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이타가키 류타 지음, 고영진.임경화 옮김 / 푸른역사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다보니 작년부터 언어, 개념, 학문 체계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여러 권의 책을 읽다 보면 겹치는 영역이 생기고 그 때는 이해되지 않고 넘겼던 것들이 이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짜릿함과 성장의 기쁨이 아닐까. 


거의 1년 만에 독서 모임을 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북한의 언어학자 김수경이라는 인물을 파헤친다. 개인의 역사이자 평전이지만 조선어학 이론을 확인할 수도 있다. 서술 방식이 독특한데 역사와 이론을 교차로 배치하여 낯선 인물과 역사, 그의 이론 중 끌리는 부분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두 달 전쯤 한국어 맞춤법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느낀 바가 있었다. 한글 맞춤법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훨씬 복잡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내가 잘못 써온 맞춤법을 마주하며 쉴 새 없이 머리에 돌 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하물며 현재 북한에서 사용 중인 조선어는 어떨까. 두음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고 봐야 했다.


'우리말' 개념은 그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 단어 어디에도 국가를 지시하는 요소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말'에는 분단 상황을 일단 괄호 안에 넣어 탈분단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겨레말'과 달리,'우리말'에는 민족이나 국민을 나타내는 요소조차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의 설정에 따라 자유자재로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 

여기에 일본에 사는 나와 같은 일본인이 이 언어를 '우리말'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의가 있다. 내가 '우리말'이라고 하는 순간, 위화감을 느끼는 독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 뭔가 '이물질' 내지 '침입자'가 들어온 듯한 감각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위화감도 모두 포함하여 '우리말' 개념의 가능성에 걸고 싶다. 장뤼크 낭시는 동질성과 단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존재와 복수성에서 공동성을 사고하려 했다. 낭시에 따르면, 전혀 공통성이 없는 특이한 존재들 간에 있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며,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특이한 존재가 형성된다. - P6~7

'우리말'과 '우리 나라'는 서로 다른 범위를 갖고 있다. '우리 나라'는 영토와 주권이 단일한 공간이라면 '우리말'은 그보다 더 다층적이고 넓은 범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김수경이라는 낯선 인물, 낯선 이론을 만났다. 서두에서 깔기는 했지만 조선어의 이론 부분은 역시 어려웠다. 그러나 이론이 어려워서 힘들다 싶으면 그의 흥미로운 역사를 풀어 놓기 때문에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저자인 이타가키 류타는 문화인류학자인데 전작에서 식민지 시기 한국의 상주라는 공간의 지역사를 훓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필 김수경이라는 개인에게 꽂혔는가 궁금했다. 2009년 연구년을 맞아 보스턴 근교에 머물렀던 저자는 2010년 북미에 거주하는 한반도 북부 출신들과 인터뷰 조사를 위해 캐나다의 토론토를 방문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사 자리에서 임혜영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언어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혜영은 당시 토론토 대학에서 외국어 교원으로 근무 중이었고 아버지는 짐작하겠지만 김수경이다. 그 때는 김수경이라는 학자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교토에 돌아왔다가 주변 연구자들에 의해 그가 북한 언어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임을 알게 된다. 이후 그를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본격적인 자료 조사를 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 이 책의 집필의 출발점이 되었다. 


김수경은 1934년 경성제대 예과를 만 15세에 입학하고 1937년 만 18세의 나이에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했다. 그는 법문학부에서 철학과를 선택했는데 당시 학부에 언어학 강좌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공이었다고(그렇지만 그 와중에 순수철학을 공부했다는 게 놀랍다). 김수경은 진작부터 언어학에 관심이 있어서 고바야시 히데오(소쉬르의 이론을 번역함) 연구실을 찾아간다. 그는 일본어학, 조선어학를 넘어선 일반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1940년 도쿄제대 문학부 대학원에 입학하여 4년 간 재학하면서 조선어학자인 이희승을 만나 친하게 지냈고, 또 이남재와 결혼을 한다. 1944년 자퇴를 하는데 조선어학 교수인 오구라 신페의 퇴직, 아내의 임신, 막바지에 이른 전쟁으로 학도병으로 출진해야 하는 상황 등의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 그리고 그는 언어 천재였다고 한다. 무려 9개국어를 했다고. 그가 언어학에 관심이 있었던 이유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해방 후, 김수경은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좌파가 주도한 자치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치위원회 내부에서는 김수경을 조교수로 언어학 강좌를 맡기로 내정했으나 당연히 미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실제로는 이희승이 맡았다고). 그는 11월 30일자로 경성대학 자치위원회 위원을 사임했다. 이처럼 그는 해방 후에도 좌파 지식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국어국문화보급회, 조선언어학회에 참여하여 언어학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북한에서 김일성대학의 창립이 결정될 무렵 남한은 서울대학교 설립 계획이 추진된다. 그는 1946년 5월, 경성제대 동기생인 박시형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김석형, 박시형과 함께 8월 17일 월북했다.


