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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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곡한 사랑이 끝내 모두를 일으킴. 덴고와 아오마메는 사랑의 궁극, 절정을 보여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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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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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러진 초록 달 같은, 하지만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다들 어쩜 그리 아프게만 살아왔는지. 그러면서도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을 뿜던 그 가엾고 이쁜 아이들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소년기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듯 때론 퇴행의 모습을 보이고 더러는 모성의 손길, 보호의 대상을 갈급해 하던 그들은 영락없는 어른 아이였다. 덴고와 아오마메만 그랬던 게 아니고 그 비열하고 냉혹한 악의 사자 우시카와까지. 또 덴고 아버지, 노부인의 보디가드인 다마루, 후카에리와 종교집단 선구의 리더였던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한 이가 없었다. 늘상 쭈뼛거리며 겉돌고, 당당하게 구성원 대열에 끼지 못하는 미성숙한 이단아들이었다. 자연 고독과 비애를 숙명처럼 끌어안고 있을밖에. 그 중에도 가장 눈에 밟혔던 게 우시카와였다. 늘상 버거운 가위에 눌린 듯 안타까운 눈길만 보내던 모습이 너무도 안쓰러워 그가 주인공인 대목은 잘 읽히지 않았던 것 같다. [1Q84] 3권은 결국 덴고와 아오마메, 그리고 또 한명의 어른 아이 우시카와, 이들 셋이 나름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현상을 해석하고 발언하며 처절하게 대응해나간 이야기인 것이다. 그들은 물론 두 개의 달이 뜬 걸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기괴한 1Q84년의 공간을 간신히, 남보다 더 힘겹게 겨우겨우 버텨나가고 있었던 것이리라. 

덴고 불쌍한 아이. 자신의 처지가 이지러진 초록 달 같다고 늘 여겼던 아이. 하지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사랑을 향해 나아갔던 아이. 아오마메뿐 아니라 모두에게 사랑의 아우라를 끼쳤던 아이. 어릴 적 트라우마를 내면에 심어준 아버지마저 마음으로 용서하고 끝내 화해하기까지 했던 아름다운 아이. 

아오마메 그 측은한 아이. 추레하게 말라비틀어진 고무나무 신세였던 아이. 재기발랄함을 펼칠 기회도 없이 권위에 강압적으로 굴종해야 했던 아이. 그러나 따스한 사랑의 감정을 20년 이상 간직할 줄 알았던 천부적 감성의 아이. 또 의협심으로 무장한 과감하고 시원스런 아이기도 했고.

우시카와, 아! 그 기괴한 모습의 외톨이. 외모 콤플렉스에 빠져 자발적 고립을 택했던 우시카와를 생각하면 가슴 저 밑 깊은 곳에서 발원한 한줄기 통증이 서서히 우러나오는 듯 내내 아릿했다. 가족과 주변인들의 질시 속에 혼자 고치를 틀고 웅크리고 있던 아이. 하지만 연민을 불러일으켜 서서히 그의 숨결에 공명하게 만드는 아이. 집요하고 무미건조하고 냉혹한 이면에 사랑에 대한 절절한 간구가 배어 있던 아이. 후카에리를 보고 얼어붙던 그 간절하고 애틋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우리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남자는 말했다. 척 보니 우린 둘 다 외톨이 늑대야. 혹은 떠돌이 개. 간단히 말하면 사회 부적응자, 천성적으로 조직에는 어울리질 못해.(611)

“우시카와는 자신의 내부에 생겨난 그 낯선 공동에 주저앉은 채 일어설 수 없었다. 가슴에 둔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그건 아픔이 아니다. 결락과 비결락의 접점에 생긴 압력차 같은 것이다. (중략) 우시카와는 자신이 후카다 에리코라는 소녀에 의해 말 그대로 온몸이 뒤흔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꿈쩍도 하지 않는 깊고 예리한 시선에 의해 몸뿐만 아니라 우시카와라는 존재 자체가 근본부터 뒤흔들린 것이다. 마치 격렬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우시카와가 그런 감각을 느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중략) 이건 아마도 영혼의 문제일 것이다. 깊이 생각한 끝에 우시카와는 그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후카에리와 그 사이에 생겨난 것은 말하자면 영혼의 교류였다. 거의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아름다운 소녀와 우시카와는 위장된 망원렌즈의 양쪽 편에서 서로를 응시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깊고 어두운 곳에서 이해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와 소녀 사이에 영혼의 상호명시라고 할 것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460-462)

하여 그들 셋은 모두 어른 아이임에 분명하다. 내면의 공동을 채우지 못해 빈 구석을 그러안고 쓸쓸해하며 이를 따스하게 매워줄 대상을 간절히 염원했기에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발견한 아름다운 아이들이기도 했고. 그런데 덴고와 아오마메는 다시 소년 소녀가 되어 손을 맞잡고 고양이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가엾게도 우시카와는 결국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되고 말았으니.

