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의 계보학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든 서사들 메두사의 시선 4
실라 미요시 야거 지음, 조고은 옮김, 정희진 시리즈기획.감수 / 나무연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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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든 화이트와 폴 리쾨르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본질적 관계를 언급한 바 있다. (…) 

우리가 과거를 서술하기 위해 무언가를 선택하는 방식은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 P179


나는 어떤 세대에 속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새마을 운동의 위대함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고, 1980년대 민중의 항쟁을 전해 들었으며, 조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국민 체조’를 교육 받고, 고등학교 때까지 교련 수업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이 국가주의에 대한 교육이나 세뇌였음을 지금은 인지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해서 싫었는데 지금은 그 때를 향수처럼 기억하기도 하는 반면 씁쓸하거나 불쾌하게 느끼게도 한다. 

국가가 국민을 알게 모르게 의식화시키기 위한 작업들이 일상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기념 사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는 종종 전쟁 기념관을 들러 전시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나마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는데 만약 멀지 않았다면 현충원도 가지 않았을까. 국립서울현충원이 국군 묘지에서 출발하여 애국지사 묘역으로 조성된 것처럼 전쟁 기념관도 한국 전쟁을 기념한다는 이유에서 조성되었다. 


<애국의 계보학>은 한국의 근현대 시기의 역사에서 이상적인 미래로 내세운 관념이 무엇이었는지 그 계보를 추적하는 책이다. 한국의 역사를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분석한 책들은 있으나 이를 젠더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는 것이 이 책의 특별한 점이다. 


젠더 담론이 항상 혹은 반드시 젠더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젠더란 상호적으로 구성되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여성과 남성의 범주로 개념화된다. 그리하여 젠더 체계는 다중적이고 가변적인 방식으로 다른 문화적, 정치적, 미학적 구조 및 경험의 양식과 서로 연관된다. - P11


젠더 담론이 사회의 구조를 해석하는 데 필수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젠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회를 온전히 해석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른 책들처럼 일반적으로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정체성, 남성, 여성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개인이 젠더적 주체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살펴보게 한 것이 효과적이었다 생각한다.


저자는 신채호를 한국 근대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 최초의 인물로 제시한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 태왕 등 고전적 영웅을 이상화하여 끌고 온다(그는 위인전을 많이 썼다). 신채호는 당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낡고 헤진 조선을 뒤로 하고 근대적 이상향을 제시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과거의 복기를 통한 회복 방법이다. 살라 미요시는 그가 근대성으로 제시한 방법이 무사, 영웅으로서의 ‘남성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박정희도 이상적 현대의 모습으로 신채호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18년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이순신 등 영웅의 부활 사업을 꾸준히 추진했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을 개혁한다고 했지만 이는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국가를 이상화시키는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일본식 군사 교육을 받았고, 일본 장교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자신의 체제에 적용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구미시가 박정희 기념 사업을 위해 근현대사 명소를 만든다는 추진 계획을 밝혔고, 경상북도는 새마을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국내가 아닌 아시아 및 아프리카 16개국에 시범마을을 조성한다고 한다. 새마을 운동이 성공적인 모델임을 자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박정희를 여전히 기념하기 위한 숨은 포석도 있다고 생각된다. 


