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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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전'은 영어로 'classic(클래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고전은 재미없으나 읽어야 하는 지루한 책' 정도로만 생각되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 유명한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을 때에도 1권까지는 그럭저럭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을 뿐 2권을 넘어가자 배경 지식이 부족한 덕분에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그냥 읽어가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그냥 읽었을 뿐이지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고문(古典文學)'이 나에겐 '고문(拷問)'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나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고 고전의 매력을 알려 준 책은 다름아닌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고전이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인지 알게 되었다. 살짝 맛만 본 것인데도 그 강렬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클래식이란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나의 눈에 띈 두 번째 고전강의가 바로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이다. 이 책은 '고전'이란 무엇인지, '클래식'의 어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부터 친절하게 설명해 주며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저명한 저자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른 이들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나에게 지식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고전을 비롯한 심도 깊은 강의는 시작부터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마미치'의 강의는 시작부터 나를 후욱 빨려들어가게 만들어 주었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래는 '함대'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에서 파생된 형용사라고 그는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한다. 클래식이 고전이란 의미로 굳어진 이면에 담긴 설명만으로도 그의 수업은 쉽고 친절하다는 인상을 준다. 쉽고 친절한 강의는 학습자의 학구열을 높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작한 그의 강의는 바로 단테의 수업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단테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울퉁불퉁한 길을 비로 쓸고 다져준다. 행여나 단테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길이라는 과정 때문에 사그라지들 않도록 도와주는 듯하다. 단테를 천국으로 이끌어주는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처럼 저자는 우리에게 단테라는 여정의 길잡이가 되기를 자청한다. 

저자는 단테가 모범으로 삼은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가 모범으로 삼은  호메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당황하고 헤매지 않도록 시작부터 차근차근 짚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테를 공부하고자 한 나는 예기치 않게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의 내용까지 덤으로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단테로 다가가는 오르막이 턱없이 높게 여겨지거나 힘들게 생각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수월한 여정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단테의 신곡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희망을 버려야만 들어설 수 있는 지옥편을 설명하면서 지옥은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는 그 순간이 바로 생지옥이란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옥문에 쓰인 비문을 읽어주며 단순이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되새겨야 할 의미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지옥문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게 만드는 말 한 마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 하나가 바로 지옥문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혹여 '나'가 다른 이의 지옥문이 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일침을 놓기에 이른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나를 다그치거나 비난하기보다 바른 길을 가게끔 이끌어주고자 하는 그의 선의가 충고에 대한 나의 반감을 없애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단계적으로 나뉜 지옥의 구조 또한 흥미진진하다. 불륜의 죄보다 폭식의 죄가 더 크다는 부분에선 왜 슬며시 웃음마저 나오는 것인지. 식탐이 가득한 나를 돌아보며 미소지어본다.-고전을 읽으며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괜히 내가 더 지적인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달까? 왜 대부분의 학자들이 '단테'의 '지옥편'을 예찬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연옥편'과 '천국편' 또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알찬 내용으로 가득하다.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가혹하고, 천국으로 보내기에는 부족한 이들이 머무르는 '연옥편'에서 만나는 이들의 모습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성찰하게 만든다. 참혹한 지옥편의 모습은 절대자의 가혹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따른 벌을 보여줌으로서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그의 가르침도 새롭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이 가장 뛰어나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마미치'는 "단테의 신곡은 '천국편'을 위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런 그의 확신에 힘입은 덕분이겠지만 '천국편'의 내용은 신비롭고 역동적이었다. 단순히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만족할 수 있는 방탕함이 만연한 곳이 아니라 새로운 빛과 사랑으로 충만한 천국의 모습은 지루하게 느껴지는 곳이 아니었다. 또한, 천국에 도달했다고 안심하기보다 지옥과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 평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 또한 생각할 수 있었다. 나만의 안위를 생각하기보다 인류의 행복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일 테니 말이다.  

