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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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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대화> 14p  
   

 사실, 참 어렵다. 이 책에 대해 설명하고, 평한다는 게 말이다. 많은 지식인에게 '사상의 은사'였던 리영희 선생님에게 바치는 책. 이 책만 읽고도 리영희 선생님을 제대로 다시 알고 싶어진다는 마음이 강렬히 든다. 그만큼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쳤고, 영향을 미치고 있고,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의 책을 읽고 큰 충격에 빠져 쥐구멍에 숨어 들어가고 싶었던 사람도 있다고 했고, 모든 생각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상을 보게 되었다는 이들도 있다. 그를 존경하고 추종하는 자는 많았으나, 선생님은 패거리 문화를 질색했기에 편을 만들지도, 집단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로 존재했고, 하나로 존재하는 것조차 자율적이고 의지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써온 모든 글들에 책임을 졌던 사람이다. 

<리영희 프리즘>을 읽게 되면, 그가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생각, 책 읽기, 전쟁, 종교, 영어공부, 지식인, 기자, 사회과학, 청년 시대. 그리고 다시 그. 그는 많은 젊은이를 '의식화'하게 했고, '생각'하게 했으며, '사유화'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 취급을 받았고, 실제로 젊은이들을 '의식화' 했다는 이유만으로 법정에 불려나가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힘', '움직이게 하는 힘' 그것은 강요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의 글만으로, 그의 말만으로 시대의 젊은이들은 하나 둘 깨어났던 것이다. 

   
 

 의식화가 일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스승은 더 이상 스승이기를 멈춘다. 그는 함께 깨어 있을 뿐이다. 스승과 제자가 구별되는 것은 한쪽이 '깨어 있고' 다른 쪽이 '잠들어 있을 때'만이 아다. 나머지 한쪽이 깨어나는 순간 그들은 사유의 동료, 해방의 동료가 되는 것이다. 결국 가르친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배우게 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동료를 늘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명나라 말기 사상가 이탁오의 말이 생각난다. "스승이 아닌 자는 친구가 될 수 없고, 친구가 아닌 자는 스승이 될 수 없다."   - 29p

 
   

 '의식화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으로 불렸던 그는 '범죄를 야기한 범죄', '메타 범죄'를 일으킨 주범이 되어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에 재판정에 서기도 했다. '간접적 주범'이 된 이유는 실제 주범이 그의 책을 읽고 방화 사건을 저지르게 했다고 해서이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힘,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각성하게 한다는 것, 어떤 행동을 이끌어 낸다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을 움직이게 해서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 그것이 리영희 선생님의 스타일이 아니었을까? 너희들은 무엇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를 알게 된, 그를 읽게 된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분명 큰 힘이었다. 우리가 이루어 놓은 지금, 이 현재는 그의 영향으로 세워온 것들도 많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머무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절필을 선언하며,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고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식화'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우상'을 파괴하라고 말했다. 그 유명한 '우상 파괴론'에 의해 하나만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둘을 알게 되고 셋을 알게 되며, 넷을 알게 된다. 다양한 문화와 사람을 인정하며 사는 '지금'이 그냥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맹목적으로 믿었던 사회적, 국가적 이념들이 조금씩 파괴되며 다른 것도 생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북괴'를 '북한'이라고 고쳐쓰고, '빨갱이'라는 말이 낡아서 회상하는 단어가 되게 했다. 그것은 하나의 혁신이었고, 변혁이었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는 것. 그것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다. 

전쟁의 이면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일침, 몸소 보여준 방대한 책 읽기, 책 읽기 안에서 이루어낸 언어 능력, 언어 능력과 세계를 보는 통찰의 맞물림, '힘'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고 대중이 알아야 할 기사를 써내던 타협없던 기자 생활. 

행동하는 '사유'人이었던 그를 스승으로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70년대 대학생들을 '사유'하게 했고, '의식화'했다. 그 힘으로 세상은 변했고, 현재에 와 있다. 그가 절필을 선언한 것은 지금까지 끌어온 시대를 후세들에게 넘겨주고 싶어서 일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낡았다거나, 생각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그를 '우상화'하는 것도 거부하는 이다. 자기 생활에 주인이 되길 바라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길 바라는 이다. 치열한 싸움이 곧 변화를 만들고, 세상이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 이.   