김일성은 남한에서 실패한 군사적 남성성 대신 과거의 유교적 모델에서 부성애를 강조함으로써 1980년대 학생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켰다고 이야기한다. 김일성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남한의 이상과 현실이 학생들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된다. 박정희 뿐 아니라 전두환도 국민과 국가를 단결시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으나 실상 잘 되지 않았고 실패했다. 올림픽 개최, 행사 등 국내외 사업을 통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려 했다는 점을 지금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살라 미요시가 다룬 인물 중 이광수는 앞선 인물들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급된 작품 <무정>,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윤광호>, <사랑인가>를 읽었는데 다시 읽어봐도 저자가 제시한 관점은 놀랍기 짝이 없다. 나는 그저 사랑을 통한 계몽, 해방 의식 정도를 느낄 뿐이었는데 그는 이광수가 사랑의 상실을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종국이 ‘여성’이라고 하는 귀환점이었다고 말한다. 귀환은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고 집, 나아가 국가,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광수는 근대적 여성의 모델을 제시했지만 그 이상적 근대성이 일본을 모델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전쟁 기념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전쟁 기념관은 전쟁 영웅을 숭배하여 기림으로써 국민을 교육시키고 나아가 국가를 개혁시키고자 만들어졌다. 나는 전쟁 기념관을 둘러보며 한국 전쟁 이후의 전시에 주로 집중했던 것 같은데 살라 미요시는 전시 중 조선 시대에 가장 긴 할애를 하고 있다고 했다고 하여 놀랐다. ‘형제의 상’도 봤을 것 같은데 생각이 흐릿한 것을 보면 주목하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광개토 대왕비(복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부 전시들보다 사실 외부에 있던 전쟁 전사자들을 적어놓은 공간이 기억에 또렷하다. 건물 설계자는 의도적으로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숭고함을 느끼도록 표현했다는 것을 보면 이는 제대로 성공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한국의 유교화 과정>, <냉전과 새마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일상적 민족주의>가 연관되어 떠올랐다. 이 중 <한국의 유교화 과정>과 <일상적 민족주의>는 읽으려고 생각했던 책인데(심지어 <일상적 민족주의>는 샀는데)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다. 이후 읽는다면 관련하여 좋은 자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선 뒤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오직 이행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자 했던 포괄적 역사 이론의 실패한 약속을 반성하면서, 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사로잡히지 않고 국민국가의 역사를 써야 한다는 과제가 제시되었다. 그러한 전략의 결과가 차이와 저항의 행동을 통해서든 역사 서사 전체를 회피하는 것을 통해서든 그저 지배 문화를 다시 쓰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보적 역사에 대한 이전의 비판 전통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벤야민이 말했던 ‘변증법적 이미지’, 즉 그가 감춰지거나 잊혔을 과거와의 연결이 현재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며 밝혀지는 각성의 순간이라 부른 관점을 통해 국가를 개념화했던 방식을 비로소 재고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제는 텍스트, 사건, 이미지의 병치로 드러나는 여러 겹의 의미적 층위를 벗겨내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예상치 못하거나 숨어 있는 연결을 (재)포착하는 것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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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4-01-11 1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희진의 공부> 1월호에서 김소연 시인이 경주를 박정희 정권이 주도해서 개발했다고 하더라고요. 조선 이전, 백제가 아닌 신라를 조명하는 것도 의도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화가님 후기를 보니 생각났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4-01-12 08:31   좋아요 1 | URL
박정희 시기 문화재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관련 사업들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국립문화재연구소 같은 것도 만들어지고요^^ 삼국을 통일한 신라를 통해 통합과 단결을 강조한 것 같기도 합니다.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 방콕, 하노이부터 치앙라이, 덴파사르까지 13개 도시로 떠나는 역사기행 도시로 보는 시리즈
신윤환 외 지음 / 사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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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현재 11개국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영역은 상당히 넓다. 도시국가인 상가포르와 브루나이를 제외하면 넓지 않은 나라가 없다. 그에 비하면 인구는 적은 편이다. 그래서 동남아시아는 도시가 중심이 되어 발달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오랜 역사 동안 중요한 지역에서 거점이 되는 도시가 사실상 나라의 명운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되거나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다른 관광지로 연결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동남아시아 도시들이 중요한 이유다. - P6


얼마 전 아시아사를 읽고 나자 동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터무니없이 부족함을 느꼈다. 동남아시아사로 굵직한 책을 갖고 있지만 그 책을 읽기 전 징검다리로 입문할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고르다 선택한 것이 이 시리즈다. 마침 2권까지 나와 있었고 평도 나쁘지 않아 보여 도서관에 가서 빌려와 읽게 되었다. 


동남아시아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물과 친하지 않고 해산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휴양지 느낌이 강해서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먹고 노는 관광객으로서의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남아시아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근현대 시기를 거치며 많은 부침을 겪었기 때문에 도시가 그야말로 역사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는 도시를 위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관광객으로서 접근성도 좋으면서도 역사학도나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공부할 거리가 많은 곳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그것을 느꼈기에 값진 시간이었다.


