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래를 만든다
고무로 데쓰야 지음, 나카타니 아키히로 해설, 이선희 옮김 / 이레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

 

 

[ 1 : 뻔한 이야기 ]

  

솔직히 말하면, 자기개발서라는 것은 뻔하디 뻔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시간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해야 성공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성공한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 비유로 말하자면, 자기개발서라는 종류의 책은 다이어트와도 같다. 누구나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알고 있지만, 단지 그대로 실행하기가 어려울 뿐인 것.  

그래서 자기개발서는 읽기 좋은 때가 있는 법이다. 연말과 연초, 그리고 지치고 힘들었을 때. 사람은 어떤 일을 끝내거나 시작할 때, 혹은 지쳐버렸을 때, 위로 받고 싶어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 위로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말들의 반복에 불과하다. 상담이 치료가 되는 이유는, 환자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라, 환자가 속에 담고 있는 말을 꺼내주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은가?

뻔하디 뻔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자기개발서 따위를 읽으면서 우리가 얻으려는 것은 이것이다.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 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끄집어 내고 싶은 것이다.

 

[ 2 : 뻔하지 않은 이야기 ]

 

- 프로듀서 고무로 데쓰야의 성공 비결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셀프 프로듀스(self produce)하는 것이다. 이 셀프 프로듀스는 특별히 음악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재능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형태로 만들어 성과를 창출해내는 모든 일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능력이다.

- 나카타니 아키히로,「셀프 프로듀스로 성공한 사람이 되자」, p.14.

 

서점의 한 코너를 차지할 정도로 무수히 쏟아지는 자기개발서들 속에서 이 책이 돋보이는 이유는,  저자가 종사하는 직업이 영업이나 경영, 인사나 자산관리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스라는 점이다. 진부한 러브 스토리가 주인공들의 직업을 당대의 트렌드에 맞춰 변화시키면서 계속되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책도 역시 당대의 상황에 적합한 직업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단 젊은 독자들의 공감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근의 시대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예시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러한 저자가 집필한 책이 아니라면, 이 책의 가치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역시나 다른 자기개발서와 마찬가지로 ‘뻔하디 뻔한’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뻔하디 뻔한 이야기 속에서 그래도 예사롭지 않은 몇 가지를 골라본다.

 

- 대중과 똑같은 눈높이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프로듀서가 갖춰야 할 필수조건이다. 상품을 만드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상품이 많이 팔릴수록 쉽게 자기 세계에 빠져든다. 따라서 시대의 분위기나 고객의 기분보다 자신의 독단이 앞서게 되고 급기야 고객이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p.43]

 

- 지금 이 자리에 시대의 기분을 나타내는 풍경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만약 당신이 카메라를 들고 있다면 그 풍경의 어느 부분에 초점을 고정시키고 셔터를 눌러야 할까? 비디오카메라라면 어디에서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까? 그것을 심사숙고 한 다음에 대중과 나의 기분이 일치하는 순간을 잡고 놓치지 않으면 그래, 지금 이런 분위기의 노래를 듣고 싶었어!라는 신선도가 높은 작품이나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p.48]

 

- 새로운 일의 첫걸음은 우선 파고 들어갈 틈을 찾아내고, 거기에 자신의 카탈로그를 끼워 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p.142]

 

- 자신의 코너를 확보하면 계속해서 새로운 카탈로그를 만든다. 그러면 가능성이 넓어지면서 확대재생산으로 이어진다. [p.142]

 

이런 이야기들에 동감 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참, 이야기하지 않았던, 무엇보다 빼어난 이 책의 장점 하나. 빨리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체가 185페이지 밖에 되지 않고, 나카타니 아키히로 특유의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한 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다. 짧고 간결한 충전을 원하는 분들께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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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

 

 

[ 1 ]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근래에 와서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익만 추구하고, 선비들은 학식을 개인적인 목적달성에만 쓰려고 합니다. (……)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과 봉록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글을 읽고는 글귀를 멋대로 따와서 묻고 답하는 데만 쓰니, 이는 마치 잘 치장한 상자만 사고 정작 사야 할 구슬은 되돌려주는 격입니다. 글을 지어도 괴상하고 과장된 문장으로 꾸며 과거에 빨리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니, 도리에 위배되고 진리에 어긋날 뿐입니다.』

- 조종도의 대책, p.283.

