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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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바타, 마더와 도터

<1Q84년>에는 실체인 마더와 실체의 그림자 도터가 등장하는데 도터는 또 다른 자기, 즉 분신을 말한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에도 분신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가 흥미롭게 오버랩된다. 다만 영화 <아바타>에서는 판도라 행성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인간 대역 로봇을 만들어 분신처럼 행동하는 단순한 구조라면 <1Q84년>에서는 리틀 피플이라는 가공할 존재가 공기 번데기라는 매체를 만들고 그 공기 번데기 안에 마더의 대역 도터가 들어있고 그 도터는 마더와 가까이 있어야 분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주로 신접한 퍼시버로 리시버인 리더와 성교를 통해 신탁을 전하는 일을 맡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하여 같은 분신을 소재로 한 이야기지만 <1Q84년>의 그것은 상당히 중층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분신에 대해서는 인류가 오래 전부터 떠올렸던 것이지만 이처럼 정교하고 치밀하게 분신을 창조하고 역할을 부여한 것은 하루키의 도저한 상상력이 아니고선 가 닿을 수 없는 지경이라 하겠다. 


2. 하루키와 노벨상 


매년 가을이 되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곤 하는데 그 중 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아마 가장 뜨겁지 않을까 싶다. 최근엔 한국 작가도 유력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고은 시인과 황석영 작가가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더 강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일본의 대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일본 작가로는 이미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한 바 있지만 일본의 국력과 매사 주도면밀하게 접근하는 성격으로 미루어 이미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지명도가 높은 하루키가 더 수상에 근접했다는 것이 정설이라 하겠다. 이번 <1Q84년>에서도 노벨상을 의식한 티가 조금 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테면 정교한 스토리 라인과 발산적인 상상력뿐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낸 에세이 같은 대목을 많이 깔아두고 있는 것 등 말이다. 아름다운 문장에 지혜가 깃들어 있는 잠언을 읽노라면 작가의 역량을 평가하는 데 긍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는 계산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문장 진행 상 절로 그랬는지 노벨상을 의식하여 수준 있는 작품이라는 평을 노리고 그랬는지 잘 분별이 되지는 않지만 그 부분에서 색다른 묘미를 느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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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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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글자가 겹쳐 보인다. 눈을 비비고 또 크게 부릅떠 보지만 여전히 두세 개로 어른거린다. 안구혹사랄 정도로 붙박인 듯 읽기에 몰두하여 어느새 1,300여 쪽을 훌쩍 넘겨 버렸으니 짓물러질 밖에. 이러다 정말 달까지 두 개로 보이는 건 아닐까 슬몃 걱정이 일기도 한다. 퍼뜩 가다듬는다. 내가 무슨 생각이람.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걸 보니 <1Q84>에 빠지긴 단단히 빠졌나보다. 

그런데 하루키는 왜 이리도 막막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어쩜 그리 절절한 얘기로 심란하게 만드는 것일까? 덴고와 아오마메 둘을 그렇게 엇갈리게 해야만 했을까?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먹먹해진 마음결 추스르느라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을 것 같다. 
 


1. 현실에선 만날 수 없는 운명이기에 새로운 시공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뭘 찾는지 실체도 모를 간절한 목마름 속에 헤매다가 마침내 그리움의 대상이 누구인지 또렷이 알게 되지만 너무 때 늦은 깨달음이었다. 결국 1Q84년 출구 없는 막다른 세계에서 스치듯 만나지만 또다시 같은 공간에서 살아갈 길이 없게끔 다른 세계로 나눠진다. 그러면서 그들을 끌어당기는 인력, 그 운명적인 흡인력이 1Q84년 그 막막한 지경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찌할 수 없는 손길의 인도로 그들은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어찌 그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있겠는가?

“어째서 꼭 나여야 했어요?”

“지극히 간단한 일이야. 그건 자네와 덴고가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이야.”(2권 331쪽)

그동안 1984년의 현실에서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에 의식 밑바닥에 잠재된 근원적인 그리움을 해소할 길을 도무지 알지 못할 밖에. 하여 어이없게도 다른 대상에 집착하는 현상으로 투사되기도 했다. 덴고는 연상의 유부녀와 정기적인 섹스 관계를 유지하며 나름의 위로를 받는데 곰곰 따져보니 그건 사랑이 아니라 정욕 해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아오마메도 중년의 머리 벗어진 남성들과 원 나잇 스탠드를 시도하며 갈증을 달래보려 하지만 늘 공허함만 남게 되었고. 그러다 덴고는 우연찮게 원고 대필 업무로 후카에리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녀에게서 아오마메의 그림자를 얼핏 읽게 된다. 후카에리와 퍼시버와 리시버 관계의 다의적인 교접을 행하는 순간 덴고는 그녀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환영 속으로 이끄는 것을 느낀다. 곧 아스라이 멀어져간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아오마메와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 내게 되었고.

