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에서 생트 콜롱브가 간직한 보쟁의 정물 한 점.


내게는 바니타스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 정물을 물끄러미.




 살짝 머금었다 삼키는 와인 향이 가을이었다. 더워도 물기를 가득 품어도 멈추어도.


 시간을 잊은 듯, 멈춘 먼지 속 고즈넉함.


 째깍, 하는 짧은 공간 넓게 가라앉은 글씨.


 이제 곧 시계가 빨리빨리를 외치면 불어올 차가운 입김.


 가을이 또 하나 쌓일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숨결을 듣는 시간. 

 화가의 붓질 소리. 수프 한 그릇 위에 아른거리는 뜨거운 공기. 

 들뜬 높음이 서서히 몸을 숙이고 가을을 맞는 몸짓.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듯한 체온을 새로이 느긴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풀어 준다.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긑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보내고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맞춘다-나의 시와 함께




김현승, 절대고독




 

 아쉬운 일, 안타까운 일, 작은 성취를 느꼈던 일, 아름다움에 눈을 감았던 무엇.

 어린아이가 누는 오줌 소리, 깊은 밤, 바람에 흩날리던 물소리. 

 여기와 저기의 구분이 없는 목소리, 나룻배를 타고 가서 닿는 세계.





 

아내가 그 옆에 온 것을 아홉번째 느낀 때는 봄이었다. 1679년 6월 대 박해가 있었던 해였다. 그는 탁자 위에 포도주와 고프레를 담은 접시를 꺼내놓았다. 그는 오두막에서 연주했다. 그는 순간 연주를 멈추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죽었는데 어떻게 여기 올 수 있는 거요? 내 나룻배는 어디 있소? 내가 당신을 볼 때 흐르는 내 눈물은 어디 있소? 이게 정녕 꿈이란 말이오? 아니면 내가 미친 거요?"

 "불안해하지 말아요. 당신 나룻배는 강가에서 오래 전에 썩었어요. 저곳 세상은 당신 배처럼 그렇게 견고하지 않아요."

 "당신을 만질 수 없어 고통스럽소."

 "바람 말고는 만질 게 하나도 없어요."

 





 파스칼 키냐르는 1948년 노르망디 지방의 외르에서 태어나 1969년 '말더듬는존재'로 문단에 데뷔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의 책 날개에 실린 작가 소개를 훑어보면 대대로 언어학자와 음악가를 배출한 집안의 영향, 5개 국어 습득, 베르사유 바로크 음악 센터의 임원, 혈관 파열, 이런 낱말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시간 말없이 생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의 담대함, 맑고 조용하지만 정확한 눈빛을 보여주는 그의 글은 소리와 냄새, 촉각과 모양의 감각을 일깨운다. 시간을 '옛날'과 '지난날'로 떠올리곤 하는 그의 글은 산문이면서 운문이기도 하며, 문학인 동시에 음악이기도 하다. 




 언어가 이루는 성취, 인간이 몸속에 품은 태초의 기억을 일깨우는 그의 글은 순서대로 말 더듬는 존재, 뷔르템베르크의 살롱, 샹보르의 계단, 세상의 모든 아침,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등이 있다. 1996년 갑작스러운 혈관 출혈로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글쓰기는 크게 변하고, 중국과 일본 여행 이후 그 변모된 글쓰기의 첫 결과물인 '은밀한 생', 그리고 그 이후 '로마의 테라스', '마지막 왕국', '빌라 아말리아' 등을 살펴보면, 그의 문학은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 시, 수필, 우화, 민화, 잠언, 단편, 이론, 인용, 사색, 몽상이 모두 뒤섞인 글. 글씨가 스치는 소리조차 만지지 않으려는 개인의 흘려보내는 성취.





 혈관 출혈 이후 '내 안에서 모든 장르가 무너졌다'고 말하는 파스칼 키냐르. 엄청난 독서의 흔적.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경계를 없애는 글쓰기. 아는 것을 가장 많이 모르는 것으로 바꾸고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듯 하지만 조용히 그 층층 쌓인 구조를 말푀유처럼 조밀하게, 그러나 뭉텅이 채로 내놓는 손길. 자신의 글을 보아 내면서 '덧없는 글들'이라는 제목으로 내고, 자신의 지식을 '박학적 무지'로 말하는 글에는 일관되게 근원에 관한 탐구, 방향성 없는 시간, 부드럽게 연속되어 하나가 되었으나 파편화된 세계를 노래하는 작가이다. 


 


 

  

  "그것은 어려운 일일세.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반드시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음악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는가?"

  "그건 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틀렸네. 신은 말하지 않는가."

  "그럼 귀를 위한 것입니까?"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 귀를 위한 것은 아니네."

  "그럼 황금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 황금은 들을 수 없지."

  "영광입니까?"

  "아니네. 그건 명성에 불과하네."

  "그럼 침묵입니까?"

  "그건 언어의 반대말에 불과하네. "

  "경쟁하는 음악가입니까?"

  "아냐!"

  "사랑입니까?"

  "아니네."

  "사랑에 대한 회한입니까?"

  "아니네."

  "단념을 위한 겁니까?"

  "아니야, 아니야."

  "보이지 않는 자에게 바치는 고프레를 위한 겁니까?"

  "그것도 아니네. 고프레가 뭔가? 그건 보이지 않나. 맛이 나고. 그건 먹는 거 아닌가. 그건 아무것도 아니네."

  "더는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죽은 자들에게 한 잔은 남겨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네 자신을 태우게나."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누군가가 먼저 어루만졌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스미는 차고 따스함 속에 음악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이 이렇게 내 손에 있고, 이 영상이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손끝에 잡힌 치맛자락 주름이 다시 펼쳐지지 않듯 한 번 지나간 소리는 다시 오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문장, 아내가 죽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혈관 파열 이전 그가 쓴 '세상의 모든 아침'은 상실로 시작하여 음악, 예술, 사랑, 괴로움, 죽음을 펼쳐나간다. 그 속에 살랑이며 보이는 것은 말 속에 숨은 시, 소리 뒤에 감춘 삶이다. 