 

 

모든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 한때나마 내용이 형식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매우 특별한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형식을 지배하는 내용 따위는 불가능하다. 그 특별한 경우란 두 가지 밖에 없다. 애초부터 형식을 알고 있지 못했거나, 혹은 형식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거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용과 형식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둘은 서로가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서 반목하고, 으르렁거리고, 싸운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앞에 인용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용 부분은 “교육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라는 명종의 질문에 대한 조종도의 대답이다. 그는 과거제도가 잘못 시행되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편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첨부하고 있다.

 

 과거는 일정한 규칙과 형식이 있으므로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형식에 맞지 않으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 과거에서 뽑히는 답안은 내용보다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글만 뽑히게 되어 있다. 글재주를 자랑하고 다듬을수록 문장만 교묘해지고 뜻을 알 수 없으며, 사람들의 심성을 들뜨게 하고 화려한 겉멋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세상을 다스릴 재주와 자질, 인격과 덕망은 글재주로 알 수 없다. 따라서 과거를 위한 문장이 성하면 성할수록, 참으로 나라를 건질 재주를 가진 사람을 구하기가 어렵다.(편자 설명, p.292.) 

 

나는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분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책의 내용이 형편없거나, 빤한 밑천으로 겉멋만 부려 형식을 요란하게 만들었거나,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책의 내용은 참신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던 것들을 일깨워주는 좋은 자극이 되었으니까. 사실 그렇다. 조선이란 시대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각종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 수없이 접했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그러나 각 매체가 전하는 조선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내게 있어서 조선이라는 시대는 심각한 정쟁과 허식으로 가득 찬 유약하기 짝이 없는 왕조였다가, 고고한 딸깍발이 선비들의 고고한 기상이 살아있는 시간이면서, 또한 한편으로는 판소리나 마당놀이 등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역동적 에너지로 충만한 시기이기도 하다. 세종에서 영조와 정조로 이어지는 군왕 중심의 인문부흥과 서민의식이 싹텄던 실학파의 정신과, 궁중에서 벌어지는 암투와 당리당략을 위한 파벌싸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어쩌면 조선은 이러한 모습들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공존하는 다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내용은 조선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용만큼은 아니지만 형식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일단 5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을 무리 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으니,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었던 듯 하다. (형식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자세하게 논의하겠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는가? 문제는 책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사회, 그 자체에 있었다. 책의 서두에서 편자는 책문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답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조선의 책문과 현재의 대입 논술시험을 비교하면서, 책문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죽기를 각오하고 진술한다는 표현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책문의 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과거에 낙방하거나 권력자의 눈밖에 난 경우도 있다니, 이런 강조가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 이 표현은 공허하기만 하다.

 

무릇 모든 비판은 현실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더구나 행정가, 정치가들의 비판은 더욱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관념적인 것, 허황한 것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으며, 그 문제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종교가, 철학자, 예술가들의 몫이다. 그들은 꿈을 꾸기 때문에 사회를 비옥하게 만든다. 하지만 행정가와 정치가들의 꿈을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꿈을 꾸기보다, 두 눈을 부릅뜨고 현실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이념이니, 관념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의 몫은 삶, 온전히 생활의 문제에 국한된다.

 

바로 여기에 책문의 한계가 있다. 책문이란 관리를 등용하기 위한 평가방법이다. 물론 현재의 관리와 조선시대의 관리의 성격이 다르다고는 해도, 관리는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기본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은 종교가가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며 예술가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그들은 행정가이고 정치가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어 올린 책문에는 현실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성현의 말씀을 장황하게 인용하고, 그 속에서 보편타당 한 진리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주장한다. 이러한 것들만 지킨다면 어찌 태평성대가 되지 않겠소이까? 물론 그 중에는 간혹 용감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자, 이런 진리가 있소이다. 그런데 위정자들은 이런 것을 지키지 않소이다. 특히 왕, 당신이 지키지 않소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지 않겠소이까? 대단한 용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도 여전히 현실은 없다.

