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의 풍경 - 주한미군이 불러온 파문과 균열에 대한 조감도 메두사의 시선 3
엘리자베스 쇼버 지음, 강경아 옮김, 정희진 기획 / 나무연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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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사에서 미군정 시기 3년(1945년 9월 9일~1948년 8월 15일)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결정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우리는 미국을 몰랐다. - P10


해제를 읽으며 너무 동감했던 구절이 바로 저 위의 구절이었다. 한국 근현대사 중 특히 3년 간을 천착하여 공부하다가 절감한 것은 일본의 지배가 끝나자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또 다른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한반도는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일제의 피해를 겪은 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 열강에 의해 두동강이 났다. 미군은 1950년 이후 지금까지 군대를 주둔시키는 중이다. 이로써 남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건설한 끊임없이 확장하는 ‘기지의 제국’(Johnson 2004: 151)에서 매우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 P81


동맹은 일시적인 것이어야 하는데도 한미동맹은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으며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그 지분을 확대해가는 중이다. 한국은 미국의 또 하나의 위성국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미국은 군사주의 국가이며 북한을 비롯한 중국, 일본에 둘러싸인 한반도도 마찬가지로 군사주의 국가다. 

그렇다면 ‘군사주의’란 용어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군사주의에 대해 가장 포괄적 정의를 내린 이는 사회학자 마틴 쇼다. 

‘군사주의’의 핵심 의미는 군사적 관행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사회관계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규정되어야 한다. 군사주의는 사회관계 전반에 군사적 관계가 침투하는 것을 뜻한다. 군사주의는 군사화할 때 팽배해지고, 비군사화할 때 줄어든다. (2012: 20) - P35

군사주의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구성원 일부 세력은 충분한 군사를 갖춰야 평화주의가 안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군비를 확장한다면 끝은 없는 것이 아닐까.


박정희 시기 일상화된 전시체제를 거친 뒤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집권했고 그는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군부 독재자였다. 광주항쟁이 벌어지자 정부는 공수대를 투입하여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런데 1980년 5월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미국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되, 장기적으로는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을 행사한다”는 접근법을 택했다. (Adesnik and Kim 2008: 18) 

이후 들어선 레이건 정부는 전두환을 백악관에 초청했고, 미국이 전두환을 지지하자 많은 한국인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미군이 광주항쟁 진압에 실제로 개입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미국이 결정적 순간에 스스로 투쟁에 나서 민주적 변화를 끌어내려했던 운동가들 편에 공개적으로 서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 P101


경제적 이득이 있었다고 해도 어쨌든 베트남 전쟁에 가장 많은 파병을 할 정도였던 한국에게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실망과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범지구적 테러와의 전쟁’으로 촉발된 지정학적 변화, 촘촘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남한 좌파 NGO의 활동과 개별 사건에 대응하며 벌이는 ‘시민운동’은 남한 내 미국의 역할을 다시 상상케 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시민단체 다수가 민중운동에서 뻗어나왔고, 1980년대 이후에는 훨씬 다양한 사회운동망으로 서서히 변모했다. - P104~105


1992년 기지촌 여성 윤금이가 살해당한 사건은 미군기지 근처 성인들의 유흥 공간에 날뛰는 폭력적 짐승이라는 미군의 이미지를 대중화하면서 ‘구조적 증폭’을 가져왔다. 전국에 퍼진 윤금이의 훼손된 사체 이미지가 민족을 상징하면서 시민들은 미군(나아가는 인종, 성)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느꼈으며 폭력적 상상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기지촌의 성 산업 유입 여성이 겪는 성 착취와 폭력은 한민족 전체의 수난에 대한 너무나도 깔끔한 알레고리로 사용됐다. 따라서 윤금이의 고난은 한민족이 (처음에는 일본, 이제는 미국이라는) 사악한 외세의 탄압에 끊임없이 시달린다는 민족 담론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민족을 억압당하는 여성에 비유하는 새로운 상상력이 좌파 민족주의자 사이에서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군인-민족이라는 세계관만큼이나 가부장적 세계관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 - P137