조선어의 문자체계의 터를 잡는 역할을 한 것은 김두봉이다. 김두봉은 한자의 폐지를 실시하고, 풀어쓰기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1948년 조선어 신철자법에 그대로 반영이 되는데 여기에 김수경도 함께 참여했다. ‘조선어 신철자법’에서 핵심적인 것은 두음법칙의 폐기, 절음부의 도입, 신6자모 도입이었다. ‘토’의 개념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접사, 의미 중 문법상 의미를 가지는 것만 따로 분류한 말이다. 나는 이 중 풀어쓰기와 두음의 고정 표기, ‘토’의 개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만 풀어쓰기는 나중에 사용상의 문제로 버려지게 된다. 생각해보라. ‘감’을 한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것을 ‘ㄱㅏㅁ’ 이렇게 표현하면 글자 수도 3개가 되고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등의 문제가 생긴다.) 


김수경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20세기가 되면,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이 주류를 잡게 되고 구조주의가 유행한다. 문헌학으로 대표되는 개별화와 구조언어학으로 대표되는 일반화는 근대 언어학의 지향성이 두 축이 되었다. 김수경 언어학의 초기 업적에는 ① 구조언어학, 나아가서는 언어철학 등 좀 더 보편적인 언어 문제에 대한 지향성, ② 조선어에 관한 개별 구체적인 역사언어학에 대한 지향성, 그리고 그 양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해방 후, 특히 월북 후에는 언어가 '이래야 한다'는 표준을 책정하려는 언어학, 즉 ③ 규범의 창출이라는 실천적인 언어학이 더해진다(P86~87). 


스탈린은 “민족이란, 언어, 지역, 경제 생활 및 문화의 공통성에 나타나는 심리 상태의 공통성을 기초로 생겨난, 역사적으로 구성된, 사람들의 견고한 공동체이다”고 할 정도로 언어의 중요성을 알았다. 이 구조를 실현한 언어학자가 니콜라이 마르와 그 학파였다. 마르학파는 스탈린이 최고지도자 지위에 있을 때 활약했는데 김수경이 여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지향한 조선어학은 규범화, 구조화에 바탕한 것으로 국제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민족적 자주’ 개념이 강조되면서 조선어 문법에도 변화가 생겼고 관련하여 김수경은 가장 바쁜 세월을 보낸다. 1956년까지 김수경은 김일성종합대학의 ‘과학연구부장’이라는 직위에 있었다. 그는 김두봉의 사상 비판 때 활동에 제약을 받기는 했지만, 계속 교육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1967~68년 김일성 유일 체제가 진행되면서 대학을 그만두고 교육 일선에서 물러나 도서관장을 맡게 된다. 다행히 1980년대 후반이 되면 복권이 되고 그의 업적이 재조명된다. 


간단하게 그의 연구와 업적과 관련하여 설명했는데 사실 개인사는 훨씬 드라마틱하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그는 교육 때문에 진도에 내려가야 했다. 전쟁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아내와 딸들은 이남으로 내려갔고 그렇게 가족은 영영 헤어지게 되었다. 교수이자 학자로 엘리트였음에도 그는 입대해야 했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김수경은 1986년에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학술토론회로 주최자였던 최응구의 도움으로 둘째 딸과 재회할 수 있었다. 1988년에 둘째 딸은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6년 큰 아들과 재회하였고 아내였던 이남재와는 1988년에 만날 수 있었다. 김수경은 2000년 영면한다. 그의 부고가 알려지자 “20세기 남북한을 통틀어 최고의 국어학자 중 한 명”이라는 식자의 언급과 함께 신문에 보도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2006년 ‘동숭학술재단이 선정한 언어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지역 연구를 포함한 오늘날의 학문 분야를 낳은 식민주의와 냉전이라는 힘에 대해, 비판적인 지역 연구로서의 '비판적 코리아 연구'라고 말하고 싶다. 월러스틴과 마찬가지로 학문 분야의 장벽을 넘어 국민국가를 초월한 분석을 시도하지만, 중요한 것은 단일한 세계체계 분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등장했을 때의 비판적 계기를 계승하는 것, 즉 식민주의와 냉전이 남긴 틀의 재생산에 봉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깨뜨리는 앎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작업을 추상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재외 코리안의 경험에 끝까지 접근하면서 앎을 재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코리아학'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코리아학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식민지기부터 냉전기를 거치면서 다양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었던 '조선', '남한', '북한'이라는 카테고리를 일단 괄호 안에 묶어서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 P12~13


저자는 이 책에서 김수경이라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전체사'를 그려내려고 했다. 한정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개인의 역사를 온전히 재구성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개인사=전체사'는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시도를 한 것은 한 사람의 역사가 보여주는 다채로움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김수경은 20세기 대부분의 시기를 살아낸 인물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하여 해방 전후, 북한의 현대 시기까지 개인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평전으로는 충분한 평가를 주고 싶다. 조선어학 이론의 기초도 얻을 수 있다. 다만 저자가 말한 대위법적 평전의 시도가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대중을 생각하여 가능한 쉽게 써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학문사다보니 개념이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내가 5별을 준 것은 저자의 노고에 감사하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모으고, 인터뷰를 하는 등 추적이 결코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다. 잘 읽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4-03-26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 나라 말을 잘 아는 사람은 대단해요 여러 가지를 알면 비슷한 점이나 다른 점을 알기도 하겠습니다 북한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기를... 식구들과 헤어진 건 마음 아팠겠네요 나중에 만났다고 해도...