“1984년에서는 나와 덴고가 걸어가는 길이 교차되는 일조차 없었다. 그런 얘기인가요?”

“그래. 자네들 두 사람은 전혀 관련을 맺지 못한 채 서로를 생각하면서 각자 고독하게 늙어갔을 거야.”(2권 343쪽)

초등학교 때의 안타까운 이별 이후 현실에서는 도무지 만날 수 없게 운명 지어진 관계였기에 그들에게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던 것. 하여 레일 포인트가 전환되듯 1Q84년이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Q84년으로의 진입은 현실에서 엇갈리기만 하던 둘의 만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 리틀 피플 모멘트 마련을 위한 목적으로 예비된 일이기도 했다. 그 1Q84년은 빅브라더인 리더와 리틀 피플이 모든 걸 지배하여 다들 옴짝달싹도 못하고 고스란히 통제당하는 불가항력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을 대적하여 균형을 이루기 위해선 새로운 전선의 구축이 필요했을 테니까. 그런 모멘트를 만들기 위한 전사로 덴고와 아오마메가 선택된 것이다. 어떤 섭리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니 덴고와 아오마메에게는 1984년보다 1Q84년이 더 적합하고 의미 있는 공간이 될밖에. 1984년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겉돌다 의미 없이 스러질 우연이, 1Q84년에 와서 비로소 필연이 되는 인연의 결정적 끈을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의 연합으로 악의 세력을 견제하는 중차대한 역할도 맡게 되었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좀 더 일찍 용기를 내어 서로를 찾아야 했어요. 그랬다면 우리는 본래의 세계에서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가설로서는 그렇지.” 남자는 말했다. “하지만 1984년의 세계에서는 자네는 찾아 나서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게야. 그처럼 원인과 결과가 뒤틀린 형태로 이어져 있어, 그 뒤틀림은 아무리 세계가 거듭된다 해도 풀리지 않아.”(2권 341쪽)  

 

2. 그들은 왜 그토록 만나려고 했을까

그런데 그들은 왜 부지불식간 서로를 그토록 그리워했을까? 그리움의 정체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아마 후카에리가 환영으로 보여준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벌어진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이후론 다시 만나지도 못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 왔으니까 말이다. 따스하게 손을 잡던 그 때를 되짚어볼 때 서로에게 끌렸던 건 아마 그들이 공유하고 있던 결핍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 다 자의식이 강한 아이였는데 현실에선 그게 무참히도 짓밟히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덴고는 NHK 수금원인 아버지의 몰이해와 교묘한 방해 속에 힘겹고 막막한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고 아오마메는 증인회라는 신앙 공동체 소속 어머니 밑에서 다른 아이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의 삶을 영위하며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의 외면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속에 그들의 트라우마는 커져만 갔고 주눅이 든 채 외톨이로 겉돌기만 하던 차에 자신과 비슷한 결핍감을 서로에게서 읽었던 것이다. 자연스런 측은함에 다가가 마음을 달려주려 아니 오히려 위로받으려 그들은 마주보게 되었던 것이다. 어두운 구석을 메워주고 온기로 감싸줄 상대가 생긴 것이다. 특히 아오마메에겐 유난히도 살갑게 다가왔던 덴고, 그의 강하고 총명함과 다정함은 그녀에게 자연스런 따스함과 깊은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아오마메 몸 심지에 박힌 한기를 없애줄 이, 덴고는 바로 그녀의 신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먼저 신호를 보냈던 것. 그런데 아오마메는 슬몃 마음을 내보이다 이사를 가는 바람에 제대로 뜻을 전하지 못했고 덴고는 의미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냥 흘려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 덴고는 더 이상 자라지 못했던 것 같다. 겉으론 성숙한 전문가로 보였다. 정확하고 열정적인 수학 강의로 명성이 높고, 후카에리의 난삽한 글을 원래 메시지와 감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도 우아하고 논리정연한 문장으로 승화시킨 필력을 갖고 있으며 고마쓰의 천방지축 제안에도 묵묵히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소화해내는 노련미까지 갖춘 그였기에 말이다. 어디에도 저급하거나 유치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시로 떠오르는 환영, 아버지가 아닌 남자에게 젖꼭지를 빨리는 어머니의 모습 때문에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했고 후카에리가 입었던 파자마 냄새를 맡으며 그 어린 소녀에게 아련히 기대고픈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는 짙은 그늘도 있었다. 그는 모성 결핍 중증인 어른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니 아오마메의 신호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무의식에선 내심 모성이 깃들어있던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몸만 커버린 어른아이 덴고. 하여 덴고는 스스로 초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 처지라고 느낀다.

