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풍경 - 주한미군이 불러온 파문과 균열에 대한 조감도 메두사의 시선 3
엘리자베스 쇼버 지음, 강경아 옮김, 정희진 기획 / 나무연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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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사에서 미군정 시기 3년(1945년 9월 9일~1948년 8월 15일)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우리는 미국을 몰랐다. - P10


해제를 읽으며 너무 동감했던 구절이 바로 저 위의 구절이었다. 한국 근현대사 중 특히 3년 간을 천착하여 공부하다가 절감한 것은 일본의 지배가 끝나자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또 다른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한반도는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일제의 피해를 겪은 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 열강에 의해 두동강이 났다. 미군은 1950년 이후 지금까지 군대를 주둔시키는 중이다. 이로써 남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건설한 끊임없이 확장하는 ‘기지의 제국’(Johnson 2004: 151)에서 매우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 P81


동맹은 일시적인 것이어야 하는데도 한미동맹은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그 지분을 확대해가는 중이다. 한국은 미국의 또 하나의 위성국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미국은 군사주의 국가이며 북한을 비롯한 중국, 일본에 둘러싸인 한반도도 마찬가지로 군사주의 국가다. 

그렇다면 ‘군사주의’란 용어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군사주의에 대해 가장 포괄적 정의를 내린 이는 사회학자 마틴 쇼다. 

‘군사주의’의 핵심 의미는 군사적 관행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사회관계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군사주의는 사회관계 전반에 군사적 관계가 침투하는 것을 뜻한다. 군사주의는 군사화할 때 팽배해지고, 비군사화할 때 줄어든다. (2012: 20) - P35

군사주의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구성원 일부 세력은 충분한 군사를 갖춰야 평화주의가 안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군비를 확장한다면 끝은 없는 것이 아닐까.


박정희 시기 일상화된 전시체제를 거친 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집권했고 그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군부 독재자였다. 광주항쟁이 벌어지자 정부는 공수대를 투입하여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국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되, 장기적으로는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을 행사한다”는 접근법을 택했다. (Adesnik and Kim 2008: 18) 

이후 들어선 레이건 정부는 전두환을 백악관에 초청했고,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하자 많은 한국인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미군이 광주항쟁 진압에 실제로 개입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미국이 결정적 순간에 스스로 투쟁에 나서 민주적 변화를 끌어내려했던 운동가들 편에 공개적으로 서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 P101


경제적 이득이 있었다고 해도 어쨌든 베트남 전쟁에 가장 많은 파병을 할 정도였던 한국에게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실망과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범지구적 테러와의 전쟁’으로 촉발된 지정학적 변화, 촘촘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남한 좌파 NGO의 활동과 개별 사건에 대응하며 벌이는 ‘시민운동’은 남한 내 미국의 역할을 다시 상상케 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시민단체 다수가 민중운동에서 뻗어나왔고, 1980년대 이후에는 훨씬 다양한 사회운동망으로 서서히 변모했다. - P104~105


1992년 기지촌 여성 윤금이가 살해당한 사건은 미군기지 근처 성인들의 유흥 공간에 날뛰는 폭력적 짐승이라는 미군의 이미지를 대중화하면서 ‘구조적 증폭’을 가져왔다. 전국에 퍼진 윤금이의 훼손된 사체 이미지가 민족을 상징하면서 시민들은 미군(나아가는 인종, 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으며 폭력적 상상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기지촌의 성 산업 유입 여성이 겪는 성 착취와 폭력은 한민족 전체의 수난에 대한 너무나도 깔끔한 알레고리로 사용됐다. 따라서 윤금이의 고난은 한민족이 (처음에는 일본, 이제는 미국이라는) 사악한 외세의 탄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는 민족 담론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민족을 억압당하는 여성에 비유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좌파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군인-민족이라는 세계관만큼이나 가부장적 세계관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 - P137


폭력적 상상이란 사람들이 개인의 폭력 행위를 국가와 관련한 문제로 재구성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주의를 이해하는 식의 사회적 관행을 말한다. - P45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매우 작은 민족의 일원일지라도 다른 많은 동료 구성원을 알거나 만나지 못하며,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일조차 없겠지만, 각자의 마음속에는 합일의 이미지가 살아 숨 쉬고 있다.” - P47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폭력 행위에는 소통의 측면이 있다. 폭력은 소통성이 없어도 사회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지닌 채 지속되는 유일한 인간 행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쪽은 피지배자의 동기를 고려할 필요가 없으며 피지배층은 관계를 우위하는 이들의 관점을 ‘상상’하고 염려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고 주장한다. - P50