  알면서도 흘리는 것. 감췄다는 것을 알고도 굳이 잡지 않는 것. 심연과 망각, 흐르는 무엇. '세상의 모든 아침' 속에는 길게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음악이 잡힌다. 들리지 않는 움직임은 유리 상자 속 나비일 뿐,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차가운 유리 벽이 있다. 파스칼 키냐르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글씨를 햇빛 아래, 안갯속에, 작은 오두막 속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보는 것 이면에 흐르는, 우리의 귓바퀴를 울리는 친숙한 소리. 그리고 가끔 반짝반짝 들리는 언어의 숨결. 






 영화 속 나이 든 마랭 마레는 '모든 음은 죽어가며 끝나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일은 자연의 일이고, 어쩔 수 없이 무심한데 인간만이 그것을 붙들고 묻는다. 사랑인가? 경쟁인가? 회한인가? 무슨 의미인가? 하고. 말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마침내 귓바퀴에 닿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덧붙이고 고치고 바로잡는다. 이미 끝나버린 무언가를 다시 잡으려는 노력은, 흐르는 물줄기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안은 태생적 한계이다.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무엇. 파스칼 키냐르가 걷는 그 길의 무엇인가는 굳이 그 무엇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 제자는 구태여 묻고 스승은 답한다. 방향과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자와 그저 흐를 뿐이라고 바라보는 자의 대화. 손에서 모든 것을 스르륵,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나서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난함. 답은 질문을 전제한다. 마랭 마레의 질문을 따라가노라면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니라는 대답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음악은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음악 뒤에 숨은 문학과 예술의 그림자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랍니다. 




 

"왜 연주하시는 작품을 출판하지 않습니까?"

 "아,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작곡을 하지 않아. 난 절대 악보를 쓰지 않아. 내가 가끔 하나의 이름과 기쁨을 추억하며 지어내는 것은 물, 물풀, 쑥, 살아있는 작은 송충이 같은 헌물일세."

 "선생님의 물풀, 송충이 안에 음악이 어디 있는데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네. 내가 하는 건 어떤 공휴일도 없이 그저 내 할일을 하는 거네. 그렇게 내 운명을 완성하는 거지."




 

 영화에서는 소설 속의 낱말을 담금질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구도를 더 명확히 한다. 배우는 이의 세계를 부순 다음 다시 하나하나 채워가는 생트 콜롱브의 음악을 조용히 따라가 보노라면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나 파스칼 키냐르는 일부러 만들어진 아름다움, 작고 유쾌한 재주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예술가라는 생각이 든다. 덧붙여 영화와 소설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도 '세상의 모든 아침'앞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거란 생각도. 그러나 더 분명해지는 느낌 한자락. 파스칼 키냐르는 '말을 하고 음악을 듣는 살아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없었을 그 최초의 기억에 다다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늘 품고 있는 사람일거라는 작은 생각 조각.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나룻배마저 썩은 경계가 없는 공간. 끊어지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는 시간 속의 사람.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의 근원에 가 닿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것이 '세상의 모든 아침'을 읽고, 보고, 듣고, 사는 내게 파스칼 키냐르가 남긴 단 하나의 숙제일 것이다. 



지금 여기, 더 넓고 깊게. 




그리고 바로크 고음악이 귀 끝에 닿으면, 이제 가을. 







비올은 비올라 다 감바와 비올라 다 브리치오, 즉 다리에 끼우고 연주하는 방식과 팔로 들고 연주하는 방식에 따라 나뉘었는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는 비올라 다 감바가 유행이었다고 전한다. 르네상스, 로크 시대 악기를 재현, 연주하는 스페인 출신 고음악 연주자 Jordi Savall이 이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아 작업하였다. 그는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인 르 콩세르 드 나시옹을 만들기도하였는데, '세상의 모든 아침'에 흐르는 음악은 자신이 르 콩세르 드 나시옹과 함께한 것. 






*김현승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인용문은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 발췌.


*칼뱅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의인화된 알레고리, 트롱프뢰유와 바니타스, 혹은 포르루아얄파와 자유 사상파, 그럼에도 똑같은 사랑, 똑같은 단념, 똑같은 밤, 똑같은 추위. 파스칼 키냐르가 스치듯 배경으로 준비한 이 많은 무엇과 무엇들은,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읽으면 더 생생하거나 생경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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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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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간에도 단위가 있다면 나의 것은 종종 시계 없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리뷰 하나, 페이퍼 하나, 혹은 문자 메세지 한 통, 전화 한 통, 그리고 어떤 일의 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소와 사람이 바뀌고 그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는 길. 그것이 로드 무비였다면, 종종 그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선의 궤적이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어차피 백 년을 기본 단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라는 핑계로, 그것이 커다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현재를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없으면 이럴 수밖에.




 이러한 백 년 단위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최대의 시간, 백 년을 제목에 내세운 소설이 하나 나왔다. 바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제목과 표지에서 그 목적과 궤적을 또렷하게 밝힌 책이다. 유머가 왜 유머러스한 것인지, 이 책에서 말할 이야기가 어떤 것이 될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웃었는지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가는 길이 명확하고 인물의 표정이 또렷한 이야기. 그 명암이 워낙 확실해서 알란이라는 100세 노인이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순간 이미 이 책의 전체가 훤히 보이는 느낌이다. 이야기가 인물이 사건 속에서 일으키는 갈등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미 이 인물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그래서 그 속에서 독자의 표정과 눈꼬리가 다른 각도로 춤을 춘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갈등의 구조를 보노라면 코미디와 다큐멘터리가 만나는 지점은 늘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큐멘터리라는 직선의 선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고 한 번에 쓱 지나간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은데, 코미디의 점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촘촘하게 흩뿌려져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점을 한번에 쓱 연결하는 것으로 큰 고민 없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일군다. 하나의 축은 100세가 된 알란, 다른 축은 100세가 되기까지의 알란. 전자는 어느 순간 외친다. 나라고 태어날 때부터 100살이었는 줄 아는가! 후자는 또 외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란이 왜 도망쳤는지는 처음부터 그리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별다른 목적의식이 없었으며 목표 또한 없었다. 목표란 목적이 있어야 단짝처럼 움직이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가야 하는 길도 없다. 단지 일어날 일이 일어나니까, 따라간달까. 