“그녀는 우시카와를 단죄하지도 않고 딱히 경멸하지도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아름다운 눈은 우시카와를 용서하고 있었다. 아니 용서하는 건 아니다. 우시카와는 다시 생각한다. 그 눈은 오히려 우시카와를 가엾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시카와의 행위가 부정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연민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570-571)

지긋지긋하게 많고 구체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계에 존재했던 이유  

우시카와 못지 않게 덴고와 아오마메도 갖은 시련, 세계의 격랑에 휩쓸려 본의 아닌 삶의 행로를 거치게 된다. 아오마메는 어릴 적부터 어떤 장소에서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분자였고, 배제되고 묵살되어야 할 존재였다.(107) 아오마메는 선교를 위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고 늘 낡은 옷을 입었으며, 식사 때마다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려야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전문 킬러가 되어 어두운 그늘을 맴돌곤 했으니. 덴고도 아버지를 따라 NHK 수신료 징수 보조 역할을 하며 냉혹한 세상에 빌붙어 살아가는 비열한 처세를 경험했기에 자의식에 엄청난 균열이 생겼고 커서도 고독한 단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끝내 세계를 버리지 않고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처음엔 그들도 왠지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갈수록 또렷하게 떠오르는 게 덴고와 아오마메, 서로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 때문이란 걸 알게 된다. 삶의 목적이 뭔지 절로 깨우치게 된 것이다. 자신의 빈 곳을 채워줄 유일한 존재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제 꼭 만나야 한다는 염원으로 그 질곡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들과는 견줄 수 없는 결곡한 소망을 지녔기에 달이 두 개나 뜨는 1Q84년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공간에 진입했음에도 오히려 서로를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고 기뻐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결국은 위험하고 번잡스런 모든 일마저 오히려 사랑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여길 정도까지 나아가게 된다. 오로지 만나야한다는 일념이 그들의 누추한 생을 든든히 지탱해준 힘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 1Q84년에 왔기 때문에 덴고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한번 덴고를 만나야 한다. 그와 대면해야만 한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 세계를 떠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269)

“이곳에 있는 것은 나 자신의 주체적인 의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덴고를 만나 맺어지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다.(585)

그리고 그들의 그 사랑은 운명이었다. 이미 확정되어 있었기에 불가역적이었다. 처음 뇌리에 심어진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 그동안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니 그런 게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사랑의 감정이 각인되어 붙박여버린 것이다. 마치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각인하여 평생을 쫒는 것처럼. 그랬기에 거세게 변화하는 미궁 같은 세계에서 20년 동안 얼굴 한번 마주한 일 없는 소년과 소녀의 마음이 변하는 일 없이 하나로 이어져왔던 것이리라. 그 일은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일어났다. 두 손을 맞잡던 짧은 순간에 따스한 온기를 나누는 바로 그 찰나에 뇌리에 아니 온몸에 아로새겨진 것이다.

“그들이 그때 발을 들인 곳은 문이 없는 방이었다. 거기에서 나갈 수는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그 방에 드어올 수 없다. 그때의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그곳은 세계에 단 하나뿐인 완결된 장소였다. 한없이 고립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고독에 물들지 않는 장소.”(676)

웜홀, 그 시공간을 넘어 사랑의 궁극을 보여주다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그 간절한 염원은 리더의 마음까지 움직여 드디어 웜홀을 열게 했다. 뇌우가 치던 날 밤 그들은 불가역의 시공간을 넘어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그때 아오마메의 뱃속엔 그 작은 것이 잉태되게 된 것이고.