 

과거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이 다르지 않다면, 사람이 먹고 자고 싸는 것이 틀려지지 않았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단순 명쾌하게 마음을 고쳐먹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어디 있을까? 마음먹기는 쉽다. 하지만 실천은 어렵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이며, 다이어트에는 실패만을 거듭하는가. 임금 한 명이 생각을 다르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공상이다. 사대부 몇몇이 행동을 고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망상이다. 옛날로 되돌아가 진리를 바로 세운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허망한 꿈이다. 시간과 강물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관리들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바라보기 위해 목을 늘이기보다는, 지금 눈앞의 것을 해결하기 위해 앞을 바라봐야 한다.

 

책문의 질문을 하는 임금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 예비관리들도 모두 이러한 현실인식이 부족하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첫째 감정, 바로 안타까움이었다.

 

 

 

이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책문이 가진 형식주의이다. 편자의 설명처럼 책문은 형식이 고정되어 있다. 질문은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로 시작된다. 이에 대한 답은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로 시작하여 장황하고 공손한 참사와 겸사가 이어진다. 그리고 답의 마지막은 “보잘것없는 말씀을 드려서 죄송하고 두렵지만, 솔직히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을 드립니다”로 끝맺는다. 편자는 이를 ‘작자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한 액자’라고 표현하면서 그 행간을 잘 읽으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조선시대 사람이 아니다. 도무지 행간이 보이지 않는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허황한 말장난뿐이다. 이건 중국 옛이야기 퀴즈대회에 지나지 않는다.

 

닫힌 형식은 내용까지 닫히게 만든다. 창의적인 내용은 고정된 틀 속에서 살 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흔히 공무원들을 고루하고 비효율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행정서류 속에서는 죽었다 깨나도 창의성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의성은 틀을 깨면서 나온다. 달걀의 모양에 집착하면 달걀을 세울 수 없다. 모양을 깨버려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앞서 이야기했던 현실인식의 결여에 대한 원인도, 이러한 형식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허망한 말장난은 독자들은 피로하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피로했다. 나만의 문제일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 모든 독자들은 대부분 나처럼 행간을 읽지 못할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대책을 올리는 선비들도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해서 답답하지 않았을까. 또한 그들의 답을 읽어야 하는 임금도 자신이 원하는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빙빙 돌아가기만 하는 말에 답답하지는 않았을까.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둘째 감정, 답답함이었다.

 

 

 

[ 2 : 또 다른 형식 – 각주 ]

 

 

이 책의 형식과 관련된 아쉬움을 지적하고자 한다. 주변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도 내 감상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꼭 한번은 언급하고 싶었다.

 

각주와 역주도 분명히 하나의 텍스트여야 한다. 그런데 이들을 본문과 분리시켜 책 뒤에 위치시킨 것은 독자들을 수고를 유도하는 것이니, 좋은 편집 방법은 아니다. (물론 이런 방법은 본문에 대한 집중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각주의 분량을 줄여야 했다.) 

 

본문과 각주의 색깔을 구분하는 방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알아보기 힘든 오랜지 색을 선택했다는 점이 문제이다. 더구나 각주와 역주까지 쉽게 구분되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하다. 

 

사실, 이 책에 포함된 각주는 독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 출전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겠는가? 이것은 각 단락의 뒤에서 참고문헌으로 처리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필요했던 주석은 역주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털어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책의 몸매는 훨씬 군살이 없어졌으리라. 

 

이처럼 정확한 출전에 집착하는 것을 독자층을 명확하게 선정하지 못한 오류, 혹은 책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오류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편자의 다음과 같은 변명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변명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가져 가면 그때마다 조금씩 새로운 주문을 했다. 그래서 책은 처음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단순한 고전 번역본이 아니라, 옮기고 풀이한 책이 된 것이다.(후기, p.463.) 