윤금이 사건으로 기지촌이 문제의 본산지가 되면서 경제적 타격을 받은 클럽들은 기지촌 여성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필리핀 등지에서 접대부를 데려오면서 해결했다. 마침 기존에 있던 기지촌 여성들은 국내에 있는 다른 유흥가 클럽(강남 등)으로 옮겨갔다(물론 떠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안드레아 브리겐티Andrea Brighenti는 ‘집단적 “상상 행위, 즉 물질을 비물질로 연장하는 행위”로 형성된 특정 영토와 장소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품은 잠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비전, 꿈, 욕망이 새겨진 물리적 영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 P208


이제 미군은 유흥을 위해 기지촌을 고집하지 않고 시내 유흥지로 나오면서 미군과 민간인의 접촉이 늘어난다. 미군들은 홍대를 즐겨 찾았고 외국 민간인들은 과거 독재 시절부터 기지촌이었던 이태원에 대거 유입되었다. 이곳들은 자유로운 소비공간이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공간이 되었다. 이태원은 동성애자, 성전환자, 무슬림, 기타 이주민들이 뒤섞여 초국적 지형이 되었다. 홍대는 권리를 박탈당한 학생, 예술가, 반항적 청년을 끌어모았고 여기에 미군과 외국인도 술집, 클럽, 거리로 모여들며 혼종의 공간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출신 국가, 배경, 민족, 종교, 직업이 매우 다양하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포용하도록 확대되면서 한국성이 점차 탈민족화하는 초기 단계가 목격”되는 것이다(Lee J. 2010: 19). 하지만 민족의 단일성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던 한국인들은 ‘한국성’의 본질을 잃는데 대한 두려움 또한 크게 느끼고 있다. - P247


어릴 적 늘 “한국인은 단일 민족이다.”임을 들어오며 강요를 받았고 암암리에 세뇌를 당했다. 이제는 이것이 결코 사실이 아니고(어떻게 단일한 민족들만 모여 살 수 있겠는가. 한반도는 끊임없이 다른 세계와 교류해왔다.) 더군다나 외부에서 끊임없는 외국인이 유입되고 있는 이 때에 더 이상 한국인의 단일 정체성을 고집하며 이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세계화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군에 대한 이미지는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특정 사건들에 노출된 언론들의 기사와 매체들, 그리고 대중에 의한 폭력적 상상의 이미지가 증폭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인은 이념적인 사고에 여전히 갇혀 있으며 특히 정치계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 다행히도 요즘 일부 청년들은 이념적 사고에서 탈피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고도성장한 한국에서 완전히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한국이 전 세계적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에 갈수록 깊이 개입하는 점을 비꼬면서 피해자로서의 한국의 역할에 반박했다. 그러면서 민중운동가 선배들이 맹렬히 붙들고 있던 민족주의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전 세계의 급진 운동에서 적극적으로 영감을 모색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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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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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독자가 읽기에 더 매끄럽고 수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설명에 살을 붙여서 문장의 이해를 돕는다고 해야 할까. ˝한 사람을 제게 말씀하옵소서˝ <- ˝들려주소서˝ 이전 숲 출판사 내용과 비교했을 때 이렇게 다르다. 좀 더 현대적인 번역으로 느껴졌다. 이제 오뒷세이아의 귀향길로 떠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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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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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으로 재미나게 읽었다. 그동안 내가 읽어온 고려사는 대부분 내부의 입장에서 쓰여져서 읽다 보면 비슷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 책은 요사, 송사, 일본사 등 주변 국가의 기록을 참고하여 거란과 송의 당시 상황과 관련 인물들을 설명해주어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지도와 그림으로 인물의 이미지, 도시의 위치와 경로의 이동 상황 등을 표현해주어 이해를 돕는다. 이미지가 정직한 2D 이미지여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이 귀엽게 느껴졌다. 


