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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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들어봐라. 고래들은 서로 노래를 불러주고 있지. 바다 깊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무리가 흩어지지 않게 유지하는 거란다. 고래들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고도 한 시간 동안은 물속에 있을 수 있어 가끔가다 질식하는 일도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익사하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고래들이 잘못 헤어쳐서 육지 위로 올라올 때가 있는데 고래한테는 가슴뼈가 없어서 제 무게를 못 이기고 해안가에서 질식사하기도 한단다. 무리 전체가 같이 해안가로 헤엄쳐 와서 죽는 일도 있고."

 "왜 그러는 건데요?"

 "그건 아무도 몰라. 내 생각에는 지구의 자기장을 나침반으로 이용하는 고래가 자기장을 감지하는 데 문제가 생겨서 혼란을 일으킨 게 아닐까 싶구나."

 고래의 노래가 끝났다.

 미크가 다시 버튼을 누르고는 말했다. "어쩌면 육지가 그리워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사람과 사람의 경계. 바다와 육지의 경계. 물속과 공기 중의 경계. 어디론가 가려는 나룻배의 흔적. 

 그것조차 남지 않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저 건너 어느 편이 있다면, 그곳에 다다른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세상 모든 경계가, 그 선의 색채가 점점 옅어지고 흐려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었다.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속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그 순간은 때로는 무척 아름답고 흐릿하여 더 선명했다. 아름다운 장면이 빛나는 반짝반짝 아이의 이야기. 이를테면 박물관에서 듣는 고래의 노래. 발보다 눈이 더 시린 스웨덴의 밤하늘에 가라앉은 별. 배에 구멍 난 채 가게 안에 잠든 악어. 나무 위에 날아다니는 긴꼬리 올빼미. 그리고 흐려지는 순간에는 뗏목을 타고 급류에 휘말리는 소년. 겁먹어도 용기있는 아이. 공기 중 먼지를 응시할 줄 아 아이. 우리는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보고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 속에 담긴 아이. 미크가 그런 아이다. 





 미크가 보는 색채는 말이 없고 소리는 파랗거나 하얬다.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아이였다. 곱고 소중한 가루를 손에 한 줌 쥔 아이. 가장 불행한 순간이 가치 있는 순간으로 자리를 마법처럼 바꾸는 순간이 있다면 그 비밀을 아는 아이. 만약 불행이 불행하고 아픔이 아프다면, 잠깐, 숨을 고르고. 상처를 없애기 전 그것이 어디 즈음 있는지를 살펴도 좋을 것이다. 불행하다 하여 감싸 안고 아프다 하여 손을 잡는 것은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결국 '행복' 내지는 '안정' 혹은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현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시간과 경험을 직선으로 느끼기에 순간을 살 수가 없다. 미크가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고 손을 잡으려 한다면 그것은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시선일 뿐이다. 그러나 손을 잡기 전에 옆에서 나란히 걸으면서 조용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체온을 전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만큼 단단한 아이다. 듣는 이의 고통을 말하는 자의 입술에 묻히려는 행동은 잠시 그만. 가만히 들어본다.





 "강꼬치고기 잡아본 적 있어?"

 "아뇨."

 "난 천 마리는 잡았을 거다. 콘숨의 라세랑 같이 프랑스로 수출한단다. 프랑스 사람들은 강꼬치고기의 진가를 알지. 맛이 훌륭하거든. 여기 사람들은 이제 강꼬치고기를 안 먹어."

 벵트 할아버지가 돼지고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강꼬치고기가 커요?"

 벵트 할아버지가 빈 프라이팬을 시크디에 갖다 놓았다.

 "너 나랑 같이 낚시하러 가서 고기 끌어 올리는 것 좀 도와줄래?"

 "네."

 "내일 아침 6시에 내려오너라. 옷 따뜻하게 잘 챙겨 입고."

 나가려던 미크가 문 앞에서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셀레트 호수에 고래가 한 마리 있어요."

 "고래가?"

 벵트 할아버지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래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네가 들었다는 그 소리는 얼음장 소리야. 얼음장이 생길 때 그렇게 노래를 하지. 장력 때문에 그래."

 "고래도 노래를 해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시간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였다.




 그렇지만 불행과 고통, 상처와 기다림 속에서 과연 가치와 의미가 어떤 순간에 드러날까?

 이런 의문에 종종 이 아이에게도 고개를 내미는데, 함께 생각하기 이전에 도와주고 손을 뻗는 것만이 옆에 앉은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 어떤 종류의 목표와 목적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자의 관점이리라. 곧 이것은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생각이다. 이것은 신에게 호소하려는 신정론의 갈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살아있는 것이 종종 왜 아프고 고통스럽고 허탈하고 허무한지를 깨닫는 것이 괴롭지는 않다. 오히려 직선으로 나타나는 듯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처음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왜 멀어져가는지, 우리가 왜 비틀거리는지를 알아내는 과정이 더 괴로워야 한다.





