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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바라본 세계사
에발트 프리 지음, 소피아 마르티네크 그림, 손희주 옮김 / 동아엠앤비 / 2021년 9월
평점 :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관련 서적을 읽을 때 '오랑캐' 라는 말이 등장한다. 야만스러운 종족이라는 뜻으로 삼국지에도 흉노족이나 아만 족 등을 오랑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어감만 들어도 무슨 털이 잔뜩 난 야만인이나 유인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문명국이라도 유사시에는 모두 오랑캐가 된다. 중국은 자기들 말고는 대부분을 오랑캐라 불렀다. 안하무인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중화사상은 아직도 자기들만 최고고 나머지는 오랑캐 내지 조연으로 전락을 시킨다. 나라 이름 자체가 오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나라도 오랑캐라는 말을 썼었다. 중국 사대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랑캐로 지목된 나라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은 당연히 오랑캐가 아니다.
유럽의 입장에서는 인디언은 야만인이고 아프리카나 인도 등도 모두 야만인으로 보았다. 콜럼버스의 탐험을 신대륙 발견이라고 칭송하는 것 자체가 그렇다. 죽을 때까지 그곳이 인도인줄 알았다는 콜럼버스는 현 아메리카 대륙의 거대 제국 미국의 명분을 위해 새로운 꿈의 대륙을 찾아낸 위대한 발견자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렇듯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쓰인 세계사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야만인이었을 우리 나라의 역사서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던 필리핀의 국교가 카톨릭인것처럼 잠식당해있다.
그래서 이 책의 취지가 참 좋았다. 세로운 시점에서 세계를 관찰한 이 책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하였다. 서양 중심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문화권을 중심으로 하지도 않는다. 제목대로 야만과 문명의 경계에서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책의 이곳 저곳에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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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큰 판형에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양장판으로 구성되어있는 이 책은 소피아 마르티네크의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삽화와 함께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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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50만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 인간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영장류가 살았다고 추정이 된다.
그러나 말을 하기까지 진화를 하게 된 것은 10만 년에서 30만 년 전부터라고 한다. 문자가 생긴지는 겨우 5,6천년 밖에 되질 않았다는데, 동물 벽화나 그림은 5만 년 전쯤에 그린 것으로 추정이 된다. 현생인류와 비슷한 영장류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데니 소바인 등 4종이 있는데, 현생 인류 외에는 다 멸종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도구의 사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성경에 나온 이야기와 비슷한 노아의 방주, 대홍수 같은 문장이 나오는데, 구약성경이 이 바발론의 문학을 인용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한다. 문자의 발명도 바빌론에서 선이나 동그라미 십자가등의 표시나 그림, 글씨 등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기록을 보면 현재에 전해지고 있는 역사적 기록들이 어느정도 사실이나 조금씩 변형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다른 국가의 설화가 서로 비슷한 것도 있고 심지어 문화권이 다른데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곤 하는데, 이것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구전된 것이 아닐가 한다.
바리가자와 갠지스를 지나 중국의 장안을 거쳐 비잔티움 제국 등으로 전개되는 문명의 이야기는 물길을 통해 흘러간다. 지정학적인 위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인도양의 바라가자는 교역망의 중심이었다. 후추처럼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물건들이 활발하게 교역이 이루어졌다. 상인이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이라는 뜻인데, 주나라에 점령당한 상나라 사람들이 세상을 떠돌면서 교역을 했다는 것에서 유례했다. 인도양 지역이 동서양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해가능하도록 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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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린다. 아프리카는 유럽인이나 중동인들과의 접촉으로 많이도 변했다. 포르투갈인이 내륙으로 접어들어가고 교역보다는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무역이 시작 되었다.
알렉스 헤일리가 자신의 조상을 추적해서 출간한 '뿌리'를 읽어보면, 헤일리의 조상 쿤타킨테의 부족은 종교가 있다. 그런데 그 종교의 신이 '알라' 이다. 알라는 그냥 '신' 이라는 뜻으로 기독교의 야훼(하나님은 한국에서의 의역이라 할 수 있다)와 같은 뜻이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신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신의 이름이 필요 없다. 아프리카 지역에 오래 전부터 종교가 전파되었다는 근거일 것이다.
그러나 선교 뒤에는 침략과 노예 무역이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다가서서 침략을 하는 유럽인의 방식은 새로울 것도 없다.
개인적으로 이런 선교 때문에 세상의 분쟁이 더 많아지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본다. 일신교도들이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해악과 죄들을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과학이 없던 고대 시대에 이해하지 못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그저 '신' 이라 지칭하여 경외하였고,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낱낱히 밝혀놓은 사실들까지 왜곡하고 부정하며 이어져 오고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고, 그 존재하지 않는 신에 의해 인간이 다시 해를 입고 있는 아이러니 한 상황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철저한 무신론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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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주제와 멋진 삽화... 그리고.....
전설의 레전드식....
번역....번역...
책을 읽어나가는 데 초반부터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지금 글씨위를 달리는 것인지 책을 읽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몇 번이고 돌아가 읽기도 했다.
그리고 곧, 얼마 전에도 이런 느낌이 들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역자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손희주... 낮선 이름이다.
그런데 옮긴 이가 번역한 책의 목록에서 얼마전에 읽은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나는 그래도 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다.