 "뭐? 정말로 당신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셨소? 백 살이나 된 양반이?"

 "아니, 내가 미쳤소? 이 나이에 히말라야를 넘게? 내가 항상 이렇게 백 살이었떤 건 아니야. 백 살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지."

 "아, 그래서요?"

 "우리 모두는 자라나고 또 늙어가는 법이지." 알란은 철학자처럼 말했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책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없앤 체 움직이는 이 노인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100세가 아니었을 때, 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열 살 무렵 폭약 회사에 취직. 폭약 실험을 하다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 미국의 해리 트루먼, 중국의 마오쩌둥, 러시아의 스탈린 등을 만난다. 모든 고비는 죽을 고비였으나 인물은 캐리커처처럼 희화화된 채 남아있다. 그 생각의 깊이가 깊든 얕든 노인은 정치공학에서 나온 판단을 배제하고 순간의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이 먼지처럼 가볍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큰 틀로 준비되어 있을 뿐,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은 한없이 가볍게만 보였기 때문이라면 이는 무거움에의 예찬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바탕 실컷 웃자는 작가의 의도를 내가 잘못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밝고 가벼운 것만을 취하는 대신 어떤 것이 무슨 이유로 밝거나 어두운지를 잠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독자의 책 읽는 행위는 무조건 아름답거나 밝은 것만을 취하려는 활동이 아닌, 작가의 역량을 파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간의 말장난, 재미있는 캐리커처, 잠시 지나가는 한 톨 유머가 아닌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려낸 창작자로서의 역량이다. 기교와 재주는 그다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쓰기는 한없이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문학에서 가벼운 기쁨과 유머러스함만을 얻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 역시 문학에서 얻는 여러 가지 효용 중의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은 문학 그 자체는 될 수 없을지언정 독자의 눈에 쉽게 스미는 글쓰기의 방법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로 재미있고 쉬우며 간간이 웃기기도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별다른 저항감이 들지 않는 이야기는 이렇게 반짝, 잠시 빛나는 효용을 발휘한다. 





 이 잠시 빛나는 순간이 한국의 독자가 느끼는 유머의 구조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 잠시 의아했으나 어찌 보면 그것이 바로 핵심일 수도 있다. 명랑함에도 색채가 있다면 그것은 문화의 색채일 것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유머코드를 번쩍이는 캐릭터나 작품을 하나씩 갖고 있다. 프랑스의 아스테릭스, 미국의 아메리칸 파이, 한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캐릭터 등이 있는데 예외로 영국의 미스터 빈은 어느 나라에서 개봉하여도 인기를 누린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미스터 빈이야말로 대사가 거의 없는 코미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유머의 큰 부분은 언어와 문화에서 오는데, 그 두 가지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북유럽권 소설 '기발한 자살여행'의 경우, 핀란드 사람들은 해마다 그가 내놓는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한 신작을 기다린다지만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그에 영 못 미친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작가가 보는 세계관, 그 안에서 사건을 비틀거나 인물을 점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사회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많은 부분은 이렇게 다를 수밖에.




그런데 이 소설의 재미있는 부분은 100세 노인 알란이 주변 인물과 다르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그는 시간을 목표를 설정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보내지 않는다. 방향이 없고, 갈 길은 묘연하다. 무엇을 하여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되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 사이 하필 역사의 주요 인물을 만났다는 점 또한 다른데, 이 역시 우연한 산물이다. 인물 하나마다 챕터를 따로 만들어서 독립된 이야기로 보아도 될 만큼 파편화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렇다. 인과관계가 1:1로 성립되지도 않으며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여도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또 있어야 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지 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현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다가오는 1초 뒤의 미래, 이미 사라진 1초 전의 과거, 그 사이의 기대와 가능성, 후회 혹은 성취를 인간은 계산하고 따져보느라 현재를 누릴 수가 없다. 지금이 영원하다는 듯 귀를 펄럭거리는 이 소설 속 코끼리처럼 현재를 즐길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오로지 알란에게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바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이 재미있다고 느꼈다면 찬찬히 들여다 보라.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구석과 재미없는 모든 구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정언 명령과 도덕률에서 벗어났기에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을 느끼는 순간, 별안간 소설이 끝나버려 의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노인이 200세까지 살다가 그 해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후속편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기분도 이런 측면에서 나온 것일지도. 





알란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학교는 3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쓰기와 읽기와 셈하기를 배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치의식이 투철한 니트로글리세린사의 동료들은 그에게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알란의 인생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남편의 사망소식을 접한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그 메시지가 소년이 영혼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정착한 뒤에는 영원히 남았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자체일 뿐이란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 중 하나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적어도 타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윅스훌트의 거실에 날아들었을 때도, 알란은 가족의 전통에 따라 묵묵히 숲으로 가서 나무를 베었을 뿐이다. 물론 다른 때보다 좀 더 오래, 그리고 좀 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베었지만 말이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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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9-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따라 서재 커버글 부질없다, 실낱같다가 확 들어옵니다.
부질없고 실낱같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나날입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인데 뭣 때문에 이렇게 허덕이거나 헤매는 것일까요?
부디 에뷔테른님만은 시간에 쫓기지도, 실낱 같더라도 희망 버리지 않는 가을 꾸려가소서.
살짝 안부만 여쭈고 사라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9-14 15:2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그러셨군요!

종종 사는 것이 무척 유용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와도 같이 어느 순간 금속 접합부분이 고장나서 덜컥, 하는 순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두 시간이나 이른 점심을 먹고 마차를 고치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할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해지는 순간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덕분에 내가 저녁까지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때문에 박자가 깨어질 수도 있는 노릇인데 늘 마음에는 정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간에 쫓기지도, 희망 버리지도 않는 가을......

팜므 느와르님의 낱말이 참 곱고 예뻐서 소리내어 조용 읽어보았답니다.

고마워요, 팜므 느와르님. 많이 읽고 생각하고 꺼내어 보는 가을날 되기를 바랍니다.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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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들어봐라. 고래들은 서로 노래를 불러주고 있지. 바다 깊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무리가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거란다. 고래들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고도 한 시간 동안은 물속에 있을 수 있어 가끔가다 질식하는 일도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익사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고래들이 잘못 헤어쳐서 육지 위로 올라올 때가 있는데 고래한테는 가슴뼈가 없어서 제 무게를 못 이기고 해안가에서 질식사하기도 한단다. 무리 전체가 같이 해안가로 헤엄쳐 와서 죽는 일도 있고."