'단테'의 <신곡>은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가라고 어처구니 없이 알고 있던 나에게 이 책은 단비와 같았다. 인문고전이 이렇게 재미있구나라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벅찬데 단테의 신곡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다니...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책장을 덮은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릴 정도이다. 이러한 길잡이만 있다면 고전에 한 애정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만 같다. 이러한 강의를 직접 들은 이들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간간이 이 글의 저자가 이탈리아어로 낭송해주는 신곡의 구절을 듣지 못한 것이 이렇게 애석할 수가 없다. 울림이 아름다운 이탈리어로 직접 낭송하는 원문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조만간 나도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하여 큰맘 먹고 구입한 책인데 읽고 난 지금 저 가격이 너무나 가볍다고 느껴진다. 다들 '이마미치'가 쓴 <단테 '신곡' 강의>에 빠져보는 행운을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덧붙이는 말로 성급하긴 하나 올해 읽은 책 중에 단연 1위로는 '단테 신곡 강의'를, 2위는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3위는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를 4위로는 <리스본행 야간열차1,2>를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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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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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의 용도가 무엇인지 확인할 시간조차 없는 바쁜 9월이었다. 보름 동안을 정신없이 살아 온 때문인지 나에겐 9월이 이미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말이다.-보름을 한 달 처럼 살아버린 것이 시간을 번 것일까 시간을 잃어버린 것일까?- 갑자기 몰려오는 일거리에 허덕거리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새로 나온 책이 있나 없나 알라딘을 흘끔거렸던 자투리 시간 덕분이었던 것 같다. 책 제목을 눈으로 낚는 것은 나에겐 산책과 같은 휴식이나 다름없다. 그러다 익숙한 작가의 책을 발견하면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장바구니에 가득 담고, 반값에 나온 책들도 우선 담고 보는지라 여전히 책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쌓이는 책을 보며 사람들은 한심한 듯, 안쓰러운 듯 바라보다가도 말로는 좋은 책 추천 좀 해 달란다. 그게 인사치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진정으로 책을 빌려달라고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앞으로 이런 책들을 이고지고, 또 이사를 해야 할 형편을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한데 어째 버리는 책보다 사들이는 책이 많은 것인지. 인생에는 분명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모양이다. 이래선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순간 말이다. 그렇게 이 책도 내 수중으로 들어왔다. 

  책과의 만남에도 때가 있다더니 이런 바쁜 와중에 내게 읽힌 '설계자들'과의 만남 역시 예사롭지만은 않다. 솔직히 제목이 아닌 작가의 이름을 보고 신간인데도 망설임없이 구매한 책이다. 그러나 도착한 책을 보고 처음에는 화들짝 놀랐고, 두 번째는 어이가 없었으며, 세 번째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분명 '김연수'인 줄 알고 샀는데 '김언수'가 아닌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남'이 된다더니 점 하나 빠진 것이 이렇게 새로운 사건을 일으키다니... 사람은 정녕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이기적인 멍충이. 그렇지만 이러한 어리석음 덕분에 새로운 작가와 또다시 안면을 튼다. 예정에 없던 만남이고 그만큼 삶이 더 복잡해지긴 할 테지만 세상은 그런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기 마련이니 이 만남을 후회하진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캐비닛'의 명성을 익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책을 아직 읽지 않은 것은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때가 무르익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러나 만날 인연은 만나게 마련인지 이 책은 나의 실수를 가장하며, 우연을 연기하며 내 앞에 등장했다.  

  서론이 길었다. 여튼 결론만 말한다면 이 만남은 아주 신선했다. 꼭 피가 낭자한 한 편의 느와르 영화를 감상한 듯한데 어째 끈끈하고 음산한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을 설계한다는 명목하에 온갖 일을 자행하는 설계자들과 그들의 장기말처럼 온갖 일을 자행하는 청부살인업자, 평범한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그들로 인해 영문을 모르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영문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평범한 사람들(나를 포함하여) 때문에 이렇게 어이없고도 끔찍한 사건이 자행된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난 실제 세상을 허구화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일까? 자신이 겪어보지 못했다고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란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하긴 보았다고 해도 보려고 하지 않는 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처럼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이 '설명해 주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은 설명을 해 줘도 모르기' 마련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은 저 윗대가리들 탓이라고 소리높여 투덜거렸던 나에게 작가가 한 말이 뜨끔하게 들린다. 

