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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ㅣ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읽을 책이 쌓여 간다. 2014년 5월은 내가 거침없이 책을 사는 날들의 연속이다. 6월부터는 도서정가제가 실시된다는 소문과 50% 세일이라는 것이 사라진다는 풍문에 세일이라는 말만 눈에 띄면 무턱대고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보여 할인폭이 적은 신간인데도 불구하고 구입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소설보다 산문이 더 따뜻한 작가, 아까운 사탕을 먹듯이 차분차분 핥아야 하는데 마음이 성급해져서 손에서 놓치를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쌓여있는 책 쪽으로 연신 눈이 간다. 읽고 있는 책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읽어야 할 책에 연신 곁눈질을 하느라 바쁘다고나 할까? 김연수 작가는 '오직 한 권의 책'이라고 했는데 곁눈질 하느라 한 권의 책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일단은 훑어보고 다시 읽어보리라 마음 한켠으로는 생각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 역시 글쎄올시다라는 마음이다.
나는 김연수의 글이 참 마음에 든다. 우연히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직접 만나니 더 좋아졌다. 사람의 좋고 싫음은 희안하게도 몇 마디 말이 오가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껴진다. 작가는 나를 모르겠지만 그런 작가를 나는 한없이 가깝게 느끼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들어온 책 속의 구절.
p33 저는 사람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라서 누가 저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걸 잘 견디지 못하거든요.
나도 그런데... 나역시 객관화가 잘 안 되는 사람이다. "너 그럴 것 같더라"나 "이거 너 스타일이지?"라는 말이 나는 제일 싫다. 아니 두렵고 부끄럽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듯 하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누군가가 단정짓듯이 말하는 것이 싫다.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을 남들이 더 잘 파악할 수도 있는데 그걸 인정하기가 싫은 유치한 마음. 난 너희들이 보듯이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할 만큼 간단한 인간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은 좁은 마음의 표현. 나의 유치한 마음을 누군가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간증을 들은 신자처럼 반갑기만 하다.
p61 나는 뭔가를 제멋대로 착각하게 되면 거짓도 충분히 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62 우리가 믿는 것들은 대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환상일 가능성이 많다.
여러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김연수 작가의 생각을 빌리자면 나는 생각만 하고 글을 쓰지는 않고 있으니 결국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으면 글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임에도 글로 쓰는 순간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우리의 무지와 오해가 엄청난 세상을 만들 수도 있구나라는 놀라운 깨달음.
p73 처음에 글쓰기는 한탄보다는 경이에 가까웠어요. 그건 아마도 내가 처음부터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없이 글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게는 한탄이 허용되지 않았어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한탄을 한다. 한탄을 하기 전에 일단 뭐라도 써 보라는 작가의 말에 얼마 동안 피곤한 몸을 이끌고 뭔가를 끄적여 보던 때도 있었는데 한 달을 가지 못했다. 쓰고 싶은 열망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고로 나의 쓰고 싶은 열망의 크기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제 함부로 쓰고 싶다고 얘기하지 못하게 됐달까? 그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나의 능력없음을 한탄하곤 했는데 원래부터 없던 것이라면 한탄할 필요가 없다는 작가의 말을 듣는 순간 죽비로 등짝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한탄할 단계조차 아니었구나.'
p180 C.S 루이스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 신기해요. 독서는 혼자서만 할 수밖에 없는데, 정작 책을 읽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사람과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결국 책을 읽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들었다. 공감하기 위해서, 위로받기 위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생각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하기 위해서 나는 책을 보고 있구나라고 이제야 생각해 본다.
p191 어쩌면 지는 꽃을 바라보는 일은 피는 꽃을 한 번 더 바라보는 일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 내년이면 나는 또 어떤 '낙안성도 낙화소식'에 귀가 뚫릴는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귀를 닫는 일. 요즘의 내가 그렇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교의 폭과 생각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일정한 시기가 지나자 많은 이들과 주고 받는 감정을 갈무리하기가 무서워져 나를 유폐시키기 시작했다. 일정한 범주를 벗어나는 만남은 제한하고 뒷걸음치기, 나와 무관한 일에는 발을 담그지 않기. 왜냐 하면 진폭이 넓은 나의 감정이 상처받을까 봐서. 그런데 세상 그 어느 일도 나와 무관한 일은 없다라는 사실을 요즘 들어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무.섭.다.
"저건 왜 저래?"라고 욕하면서, 비판하면서 바라보던 일들이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나니 마음이 스산하다 못해 저릿저릿하기까지 하다. 하긴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꽃이 피는 모습까지 떠올리려니 마음이 어찌 무사하겠는가. 피는 꽃과 지는 꽃이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나 역시 피는 꽃인 동시에 지는 꽃임을 알게 되니 말이다.
p202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김애란의 후기 중에서)
난 연예인이 부럽다. 물론 그들의 미모와 유명세와 재력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부러운 것은 그들이 연기하는 삶이다. 주어진 삶의 궤도 안에서 공식적으로 이탈할 수 있는 직업의 축복이라니... 연기 속에서 그들은 살인자로도, 불륜의 대상으로도,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도 변신한다. 일반인들이 상상만 하던 삶을 잠깐이라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데 김애란의 저 문장을 보는 순간 '나도 문장을 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책을 탐독하고, 활자 중독에 걸린 듯 책을 읽어댄 이유가 그 문장에서 나의 또다른 삶을 영위하고 싶었구나 싶다. 나의 생각을 다른 이들의 문장을 통해 읽어내는 이 순간의 충만감 때문이라도 당분간 독자로서의 삶은 포기하지 못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