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런던에 나가 N이 이사하는 걸 도와줌. 무거운 짐가방 중 무거운 걸 내가 날랐다. 새로 이사 간 곳은 방이 세 개, 거실이 하나, 욕실이 하나, 부엌이 하나다. N은 집 치우는 것도 도와달라 했지만 손대기 시작하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일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

나: 이봐,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있고 네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있어. 집 청소는 너가 해야 할 일이야.
(내 속마음: 이봐, 내 시간은 공공재가 아니라구. 그리고 내가 호의를 베풀었는데 상대가 그걸 이용해 먹는다고 느끼게 되면 기분 참 더러워 지지.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라는 거 알아?)

칼같이 자르고(혹은 쿨하게 잘라 말하고) 학교로 갔다. 무의식적으로 도서관 서가로 가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요하킴의 "지성개선론" 주석서, 비트겐슈타인이 럿셀 등에게 보낸 편지 모음, 비트겐슈타인의 일기(철학 노트가 아닌 진짜 일기), 그리고 푸트남의 논문집. 이렇게 남독으로 가면 안되는데, 서가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일은 이렇게 되게끔 되어 있었다...

카페 쇼파에 기대 앉아 비트겐슈타인의 일기를 빠르게 훑어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위대한 철학자일까?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으로 심오해서? 혹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아니면 성인, 혹은 현인에 가까와서? 이 마지막 사항은 비트겐슈타인에게 해당이 없는 것 같더라. 비트겐슈타인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일기에서 느낄 수 있는 건, 혼자 사는 남자의 고독, 그러니까 사막과 비슷한 어떤 것이었으니까...

푸트남의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갔다. "분석적인 것과 종합적인 것"이란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논문을 스피노자의 주석서로 읽는다. 다시 말하면, 나는 R과 아프리오리/아포스테리오리에 대해 토론한 결과로 이 주제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R과 만나는 걸 피해 왔다. 이번 주 내내 나는 R에게 문자 한 통 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다 어제 우연히 R을 학생 카페에서 만났던 것. 그 만남은 결국 푸트남, 그리고 다음엔 물론 콰인으로 이어질 것이다.)

도서관에서 푸트남을 읽다가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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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2-10-2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행복이란 기분 어떤지 잘 알것 같네요. 그게 왜 한국에선 어려운지!!

+ 근데 정말 런던피플은 성격이 다른가요? ㅋㅋ 다들 런던피플 성격 거지같다고 ㅋㅋ

weekly 2012-10-22 06:4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핫하,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회든 경제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자기만족처럼 보이는 일에 시간과 돈을 쏟아 넣는 것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한국은 그에 대한 압박이 좀 더 심하고, 영국은 좀 더 관대한 것 같지만, 제가 느끼는 행복감의 배경은, 여기가 영국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동네 사람들 등의 시선과 압박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 크겠죠...^^

음... 제가 아직 영국 친구가 하나도 없고, 영국 사람들과 많은 접촉이 있는 것도 아니라, 객관적인 척 하고 잘 모르겠다고 해버리면 세상 너무 재미없게 사는 거겠죠?^^ 스페인 친구들이 영국 날씨와 영국 사람들 성격을 싸잡아 비판하는 건 많이 봤습니다. 내성적이고 사귀기 힘들고, 차갑고, 술 들어가기 전과 후의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하다는 거죠. 제 개인적 경험으로 봐도 영국 사람들과 접촉하는 게 제일 힘듭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저는 제 영어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영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들은 상대의 영어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대화를 나누고 친분을 나누려고 합니다. 영국 사람들이 이런 데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 사람들 끼리도 서로 관계를 맺는 데 힘들어 한다는 건 영국 사람들 스스로 인정하는 바이구요. 또, 온세계가 다 영어를 들고 말을 걸어 오는 상황에서 영국 사람들이 영국 밖의 세계에 무관심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능한 것 같습니다. 제 친구는 영국인들과 일하는데, 평소에는 찬바람이 쌩쌩 돌다가, 어떤 화제에 대해 우연히 얘기를 나누게 되면 참 친절하고 얘기도 잘한다는 군요. 그래서 서로 친했졌나 하고 생각하면, 또 어느날 갑자기 찬바람이 쌩쌩 돌고...^^ 문화적인 차이가 크겠지만 우리 기준에서 보면 사귀기 힘든 사람들인 것은 맞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성격 드럽다고 소문나는 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런 백인네들만 보다가 펍 입구에서 쫄딱거리며 먼저 말 걸어오고 한국 잘 안다며 희죽희죽 웃어주는 흑인 친구들 보면 정말 귀엽고 정감이 가지요. 스킨쉽이 저절로 될 정도로~^^

Forgettable. 2012-10-22 10:27   좋아요 0 | URL
한국이 아니라서가 정답인듯. 요즘 또 떠나고 싶어서요.

런던이 특히 심한 것 같더라구요. 친구도 많이 사귀신 것 같아서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ㅋㅋ 제 친구는 영국 시골에서 왔는데 제가 런던사람 캐릭터 물어보니 뭐 한국의 서울 사람들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 편견은 어떤 책에서 런던피플을 마구잡이로 욕해놓은 것을 보고 진짜인가 호기심이 동했던 거였거든요. ㅋㅋㅋ 여튼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한 주 시작 잘 하세욤! 일기(?)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weekly 2012-10-2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은... 친구 몇 명 사귀지도 못했는데 글로 써놓고 보니 풍성해 보이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혹시 의도한 거?)^^ 저에게 공정하게 말하자면 제가 친구 만드는 데 별 열의를 보이지 않는 이유도 있을 거 같기는 합니다(영국 놈스러운 건가?^^).