5명의 학자들이 7개의 나라에서 고른 13개의 도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자마다 다른 국가와 전공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이야기의 스타일이 다른 것이 꽤나 재미있었다. 

태국 현대사를 전공자가 방콕, 치앙라이, 폰사완의 민주화와 민족 갈등, 전쟁 경험을 통해 태국과 라오스의 아픈 현대사를 들려준다. 특히 소수민족과 국경, 그 각각에 대해서, 또 둘 간의 관계에 대해서 포커싱을 맞추어 전달한다.

베트남의 정치, 경제를 전공한 정치학자는 하노이와 호찌민시의 거리와 건축물을 통해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베트남의 유적지와 현재를 볼 수 있는 여행 장소를 빠짐없이 소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도네시아 발리를 연구한 인류학자는 덴파샤르, 족자카르타, 수라바야를 소개하는데 지나치게 개발된 자카르타, 발리를 벗어나 현지인의 문화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들로서의 매력을 가져서다.

동남아시아 불교 미술을 전공한 미술 사학자는 믈라카, 페낭을 소개하며 일찍부터 외부의 눈에 띄어 식민지가 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혼종성을 낳았다고 말한다.

동남아시아 화교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싱가포르, 양곤, 쿠칭을 소개하는데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치앙라이, 폰 사완의 국경 전쟁에 따른 피해와 국경을 오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기억에 남았다. 또 베트남의 하노이와 호찌민을 비교하며 급속도로 개발되고 있는 현재를 주목하기도 했다. 고양이 천국인 쿠칭도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붐비고 지나치게 개발되어 관광화되어버린 자카르타나 발리 대신 현지인들을 느길 수 있는 덴파샤르, 수라바야, 족자카르타는 언젠가 가보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다.

믈라카, 페낭은 역사적 가치와 미관만으로 가고 싶은 욕망은 충분하다. 특히 페낭 신학교는 김대건 신부을 비롯한 조선의 신자들이 사제의 서품을 받은 곳이라 특별하게 느껴진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현재 페낭교구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입문하기에 적절한 책인 것 같다. 교양서이기도 하고 대중서이기도 하지만 책의 깊이가 얕지 않아서 좋았다.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탄생 시기는 다양하나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은 식민 지배와 국가 건설 과정에서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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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모사 1867 - 대만의 운명을 뒤흔든 만남과 조약
첸야오창 지음, 차혜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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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역사의 ‘나비’가 1867년 이 해변에서 첫 날갯짓을 했다. 이 날개짓은 1874년 일본의 대만 정벌로 이어졌으며, 1875년 심보정의 개산무번(청나라가 대만 원주민 산지를 개척하면서 진행된 침략)과 1885년 대만 건성(청나라가 대만을 성으로 승격시킴)을 거쳐,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에 걸친 일제 강점기로 이어졌다. 일본인이 대만에서 물러나면서 이 해변에서 시작된 대만 역사의 나비효과는 비로소 멈추게 된다. 


1867년 대만 남단 해역에 미국 상선인 로버호가 좌초되었다. 10명의 선원이 배를 버리고 해변에 상륙했으나 생번인 원주민에게 살해된다. 

이 소설은 1867번 로버호 사건을 파고들어 작가의 상상력에 의지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대만은 당시 포르모사라고 불렸다. 17세기 중엽의 포르모사는 37년 동안 네덜란드의 동양 진출을 위한 근거지였으며,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가장 돈을 많이 번 식민지 중 하나였다. 이후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했으나 통치 범주의 최남단을 방료까지로 한정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력은 섬 가운데 서북부 정도에만 실렸다. 1858년 천진조약에 따라 담수와 안평항이 개방되고 북경조약에서 계롱과 타구가 추가 개방되었다. 


포르모사는 물산이 풍부할 뿐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로도 중요하여 영국, 프랑스는 진작부터 눈독을 들였다. 일본의 근대화 계기가 된 흑선의 주인공 페리가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1854년 7월에 마케도니안호(The Macedonian)과 서플라이호(The Supply)를 계롱항에 파견하여 포르모사 해안을 측량했다. 마케도니안호의 선상 목사이며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조지 존스(George Jones)는 상륙하여 내륙의 탄광 갱도까지 들어가 탐사했는데 이곳의 탄광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포르모사를 극동 기지로 여겨 중요하게 생각했으나 자국에 남북전쟁으로 포르모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영국에 선점 기회를 내주었다. 