   
  p299 "세상이 왜 이 모양인 줄 알아? 너구리 영감과 한자 같은 악인 때문에? 그들에게 청부 일거리를 주는 권력의 배후 때문에? 아니야. 악인 몇 명이 세상을 어찌할 순 없어. 세상이 이 모양인 건 우리가 너무 얌전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당신 같은 체념주의자들 때문이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 쿨한 척 말하면 멋있니? 너구리 영감이나 한자 밑에선 찍소리도 못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착하게 고분고분하게 살면서, 결국 제 밥그릇 챙길 걱정밖에 못하는 당신 같은 인간이 술자리에선 뭘 다 안다는 듯 욕하고 투덜거리기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인 거야. 당신은 한자보다 더 역겨운 인간이야. 당신은 한자를 너무나 유명한 악인으로 만들면서 자기는 여전히 한자보다 나은 인간이라고 믿고 싶은 거지. 결국엔 할 짓 못할 짓 다 하면서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당신보다는 차라리 한자가 더 나아. 적어도 한자는 욕이라도 실컷 얻어먹고 있으니까."   
   

  세상이 선과 악처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진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예전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신이 악을 만들 이유가 없듯 선을 만들었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그렇게 나누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다른 사람을 악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을 욕하는 나는 악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악인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 다 나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는데 난 그걸 항상 잊는다. 아니 잊고 싶어하고 정말 잊어간다. 아마 한동안 이 충격을 간직하지 않는 한 계속 잊고 살아갈 것이다. '의아한 북극곰(p352)'처럼 말이다. 

  '김언수'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해 본다. 그의 글이 그래서 쪼금 마음에 든다. 그런데 사실은 그의 소설보다 그의 후기가 더 마음에 든다. 다양한 종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숲 속에서 단지 같이 서 있는 것만으로 숲의 일원이 된 듯하여 혼자 울었다는 그가 온마음으로 이해가 된다. 나도 꼭 숲에 서 있는 듯 하여 더욱 찡하다. 느낌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싶어 당장 아무 숲이나 달려가고 싶을 정도인데 도시의 밤이 너무 환하기만 하다. 사람을 사랑할 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그의 말을 되새기며 도시의 가로등을, 주변의 타인들을 숲 속의 다양한 나무인 양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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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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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교본이라 할 만하다. '김화성'의 <책에 취해 놀다>라는 책에 인용된 구절에 끌려 구입한 책인데 참으로 읽을 만한 책이다. 책의 덩굴에 엮인 또 하나의 물건. 막연히 글이란 것이 쓰고 싶었던 나에겐 구체적인 행동지침처럼 여겨진다. 글에서 선택해야 하는 낱단어에서부터 불필요한 표현과 문장, 단락의 흐름까지.  

"글을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죠? "라는 질문에 "자아~알."이라는 대답을 해야 했고, 그 대답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막막하고 허탈한 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여 주며 연필을 쥐어주는 책이다. 누군가는 평생 글쓰기를 한다고 해도 재능이 없는 사람을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한 거만한 작가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흥분했던 것은 아마 그 말이 사실이라고 나 역시 몸 속 깊은 곳에서 인정했기 때문일 게다. 또한 거만한 작가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비난을 퍼부을 수 있었ㅇ르 망정 비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거만한 작가의 놀라운 글발을 외면하고 폄하할 수 었었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던 얄미운 진리가 이대도록 원망스럽다니...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왠지 나도 무엇인가를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도 괜찮지 않은가!  

