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미디어 디스토피아에서 미디어 유토피아를 상상하다
정여울 지음 / 강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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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석이다"라는 류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지만, 낡았다.

  이 책은 지극히 파편적이다. 아직 꿰지 않은 보석처럼. 
  중간중간 빛나는 문장들이 포진되어 있지만, 그 문장들은 아포리즘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가 되지 못한 까닭이다.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가 없으니 산만할 수밖에. 작가가 텍스트로 삼는 '대중문화'가 그러한 것처럼. 

  사실, 이 책에서 사용된 '대중문화'라는 용어는 매우 문제적이다. 적어도 일반적인 용법은 되지 못한다. 작가의 대상 텍스트 중 많은 부분을 '책'이 차지하고 있고, 그 '책' 중의 다시 많은 부분은 '대중'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대로 작가의 사유가 가진 한계가 된다. 작가는 '대중문화'를 표제로 걸고 있으나, 정작 대중적인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문화의 넓이와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재치발랄한 책은 독서광이자, 진지한 드라마 시청자, 게다가 간혹 다른 분야들도 기웃거리는 한 사람의 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것이, 이 책에 수록된 글들에서 고루 발견되는 난삽하고 자의식이 넘처나는 문장의 기원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이 책의 중요한 한계로 지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하다면 그 지적 역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꼴이 된다. 
  앞서 지적한 내용처럼, 이 글의 형식과 내용은 '대중문화'를 그대로 닮아 있고, 대중문화야말로 일관된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 난삽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제목 그대로 '대중문화의 숲'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오만가지 식물과 동물들이 얽혀 살고 있는 숲의 다양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앞서의 비판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선뜻 좋은 별점을 주는 일에 주저한다. 

  과연 스스로를 '아가씨'라 부르는 이 작가는 숲으로 들어가 갔는가? 
  의심스럽다. 적어도 나의 독서법에서 본다면, 아가씨는 숲 에 가지 않았다.  그저 숲의 주변에서, 경계에서 머뭇거릴 뿐이다.

  작가는 숲의 일부분만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논의의 집중이나 세밀화와는 분명히 다르다.
  집중과 세밀은 전체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전체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는다.

 

숲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중문화의 숲에 대한 유쾌한 여행안내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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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난 바다
박예분 지음, 정하영 그림 / 청개구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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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한다. 나는 알지 못했다.

  1942년 2월 3일에 일어났던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사건.

  아마도 나 혼자 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해도 나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맞다. 그것은 분명히 죄다.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렸으며,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을 과거라고 생각해버렸다. 낯설기 짝이 없는 이 싱싱한 역사의 상처 앞에서, 무지와 무식은 곧 죄다. 변명할 수 없는 죄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이제 식민지 시대는 끝났다고. 그건 역사책이나 TV사극에서나 종종 만나볼 수 있는 과거의 일이라고.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새삼 느낀다. 아직 식민지배는 끝나지 않았다.

  포스트콜로리얼(post-colonail)이란 용어의 특성이 그러하듯이, 식민지는 끝났으나 식민지배의 영향과 상처는 생생하게 남는다. 그림자처럼, 낙인처럼.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눈을 돌린다고 사라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잊어버린다고 아물어버릴 상처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해결방법은 문명하다.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눈 돌리지도 피하지도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야 한다. 복수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책의 모든 가치가 역사적 의미만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역사적 의미만 충족했을 뿐, 작품으로서의 의미는 충족시키지 못했다. 특히 같은 내용이 증언을 통해서, 학생들의 글을 통해서, 또한 작가의 말을 통해서 반복되는 형식은 작품의 재미를 급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책이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무시해버릴 수 있는 단점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을 위한 책일수록, 분명하고 명쾌한 이야기구조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한 책은 쉬워야 한다. 그러나 '쉽다'는 수사는 내용이 성글기 때문이 아니라, 정교하고도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붙어야 할 것이다. (*) 20080614(초)/20080701(오자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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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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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어느 날, 친구들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논쟁은 소설을 쓰는 친구의 신세한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제법 과격한 어조로 소설을 읽지 않는 요즘 세태를 비난했다. 그리곤 지난 시절 함께 글쓰기를 공부했던 친구들마저 책을 읽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을 힐난했다.