'Simple life, high thinking.'  그가 전하는 한 마디.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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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2>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명의 2 : 심장에 남는 사람 명의 2
EBS 명의 제작팀 엮음 / 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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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의사에게는 전적인 믿음을 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아픈 내 몸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의사의 처방전 만으로도 병이 호전 되고 고칠 수 없을 것 같던 병도 낫게 된다. 감기 때문에 동네 병원만 가도 의사의 말을 추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의사는 아픈 이들에게 '신'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은 의사 중 의사 '명의'를 소개한다. 명의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병, 그 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의 마음과 방법 등을 사실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명의' 프로그램을 봤을 때, 의사들의 노고와 고통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도 사람이고, 가족이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는 벅차다. 모든 시간은 환자 위주로 돌아가며, 한 명이라도 더 고칠 수 있다면,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낼 수 있다면 이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발견할 때마다 가족들의 고충 또한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이 책에 수록된 17명의 의사들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는  사람이다. 환자의 병을 잘 고쳐내는 것은 물론,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애쓴다는 점에서 그들은 진짜 명의일 것이다. 시간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더 나은 의술로 환자의 고통과 근심을 최소화하고 싶어하는 그들이 있기에 환자들은 그들을 믿고, 자기 몸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없는 고통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간암, 췌장암부터 병이름도 생소한 크론병, 수근관증후군, 자궁경부무력증 등. 우리가 알 수없는 병들이 가지가지다. 그 병들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사들이 대단할 따름이다. 환자들은 병과 함께 사연도 가져온다. 첫 아이를 잃고, 다시 도전해 임신했지만, 자궁경부무력증 때문에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는 산모. 자궁경부절제술을 받았지만 쌍둥이를 출산한 산모. 사는 게 힘들어 방광암을 키워온 가족없는 청년을 수술시켜주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의사, 선천성 손 기형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손가락을 만들어 주는 의사. 

의사들은 단순히 몸만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 걱정, 근심까지 모두 고친다. 몸이 좋아짐으로 인해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환자들. 그리고 또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게 환자들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조금 더 긴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의. 그들의 땀과 노력이 없다면 그 수많은 병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삶의 희망마저 잃어버릴 것이다. 

   
 

 착한 사람이어야죠. 그러려면 환자한테 거짓말하지 말아야 할 거구요. 또 환자한테 항상 따뜻하게 대해야죠. 환자들이 '내가 선생님 부인이라면 어떻게 하겠냐, 그렇게 수술하겠냐' 하고 질문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제 가족이라고 생각 안 하면 어떻게 최선의 방법을 찾겠습니까? 당연히 그 환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찾을 수밖에 업고, 늘 마음을 다해야죠. - 산부인과 전문의 남주현 교수

 
   

 

   
 

의사들의 노력과 과학의 발전이 지금보다 더 나은 의료 환경, 그리고 의학을 발전시킨다고 봅니다. 그런 노력들의 결과는 당연히 환자들에게 돌아갈 것이구요. 그래서 더 많은 환자들을 질병으로부터 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대장외과 전문의 김선한 교수

 
   

 

   
 

 우리가 의자라든가 다른 물건을 만들 때는, 그것이 마음에 안 들면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몸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수술하게 되면, 그 환자를 다시 수술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사람을 다시 만들 수도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환자 한 분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비뇨기과 전문의 박영요 교수

 
   

 '명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의사들은, 단지 의술만이 뛰어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의술이 뛰어나다 하여 그곳에 머무른다면, 뛰어난 의술을 전술하지 않고 자기만 알려 한다면, 의술을 고치는 게 다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는 진정한 '명의'가 아니다.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의 꿈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 그게 진정한 명의가 아닐까? 의술을 뛰어넘어 인술을 행하는 명의, 그들이 여기 한 자리에 모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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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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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시를 왜 읽는가? 그리고, 시를 왜 쓰는가? 시는 어째서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가? 깨닫게 하는가? 느끼게 하는가? 짧은 시에 담긴 삶에 대한 통찰, 인간에 대한 사유, 관계에 대한 의문과 정립. 시가 내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답답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화가 나거나, 마음에 안정이 필요할 때. 가슴 속이 메말라 갈 때. 나는 시를 필사하곤 한다. 좋은 시를 찾아 시인의 마음을 따라가며 한 글자 한 글자 베껴 나가다 보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곤 한다. 시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안을 주거나, 깨달음을 주곤 한다. 누구나 가슴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시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 하나 없다면 얼마나 서글픈 일일까? 