5대10국 시대를 정리하고 송나라를 건국한 태조(조광윤)은 북벌을 단행하는데 연운16주를 회복하여 거란을 북으로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연운16주는 거란에게 뺏길 수 없는 땅이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 거란은 송나라 뿐 아니라 동쪽에서는 발해부흥세력과 여진족, 서쪽에서는 몽골 등이 압박을 하는 중이였다. 경종은 몸이 병약했다고 하며 승천황태후가 경종을 대신해 거란을 통치하여 970년대부터 1009년까지 사실상 거란을 지배한다(p45). 새로운 인물을 알아가는 것은 역시 재미있다. 승천황태후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기록에서는 그녀의 승하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기에 요사를 봐야만 알 수 있는 인물이다. 승천황태후가 거란을 사실상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젊은 인재들인 한덕양, 야율휴가, 야율사진, 소배압, 소손녕 등을 발탁했기 때문이다(p46). 


고려와 거란 사이에 만부교 사건이 발생한 후에 공식 외교는 단절된 상태였다. 대신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고려의 유학생들을 송나라의 국자감에 입학시키는데 이 중 강전(~1006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강전은 송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 사망했기 때문에 고려 역사에는 기록이 없고 송사에만 기록이 남아 있다(이런 인물이 많을 것 같다). 강전은 송나라 유학 전 발해부흥세력을 돕기 위해 거란으로 가서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또 일단의 고려군과 함께 천 오백리 이상을 행군하여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그 길은 거란의 영토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대장정이었다. 


거란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첩보를 받은 고려는 "전국에 군사들을 소집하라!" 하고 박양유, 서희, 최량을 보내 거란군을 막게 한다. 이때 성종도 친정을 단행했다. "지금 인근의 적이 침입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니, 짐이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적을 물리치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p71). 당시 거란군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군대였는데 친정을 감행한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고려군 리더 서희는 거란군 리더 소손녕에게 화친을 제의하는데 소손녕은 먼저 항복해야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에서는 대책회의를 벌이고 대신들 간에 항복론과 할지론으로 두 파로 나뉘게 된다. 성종은 항복이 불가하다 생각했고 영토를 떼어주는 할지론에 따르기로 한다. 그러나 서희는 이 결정에 불복하며 "전투의 승부는 국력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의 빈틈을 보아 기동하는 데 있습니다!"(p80)하며 영토를 언제까지나 내어줄 수는 없으며 승부를 본 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희는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과 강화협상을 끝마친다. 


송 태조는 거란에 친정을 단행했다 패배한 후에도 거란에 연이어 대패하여 수세에 몰려 있었다. 고려 성종은 994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거란이 이 사실을 눈치챈다. 고려와 거란 간에 강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전쟁이 휴전된 것일 뿐 종전은 아니었다. 양국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전쟁 준비에 돌입하는데 이 때 강동6주를 고려가 여진으로부터 뺏어 장악하고 성을 쌓아 방비하게 된다. 

성종이 승천황태후의 사위를 요청하자 거란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 성종은 소손녕과의 딸과 혼인을 맺게 된다. 이후 거란은 고려 성종을 거란 황가의 일원으로 대우했고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는 아예 끊고 거란과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럼 이후 거란과의 싸움이 없었어야 하지만 성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양국은 다시 바람 앞에 등불이 되었다(공교롭게도 성종이 사망한 다음 해 서희도 사망했다). 성종과 서희의 관계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였지만 둘은 굳건한 믿음 아래 서로를 믿어주는 관계였다고 생각한다. 뛰어난 신하였고 훌륭한 왕이었다. 

  

강조의 변으로 왕위에 오른 현종은 내부를 다스릴 새도 없이 거란의 침입에 맞닥뜨리게 된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공신으로 최고위직에 올라 있었으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거란군을 여러 차례 물리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거란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란군이 강조의 막사를 들이닥치자 그는 사로잡히게 된다. 

고려군 본진은 패배했으나 고려군에는 뒷배가 있었다. 통주와 곽주 사이에 완항령이라는 큰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에 일단의 군사들이 곽주 쪽으로 후퇴하다가 완항령에 매복한 것이다. 좌우기군들은 거란군들이 완항령에 접어들자 창과 칼 같은 단병기를 빼어들고 거란군에 돌격했다(p150). 그럼에도 거란군은 계속 진격하여 곽주, 안주, 숙주가 그들 수중에 들어가고, 거란군은 서경까지 들이닥친다. 결국 동북면에 있던 고려군 병사들이 서경을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서경 방어를 책임진 여러 장수가 전사하거나 도망가자, 성안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진다(p164). 이 때 조원은 "서경이 없으면 고려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조원은 비록 중하급 관료였을 뿐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았던 사람이었다. 이후 조원을 비롯하여 성안의 군민들은 합심하여 밀려드는 거란군을 막아낸다. 