“시간은 전혀 직선 같은 게 아닐 수도 있어. 그건 꽈배기 도넛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덴고는 말했다.”(77쪽)

“어쩌면 리더는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자신의 후계자를 내게 의탁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아오마메의 머리에 떠오른다. 리더는 그러기 위해 그 뇌우의 밤에 서로 다른 세계를 교차시키는 회로를 일시적으로 열어 나와 덴고를 하나로 맺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644)

그곳 1Q84년, 아니 고양이 마을에서 살아가려면 공기번데기를 매뉴얼로 삼아야 했다. 리틀 피플이 만들어낸 공기 번데기 속 도터가 마더의 분신으로 역할을 대신하는 가운데 악의 세력은 온 세계를 수중에 넣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덴고와 아오마메도 그곳의 논리를 빌어 아버지 병실 침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공기 번데기에 들어있는 도터가 바로 아오마메의 초등학교 시절 모습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 무음 속에서 재생된 그 영상은 오히려 선명하게 그때, 그 아련했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공기번데기 속 아오마메는 손을 내밀면 바로 닿을 곳에 있었고 실제 따스한 촉감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둘이서 한 팀이다. 덴고와 후카다 에리코가 [공기번데기]에서 유능한 팀을 이루었던 것처럼. 이 새로운 이야기에서 나와 덴고는 한 팀이다. 우리 두 사람의 의지가 -혹은 의지의 밑바탕에 있는 것이- 하나가 되어 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만들고 진행시키고 있다. 그건 아마도 어딘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한편에서 이야기가 우리를 움직인다.(587) 

사랑이 존재하는 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이야기 속의 그들은 빛을 뿜는 뽀얀 얼굴에 맑은 눈빛을 반짝이며 만남이 길고 긴 여정을 기꺼이 감내하게 된다.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위험이 눈앞에 어른거려도 걸음을 결코 멈추는 법 없이. 기어이 불속에라도 뛰어들겠다는 마음으로 결정적 해후의 순간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간절함이 신의 섭리마저 바꾸고 말았던 것이다. 돌이킬 수 없게끔 불가역적이고 복원 불능의 세계에서 결국은 둘이 만나게 되었다.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서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덴고와 아오마메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둘은 또 자기들의 아이, 그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구까지 찾아내게 되고 말았고. 그 간절함의 원천은 물론 둘의 결곡한 사랑이었다. 간곡한 염원, 절절한 사랑이 끝내 모두를 일으킨 것이다. 하여 덴고와 아오마메는 사랑의 궁극을, 절정의 로맨스를 보여주었다 하겠다.

 아! 이제 또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만난 덴고와 아오마메는 손을 맞잡고 수도고속도로 비상 계단을 통해 마침내 1Q84년의 세계를 빠져나오고야 만다. 하여 이제 한숨 좀 돌리겠거니 하는 찰나에 아! 이 또 무슨 날벼락이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조짐이 다시 느껴지는 게 아닌가. 틈입자들이 엿보고 있으니 말이다. 1984년의 세계, 리틀 피플이 존재하지 않는 안전한 공간으로 간신히 돌아왔지만 집요한 악의 세력은 곳곳에서 모양을 바꾸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으니.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을 어쩜 그렇게도 시샘하여 내버려두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여 이 아이들을 또 어찌할 것인가? 이 세상 끝 날까지 간섭받지 않고 덴고와 아오마메는 맞잡은 두 손을 놓을 필요가 없는 곳에서 사랑스런 일상을 원도 없이 맘껏 누려야하는데. 더는 안타까이 떨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주유기를 든 광고판 속 타이거가 옆얼굴을 돌려버리고 우시카와의 입에선 리틀피플이 나와 공기번데기를 만들고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이 세상을 넘본다면 기어이 그 작은 것을 앗아가려 한다면 또 어떤 대가를 치러야할까? 아오마메의 몸속에서 뭔가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순간 내 몸에도 싸하게 섬뜩한 전류가 흘렀다.

퍼뜩 정신을 가다듬고 곰곰 따져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1Q84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판타지 속에 살고 있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싶었다. 다들 모르고 있을 뿐, 아니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짐짓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 온 세상이 미쳐 날뛰고 있는데 그게 1Q84년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런 세상을 비정상이라고 또렷이 알아차리고 분연히 박차고 나간 덴고와 아오마메였으니 그들은 천상 이단아랄 밖에. 그냥 타락하고 진부한 채 더불어 휩쓸렸으면 좋으련만 끝내 세계를 거스르고 만 것이다. 수도고속도로 대피 공간 출구를 통해 1984년의 세계로 빠져나와버린 것이다. 1Q84년의 비밀을 빤히 아는 그들의 도발에 그 세계가 눈감을 리는 없을 터. 그러니 오히려 더 심각한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할밖에. 이 가엾은 아이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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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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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절, 창작의 원천

