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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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자니 왜 이리 서늘해지는 걸까? 곱씹어보니 일관성 없는 상념들이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었다. 너무 시원시원 읽힌다는 것, 그러면 쌈박해야 할 건데 기분이 영 찜찜한 게 도무지 불편하여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동안 온 몸의 맥이 다 풀린 듯 착 가라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기분은 대체 뭐람 하는 생각이 들어 [강남몽]을 집어 들고 몇 부분 다시 살폈지만 좀처럼 가닥이 잡히질 않았다. 종잡을 수 없게끔 난처한 이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애초부터 [강남몽]이 너무 쉽게, 아무 저항 없이 읽히는 게 이상하다 싶었다. 소개 글을 통해 강남 형성사에 관한 작품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못 심각할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던 터여서 약간 허탈하달 정도로 말이다. 진입장벽을 거치고 심리적 동요를 겪은 후에 비로소 작품 세계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으리라 예단했던 것이다. 혹시 이게 모든 걸 대수롭지 않은 듯 심드렁하게 엮어나가는 작가의 몰가치적 관점과 고저장단 없이 밋밋한 문체 탓인가 하고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렸는데 어느 순간 연유가 선하게 그려지는 걸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 김진이나 박선녀, 심지어 조폭 보스인 홍양태, 강은촌 같은 이들의 행동방식이 결코 파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오늘 여기,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인 것이다. 바로 우리 속에 꿈틀대고 있던 탐욕스런 본능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어느새 꼭두각시처럼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져 버린 게 그들이란 말이다. 한 때 부동산에 기웃거리고 증권 투자, 펀드 가입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낯익은 얘기니 자연 쉽게 읽힐밖에.

그러면서 석연찮았던 불쾌감의 발원지가 어딘지도 알 것 같았다. 황석영은 애써 외면하고 있던 우리, 아니 나의 천민적인 실상을 에둘러 포장하지 않고 직방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적나라한 면모 그대로를 만천하에 까발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모습이었구나,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참담한 마음에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말이다. 바로 내 안에 들어있던 동물적 속성을 고스란히 그려 보이고 있었으니 어찌 가슴 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 순간 [강남몽]에서 유일하게 분별력을 발휘하던 심남수의 말이 뇌리에 비수처럼 꽂히는 듯 했다. 그는 이미 모든 걸 꿰고 있었다.

글쎄 맨손으로 일어나기는 좋았는데 말이지. 아무래두 여긴 정신이 없어서, 혼을 빼놓고 살아야 할 것 같아. 앞으로 수십 년은 그렇게 흘러갈 거야.(49쪽)

한국 사회에서 제정신 챙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도태를 의미할 뿐이었다. 제주 4.3항쟁 시 양민과 무장 세력의 분리를 주장하며 무고한 시민들을 초토화시키라는 지시에 반대하다 결국 권부에 의해 축출당한 김익창 중령처럼 강직하고 줏대 있는 자가 소신을 펼 수 있는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지경에서 버텨나가려면 천민, 아니 동물이 되어야 할밖에. 꿈틀대는 탐욕을 스스럼없이 실현한 이들만이 내면에 분열을 일으키지 않고 연명하고 득세하는 사회구조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일제 때 친일 행각으로 우리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오로지 일신의 영달만 꾀하던 이들이 해방 후 신생 조국에서 심판을 받기는커녕 고급 관료나 경찰로 자연스레 등용되는 어이없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던 것이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배신과 변절이 너무 횡행한 탓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페르소나를 바꿔나갔던 것이다. 홍양태와 강은촌 같은 조폭의 세력 다툼에선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이들을 실컷 이용해먹곤 범죄와의 전쟁이란 명목으로 일망타진하여 신의를 헌신짝처럼 저버린 정권 담당자도 있었다. 또 박선녀 같이 앳되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은 착실하게 한푼 두푼 저축하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온전한 일자리보단 손쉽게 거금을 쥘 수 있는 유흥업소 쪽으로 빠지는 게 정규 코스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런 밤 문화가 워낙 창궐했던 탓에 꽃다운 아가씨들 부기지수가 이 대열에 합류했다. 남들 다 하는 일이라 생각해서인지 주저하고 망설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다 자연스레 매춘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고. [강남몽]에서 가장 분별력 있는 인물로 그리고 있는 심남수조차 부동산 업자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크게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 천지가 넋이 나가 있었다. 광기에 휘둘려 어찌 돌아가는지 살필 안목이나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광란의 바벨탑을 쌓아 왔다. 그러다 결국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로 상징되는 파국을 맞고 만 것이고. 외형은 그렇게 파괴되었지만 의식은 여전히 탐욕의 노예였던 우리에게 제대로 정신 차리라는 듯 IMF가 닥쳤고 또 그걸 남의 일로만 여기던 뉴욕 월가 펀드매니저들도 결국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 동반 금융 위기에 직면하고서야 겨우 자신과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온 천하가 어디 한 군데 예외 없이 광란의 도가니였던 것이다.