혹시라도 마음에 담아 둔 시 하나 없거나, 시를 조금 더 깊이 느끼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선택해 보는 것도 좋다. 어려울 것 같은 철학이 쉽게 다가는 것도 좋지만, 시 한편에 담긴 뜻밖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명의 시인과 21명의 철학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달라질 수도 있다. 또한 세상을 읽어가는 힘이 더해질 수도 있다. 난 그렇게 자신하고 싶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게 확실해지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이 시를 들여다보며, 시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잡아 끌기 때문이다. 그만큼의 힘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네그리와 박노해,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한나 아렌트와 김남주, 알튀세르와 강은교, 바타이유와 박정대, 벤야민과 유하, 레비나스와 원재훈, 벤야민과 유하, 레비나스와 원재훈, 니체와 황동규, 푸코와 김수영, 가라타니 고진과 도종환, 하이데거와 김춘수, 들뢰즈와 최두석, 샤르트르와 최영미, 아도르노와 최명란, 데리다와 오규원, 아감벤과 한하운, 메를로 퐁티와 정현종, 리오타르와 이상, 바디우와 황지우, 호네트와 박찬일, 박동환과 김준태 

작가의 기준대로 고른 시들은, 철학적으로 잘 맞아떨어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가장 좋은 점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작가가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궁금함을 여기 저기 뿌려 놓는다. 철학자에 대해 더 공부해 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할까? 그건 내가 철학에 무지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철학을 어렵게만 생각하는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동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김남주의 '어떤 관료'라는 시로 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관하여 설명한다.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국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아이히만은 아이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차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74p

 
   

아렌트가 생각하는 사유는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것. 김남주의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관료'는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아이히만'과 닮아 있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 '전체주의'라는 괴물로 변하는 사람,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 일어날 사태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은 설득적이다. 도처에 널려 있는 사람이 사유하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조차도 그럴 수 있다. 내 편의와 내 이익만 생각하고 하는 어떤 행위는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아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부에서 하는 일 마찬가지다. 이것은 모든 삶과 통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사유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성에꽃 - 최두석 

새벅 시내버스는 /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 엄동 혹한일수록 / 선연히 피는 성에꽃 / 어제 이 버스를 탔던 / 처녀 총각 아이 어른 /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 입김과 숨결이 /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 성에꽃 한 잎 지우고 / 이마를 대고 본다 /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 차이, 성별의 차이, 신분의 차이, 즉 차이나는 본성들을 가로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대화>>  

다중체는 '많다'라는 뜻의 '멀티multi'라는 글자와 '주름fold'을 의미하는 '플리pli'라는 글자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글자가 바로 '플리'입니다. 새로 산 옷을 자주 입으면 이 옷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형태의 주름들이 생기지요. 이 주름들은 옷을 입은나 자신 혹은 외부로부터 받은 힘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름이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243, 244p

 
   

 버스의 '성에꽃'은 어제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라는 시구절. 여기서 작가는 들뢰즈의 철학을 끌어냅니다. 다양한 것들의 마주침과 그로부터 생기는 흔적이나 주름을 이야기한 들뢰즈. 들뢰즈가 펼친 인간의 사유 '나무'와 '리좀'. 뿌리와 뿌리줄기, 뻗나가고 분리되고 연결하는.  
사실, 이 이야기만 듣고 들뢰즈를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을 어렴풋이 느끼며, 시와 연결해 개념을 이해할 수는 있다. 더 나아가서는 들뢰즈에 관심이 생기고, 알고 싶어진다. 

이 외에도 펼쳐지는 시와 철학. 시를 본 철학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냐, 이런 의도가 숨겨있는 것은 아니냐. 과격하고, 직설적이지는 않다. 부드럽게 시를 배려한 풀이라고 보면 된다.  

대부분의 철학 이론은 '마르크스'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며, 철학적 사고를 모두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자만이고 욕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21개의 시와 21명의 철학자가 펼쳐주는 이야기에서 원하는 하나 만이라도 진지하고 깊게 다가가길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명, 읽다 보면 충돌이 일어나는 철학도 있고, 비슷한 이론으로 묶이는 철학도 있다. 그것에 대한 의문은 독자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
철학 공부를 잠시 접어 두었던 사람에게는 또 다른 시작을, 철학 공부를 하고 싶었던 사람에게 또 다른 동기를 부여할지도 모르는 시간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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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ksy Wall and Piece 뱅크시 월 앤 피스 - 거리로 뛰쳐나간 예술가, 벽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네다
뱅크시 지음, 리경 옮김, 이태호 해제, 임진평 기획 / 위즈덤피플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간단하고 충격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말하고 싶은 이야를 구구절절 늘어놓기 보다, 한 줄로 혹은 그림 하나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능력이다. 뱅크시(Banksy)는 이런 능력에 탁월하다. 간단한 그림으로 간단하게 말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하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다.