틀림없다. 달은 두 개다.

하나는 옛날부터 있던 원래의 달이고, 또 하나는 훨씬 자그마한 초록색 달이다. 그것은 원래의 달보다 모양이 삐뚜름하고 밝기도 덜했다. 얼결에 떠맡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못생긴 먼 친척아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부정할 수 없이 그곳에 분명히 존재했다. 환영도 아니고 착시도 아니다. 실체와 윤곽을 가진 천체로서 확실하게 그곳에 떠 있었다.(2권 503쪽) 

그 이지러진 초록색 달이 먼 친척아이의 모습이 아니고 바로 덴고 자신이었던 것이다.  

아오마메도 자존감이 없이 자라나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도 그 고무나무가 마음에 걸리는 걸까. 그걸 두고 방을 나설 때까지 아오마메는 고무나무 같은 건 별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건 정말로 추레한 고무나무였다. 색깔도 별로고 한눈에 보기에도 시들시들 생기가 없었다.(2권 513쪽)

그것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로 밀려나 고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적어도 아오마메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색깔도 칙칙하고 전체적인 모양새도 좋지 않았다.(2권 516쪽)

그 고무나무에 왜 그리 유난히도 마음이 쓰였을까? 최후의 결전을 위해 떠나올 때 휑뎅그렁한 방에 유일하게 남기고온 그 화분, 바로 그게 아오마메 자신의 신세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지러진 초록 달과 추레한 고무나무 신세인 자신에게 따뜻한 신호를 보내던 아이가 그리워 간절히 만나려 했던 것이다.  

 

3.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 

이지러진 초록 달과 추레한 고무나무로 기댈 곳 없이 헤매던 그들에게 목마름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렷이 드러나게 된다.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덴고, 공기 번데기 속 자신의 분신인 도터(daughter)가 아오마메란 걸 확인하곤 모든 패키지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된다. 아오마메는 그 온기를 전하러 1Q84년, 여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어디든 기어이 그 사랑의 온기를 전해주기 위해 위험을 마다 않고 기어이 찾아오고야 만 것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결핍과 트라우마로 얼룩진 어른 아이가 비로소 어른이 되어 아오마메의 마더(mother)가 되고자 나서게 된다. 모성결핍 덴고가 말이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먼저 아오마메를 찾고 그게 실체든 분신이든 오롯이 돌봐 주리라 마음먹게 되는 것이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건 그는 달이 두 개 있는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찾아낼 것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찾아낼 것이다. 이 온기를 잊지 않는다면, 이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2권 597쪽) 

아오마메을 찾자, 덴고는 새삼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건, 그곳이 어떤 세계이건, 그리고 그녀가 누구이건.(2권 597쪽)

아오마메도 그리움의 정체를 기어이 알게 된다. 

덴고와 나는 어떤 사정으로 이 세계에 옮겨왔고 엄청난 소용돌이에 휘말린 모양새로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아마도 그건 치명적인 소용돌이일 것이다. 하지만 리더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치명적이지 않고서는 우리의 해후는 불가능하다. 폭력성이 어떤 종류의 순수한 인연을 만들어내는 것과 똑같이.(2권 444쪽)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는 그의 몸 안에 있어. 그녀는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신전 안에 있는 것이다.(2권 501쪽) 

그런 둘이 드디어 만난다. 아니 같은 곳을 지향하게 된다. 그런데 한번 들어온 1Q84년의 세계에는 비상계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출구는 없는 것이다. 1Q84년은 둘의 의지와 염원이 교감되어, 간절한 바람이 사무쳐 닿은 곳이지만 1984년으로 되돌아갈 길이 없는 치명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퇴로가 없는 그곳에서 아오마메는 리더와의 약속을 실행에 옮긴다. 오로지 덴고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또 다시 엇갈리고 말았다. 이번엔 아오마메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 그건 어쩌면 아오마메 패키지의 최종 완성판이었을 것이다.  

