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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영혼
오히예사 지음, 류시화 옮김 / 오래된미래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 1 : 인디언식 삶의 방식 ]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얼굴 붉은 사람들의 삶의 목표였다. - p.219.』
인디언의 언어는 모호하다. 그들은 모호한 언어로 세상의 진리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의 몫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줄거리를 따라서 후루룩 읽어버릴 만한 것이 아니다.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들도 찬찬히 감상해야 한다. 소설이 아니라 詩에 가까운 글이고, 시가 아니라 화집에 가까운 글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디언의 영혼>이 전하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말한다. 세상은 찬찬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백인들처럼 ‘산을 오르는 불 배(증기기관차)’를 타고 숨 가쁘게 달리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느긋하게 평원을 돌아다니라고. 이 책의 구성방식은 이러한 인디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중간에 삽입된 사진들은 끊임없이 독자들의 발걸음을 방해한다. 멈춰, 쉬어, 천천히. 백인들의 방법이 아니라 인디언의 방법으로 책을 읽어.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대한 독서노트를 늦게 올리는 변명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 사진 속의 인디언들이 말을 걸었다. 이봐, 당신 정말 다 읽었어? 우리 인디언들의 말은 백인들의 그것처럼 가볍지 않아. 나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구절 한 구절을, 사진 한 장 한 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사진 속의 그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것은 그들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 2 : 같지만 다른 이야기 ]
『부족 사람들의 명예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은 인격을 실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명예를 기리고 부족 청년들이 모범으로 삼도록 훌륭한 전사를 치장하는 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상징성을 지닌 깃털이나 짐승가죽이 포함되었다. 인디언들은 특히 독수리 깃털을 자주 사용했다. 또한 특별한 공로를 세웠을 경우에는 ‘명예로운 이름’이 수여되기도 했다. - p.220.』
이 책을 읽기 전에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미국 인디언 멸망사』(나무심는사람, 2002)를 먼저 읽었어. 참으로 다른 느낌이더군. 전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어. 결국 두 권 모두 당신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말이야.
디 브라운의 책이 처절하게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상처를 직접적으로 그대로 적나라하게 내보였는데 비해서, 오히예사의 책은 상처에서 조금 비켜서 있더군. 아니, 그렇다고 상처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어. 외과수술과 한방치료의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똑같이 아프지만 대처방안이 다른 거지. 무엇이 더 좋은지 혹은 무엇이 더 나쁜지 평가할 수는 없을 거야. 두 가지 모두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진 것들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난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당신들은 어떻게 분노를 잊을 수 있었던 거지? 그렇게 깊은 상처를 받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욱신거리는 상처가 남았는데, 당신들과 같은 종족이 아닌 나까지도 피가 끓어오를 것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 분노가 이렇게 담담하게 가라앉을 수가 있는 거야.
이봐, 이런 게 있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 중에 한(恨)이라는 것이 있거든. 슬픔하고는 좀 달라. 울분하고도 좀 다르고, 분한 것과도 다르지. 이런 감정들이 한꺼번에 섞여있다고 해야 하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야. 말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거지. 당신들이 느끼는 감정도 이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슬프지만 슬픔 그 이상의 감정,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만 분노 그 이상의 감정.
그래, 그래서 당신들은 상처에서 한 발자국 물러날 수 있었던 거지. 그래서 나는 당신들의 이런 글들에 끌리는 거야. 이건, 꼭 우리 민족의 굿판 같거든. ‘굿’이라는 것이 있어. 가슴 속에 한이 응어리져 있을 때, 그것을 풀기 위해서 벌이는 행동이야. 하지만 이것은 복수 같은 것이 아니야. 누군가를 단죄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거든. 오히려 놀이에 가까워. 지치고 힘들 때, 한 판 신명나게 놀고 나서 한동안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거야. 그래, 굿은 원한풀이와 놀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당신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디 브라운의 이야기가 원한 풀이라면, 오히예사의 이야기는 놀이에 가깝지. 어때? 나는 그렇게 느꼈어.
[ 3 : 오래전 당신들이 아닌 지금 우리의 이야기 ]
『얼굴 흰 사람들은 정말로 특이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하루를 여러 시간으로 나누고, 한 해를 여러 날로 쪼갠다. 사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나눈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해 가치를 따지고, 끝까지 이익을 추구하며,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이라 여긴다. 그들은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 p.94.』
사실 이건 당신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야.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신들과 우리 민족이 비슷하지. 하지만 비슷한 상처를 가진 것은 당신이나 우리뿐이 아닐 거야. 백인이 아닌 그 모든 종족, 유럽이 아닌 그 모든 지역에는 같은 이야기들이 있겠지. 모두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근대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몰려온 것들이지. 그래,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누구를 공격하지도 않았지.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 그 자체가 잘못이었던 거야. 세상은 변하는데 혼자 변하지 않으려했던 잘못.
잘못의 결과는 너무도 엄청났지. 백인이 아닌 우리는 시대에 뒤쳐졌고, 문명에 뒤쳐졌고, 이익에 뒤쳐졌어. 그래서 스스로의 것을 돌볼 틈도 없이 정신없이 남의 것을 배우기에 급급했지. 근대 이후, 우리가 서양을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이후 선(善)은 하나밖에 없었지. 백인들의 고결한 정신세계, 백인들의 우아한 문화, 백인들의 화려한 문명.
그렇게 백년이 지났어. 문제는 더 이상 그것들이 선이 아니라는 것이야. 타락한 정신세계, 생명력 없는 문화, 천박한 문명. 이제 세상을 지배했던 늙은 추장은 눈을 돌리고 있어. 바로 자신들이 멸망시켰던 동양과 인디언 문화들을 끌어들여, 부흥을 노리는 거지. 백인들의 예술에서 동양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사무라이 영화에 열광하고, 선(禪)과 명상이 유행하고, 요가와 채식이 유행하고 있어. 웃기지 않아? 자기들이 망쳐놓은 것들이 이제야 긁어모으고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우리가 당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야. 이미 사라진 문명에 대한 현학적인 관심이 아니라, 당신들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이거든. 오래전에 자신의 것을 지키며 사라졌던 당신들이 지금 자신의 것을 모두 잃어버린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야.
[ 4 : 진리의 책은 없다 ]
『우리는 진리의 책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으며, 누가 어떤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책에다 적어 놓고 찬양하고 다니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삶이 곧 진리이며, 진리가 곧 삶이다. 진리로부터 멀어진 삶은 죽음이며,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는 진리의 책도 아무 소용없다. - p.95.』
인디언들과의 대화는 끝났다. 아니 사실 말은 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말고도 인디언들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어, 이런, 저들도 알까? 사실 인디언들은 말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 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요즘 인디언에 관련된 책들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서구식 문명화가 진행된 것이며, 그에 따라 그 문제점도 심각해진 것이리라.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인디언식 삶의 방법이리라. 물론 삶의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그 자체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리의 책인 것처럼 다루는 경향은 경계해야 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디언들이 입을 열지 않았는가? 책 따위에 진리가 들어있을 리 없다고. 진리는 오직 당신의 삶에 들어있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