폭력적 상상이란 사람들이 개인의 폭력 행위를 국가와 관련한 문제로 재구성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주의를 이해하는 식의 사회적 관행을 말한다. - P45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은 상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매우 작은 민족의 일원일지라도 다른 많은 동료 구성원을 알거나 만나지 못하며, 혹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일조차 없겠지만, 각자의 마음속에는 합일의 이미지가 살아 숨 쉬고 있다.” - P47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폭력 행위에는 소통의 측면이 있다. 폭력은 소통성이 없어도 사회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지닌 채 지속되는 유일한 인간 행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쪽은 피지배자의 동기를 고려할 필요가 없으며 피지배층은 관계를 우위하는 이들의 관점을 ‘상상’하고 염려하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고 주장한다. - P50


윤금이 사건으로 기지촌이 문제의 본산지가 되면서 경제적 타격을 받은 클럽들은 기지촌 여성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필리핀 등지에서 접대부를 데려오면서 해결했다. 마침 기존에 있던 기지촌 여성들은 국내에 있는 다른 유흥가 클럽(강남 등)으로 옮겨갔다(물론 떠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 


안드레아 브리겐티Andrea Brighenti는 ‘집단적 “상상 행위, 즉 물질을 비물질로 연장하는 행위”로 형성된 특정 영토와 장소는 다양한 행위자들이 품은 잠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비전, 꿈, 욕망이 새겨진 물리적 영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 P208


이제 미군은 유흥을 위해 기지촌을 고집하지 않고 시내 유흥지로 나오면서 미군과 민간인의 접촉이 늘어난다. 미군들은 홍대를 즐겨 찾았고 외국 민간인들은 과거 독재 시절부터 기지촌이었던 이태원에 대거 유입되었다. 이곳들은 자유로운 소비공간이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공간이 되었다. 이태원은 동성애자, 성전환자, 무슬림, 기타 이주민들이 뒤섞여 초국적 지형이 되었다. 홍대는 권리를 박탈당한 학생, 예술가, 반항적 청년을 끌어모았고 여기에 미군과 외국인도 술집, 클럽, 거리로 모여들며 혼종의 공간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출신 국가, 배경, 민족, 종교, 직업이 매우 다양하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포용하도록 확대되면서 한국성이 점차 탈민족화하는 초기 단계가 목격”되는 것이다(Lee J. 2010: 19). 하지만 민족의 단일성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던 한국인들은 ‘한국성’의 본질을 잃는데 대한 두려움 또한 크게 느끼고 있다. - P247


어릴 적 늘 “한국인은 단일 민족이다.”임을 들어오며 강요를 받았고 암암리에 세뇌를 당했다. 이제는 이것이 결코 사실이 아니고(어떻게 단일한 민족들만 모여 살 수 있겠는가. 한반도는 끊임없이 다른 세계와 교류해왔다.) 더군다나 외부에서 끊임없는 외국인이 유입되고 있는 이 때에 더 이상 한국인의 단일 정체성을 고집하며 이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세계화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군에 대한 이미지는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특정 사건들에 노출된 언론들의 기사와 매체들, 그리고 대중에 의한 폭력적 상상의 이미지가 증폭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인은 이념적인 사고에 여전히 갇혀 있으며 특히 정치계는 이 문제가 심각하다. 다행히도 요즘 일부 청년들은 이념적 사고에서 탈피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고도성장한 한국에서 완전히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한국이 전 세계적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에 갈수록 깊이 개입하는 점을 비꼬면서 피해자로서의 한국의 역할에 반박했다. 그러면서 민중운동가 선배들이 맹렬히 붙들고 있던 민족주의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전 세계의 급진 운동에서 적극적으로 영감을 모색했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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