  그러자 소설을 쓰지 않는 친구 하나가 반론 혹은 변명을 했다. 요즘 세상에서 소설이 과연 얼마만큼의 기능을 하고 있는가, 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소설 따위를 읽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소설을 쓰지만 무명에 가깝고, 널리 알려지고 싶어 하지도 않는 나는 중간에 끼인 상태로 말했다. 소설을 읽지 않는 세태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소설은 그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전적으로 독자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소설가들이다. 요즘 독자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최근 소설이 재미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애초부터 맞고 틀림이 문제가 되지 않는 논쟁이었다. 아니, 논쟁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저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신세한탄과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 2 >


   김중혁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 때의 논쟁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다시 중얼거렸다.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맞다. 바로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나는 김중혁의 소설에서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 3 >


   좀 거창하게 말해보자. 우리 소설(사실, 소설뿐이 아니다. 우리 영화나 드라마, 만화, 음악 등등 대부분의 예술장르가 그러하다.)은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이 없다. 유럽처럼 장중한 스케일이나 문화적 깊이도 없고, 미국처럼 전문적인 지식으로 무장한 장르소설도 없다. 그뿐인가? 일본처럼 아기자기하면서 재기발랄한 것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단순한 방향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장르소설은 상업적이라고 무시하고, 태생을 간과한 채 서구의 이론을 적용시켜 평론가나 연구자들의 눈에 드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정작 독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도 못하면서, 독자들의 수준이 낮다고 투덜거리기만 한다.


   잘라 말하겠다.


   먼저 독자의 요구를 파악해야 한다. 이제 소설에도 마케팅의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소설은 문화상품과는 다르다. 온전한 예술 행위로의 소설쓰기, 즉 철저히 자기만족을 위한 소설쓰기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은 '상품성을 가진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통해, 내 과격한 논의를 방어하고자 한다.)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제품을 소비자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작업이다.

   마케팅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소비자의 요구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제품이 만들어져 있다면, 그것이 소비자의 요구에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어필해야 한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면 이렇게 된다.

   소설이 읽히기 위해서는, 그래서 소설책이 잘 팔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자들의 요구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문제이다.

   (이런 말을 하면 꼭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그럼, 상업주의에 영합하지는 말인가?” 이 물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A) 이는 독자들을 무시하는 얼치기 계몽주의적인 관점이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독자 역시 감식안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경우 그들의 안목이 보편적이며 타당하기까지 하다. B) 또한 이는 위선적인 자기기만이다. 상업주의를 하기 싫다면, 독자들이 책을 보지 않는다는 둥의 넋두리를 떨 필요가 없다. 그냥 자기 돈을 책을 찍어 주변 사람들과 돌려 읽으면 된다. 뭐, 운이 좋아서 다른 사람도 읽어주면 좋고, 아니어도 서운할 것 없고. 오히려 이런 자세가 더 쿨하고, 예술가답다.)



< 4 >


   그렇다면 독자의 요구는 무엇인가?


   4-1. 선정성?


   많은 창작자들의 착각 중의 하나가 선정적이기만 하면 독자들이 다 좋아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소설 독자들은 야설 독자들과 분명히 다르다. 소설이 제아무리 선정적이라고 하더라도 포르노보다 더 하겠는가?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읽을 시간에 열심히 다운로드를 받고 있을 것이다.


   4-2. 새로운 시대?


   그렇다면 시대 문제인가?


   요건 좀 고민해볼만 하다. 그리고 보다 깊이 있는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시대 문제를 다루긴 하지만, 그것은 예전의 것들과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시대니, 한국전쟁이니, 분단상황이니, 반독재투쟁이니, 산업사회의 폐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많은 작가들이 더욱 많은 작품을 통해 다루고, 다루고, 또 다루었다.


   엇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기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같은 이야기라면 이야기 방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에 성공한 작품으로 김영하의 소설「검은 꽃」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김중혁의 소설들에서는 새로운 이야기 방식이 없다. 짐짓 새로워 보이는 이 작품집은, 적어도 이야기 방식의 측면에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모든 서술이 기존의 소설에서 보아왔던 것이다. 


