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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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간에도 단위가 있다면 나의 것은 종종 시계 없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리뷰 하나, 페이퍼 하나, 혹은 문자 메세지 한 통, 전화 한 통, 그리고 어떤 일의 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장소와 사람이 바뀌고 그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는 길. 그것이 로드 무비였다면, 종종 그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선의 궤적이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어차피 백 년을 기본 단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라는 핑계로, 그것이 커다란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현재를 온전히 내 것으로 할 수 없으면 이럴 수밖에.




 이러한 백 년 단위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최대의 시간, 백 년을 제목에 내세운 소설이 하나 나왔다. 바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제목과 표지에서 그 목적과 궤적을 또렷하게 밝힌 책이다. 유머가 왜 유머러스한 것인지, 이 책에서 말할 이야기가 어떤 것이 될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웃었는지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가는 길이 명확하고 인물의 표정이 또렷한 이야기. 그 명암이 워낙 확실해서 알란이라는 100세 노인이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는 순간 이미 이 책의 전체가 훤히 보이는 느낌이다. 이야기가 인물이 사건 속에서 일으키는 갈등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미 이 인물 속에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그래서 그 속에서 독자의 표정과 눈꼬리가 다른 각도로 춤을 춘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갈등의 구조를 보노라면 코미디와 다큐멘터리가 만나는 지점은 늘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큐멘터리라는 직선의 선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고 한 번에 쓱 지나간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은데, 코미디의 점이 과거와 현재, 미래에 촘촘하게 흩뿌려져 있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점을 한번에 쓱 연결하는 것으로 큰 고민 없이 이야기의 큰 축을 일군다. 하나의 축은 100세가 된 알란, 다른 축은 100세가 되기까지의 알란. 전자는 어느 순간 외친다. 나라고 태어날 때부터 100살이었는 줄 아는가! 후자는 또 외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란이 왜 도망쳤는지는 처음부터 그리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별다른 목적의식이 없었으며 목표 또한 없었다. 목표란 목적이 있어야 단짝처럼 움직이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가야 하는 길도 없다. 단지 일어날 일이 일어나니까, 따라간달까. 




 "뭐? 정말로 당신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셨소? 백 살이나 된 양반이?"

 "아니, 내가 미쳤소? 이 나이에 히말라야를 넘게? 내가 항상 이렇게 백 살이었떤 건 아니야. 백 살이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지."

 "아, 그래서요?"

 "우리 모두는 자라나고 또 늙어가는 법이지." 알란은 철학자처럼 말했다. "어렸을 때는 자기가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해......"

-책 속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없앤 체 움직이는 이 노인의 길을 따라가노라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떠오른다. 100세가 아니었을 때, 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열 살 무렵 폭약 회사에 취직. 폭약 실험을 하다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 미국의 해리 트루먼, 중국의 마오쩌둥, 러시아의 스탈린 등을 만난다. 모든 고비는 죽을 고비였으나 인물은 캐리커처처럼 희화화된 채 남아있다. 그 생각의 깊이가 깊든 얕든 노인은 정치공학에서 나온 판단을 배제하고 순간의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이 모든 것이 먼지처럼 가볍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큰 틀로 준비되어 있을 뿐,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은 한없이 가볍게만 보였기 때문이라면 이는 무거움에의 예찬일지도 모른다. 또한, 한바탕 실컷 웃자는 작가의 의도를 내가 잘못 받아들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밝고 가벼운 것만을 취하는 대신 어떤 것이 무슨 이유로 밝거나 어두운지를 잠시 생각해 보아도 그것이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독자의 책 읽는 행위는 무조건 아름답거나 밝은 것만을 취하려는 활동이 아닌, 작가의 역량을 파악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간의 말장난, 재미있는 캐리커처, 잠시 지나가는 한 톨 유머가 아닌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려낸 창작자로서의 역량이다. 기교와 재주는 그다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쓰기는 한없이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문학에서 가벼운 기쁨과 유머러스함만을 얻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 역시 문학에서 얻는 여러 가지 효용 중의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요나스 요나손의 글은 문학 그 자체는 될 수 없을지언정 독자의 눈에 쉽게 스미는 글쓰기의 방법을 아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로 재미있고 쉬우며 간간이 웃기기도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별다른 저항감이 들지 않는 이야기는 이렇게 반짝, 잠시 빛나는 효용을 발휘한다. 