표절은 이 시대의 화두 가운데 하나다. 키치문학처럼 드러내놓고 표절, 심지어 복제까지 시도하며 원본 비틀기에서 작품성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은 표절 사실을 숨기기에 바쁘고 애써 발뺌하려는 분위기가 대세다. 특히 대중음악 창작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실은 모든 창작품이 표절과 복제에서 완전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 직접 대놓고 베낀 건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원작의 이미지를 차용한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순수 최초로 이루어진 창작품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표절을 장려할 수는 없겠지만 완전 금기시하는 것은 예술 창작의 원천을 봉쇄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려된다. 하여 표절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좀 삼갔으면 한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가릴 건 가리고 받아들일만한 것은 용인해야 예술의 풍성함과 질적인 깊이를 쌓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다. 물론 표절자의 윤리에 대해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라 할까,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누구를 사숙했다든지, 어떤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든지 하는 것을 솔직하게 밝힌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아니라고 본다. 이 책에는 어린 시절 행했던 표절의 경험을 평생의 업보, 트라우마로 간직하고 있는 어른 아이가 나오는데 누구나 습작기엔 통과의례처럼 그런 시도를 하는 것인데 너무 심각하게 여긴 건 아닐까 한다. 그래서 그 기억을 의식에서 애써 지우려했던 게 아닐까?

2. 말 없음의 무게

때론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말을 건넬 수 있다. 재잘거리는 숱한 언어들 속에 정작 의미는 사상되고 공허한 발음만 허공에 내뱉는 경우가 대부분인 시대에 차라리 입을 닫음으로 더 깊은 사인을 상대에게, 세상에 발신할 수 있는 것이다. [진부의 송어 낚시]의 고3, 정미는 세상과 절연한 대신 송어에게 심경을 고백한다. 특별한 말로 자신의 절박함을 포장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실은 없는 대상에게 독백하듯, 아니 진정성 있는 상대와 마음을 담은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잡지 못한 송어와 함께 떠날 수는 없는 걸까.

얼음구멍 속의 물은 여전히 흐리고 송어는 보이지 않는다.

“담탱이가 마침내 시집을 냈어.”

“......”

“너, 좀 너무하지 않아? 얼굴 정도는 보여줄 수 있는 거 아냐?”

“......!”

“고마워.”

“......?”

“그냥 고마워!” (208쪽)

아무 대답도 없는 연어의 심경은 느낌표와 물음표로 처리하며 결곡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이 마치 선사와 제자의 선문답 같다. 하지만 정미가 하고 싶은 말, 정리하고픈 일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여운이 길게 남는 이 대목만으로도 이 책의 고갱이를 알 수 있을 듯하다. 나도 이런 대화를 나눌 대상을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도 메시지를 모두 담을 수 있는 멋진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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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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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은 고종석의 분신 같다. 아니 바로 그다. 글 중간 중간 넌지시 에둘러 자신임을 내비치더니 결국은 덜컥 커밍아웃까지 해버렸으니 말이다. 본인의 에세이집 제목을 직접 들더니만 그 책의 필자를 독고준이라 노골적으로 소개하는 모습이라니. 애초부터 독고준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음을 단도직입 드러낸 것이다. 

소수자를 등장시켜 자유의 한계를(‘자유의 무늬’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다.) 그려보는 작품을 독고준은 여러 편 썼다. (400쪽)

글의 구조는 단순 명료하기 그지없다. 독고준이 남긴 일기를 딸이 읽으며 아버지의 생각에 자신의 견해를 덧입히는 얼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형식적 변주의 폭이 그리 크지 않고 템포도 사뭇 같은 보폭을 유지하고 있어 인내의 한계를 잔뜩 늘여야 했다. 하여 고종석 매니아이면서 글의 의미를 천천히 곱씹는 타입의 독서 패턴을 지닌 내겐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지향과 독서 방식이 다른 이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까 한다.