희선

거리의화가 2024-03-26 14:07   좋아요 2 | URL
진짜 천재는 괜히 천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영어, 중국어 공부만 하는데도 허덕이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그 분의 지위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회를 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나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캠브리지 중국사 10 - 하 - 청 제국 말 1800~1911, 1부 캠브리지 중국사 10
존 킹 페어뱅크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령 내륙아시아의 이후의 역사는 한족의 정주, 한족화 그리고 전에 비중국적이었던 사회의 보다 큰 중국으로의 통합 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청조가 이룩한 것도 부인해서는 안 될것이다. 내부 반란과 유럽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살아남았고 청의 질서는 최소한의 변화만을 허용한 채 계속 유지되었다. 청조가 처해 있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청이 이보다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P610~611


이전 권에서 1800년 경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와 청의 조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면 이번 권에서는 1820년~1830년 무렵의 시기를 살펴본다. 특히나 청과 러시아 사이 국경을 둘러싸고 아이훈 조약이 맺어지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로웠다. 시작은 다른 내륙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교역 관계의 문제였는데 1854년 크림 전쟁의 발발로 러시아가 영국을 경계하면서 청과의 접경 지역을 더욱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이 과정을 청은 주도적으로 끌고갈 수 없었는데 이는 태평천국운동으로 내부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1858년 아이훈조약과 텐진조약을 차례로 맺으며 양국 간 북쪽의 국경선이 정해지고 항구를 개방하며 러시아인에 대한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로서 동북 만주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몽골 유목 사회는 사원 제도가 정착하면서 출가에 따른 남성 인구가 감소하였고 한족 세력이 침투하여 몽골인의 채무가 늘어나 약탈, 걸식으로 내몰리자 일반인들은 빈민화되었다. 몽골의 방목지까지 감소하면서 먹고 살 길은 더 어려워졌고 이에 도시 지역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청 조정도 처음에는 한족이 이 땅에 이주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나 관리를 파견하고 조세 수입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통해 우호적인 입장으로 변화하였다.


몽골 지역에서 청조의 목적은 중국인들의 오랜 목표, 즉 유목민들을 변화시켜 중국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 점에서 만주족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몽골인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 만주 지역에서 준가르 지역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감소했고 가축과 영토 또한 크게 감소했다.

신장에서 만주인들이 원한 것은 평화와 공식적으로 청조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동투르키스탄인들은 중국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지역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이슬람 문명의 성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모든 권위의 정점에는 황제가 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제국 질서의 초석에 도전적이었다. 황제는 라마교도가 되지 않고도 라마교의 합법적인 후견인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 되지 않고서는 무슬림 세계에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P701


몽골이나 신장과 달리 티베트는 자기 고유의 토착적인 중앙 정부를 갖고 있었다. 티베트의 군사력은 중국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 결과 만주족은 이 종교 국가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권위를 약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그의 권력을 강화시켜 주었다. 19세기 내내 달라이 라마 정부의 권력은 증대되었고, 베이징은 외국의 영향력을 배척하고 티베트의 고립을 유지하려는 라싸의 노력을 지지했다. - P702~703


1830년대 신장의 역사는 놀라웠다. 그 지역을 꽉 잡고 있던 세력은 코칸드 정부로 청 조정은 1840년대 난징조약 등 외국 세력과 맺은 다양한 사항을 미리 이행하는 과정을 거쳤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 등의 조항이 있는데 향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조약에서 볼 수 있는 비슷한 내용들이다. 티베트도 네팔과의  사이에서 코칸드 정부와 비슷한 협상을 거치며 1856년 조약을 맺었다. 


청조는 태평천국운동 세력들을 물리치면서 쌓여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했다. 증국번은 양쯔강 이남 지역의 농촌에 토지세와 부가세를 줄이면서 농민들이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했고 조정 관료의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인재 선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반면 화북 지방에는 소금 밀매업자인 염군이 활동했는데 그들은 의적을 자처하며 핍박 받는 백성을 구제하고자 일어났고 1868년 무렵이 되면 그들이 화북 전체로 집단화되어 민란이 번진다. 때문에 조정의 입장에서 민란은 태평천국 이후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세력이었을 것 같다.


메리 클래버 라이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조뿐만 아니라 붕괴된 것처럼 보였던 문명 또한 1860년대 걸출한 인물들의 걸출한 노력으로 살아남아 이후 6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것이 동치중흥이다. - P808

메리 라이트의 탁견은 앞으로도 이 시기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청조의 중흥은 "중국의 전통적 제도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주장하기 위한 최후의 위대한 노력을 대변하며 "당시의 위대한 사람들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 승리를 보았다" 는 것이 그녀의 최종적인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미 1870년대 초 장쑤 성, 산둥성, 직예성 등에서는 구질서가 분명하게 회복되었다. 쑤-쑹-타이 지역의 ‘대호들‘은 탈세를 계속했다. 아역들은 다시 산둥 성에서 활동하기 시작해 세금 징수를 독점하거나 부가세를 착복했다. 거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층 신사들(심지어 예성의 하층 신사들조차)은 세금 징수인 혹은 말썽많은 ‘송‘ 혹은 송사가 되어 아역과 결탁하거나 경쟁했다. 대규모 반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서양식 무기를 이용할 수있게 된 여러 성의 용영, 심지어 재훈련된 녹영군 때문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청조가 관료 인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게 되면서, 총독과 순무가 지방 관원 임명에 대한 역할을 확대시켜 행정적 개혁을 모색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융통성이 점차 제한되었다. - P824~825