엊그제 런던 동부쪽, 베스날 그린, 헤크니 이런 동네에서 놀았는데 그 동네는 분위기가 참 다르더라구요. 특히 베스날 그린 쪽은 영국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소도시를 연상케 하더군요. 헤크니의 한 가게에서 커피랑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를 먹는데, 가게 밖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던 할아버지에게 퉁퉁한 흑인 아낙이 다가와 뭐라 한 마디 하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씨유 레이아" 하고 가는데,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정겨운 풍경을 보는 듯 했습니다. 반면 역근처 펍 앞에서는 백인 청년들 너댓이 모여 간헐적으로 큰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놀래키고 있더군요. 제가 보기엔, 유색 인종들아, 너그들 머릿수를 암만 늘린들 여기 영국은 우리 땅이야! 하고 시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너그들 말이 맞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죠. 저야 단지 여행객일 뿐이지만, 헤크니의 퉁퉁한 흑인 아주머니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한 주 되세요~^^
 

D2에 관한 짧은 보고문을 만듦.

N과 집을 보러감. BBC 드라마 이스트엔더스와 똑같이 생긴 동네였음. N은 흥분해서 1 분만에 계약하기로 결정함. 나는 너무 빠른 결정이라며 계속 우려를 표함.

N: 내 직관이 행복해해.
나: 난 내 직관을 믿지 않아. 여자들이라면 경우가 다를 수 있겠지만...
N: 너 섹시스트야?
나: 헐~

R과 만나 아프리오리 논증의 증명력과  아포스테리오리 논증의 증명력 등에 대해 토론함. 잠정적인 결론은 아프리오리/아포스테리오리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 예를 들면, 에티카 제1부 공리 6. 참인 관념은 자신의 대상과 일치한다, 는 아프리오리한가? 

(나는 무엇보다도 스피노자의 방법론에 관심이 많다. 엊그제 학교 도서관 서가를 처음으로 돌아보았다. 그동안 일부러 접근하지 않았었다. 사고 싶었던, 그러나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이라 속만 태우던, 요하킴의 "지성개선론 연구"가 거기 놓여 있었다. 아름답게 퇴락한 그 책을 집어 들고 냄새만 잠깐 음미하다 책장에 도로 끼워 넣었다. 주제를 넓히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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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많이 했다.
오늘 한 것 중 가장 의미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옹호한 것. 텍스트 지원이 가능한지 검토할 것.

(N네 집주인이 일요일까지 방을 빼라 했다 한다.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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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공부.

영어 공부. 별 것 없음. 유튭에서 이러저러한 대담 동영상 틀어놓고 뒤따라 읽기함. 유튭에 자막 기능이 있지만 이걸 켜놓고 있으면 뒤따라 읽기에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게 신기함.

에티카. 설사 스피노자가 틀렸을 때라도 그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철학 일반에 해당하는 말.

강의 예습. 점점 게을러 지고 있다. 

R에게 메일. R은 불어 원어민이라 먀슐레의 책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을 자신의 논거로 삼는다.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지만 내가 핀트를 벗어났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나는 마슐레를 읽을 수 없으므로.

오바마-롬니의 두번째 토론을 봄. 첫번째 토론은 절반 정도 보았고 이번 것은 끝까지 다 보았다. 이번 토론은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라이브로 방송한 대통령 선거 토론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드라마틱했다. 오바마가 처음부터 거칠고 단호하게 밀어부쳤다. 시민들이 질문하고 후보들이 대답을 하는데, 질문자들이 그 답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없다는 점이 재미있더라.

에머데일이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는데 40주년 기념이라며 오늘 라이브 방송을 했다. 피쉬 앤 칲스 사러 가느라 첫 10분 밖에는 보지 못했다. 영국에는 50년 넘게 방송하고 있는 드라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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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음. 기차 삯이 너무 비싸서 이틀 정도 런던에 나가지 않으면 책 한권 값이 나올 정도다. 책값을 벌고 있다.-.-
영어 공부 함.
에티카. 꼼꼼하게 읽고 있음. 스피노자에 대해 내가 할 말이 많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됨.

(에릭 슈미트가 대학에 초청 받아가서 대학생들과 대화하는 동영상을 봤다(College Tour- Eric Schmidt Google로 유튭 검색). 네덜란드인 듯. 손님을 데려다 놓고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가 연출됨. 예를 들면, 구글은 자기네 서비스가 공짜라고 광고하고 있지만 사실은 뒤에서 개인 정보 장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는, 에릭 슈미트를 우스꽝스럽게 캐리컬쳐한 애니매이션을 틀어줌. 엊그제 본 한국 대학생들과의 대화와 많이 비교가 되었다. 물론, 행사의 기획이 다르고 한국과 네덜란드의 문화가 다르므로 동일 평면에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국과 네덜란드가 자신들의 사회에서 대학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에릭 슈미트가 고등학생들과 대화를 하였더라도 한국 대학생들과의 대화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라마다 대학에 대한, 대학의 사명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이며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을 긍정할 수 없다. 각 나라의 대학이 주로 젊은 세대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은 말이다. 한국의 대학도 대학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충족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쉽게 인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대학의 현 상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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