 주지 못했던, 그리하여 대중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그간의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말이다.

 

이 책은 크게 1,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퇴계, 남명, 추사, 다산 및 교산 등 한국 정신사의 지형을 구분한 지적 거두들의 본원을 톺아보며 그들의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살피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소설가 한승원 님이 추사 김정희 선생을 몽중에 만나 대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작가 특유의 분방한 상상력과 한문학에 대한 조예가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만 고답적인 측면이 없지 않아 여러 모로 역량이 얕은 내겐 진입장벽이 느껴지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하여 때론 흔쾌하게 끄덕거려지지 않기도 했다.

2부는 역사의 흔적을 따라 떠나는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소프트하게 접근하고 있어 내겐 오히려 1부보다 더 실감나게 다가왔다 하겠다. 필자가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둘러보며 회한어린 감성을 피력한 부분도 있고 어릴 적 걸었던 길을 추억하며 아릿하게 떠올려보는 대목도 있어 나의 마음결까지 덩달아 출렁거리는 듯했다. 특히 김도연 작가가 쓴 강릉 가는 먼 길은 추억과 시와 달과 바다가 어우러진 한 편의 드라마였다. 김도연 작가의 창작 무대와 생장 배경에 대해서는 [30년 만에 쓰는 반성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글을 읽고 있자니 작가가 어릴 적 노닐었던 대관령 고갯 말랑과 강릉 골목길이 환하게 잡히는 듯 그려지고 거기서 그의 내면이 이렇게 익어갔겠구나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 [길 위의 인문학]은 애초에 의도했던 바를 충분히 이뤘다 하겠다. 고답스런 관념에 갇혀 허공을 맴돌던 인문학을 풀어주어 땅의 온기와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은 듯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인간에 대해, 여유와 관조에 대해 자연스레 숙고하게 될 것 같다.

 

좀 더 바란다면 학자들, 작가들의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상상력 충만한 작품만이 아닌 대중들의 투박한 목소리, 현장의 생생한 발언이 조금이나마 가미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작가들과 동행했던 대중사이에 오간 문답을 곁들인다든지 일반인들의 글을 싣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수준은 비록 떨어지겠지만 대중들의 눈높이에서 고민하고 사색한 흔적들, 그리고 그것들의 해결방안을 모색한 의식의 궤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오히려 글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이 인문학의 결을 더 다양하고 어쩜 깊게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 말미의 실은 노자의 길 얘기도 눈높이를 더 낮춰 범인들도 쉬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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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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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글감이 손에 잡힐 듯 빤히 그려지기도 한다. 당장 장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글이라고 끼적거리겠다 싶지만, 차근차근 구상을 하다보면 어느새 벽을 느끼고 만다. 고저장단도 없는 매끈한 권선징악형 스토리에 이쁘기만 한 문체라는 자가진단을 내리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작을 읽은 연후엔 더욱 심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자책하며 펜을 던지기 일쑤다. 비록 단순 비교 대상은 아니라 해도 작가가 되려면 이런 수준의 글은 쓸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속에선 분열이 일어날 지경인 것이다.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도 그렇게 좌절감에 빠지도록 만든, 도무지 글을 쓸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든 작품 중 하나이다.

[보이지 않는]은 크게 두 가지 텍스트를 짜깁기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덤 워커가 친구인 소설가 짐에게 보낸 원고와, 한때 워커를 좋아했던 프랑스 소녀 세실 쥐앵의 일기를 액자식으로 짜 넣고 그 사이 짐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시점이 흔들리고 서사구조에 대한 회의를 끊임없이 유발하며 모호하게 흘러간다. 하여 어느 선까지가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혹은 필자의 창작인지 구별할 수 없게끔 혼란스럽다. 읽는 동안 내내 오스터의 구성방식에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경탄했다 할까? 좋은 글이 되려면 이 정도로 짜임새 있고 독자의 상상과 추리를 유발하는 것이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맴돌았던 것이다. 더구나 오스터는 이 모든 난해한 스토리 전개 방식과 곳곳에 깔아둔 미묘한 장치의 설정 연유까지 친절하게 밝히고 있어서 더욱 대단해 보였다. 혼란스런 사태 앞에서 짐은 주인공과 장소, 사건, 심리구조 전반에 대해 의심을 품는데, 그렇게 꼬이고 만 연유를 몇 가지 암시하며 결코 맥락 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 첫째는 글의 뼈대가 되는 텍스트의 원저자 애덤 워커의 심신 쇠약에서 찾고 있다. 명료한 의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급조한 것이기에 서사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 차원에서 말이다.

“끝의 세 페이지에 이르면, 지리멸렬한 서술의 붕괴는 거의 완벽해진다. 워커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있으며, 그의 생명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는 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끝마치려고 애쓴 것 같다. (250쪽)

또 하나는 워커가 쓴 작품의 소재가 금기의 벽을 깨는 파격적인 것이어서 관련 당사자들이 애써 부인하고 있는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워커와 누나 그윈의 플라토닉을 넘은 에로틱한 사랑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고 절절하여 하나도 추하지 않고 짠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걸 워커는 아마도 가감 없이 진솔하게 그렸을 터다. 그러나 그 불장난 같은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들 생애 전 기간에 걸쳐 내내 가위눌림으로 작용했을 밖에. 뇌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여 워커의 그 내밀한 이야기를 누나 그원은 그의 염원에서 비롯된 상상의 결과물이라 치부해버렸다. 그 아릿한 얘기가 한 순간 워커의 환상이 빚은 픽션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긴가 민가 갸웃거리게 될밖에.

다른 하나는 검열을 의식한 픽션화 전략을 슬몃 제기하고 있다. 세실 쥐앵에게 자서전 집필을 부탁한 루돌프 보른은 자신의 얘기가 발간되면 국가 기밀 누설에 해당될 것이므로 프랑스 정보 당국이 제재를 가할 것을 우려하였다. 하여 세실이 창작한 소설 형식으로 자서전을 출간하자고 제의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소설 속 모든 얘기도 필자의 상상에서 비롯된 허구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런 연유들이 중첩되어 글은 사실과 환상,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하여 혼란스러우면서도 정말 소설답다는 감이 절로 든다. 글의 말미에서 작가는 이 모든 모호한 얘기의 홍수 속에 사실인지 환상인지 구별 못하고 나른하게 취해 있는 세실, 짐, 아니 모든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실의 소리를 들려주며 깨어나게 만든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직접 온몸으로 다가오는 생명의 소리였다.

“그 망치 두드리는 소리는 내 몸에 스며들어 내가 그곳을 떠난 오랜 뒤에도 내 안에 머물렀고 심지어 지금 대양을 건너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도 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다. 그 소리는 앞으로 나와 늘 함께 있을 것이다. 내 여생 동안,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 소리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함께 있을 것이다.” (326쪽)

하여 폴 오스터는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사실인 듯 아니기도 한 세계를 그리다 불현듯 현실임을 벼락같이 깨우치는 구성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이런 작품 한 편을 온전히 쓸 수 있었으면, 그러나 가다듬고 보니 너무 멀어 보인다. 폴 오스터는 구름 위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비스무리하게 흉내라도 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히는 듯도 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의 서사구조에서, 다양한 장치들에서 여러 모로 생각해볼 거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내가 도전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시금 의욕이 생겼다 할까. 하여 [보이지 않는]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던 내게 새삼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운, 구체적인 전략을 이렇게 세워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성장 촉진제였다 하겠다.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를 못 잡던 내게 아련하게나마 북극성을 발견하게 해주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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