2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며 청 조정의 관료들은 전통적인 유교식 덕치주의 정치에 대한 한계를 깨닫는다. 이제 과거와는 단절하고 외국 열강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함을 느낀 것이다. 특히나 전쟁에서 확인한 서양의 대포를 비롯한 화기는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들은 부국 강병책을 위해 서양 무기 수용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게 된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 맞춰 의견 갈등은 있었으나 정도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대부분은 수용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전통과의 단절에 대한 압박은 서양 종교의 포교의 영향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 선교회는 일찍부터 청에 들어와 포교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직 체계를 세우고 청나라 전 지역에 대한 자유로운 이동, 경비 마련 등이 필요했다. 1860년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조약이 체결되면서 중국에서의 모든 기독교 선교가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과거의 유산은 깊었다. 송나라 시기 이후 기독교는 유가적 세계와 충돌을 일으켰으며 기적에 의한 기독교적 신앙이 정치 전복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며 이단화된다. 결국 옹정제 때 기독교 금령이 내려지는데 결정적으로 태평천국운동 세력이 기독교에 배경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더 수용할 수 없는 배경이 되엇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서로에 대한 이해였다. 서양인들이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청나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으며 반대로 서양인들도 청나라 사람들의 문화,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서로 다가가지 못한 기간이 이토록 길었던 것이다. 

청나라 말기 선교가 자유화되며 기독교 세력은 확대되지만 중국 내 자리잡는데는 실패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청나라 사람들은 서양의 지식은 수용하고 종교는 거부하는 이중 전략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10권 상/하권 읽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잘 안 읽혀서 고생했는데 책에 대한 감을 잡고 나니 그 이후에는 읽기가 더 매끄러웠다. 책에서 특히 만주, 신장, 티베트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캠브리지 중국사 10 - 상 - 청 제국 말 1800~1911, 1부 캠브리지 중국사 10
존 킹 페어뱅크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중국의 근대사는 두 개의 커다란 드라마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국제 교역과 전쟁을 무기로 팽창을 거듭해온 서구 문명과 농업과 관료주의를 무기로 이에 끈질기게 저항한 중국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이며, 이러한 충돌의 와중에서 미증유의 혁명을 거치며 이루어진 중국의 전면적 변화가 다른 하나이다. - P24


캠브리지 중국사 10권부터 11권까지는 1800년 무렵부터 청 제국 말기까지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캠브리지 중국사 시리즈는 오래 전 나온 책이지만 중국 통사를 전반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이다. 아쉽게도 청나라 역사를 제외하고는 앞부분은 모두 절판이거나 품절되어 현재는 구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청나라의 역사는 구입이 가능하여 구해서 읽었다.


18세기 청 제국은 유럽 세력이 확대되고 영토가 늘었으며 한족 인구가 증가하였다. 전사-통치자들의 간헐적인 침입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촌락 생활은 외관상 사회적·기술적으로 갑작스런 변화에 의해 중단되는 일 없이 이때부터 지속성을 유지한 채 꾸준히 발전해온 것 같다. 촌락 공동체 사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 또한 오랜 전통을 지닌 중국 지배층의 특별한 관심사였다. 왕조는 계속 바뀌었지만 이들 지배층은 점차 복잡한 관료주의 통치 조직을 창조해냈다. 1800년 이후까지 이처럼 농업-관료주의에 기반한 중국 제국은 유럽의 상업적 군사적 사회보다 훨씬 오래된 그리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회 질서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중국의 농업 공동체에서는 폭력의 사용을 포함해 개인의 용기와 적극적인 태도가 해상 활동, 전쟁, 탐험, 해외 이민 등을 추구하는 유럽 사회에서와는 달리 그리 중시되지 않았다(P38).


인구 압력의 영향은 청대에 들어와 대규모의 국내 이민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전달되었는데, 일반적으로 18세기 초 이후 인구의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고 또한 반란이 가장 쉽게 발발한 곳이 바로 이들 변경 지역이었다. 예컨대 타이완 섬, 쓰촨의 산간 지방, 광시의 낙후된 향촌, 후난과 구이저우의 접경 지역의 먀오족 거주 지역 등이 그러했다. 이들 지역의 사회적 특징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지역들 속에서 일련의 반란을 조장한 몇 가지 공통적인 요인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강력한 공동체 의식이나 준종족적 자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변경 지역 사람들의 종족적 이질성으로 인해 첨예화하고 때로는 언어의 불일치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다. 또 다른 한 가지 특성으로는 불안정한 변경 지대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비적들의 출몰이나 집단 간 분쟁으로 인해 고도의 무장화가 필연화된 것을 들 수 있다(P222).