   이야기 방식을 바꾸는 것 말고도, 새로운 사회 문제를 찾아내는 방법도 있다. 20세기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제. 산업화 정도가 아니라, 고도산업화된 지식사회의 문제. 이것은 이야기거리 자체가 새롭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 하다.

   김중혁의 작품들은 이런 측면에 어느 정도 부합된다. 내가 김중혁이란 작가에게서 찾아낸 가장 큰 미덕은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우리 시대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소설은 ‘접근’을 할 뿐이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부’하거나 ‘성찰’하거나 ‘논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 작품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멍청한 유비쿼터스」와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해커의 활약상, 혹은 전산보안시스템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새롭지만, 그 문제의 기원을 탐구하지 않았고, 그 영향력 역시 간과해버렸다는 점은 끝내 아쉽다. 그래서 제법 독설적인 문명진단이 될 수도 있었던 소재가 그저 ‘시건방진 해커의 액션 활극’이 되어버렸다.


   4-3. 삶?


   범위를 좁혀볼 필요가 있다. ‘시대’라는 용어 자체에 염증을 느끼는 독자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결국은 모두 ‘삶’의 문제라고. 맞다. ‘삶’이야말로 소설이 꾸준하게 추구해왔던 문제가 아니던가.


   ‘삶’의 범위를 생각해보자. 흔히 이 단어는 ‘현실’이나 ‘생활’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런 것들하고만 관련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와 융, 그리고 톨킨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것처럼, 무의식과 상징 그리고 환상도 역시 ‘삶’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삶이란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렇다면, 소설도 역시 이 현실과 환상의 두 가지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김중혁의 소설은 이 균형감각이 부족하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은 찾아볼 수 없다. 단순한 소재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 혹은 경험과 이어지는 문제이다. 나는 이 작가를 알지 모르지만, 단순히 작품만을 가지고 평가하자면, 사회 경험이 부족하다. 아니,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전무하다. 즉, 그는 문학인으로의 삶을 살았을 뿐이지, 생활인으로서의 삶은 살지 않은 듯 하다. 그러니 생활인이 대부분인 독자들에게 이런 글이 먹힐 리 없다. 

   물론 이는 김중혁 만의 문제는 아니다. 1990년대 이후의 소설가들이 대부분 그러하지 않았던가? 윤대녕의 댄디즘이나, 여성작가들의 낭만적 불륜이야기 등등,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


   나는 바로 이것이 우리 소설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활에 빠진 허구. 무릇, 거짓말의 기반은 현실이다. 가장 그럴싸한 것이 가장 빼어난 거짓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우리 소설은 그 기반을 잃어버렸다

   ‘소설가’라는 명칭은, 멋진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들의 거짓말이 다른 이들을 멋지게 속이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소설가가 아니다. 소설가들이여 먼저 생활을 찾자. 그래야 생활인인 독자들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중혁에게, 그리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소설가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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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걸음 2007-05-16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는 건 쓰는 분의 자유입니다만 제대로 알고 써주셨으면 합니다. 김중혁 씨는 여러 직업도 전전하셨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사회 경험이 전무하다뇨. 소설만 가지고 작가까지 단정짓는 건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라훌라 2007-05-20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심 님께서는 김중혁 작가의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군요. ^^ 제가 "작품만을 가지고 평가하자면~"과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이라는 단서를 붙였는데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시는 것을 보니 이 작가에 대해 매우 깊은 관심과 통찰이 있으시리라고 기대합니다. 의견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늘보리 2007-06-21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고 깊고 열정적인 리뷰는 두 가지 작품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하나는 정말 맘에 쏙 드는 작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말 성에 안 차는 작품.. ㅋㅋ 이 정도 분량의 리뷰를 쓸 정도면 정말 .. ㅋㅋ 펭귄뉴스도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한국 작품들 태반이 이 책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겁니다(현실성이랄까?). 님이 지적하신 그 점 때문에 한국 소설 안 읽는다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이구요. 저 역시..ㅋㅋ 한가지 더붙이자면 일본 소설에도 특별히 생활이란 것은 없는데 왜 그렇게 읽히는지 가슴이 쓰리긴 합니다. 제가 볼 땐 일본 소설이 별달리 재기발랄한 점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요. 아무튼 일본 소설이든 한국 소설이든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작가들이 좀 나타났으면 합니다. 생활이든 재기발랄함이든. 쩝쩝. 그러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걸 알지만.. 아무튼 라훌라님의 리뷰는 저를 즐겁게 해줍니다. 최소한 이 책보단 그랬네요. ^^ ㅎㅎ
 