거란군에 의해 점령당해있던 곽주에 포로들이 남아 있었다. 이 때 양규는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서, 거란병사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안에 있던 남녀 7,000여 명을 구하여 통주로 옮겼다. 그는 단 7백명의 결사대로 6천명의 군사를 막아내었는데 방어하는 성을 공격하여 군민들을 빼내고 승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곽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거란군 황제 야율융서는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돌아가지 않고 개경으로 남하한다. 야율융서도 정말 난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튼 허를 찔린 공격에 고려군은 대책을 세우는데 이 때 강감찬이 현종을 이렇게 설득한다.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때 굳이 몽진을 해야 했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그들을 맞아들여서 피해를 당하기보다는 시간을 버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현종은 강감찬의 말에 따랐는데 몽진길은 그야말로 험난했다. 고려 군민들의 태도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속사정을 알 수 없는 군민들이 보기에 현종의 나주행은 피난이었고 도망길이었을 것이다. 그걸 감수하고 현종은 울분을 삼키며 고스란히 감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때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식으로 벌을 주었다면 그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을 때 왕위를 순탄히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몽진길에 공주에서 김은부를 만난 것도 그에게는 운명이었다. 김은부는 현종을 극진히 대접했기에 현종은 감읍할 수 밖에 없었고 김은부의 딸들을 현종이 비로 맞아들이면서 이후 이 사이 낳은 혈통이 고려 말까지 이어지게 된다. 


야율융서는 전투에서 수많은 병사를 잃고 물자의 손실을 감당했기에 고려 왕이 친조하기를 원했고 현종이 오지 않는다면 강동6주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고려는 강동6주를 포기할 수 없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강감찬은 1012년 동북면병마사로 군대를 지휘 중이었다. 감찰어사 이인택이 그를 탄핵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현종은 감찰어사를 파직하면서 강감찬을 지켰다. 만약 이 때 강감찬을 파직시켜버렸다면 이후 거란과의 싸움은 힘들었을 것이다. 1013년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넌다. 이때 거란군을 리드하는 이는 소배압이었다. 그는 북쪽에 있는 모든 성을 무시하고 개경을 향해 직진했다. 어느 정도 병력의 희생을 감수하고 평지인 개경에서의 싸움을 선택한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자가 아닐 수 없다. 개경은 청야작전으로 들판이 모두 비워져 있었고 고려의 백성들은 궁궐 안에 피신한 상태였다. 소배압은 궁궐 안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야율호덕을 개경 통덕문에 파견해 철군하겠다고 통보한 뒤, 몰래 기병 300기를 금교역으로 진입시켰다. 김종현과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은 아직 개경에 도착하지 않았다. 개경 안의 병력은 절대 부족했다. 거란군 선봉대가 금교역 쪽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현종은 결단했다. "출격하라!"(p296). 동북면병마사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현종은 현재의 군민으로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다행히 고려는 앞선 거란과의 전투들을 치르면서 거란군과 맞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깃발들이 순간 북쪽으로 나부끼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갑자기 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비구름이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름 아래, 하나의 깃발이 있었다. 구름은 마치 그 깃발 끝에 걸려서 오고 있는 듯 보였다. 깃발을 필두로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군사들. 개경을 호위하러 갔던 김종현과 1만 정예군이 도착한 것이다(p306). 


건조한 역사서에서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장면이라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 책의 또 하나의 장점이다. 


아무튼 이 순간 개경군은 얼마나 큰 안심이 되었을까. 고려는 전군을 좌우로 좁혀가며 거란군을 압박하여 승기를 잡았다. 거란군 진영이 무너지며 북쪽으로 내달리자 고려군은 그들을 공격한다. 거란군 10만은 전투에서 대부분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살아서 돌아간 인원은 수천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 고려군의 피해는 겨우 173명이 전사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이후에도 거란과 소소한 전투는 이어졌지만 더 이상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고려 군민의 힘이 있었지만 현종의 역할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공격한 이를 용서할 줄 아는 관대함을 지녔고 거란군에 맞서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워서 고려를 지켜냈다. 고려 후기 대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현종을 논평했다. "현종은 무엇 하나 흠을 잡을 수 없는 분이라 할 것이다."(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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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2023-10-25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11월부터 최수종 씨 주연으로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한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3-10-26 13:00   좋아요 1 | URL
그 드라마 보려고 미리 고려의 역사를 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사극 정극 드라마라 기대가 커요. 특히 최수종 사극은 믿고 보니까ㅎㅎㅎ

희선 2023-10-26 0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가 소설도 썼더군요 고려와 거란 싸움... 그게 오랫동안 이어진 거였군요 고려가 이겨서 다행이기는 한데, 그렇게 싸우는 동안 백성은 참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힘든 건 백성이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10-26 13:0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희선님. 저는 어떤 전쟁이든 피해는 고스란히 피지배층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하루 빨리 종식되어야겠죠.