 "왜 그러는 건데요?"

 "그건 아무도 몰라. 내 생각에는 지구의 자기장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고래가 자기장을 감지하는 데 문제가 생겨서 혼란을 일으킨 게 아닐까 싶구나."

 고래의 노래가 끝났다.

 미크가 다시 버튼을 누르고는 말했다. "어쩌면 육지가 그리워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사람과 사람의 경계. 바다와 육지의 경계. 물속과 공기 중의 경계. 어디론가 가려는 나룻배의 흔적. 

 그것조차 남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건너 어느 편이 있다면, 그곳에 다다른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세상 모든 경계가, 그 선의 색채가 점점 옅어지고 흐려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었다.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그 순간은 때로는 무척 아름답고 흐릿하여 더 선명했다. 아름다운 장면이 빛나는 반짝반짝 아이의 이야기. 이를테면 박물관에서 듣는 고래의 노래. 발보다 눈이 더 시린 스웨덴의 밤하늘에 가라앉은 별. 배에 구멍 난 채 가게 안에 잠든 악어. 나무 위에 날아다니는 긴꼬리 올빼미. 그리고 흐려지는 순간에는 뗏목을 타고 급류에 휘말리는 소년. 겁먹어도 용기있는 아이. 공기 중 먼지를 응시할 줄 아 아이. 우리는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 속에 담긴 아이. 미크가 그런 아이다. 





 미크가 보는 색채는 말이 없고 소리는 파랗거나 하얬다.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아이였다. 곱고 소중한 가루를 손에 한 줌 쥔 아이. 가장 불행한 순간이 가치 있는 순간으로 자리를 마법처럼 바꾸는 순간이 있다면 그 비밀을 아는 아이. 만약 불행이 불행하고 아픔이 아프다면, 잠깐, 숨을 고르고. 상처를 없애기 전 그것이 어디 즈음 있는지를 살펴도 좋을 것이다. 불행하다 하여 감싸 안고 아프다 하여 손을 잡는 것은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결국 '행복' 내지는 '안정' 혹은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시간과 경험을 직선으로 느끼기에 순간을 살 수가 없다. 미크가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고 손을 잡으려 한다면 그것은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시선일 뿐이다. 그러나 손을 잡기 전에 옆에서 나란히 걸으면서 조용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체온을 전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만큼 단단한 아이다. 듣는 이의 고통을 말하는 자의 입술에 묻히려는 행동은 잠시 그만. 가만히 들어본다.





 "강꼬치고기 잡아본 적 있어?"

 "아뇨."

 "난 천 마리는 잡았을 거다. 콘숨의 라세랑 같이 프랑스로 수출한단다. 프랑스 사람들은 강꼬치고기의 진가를 알지. 맛이 훌륭하거든. 여기 사람들은 이제 강꼬치고기를 안 먹어."

 벵트 할아버지가 돼지고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강꼬치고기가 커요?"

 벵트 할아버지가 빈 프라이팬을 시크디에 갖다 놓았다.

 "너 나랑 같이 낚시하러 가서 고기 끌어 올리는 것 좀 도와줄래?"

 "네."

 "내일 아침 6시에 내려오너라. 옷 따뜻하게 잘 챙겨 입고."

 나가려던 미크가 문 앞에서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셀레트 호수에 고래가 한 마리 있어요."

 "고래가?"

 벵트 할아버지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래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네가 들었다는 그 소리는 얼음장 소리야. 얼음장이 생길 때 그렇게 노래를 하지. 장력 때문에 그래."

 "고래도 노래를 해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시간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였다.




 그렇지만 불행과 고통, 상처와 기다림 속에서 과연 가치와 의미가 어떤 순간에 드러날까?

 이런 의문에 종종 이 아이에게도 고개를 내미는데, 함께 생각하기 이전에 도와주고 손을 뻗는 것만이 옆에 앉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 어떤 종류의 목표와 목적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자의 관점이리라. 곧 이것은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생각이다. 이것은 신에게 호소하려는 신정론의 갈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살아있는 것이 종종 왜 아프고 고통스럽고 허탈하고 허무한지를 깨닫는 것이 괴롭지는 않다. 오히려 직선으로 나타나는 듯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처음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왜 멀어져가는지, 우리가 왜 비틀거리는지를 알아내는 과정이 더 괴로워야 한다.





 이 괴로운 과정이 이렇게까지 무섭게 느껴졌던 것은 순전히 내가 단단하지 않고 그저 딱딱하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말랑말랑한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해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늘 만났던 나도 몰랐고 모두는 알고 있었던 아이 미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아이는 곧바로 모든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아이는 사자왕의 모험에 나오는 병약한 아이이기도 했고 술주정뱅이 아빠와 언젠가부터 자신을 보살펴 주지 않는 형과 함께 살던 아이이기도 했고 흡혈귀와 관 여행을 하는 아이일 수도 있다. 





어떤 아이가 스웨덴에 살았는데......

-그 아이는 머리카락 색깔이 뭐야?

아마도 눈처럼 빛나는 색일거야.

-눈도 빛이 나?

고양이가 아니니까, 눈에선 빛이 안나와.

-엄마, 아빠는 뭘 해?

엄마 아빠는 없어. 

-그럼 형은? 동생은?

아무도 없어.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 살아?

응. 대신 고래가 노래하는 걸 들어. 

-고래와 밥을 먹어?

아니. 못된 사람들이 그 아이를 가두고 밥도 주지 않아.

-그런데 고래는 뭘 노래하지?