한국의 일상 이야기 - 어느 프랑스인이 본 처가의 나라 꼬레
에릭 비데 지음, 니코비 그림, 최미경 옮김 / 눈빛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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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지리는 하나의 보편성만 있는 것이 아니며, 보편성과 개별성이 대를 이루는 이론의 축 위에 여러 단계의 보편서이 존재함을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현실은 항상 중도적인 것이며, 그 어떤 것도 완전히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 오귀스텡 베르크(Augustin Berque), 『야성과 기교』 중에서



[ * ]


한국에 대한 글을 쓰는 서구인들은 오리엔탈리즘에서 이상화하거나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에릭 비데는 오랫동안 한국에 살면서 가정을 이루고, 학자로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상당 기간 하고 있는 사람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 역시 남다르다. 본문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일상적인 것이다. 일상적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문제도 적절하게 진단을 한다. - 「옮긴이 후기」, p.170.

 

  자신을 올바로 돌아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렴, 그래야 우물에만 갇혀 만족해버리는 잘못을 피할 수 있다. 특히 비판에 익숙하지 않고, 비판과 비난을 쉽게 혼동하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저작을 읽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외국인들의 저술 중에서 만족할만한 수준의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에 인용된 옮긴이의 후기에서 지적된 것처럼, 대부분은 우리를 동양의 일부로 신비화하거나, 우리 사회의 단면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긴, 이것은 외국인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 역시 일본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신비화와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 저술에도 그런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것들보다는 좀 더 정돈된 시각을 갖추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가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관광객’의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생활인’의 시각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는 한국의 목욕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허름한 밥집과 술집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장과 지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를 다루었던 대다수의 저술들이 도시와 경제와 정치를 다루었다는 점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우리의 특징을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도 위험한 작업이다. 그러나 구태여 정리하지 않더라도, 도시보다는 지방에서, 대기업보다는 시장에서, 정치문제보다는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우리의 특징을 더 잘 파악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지만 쉽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적어도 ‘관광객’의 시선을 유지할 때는 그러하다. 여행길에 찾아간 고장에서 삶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고 이러한 장소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관찰자에게 더욱 잘 발견되는 법이다. 공간이 장소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험이 익숙해진다는 의미이니까. 익숙한 경험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지 못한다. 익숙함 속에서 발견되는 낯선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특징이 아닐까?

  이 책의 저자인 에릭 비데는 한국인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첫 번째 단계로 목욕탕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일본인들과 비교하고 있다. 다소 길기는 하지만 인용하고자 한다. 이 부분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특징을 잘 표현한 곳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가본 적이 있는 한국․일본․헝가리․터키의 목욕탕 중에서 한국의 목욕탕이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이며, 시설도 가장 잘되어 있고, 이웃 일본의 목욕탕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목욕탕에는 일본의 목욕탕에 없는 목욕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용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다. 내가 처음 일본의 목욕탕에 갔을 때, 목욕을 끝내고 나오는데 주인이 따라 나와서 추가요금을 내고 가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사우나에 들어갔기 때문이란다.

  (……) 한국에서는 보통 아침에 목욕탕엘 간다. 아니면 오후 늦게 가게 되는데, 대부분의 목욕탕은 저녁 7-8시가 되면 문을 닫는다. 한국에서 목욕탕은 하루를 시작하는 시발점으로 들르는 경우가 더 빈번한 것 같다. 특히 전날 저녁에 과음을 했을 때 머리를 맑게 해주는데 아주 좋다. 일본의 경우, 목욕탕은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잠자기 전에 몸을 푸는 곳(p.32.)으로서 기능한다. 그래서 밤 11시, 자정까지 열려 있다. 한국과 일본 목욕탕의 가장 큰 차이는 개방 시간보다도 그 내부에서 진행되는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들은 온탕에 입수하기 전에 일반적으로 아주 치밀하게 몸의 곳곳을 닦아낸다.