“1860년부터 지금까지 7년 동안 무려 스무 척 이상의 상선이 포르모사 해역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침몰했습니다. 청나라 지방 관리들은 백성들이 배와 선원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해도 방임합니다. 생번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스윈호가 청나라 정부에 몇 번이나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관리들은 계속 미루면서 세월만 보냅니다. 신사적인 스윈호도 견디지 못하고 자구책을 강구하여 군함을 파견해 포르모사 연해를 순찰했습니다.”



위의 지도는 당시 미 외교관 이양례가 작성한 대만 지도이다. 한 눈에 봐도 다양한 부족들이 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부족 간에 교류 및 통혼이 있기도 했지만 서로 다른 문화와 풍습으로 갈등이 빈번했다. 복로와 객가는 언어와 풍속이 다를 뿐 아니라 생존 경쟁구도에 놓여, 매사에 대립하고 반목했다. 두 집단은 처음에는 땅을 두고 충돌했다가 나중에는 정치적 입장에서 충돌했다. 

몇 차례에 걸친 복로와 청나라 조정 간의 전쟁에서 객가인들은 모두 통치자인 청의 편에 섰다. 청나라 조정의 눈에 복로인들은 정성공의 반역 이후 태생적으로 반골 기질이 있는 고약한 백성이었다. 반면 객가 출신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의로운 백성이라고 여겼다. 


대만 역사 교과서는 1867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데 이 해는 전통적인 역사관으로 볼 때 그저 평탄했던 한 해였다 여기기 때문이다. 대만 남부에서 발생한 선박 조난 사고는 전혀 언급되지도 않는다고. 청나라 조정 문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만부의 지방 관리가 작성한 상주문 몇 편인데 사실을 그대로 쓰지도 않았을 뿐더러 기록도 소략하다. 

반면 작가는 1867년이 역사상 지극히 중요한 해라고 주장한다. 1683년에 강희제가 대만을 봉쇄하고 대만과 대만 사람들이 184년 동안 세계사에서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춘 이후 두 번째로 국제 무대에 등장한 해이기 때문이다. 


1867년 200명에 육박하는 미국 해병대가 대만에서 군사 행동을 전개했다. 군사 행동이 일어난 장소는 현재 세계적인 휴양지인 컨딩국가공원이다. 미국은 이 때 대만 원주민에게 맥없이 당하고 의기소침하여 돌아갔다. 만약 미군이 승리했다면 일본 정벌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르며 1867년 대만 남부가 이미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으로 대만과 미국은 조약을 체결했다(남갑지맹). 대만을 대표한 사람은 괴뢰산의 생번 두목이자 낭교 18부락 연맹 총두목인 탁기독이었고 미국을 대표한 사람은 대사인 이양례였다. 1869년 2월 28일 확인한 조약의 협의서는 지금도 미 국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양례는 19세기 대만 운명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일본의 대만 정벌(일본 입장에서 모란사 사건을 부르는 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1867년 사건은 대만 각 부족 집단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만은 다민족이 병립하는 사회였으나 사건 이후 심보정의 개산무번, 항해 금지 완화로 이주민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한족과 원주민의 경계가 허물어져 오늘날 대만계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이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뒤 ‘대만 본토 의식’이 일어났고 서서히 과거의 잊힌 문화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속에 2000년 이후가 되어서는 후손들이 조상의 유적을 찾고 ‘원주민 의식’을 부활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 이전에 <포르모사 삼족기>라는 책으로 17세기 대만 역사를 담은 소설을 집필한 이력이 있다. <포르모사 1867>은 대만 근대 역사 3부작 시리즈로 그 시작이라고 하니 이후 소개될 책들이 기대가 된다. 그 전에 <포르모사 삼족기>도 시간을 내어 읽어보고 싶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대만의 역사를 읽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작가가 넣은 허구적 인물과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좀 뻔하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당시 사건을 나는 처음 알았기 때문에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작가의 건필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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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2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4-01-02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이동물원 읽고 대만 역사를 살펴보다가 이 책 궁금했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거리의화가 2024-01-03 10:12   좋아요 1 | URL
저도 켄 리우 작가 소설은 언젠가 읽어보고 싶어 찜해놨었어요. 대만의 근대 초기 상황을 거의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인데 그레이스님이 읽으시면 어떨까 저도 궁금하네요^^ 감사합니다.

