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ㅣ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평점 :
소설은 이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저 문장이 가슴을 쿵하고 울린다. 이 소설을 무슨 이야기라고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소개를 해야 할지, 아니 어디서부터 나의 감동을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혜윤'의 <마술라디오>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그 책 속에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정혜윤'이 인터뷰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섞여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라는 책이 살짝 언급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냅다 나의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알라딘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나갔다. 그런데 내가 옮겨 적고 싶은 문장은 하나가 아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순간이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을 글귀로 보는 경우에도 그렇고,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문장으로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그렇다. 그리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말로 표현하지 못해 마음 속에만 담아 두었던 형체도 없던 유령 같은 감정을 뚜렷하게 형상화시켜주는 문장을 봐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 소설은 나에게 이 세 가지 모두로 다가왔다.
p32
물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에 본인이 전혀 모르던 중요한 사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뒤늦게 아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이 정작 본인은 거의 알지 못하는 이야기니까.
읽고 나니 그런 것 같다. 나의 탄생에 내가 개입한 적이 있던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모두 내가 결정한 것이었던가? 내가 살아온 이야기에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결국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신념대로 살아왔다’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신념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정녕 그의 신념이 맞는지...
일생 동안 당을 위해서, 공산주의를 위해서, 노동자를 위해서 살아왔다고 믿어진 한 인물, ‘아이라’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 것 하나 동떨어진 것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혼자만의 일이라고, 혼자만의 결정이라고 자부하는 것들이 결국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애국자인 양 배신을 하면서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p440)”는 공산주의를 처단하기 위한 미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을 치른 우리나라 역시 그 영향을 피해갈 수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질문과 그것을 대하는 자세가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결정하고 있다. 지금의 우리는 결국 과거의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섬뜩하지 않은가. 오늘을 망쳤다고 내일조차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하기조차 무섭다.
아흔 살이 된 아이라 린골드의 형인 머리 린골드 선생님은 제자 네이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p509 그녀는 대중이라는 기계를 작동시켰지만, 대중은 항상 원하는 방향으로 가진 않는다네. 자기 스스로 방향을 잡지. 아이라를 깔아뭉개주길 바랐던 대중이라는 기계가 그녀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네. 암 그래야지. 여긴 미국이니까. 대중이라는 기계는 일단 스위치를 켜면 모두를 파국으로 몰아넣기 전에는 멈추지 않거든.
지배층의 꼭두각시 인형 이브 프레임은 남편 아이라 린골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데 앞장서게 되고, 그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세상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가 이브 프레임으로 방향을 돌릴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저 문장에서 ‘미국’을 ‘한국’으로 바꿔도 내용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대중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지, 이념에 대한 이야기인지, 정치에 대한 이야기인지, 예술에 대한 이야기인지 하나로 규정은 못하겠다. 아마도 그 모든 것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가 설명하지 못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에 여운이 남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