  (……) 일본사람들의 경우는 탕에 들어가기 전에 물을 끼얹는 정도로 몸을 가볍게 닦고, 탕에서 나온 다음에 오히려 세심하게 닦는 편이다. (……) 이미 17세기의 책에도 “규율준수 정신과 검소함이 특징인 일본인들은 편집증일 만큼 청결을 추구한다”고 나와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그 점이 바로 어떤 때는 일본을 참기 어렵게 느끼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욕탕에서만큼은 청결의 세세한 사항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을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p.33.)


   그러나 이 작가의 시각에도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이는 저자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대표적인 예가 백담사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백담사를 전두환의 은신처로만 다루고 있다. 그러나 백담사에 대해서는 한용운 선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이를 개인적 취향의 문제, 즉 정치에 대한 관심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의 전통과 특징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면, 아무래도 전두환보다는 한용운이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한용운은 시인이면서 사상가였고, 한국 불교를 혁신하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그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하긴, 우리나라 사람들도 백담사에서 한용운을 떠올리기보다는, 전두환을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지키지 않는데, 누가 우리 것을 지켜주기를 바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의 주장은 대부분 타당하고, 따끔따끔하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잊고 있던 문제들, 경제 성장 제일주의에 의해 우리가 스스로 잃어버렸던 것들에 그는 애정을 보이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지적했던 것들이야 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가 앞장서서 지켜야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날카로운 지적 중에서 몇 가지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 나이가 상당히 들어도 부모의 경제적 부양을 받는 젊은이들은 결혼을 할 때는 부모들이 장만해 준 아파트와 거기에 어울리는 자동차를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풍속이 가족 간의 결속력의 발현이라고 보지만, 내가 보기에는 현실의 삶에서의 도피이며, 원하는 물건을 노력해서 시간을 두고 하나씩 사들이는 데 필요한 인내심 부재의 현상일 뿐이다. (p.40.)


- “도시의 시장은 한국에서 수세기 전부터 중앙정부와 촌락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기관의 역할을 했다. 시장에 가보면 바로 촌락의 영향이 도시에서 계속해서 미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핸더슨(Henderson)은 시골 특유의 상부상조와 나누기 전통 등이 도시에서 계속되는 장소로 시장을 꼽으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같은 물건을 판매하는 시장 상인들 사이에는 치열한 경쟁이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들 중에 한 명이 운이 나쁘게 파산을 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 같은 동업자들끼리 서로 돈을 빌려 준다. 어떤 때는 차용증 한 장 쓰지 않고 빌려 주기도 한다. 만약에 깡패들로부터 위협을 받으면, 위험에 처한 상인을 위해 서로 힘을 모은다. 정부가 그들이 판매하는 상품에 대해 어떤 불리한 조치를 취하면 항의하기 위해서 역시 힘을 모은다. (p.54.)


- 19세기에 샤를 바라는 한국의 음악이 이미 중국이나 일본에서 듣던 음악에 비해 훨씬 우수하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로부터 오십여 년이 지난 후에 앙리 미쇼는 “한국의 고대음악은 쾌락을 제공하기 위한 여성들인 기녀들이 부르는 데도 슬프고 장중하다”라고 적고 있다. 최근의 음악도 서구의 유행가를 그대로 따르는 노래를 제외하고는 아주 우수한 음악이 많다.

  이 주점의 손님들은 모두 단골이며, 거의 가수 수준으로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들로, 거침없이 주점에 여기저기 놓여 있는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그러면 다른 손님들도 같이 따라서 노래를 하곤 한다. 특히 1970-80년대의 민주화 투쟁 시에 많이 불렸던 저항의식의 데모 노래가 많다. 이 주점에서는 거의 세계에 보편적으로 나타났지만 선진국, 특히 프랑스의 경우에 사라져 가고 있는 음유시인의 전통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한국적인 맥락에(p.69.)서 이 전통이 지속되고 있었다.(p.70.)