19세기 초가 되면 중앙 정부의 힘이 지방 정부에까지 미치지 못한다. 지방의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착취하고, 이들은 살 길을 찾기 위해 들고 일어나거나 점점 거세지는 상업화의 물결에 맞춰 도시로 나아간다. 도시에는 정기 시장이 생기고 상인이 늘어났으며 교역을 위한 해운업이 자연스레 발달하게 된다. 하지만 농촌의 지식인층은 여전히 상업을 천시하며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걸으려 했기 때문에 이들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관료와 지식인 간에 인맥 네트워크는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각종 불법과 부패를 낳는 효과를 낳는다. 가경제는 인사와 재정 지출 문제에 칼을 들이대며 개혁을 추진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민중의 항세 운동이 거세지자 정부는 진압을 하고, 이는 지방 사회를 더 분열하고 해체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 


홍수전은 (꿈을 꾼 뒤) 기독교로 개종하고 광시성에서 포교를 하며 신도를 끌어 모아 배상제회라는 조직을 만든다. 이때 배상제회의 구성원이자 홍수전의 사촌인 풍운산이 체포된 뒤 홍수전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조직의 지도자들이 변경되고 이들은 태평천국 성립을 선포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평등주의적 메시지가 가난한 농민과 토지가 없는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운동이 성립하기 전 조직의 지도자들끼리의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정부는 태평천국운동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증국번을 지도자로 한 군대를 결성하여 대응하게 했다. 

태평천국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이는 조직의 지도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내부 분열, 정부의 반란 대응군 추가 투입(여기서 이홍장 등장),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하여 태평천국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1864년 7월 19일 태평천국군은 난징성을 점령당하며 주요 흐름은 소탕되었다(이후에도 몇 년 더 이어졌지만 새 흐름을 일으키지 못했다).


19세기 중반 중국의 농촌 사회는 각종 반란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태평천국군은 이들과 겨우 사후에나 전술적으로만 협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좀더 쉽게 진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태평천국은 전통 사회의 가치와 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점령한 도시의 배후에 있는 내륙의 농촌에까지통제력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태평천국에게는 도시가 제국의 정통성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그곳에서만이 그들의 독특한 제도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중국 고유의 농촌 조직 형태들은 오히려 정통 신사들에 의해 쉽게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중심 도시를 태평천국군에게 점령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에서 지방 방어 조직을 이용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과 이들이 통치하려고 한 농촌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격은 종종도시와 농촌 사이의 간격과 일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격차는신기하게도 서양 세력이 조약항에 침투하면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중국이 겪게 될 문화적 분열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P528).


1800년 이전 청은 내륙아시아의 다양한 민족들을 포섭하고 흡수하다가 1800년 이후가 되면 그 범위를 본토와 연해까지 확장하게 된다. 1800년 당시 내륙아시아는 크게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의 4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4개 지역 모두에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통치를 위한 행정 구조는 각기 달랐다(P84). 청은 현재의 통치 시스템을 건드리지 않는 상태에서 주변 민족들을 포섭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사실 청이 그들에게서 원한 것은 오직 평화였다. 만주인의 내륙아시아 정복은 이윤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적대적 세력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륙 방면에서 중국 본토는 안전하게 보호받았다. 그러나 변경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령 인도의 팽창은 티베트의 청조 당국에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신장, 몽골, 만주 등의 변경에서는 러시아 세력이 대두했다. 그러나 중국 본토에서 보면 이들은 먼 지방의 문제였다. 1815년 베이징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거의 감지조차 되지 않았다(P184). 19세기 중반 무렵이 되어서야 변경 문제가 비로소 현실화된다.


1800년 무렵 청 정부는 외국 상인들을 인가 받은 교역 업자들만 독점적으로 상대하게 했다. 교역업소에 황제가 임명한 감독관이 파견되었는데 외국 상인들로서는 그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고 정부 입장에서도 여기서 들어오는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에 감독관의 부패를 묵인하는 경향도 발생했다. 특히 광저우는 상업의 중심지로 온갖 물자가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편은 18세기 금지되고 윤리를 파괴시키는 물품으로 인식되었음에도 중국 전역에 자유로운 무역 거래가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영국 상인들은 아편의 합법화를 주장하며 들고 일어섰고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 대신으로 임명하여 아편 폐단의 근원을 뿌리뽑도록 지시한다. 임칙서는 국가의 힘으로 아편 중독자를 구해야 한다는 원칙론자였다. 1차 아편 전쟁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1차 아편 전쟁의 결과 난징 조약이 맺어진다. 조약의 내용은 기존의 특정 항구(광저우) 중심의 사무역이 아닌, 국가 대 국가의 외교 관계를 맺는 방식을 지시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공식 문서들은 번외의 이인들을 ‘영역‘ 즉 ‘영국 반역자‘로, 베이징 중심의 세계 질서에 속해 있지만 그에 반항하는 반역적인 존재들로 묘사하고있다. 게다가 그들이 무력에 의존하는 것은 ‘반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조약항 체제는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de novos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중국의 환경 속에서 자라나온 것이었다. 조약항 내의 외국인 거주지와 통상 지역을 지정하고, 상대국에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을 허용하며, 다른 외국과의 교섭에서 최혜국 대우 등을 규정한 새로운 조약의 조항들은 모두 중국전통의 확대였으며 제도로 볼 때 원래는 과거의 관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다. 항구들이 새로 개항된 1840년대에도 조공 사절단은 계속 베이징을 방문했다. 조선은 매년, 류큐는 7년에 한 번, 베트남과 시암은 3년마다 한 번씩 보내왔다. 조공에 관한 각종 규례와 기록들은세부적인 내용까지 하나하나 보존되어 있는데, 이번원을 통해 몽골이나 기타 중앙아시아 각 민족의 수장들이 표한 충성의 표시까지 기록되었다. 아편전쟁은 오늘날 회고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대격변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다(P382).


