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
류근 지음 / 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술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 하였다. 

-책 속에서





'내가 세상에 와서 한 일이라곤 오로지 울고 싶을 때 그 울음을 참은 것이 전부였다.'로 시작하는 산문집을 읽었다. 이 더위에, 혹은 이 추위에, 라고 슬쩍 펄펄 끓거나 얼어붙은 시간 한 톨을 붙이고 싶은 책. 

 말끝마다 싱그럽게 교화된 욕설이 따귀처럼 따라붙고 좀 억울한 표정의 글자가 헤엄치는  책.  '소설가이자 탁월한 신화학자로 잘 알려진 이윤기 선생님은 생전에 나와 마주치면 절대로 류근과는 노래방에 가지 않겠다, 라고 힘주어 결심의 일단을 외치곤 하셨다.'로 글머리를 열더니 마침내는 북방에서 온 아주머니가 어서 나가라 문 두드리고 천장엔 쥐오줌 있는 위독한 풍경이 펼쳐진다. 시래깃국도 못 먹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는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시래깃국을 못 먹어 죽을 뻔했다는 말로 들었는지 날마다 시래깃국을 주는 나날. 

 





 가난한 마음. 

 꼭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는데 그걸로 더듬더듬 밤길을 거슬러 어디론가 가는 느낌. 





 이 어둠 속 좌절과 자학의 암중모색 가운데 떠오르는 대책 없는 젊음의 이미지를 어쩌면 좋을까, 생각했었다. 헤어짐과 실연, 게다가 헤드라이트는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 불에 차라리 타서 없어져 버리면 좋을 것 같은 집 이야기를 담은 노래 가사 같은 글귀. 라인과 공백이 어둡지 않은 리듬을 만들어주는 이 책 책장을 넘기면 내도록 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쳇말로 류 근이 그리도 매 페이지 마다 즐겨 부르는 옛 애인조차 없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술집 여자조차 못기다리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한탄. 세 편의 시를 썼고, 스무 통의 연애편지를 썼고, 열한 명의 애인을 만났고, 아흔 명의 애인을 떠났다는 작가가 차라리 부러워지면 지는 거란 말인가, 하는 자조. 책의 전반에 드리워진 자학의 암중모색이 가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할 때조차 우습게 일컫는 류 근의 글에는 절제, 공백, 여백, 은유, 축약이 없다. 유용하거나 즐거워야 하거나, 쾌락을 가르치거나 주거나, 혹은 이 둘을 겸하여야 하거나,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가진 말하는 그림이어야 한다거나, '상상력의 표현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한다거나, 감정의 자생적인 분출이어야 한다거나, 시는 곳 체험이거나 아름다움의 운율적 창조이거나....... 호레이스, 부알로, 시드니, 셸리, 워즈워스, 릴케, 포의 시에 관한 정의를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류 근의 시나 산문을 읽노라면 이렇게도 직설적일 수가 있다니, 하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자기풍자를 술마시듯 하는 시인의 산문은 통속적이어서 담장이 낮다. 





 소나기 전의 구름도,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가워지는 바람도, 조금씩 기우는 달도, 그의 글 속에서는 라면과 키우는 강아지와 옛날 애인이 입고 지나가던 빨간 옷으로 바뀌어 모습을 보인다. 이쯤 되면 묻고 싶어질 지경이다. 지금 애인은 어디서 뭘 하냐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끄는 정서는, 월플라워즈의 노래에서처럼 단 하나의 헤드라이트, 혹은 파이스트의 노래에 나오는 어느 저녁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가 주는 결핍이 둘을 부른다면, 그는 차라리 셋을 외칠 사람이다. 글이 흐르는 곳과 닿는 곳은 자신이되 언어는 그 자체이길 바라는 글. 책속에는 물론 옛애인과 술이 가장 많이 등장하지만(그냥 '애인'도 많이 등장한다), 종종 그는 언어의 그릇이 머무는 세상을 맨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언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가 곧 그 사람의 '내용'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단 두어 문장의 글을 보고도 그 사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그가 내뱉는 말의 높이에 따라 그 사람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당 인수위원회의 첫 인선의 수석 대변인이라는 자의 '언어'를 나는 몇 번 목도한 적이 있다. 이제 그의 언어가 그 당의 입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언어가 곧 그 당의 내용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놀랍다. 국민의 수준을 딱 그 정도 언격으로 판단한 것이다.

-책 속에서





 그러니, 이러한 그릇으로 대접받는 시대에는 사금파리같이 반짝이는 것이라고 모조리 수집하려 들지 말 것. 오늘 창피하다고 내일도 계속 창피해하지 말 것. 말만 남았다 하더라도 빈말은 하지 말 것. 혼자 살든 함께 살든, 가장 혼자가 될 것. 갈 곳이 없어진 류 근이 혼자 기울이는 술잔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들먹이기 위한 술잔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추측이 판단보다 더 많은 것은, 그만큼 이 산문집의 결에 공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류 근의 산문을 읽고 나면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들' 같은 메모를 남기지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은 결국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핍이며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니,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늘 바뀌고 지금도 바뀌고 앞으로도 바뀔 것인데, 그 사이 빙점을 마침표로 잘못 읽는 것은 읽는 자의 착각이다. 그 끝도 없는 자유에서 울 수도 없을 때 하필 류 근의 이런 글이 나타난다.