글감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상적인 가족사에 대한 소회, 매일 매일 그날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의 견강부회랄 정도의 주관적 해석에다 그의 정신세계의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독서경험에 대한 것들이다. 이를 때론 독고준의 일기에 담아 딸의 코멘트를 살짝 버무려 나름 맛을 내기도 하고 더러는 일기 한 줄에 딸의 장황한 의견을 덧붙이는 식의 배리에이션을 보이다가 딸이 쓴 아버지의 평전 형식의 <독고준 소묘>로 대미를 장식한다. 이렇게 부녀간에 교감하는 방식으로 펴 보인 생각의 결들은 물론 고종석의 사유의 기록이자 세상을 향한 발언이다. 이를테면 ‘앙드레 말로가 죽었다. 나는 그의 좌파적 영웅주의가 싫었다. 드골주의로의 전향도 싫었고’(266쪽)처럼 짧은 아빠의 일기를 토대로 딸의 시점을 빌어 인간과 역사, 문학에 대한 작가의 탁견, 아니 혜안을 펼쳐 보이고 있는데 하나 같이 평소부터 고종석이 일관되게 지녀오던 지론인 것이다.  

자발적 망명자

독고준, 아니 고종석은 언어와 관념의 성채를 스스로 짓고 자신을 그곳에 유폐하여 자발적 고립을 택한 내부 망명자이다. 그러나 그의 고립은 세상과의 소통을 일체 단절해버린 극단적 폐쇄가 아니다. 균형과 중용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택한 것일 뿐.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당하는 세상사와 일정 부분 절연하여 스스로 균형 있는 가치 기준을 정립하고 이를 일관되게 유지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인위적인 선긋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하여 그의 망명은 권력의 압제, 그 무도한 칼날을, 혹은 대중의 거칠고 성근 비난을 비껴가려는 우회전술로 읽힌다.

물론 그 일기는 성인의 고백록이나 자서전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시대의 흐름을 타거나 거기 맞서지 못하고 자기 마음속으로 망명해버린 한 남자의 실루엣이 담겨 있었다. 그 남자는 때로 나약했고, 때로 비겁했고, 때로 이기적이었다. 그런 대목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슬펐고, 안쓰러웠고, 마침내 아버지가 그리웠다.(29쪽)

그는 세상 모든 억압의 굴레로부터 독립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과는 무관하다는 듯 모든 걸 방임해버린 건 아니었다. 고립되어 있되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참견하는 공인이었다. 그 발언의 울림이 비록 적대적 의견자의 심장까지 가 닿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언제나 투명한 이성을 바탕으로 질곡의 일그러진 세상을 향한 지식인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는 늘 세상과 담 쌓고 스스로의 내면에 깃들어버린 공고한 자발적 망명자로 비쳤다.

NL도 PD도 아닌 순정 좌파

고종석은 북한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는 듯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지만 근원적으로는 적대적 감정을 지니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전체주의의 숨 가쁜 압제의 굴레를 도무지 용인하지 못하겠기 때문이다. 하여 그 체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민족해방파(NL계열)들에 대해 너그러운 시선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또 모든 걸 경제적 계급문제로 환원해버리는 민중민주파(PD계열)의 견해에도 동감하지 않는다. 민중은 실체가 모호한 개념으로 이익추구를 위한 탐욕적 집단이라 여기고 있는 듯하다.

독고준이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어떤 개인의 장애이지 그의 계급이 아니다. 독고준은 계급이 개인의 행복을 결정한다는 좌파적 견해를 믿지 않았다. 그의 소설에는 불행한 부자와 행복한 빈자들이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인간의 관찰자로서 독고준이 탁월했던 점은 그가 추상적 민중만이 아니라 구체적 소수자들에게도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는 데 있다.(405쪽)

그러나 그가 실은 왼편으로 상당 부분 기울어져 있음은 약자에 대한 연민의 눈빛으로 단박에 알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해 일관되게 우호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계급이나 국적, 또 사회적 지위 따위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양 결코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소외된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좌파 가운데서도 경제적 이익이나 민족적 유, 불리를 넘어선 순정 좌파임이 분명하다.

[아내의 봄비]에서 화자의 아내가 실천하는 것, 그리고 화자가 흐뭇하게 공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소박한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거창하다면 그것을 연민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보다 힘든 이웃에 대한 연민 말이다. 만약에 인간사회가 진보해 왔다면, 그 진보의 과정이란 그런 연민의 확산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운 연민의 마음은 이 노동자 시인의 다른 시에서 자주 보여주었던 강인하고 헌걸찬 분노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97쪽)

개인주의자 

그는 천상 개인주의자였다. 집단적 구속의 매커니즘을 생래적으로 거북해 했고 못 견뎌왔다.