 



미크가 술주정뱅이 아빠와 형과 살다가 어느 순간 형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잠시 고모와 살다가 아동학대를 일삼는 가정에 위탁되고 죽을 힘을 다해 그 집에서 나왔을 때, 자신은 지옥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꼭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강해지려면 아픔과 고통이 꼭 필요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시간의 한 형태 역시 눈처럼 녹아 없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굳이 강해지기 위해 그 아픔과 고통 역시 미크가 겪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미크가 반짝인다. 바로 그 이유로 미크가 빛을 내며 생생하게 살아있다. 죽지 않고서야 누구나 겪어야 할 시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하여금 우리의 시간은 가치를 갖는다. 미크는 벼랑 끝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을 때에는 숨 한 번 잘못 쉬어도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다. 그것은 행복해야만 한다는 목적을 달성해야 이루어지는 삶도, 단계를 계단처럼 밟아야 하나씩 이루어지는 삶도 아니다. 그에게 행복은 즐거운 상태가 아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미크에게는 '기다리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겨낸 다음 소중함의 가치를 깨닫는 행위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가지 표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미크가 조금씩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분명 있다. 

고모와 함께 밤길을 걸을 때. 벵트 할아버지와 이야기할 때. 피아가 용감한 아이라고 말해줄 때. 그것은 분명 미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순간이었다. 미크를 바라보노라면 행복은 감정의 형상을 띤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춥지만 따뜻할 때. 떨어져 있지만 연결될 때. 물에 빠졌지만 숨을 쉴 때. 두려움과 기쁨, 불행과 행복, 무서움과 용기. 이렇게 짝지어 나타나는 상반된 각각의  모습이 우리가 가치 있다거나 의미 있다고 부르는 순간이 된다. 모든 벽이 허물어질 때 새로운 벽이 나타난다. 한 가지 색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삶의 다양한 순간. 괴로워서 행복하거나 불편해서 가치 있는, 감정이 아닌 존재를 깨닫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중요한 것들이 있다. 




바로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중에 내쉬는 따뜻한 숨소리를 듣는 일. 

괴로움이 가치 있는 것으로 돌변하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듣는 일.

춥고 먼 길이지만 그래서 그 자체로 빛나는 일.

읽고 나면 그 용기가 내게도 전해지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닌 아이의 이야기.



 


미크는 점점 더 따듯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기는 했지만 이상했다. 아까 점퍼도 벗어놓고 달아났는데. 밝아졌다. 빛이 보였다. 그곳에 도착한 걸까? 빛이 보여. 이제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그런데 누가 나를 끌어올렸지? 누가 내 다리를 잡아당긴 걸까?



*제목은 소설 원제.

*본문은 모두 책 인용문이며, 사진은 영화 각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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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9-0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런 소설 읽기가 두려워요.
내 마음이 글의 의도와는 아주 멀어져 폭주할 것 같거든요.

Jeanne_Hebuterne 2013-09-08 10:44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그렇지요? 저도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누군가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쉽지만은 않은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 역시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접할 때 위안과 치유를 바랄 때도 있지만 현실을 자신만의 독특한 역량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도 종종 있어요.


대상을 직시할 수도, 환원하여 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응시하였는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그려냈는가, 이런 부분을 부각시켜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는데,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무섭고 아픈 이야기이지만 작가가 하려는 말은 어쩌면 '안아주세요'가 아닌, '들여다 보아 주세요' 였던 것 같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 주말에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는 누구인가? - 카이로스의 시선으로 본 세기의 순간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정진국 옮김 / 까치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때를 기다리는 신경다발이다. 그것은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터져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기쁨이고, 춤이고, 시간이고 또 얽힌 공간이다. 그래, 그래, 그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의 결말처럼, 보는 것이 전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어떤 유명인의 초상. 그의 그림자. 지나간 세기의 시선. 35밀리 라이카 카메라. 매그넘 창시자. 포토저널리즘. 카르티에 브레송 가문. 포로생활, 아시아와 서방세계. 간디와 샤넬, 트루먼 카포티와 자코메티. 때로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필치를 작품으로 남긴다. 그들의 유명세는 벽이 되거나 성곽이 되어 길게 뻗어나가는데, 종종 그 그림자는 때로는 그 분야에 관심이 없는 이의 뇌리에까지 박혀있다. 2004년, 그의 사망 이후 지금에야 그의 종적을 더듬는 것은 너무 늦거나 빠른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의 역사가 니엡스, 다게르로부터 1800년대 초반에 대중에게 공개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오히려 재빠른 순간이기도 하다.



어떤 남자가 물웅덩이를 건너기 위해 뛰는 순간. 자전거가 계단 아래 길을 지나는 순간, 조지 6세의 대관식을 바라보던 영국 국민의 모습. 멕시코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아이. 창문 너머로 벗겨진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 서독의 사람들. 필시 전쟁에서 다리를 잃었을 남자의 걸음, 레닌그라드의 아이와 아버지. 샤넬의 담배피는 모습. 마티스의 스케치, 포크너의 시선. 자코메티의 걸음과 마르셀 뒤샹의 손길. 스트라빈스키의 얼굴 앞에 원근처럼 어우러진 손. 뉴욕의 거리, 케이프 커내버럴의 사람들. 뉴욕의 사무직 노동자의 순간, 국회의사당의 한 사람. 중국의 노동자, 인도의 간디.


이 책에는 브레송의 모든 초기 사진, 시기별로 분류된 사진, 단행본, 논문, 에세이, 사진집과 그의 데생까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시선이 담겨있다.



전설처럼 굳어진 어떤 위인을 살펴볼 때에는 살짝 시선이 굳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평가를 내리기에는 내 스스로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작가가 작품을 통해 남기려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일에 게을러선 안될 거란 생각에 이 사진집을 살피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주치게 되는 그의 시선. 신화적 인물의 등 뒤, 전설의 얼굴, 권위와 고전의 시선. 그 유명한 생 라자르 역의 물웅덩이를 건너뛰는 남자를 찍은 모습을 보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키려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렬하고 솔직하다. 그의 사진에 풍경보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생에 대한 찬가를 그가 부르고 싶었을 거란 생각도. 삶에 대한 환희와 경이가 구도와 형식의 완벽함을 타고 전해져 온다. 브레송의 손 안에 꼭 쥐어진 라이카로 표현된 황금의 수는 그가 이십대 초반 머릿속에 소중히 새겨둔 초현실주의, 데생의 섬세함, 로트의 가르침을 따른 구도의 순수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그는 유명인만큼이나 일반인의 얼굴이 더 다양하다는 말을 한 적 있다. 라이카를 들고 시장과 골목,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는 모든 것을 유심히 관찰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들이 만든 온갖 행동이 담겨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물들고 생생함과 움직임이 보인다. 워커 에반스의 말처럼,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에는 우리가 이제껏 탐험해본 적이 없는 무언가가 있다.' 에반스에게 그러했듯 브레송에게도 사진은 데생 대신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글쓰기가 아니었을까.