 이 괴로운 과정이 이렇게까지 무섭게 느껴졌던 것은 순전히 내가 단단하지 않고 그저 딱딱하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말랑말랑한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해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늘 만났던 나도 몰랐고 모두는 알고 있었던 아이 미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 아이는 곧바로 모든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아이는 사자왕의 모험에 나오는 병약한 아이이기도 했고 술주정뱅이 아빠와 언젠가부터 자신을 보살펴 주지 않는 형과 함께 살던 아이이기도 했고 흡혈귀와 관 여행을 하는 아이일 수도 있다. 





어떤 아이가 스웨덴에 살았는데......

-그 아이는 머리카락 색깔이 뭐야?

아마도 눈처럼 빛나는 색일거야.

-눈도 빛이 나?

고양이가 아니니까, 눈에선 빛이 안나와.

-엄마, 아빠는 뭘 해?

엄마 아빠는 없어. 

-그럼 형은? 동생은?

아무도 없어.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 살아?

응. 대신 고래가 노래하는 걸 들어. 

-고래와 밥을 먹어?

아니. 못된 사람들이 그 아이를 가두고 밥도 주지 않아.

-그런데 고래는 뭘 노래하지?







 



미크가 술주정뱅이 아빠와 형과 살다가 어느 순간 형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잠시 고모와 살다가 아동학대를 일삼는 가정에 위탁되고 죽을 힘을 다해 그 집에서 나왔을 때, 자신은 지옥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꼭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강해지려면 아픔과 고통이 꼭 필요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모두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시간의 한 형태 역시 눈처럼 녹아 없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굳이 강해지기 위해 그 아픔과 고통 역시 미크가 겪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미크가 반짝인다. 바로 그 이유로 미크가 빛을 내며 생생하게 살아있다. 죽지 않고서야 누구나 겪어야 할 시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하여금 우리의 시간은 가치를 갖는다. 미크는 벼랑 끝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을 때에는 숨 한 번 잘못 쉬어도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다. 그것은 행복해야만 한다는 목적을 달성해야 이루어지는 삶도, 단계를 계단처럼 밟아야 하나씩 이루어지는 삶도 아니다. 그에게 행복은 즐거운 상태가 아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미크에게는 '기다리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겨낸 다음 소중함의 가치를 깨닫는 행위였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한가지 표정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미크가 조금씩 행복을 느끼는 순간도 분명 있다. 

고모와 함께 밤길을 걸을 때. 벵트 할아버지와 이야기할 때. 피아가 용감한 아이라고 말해줄 때. 그것은 분명 미크가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순간이었다. 미크를 바라보노라면 행복은 감정의 형상을 띤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행복은 존재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춥지만 따뜻할 때. 떨어져 있지만 연결될 때. 물에 빠졌지만 숨을 쉴 때. 두려움과 기쁨, 불행과 행복, 무서움과 용기. 이렇게 짝지어 나타나는 상반된 각각의  모습이 우리가 가치 있다거나 의미 있다고 부르는 순간이 된다. 모든 벽이 허물어질 때 새로운 벽이 나타난다. 한 가지 색깔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삶의 다양한 순간. 괴로워서 행복하거나 불편해서 가치 있는, 감정이 아닌 존재를 깨닫는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중요한 것들이 있다. 




바로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중에 내쉬는 따뜻한 숨소리를 듣는 일. 

괴로움이 가치 있는 것으로 돌변하는 마술 같은 이야기를 듣는 일.

춥고 먼 길이지만 그래서 그 자체로 빛나는 일.

읽고 나면 그 용기가 내게도 전해지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닌 아이의 이야기.



 


미크는 점점 더 따듯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기는 했지만 이상했다. 아까 점퍼도 벗어놓고 달아났는데. 밝아졌다. 빛이 보였다. 그곳에 도착한 걸까? 빛이 보여. 이제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그런데 누가 나를 끌어올렸지? 누가 내 다리를 잡아당긴 걸까?



*제목은 소설 원제.

*본문은 모두 책 인용문이며, 사진은 영화 각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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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9-0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이런 소설 읽기가 두려워요.
내 마음이 글의 의도와는 아주 멀어져 폭주할 것 같거든요.

Jeanne_Hebuterne 2013-09-08 10:44   좋아요 0 | URL



dreamout님, 그렇지요? 저도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누군가의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쉽지만은 않은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 역시 예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접할 때 위안과 치유를 바랄 때도 있지만 현실을 자신만의 독특한 역량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도 종종 있어요.


대상을 직시할 수도, 환원하여 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응시하였는가,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그려냈는가, 이런 부분을 부각시켜 보아야 하는 작품이 있는데,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무섭고 아픈 이야기이지만 작가가 하려는 말은 어쩌면 '안아주세요'가 아닌, '들여다 보아 주세요' 였던 것 같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 주말에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