 불안을 극복하고, 공포를 극복하고 오늘날 바야흐로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람들 보면 킥, 웃음이 난다. 우울을 극복하고, 절망을 극복하고 날마다 바야흐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 보면 캑, 목이 막힌다.

 그들이 극복한 것은 불안도 공포도 우울도 절망도 뭣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가벼운 핑계들을 잠시 알고 있었을 뿐이다. 가벼운 느낌들을 잠시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불안과 공포, 우울과 절망 같은 것들은 극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불안을 느끼는 것과 불안을 깨닫는 것은 다르다. 공포를 느끼는 것과 공포를 깨닫는 것은 다르다. 

 우울과 절망이 느낌이라면 그것은 곧 지나간다. 하지만 불안을, 공포를, 우울을, 절망을 깨달아버린 거라면 그것들은 절대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불안과 공포, 진정한 우울과 절망은 깨달음의 세계다. 가벼운 느낌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한 번 깨달은 것이 무슨 수로 극복될 수 있겠는가.

 극복된 깨달음은 가짜다.

-책 속에서.




 그렇단 말이지, 하고 읽고 있는데 저 말끝에 앙큼한 한 마디가 따라붙는다. '사랑도 그와 같다, 시바.' 그러니까 책 앞머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나온 문구, '이 책에 표기된 비속어, 문법 파괴 등의 표현은 원문을 쓸 당시의 격렬한 파토스와 문맥을 살리기 위해 저자와의 협의 아래 최소한의 범위에서 의도적으로 허용한 것임을 밝힙니다.'라는 글귀는 그러니까 '지나친 흡연은 폐암의 위험을 가져오며......'와도 같은 경고 문구였다. 마침 따라붙은 된소리가 제거된 욕설에서 시인이 표현하고 싶었던, 원문을 쓸 당시의 격한 파토스와 글의 결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일이 멀리 떨어지면서 비극이 되어가는 과정. 수족관에 들어간 물고기가 자신은 원래 더 깊고 넓은 물속에 있어야 했다는 것을 잊는 나날. 열차 안에서 태어나서 땅을 밟아본 적 없는 트레인 베이비가 흙을 만지는 역설. 





 그리운 것이 무어 그리 많은지, 추억으로 간직할 것이 무엇 그리 많은지 '추억의 힘과 그리움의 힘은 같은 높이의 음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내 노래는 언제나 길 없는 허공에 발이 묶인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음계의 색상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이 직접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높낮이일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은, 그 열망의 정도일 뿐 그 정확도의 깊이는 아닐 것이다. 상처와 허무, 절망과 헤어짐, 그 사이를 연애와 담배와 술과 부조리로 가득 채우는 류 근의 시는 아마 앞으로도 작가의 바람처럼, 지붕이 낮을 것 같다. 높고 차갑고 엄정한 음계 가운데, 이렇게 하나 정도 속된 낮은 양철 지붕 하나 정도를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저녁, 까닭없이 무엇이 불쑥 떠오를 때.







*제목은 책 끝에 실린 시 제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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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8-19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왔는데 바로 이 리뷰를 보게 되다니.
김광석의 저 노래 가사만으로도 마음이 무장해제되는데, 그 가사를 쓴 사람의 책을 통째로 읽으면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부제의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그대에게라는 문장을 보니, 맞다, 외롭고 슬프고 고단한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면 다 그런거지, 라는 생각에 오히려 위안을 받아요. 그러면서 다 살아가는거지 라고 생각하먄서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는데 그럼 아마 저를 에뷔테른님 따라쟁이라고 놀리시지 않을까...^^

Jeanne_Hebuterne 2013-08-23 08:33   좋아요 0 | URL
hnine님, 저는 김광석을 잘 알지 못했지만, 류 근에 관해서는 통속시인이라고 부르는 말들을 많이 들었어요. 저자의 다양한 경험도 신기한듯 하였고, 글도 접근하기 쉬웠던 것 같아요. 이 책은 일정 기간, 지면 발표하지 않은 그의 개인적인 글모음이라 깔끔하게 정리된 맛은 없지만 어떤 이의 수첩을 몰래 들여다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주 깊숙하지도, 내밀하지도 않지만 이런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페이지마다 (옛)애인이 끈질기게 등장하여 이 사람의 머리는 엄청난 구심력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요.

한마디로, 달 보며 함께 술마시기 좋은 책이었어요.

덧-저야말로 hnine님 따라쟁이인데요! 그보다는 풴 정도인지도! 히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