 이 잠시 빛나는 순간이 한국의 독자가 느끼는 유머의 구조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 잠시 의아했으나 어찌 보면 그것이 바로 핵심일 수도 있다. 명랑함에도 색채가 있다면 그것은 문화의 색채일 것이다. 나라마다 고유한 유머코드를 번쩍이는 캐릭터나 작품을 하나씩 갖고 있다. 프랑스의 아스테릭스, 미국의 아메리칸 파이, 한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의 캐릭터 등이 있는데 예외로 영국의 미스터 빈은 어느 나라에서 개봉하여도 인기를 누린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미스터 빈이야말로 대사가 거의 없는 코미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유머의 큰 부분은 언어와 문화에서 오는데, 그 두 가지를 전제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또 다른 북유럽권 소설 '기발한 자살여행'의 경우, 핀란드 사람들은 해마다 그가 내놓는 유머러스하면서도 기발한 신작을 기다린다지만 한국에서 그의 인기는 그에 영 못 미친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작가가 보는 세계관, 그 안에서 사건을 비틀거나 인물을 점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사회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많은 부분은 이렇게 다를 수밖에.




그런데 이 소설의 재미있는 부분은 100세 노인 알란이 주변 인물과 다르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그는 시간을 목표를 설정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일로 보내지 않는다. 방향이 없고, 갈 길은 묘연하다. 무엇을 하여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되는 대로,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 사이 하필 역사의 주요 인물을 만났다는 점 또한 다른데, 이 역시 우연한 산물이다. 인물 하나마다 챕터를 따로 만들어서 독립된 이야기로 보아도 될 만큼 파편화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렇다. 인과관계가 1:1로 성립되지도 않으며 목표와 가치를 추구하여도 그것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또 있어야 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지 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현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다가오는 1초 뒤의 미래, 이미 사라진 1초 전의 과거, 그 사이의 기대와 가능성, 후회 혹은 성취를 인간은 계산하고 따져보느라 현재를 누릴 수가 없다. 지금이 영원하다는 듯 귀를 펄럭거리는 이 소설 속 코끼리처럼 현재를 즐길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오로지 알란에게만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작가가 의도한 바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노인이 재미있다고 느꼈다면 찬찬히 들여다 보라. 이 이야기의 재미있는 구석과 재미없는 모든 구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정언 명령과 도덕률에서 벗어났기에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을 느끼는 순간, 별안간 소설이 끝나버려 의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노인이 200세까지 살다가 그 해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후속편이 나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기분도 이런 측면에서 나온 것일지도. 





알란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학교는 3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쓰기와 읽기와 셈하기를 배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치의식이 투철한 니트로글리세린사의 동료들은 그에게 세상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알란의 인생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남편의 사망소식을 접한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그 메시지가 소년이 영혼에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정착한 뒤에는 영원히 남았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자체일 뿐이란다.>

이 말에 내포된 의미 중 하나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적어도 타당한 이유 없이는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윅스훌트의 거실에 날아들었을 때도, 알란은 가족의 전통에 따라 묵묵히 숲으로 가서 나무를 베었을 뿐이다. 물론 다른 때보다 좀 더 오래, 그리고 좀 더 무거운 침묵 속에서 베었지만 말이다.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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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9-12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따라 서재 커버글 부질없다, 실낱같다가 확 들어옵니다.
부질없고 실낱같다는 걸 알면서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는 나날입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인데 뭣 때문에 이렇게 허덕이거나 헤매는 것일까요?
부디 에뷔테른님만은 시간에 쫓기지도, 실낱 같더라도 희망 버리지 않는 가을 꾸려가소서.
살짝 안부만 여쭈고 사라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9-14 15:29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그러셨군요!

종종 사는 것이 무척 유용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시골길을 달리는 마차와도 같이 어느 순간 금속 접합부분이 고장나서 덜컥, 하는 순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두 시간이나 이른 점심을 먹고 마차를 고치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할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해지는 순간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덕분에 내가 저녁까지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그 두 시간 이른 점심 때문에 박자가 깨어질 수도 있는 노릇인데 늘 마음에는 정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간에 쫓기지도, 희망 버리지도 않는 가을......

팜므 느와르님의 낱말이 참 곱고 예뻐서 소리내어 조용 읽어보았답니다.

고마워요, 팜므 느와르님. 많이 읽고 생각하고 꺼내어 보는 가을날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