그 미친바람은 나도 피해가지 않았다. 아니 내가 기꺼이 바람 속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그 대열에 동참하여 아등바등 설쳐대었으니. 사리 분별없이 덩달아 춤추던 그 꼬락서니가 어땠을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아파트 담보 대출 자금으로 더 큰 평수를 분양받는 갈아타기를 시도하여 신분 상승을 꾀한 듯 우쭐거렸고 한번은 등기 전 전매로 시세차익을 노리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분양 신청이 쇄도하던 터여서 당첨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 분양가에 속칭 p(프리미엄)을 얹어서 입주권을 전매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 되는 놈은 엎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막차 중의 최고 막차를 탄 듯 IMF 외환위기에 딱 걸리고 말았다. 집값은 곤두박질치고 이자율은 하루가 멀다 하고 팽팽 오르는 통에 결국 감당하지 못해 프리미엄은커녕 분양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입주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선 한참 시간이 흘러 겨우 마음을 추스른 후인 것 같다. 아내와 이 문제로 얘기를 나누다 아찔해졌다. 한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며 그 동안 전혀 의식 않던, 아니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내 일그러진 모습이 또렷이 드러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연실색 했달 밖에.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지, 그런 터무니없는 욕심을 내다니 하는 개탄이 나오고, 스스로 너무 한심하게 여겨져 한참이나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적어도 나는, 아니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는 김진에게, 또 박선녀에게 돌을 던질 수 없을 것  같다. 그럴 자격을 갖춘 몇몇을 빼곤 말이다. 오히려 돌 맞을 자리에 서야 할 자가 누군지 빤하기에.

하여 이제 정말 알겠다. [강남몽]이 가슴 서늘하도록 시원하게 읽힌 게 주변에서 보아오던, 아니 내가 늘 행하던 익숙한 일이어서 별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는 걸 말이다. 그런 광풍에 분별없이 휩쓸려 눈 못 뜨고 탐욕의 행각에 동참했다는 뒤늦은 자각에 분열이 일어나 맥이 빠졌다는 것까지도. 어쩌면 나 때문에 피눈물 흘린 이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아득해지기만 한다. 광주대단지에서 못 가진 설움을 톡톡히 겪었던 정아네 가족사를 떠올려보면 상대적으로 가진 자들이 얼마나 미안해하고 더 베풀어야 할지 절로 알 것 같기에 말이다.

황석영은 특별히 강조하지도, 애써 방점을 찍지도 않고 담담하게 한국 현대사의 한때를 지배했던, 아니 실은 여전히 도도하게 불고 있는 광풍을 오롯이 그려내었다. 그러면서 누구에게도 희생양이 되라고 지탄을 퍼붓지 않았다. 돌아보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김진과 박선녀, 홍양태와 강은촌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게 한 바탕 꿈이라면 얼마나 좋으련만 버젓한 현실이고 더 심각한 건 좀처럼 바뀔 가망이 없다는 것. 다시 가슴께가 묵직해지더니 저릿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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