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책을 한권씩 아작 아작 씹어먹는 꿈을 꾸지만, 저녁녁에는 그저 그런 현실을 받아들고 집으로 향할 뿐이다.

이동 중에 요하킴의 지성개선론 해설서를 읽는다. 책의 장정, 딱딱하고 두껍고 색이 바랜 책장, 그 안에 담긴 명료하고 단아한 문장까지, 난 요하킴의 책을 사랑한다. 갖고 싶다. 복사본 말고, PDF 파일 말고, 하드 커버의 단단하고 단아한 바로 이 책을 갖고 싶다. 아마존에서 180 파운드에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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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이 좋은 에스프레소 카페를 알려 주었다. 아무 생각없이 첫 모금을 넘기다가 감탄사를 떠뜨렸다. "여기가 이 근방에서 최고로 에스프레소를 잘 뽑는 데야. 내가 널 여기 데려온 이유이기도 하지." R은 지난 주에 다른 학교에서 들었던 에티카 강의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제2부 명제7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카페에 앉아 이 문제에 대해 같이 토론했고, 추워서 자리에서 일어설 즈음에는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R이 토론 내용을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줄 것을 부탁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내용을 정리하고 나니 모든 게 명확해 보였다. 스피노자가 명제7을 증명하는데 공리6을 이용하지 않고 공리4를 이용한 이유는? 즉, 공리6은 무엇을 하는 것이고, 공리4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모든 게 너무 당연해 보여서 에티카의 이해에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감흥마저 사라져 버렸다. 도서관을 나서서 비가 간간히 뿌리는 가운데 우산도 받쳐 들지 않고 지하철역 몇 개를 지나쳐 걸었다. 오늘의 감흥이라면 단연코 그 에스프레소 가게야...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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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맘 먹은 대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위에서 Strictly English라는 책을 읽고 오전에 비비씨를 보고, 오후에 장보러 다니고... 그러다 보니 지난 주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일요일이 지나갔다.

원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해 온 것들 평가해 보고, 해야 할 것들 계획해 보고, 마음만 급해 하느라 오랫 동안 메일을 드리지 못했던 분들께 메일 드리고, 영어 공부 좀 하고, 폴더에 뒤죽박죽으로 쌓여 있는 pdf  파일들 정리하고... -이 마지막 것만 했다. 

원래 내가 의도했던 것은, 현재 내가 코를 박고 있는 일에서 거리를 두고, 내가 어디쯤 와 있나 돌이켜 보고, 그렇게 코를 박고 있느라 신경쓰지 못했던 분들을 돌아다 보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었을 거다. 온전한 하루, 아니면 반나절 동안, 지금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서 떠나 보는 것,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유튭에서 진중권과 간결이라는 사람의 토론 동영상을 보았다. 재미있었다. 간결이 자신의 주장에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는 모습이 도드라졌지만, 그런 것은 토론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판단은 제삼자인 시청자가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던 것 같다.

아마 누구라도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비판할 수 있으리라. 사유와 연장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실체라면 둘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을까? 만일 어떤 사람이 사유가 양자역학적 뒷구멍을 통해 물리 세계의 법칙들을 간섭하지 않으면서 연장과 상호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려 한다면, 누구라도 "그거 억지같은데..."라고 짧고 정당한 비판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혹은 그 후계자)가 옳고 틀리고가 아닐 것이다. 비판자로서의 내가 옳고 틀리고가 아닐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세계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게다. 데카르트의 경우라면, 우주에서 물리 법칙이 관철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하는 심오한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내게는 이런 것이 진정으로 의미있고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극장과 현실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진중권과 간결의 토론,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분명 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보인다. 현실은 훨씬 풍요롭고 다채롭다. 예컨대, 두 가지 논점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면, 두 논점 모두 비판점을 갖고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두 논점이 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논점을 빠르게 각하해 버리는 것도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빠름이 우리의 명민한 시민적 판단력을 보증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빠름이 깊이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스티브 잡스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제품을 만들고자 하느냐고. 스티브 잡스의 대답은, 시장에 혁신을 가지고 오는, 경쟁자보다 몇 년 앞선... 따위의 수식어를 달고 있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아, 물론 스티브 잡스는 수사법의 대가이고, 타고난 장사꾼이고... 다 맞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러한 표면에 집중하여 스티브 잡스의 말에 귀를 빌려준 것이라면, 그건 정말 시간 낭비다. 그런 거 집어내려고 진중권-간결의 토론회를 봤다면, 그런 정도 비판을 하려고 데카르트를 읽는다면, 그런 것은 다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정치적 논점에 대한 판단 기준을 스티브 잡스식으로 말한다면, 예컨대, 어떤 판단이 나의 자식에게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판단하라! 그리고 책임지라!) 그리고, 예를 들어, 어떤 철학적 논제를 앞에 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로 이끌 수 있는 문제로, 그 논제 자체를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일 게다.

그것이 극장의 일인지 현실의 일인지를 가르는 것은 나의 실존성이다. 그것이 나와 관련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극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나는 빠른 판단을 하고 극장을 나서면 그만이다. 만일 그것이 나와 관련 있는 일이라면, 그러한 일에는 오히려 신중한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일에 대해 우리는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체적이란, 내 스스로 판단한다는 뜻이 아니라, 나와의 관련성 아래서, 나의 가치의 연결망 아래서 판단한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극장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우리는 실존 안에 존재하든지, 그냥 무로 남아있든지이다. 지나치게 살벌한 조건이다. 우리가 실존의 무게로 무너지지 않도록 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 바로 유머와 웃음이리라. 물론, 자연의 선물에 냉소는 들어가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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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도서관에서 심리 철학 개론서를 읽음. 개론서는 일종의 지도와 같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목적지가 섰을 때만 유용하다.   

앞으로 일요일에는 철학 공부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렇게 마음 먹고 보니 오늘까지 매듭지어 놓아야 할 부분은 계속 붙들고 있게 되더라. 방금 전에 해야 할 것을 다 했다. 이제 자도 되고 놀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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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에서 중고로 주문한 심리 철학 교재가 왔다. 큰 판형, 작은 활자, 이단 편집의 논문 모음집이다. N이 학교 앞 서점에서 산 것보다 10 파운드 이상 싸게 샀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강의가 절반 가까이 진행된 지금에야 책을 받긴 했다.)

도서관에서 종일 논문집을 읽었다. 저녁을 먹으러 잠깐 학생 카페에 간 것 빼고는 도서관에서 살았다. 맥긴의 논문에 비평을 달다가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굉장히 큰 테마이기 때문에 내가 심리 철학에서 해 낼 수 있는 사고는 다 이 아이디어에 기반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몇 칠 전 박사전과정 학생을 만났을 때다.
그: 네 관심 주제가 뭐야?
R: 얘는 비트겐슈타인에 관심이 있어.
나: 스피노자도. 근데 오늘은 입 다물고 있을래. 저번에 알렉스 만났을 때 내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못했잖아...-.-
그: 비트겐슈타인과 스피노자라... 전혀 다른 부류의 철학자들이네?
나: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Two jews!
그리고 우리는 웃었다. 

오늘 내가 얻은 아이디어는 스피노자와 비트겐슈타인의 교집합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그 교집합에 주의를 두고 있긴 했다. 내가 이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불과 몇 시간 전이다. 내일 해가 뜨면 어떨까? 적어도 하루는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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