 

가장 큰 문제는 이 책이 정체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공도서인지,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양도서인지 분명하게 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공도서라 하기엔 내용은 너무 피상적이고 평가는 주관적이었다. 또한 교양도서라고 하기에는 내용과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가 헐겁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책은 고급스러운 교양도서였어야 했다고 판단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여 분량을 줄이고, 디자인과 형식을 좀더 분명하고 단정하게 만들고, 내용도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견고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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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영혼
오히예사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 1 : 인디언식 삶의 방식 ]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얼굴 붉은 사람들의 삶의 목표였다. - p.219.』


  인디언의 언어는 모호하다. 그들은 모호한 언어로 세상의 진리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의 몫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줄거리를 따라서 후루룩 읽어버릴 만한 것이 아니다.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들도 찬찬히 감상해야 한다. 소설이 아니라 詩에 가까운 글이고, 시가 아니라 화집에 가까운 글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디언의 영혼>이 전하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말한다. 세상은 찬찬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백인들처럼 ‘산을 오르는 불 배(증기기관차)’를 타고 숨 가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느긋하게 평원을 돌아다니라고. 이 책의 구성방식은 이러한 인디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중간에 삽입된 사진들은 끊임없이 독자들의 발걸음을 방해한다. 멈춰, 쉬어, 천천히. 백인들의 방법이 아니라 인디언의 방법으로 책을 읽어.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대한 독서노트를 늦게 올리는 변명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 사진 속의 인디언들이 말을 걸었다. 이봐, 당신 정말 다 읽었어? 우리 인디언들의 말은 백인들의 그것처럼 가볍지 않아. 나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사진 한 장 한 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사진 속의 그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것은 그들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 2 : 같지만 다른 이야기 ]


『부족 사람들의 명예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은 인격을 실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명예를 기리고 부족 청년들이 모범으로 삼도록 훌륭한 전사를 치장하는 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상징성을 지닌 깃털이나 짐승가죽이 포함되었다. 인디언들은 특히 독수리 깃털을 자주 사용했다. 또한 특별한 공로를 세웠을 경우에는 ‘명예로운 이름’이 수여되기도 했다. - p.220.』


  이 책을 읽기 전에 디 브라운『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미국 인디언 멸망사』(나무심는사람, 2002)를 먼저 읽었어. 참으로 다른 느낌이더군.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어. 결국 두 권 모두 당신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말이야. 

  디 브라운의 책이 처절하게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상처를 직접적으로 그대로 적나라하게 내보였는데 비해서, 오히예사의 책은 상처에서 조금 비켜서 있더군. 아니, 그렇다고 상처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어. 외과수술과 한방치료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똑같이 아프지만 대처방안이 다른 거지. 무엇이 더 좋은지 혹은 무엇이 더 나쁜지 평가할 수는 없을 거야. 두 가지 모두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진 것들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난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당신들은 어떻게 분노를 잊을 수 있었던 거지? 그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욱신거리는 상처가 남았는데, 당신들과 같은 종족이 아닌 나까지도 피가 끓어오를 것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 분노가 이렇게 담담하게 가라앉을 수가 있는 거야.

  이봐, 이런 게 있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 중에 한(恨)이라는 것이 있거든. 슬픔하고는 좀 달라. 울분하고도 좀 다르고, 분한 것과도 다르지.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섞여있다고 해야 하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야. 말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거지. 당신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슬프지만 슬픔 그 이상의 감정,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분노 그 이상의 감정.

  그래, 그래서 당신들은 상처에서 한 발자국 물러날 수 있었던 거지. 그래서 나는 당신들의 이런 글들에 끌리는 거야. 이건, 꼭 우리 민족의 굿판 같거든. ‘굿’이라는 것이 있어. 가슴 속에 한이 응어리져 있을 때, 그것을 풀기 위해서 벌이는 행동이야. 하지만 이것은 복수 같은 것이 아니야. 누군가를 단죄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거든. 오히려 놀이에 가까워. 지치고 힘들 때, 한 판 신명나게 놀고 나서 한동안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거야. 그래, 굿은 원한풀이와 놀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당신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디 브라운의 이야기가 원한 풀이라면, 오히예사의 이야기는 놀이에 가깝지. 어때? 나는 그렇게 느꼈어.