아버지는 혼자서 사유하고 혼자서 행동했다. 아버지의 그 독립성은 시몬 베유의 말을 연상시킨다. 자신과 홀로 마주 서 있는 정신 속에서만 사상은 형성된다. 집단을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254쪽)

개인주의자였기에 자유에의 과도한 집착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자유였다. 그것은 연대나 평등보다 더 높은 가치였다.(406쪽)

그런 지향은 언제나 홀로이기 일쑤다.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경계선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늘 단독자일밖에. 경계인에게는 집단의 규범을 내면화한 일체감을 느낄 동지가 있을 리 없고, 그는 또 신에게 의탁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니 신의 은총에 기댈 수도 없을 것이다. 동지도 신도 지니지 못한 단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내밀한 글쓰기밖에 더는 없으리라. 이를 생각하니 독고준, 아니 고종석의 선 자리가 너무 쓸쓸해 보인다. 돌출된 광대뼈에 불안한 눈빛으로 서성대는 뒷배경으로 휑한 살풍경이 도드라지는 듯하다.

아름다운 우리말 예찬론자 

그는 언어의 세계로도 망명을 택했다. 아름다운 우리말의 섬세한 결을 문맥에 딱 어울리게 배치하여 읽는 맛, 감칠맛을 느끼게 하는데 모든 것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반듯반듯하지 못한 것, 얄긋한 것, 샐긋한 것, 삐죽 나와 있는 것을 역사는 벽장에 가두고 한 줄로 처리하지만 문학은 팔을 활짝 벌려 보듬는다.(268쪽)

그의 우리말 사랑은 각별하다. 그래서 우리말을 아름답게 구사하는 이에게는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비록 지향이 다르더라도 말이다.

복거일의 문체는 그의 생각만큼 과격하지 않다. 단아하고 명료하고 깔끔한 그의 문체는 그의 글에 담긴 메시지의 과격함과 도발성을 때론 덮고 때로는 돋보이게 하면서, 그의 글을 묘한 아우라로 감싼다. 아무튼 그는 글 솜씨가 부족한 전문가들과 전문지식이 부족한 문장가들만 흔한 사회에서, 전문적 담론을 잘 다져 일반인들이 먹기 편하게 요리해주는 탁월한 대중화 저자의 면모를 보여 왔다.(140쪽)

그리고 자신의 소망을 넌지시 피력하기까지 한다. 독고준의 죽음을 이례적으로 사설로까지 다루어 상찬해마지 않는 <한국일보>칼럼 형식을 빌어 자신의 글이 세상에서 이렇게 평가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고종석의 속마음이 또렷이 읽힌다.

고인은 십여 편의 장편과 수십 편의 단편을 통해서 한국어 문체가 다다를 수 있는 미학적이고도 논리적인 끝 간 데를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작가들이야말로 모국어의 수호자라는 점을 생생히 증명했다.(20쪽)

치열한 자아비판을 가하는 성찰자

고종석은 세상의 부조리한 단면과 탐욕적인 인물에 대해 가차 없이 벼린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데 그 칼끝이 가리키는 대상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딸의 입을 빌어 자신의 무책임성과 꾀하는 일의 무의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외부인의 시각에서 객관적 점검을 시도하기도 한다. 특히 국가보안법 개폐를 주장하는 2000년 3월 5일자 아버지의 일기를 읽은 딸이 아빠의 입장과 처지를 호되게 나무라는 대목에선 지나치리만치 준엄하게 자아비판을 행하고 있다.

이 글은 무책임하고 무의미하다. 글을 쓴 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대의의 실천에 스스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고, 글쓴이의 일기장에 갇혀 있는 탓에 아무런 선전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364쪽) 

그는 스스로를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라 여겼지만 세상의 눈은 에고이스트라 낙인찍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부단히 사회적 자아로서의 자기검열을 꾀하고 있다. 그런 모습이 지식인다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측은하기도 하다. 그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나는 오로지 내 성공을 위해 분주하게 살았다.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나도 그렇단다.”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기주의는 공적인 이기주의였다.(사실이 그래요 아빠!) (52쪽)

또 더러는 자신의 취향, 호불호에 따라 균형과 절제를 잃고 잘못 판단한 경우도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닉슨이 사임한 것을 미국 민주주의의 승리일까? 하고 회의적 시각으로 본 데 대해 딸은 시니컬하게 되받는다. 고종석의 자아비판은 구석구석 어느 하나 놓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집요하다.