안정효의 말처럼 걸작을 쓰겠다는 오만과 자학만 버린다면 산고에 빗대어지는 글쓰기의 고통도 나름 즐길만 하겠다 싶다. 마음에 실낱같은 용기는 생겼고, 이젠 연필을 집어들기까지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우유부단한 나 같으니라고 마지막으로 자학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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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시간여행 1~10권 세트 / 양장 - magic tree house
비룡소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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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사지 마세요.ㅜㅜ 아가에게 사주려고 '파도야 놀자'를 고르려다 비룡소 세트가 있어서 덜컥 믿고 사버렸네요. 그런데 낚인 기분이 뭉텅 들어요. 만약 오프라인에서 보고 살 수 있었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책이에요. 파도야 놀자는 색감도 내용도 너무 맘에 들었는데 나머지는 외국 그림 중에 좀 지저분한 느낌이 드는 그림들과 너무 단순한 것들이네요. 왜 묶음으로 파는지 이해가 됐다고나 할까요? 여튼 혹 이걸 장바구니에 담으실 분은 함 더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글치만 '파도야 놀자'는 정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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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 범우문고 173
데카르트 지음, 김진욱 옮김 / 범우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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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부터 무수히 들어왔던 데카르트. 그의 책을 이제야 접한다. 얇은 문고본이라 가볍에 집어들긴 했으나 철학자라는 타이틀이 나의 손을 떨리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학교에서 배울 때가 아니라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에 이르러서이다. 아무리 이것저것을 의심해 보더라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의심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라던가?  '소피의 세계'라든가 '드림 위버'와 같은 책으로 인해-난 후자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심심치 않게 철학을 접해 본 다음이기에 이 책도 집어들 수 있었다.  

여튼 읽은 소감을 말하라면? 만족이다. 방법서설은 그야말로 데카르트의 저서의 앞 부분에 서문으로 쓴 내용이다. 이 짧은 부분의 내용으로도 데카르트의 소심한(?) 귀여움이 엿보여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물론 나의 이해력이 맞다면 말이지만.  

다만 말의 앞뒤가 맞지 않은 번역은 너무 아쉬운 점이다. 2002년에 초판이 나오고 벌써 2판 1쇄에 접어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번역은 전혀 수정되지 않은 모양이다. 누구누구처럼 번역의 허술함을 비판하며 선뜻 원서를 집어들 만한 실력이 있다면 걱정이 없겠으나 영어 실력이 워낙 미천한지라 새로운 번역서가 나오길 기다릴 뿐이다. 다른 책에서 '범우사'에서 나온 '방법서설'을 추천받은지라 이 책을 읽긴 했는데 다른 출판사의 번역은 어떤지 모르는 일이긴 하다. 조만간 제대로 된 번역본을 발견한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데카르트는 자기가 기존에 받아들인 모든 지식을 소멸시킨 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지식의 토대로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떨치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을 권하는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덧붙인다. 

 
p19 "그렇지만 여행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 나중에는 자신의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얼마나 재치있는 답변인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는 우리들조차 떠돌이로만 살아간다면 우리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집시처럼 방랑하며 사는 것을 원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지만 여행과 이방인의 관계를 저렇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의 파급 효과를 보고 책의 출판을 망설이는 데카르트의 모습은 인간적인 면이 물씬 느껴진다. 게다가 토련이라는 방식을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진리를 뭔가 하나라고 발견했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그의 용감한 발언을 보고 있으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진리를 얻는 데는 무엇보다 본인의 노력과 탐구만한 것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에 기인한 생각일 터이다.  

   
  "호기심이나 지식욕 때문에 도와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서는 지원자는 대개 자신이 실행할 수 없는 약속을 하고,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할 훌륭한 제안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수로 반드시 몇 가지 어려운 문제의 설명리라든가, 적어도 인사치레나 쓸데없는 대화를 요구해 오며, 이 때문에 낭비되는 시간은 결코 적은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실제적인 답변인가. 어설픈 호의는 서로에게 해가 될 뿐이니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경우에만 덤비자는 말 아니던가. 역시 의욕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게다가 그는 어설픈 도움보다는 학문을 하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경제적 지원이나 해 주라고 충고를 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악평만은 모면하자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박장대소가 터질 지경이다.  

번역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점에서 이 책을 읽게 된 걸 후회하진 않는다. 다들 데카르트의 생각을 살짝 엿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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