 

4. 이지러진 초록 달과 추레한 고무나무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보았다. 다만 그 동안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잠재의식에 쌓아두고 있었을 뿐. 초등 시절부터 어른아이로, 냉혹한 살인청부업자로 결핍감을 지닌 채 공허하게 겉돌고 있는 지금까지 그들은 이지러진 초록 달과 추레한 고무나무 신세였고 그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선 서로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걸 현실 1984년에서는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실체도 모를 막막함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운명적으로 진입한 1Q84년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고. 그러니 1Q84년은 출구도 없고 아오마메에게 비극적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안타까운 곳이지만 아오마메가 전하려던 패키지의 의미를 알게 되고 서로에게 이제 어떻게든 다가가야 하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 덴고와 아오마메에겐 그 곳이 구원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거기선 생사의 경계도 무의미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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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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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미스터리로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우리 사회의 그늘에 대해 성찰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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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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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모르겠다. 인물의 정체도, 사건의 실상도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다. 이 가족에게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고 서로 맨얼굴로 대면하며 소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해 보이니 외형만 갖고는 도무지 진단 불가랄 밖에. 공교하게 숨어 가식과 위악의 몸짓으로 다만 관망하고 있을 뿐인 그들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어린 유지의 내면조차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이 가족의 정서적 유대감은 선을 넘어버렸던 것. 하여 읽어내질 못하겠다. 이 가족의 진면목을, 아니 작가의 의도를.

1. 작가 정이현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

전작을 통해 각인된 정이현의 이미지는 시대의 트랜드를 반영하는 쿨한 작가라는 정도였다. 게으름과 무지로 인해 그녀의 진면목을 제대로 접해보고 알아채지 못한 탓이 크겠지만 내 감식안으로는 그런 범주와 위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너는 모른다> 초반부까지만 해도 예의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 약간 식상한 감마저 들었다 할까. 스피디한 전개에다 나긋나긋 잘 읽히는 문체가 시종여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어느 순간 갑자기 멈칫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익사 사건의 실마리라곤 조그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는 와중에 느닷없이 유지의 실종 사건까지 발생하여 스토리 라인이 더욱 난마처럼 꼬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뚜렷한 암시 하나 없이 뚜벅뚜벅 나아가는 게 너무 막막했기 때문일 것이다.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면 우리의 뇌가 겉도는 법. 하여 정말 모르겠다고 되뇌며 간신히 읽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작가가 내미는 손이 얼핏 보였던 것 같다. 그 복잡다단한 일들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정교한 퍼즐의 형태로 슬몃슬몃 건네주고 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를 조금씩 짜 맞춰 나가다 보니 이럴 수가, 어느새 윤곽이 얼비치는 게 아닌가. 인물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어 과거와 현재를 톺아보는 가운데 그들의 정체도, 그와 관련된 사건의 실상도 서서히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여 빨려들듯 몰입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작가의 손이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곳곳에 반전을 예감하는 장치를 절묘하게 숨겨두어 긴장을 고조시키면서도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적인 문장으로 따뜻하게 다가오고 있어 어느새 마음으로 다가가 작가의 심경을 고스란히 따라 읽게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이 정도 내공을 지니고 있을지 그동안 정말 까맣게 몰랐다.
 

2. 김상호 가족에 대해 도무지 모르겠다. 

방배동 서래마을 하이밸리 김상호 가족은 겉으론 평온해보이지만 속을 조금만 헤집어 보면 퍼뜩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꼬여있고, 일견 해체 일보 직전까지 이른 것 같기도 하다. 하여 그들 가족에 대해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할밖에. 그런데 작가가 인물과 사건별로 하나씩 제시하는 퍼즐을 맞춰나갈수록 이미지가 서서히 그려지며 파편화된 듯 여겨지던 개별적 자아와 그들의 집합인 가족의 실상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할까. 아버지 김상호로부터 배다른 막내 유지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족 모두는 자신의 영역 구획을 너무 높게 해버린 극단적 단독자들이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선 비밀번호 설정 여부도 모를 정도였고 대체 무슨 고민에 빠져 있는지 가늠하지조차 못해 다만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낼 뿐이었다. 

우선 아버지 김상호와 어머니 진옥영. 늘 삐걱대는 이들에게서 정겨운 가족의 모습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지경이라 하겠다. 하여 사설탐정 문영광은 수첩에다가 ‘의뢰인 부부 사이를 파악할 것’이라고 메모할 정도였다.