[ 3 : 오래전 당신들이 아닌 지금 우리의 이야기 ]


『얼굴 흰 사람들은 정말로 특이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하루를 여러 시간으로 나누고, 한 해를 여러 날로 쪼갠다. 사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나눈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해 가치를 따지고, 끝까지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라 여긴다. 그들은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 p.94.』


  사실 이건 당신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야.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신들과 우리 민족이 비슷하지. 하지만 비슷한 상처를 가진 것은 당신이나 우리뿐이 아닐 거야. 백인이 아닌 그 모든 종족, 유럽이 아닌 그 모든 지역에는 같은 이야기들이 있겠지. 모두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근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몰려온 것들이지. 그래,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누구를 공격하지도 않았지.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 그 자체가 잘못이었던 거야. 세상은 변하는데 혼자 변하지 않으려했던 잘못.

  잘못의 결과는 너무도 엄청났지. 백인이 아닌 우리는 시대에 뒤쳐졌고, 문명에 뒤쳐졌고, 이익에 뒤쳐졌어. 그래서 스스로의 것을 돌볼 틈도 없이 정신없이 남의 것을 배우기에 급급했지. 근대 이후, 우리가 서양을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이후 선(善)은 하나밖에 없었지. 백인들의 고결한 정신세계, 백인들의 우아한 문화, 백인들의 화려한 문명.

  그렇게 백년이 지났어. 문제는 더 이상 그것들이 선이 아니라는 것이야. 타락한 정신세계, 생명력 없는 문화, 천박한 문명. 이제 세상을 지배했던 늙은 추장은 눈을 돌리고 있어. 바로 자신들이 멸망시켰던 동양과 인디언 문화들을 끌어들여, 부흥을 노리는 거지. 백인들의 예술에서 동양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사무라이 영화에 열광하고, 선(禪)과 명상이 유행하고, 요가와 채식이 유행하고 있어. 웃기지 않아? 자기들이 망쳐놓은 것들이 이제야 긁어모으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당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야. 이미 사라진 문명에 대한 현학적인 관심이 아니라, 당신들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거든. 오래전에 자신의 것을 지키며 사라졌던 당신들이 지금 자신의 것을 모두 잃어버린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야.




[ 4 : 진리의 책은 없다 ]


『우리는 진리의 책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으며, 누가 어떤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책에다 적어 놓고 찬양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진리로부터 멀어진 삶은 죽음이며,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는 진리의 책도 아무 소용없다. - p.95.』


  인디언들과의 대화는 끝났다. 아니 사실 말은 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말고도 인디언들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 이런, 저들도 알까? 사실 인디언들은 말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 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요즘 인디언에 관련된 책들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서구식 문명화가 진행된 것이며, 그에 따라 그 문제점도 심각해진 것이리라.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인디언식 삶의 방법이리라. 물론 삶의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그 자체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리의 책인 것처럼 다루는 경향은 경계해야 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디언들이 입을 열지 않았는가? 책 따위에 진리가 들어있을 리 없다고. 진리는 오직 당신의 삶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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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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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집을 읽는 내내 참담했다. 과연 이것이 우리 문학의 현주소인가? 고작 이것이? 다른 문학상이 아니다. 이상(李箱)을 기리는 문학상이다. 이상이 누구인가? 근대, 그것도 봉건잔재를 털어내지 못한 식민지적 근대라는 상황을 현대의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살았던 작가가 아닌가.

그런데 그를 기리는 문학상의 수상작, 그리고 후보작들의 상상력은 왜 이리 초라한가? 그 감수성은 왜 이리 빈곤한가? 작가 이상은 식민지 조선의 초라한 현실을 박차고 날아오르기 위해서 날개야 돋으라고 절규했다. 그러나 이 작품집에 수록된 그 어떤 작품에도 날개는 없다. 그들은 남루한 현실을 족쇄처럼 발에 달고서, 이상(理想)은커녕 몽상(夢想)도 꿈꾸지 못하고 있다.