'그래피티'(Graffiti_낙서)는 무엇보다 하위 형식의 예술이 아니다. 비록 엄마한테 거짓말을 하고 한방중에 숨죽인 채로 작업을 해내야 한다 할지라도 이는 실존하는 가장 정직한 형식의 예술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것은 엘리트 의식으로 인함도 아니며 누군가를 현혹하기 위함도 아니다. 게다가 이것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동네의 가장 좋은 벽만 있으면 된다. 당연히 누구도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불필요한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벽(Wall)'이야말로 당신의 작품을 발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이제까지 벽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왔다.

도시를 경영하며 관리하는 사람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치 기준이 당신의 생각이나 의견보다 '돈'에 우선해 있다면 물론 이 또한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리겠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래피티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사회를 부정하는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그래피티는 단지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에게만 위험하다. 정치인들, 광고쟁이들 그리고 그래피티 작가들 말이다.

진정으로 우리 이웃들의 외관을 더럽히고 손상시키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거대한 슬로건들을 버스와 건물들 사이에 되는 대로 마구 휘갈겨 쓰고는 마치 우리가 자기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회사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얼굴에 대고 그들의 메시지를 소리쳐 대지만 정작 우리의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이 이 싸움을 시작했고 그 싸움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나의 무기는 바로 벽이엇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되고 어떤 이들은 세상을 더 좋아 보이게 만들기 위해 문화파괴자(Vandals)가 된다.



그는 어릴 때 부모 조차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음을 경험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었는데도 그의 잘못이 되었다. 그떄부터 그는 입을 닫고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속도가 느려서 트럭 밑에 숨어 있기도 했다. 그는 곧, 자신만의 방식을 개발했다. 스텐실 기법은 그의 그림에 속도를 붙여주었다.

 


이런 풍자는, 그의 비판을 더욱 겸허하게 받아드리도록 한다.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도 폭력으로 행해져야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는 말처럼 우스운 것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나의 그림으로 단호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뱅크시의 그러한 능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아닐까?

 





 그가 그림으로 말하는 화두 중 가장 많은 것이 전쟁이다. 필요없는 싸움, 그것이 바로 전쟁이 아닐까? 평화를 지킨다는 말은 거짓이다. 평화가 아니라 이익을 지키고자 싸운다. 그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람 이외의 모든 것들, 아이, 동물, 자연 등 모두가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할 뿐이다. 직접적이고 충격적이게, 우리가 저지르는 일 우리가 동조하고 동의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경고다. 수많은 경고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의 책 'Wall and Piece'는 'War and peace'가 연상된다. 그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이 끝나지 않는 화두는 서로를 먹고 먹으며, 다른 형태로 진화해온다. 결국, 평화라는 것은 없다. 무기와 죽음, 이익, 고통만 있을 뿐이다. 왜 우리는 그것들을 깨닫지 못하는가? 사실 깨닫고 있으면서도 외면할 뿐이다. 

 




물질주의, 소비주의, 신자유주의.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 뱅크시는 언제나 소수자의 입장에서 대변한다. 다수가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법을 존중해야 한다. 소비주의, 신자유주의는 물질에 노예가 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허세와 과시, 그리고 욕망 그것이 고유한 문화들을 망가뜨리며 획일화 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경주는 공평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경쟁이다. 아직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운동화와 깨끗한 먹을 물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 116p

이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슬프게 생각하지 않는 문명들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물질에 물들지 않는 이들의 문화를 파괴시켰다. 뱅크시의 간단한 그림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우리의 욕망과 경쟁이 어떤 것들을 파괴시키고, 앗아갔는지 말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강렬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유명한 미술관에 자기의 그림을 걸어 놓는 기상천외한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유명 화가의 그림에 그래피티적 요소를 첨가했으며, 유명 화가의 그림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뉴욕 자연사 박물관 등 그는 혼자만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큐레이터들을 바보로 만들었고,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예술이고 아닌지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다. 유명하고 저명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 그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관람객들, 심지어 박물관 관련자들을 비웃었다. 그의 행동은 예술의 진정성을 묻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본다.