자목련 2023-10-26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거리의 화가 님의 정리된 리뷰 좋습니다. 덕분에 한 번 더 책을 읽은 듯해요. 곧 드라마가 시작되니 기대하고 있어요^^

거리의화가 2023-10-26 17: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덕분에 저도 고려와 거란의 전쟁만 다룬 책을 읽게 되었어요.
드라마가 곧 방영이라 더 두근합니다!ㅎㅎㅎ
 
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레이첼 모랜 지음, 안서진 옮김 / 안홍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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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된 여성이 갖게 되는 온갖 경험들 중 학대와 폭력 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인간성의 상실‘이 가장 큰 아픔이라 여겨진다.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경험을 잃고 인격과 연결고리를 놓쳐버리는 것이 상실이다. 이 글은 개인의 내밀한 고백을 넘어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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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23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쉽지 않은 책 읽느라 고생 많으셨고 완독 축하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3 20:4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재독하느라 고생많으셨어요. 좋은 책 함께 읽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10-24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잡이!
끄덕끄덕 공감이 됩니다.
완독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3-10-24 09:37   좋아요 1 | URL
직접 경험한 이가 써서 절절했지만 저자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을 책이었을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 2023-10-24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일부러 의도하지 않으면 잡기 어려운 책인데,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3-10-24 17:30   좋아요 1 | URL
이번 달 <여성주의책 함께읽기> 책이었기 때문에 읽을 수 있었어요. 아마도 저 혼자 읽을 생각이었으면 쉽게 손이 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힘들지만 완독할만한 가치가 넘치는 책이었어요^^

건수하 2023-10-25 2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완독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3-10-26 11:43   좋아요 1 | URL
수하님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역사비평 144호 - 2023.가을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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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주년을 맞이한 2023년 한국의 상황은 녹록치 않다. 남북 관계는 진흙 속에 처박혀 있고 북한은 중국, 소련과 관계가 여전히 공고함을 내비쳤으며 한미일 동맹 관계는 더 굳건해진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은 군비를 더욱 확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얼마 전 가자 지구를 둘러싸고 충돌이 발생하여 수천 명이 희생되면서 전쟁의 위기에 돌입했다.


평화를 기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암울하고 각자도생을 하기 위한 셈법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나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세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호의 특집 내용은 시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전쟁사나 정치, 경제사가 아닌 사회사를 다룸으로써 북한 인민들의 삶을 돌아보고 이를 통해 미래의 비전을 이야기한다.


북한 인민들은 정전(停戰)의 성립을 폭격의 공포에서 벗어나 일상을 회복하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북한 사회는 전 사회적 역량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산업 시설을 복구, 재건하는 데 집중했고, 모든 직능 분야에서 체제의 요구에 호응하도록 독려했다. 당과 각종 직능단체들은 산하 기관지와 다양한 책자를 통해 전후복구 시책들을 전파하며 조직화에 나섰다. 공장과 농촌과 도시의 주민들은 두려움과 공포, 가족을 잃은 상처를 딛고 토굴과 방공호를 벗어나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 P44

 

정전 후 사회주의 국가였던 북한과 동유럽의 문화 교류가 있을 거라 예상하였으나 그동안은 이와 관련해서 정보를 얻었던 적이 없었다. 다양한 교류 경로가 있었겠지만 해당 글에서는 북한의 월간 『조선문학』에 수록되었던 기행문과 번역문학을 분석함으로써 당시 국가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해볼 수 있도록 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친선 및 ‘사회주의 건설‘은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었으며, 전후복구의 선행 경험을 지닌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대한 원조나 협력의 원천으로서 적극적인 교류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 문학자들은 동유럽 국가들과의 이질성을 넘어 국제주의적 연대를 구현하기 위해, 전쟁·혁명의 공통 경험을 환기하거나 소련이라는 이념적·문학적·산업적 보편항의 매개를 필요로 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조선-동유럽 간 동질성의 모색은 동일한 창작 주제를 공유하는 사회주의 세계문학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한편, ‘전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일(一) 국가의 시대적 과업을 세계라는 보편적 공간 내에자리매김하기 위한 목적하에 수행되었다.