아버지처럼 균형과 절제를 중요시했던 이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가볍게 보았다는 것이 좀 뜻밖이다.(200쪽)

이런 것들은 모두 고종석을 향한 일부 지성계의 시선을 적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도 이런 비판이 일리가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고와 행동방식이 그렇게 굳어져있는데 달리 어쩔 도리가 없을 터여서 아마 많이 갑갑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타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여 이 책은 고종석이 외부인의 시각을 의식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검열문으로도 읽힌다.

결국은 회색인 

독고준, 아니 고종석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규정은 결국 하나의 용어로 수렴되고 만다. 바로 회색인이 그것이다. 박쥐로 대변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사려 깊은, 그래서 섣불리 세상에 발을 담그고 성급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 숙고형 인간 말이다. 그 회색인은 투명한 이성을 지닌 객관적 독립자일 것이다.

아버지의 발은 반민주주의와 과도한 민주주의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이 점에서도 아버지는 회색인이었다. 나는 그 ‘회색인’을 ‘사려 깊은 사람’으로 읽는다. 아버지는 사려 깊은 분이었다. 새삼 아버지가 그립다.(157쪽)

아버지에게 회색인이라는 딱지를 붙인 사람들은 그 말을 박쥐라는 말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그 회색인은 실존을 좌우 너머로 밀쳐버린 독립적 개인이었다.(234쪽)

그 독립적 개인, 회색인은 집단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으며 극단주의로 치우침이 없이 균형을 유지했고 일관되게 소수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와 행동 패턴은 일제 강점기와 좌우대립을 거쳐 남북분단이 이루어지고 양 체제에서 극단적 권위주의가 경쟁적으로 행해졌으며 진보 진영은 오로지 독재 정권에 대해 강고한 투쟁 일변도의 노선을 지녀온 우리 사회의 문화적 배경과 지적 풍토에서는 제대로 자리매김 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늘 기회주의자로 매도되고 한가로운 지적 유희나 즐긴다는 비아냥을 감내해야 했을 밖에. 독고준의 비애, 고종석의 분노가 눈에 선하다.

일기, 평생동안 쓴 유서 

독고준은 전직 대통령이 목숨을 버린 바로 그날 아파트 14층 베란다에서 투신하고 말았다. [자기 앞의 생]의 작가 로맹 가리가 그랬듯이. 그 자살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독고준이나 딸의 입을 통해서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딸은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의 죽음의 연유를 캐려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데 글의 말미에 독고준의 심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케 하는 대목이 얼비친다. 독고준이 실은 결정론자였음에도 어쩔 수 없이 자유의지 신봉자 행세를 해 왔다고 분열적 내면을 고백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생의 말년에 결국 꿰뚫은 게 결정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존재의 유한한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을 오롯이 지탱하기 위해선 자유의지론을 견지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독고준의 내면이 얼마나 부대꼈겠는가? 작위적 설정인 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체 시침을 떼는 자신이 또 얼마나 위선적이고 불가항력적 상황 앞에 무기력하게 여겨졌을까? 아마 치를 떨며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았을까 한다. 게다가 특유의 로맨티시즘까지 가미되었으니 어쩜 그의 투신은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 결정론의 견해처럼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나 그런 식으로 삶을 마감하게끔 운명 지어졌던 건 아닐까? 절대자가 유전자에 아로새겨 놓았기에 말이다.

이렇게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문득 우리의 고종석이 겹쳐지는 게 아닌가. 혹 [독고준]을 쓰다 자기실현적 예언을 떠올린 건 아닐까 하고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아니다. 절대 안 된다. 천부당, 만부당. 고종석은 명실상부 내면과 외적 견해가 일치하는 자유의지론자이고 그를, 내심으로 아니 당당히 표명하며, 적극 옹위하는 이들이 즐비한데 분열을 빚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독고준을 비록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하더라도 이 점만은 명백히 분리해야 할 것이다. 

하여 독고준은 일기를 통해 자신이 거쳐 온 삶의 여로를 돌아보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연유까지 밝힌 셈이니 그의 일기는 평생 동안 기록한 유서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고종석은 독고준의 일기와 딸의 코멘트를 빌어 자신의 정체성을 진단해보고 외부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사회적 자아로서의 자기검열을 시도하여 끊임없이 완벽한 고갱이를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리라. 결국 [독고준]은 한 망명객의 유서이자 작가 고종석의 자기검열문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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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코브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디 아더스 The Others 1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에 왜곡된 선입견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환타지물이라 하면 상상력의 범주를 한참이나 일탈하여 논리적 연관이 부자연스럽기 일쑤고 서사 전개 과정도 인명이나 유사 생명체에 대한 살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등 비정한 면을 보이기 십상이어서 때론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환타지니까 그럴 수밖에, 하며 넘겨 버리려 해도 이건 좀 심한데 하고 갸웃거린 경우도 꽤 있었다. 그러기에 환타지물을 읽고선 썩 유쾌했던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내 이런 선입견을 보란 듯이 깨뜨린 작품을 만나고 말았으니 크리스토퍼 무어의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이 바로 그것이다. 한 마디로 착하디착한 환타지였기 때문이다.