그는 아직도 그리고 있다. 눈치 챌 수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뿌리고 있기도 하다. 이제 그의 작품은 숨은 그림 찾기가 되었다. 이제 그의 그림은 지워지지 않고, 심지어 그림이 그려진 벽이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만큼 중요한 것들이 되었다. 

그를 만나며, 그래피티를 더 깊게 더 잘 알 수 있었다. 단순하게 벽에 낙서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도 철저하게 깨주었다. 그의 작품을 보며, 한가지 바람이 생겼다면 우리의 그래피티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의 그래피티를 보며,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를 알고, 좋아하게 된만큼 그의 행보가 지금처럼 굳건하고 확실하게 지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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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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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맹렬한 비판 마저도 힘 빠지는 일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우리 정부의 모습이다. 곁다리로 걸쳐 힘을 쓰는 건지 마는 건지 우습기만 한 야당도 똑같다. MB가 정권을 잡고부터 매시간, 하루하루 사건 사고 없었던 날이 있었던가. 사건이 터지면, 지저분한 스캔들을 대서특필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덮어버리기 위해 애를 써왔던 게 바로 정부 아닌가.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까지 달려야할 시간들은 아직도 멀고 험한 듯 보인다. 이미 다 지나간 일 같지만, 지나간 일들은 없다. 표면적으로 기억에서 조금씩 물러났을 뿐. 아직도 누군가의 가슴에는 방금 일어난 일처럼 처절한 사건들이 많았다. 

쌍용차 사태를 비롯, 용산 참사, 두 대통령의 죽음, 미친소 촛불 시위 등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상상초월이었다. 그 사건 뒤의 발언, 대처들은 더 당황스럽고 울분을 토하게 했다. 인간을 인간처럼 대우하지 않았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정부를 보며 참담한 심정이었다. 한 명의 사생활이나 인권은 존중은 무슨, 딱 알맞게 무시했다. 

그 고집과 아집 사이에서 국민들은 기겁을 했다. 논리적으로 다가가도 무식하게 처리하는 그들의 모습에 이것이 과연 21세기의 모습인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포퓰리즘은 그렇다 치고 파시즘은 무엇인가? 자기가 대한민국의 히틀러라도 된 것처럼 더럽기 짝이 없는 웃음. 그 아래 파리처럼 들러붙어 살겠다고 손바닥을 비벼대는 하수인들. 이제 말만해도 입 아프다.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에 담긴 손호철 교수식 비판을 속을 다 후련하게 해준다. '민주당'을 향한 촌철살인이나, 대중을 향한 외침 또한 가슴에 콱콱 박힌다. 국민들이 움츠리고 있다고 하여, 그들은 당연히 내뜻이 국민들의 뜻이라고 말한다. 스물스물 내부에서 울리는 진동 따위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손호철 교수는 경고한다. 사실 반복되는 이야기도 많고, 한 이야기를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복이 전혀 과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눈치나 살살보며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민주당의 투쟁은 어디 쓸 데도 없다. 뭐 말 뒤집기야 정치 하는 인간들이 최고겠지만, 자신들이 뿌려놓은 잘못도 수습하지 못하면서, 비판과 비난을 일삼는다고 국민들이 모르고 지나칠까?  

믿었지만, 믿음을 배신당했기에 등을 돌려 만들어낸 결과가 더 끔찍하다는 걸 국민들이 더 잘 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떠들지 않아도 가장 잘 아는 건 국민들이다.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게 정부고, 국회의원들이다. 해도해도 너무들 하는 것이다. 개딜정책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하고, 강 정비 한답시고 빈곤층과 복지비를 하루아침에 깎아드시고, 그 마누라님께서는 한식의 세계화를 한답시고 급식비를 왕창 삭감하시고.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흘러 오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들에게 표를 던져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응원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책을 읽으며, 지난간 혹시 때늦은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우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가득이다. 그가 말하는 2년 여가 넘는 시간동안 일어난 이야기들 중, 제대로 해결된 것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게 더 가슴 아프다. 그게 더 뼈저리다. 우리는 좀 더 좋은 사회를 위해서 달렸고, 노력했지만 결국 더 나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제 웃기는 굿판은 그만 보고 싶다. 좀 더 신명나는 굿판, 모두가 즐거운 굿판이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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