“무디게 갈린 얼음처럼 식탁 위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의 아버지 김상호는 아내 진옥영과 아침 내내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었다. 밥을 먹는 김상호의 동작은 사뭇 기계적이었다. 젓가락을 놀려 반찬을 집을 때나 어금니를 그것을 씹을 때도 아내와 자식들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무엇엔가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것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너무나 역력해서 도리에 그 자리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잊힐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10-11쪽)

새엄마와 혜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자분자분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어딜 가는지 얼마 동안 집을 비우는지 피차 밝히지도 묻지도 않았다. 수년에 걸쳐 성립되어 온 일종의 암묵적 규칙이었다.”(12쪽) 

혜성은 겉으론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범생이지만 내면에 울화를 늘 억누르고 있다가 결정적으로 폭발할 지경에 이르면 차량 방화를 통해 이를 해소하곤 하는 일탈자였다. 또 명문대 의예과에 입학하였지만 학업도 포기하고 말았고. 

은성은 좀 더 심한 경우라 하겠다. 애정 결핍이다 보니 매사에 삐딱이였고 늘 집착할 대상에 몰입하는 가엾은 아이였다. 거쳐 간 이들도 사기꾼에다, 학원 강사 심지어 유지 수사를 맡은 사설탐정 문영광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하나같이 처참한 파탄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니 사귀던 남자에게서 내가 본 최고의 미친년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밖에. 

유지에 대해선 다들 착하고 얌전한 막내딸로만 여겼지 그 내면에 벌써부터 트라우마가 중첩되어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짱깨의 딸이라 놀림 받고, 초등학교에선 세컨드 소생이라는 소문으로 친구들에게 외면당한 아이였으니 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다고 지레 짐작해버릴 밖에. 하여 할 말이 있어도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작은 어금니로 그냥 오독오독 깨물어버릴 정도로 삭이곤 했던 것. 그러니 도피기제가 발동하여 실재하는 세계는 허상으로 보고 오히려 가상의 공간, 혼자만의 영역으로 깊이 침잠하고 만 것이다. 그런 선택의 일단이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하울카와 내밀한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진옥영의 연인 밍. 그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국외자, 이방인이었다. 김상호 가족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도 대만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그러면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자발적 고립의 길을 택한 자였다.

이런 하나하나의 모습만 놓고 보면 그들도 한때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뽀얀 얼굴의 천사였다는 걸 도무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유지의 실종 사건은 이런 김상호 가정의 터닝 포인트였다. 막내의 실종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 혼자만의 꼬치 속에 똬리 틀고 있던 개별적 자아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숨겨왔던 내면의 그 보드라운 진면목이 슬몃 고개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니 다른 이들도 자신 못지않게 버거운 짐을 부여잡고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으며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간신히 숨기고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고. 그 과정을 거치며 이제 김상호 가족은 서서히 화해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언젠가는 환자용 침대에 누워 잠든 아이를 들여다보다가 작은 탄성을 뱉어내기도 했다. 얘가 이렇게 예쁜 애였구나.”(484쪽)

마음의 문을 가장 굳게 닫아걸고 있던 은성마저 유지를 보고 이렇게 감격하며 목욕을 시키고 숟가락으로 죽을 떠먹이는 등 정성스레 돌보는 일을 기꺼이 맡기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소중한 발견을 위해서는 대가가 없을 수 없는 법. 희생 제물은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 하겠다.

3. 한국 사회가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너는 모른다>를 통해 한국 사회가 정말 불가해한 곳이라는 걸 새삼 절감했다. 김상호 가족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아주 특별한 얘기만은 아닐 듯하다. 우리 삶이 온통 천민자본주의 근성으로 물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장기를 밀매하고 경찰력을 대신하여 사설탐정에게 유괴 의심 사건의 해결을 맡길 수 있으며, 불법 도청과 정보 유출이 가능했겠는가? 그건 오로지 돈의 힘이 최고의 권력인 시대니까 공공연히 시도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또 하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가해지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과 배제가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된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그것도 심해도 너무 심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가부장이 아내와 아이들 위에 가공할 권력으로 군림하는 모습하며, 다른 민족 구성원에게 이유 없이 가하는 집단적 따돌림 등 한국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아프게 확인했던 것이다. 특히 화교들이 이 정도로 고통 받고 이처럼 깊은 상처를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늘 의심받으며 어떤 집단에도 선뜻 끼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예외적 존재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다. 오죽하면 밍과 옥영이 남태평양 어디쯤에 섬 하나를 사서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을까.