희선 2024-01-04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나 그렇지만 대만은 더 모르는 것 같네요 어느 나라나 나름의 역사가 있겠습니다 거리의화가 님은 그런 데 관심을 많이 갖고 있고 공부를 하고 알기도 해서 즐겁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04 09:07   좋아요 2 | URL
대만은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외교와도 관련이 깊지만 근대 시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관련이 깊은 것 같아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조금씩 공부해보고 있습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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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 P15


과거를 떠올리면 이제는 구체적인 기억보다 희미해진 기억이 더 많다. 적어도 내게는 이것이 감사했다. 어릴 적 부모님은 늘 장사로 바쁘셨고 집이라는 공간은 나와 동생들에게 내맡겨진 곳이었기에 차갑기만 했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면 늘 술에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하루 빨리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폭력과 자본이란 단어는 일찍부터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주는 동시에 해방을 꿈꾸게 했던 것 같다. 


인간이란 큰 일을 겪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것일까. 다치고 아프게 되기 전 깨달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되뇌여보지만 그 때 아버지는 나사 풀린 브레이크 같았고 어머니는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였다. 괴로웠고 피하고만 싶었던 존재들이 시간이 지나 병마가 찾아왔고 이후에 그분들은 신앙을 찾고 바뀌었다. 

부모님은 노화와 병마의 후유증으로 신체적 기능은 떨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평화롭다 말씀하신다. 내게 종교는 의미가 없지만 부모님께서 신앙의 힘으로 기운을 차리신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매년 김치를 담가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행위는 분명 애정의 표현일 것이다. 어제는 2023년 마지막 날이었는데 가족들에게 전화를 내가 먼저 걸어야겠다 싶어 그렇게 했다. 

어머니는 “니가 웬일이야.” 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어머니는 평소 내가 쌀쌀맞게 군다고 서운해하신다. 그럼에도 내가 이전에 가족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며 미안해하신다. 옆에 아버지도 계시다고 하셔서 이어서 통화를 했다. “고맙다.” 무서웠던 아버지는 없고 이제는 내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아버지가 있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의 이런 표현이 익숙지 않지만.


사람들은 성격이나 감정을 말할 때 온도와 관련한 표현을 쓰기도 한다. ‘따뜻하거나 냉담한 마음, ‘차가운‘ 기질, ‘뜨거운 열정처럼. 극지방의 태양에 관해 쓴 지 1년쯤 후, 그러니까 남편이 갑작스레 익사한 후에 메리 셸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마음이 차가운 사람인 걸까?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이 마음 한가운데 있는 얼음같이 차가운 무언가를 부러워할 필요는 없겠지. 적어도 이 차가운 심장에서 나온 감정이 만들어 내는 눈물은 뜨거운 것임을." 내색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차가운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듣곤 했다. - P71


어머니가 내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화를 내던 시절, 나 역시 내가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사실에 끔찍해하고 비슷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우리가 사실은 얼마나 닮았는지, 어머니가 나의 가장 본질적인 취향이나 관심사 혹은 가치체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게 된다. 어머니는 평생 동안 도덕적인 질문과 원칙에 사로잡혀 있었고, 사람의 삶은 그가 이룬 것과 그가 기여한 것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점을 물려받았다. 좀 더 작은 것들도 있다. 꽃이나 메마른 나뭇가지를 보고 즐거움을 얻는다든가, 책을 좋아하는 점, 일종의 불안감과 불확실성 같은 것들. 물론 외모도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 P340