1856년 로이처선 애로호 사건을 배경으로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이에 따라 청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중국의 하천과 해안을 모두 개방하게 되었으며 아편 무역이 합법화되었다. 이어진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청은 홍콩의 주룽반도를 영국에 할양하게 되었다.


포함 외교 - 즉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이용한 강요-를 통해 시작된 불평등 조약 체제는 외국의 조약 열강들에게 중국 영내에서 상당 정도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모습은 1860년에 이르러 확고해졌다. 즉 조약향의 자국민들에 대한 영사 재판권(치외법권), 조약항 내 조계들의 자치권, 중국 영해에서의 외국군함의 활동 허용과 중국 영토 내 외국 군대의 주둔, 외국 선박의 중국연해 교역과 내지 항해 허용, 그리고 조약에 의한 관세권의 제한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외국의 권리와 특권이 추가되면서 중국의 주권 행사 범위는 한층 더 축소되었다. 상업, 재정, 군사, 산업, 기술등 여러 면에서 초강대국인 이들은 점점 더 중국의 전통 사회, 정치, 문화를 파괴적으로 잠식해 들어갔다(P438).


작년부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를 읽어오고 있다. 이번에 캠브리지 중국사를 읽어보니 하버드 중국사와는 서술 방식이 다르다고 느꼈다. 하버드 중국사는 시간 순으로 나열된 역사가 아님은 이미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캠브리지 중국사는 목차만 보면 시간 순의 역사가 아닌 것 같지만 앞부분을 제외하고는 내용상 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다고 느꼈다.


10(하) 권의 내용은 점점 확대되는 외국 세력에 맞서 중국이 스스로 어떻게 맞서려 했는지를 다루는 것 같다. 바로 읽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움직이는 국가, 거란 - 거란의 통치전략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109
김인희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려거란전쟁> 사극을 계기로 고려 당대의 역사와 관련 인물들이 재조명되었다. 더불어 당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거란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 책을 구입한 것은 한참 되었는데 이제야 펼쳐보게 되었다. 뒤늦게 읽었지만 기대만큼이나 만족스러웠다. 


《요사》는 거란의 전체 역사를 시기별로 세세하게 조명한다면 이 책은 거란이라는 나라와 거란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을 서술함으로써 거란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데 도움을 준다. 더불이 이 책을 읽으면서 송, 고려 등 주변 국가의 역사를 교차하여 읽는다면 통합적인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거란의 국호 중 한자로 ‘요’라고 표기한 것은 한족들이 위화감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거란의 국호는 계속 ‘거란’이었다. - P24 


거란의 국호는 요, 대요, 거란 등 여러 개를 사용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거란이 '요'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한족과 충돌하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래서 거란인은 개국 초부터 끝까지 거란이라는 국호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란 성립 초기 석경당이 유주를 거란에 바친 사건은 중국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베이징이 북방 민족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만리장성은 더 이상 병풍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역사는 북방 민족과 중원의 대립에서 북방 민족의 우세로 기울기 시작했다.(P59) 태종은 938년 당의 유주성을 중수하여 남경성을 건립하고 유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켰다.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으로 중원이 북방 민족을 만나는 경계 지점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거란국의 고유성과 문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면 나는 장례 풍경과 거란인의 외모, 황제의 '날발'이 있었다.


거란 황제는 1년 중 어느 도성에도 상주하지 않고 대신들과 호위병들과 함께 계절에 따라 움직였는데 이것이 '날발'이다. 중원의 황제가 황궁에서 고정적으로 업무를 보며 생활하던 방식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황제는 날발 기간에 중요한 국가 대사를 논하며 결정했다. 특히 춘날발(봄에 진행하는 날발)을 중요하게 챙겼다고 한다. 날발은 거란의 고유 습속이자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통치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또 거란은 장례식에서 굿을 할 때 얼굴에 구슬을 늘어뜨리고 금속 가면을 씌우며 망자의 영혼을 달래고 귀신들로부터 보호하였다. 


거란 이전에도 중국에는 흉노, 돌궐, 위구르, 북위 등 다양한 민족이 거쳐갔지만 거란은 이전 국가와 다르게 '자신의 근본을 초원에 두고 전통과 정통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성의 2/3을 차지하는 한족문화도 부정하지 않았다. 거란 사회는 유목과 농경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길을 모색한(P90)' 최초의 국가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거란은 거란족 뿐 아니라 한족, 발해인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었는데 이전 국가의 통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의 통치를 도모하려했기 때문에 약 200 년의 시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거란은 본래 ‘인속이치’ 방침으로 ‘나라의 제도로 거란을 통치하고, 한인의 제도로 한인을 대한다’는 ‘북면관’과 ‘남면관’을 두는 이원적인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P182). 그러나 거란 중기 이후에는 한족과의 교류가 늘면서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고 한족 문화를 많이 흡수하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북방 유목민족 가운데 첫 번째로 중원 유가문화를 접수한 거란은 유가문화가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셈이다. 서하 등 이웃 나라에서도 이를 모방하였고, 모두 한족문화를 학습하였다. 거란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다음 문으로 다스리는 문치 사상을 확립하였으며, 이는 사회 발전의 수요에 상당히 부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P247). 그러나 거란이 유학을 통치에 이용한 것은 자신들이 이미 예법을 갖추었으므로 중화와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학과 중화라는 개념을 자신들보다 상위로 보거나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역사를 정주의 역사의 기준에서 바라보려고 하는 나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거란과 주변국의 외교, 군사적 관계이다. 