“그들은 단박에 서로의 고향을 알아보았다. 아무리 감추려 애써도, 그들의 발음에선 산둥성 악센트와 한국어 악센트가 독특하게 뒤섞여 묻어났다.”(55쪽)

“2008년의 옥영이 창밖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중얼거렸다. 그렇지 한국 여자들만 빼고. 그러네 정말, 그런데 나는? 내가 한국 여잔가? 밍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중국 여자는 아니잖아.”(57쪽)

이렇게 천민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어 불법, 탈법을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있으니 합법적인 시스템에 의한 사건 해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거고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인 화교가 개입된 사건이었으니 해법을 찾기가 오리무중이었다 하겠다. 놀랍고도 안타까운 우리의 참 모습에 진저리칠 밖에.

4. 그리고 삶에 대해 정말 모르겠다.

삶이 왜 그리 어렵고 팍팍한지 모르겠다. 김상호 가족이 하나 같이 까칠하고 서로 부대끼는 것은 그만큼 그들 각자의 삶이 인내의 한계를 넘나들 정도로 힘겹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러니 이런 약육강식의 살벌한 무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때론 길들여진 사회적 자아, 페르소나의 가면 뒤로 교묘하게 숨고, 더러는 위악을 행하며 자신의 두려움을 위장하곤 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던 것이리라.

장기 밀매 브로커로 인간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노예상인 아버지, 그의 내면에선 얼마나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겠는가? 페르소나로 두껍게 위장하고 애써 태연한 척 해보지만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실종되었는데도 두려움에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사설탐정에게 의뢰할 정도였으니까. 그 막막함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대부분의 직업인들처럼 그도 자신의 생업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모든 기본적 업무들이 다 법적인 테두리 밖에서 진행되므로 받게 되는 업무 스트레스의 강도가 특히 두드러졌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직업군을 다만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야 한다면 자신이 어디에 속하게 될지 김상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수치스런 행위로 치부당하기에는 억울한 것도 사실이었다.”(279쪽)

위악은 자신에게 닥친 외부의 자극을 어떻게 방어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 행해지는 안쓰러운 폭력이다. 늘 거부당하는 환경 속에서 쩔쩔매다 주눅이 들게 되면, 욕망하는 바를 표출하지 못하고 꾹 눌러 억압해두었다가 엉뚱한 상황에서 낯선 방식으로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은성이 한 때의 연인 스티브가 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벽거울에 이마를 찧어 피가 흐를 정도로 자신을 학대한 것처럼 말이다. 차량 방화로 스트레스를 풀던 혜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여 억지로 악을 행하는 이들의 내면을 한 꺼풀만 벗겨 봐도 여리디 여린 속살이 오롯 들어차 있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세상은 외면만 보고 미친년이라고, 소년 방화범이라고 금방 낙인찍어버리니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될밖에. 하여 삶은 마냥 고달파지고 타인의 배제는 한층 노골화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일 게다. 이 안쓰러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그건 결국 각자가 스스로를 이겨내어야 할 것인데 그 과정에 외생적 계기가 주어진다면 긍정적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상호 가족의 경우는 유지의 실종이라는 불행이 닥쳐옴으로써 다들 위악의 몸짓을 거두고 본래의 그 선한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의 비의가 놀랍다.

5. 퍼즐 속 숨은 그림을 발견하다.

작가가 건네준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다 보니 완성된 퍼즐의 배경으로 슬몃 숨은 그림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실눈으로 가늠해보니 그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같이 따뜻하고 반듯한 인간의 품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모습이었다. 본연의 뽀얀 얼굴로 서로에게 연민과 위로의 눈짓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다들 이랬구나 하는 경탄이 절로 나왔다. 그걸 모르고 그렇게들 먼길을 돌아왔다 생각하니 아득해진다.