솔닛의 글은 위로가 되고 따뜻했다. 게다가 문장도 좋아서 기뻐서, 슬퍼서 벅차오를 때가 많았다. 읽을수록 내 스타일이다 싶어 전작 읽기를 해야겠다 결심했다. 그녀가 역사가이기도 해서 고전과 역사적 사례를 끌고 오는 것도 좋았다. 선물해주신 분의 마음이 더해져서 소중하게 읽었던 것 같다. 감사하다.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 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그 순간부터는 정말로 중요해진다. 이 순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손님은 때로는 안내인처럼 친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우리를 문밖으로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바로 그 순간 이후에 살아가게 될 삶이다. - P223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 P278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도 나는 멸종해 버린 과거의 어머니와 여전히 다투고 있고, 과거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너무 작아졌지만 여전히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과거의 어머니와 과거의 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독특한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불러낸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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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1 1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리베카 솔닛의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올해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가족의 존재가 참 그런 것 같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거리의화가 2024-01-01 19:53   좋아요 1 | URL
솔닛의 글 참 좋네요^^ 페넬로페님께도 좋은 느낌으로 다가갈 것 같습니다.
가족이란 멀고도 가까운 존재인 듯 싶어요. 가까워서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01-01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1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1-02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면서 거리의화가 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부모님을 떠올리기도 하셨군요 이 책을 보시고 리베카 솔닉 책을 다 보시기로 하시다니... 멋지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1-02 09:04   좋아요 0 | URL
내용이 저자의 어머니의 사연으로 시작되어서인지 자동으로 저도 옛 기억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녀의 책을 조금씩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4-01-02 1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가까운 날에 이 책을 읽고 싶어요. 미루지 말고...

거리의화가 2024-01-02 12:45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이 이 책을 읽고 풀어내실 감상이 궁금해집니다^^
 
아시아 1945-1990 - 서구의 번영 아래 전쟁과 폭력으로 물든
폴 토머스 체임벌린 지음, 김남섭 옮김 / 이데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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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따라 지도를 그려보면, 학살은 개발 도상 세계를 관통하는 일정한 길을 쫓아가면서, 모두 합쳐 냉전 시대에 발생한 전사자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 광범위한 세 전선에 집중되었다. 전선 각각은 세 개의 지방 전쟁군 중 하나와 연계된 지역 투쟁들로 이루어졌고, 이 지방 전쟁군들은 다시 지구적 냉전 네트워크와 연결되었다. 각 전선은 소련과 중국의 국경을 따라 만들어졌고, 지방 권력의 대두에 집중되었으며, 탈식민지화의 뒤를 쫓아 전개되었다. 다량의 병력이 주둔한 중부 유럽의 변경 지대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남았던 반면, 동쪽에서는 격렬한 충돌이 불타올랐다. - P16


2023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10월 7일 이스라엘을 기습해 1,200여 명을 살해하고, 240여 명을 납치했다. 이스라엘은 ‘피의 보복’에 나섰고 현재, 팔레스타인 희생자만 2만 명을 넘어섰다. 봉쇄된 가자지구의 주민 220만 명도 생사기로에 있다.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은 세계 곳곳에서 반유대주의 물결을 일으켰다. 국제사회의 휴전 촉구에도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덧 2달을 훌쩍 넘겨버린 전장터가 된 가자지구를 떠올렸다. 중간에 일시적인 휴전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전쟁은 현재진행중이다. 


현대 아시아의 역사는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 미소 냉전으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에 의해 한쪽 편에 서는 것을 강요당했다. 1955년 비동맹운동이 일어나면서 중립 노선이 성공할 수 있을까 했으나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끝났다. 냉전이 해체되면 평화가 올 것 같았으나 강대국의 영향력은 여전하고 잠재해 있던 내부 갈등이 결합되어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폭력과 전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번역서의 제목은 ‘아시아 1945-1990’이고 원서의 제목은 ‘The Cold War’s Killing Fields: Rethinking The Long Peace’이다. 비교해보면 번역서의 제목이 지역과 시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이라고 할 수는 있겠으나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읽어보기 전에는 주제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다. 그런 뜻에서 번역서의 제목을 원서 제목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시아에서 치뤄진 폭력의 역사를 담고 있다. 저자는 같은 시기 다른 지역은 냉전이라는 미명 아래 장기 평화의 시대에 진입했으나 아시아는 남은 제국주의와의 민족해방전쟁, 이념, 인종과 종교의 갈등으로 인해 이뤄진 각종 전쟁으로 열전을 치뤄냈다고 주장한다. 