김훈,「화장」

-  다른 작품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불륜관계에 있는 여자 부하직원에 대한 이야기는 보잘 것 없고 다소 천박하기까지 하지만, 죽어가는 아내에 대한 부분에서는 냉정한 산문정신이 발휘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장점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의 결합이, 이상에 견줄만한 상상력은 아니었다.

문순태,「늙으신 어머니의 향기」

- 교과서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규범적이다. 초반에 아무리 부정을 한다고 해도, 이미 제목에서부터 어머니를 긍정하리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냄새에서 향기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향기였던 것을 다시 한번 향기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니, 새로울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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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밤이 지나다」

- 이런 식의 인식이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것이 아니라면, 이 작품은 참신할 수 있었다. 작품 자체의 구성이나 분위기 등은 참으로 좋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작품은「말발굽 소리를 듣다」․ 「천지간」등의 윤대녕식 감수성이나, 이순원의「은비령」등의 감수성과 너무 닮아있다. 그래서 충분히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작품이 참신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특히, 혜성, 천문대, 별 따위의 상징은 이제는 정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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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진홁파이를 굽는 시간」

- 도무지 이런 이야기가 왜 대단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 글은 심오한 척 하려는 넋두리에 불과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열하고 있지만, 삶이 왜 진흙파이라는 것인지, 이 등장인물들의 생활이 이런 인식에 도달 할 만큼의 가치를 가지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말을 내뱉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해야 비로소 좋은 소설이다.


전성태,「존재의 숲」

- 낡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참신하지만, 말 그대로 상대적인 장점일 뿐이다. 작품 자체에는 신뢰가 가지 않는다. 문장은 매력적이지만, 이야기 자체의 힘이 없다. 어디에선가, 예전의 어떤 작품에선가 보았던 이야기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고은주,「칵테일 슈가」

- 형식은 재미있지만 내용은 무엇 하나 새로울 것 없음. 제법 기교를 부린 드라마를 보는 기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충분히 무게감을 갖출 수 있는 내용을 가렵게 흘려버리고 말았다. 또한 등장인물들 간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아서, 비슷비슷한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제시된다는 인상을 준다. 조금 더 정교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아쉽다.


하성란,「그림자 아이」

- 베트남전쟁, 갑오농민전쟁,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 등 다양한 이미지들의 세련된 제시가 돋보인다. 하성란의 다른 작품들과 같은 장점과 단점을 가진 작품이다. 이미지의 제시는 매력적이나 서사가 약하다. 모호하기만 한 이야기가 읽는 내내 답답함을 주었다.


정미경,「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 끔찍하기 짝이 없는 우리말 잘못쓰기 교본이다. 외국어를 많이 아는 것이 자랑인가? 우리 문장이나 똑바로 쓰라.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은 우리말 문장을 잘못 사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시나몬이나 헤이즐넛 같은 향커피를 아내는 좋아했지만 그따위 인공향으로 위로받아야 할 만큼의 상처가 내 인생에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블루마운틴만을 고집했다.”(p.252.) 이 문장은 주어 앞에 과도한 수식이 붙어있어 의미전달을 어렵게 만든다. 더구나 향기로 위로받을 수 있는 정도라면 감히 상처가 되기나 하는가? 지나친 호들갑이다. 만일 나에게 이 문장을 고쳐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고치겠다. “아내는 시나몬이나 헤이즐넛 같은 향커피를 좋아했지만, 나는 블루마운틴을 고집했다.  인공적으로 만든 향기 따위로 위로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 기러기 아빠라는 소재는 좋지만, 인물관계설정이나 구성은 끔찍하게도 진부하다. 감정이 과도하게 남발되어 질척거린다. 감정의 남발은 글을 천박하게 만든다. 작품의 후반에 가서 현대생활에 대한 제법 의미심장한 한 인식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믿음은 가지 않는다. 너무 갑자기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의미도 모르고 지껄였거나, 입으로만 말하고 행동은 따라가지 못하는 진실이 부족한 말이라는 혐의가 짙다.