하여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김상호 가족의 순수한 면모를, 아니 이를 고스란히 그려낸 작가 정이현의 심경과 역량을 말이다. 정이현은 얽히고설킨 사건과 관계의 실마리를 퍼즐 조각 하나하나 마다에 담아 이를 긴 호흡으로 일관되게 엮어내어 어느새 선명한 이미지로 살려내었던 것이다. 그 도저한 내공이라니. 그리고 퍼즐의 단순 조합을 넘어 숨은 그림을 깔아두기까지 하였다. 그런 정이현을 따라 가다보니 가면을 쓰고 위악을 일삼던 김상호 가족의 진면목도, 유지 실종과 익사 사건의 실체도 또렷이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따뜻한, 아니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 방식이 비록 서툴고 거칠었으며 때론 위악적인 모습이었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 유지를 다시 찾고 아버지 면회도 다니게 되면서 그런 방식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는데 그들이 갑자기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뽀얀 얼굴의 천사, 방배동 서래마을 하이밸리 김상호네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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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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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세계의 끝 여자친구. 87쪽) 

1. 끝이라니, 거기가 도대체 어디 

세계라는 게 만약 끝이 있다면, 그 경계선 안쪽에 머물러 있건, 끝을 지나 세계 바깥쪽까지 일탈했건 어느 경우나 슬픈 일일 것이다. 경계선 내에 있는 자는 자기에게 부여된 좁디좁은 세계를 탓하며 그런 세계관을 강요한 측을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할 것이며, 끝을 지나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던 세계를 벗어났다면 일탈을 방임한 측의 무책임을 탓하며 때론 세계 안의 안락함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 과정이나 정서적 반응은 세계의 끝에 이르거나 더 나아가 한계를 넘기까지 해보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끝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이고, 끝까지 치달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성찰하며 안과 밖 두 세계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하여 끝을 본 사람은 삼나무 우듬지에 오른 까마귀처럼 이제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끝이라니, 도대체 어떤 지점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사회의 분위기나 개인적 역량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지각될 것이다. 얼마나 관대하게 구성원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지, 혹은 감성의 울림에 공감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심성의 두께와 경험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오차의 범위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끝이란 바로 그 사회의 규범이 허용하는 한계를 구획하는 선, 넘는 순간 가해질 지탄을 개인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분량의 최대치가 아닐까. 

우리 사회는 너무나 편협한 세계관을 강요하고 있다. 약간의 변주와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영혼들의 서식처로는 지극히 부적합한 환경일밖에. 세계가 이런 지경인데 감성까지 작은 떨림에도 울림이 깊게 스며든다면 그의 아픔은 극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들은 또 가슴이 부르는 소리에 예민한 촉수를 뻗고 있으므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천부적으로 이끌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은 온 생애를 건 것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어찌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여 그들은 누구보다 쉽게 세계의 끝에 이르고 때론 그 선을 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더러는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이혼으로 또는 연인과의 사랑을 일거에 접어버리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그들에게 세계의 끝은 상심을 넘어 절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믿었던 것들이 하나 남김없이 무너지는 그 순간, 세계의 끝이라는 벽에 직면하게 될 것이니까. 

하여 끝이란 게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끝에 직면했다는 건 생의 근원을 뒤흔드는 뼈저린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만약 세계의 끝이 없다면, 생의 어떤 임계치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한번이라도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삶이 이리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겠는가. 너무 아픈 사랑이었다 해도 그게 사랑이 분명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면, 끝 모르고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어진 다음 비로소 사랑의 실체가 온전히 도드라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하여 진정한 사랑은 갈 데 까지 나아가 끝에 이르러야만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다시 세계 안으로 돌아온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실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하여 세계의 끝은 사랑의 실체를 파악하고 다시 세계 안으로 돌아오게끔 가리키는 이정표인 셈이다.

2.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러나 끝에 이르는 과정에서 치르는 아픔은 겪지 아니한 자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고통스런 일이다. 하여 이건 도무지 사랑이 아니야 하며, 아예 사랑의 근원을 부정하기도 한다. 

체르니 40번을 친다는 건 고통 없이 플랫과 샵이 네 개 이상 달린 악보를 읽는다는 뜻이거든.
고통이라고 말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린다. 그건 힘들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 힘든 건 마음이 힘든 거고, 고통은 몸이 고통스러운 거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고통이겠지. 그치? 손가락이 아파서 건반을 두드릴 수가 없었으니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126쪽)

피아노 연주의 고통을 통하여 삶의 힘겨움을 말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처연하여 가슴이 저려온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는 이런 아픈 얘기들로 빼곡하다. 사랑하는 연인 케이케이를 잃고 그와 인연이 있는 모든 것에 탐닉하거나, 헤어진 연인과 이름이 같은 할머니에게 끌려 그의 사랑하는 제자 대역을 해 주는 남자,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 택시운전수가 된 연인을 잊지 못하여 위성처럼 그 주위를 배회하는 서른 즈음의 여자이거나, 곁에 있어도 정서적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단절되어 버린 부부, 문화혁명 기간 중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그에 대한 얘기만을 평생 다른 버전으로 만들고 있는 노인의 사랑 얘기 같이 너무 절절하고 아픈 사랑만 그리고 있어 세계의 끝이 어떤 건지 다양한 변주를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그 곡은 때론 비장하고 더러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경계를 오르내리고 있다.