그의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라이카를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낸다. 어느 사회나 중심부튼 관습에 장악당한 반면, 참모습은 주변부에 드러나는 것이라는 철학을 고수한 그의 사진은 어쩌면 처음부터 늘 주변에 관심을 두는 그의 반순응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떠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현장을 지키되 그 현장 속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 시선. 그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드러난 사회는 늘 뜻밖의 얼굴을 보여준다.
만리장성이 없는 중국, 피라미드가 없는 이집트, 빅벤이 없는 영국,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프랑스가 그의 사진 속에 담겨 있다. 대신 그의 사진에는 거리, 카페, 상점,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엇갈린 시선으로 다른 곳을 향하는 전직 군인과 현직 군인의 모습을 담는다. 그 마법같은 구도를 잡기 위해 그가 생 라자르 역에서만 하루를 보내며 기다렸다는 일화가 생생하지만,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은 의도치 않은 순간 삶이 뜻밖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마법같은 황금율이다. 있어야 할 것이 당연히 나타나고 예기치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조각조각 파편화된 우연이 만나고 필연적인 스침이 생겨난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담는 시선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그가 찍은 미국은 빠르게 모든 것이 연소되는 마천루의 도시. 거대함과 폭력이 어우러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나타난다.





언젠가 보나르가 브레송에게 '왜 바로 그 순간 셔터를 눌렀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브레송이 보나르의 미완성 작품 중 하나를 가리키며 '왜 여기를 노란색으로 칠하셨나요?'라고 되물었다는 일화는 재치있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에서도 중요한 것은 시선이라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사진도 예술일까? 사진도 회화와 같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어쩌면 브레송은 피사체의 내면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삶 속에 들어가서 삶을 함께 숨쉬고 겪은 다음 다시 존재를 잊고 환경에 녹아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술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브레송의 사진은 예술의 한켠을 차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잰슨의 말에 다르면, 예술과 기술의 차이는 작품이 '왜'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판명된다.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주제, 양식은 사진을 찍는 이가 속한 세계의 안팎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주곤 한다. 탐구와 모색, 관찰과 이해. 실현과 평가. 이 모든 것을 한 장에 담으려면 피에르 아술린의 말처럼 송어의 민첩성과 궁수의 부동심을 적절히 배합해야 하는 것이다. 회화와 소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진의 영역을 바라보노라면, 사진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별함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매그넘이 있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자신이 로버트 카파, 다비드 스치민, 조지 로저, 일리엄 밴디버트와 함께 창설했다며 말년에는 비아냥거리는 편지를 보냄으로 자신의 마침표를 찍었던 매그넘. 존재하는 이야기, 우연이 아닌 필연, 전쟁동안 굶주렸던 사람들의 의문에 답할 세계의 눈. 그와 동시에 브레송은 이제 전문 사진가가 되었음을 뜻한다.



시대를 증언하되 증언에만 그치지 않는 사진, 초현실주의라는 딱지를 스스로 떼어내는 일. 그 묘한 역설을 활용하려는 태도는 브레송의 아래와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작은 차이점들이다. 일반적인 생각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작은 차이점들을 찬양했던 스탕달 만세! 1밀리미터가 바로 차이를 만들어낸다. 증거만을 얻으려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이다."






수평 공간 안에, 직각자로 잰 듯 완벽한 수직선을 이루는 두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부동자세로 멍한 시선을 하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밥그릇을 쳐다보면서 먹고 있다. ... 왼편 구석의 검은 그림자와 오른편이 문이 호응을 한다. 문 위쪽으로 상감된 두번째 사각형이 최면효과를 자아낸다. 왼편 문 너머로 텅 빈 어둠이 들여다보이는데, 열린 공간은 역사각형 형태를 이루고 있어서 멍한 시선의 중국인 사내와 대비를 이루면서 테두리를 형성한다. 사내의 부동자세와 앉아서 먹느라 여념이 없는 또 다른 사내가 호응을 한다. 앉아있는 사내는 정확하게 황금비례가 형성되는 바로 그 자리에 위치한다. 사내는 밥공기를 손에 쥐고 있다. 이는 바닥에 놓인 또다른 밥공기와 대조를 이룬다. 테 없는 검은 모자가 바로 두 밥공기 가운데서 경계를 형성한다. 조각난 그림자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선을 그으며 장면의 평온한 수평을 깨뜨린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다.
-아비그도르 아리카, 화가.






브레송의 사진은 그가 말한 여섯 범주로 나뉘어 전개된다.
르포, 주제, 구도, 색채, 테크닉, 고객.
브레송이 낸 자신의 사진집 서문을 읽어보노라면 사진에 임하는 그의 시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르포르타주란 문제를 표현하고 사건이나 인상을 고정할 목적으로 머리와 눈, 그리고 마음이 동시에 점진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나에게 사진이란,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의 대상의 의미와 또 이 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형태들의 엄정한 조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 주제란 사실들을 그저 옮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들 그 자체는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들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고, 사실의 진면목을 심오한 현실과의 연관성 속에서 포착하는 일이다. 사진에서는 아주 작은 대상도 커다란 주제가 될 수 있고, 사소한 인간적 디테일도 라이트모티프가 될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결정적 순간', 서문.





그의 사진 속에는 아시아를 신비롭게만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이 없다. 이를테면 상하이의 동맹은행 앞에서 찍은 사진에는 아래와 같은 캡션이 달렸다.



"상하이, 1948년 12월. 골드러시. 동맹은행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형성되어서 이웃 거리로까지 뻗는 바람에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밀고 당기는 소동이 벌어져서 십여 명이 사망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인당 금 40그램씩만 바꿔주기로 정했었다. 지폐를 바꿀 요량으로 24시간 이상 줄을 선 사람들도 있었다. 주변의 경찰은 15년 전부터 중국 땅에 눈독 들이던 잡다한 군대에서 차출된 인원들인 만큼, 치안은 허술했다."