10세기 말 거란은 송과 여전히 충돌하고 있었고, 고려와는 교류가 거의 끊어졌으며, 만주와 초원의 여진과 여러 부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대하와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거란은 송과 1004년 전연의 맹약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둘 간의 국경을 획정하고 연운 16주의 땅을 얻는다. 송은 연운 16주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지만 거란에 세폐를 내주어야 했고, 반대로 거란은 연운 16주 이남의 땅을 포기하는 대신 세폐를 받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고려와는 총 3차에 걸친 전쟁을 치루면서 많은 피해를 낳았다. 


그러나 이후 40여 년간 다원적 국제질서의 맹약체제를 구축하면서 1020년대 이후부터 12세기 초까지 1세기 동안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누렸다. 거란은 한족 중심의 조공체제와 천하관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송, 대하, 고려 등 이웃 국가들과 공존을 추구하였다(P129). 


얼마 전 종영한 <역사저널 그날> TV 프로그램에서 거란어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다. 거란어를 연구하시는 분께서 직접 출연하셔서 거란 문자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 거란어와 몽골어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사정상 거란어가 아닌 몽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거란어와 몽골어는 비슷할 것 같았지만 문자도 다르고 발음도 달랐다. 동호계의 하나인 선비어를 이은 거란어는 사어로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거란어는 알타이어족 언어에 속하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몽골어의 조상어로 추정된다(P140). 

거란어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어 비석의 탁본 등에 남아 있는 것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거란의 문자는 왜 현재까지 살아남지 못했을까. 거란 대자의 경우 글자 수가 3,000여 자나 되고, 한자의 소리와 뜻 두 가지를 모두 활용하여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거란 소자의 경우도 원자가 450여 자나 되어 널리 사용하는 데 제약이 많았다. 결국 두 종류의 거란 문자는 제정할 때부터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거란 문자가 대중화에는 실패하였으나 이웃한 여러 민족의 문자 창제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1036년경 서하가 서하 문자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금의 문자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금은 1119년 거란 대자를 본받아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여진 소자도 제정하였다(P170). 


이 책은 거란의 정치 체계와 문화, 외교, 사회적 모습을 핵심을 담고 있다. 비교적 대중적으로 쓰여져서 일반인이 접근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다민족 제국 거란은 필요에 따라 한족 제도와 전통문화를 부분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거란과 한족의 전통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하였다. 거란 제국은 정치 제도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일원적 체제였던 한족 왕조 송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복왕조 거란은 지배자로서의 지위와 특권을 보장하고자 본래의 유목민족적 사회조직과 언어 전통 문화 종교에서 차별되는 이원적 체제를 시종일관 유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거란은 자신의 민족성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한족과 한족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최초의 정복 왕조가 될 수 있었다. 거란이 연 정복왕조의 문을 통해 이후 금 원 청은 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더욱 세차게 내딛을 수 있었다. - P29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3-1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책은 거리의 화가님 서재에서 검색해야겠군요.^^
 
모든 것의 이야기 나비클럽 소설선
김형규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실에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발 붙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은 탓이다. 몇 달 전 서재 친구분께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신 것을 보고 작가도 나처럼 현실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관심이 갔다. 작년 말 희망 도서로 신청했는데 예산 때문에 잘려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내 손에 받아들 수 있었다. 


우선 작가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동양사를 전공하고 러시아 현대사를 연구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사회과학 분야의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현재는 티셔츠를 입고 대중 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는 변호사로 일한다. 


러시아 현대사와 동양사를 공부해서인지 소설의 배경에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졌을 때 나처럼 어릴 때라 당시 한국의 노동계와 사회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잘 모르던 사람도 이런 사실이 있었고 이런 대화가 오갔겠구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와 ‘너’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온다. ‘너’는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하고 질문의 대상이기도 하며 공포, 또는 연민의 대상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모든 것의 이야기>는 슬픔과 연민에서 시작해 이상과 희망으로 나아가고 싶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20년 대림동 수정커피호프에서는 슬픔과 외로움의 냄새가 진하게 흐른다. 나는 수정커피호프에서 일하는 탈북자 여성을 위험에서 구해준다. 나는 가난과 폭력 속에서 살아왔다.


있잖아, 내가 되게 무서운 사람이거든. 사람들은 나를 많이 무서워해. 

그런데 내가 집에만 들어가면,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곧바로 눈물이 막 쏟아져.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언제나 그래. 엉엉 울어. 무서운 것도 없는데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려. 추워서 덜덜 떨려. - P24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나를 지켜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를 더 강하게 다그쳐야할지 모른다(사회적 가면). 세상은 폭력과 위협이 난무하고 나를 지키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과 온종일 부딪치며 돌아온 나는 피투성이가 된다. 이럴 때는 우는 것이 나의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의 하나일 것이다.


