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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의 계보학 -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든 서사들 ㅣ 메두사의 시선 4
실라 미요시 야거 지음, 조고은 옮김, 정희진 시리즈기획.감수 / 나무연필 / 2023년 10월
평점 :
헤이든 화이트와 폴 리쾨르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과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본질적 관계를 언급한 바 있다. (…)
우리가 과거를 서술하기 위해 무언가를 선택하는 방식은 우리가 자신의 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 P179
나는 어떤 세대에 속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새마을 운동의 위대함에 대해서 교육을 받았고, 1980년대 민중의 항쟁을 전해 들었으며, 조회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국민 체조’를 교육 받고, 고등학교 때까지 교련 수업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이 국가주의에 대한 교육이나 세뇌였음을 지금은 인지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만 해서 싫었는데 지금은 그 때를 향수처럼 기억하기도 하는 반면 씁쓸하거나 불쾌하게 느끼게도 한다.
국가가 국민을 알게 모르게 의식화시키기 위한 작업들이 일상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기념 사업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나는 종종 전쟁 기념관을 들러 전시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나마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는데 만약 멀지 않았다면 현충원도 가지 않았을까. 국립서울현충원이 국군 묘지에서 출발하여 애국지사 묘역으로 조성된 것처럼 전쟁 기념관도 한국 전쟁을 기념한다는 이유에서 조성되었다.
<애국의 계보학>은 한국의 근현대 시기의 역사에서 이상적인 미래로 내세운 관념이 무엇이었는지 그 계보를 추적하는 책이다. 한국의 역사를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분석한 책들은 있으나 이를 젠더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는 것이 이 책의 특별한 점이다.
젠더 담론이 항상 혹은 반드시 젠더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젠더란 상호적으로 구성되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여성과 남성의 범주로 개념화된다. 그리하여 젠더 체계는 다중적이고 가변적인 방식으로 다른 문화적, 정치적, 미학적 구조 및 경험의 양식과 서로 연관된다. - P11
젠더 담론이 사회의 구조를 해석하는 데 필수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젠더에 대한 이해 없이는 사회를 온전히 해석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른 책들처럼 일반적으로 시간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정체성, 남성, 여성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개인이 젠더적 주체로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살펴보게 한 것이 효과적이었다 생각한다.
저자는 신채호를 한국 근대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 최초의 인물로 제시한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 태왕 등 고전적 영웅을 이상화하여 끌고 온다(그는 위인전을 많이 썼다). 신채호는 당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낡고 헤진 조선을 뒤로 하고 근대적 이상향을 제시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과거의 복기를 통한 회복 방법이다. 살라 미요시는 그가 근대성으로 제시한 방법이 무사, 영웅으로서의 ‘남성성’이라고 이야기한다.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박정희도 이상적 현대의 모습으로 신채호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다. 18년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이순신 등 영웅의 부활 사업을 꾸준히 추진했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을 개혁한다고 했지만 이는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국가를 이상화시키는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일본식 군사 교육을 받았고, 일본 장교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자신의 체제에 적용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구미시가 박정희 기념 사업을 위해 근현대사 명소를 만든다는 추진 계획을 밝혔고, 경상북도는 새마을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국내가 아닌 아시아 및 아프리카 16개국에 시범마을을 조성한다고 한다. 새마을 운동이 성공적인 모델임을 자인하는 것이며, 나아가 박정희를 여전히 기념하기 위한 숨은 포석도 있다고 생각된다.
김일성은 남한에서 실패한 군사적 남성성 대신 과거의 유교적 모델에서 부성애를 강조함으로써 1980년대 학생들 사이에서 붐을 일으켰다고 이야기한다. 김일성 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남한의 이상과 현실이 학생들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된다. 박정희 뿐 아니라 전두환도 국민과 국가를 단결시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으나 실상 잘 되지 않았고 실패했다. 올림픽 개최, 행사 등 국내외 사업을 통해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려 했다는 점을 지금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살라 미요시가 다룬 인물 중 이광수는 앞선 인물들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급된 작품 <무정>,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 <윤광호>, <사랑인가>를 읽었는데 다시 읽어봐도 저자가 제시한 관점은 놀랍기 짝이 없다. 나는 그저 사랑을 통한 계몽, 해방 의식 정도를 느낄 뿐이었는데 그는 이광수가 사랑의 상실을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종국이 ‘여성’이라고 하는 귀환점이었다고 말한다. 귀환은 출발점이자 도착점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고 집, 나아가 국가,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광수는 근대적 여성의 모델을 제시했지만 그 이상적 근대성이 일본을 모델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전쟁 기념관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전쟁 기념관은 전쟁 영웅을 숭배하여 기림으로써 국민을 교육시키고 나아가 국가를 개혁시키고자 만들어졌다. 나는 전쟁 기념관을 둘러보며 한국 전쟁 이후의 전시에 주로 집중했던 것 같은데 살라 미요시는 전시 중 조선 시대에 가장 긴 할애를 하고 있다고 했다고 하여 놀랐다. ‘형제의 상’도 봤을 것 같은데 생각이 흐릿한 것을 보면 주목하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광개토 대왕비(복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부 전시들보다 사실 외부에 있던 전쟁 전사자들을 적어놓은 공간이 기억에 또렷하다. 건물 설계자는 의도적으로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관람객으로 하여금 숭고함을 느끼도록 표현했다는 것을 보면 이는 제대로 성공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한국의 유교화 과정>, <냉전과 새마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일상적 민족주의>가 연관되어 떠올랐다. 이 중 <한국의 유교화 과정>과 <일상적 민족주의>는 읽으려고 생각했던 책인데(심지어 <일상적 민족주의>는 샀는데) 아직 읽어보지를 못했다. 이후 읽는다면 관련하여 좋은 자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선 뒤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오직 이행의 개념으로만 이해하고자 했던 포괄적 역사 이론의 실패한 약속을 반성하면서, 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사로잡히지 않고 국민국가의 역사를 써야 한다는 과제가 제시되었다. 그러한 전략의 결과가 차이와 저항의 행동을 통해서든 역사 서사 전체를 회피하는 것을 통해서든 그저 지배 문화를 다시 쓰는 것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보적 역사에 대한 이전의 비판 전통으로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벤야민이 말했던 ‘변증법적 이미지’, 즉 그가 감춰지거나 잊혔을 과거와의 연결이 현재 속에서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며 밝혀지는 각성의 순간이라 부른 관점을 통해 국가를 개념화했던 방식을 비로소 재고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가의 과제는 텍스트, 사건, 이미지의 병치로 드러나는 여러 겹의 의미적 층위를 벗겨내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하고 예상치 못하거나 숨어 있는 연결을 (재)포착하는 것이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