삶을 담되 한박자 늦출 것. 있는 그대로를 담을 것. 황금의 수 안에서 미래주의의 역동성과 다다의 개념까지 활용할 것.

굳이 브레송이 이러한 원칙 아래 사진을 찍은 것은 아닐테지만 그의 사진 속에는 늘 이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암시적이고 은근하다. 현실의 모습을 다루되 그의 사진의 경이로움은 그가 언제나 되새김질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에서 나온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삶에 관해 진실함을 표명했다면 브레송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을 표명했으리라. 동작과 의미, 구성과 항금의 비례. 앗제와 만 레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1920년대 후반 입체주의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은 그의 사진을 보노라면, 예술가의 시선은 한 가지 성향만으로 대표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형식주의자의 시선은 이런 것이었다.






세월은 어림없이 흘러서, 오직 우리의 죽음만이 붙잡을 수 있을 따름이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바로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제목은 브레송의 사진집 제목 결정적 순간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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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8-2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봐도 좋네요. ^^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보셨군요!
브레송의 사진에는 늘 사람이 있어요. 참 좋지요?
dreamout님이 잘 보고 가셨다니 제가 다 기뻐요 :)



dreamout 2013-08-28 22:50   좋아요 0 | URL
정면 사진들이 많죠.

저는 남의 뒷통수 찍기를 좋아하는데..
그러고보면, 옛 사진가들은 참 잘 훔쳤어요. ㅎㅎ

oren 2013-08-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페이퍼에 올려주신 글로도 브레송의 사진들을 훌륭하게 감상할 수 있군요. 수많은 사진들을 손수 찍고 편집하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덕분에 좋은 사진, 좋은 글 잘 감상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올해가 로버트 카파 100주년이라면서 1년 전부터 '전시회' 준비에 골몰해 오던 친구 녀석('ㄱ신문 사진부 기자)이 '전시회 개관일에 꼭 오라'고 했던 게 벌써 한 달 전 일이네요. 개관일에 공짜로 볼 기회는 놓쳤지만, 그래도 전시회 마감 전까지는 꼭 가보겠노라 약속을 했건만 여태 꾸물거리고 있네요.ㅠㅠ
* * *
《로버트카파 100주년 사진전》2013년 8월2일~10월28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사진전을 '널리 알려달라'는 제 친구의 요청 때문에 여기에 '불법광고' 남겼음을 용서하세요..)

Jeanne_Hebuterne 2013-08-28 17:57   좋아요 0 | URL



oren님, 브레송이 찍은 사진을 저야 뭐 가장 단순작업만 하여 올렸을 뿐인걸요, 뭘.
오히려 사진이 하나같이 다 좋아 선별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습니다. 좋은 사진에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카파 전시회라니, 사진에 관해 여전히 잘 모르는 저도 솔깃해집니다. 갑자기 저도 가고싶어지는걸요! 사진을 좋아하시는, 카파를 좋아하시는 많은 분들이 가셔서 잘 보셨음 좋겠습니다 :)


그나저나 뭐하십니까! 얼른 가신 다음 후기 남기시지 않고!!!



adsl 2013-09-2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오래간만에 브레송 사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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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술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책 속에서





'내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라곤 오로지 울고 싶을 때 그 울음을 참은 것이 전부였다.'로 시작하는 산문집을 읽었다. 이 더위에, 혹은 이 추위에, 라고 슬쩍 펄펄 끓거나 얼어붙은 시간 한 톨을 붙이고 싶은 책. 

 말끝마다 싱그럽게 교화된 욕설이 따귀처럼 따라붙고 좀 억울한 표정의 글자가 헤엄치는  책.  '소설가이자 탁월한 신화학자로 잘 알려진 이윤기 선생님은 생전에 나와 마주치면 절대로 류근과는 노래방에 가지 않겠다, 라고 힘주어 결심의 일단을 외치곤 하셨다.'로 글머리를 열더니 마침내는 북방에서 온 아주머니가 어서 나가라 문 두드리고 천장엔 쥐오줌 있는 위독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래깃국도 못 먹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는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시래깃국을 못 먹어 죽을 뻔했다는 말로 들었는지 날마다 시래깃국을 주는 나날. 

 





 가난한 마음. 

 꼭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는데 그걸로 더듬더듬 밤길을 거슬러 어디론가 가는 느낌. 





 이 어둠 속 좌절과 자학의 암중모색 가운데 떠오르는 대책 없는 젊음의 이미지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했었다. 헤어짐과 실연, 게다가 헤드라이트는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 불에 차라리 타서 없어져 버리면 좋을 것 같은 집 이야기를 담은 노래 가사 같은 글귀. 라인과 공백이 어둡지 않은 리듬을 만들어주는 이 책 책장을 넘기면 내도록 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쳇말로 류 근이 그리도 매 페이지 마다 즐겨 부르는 옛 애인조차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술집 여자조차 못기다리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한탄. 세 편의 시를 썼고, 스무 통의 연애편지를 썼고, 열한 명의 애인을 만났고, 아흔 명의 애인을 떠났다는 작가가 차라리 부러워지면 지는 거란 말인가, 하는 자조. 책의 전반에 드리워진 자학의 암중모색이 가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할 때조차 우습게 일컫는 류 근의 글에는 절제, 공백, 여백, 은유, 축약이 없다. 유용하거나 즐거워야 하거나, 쾌락을 가르치거나 주거나, 혹은 이 둘을 겸하여야 하거나,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어야 한다거나, '상상력의 표현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거나,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어야 한다거나, 시는 곳 체험이거나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이거나....... 호레이스, 부알로, 시드니, 셸리, 워즈워스, 릴케, 포의 시에 관한 정의를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류 근의 시나 산문을 읽노라면 이렇게도 직설적일 수가 있다니, 하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자기풍자를 술마시듯 하는 시인의 산문은 통속적이어서 담장이 낮다. 