시기별로 전쟁의 성격이 구분되는데 첫 번째는 동아시아 전선으로 1945년부터 1954년 시기의 중국, 한국, 인도차이나가 그 무대다. 두 번째는 남아시아 전선으로 1964년부터 1979년까지 베트남, 라오스 및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가 그 무대다. 세 번째는 서아시아 전선으로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레바논과 이란, 아프가니스탄이 그 무대다.


기존에도 현대 제3세계가 열전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음을 많은 연구자들이 밝혔으나 저자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보다 아시아에서 열전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음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동안 아시아 지역의 개별 전쟁사를 다룬 책들은 있었으나 여러 전쟁사를 현대 시기 전반에 걸쳐 다룬 역사서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는 소중한 참고서를 얻은 셈이다.


나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남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 소중한 정보를 얻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알고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여파가 라오스, 캄보디아로 확대되었음은 잘 알지 못했었다. 또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학살과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 크메르 루주 정권의 제노사이드도 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전반적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전선이었던 서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레바논 내전, 이란 혁명,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은 미소의 전쟁 개입으로 무장 정파 등의 급진파들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면서 현재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역사라 느꼈다. 개인적으로 1~3부 중 3부의 내용이 가장 설득력 있어 좋았다. 


아쉬운 점들도 있다. 


첫 번째로,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균열 구도를 설명하는 부분은 그 근거가 빈약해보였다. 우선 양국 간 정치, 이념적 차이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아시아 전장에서의 이득적인 면이 갈등의 요인이 되었겠지만 미국과의 이해 관계가 있다는 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아무래도 제1시기와 제2시기 사이의 10년 동안 각국에서 벌어진 정치, 군사적 흐름에 대한 공백의 영향도 있지 않을까 싶다. 


두 번째로, 시기별로 주요 전장이 달라졌을 뿐이지 각 지역의 역사가 제국주의의 영향과 이념, 종교와의 갈등에서 어느 곳 하나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장에서 벌어진 일을 그 시기로 한정하려고 하다보니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특히 1971년 벌어진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은 그 갈등의 기원이 1947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947년 양국은 영국에서 분리독립되었으나 이후에도 대립 구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카슈미르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1949년 둘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전선에 의해 카슈미르가 분할되었다. 그런데 책에서는 1970년 무렵부터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료들이 미국 쪽에 치우쳐 있음이 아쉬웠다. 


여러 아쉬움들이 있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텐데 전체적으로 정리해낸 저자의 노고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앞으로도 이런 저작이 쉽사리 나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18일부터 읽기 시작해서 27일 완독하였으니 딱 열흘 걸려 읽어냈다. 최대한 꼭꼭 씹어 소화하기 위해 천천히 읽느라 시간이 더 걸렸는데 이해를 그만큼 했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도 참고서로 잘 활용할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 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반세기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미국, 유럽, 러시아에게 냉전은 마르스크주의의 혁명적 도전을 사실상 패배시켰고, 자본주의를 지배적인 정치, 경제, 시스템으로 남겨 놓았다. 그러나 제3세계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게 끝났다. 제3세계에서 냉전은 유럽 식민주의를 파멸시키면서 수십 개의 독립국가들을 창출하는 동시에 2000만명 이상을 죽이고 온건한 세속 민족주의의 힘을 파괴한 대량 폭력을 부채질하는 데 일조했다. 궁극적으로 두 이야기는 냉전 시대와 21세기 국제 질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냉전의 킬링필드에서 저질러진 격렬한 폭력은 유럽의장기 평화 못지않게 현대 세계의 형성에 주요한 요소였다. - P872~873


동아시아를 위한 전투는 초강대국 투쟁을 제3세계에 가져왔다. 이 지역 전역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자 미국 지도자들은 세계 지배를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목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1949년10월부터 1950년 6월 사이의 몇 개월은 제3세계에서 냉전이 형성되는 데 핵심적인 기간이었다.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주의 대국으로 등장하자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이 뒤집혔고, 개발 도상 세계 전체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커졌다.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냉전 지도자들은 중국, 한국, 인도차이나에서 맹렬히 진행된 일련의 아시아 혁명들을 두고 하나의 응집된 전선으로 결합해 전략적 계산을 수행했다. 한편 동쪽에서 공산주의가 승리하자 주저하던 소련 지도자들은 아시아 혁명가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과 동지들은 냉전 투쟁의 방향을 중부 유럽에서 동아시아의 포스트식민주의국경 지역과 그 너머로 돌렸다. - P88