이와 더불어, 개별 작가들의 관점은 1955년 12월의 반소련 캠페인 이후 소련이라는 보편항으로 포용될 수 없는 상호간의 이질성을 발견하거나, 개인의 생각과 내면을 부각시킴으로써 가족애·낭만적 사랑 등의 ‘생활 감정‘을 새로운 보편항으로 발견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이질성이나 ‘보통사람‘의 삶에 대한 주목은 북한 문학자들이 소련이라는 보편항의 중재나 이념 · 국가라는 거시적 프레임의 매개에 매몰되지 않은 채, 동유럽의 다채로운인민들과 마주할 수 있는 위치에 근접했음을 의미한다. - P79~80


작년에 민병래 작가의 <송환>이라는 책에서 한국 사회의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알게 되었었다. 여기서는 '강제전향'한 장기수들을 인터뷰 발췌한 내용을 실어 그들이 출소 후 남한 사회에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들은 감옥에 몇 년째 수감되어 강제로 고문이나 협박, 회유 등을 통해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 출소했더라도 사회안전법(보안감찰법)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를 당했다. 어딜 가도 내 궤적을 추적하고 추궁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을 피말리게 할까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연재기획 시리즈인 '현대 중국의 공간과 이동'에서는 군사화학공장에서 고급 리조트로 변신한 ‘809공장’ 공간의 역사에 대해서 다룬다. 중국이 개혁 개방 후 발전 경제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809공장'은 고무를 생산하는 곳이었으나 최근에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고급 리조트로 변모하였다. 


마침 기획인 '20세기 동아시아 농어업과 사회'가 있어 연재기획 시리즈와 자연스레 연결하며 읽을 수 있어 유익했다. 

해당 글은 1950년대 마오쩌둥 시대 초기 고무 생산이 핵심 자원으로 부상했으나 냉해 피해가 발생하면서 해결 방법론(기상 상황과 위치에 따라 환경을 바꾸어야 하느냐 기후 조건을 바꾸어야 하느냐)을 두고 '과학적’ 환경 개조관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오늘날 '근대'라는 산물로 이루어진 과도한 개발로 인해 기후 위기라는 직격탄을 맞은 지구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후로도 기획으로 다루어진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역비논단에서는 특히 누에 연구를 한 농학박사 계응상을 알게 되어 수확이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리승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과학자로 인식된다고 한다. 북한으로 가서 아마도 대중 뿐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이 이름이 낯설 수 있겠다 싶다. 

계응상은 식민지 조선인의 신분으로 양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우수한 여건을 갖춘 일본(1920년대 일본은 세계 생사 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였으므로 연구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에서 안정된 과학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식민지 조선인이 감히?라는 불평등한 조건). 그는 일본의 제국대학에서 양잠학에 관한 교육과 연구 경험을 쌓았음에도 중국으로 건너가서야 연구 활동을 활발히 벌일수 있었다. 해방 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자리는 보장되지 않았고 그를 둘러싼 연구 여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 무렵 요청을 받고 북한으로 올라간 후에야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양잠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후한 지원을 통해 북한의 누에고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고 잠업과학연구소를 설립하며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의 방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 애국열사릉에 묻히는 영예를 누린다. 그렇지만 그는 시대적 한계로 연구를 위해 여러 번 국가를 이동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서평에서는 읽었던 책(『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이 포함되어 있어 반가웠다. 근대를 일본으로부터 상당수 받아들인 우리로서는 근대와 번역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된 책(『백제의 이주지식인과 동아시아 세계』)이 오랜만에 보여서 반가웠다. 이주지식인으로서의 백제인이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론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강만길이다. 내가 이 학자의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확인해봐야겠으나 어쨌든 이미 갖고 있는 책이 많다는 것은 확실하다. 70년대 『분단시대』를 거론하며 본격적으로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관련한 책을 쏟아내셨다. 그 중 역시 '분단시대의 역사 인식'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대중을 위한 역사를 저술하셨고 그런 글쓰기를 지양하셨다는 것에 존경심이 이는 분이었다. 얼마 전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시간을 내어 관련 책들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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