박민규,「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 정말 제목 그대로, “고마워, 과연 박민규야, 너마저 없었다면 정말 우울할 뻔했어.”  이 작품이 없었다면 이번 작품집은 얼마나 퍽퍽했을까? 가장 경쾌하면서도 가장 슬픈 이야기였고, 가장 우화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을 잘 묘파한 작품이었다. 어쩌면 이런 환상이 우리 소설이 앞으로 갖춰야 할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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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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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의 글은 감상적이다. 물론 그의 감상은 천박하지 않고 세련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글은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1992년「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노르웨이의 숲』이후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은 줄곧 감상적이었다. 세상에, 10년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바로 그 10년이다. 분명히 짧지 않은 시간이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대학생이 될 수도 있는 세월이고, 이제 막 제대한 사람은 예비군 훈련을 모두 끝내고 민방위가 될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그의 글은 읽힌다. 독자들은 지겹지도 않은지, 여전히 그의 감상에 동감한다. 이것을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감상적’이라는 한 마디 표현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분명히 무엇인가가 더 있다. 그의 글을 단순한 감상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무엇이.


  우리는 그 실마리를 작가가 감상을 만들어내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하루키 작품의 화자는 자기 느낌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꼭꼭 숨긴 채로 각종 이미지와 음악을 통해서 징조를 언뜻언뜻 내보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나오는 화자는 겉으로는 냉정해 보이지만, 그 징조를 파악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듯한 인물이 된다.

  이 정도까지 진행되면, 작가의 감상은 어떤 대상으로 인해 받은 느낌을 넘어서, 독자들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감정이 된다. 그러므로 하루키 소설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감정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동감하는 것은 그의 감상이 아니라 그 인물과의 의사소통, 즉 감정의 교류가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아무리 좋은 감정이라고 해도 한두 번이지, 변하지 않는 감정, 일관된  감정을 가지고 10년을 한결같이 동감을 얻을 수야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감정에는 분명한 흐름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루키 작품의 변화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A) 그의 첫 작품인「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3년의 핀볼」를 비롯한『노르웨이의 숲』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들은 분명히 감상적인 요소가 주를 이룬다. 물론 이 속에도 우리나라의 전대협이라고 할 수 있는 전공투(全公鬪) 세대의 의식이 녹아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저(基底)에 해당하는 부분일 뿐이고, 표면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B) 그의 작품이 변화하는 것은『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일각수의 꿈)』이다. 그는 여기에서부터 환상과 상징의 세계로 접어들게 되는데, 그의 여러 단편들에서 나타는 요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벽/일각수(unicorn)/그림자/새 등등의 원형상징들이고, 그것은 하나의 경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작품들에도 반복적으로 제시된다.『태엽을 감는 새』를 비롯해서,『해변의 카프카』와 이 작품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C) 하루키의 작품은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과 사회문제에 대한 자각이다. 이것은 하루키 작품으로서는 다소 예외적인 흐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변화는 소설 작품을 통해서 시작되지 않고, 다른 장르의 글을 통해서 먼저 이루어진다. 그의 인식변화가 이루어지는 계기는 두 가지이다.

  [C-1] 하나는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한 옴 진리교 사건인데, 그는 그 사건의 피해자들을 취재하여『언더그라운드』라는 르포르타주를 집필한다(이 작품이야말로 하루키의 작품세계가 변화하는 가장 직접적인 징후이다). [C-2] 또 하나의 사건의 고베 지진*이다. 그는 이와 관련해서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으며, 그런 단편들을 묶은 결과가 바로 이 연작소설『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이다. 이런 경향들도 역시 앞서의 환상적인 요소에 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키의 이후 작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이 연작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는『해변의 카프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 이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이 10년이 지나도록 독자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

  이제 하루키는 단순한 감상과 감정의 상호교류를 넘어서, 현실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는 작가로 거듭난 것이다. 더구나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일반적인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환상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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