3. 아무리 아파도 사랑은 사랑인 법

그러나 그 사랑은 하나 같이 뜨겁게 불살라 결국은 끝을 보고야 말았다. 미련 없이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것이다. 하여 타버린 불씨만이 남은 지금 그들은 이제 고요해진 상태다. 그리고 추억한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에 지폈던 시절이거나 절망에 이르게 했던 이에 대한 것이다. 불꽃처럼 세계의 끝, 사랑의 절정에 이르렀던 그 순간은 비록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사라져버렸지만 지금 돌이키건대 “긴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있다. (김광석 노래 <회귀> 중에서)

하여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제발 좀 돌아보라고. 그리고 이제 얘기 한번 해 보라고 채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삶이 정리되고 비로소 그 시절 세계의 끝까지 막무가내로 치닫던 자신의 모습이 안개 걷히듯 또렷하게 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모든 삶은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거라며 달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이 끝났다고 여길 정도로 막막한 순간에 처하면 일체의 이성적 판단은 작동 중지되고 악에 북받쳐 분노에 눈이 멀고 만다. 자연 파괴와 자학이 뒤따를 수밖에. 이럴 땐 끝에 이르게 된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물론 마음 엄청 추슬러야 하고 세월도 훌쩍 지나가야 가능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에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게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세계의 끝 여자친구. 81쪽) 

그리고 세계의 끝에 이르렀던 과정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대화라는 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상황 정리가 이루어져야 소통 가능한 것이므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다 보면 그 일의 실체를 냉정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심경의 내밀한 구석까지 얘기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끝났다고 여겼던 일을 얘기하는 가운데 스스로 흐름을 읽게 되고 자연스레 맺혔던 응어리가 누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들이고 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별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각자 고독하게 달로 가지 않고 모두 함께 복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메리 올리버가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는 동안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312쪽)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315쪽)

그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 대한 성찰로 바꿀 수 있고 그 순간 상대방의 처지와 심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나며 분노와 원망이 연민과 공감으로 화하게 된다. 용서와 화해도 그 지점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홀가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족쇄에서 놓여나게 되었으니까. 

차가운 바다. 차가운 운하, 차가운 웅덩이. 그렇게 차가운 물에 둘러싸인 나는, 또한 따뜻한 그녀 안에 머물던 나는,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때 나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렸다.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 그리고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중에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었으나,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 더 많았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124쪽)

4. 그러니 세상은 아직 살아볼만한 곳이 아닐까.

세계의 끝, 그 절망의 지점에 이른 자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아니 돌아온 자만이 끝에 대해 알게 된다. 절망에 휘둘려 삶의 끝에 이른 자는 세계의 끝을 결국 알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돌아온 자는 이제 일상의 가벼운 것들에는 전혀 요동치 않게 된다. 삼나무 우듬지까지 올라가 보았으니 하찮은 것들에 눈길 돌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여 분노는 수그러들고 이제 오히려 그 시절이 아름답게까지 보이게 된다. 그것을 추동력으로 삼아 이제 현실로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198쪽)

하여 김연수는 경계선의 작가라 하겠다. 세계의 끝 그 언저리에서 서성대는 우리에게 결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말았다. 바람이 사위어진 다음 비로소 경계였음이 드러난다는 걸 명료하게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 끝을 넘지 말라고, 넘었거든 속히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니 짐짓 들리지 않는 척 백수광부마냥 그예 넘고 말곤 한다. 하니 지금 막 선을 넘으려는 자에게 김연수는 하나의 구원이 될 것이다. 아픔을 딛고 응어리를 풀고 세상 한가운데로 돌아온 이들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절망의 지점, 세계의 끝에 이르러 지상의 고통을 맛보았던 자는 이제 돌아와 다시 세계의 한 가운데 설 수 있게 된다. 그 힘은 세계의 끝, 절정의 순간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하니 세상 모든 일들이 여유로워지고 이제 그 절망의 순간들에 대해서도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고귀한 의미로 차득 차 있었다고 아름답게 추억하며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하여 세계의 끝은 절망의 지점이지만 또한 희망과 구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김연수는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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