 소나기 전의 구름도,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가워지는 바람도, 조금씩 기우는 달도, 그의 글 속에서는 라면과 키우는 강아지와 옛날 애인이 입고 지나가던 빨간 옷으로 바뀌어 모습을 보인다.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질 지경이다. 지금 애인은 어디서 뭘 하냐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끄는 정서는, 월플라워즈의 노래에서처럼 단 하나의 헤드라이트, 혹은 파이스트의 노래에 나오는 어느 저녁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가 주는 결핍이 둘을 부른다면, 그는 차라리 셋을 외칠 사람이다. 글이 흐르는 곳과 닿는 곳은 자신이되 언어는 그 자체이길 바라는 글. 책속에는 물론 옛애인과 술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만(그냥 '애인'도 많이 등장한다), 종종 그는 언어의 그릇이 머무는 세상을 맨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언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가 곧 그 사람의 '내용'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단 두어 문장의 글을 보고도 그 사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내뱉는 말의 높이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당 인수위원회의 첫 인선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자의 '언어'를 나는 몇 번 목도한 적이 있다. 이제 그의 언어가 그 당의 입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언어가 곧 그 당의 내용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놀랍다. 국민의 수준을 딱 그 정도 언격으로 판단한 것이다.

-책 속에서





 그러니, 이러한 그릇으로 대접받는 시대에는 사금파리같이 반짝이는 것이라고 모조리 수집하려 들지 말 것. 오늘 창피하다고 내일도 계속 창피해하지 말 것. 말만 남았다 하더라도 빈말은 하지 말 것. 혼자 살든 함께 살든, 가장 혼자가 될 것. 갈 곳이 없어진 류 근이 혼자 기울이는 술잔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들먹이기 위한 술잔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추측이 판단보다 더 많은 것은, 그만큼 이 산문집의 결에 공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류 근의 산문을 읽고 나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들' 같은 메모를 남기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은 결국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핍이며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니,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늘 바뀌고 지금도 바뀌고 앞으로도 바뀔 것인데, 그 사이 빙점을 마침표로 잘못 읽는 것은 읽는 자의 착각이다. 그 끝도 없는 자유에서 울 수도 없을 때 하필 류 근의 이런 글이 나타난다.





 불안을 극복하고, 공포를 극복하고 오늘날 바야흐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람들 보면 킥, 웃음이 난다. 우울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날마다 바야흐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 보면 캑, 목이 막힌다.

 그들이 극복한 것은 불안도 공포도 우울도 절망도 뭣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가벼운 핑계들을 잠시 알고 있었을 뿐이다. 가벼운 느낌들을 잠시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불안과 공포, 우울과 절망 같은 것들은 극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불안을 느끼는 것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다르다. 공포를 느끼는 것과 공포를 깨닫는 것은 다르다. 

 우울과 절망이 느낌이라면 그것은 곧 지나간다. 하지만 불안을, 공포를, 우울을, 절망을 깨달아버린 거라면 그것들은 절대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불안과 공포, 진정한 우울과 절망은 깨달음의 세계다. 가벼운 느낌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한 번 깨달은 것이 무슨 수로 극복될 수 있겠는가.

 극복된 깨달음은 가짜다.

-책 속에서.




 그렇단 말이지, 하고 읽고 있는데 저 말끝에 앙큼한 한 마디가 따라붙는다. '사랑도 그와 같다, 시바.' 그러니까 책 앞머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온 문구, '이 책에 표기된 비속어, 문법 파괴 등의 표현은 원문을 쓸 당시의 격렬한 파토스와 문맥을 살리기 위해 저자와의 협의 아래 최소한의 범위에서 의도적으로 허용한 것임을 밝힙니다.'라는 글귀는 그러니까 '지나친 흡연은 폐암의 위험을 가져오며......'와도 같은 경고 문구였다. 마침 따라붙은 된소리가 제거된 욕설에서 시인이 표현하고 싶었던, 원문을 쓸 당시의 격한 파토스와 글의 결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일이 멀리 떨어지면서 비극이 되어가는 과정. 수족관에 들어간 물고기가 자신은 원래 더 깊고 넓은 물속에 있어야 했다는 것을 잊는 나날. 열차 안에서 태어나서 땅을 밟아본 적 없는 트레인 베이비가 흙을 만지는 역설. 





 그리운 것이 무어 그리 많은지,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 무엇 그리 많은지 '추억의 힘과 그리움의 힘은 같은 높이의 음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내 노래는 언제나 길 없는 허공에 발이 묶인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음계의 색상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이 직접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높낮이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그 열망의 정도일 뿐 그 정확도의 깊이는 아닐 것이다. 상처와 허무, 절망과 헤어짐, 그 사이를 연애와 담배와 술과 부조리로 가득 채우는 류 근의 시는 아마 앞으로도 작가의 바람처럼, 지붕이 낮을 것 같다. 높고 차갑고 엄정한 음계 가운데, 이렇게 하나 정도 속된 낮은 양철 지붕 하나 정도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저녁, 까닭없이 무엇이 불쑥 떠오를 때.







*제목은 책 끝에 실린 시 제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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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8-19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왔는데 바로 이 리뷰를 보게 되다니.
김광석의 저 노래 가사만으로도 마음이 무장해제되는데, 그 가사를 쓴 사람의 책을 통째로 읽으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부제의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라는 문장을 보니, 맞다,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면 다 그런거지, 라는 생각에 오히려 위안을 받아요. 그러면서 다 살아가는거지 라고 생각하먄서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는데 그럼 아마 저를 에뷔테른님 따라쟁이라고 놀리시지 않을까...^^

Jeanne_Hebuterne 2013-08-23 08:33   좋아요 0 | URL
hnine님, 저는 김광석을 잘 알지 못했지만, 류 근에 관해서는 통속시인이라고 부르는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저자의 다양한 경험도 신기한듯 하였고, 글도 접근하기 쉬웠던 것 같아요. 이 책은 일정 기간, 지면 발표하지 않은 그의 개인적인 글모음이라 깔끔하게 정리된 맛은 없지만 어떤 이의 수첩을 몰래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주 깊숙하지도, 내밀하지도 않지만 이런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페이지마다 (옛)애인이 끈질기게 등장하여 이 사람의 머리는 엄청난 구심력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요.

한마디로, 달 보며 함께 술마시기 좋은 책이었어요.

덧-저야말로 hnine님 따라쟁이인데요! 그보다는 풴 정도인지도!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