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144호 - 2023.가을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 역사비평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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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주년을 맞이한 2023년 한국의 상황은 녹록치 않다. 남북 관계는 진흙 속에 처박혀 있고 북한은 중국, 소련과 관계가 여전히 공고함을 내비쳤으며 한미일 동맹 관계는 더 굳건해진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은 군비를 더욱 확장하고 있는 상태이다. 

우크라이나-러시아 간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얼마 전 가자 지구를 둘러싸고 충돌이 발생하여 수천 명이 희생되면서 전쟁의 위기에 돌입했다.


평화를 기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암울하고 각자도생을 하기 위한 셈법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나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세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호의 특집 내용은 시기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전쟁사나 정치, 경제사가 아닌 사회사를 다룸으로써 북한 인민들의 삶을 돌아보고 이를 통해 미래의 비전을 이야기한다.


북한 인민들은 정전(停戰)의 성립을 폭격의 공포에서 벗어나 일상을 회복하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북한 사회는 전 사회적 역량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산업 시설을 복구, 재건하는 데 집중했고, 모든 직능 분야에서 체제의 요구에 호응하도록 독려했다. 당과 각종 직능단체들은 산하 기관지와 다양한 책자를 통해 전후복구 시책들을 전파하며 조직화에 나섰다. 공장과 농촌과 도시의 주민들은 두려움과 공포, 가족을 잃은 상처를 딛고 토굴과 방공호를 벗어나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 P44

 

정전 후 사회주의 국가였던 북한과 동유럽의 문화 교류가 있을 거라 예상하였으나 그동안은 이와 관련해서 정보를 얻었던 적이 없었다. 다양한 교류 경로가 있었겠지만 해당 글에서는 북한의 월간 『조선문학』에 수록되었던 기행문과 번역문학을 분석함으로써 당시 국가간의 문화교류를 짐작해볼 수 있도록 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친선 및 ‘사회주의 건설‘은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었으며, 전후복구의 선행 경험을 지닌 동유럽 국가들은 북한에 대한 원조나 협력의 원천으로서 적극적인 교류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 문학자들은 동유럽 국가들과의 이질성을 넘어 국제주의적 연대를 구현하기 위해, 전쟁·혁명의 공통 경험을 환기하거나 소련이라는 이념적·문학적·산업적 보편항의 매개를 필요로 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조선-동유럽 간 동질성의 모색은 동일한 창작 주제를 공유하는 사회주의 세계문학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한편, ‘전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일(一) 국가의 시대적 과업을 세계라는 보편적 공간 내에자리매김하기 위한 목적하에 수행되었다.

이와 더불어, 개별 작가들의 관점은 1955년 12월의 반소련 캠페인 이후 소련이라는 보편항으로 포용될 수 없는 상호간의 이질성을 발견하거나, 개인의 생각과 내면을 부각시킴으로써 가족애·낭만적 사랑 등의 ‘생활 감정‘을 새로운 보편항으로 발견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이질성이나 ‘보통사람‘의 삶에 대한 주목은 북한 문학자들이 소련이라는 보편항의 중재나 이념 · 국가라는 거시적 프레임의 매개에 매몰되지 않은 채, 동유럽의 다채로운인민들과 마주할 수 있는 위치에 근접했음을 의미한다. - P79~80


작년에 민병래 작가의 <송환>이라는 책에서 한국 사회의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알게 되었었다. 여기서는 '강제전향'한 장기수들을 인터뷰 발췌한 내용을 실어 그들이 출소 후 남한 사회에 어떻게 정착하고 살아왔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들은 감옥에 몇 년째 수감되어 강제로 고문이나 협박, 회유 등을 통해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나서 출소했더라도 사회안전법(보안감찰법)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를 당했다. 어딜 가도 내 궤적을 추적하고 추궁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람을 피말리게 할까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연재기획 시리즈인 '현대 중국의 공간과 이동'에서는 군사화학공장에서 고급 리조트로 변신한 ‘809공장’ 공간의 역사에 대해서 다룬다. 중국이 개혁 개방 후 발전 경제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809공장'은 고무를 생산하는 곳이었으나 최근에 도시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고급 리조트로 변모하였다. 


마침 기획인 '20세기 동아시아 농어업과 사회'가 있어 연재기획 시리즈와 자연스레 연결하며 읽을 수 있어 유익했다. 

해당 글은 1950년대 마오쩌둥 시대 초기 고무 생산이 핵심 자원으로 부상했으나 냉해 피해가 발생하면서 해결 방법론(기상 상황과 위치에 따라 환경을 바꾸어야 하느냐 기후 조건을 바꾸어야 하느냐)을 두고 '과학적’ 환경 개조관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오늘날 '근대'라는 산물로 이루어진 과도한 개발로 인해 기후 위기라는 직격탄을 맞은 지구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후로도 기획으로 다루어진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역비논단에서는 특히 누에 연구를 한 농학박사 계응상을 알게 되어 수확이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리승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과학자로 인식된다고 한다. 북한으로 가서 아마도 대중 뿐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이 이름이 낯설 수 있겠다 싶다. 

계응상은 식민지 조선인의 신분으로 양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우수한 여건을 갖춘 일본(1920년대 일본은 세계 생사 시장의 60%를 차지할 정도였으므로 연구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에서 안정된 과학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식민지 조선인이 감히?라는 불평등한 조건). 그는 일본의 제국대학에서 양잠학에 관한 교육과 연구 경험을 쌓았음에도 중국으로 건너가서야 연구 활동을 활발히 벌일수 있었다. 해방 후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자리는 보장되지 않았고 그를 둘러싼 연구 여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 무렵 요청을 받고 북한으로 올라간 후에야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양잠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김일성의 후한 지원을 통해 북한의 누에고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고 잠업과학연구소를 설립하며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의 방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죽어서 애국열사릉에 묻히는 영예를 누린다. 그렇지만 그는 시대적 한계로 연구를 위해 여러 번 국가를 이동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서평에서는 읽었던 책(『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이 포함되어 있어 반가웠다. 근대를 일본으로부터 상당수 받아들인 우리로서는 근대와 번역의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와 관련된 책(『백제의 이주지식인과 동아시아 세계』)이 오랜만에 보여서 반가웠다. 이주지식인으로서의 백제인이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론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강만길이다. 내가 이 학자의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는 확인해봐야겠으나 어쨌든 이미 갖고 있는 책이 많다는 것은 확실하다. 70년대 『분단시대』를 거론하며 본격적으로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관련한 책을 쏟아내셨다. 그 중 역시 '분단시대의 역사 인식'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대중을 위한 역사를 저술하셨고 그런 글쓰기를 지양하셨다는 것에 존경심이 이는 분이었다. 얼마 전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시간을 내어 관련 책들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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