1954년 제네바에서 소련과 중국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국익을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 공세를 계속한다는 목표보다 위에 두었다. 그러나 베이징과 모스크바는 그 모든 승리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정치적, 이념적 이해관계 속에 뿌리박힌 극심한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중국 내전 동안 스탈린이 했던 미온적인 지원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중국 지도자들은 개발 도상 세계의 사회들에 소련 모델을 적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 P267

베이징과 모스크바 사이의 균열이 깊어지면서 개발 도상 세계에서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쿠바 미사일 위기 동안 미국과 최후의 대결을 벌이면서 의기소침해진 흐루쇼프는 포스트식민주의 세계에서 소련의 자세를 더욱 행동주의적으로 취함으로써 제3세계 동맹자들에게 모스크바의 신뢰를 회복시킬 필요에 직면했다. 한편 중국 지도자들은 처참한 대약진운동의 경험을 잊어버리고 제3세계 혁명 프로젝트의 리더십에 대한 그들의 권리 주장을 강화하기를 바랐다. 1960년대라는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면서 베이징도, 모스크바도 비서방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교묘하게 움직였다. - P280

크렘린에 대한 베이징의 적대감이 증대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학살당했으며, 중소 국경 충돌이 1969년에 발생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노이를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중국 지도자들은 워싱턴과 관계 회복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71년 방글라데시 해방전쟁부터 1979년의 중국-베트남 전쟁에 이르는 동안 워싱턴과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소련과 그 동맹국에 맞선 투쟁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제휴 관계를 형성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방글라데시, 캄보디아의 전쟁은 공산주의 세계를 갈갈이 찢어놓았고 제3세계 공산주의 프로젝트를 완전히 파괴했다. - P554

냉전 시대의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혁명전쟁의 경로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부터 새로운 지역으로 두드러지게 이동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 사담 후세인, 오사마 빈 라덴은 포스트냉전 시대의 국제정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었다. 이 세번째 충돌의 물결은 좌익 게릴라들이 친서방 정부와 싸우는 이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났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아니라 종교적, 인종적 정치에 사로잡힌 새로운 유형의 급진주의자들이 선두를 차지했다. "동도 서도 아닌" 새로운 길을 개척한 이 다음 세대의 전사들은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영향력을 모두 거부했다. 냉전 말기의 종파 전사들은 외부 세력에 맞서 싸우는 만큼이나 서로를 상대로도 싸웠다. - P558

대대적인 종파 반란의 전쟁들은 레바논,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투적 그룹들을 급진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파키스탄의 군사화된 정권들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포스트식민주의 세계 전역에서 맹렬하게 진행된 충돌들에 미국과 소련이 퍼부은 군사적, 정치적, 재정적 지원은 온건파를 파멸시키고 세계의 사회들을 급진화하는 데 일조했다. - P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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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28 0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리뷰 읽고 이 책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분량이 어마어마하네요.
저 미국이 캄보디아 폭격했다는 걸 알았을 때 되게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그 커다란 나라가 도대체 그 작은 나라를 왜 폭격하는거야? 하고 말이지요. 그때 정말 대충격이었는데,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12-28 09:05   좋아요 2 | URL
미국은 아시아 대부분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과 러시아(소련)은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죠.
아무래도 시기도 길고 전 아시아의 역사를 다루다보니 분량은 두껍지만 필독서임에는 분명합니다. 현대의 아시아를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거에요.

잠자냥 2023-12-28 0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에 담아두기는 했는데, 필독서군요!!

다락방 2023-12-28 08:59   좋아요 2 | URL
나에겐 오늘 잠자냥 님이 쏘아준 600원이 있다.. 이 책을 사기에 충분하지!!

거리의화가 2023-12-28 09:03   좋아요 1 | URL
두분 다 꼭 읽어보셔요! 좋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