누구나 닿을 수 있는, 그래서 공감 가능한 상상력

권태로운 일상에 무기력해진 코브 마을 사람들의 우울증에서 비롯된 갖가지 해프닝이 얽히고설켜드는 서사구조는 특이한 것이긴 하지만 현실성이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얘기만은 아니다. 노령화 사회, 성장이 정체된 지역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는 동물을 먹이로 삼는 방향으로 진화한 스티브라는 파충류가 등장하는 건 좀 비약이다 싶었는데 환타지물의 장르적 특성 상 그 정도 설정은 눈감아줄 만하다 하겠다. 이후에 꿰어지는 스토리는 개연성이 다분히 있는 픽션이어서 별 심리적 저항 없이 술술 잘 읽혔다. 그리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공감할만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생태적 재앙의 발생 가능성, 정서적 소통이 단절된 사회에서의 소외 문제 등 우리 사회의 아픈 단면을 잘 포착하여 쟁점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그간 환타지물에서 늘 보아왔던 뜬금없이 전개되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기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이물감을 느끼며 멀찍이서 낯설어하기만 하던 내게 이런 작품도 있구나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겠다. 독자를 소외시키지 않고 독자의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를 감안하고 있기에 현실과, 또 지적 역량과 겉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착한 환타지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재기발랄, 깜찍한 문장들

환타지는 대개 기괴한 이야기를 스피디하게 끌고 가는 통에 문장의 유려함, 문체의 독특함 따위는 음미할 겨를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무어의 글은 그 자체로도 시종일관 유쾌하게 다가온다. 

그들은 바람막이가 되어줄 움푹 팬 바위를 발견했다. 캣피시는 구두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젖은 양말을 벗어 바위에 널었다. 

“갑자기 밀려오다니, 비겁한 파도 같으니.” (68쪽)

들이친 파도에 눈 흘기며 투덜대는 모양이라니. 이처럼 통통 튀는 문장이 글의 생기를 불어넣어 지루해질 틈이 없게 한다. 또 개의 입장에서 주인을 평하는 대목도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스키너는 생각했다. 먹이 주는 남자가 날 질투하는구나. 하긴 몸에서 섬유 유연제랑 비누 냄새만 풍겨대니 암컷이 꼬일 리 없지. 집 밖에 나가 암컷 궁둥이 냄새라도 좀 맡고 다닌다면 저렇게 성격이 까칠해지진 않았을 텐데.(스키너에게 게이브는 언제나 ‘먹이 주는 남자’였다.) (75쪽)

마치 이상한 요정이 갑작스레 그의 인생에 끼어들어 그의 머리통을 고무 닭 장난감을 후려치고 정강이를 걷어찬 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러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189쪽)

경찰관 시오가 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두고, 대마초 흡연 중단에 따른 금단증상 때문에 떠오른 환상인지 실제 상황인지 헛갈려 하는 대목인데 심각한 장면인데도 쿡쿡 웃음이 났다 할까.

결국 사랑이 모두를 일으켰으니 

결말도 정말 모두에게 괜찮은 것이었다. 물론 스티브에게 먹힌 몇몇 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긴 해도 말이다. 우울증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던 마을 사람들의 내면에 깃들어있는 사랑의 감정이 결국 스티브 출현 해프닝을 계기로 표출되고 이로써 마을에 다시 평화가 깃들게 된다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이면서도 결코 식상하지만은 않다.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어 미묘한 감정의 결을 느낄 수 있게 하면서도 고대 바다괴물과의 한판 승부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활력을 되찾는 모습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내어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맛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은 그렇고 그런 환타지물이 아니었다. 독자의 상상력의 한계를 고려해 충분히 있을 법한 얘기를 공감 가능한 톤으로 재미있는 문체에 담아 기발하게 풀어 나갔기 때문이다. 하니 참 착한 환타지물이라 주저없이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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