올해 5월에 출간되었고 6월 초에 서평을 쓴 바 있는데, '좋은 내용이었지만 번역이 이상하다'라고 썼던 바 있다. 역자의 이름은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문장이 가독성이 떨어지고 비 전문가인 내가 봐도 '이렇게 번역하는게 맞나?'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말하자면 다 만족스러운데 번역만 마음에 안든 책이었다. 우르술라 누버의 다른 책을 읽고 싶었지만 역자가 같아서 포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5월에 <나는 그래도 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를 출간하고 4개월도 채 안되어 이 500페이지가 넘는 전문적인 서적을 새로 번역을 해냈단 말인가? 한 역자에게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뭐 동시에 작업을 하거나 미리 해놓은 것을 나중에 출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그때 느낀 어색함보다 훨씬 어색하다. 어색하다 못해 어설프다.
과장 좀 보태서 무슨 구글 번역기를 돌린 것같이 느껴진다. 번역을 할 때 보통 윤문과정을 거치는데, 이 책은 윤문을 아예 안했거나 대충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29 페이지의 문장을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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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은 오랫동안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알려진 지구 남쪽의 커다란 대륙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경력으로 수 백년 전부터 내려온 의문점을 풀어주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글쓰기에서 금기하다 시피 하는 긴 문장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커다란' 대륙이라니.... 눈을 의심할 만한 문장이다. 대륙이라는 말이 이미 '광대한 면적'이라는 의미가 포함이 되어있는데 커다란 대륙이라니..... 전설의 레전드같은 우스갯 소리의 문장이 실제 정식 출판물에 쓰일 줄이야...
순간 책의 장르가 코믹 역사였던가? 싶었다. 역자도 역자지만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문장을 가만히 내버려두었을까.
'쿡은 오랫동안 '남쪽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대륙이 실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경력으로' 수 백년에 걸친 의문을 풀어줄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 라고 한다면 더 깔끔하지 않을까?
마지막 문장의 첫 번째도 그렇다. '이번에도 쿡은 배 두 척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이번에는 항해 내내 같이 움직였다.' 라니....
'이번에는' '이번에도' 가 한 문장에 같이 쓰여있다. 어둠의 다크 같은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도 쿡은 두 척의 배와 함께 길을 떠나서 항해 내내 함께 했다.' 라고 쓰면 될 것을 참 길고 복잡하게도 써놨다.
뭐 실수라고 치자.
허나 이 두 부분만 그랬다면 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이런 어색한 문장이 나올 정도다. 속독으로 읽어도 거슬릴 정도였는데, 정독해서 그걸 다 따지기 시작했다면 아마 백페이지도 넘게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단어의 배치도 앞에 나와야할 단어가 뒤에 있는 느낌이 드는 문장 투성이었다. 뭐 문학 작품이 아니니 의미 전달에 문제가 없다면 그 쯤이야 할텐데... 문제가 있다... 이 책을 읽는데 상당히 곤욕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다시는 이 역자의 번역을 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의 번역은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역자께서 마감에 쫓겨 구글과 파파고의 도움을 받으신것인지? 몇 개월 만에 원고를 마감해야 해서 후다닥 해치우시느라 이랬는지...
뭐 난 알 방도가 없다. 국어 실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왜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하냐면 ... 그만큼 내용이 좋았기 때문에 번역에 더 신경을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문장에 민감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블로그에 쓴 백여개의 서평중에 문장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한 책은 처음이다. 이것도 나의 굉장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행동이다.
책 읽다가 발견한 왠만한 오탈자마저 그냥 넘어가는 편이다. 그런게 있더라도 문장의 의미 전달이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글을 못쓰며 어색한 문장이 있을 수 있다. 아니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문가가 아닌 독자이다. 그저 독자의 눈으로 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스포츠를 볼 때 응원도 하지만 비판도 있을 수 있는데 거기다 대고 '그럼 니가 해보던가'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니가 더 잘하지 못하면 입을 다물어라' 라는 이야기인데 이건 굉장히 위험하고도 무서운 발언이다. 게다가 이 논리를 따르자면 그 사람은 발언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사고방식의 단순함으로 그 누구보다 못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평생 벙어리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 그런 논리대로라면 영화 감독이나 제작자만이 영화를 비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영화를 보고 비평이든 비판이든 한 번 안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세포 소녀나 긴급조치 제 1호 같은 영화를 보고도 그럴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모두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 말같은 말인가?
나보다 더 나은 사람, 낫다고 누군가가 평가한 사람에게는 입을 다물라는 것은 노예근성이나 다름 없다.
누군가는 나보다 돈이 많을 것이고 나이가 많을 수도 있고 스펙이 높을 수도 있다. 어느 한 부분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나은 면이 있을 것이란 얘기다. 사람에 대해 단순히 누구보다 낫고 못하다 라는 표현을 하는 자체가 그런 점을 고려하지 못한 단순함이라 볼 수 있다.
독재국가라면 또 모를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런 논리가 '불가능' 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만약에 그런게 가능해서 어떠한 '보편적 기준'같은 것에 맞추어 정보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독서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도 역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아무 감정도 없다. 그저 번역에 대해서 느낀점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지도는 땅 자체가 아니다' 라는 유명한 말처럼 번역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다.
좋은 주제와 취지를 가진 책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웠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여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이버 문화충전200% 카페를 통해 책을 제공받은 뒤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