2043년 화성 마오 기지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중국의 우주본부가 핵폭격을 받고 인공위성도 격추되어 본부와 통신도 할 수 없고 지구로도 돌아갈 수 없는 고립된 상황이 되었다.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아끼며 나아갈 밖에 없다고 말하지만 너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지구를 그리는 두 사람. 문을 열고 나아간 너. 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1999년 마석 어쭈구리 테이블에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의 꿈을 위하여!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한때나마 품었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낸다. 선생님, 용접공, 과일 가게 주인, 경찰관, 소방관, 사냥꾼, 가수, 우주인. 꿈은 일관성도 없이 다종다양하다. - P56


‘어쭈구리’라는 상호명을 볼 때 반가웠다. 대학 근처에 어쭈구리가 있었는데 만 원에서 이만 원이면 다양한 안주에 소주를 마실 수 있어서 친구들, 선배들과 무척 많이 갔던 기억이 난다. 대학을 다니면서 장학금을 얻기 위해 공부도 하고 동시에 돈을 벌기도 해야 했다. 당시는 IMF를 막 넘은 터라 여전히 경기는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꿈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를 무사히 넘기길 바랐던 것 같다. 


1951년 하동군 양보면에서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다. 

3년 간 이어진 한국 전쟁은 시시각각 전황이 바뀌었다. 인민군이 내려와 인민군의 세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는 국군의 세상이 되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인민군으로 변신하고 사람들에게 평등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반동분자를 가려내어 처형하는 일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곳에서 인간이란 어느 장단에 맞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간절히 그리운데 누가 그리운지 모르겠고, 그리운 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군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가고 싶은 데가 있는지도,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 거기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거기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뜻을 헤아리려 애써보아도 헤아릴 수 없는 부서지고 조각난 말들이었다. - P90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세상 속에서도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 말은 ‘네가 문을 열고 나아간다.’이다. 희망 섞인 바람이자 주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어서 기다리면 변하는 것은 없다. 문을 열고 나아가야 무엇이든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림동에서, 실종>은 차별과 배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대림동’하면 떠오르는 주입식 이미지들이 있지 않나. 대림동을 가자고 하니 택시 기사가 하는 반응은 너무나 뻔하다.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려고 하세요?” 계속 읽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어디에 숨고 싶어진다.


대림동은 분지예요. 아무 건물이나 옥상에 한번 올라가서 보세요. 신도림동, 신길동, 신대방동, 구로동의 고층 아파트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요. 거인의 성벽처럼요. 대림동은 아파트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그 성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누가 뭘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지 못하는 거예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죠. 제대로 된 이름도 없고요. 조선족, 중국 동포, 그런 이름들도 웃기잖아요. - P113


가난한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이 제 몫을 누리고 평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꼭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면 하고 싶어요.

그게 연극이지? 있잖아,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은 늘 배신당해.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우리가, 이겼으면 좋겠어요. 이길 거라고 믿어요.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한다면요. 그러고는 모두 말이 없어졌다. - P165


<가리봉의 선한 사람>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다. 작가가 경험한, 보고 느낀 것이 가장 많이 담겨져 있는 이야기라 생각됐다. 선한 노동자는 거지꼴이 되거나 아귀들에 뜯겨 살아남지 못한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이 자신의 밥그릇을 뺏는다고 생각하고 사장은 노조가 만들어지거나 노조가 목소리를 내는 것을 혐오한다. 지금은 폭력으로 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방법들로 노동자를 무너뜨리게 하는 일이 많다. 


- 정규직: 청소부들이 주제를 모르고 정규직이 되려 하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우리가 취준생으로 몇 년을 고생했나

  공정하지 않아 정의롭지 않아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세상은 평등하지 않아 평등해선 안 돼 세상은 원래부터 불평등한 것

  오른쪽 공장 건물의 창문에서 누군가 얼굴을 내민다. 살집이 두툼한 사장님이다.

- 사장님: 공순이들이 겁도 없이 파업을 하려 하네

  세상 무서운 줄 몰라 백골단을 불러 묵사발을 내줄까

  하지만 나는 교양 있는 사장님 근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지

  건전한 노조 활동을 육성하려 하네 건전한 어용노조를 육성해 - P176~177


<구세군>은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다. 기본 소득에 대한 이야기, AI의 등장으로 사람과 기계가 직업을 두고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 등.

기본 소득이 실현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하지 않을까. 일반 납세자들, 무직자들, 재벌을 비롯한 기업가들 간에 충돌은 여전하지 않을까. 지금의 굳어진 양당제가 의원 내각제로 변화할 수 있을까. 


사육되기를 거부하라. 세계는 사람의 것이다. - P222


사육되기를 거부하라는 메시지는 ‘동물 농장’을 읽었을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과학과 기술로 환경은 무너지고 인류는 기술과 실력을 겨루어야 하는 시대가 올 지 모른다.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시간 뿐 아니라 레닌그라드, 한국 등 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읽고 나면 슬프고, 벅차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역시 읽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3-11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1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5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8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