★ 옷가게나 시계가계도 늦게까지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밤이 이슥한 시간에 양복이나 시계를 사러갈 것인가. 이 상인들의 가족의 삶은 어떻게 유지가 되는지. 이 점이 바로 한국 현대사회의 거대한 모순인 것이다. 가족의 가치에 대해서 서구보다 훨씬 더 강조하면서 사실은 가정생활의 조화와 행복을(그것보다 더 우선적이라고 생각하는) 국가나 기업의 영리를 위해서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p.114.밑줄강조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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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 보트 Remix
후루카와 히데오 지음, 김현희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1 ]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영화 업계에서는 고전적인 명제로 자리 잡은 그것, “전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맞다. 분명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중국행 슬로보트>보다 떨어진다. 구성상의 밀도도 부족하고, 작품에 제시된 이미지도 선명하지 못하며, 심지어 주제의식까지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주목한다. 아니 이 표현은 잘못되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러한 시리즈물을 생각해낸 기획력이다.


  “리믹스소설”이라는 용어는 낯설다. 물론 ‘리믹스’라는 용어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음악, 특히 대중음악에 있어서는 이제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을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라고 해서, 이를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가? 나는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상념은 보다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으로 이어진다. (근원이나 추상과 같은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독자들은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을 건너뛰고 이 글을 읽는 것이 좋다. 뭐, 상관없다. 그런 상념을 하는 나 역시도, 남들의 상념을 읽는 일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생각을 조금만 이어가자.)


  문학은 대중음악과 다른가? 결국 내 생각은 이 질문으로 국한된다. 만일, 다를 것이 없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일만한 기법이다. 그렇지만 만일, 다르다면?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고전적인 명제에서부터 시작하자.

  문학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작가의 세계관이나 사회의식이 분명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표절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작품을 토대로 창작을 시작했을 뿐이라면, 그리고 원작과는 분명하게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를 통해서 작가의식은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 문학 각 장르에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스타일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그건 다른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예술, 그리고 단순한 창작자 이상인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다. 더구나 리믹스음악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원곡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경향에 따라 새롭게 창작된다. 그렇다면, 이 역시 나름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대중예술 장르와는 달리 문학의 창작자는 ‘작가’라도 호칭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작가’라는 호칭에는 그의 권한에 대한 절대성이 내포되어 있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도 창작활동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고주의 요구를 치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창작활동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투자자와 관객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 비해 문학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창작품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물론 출판사나 잡지 편집자의 견해가 제시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예술에 비한다면 그 영향력은 지극히 미비하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작품의 창작자에게 ‘작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단어 속에는 작가라면 온전하게 독창적인 창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맞다. 내가 ‘리믹스’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는데 주춤거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리믹스 기법을 사용한다면, 작가의 창조력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을 떠올린다. 과연 작가의 지위가 그렇게 절대적일 필요가 있는가? “태양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명제처럼, 어떤 작품도 앞선 작가들, 그리고 작품들과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공간, 서로 다른 개성의 작가들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것은 때로 동감(同感)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반감(反感)이 되기도 하지만,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요컨대, 너무 어깨에 힘을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작가라는 명칭에 부여된 전지전능한 창작자로의 무게를 조금만 덜어낸다면, ‘리믹스소설’이라는 용어는 충분히 사용가능하다. 




[ 2 ]


  무라카미 하루키가 <중국행 슬로보트>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의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된다”는 다소 선언적인 내용이라고 나는 읽었다. 하지만 이 리믹스소설의 저자 후루키와 히데오는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중국행 슬로보트>를 읽었다, 라고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리믹스 작업을 통해서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제목에다 “도쿄 탈출기”라는 설명을 달았다. 하지만 왜 그곳을 탈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탈출을 시도한다고 하면서도, 각 연도별로 당시 도쿄에 대한 기억을 모으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다소 천박해진 느낌까지 있지만,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완전한 탈출”이 아니던가.

  아마도 ‘탈출’과 관련되는 상상력은 하루키의 작품 끝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계기가 된 것이리라.


  오류……, 오류라는 것은 그 중국인 여자 대학생이 말했던 것처럼(혹은 정신 분석의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은 역설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아무데도 출구 따위는 없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중국행 슬로보트」,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모음사, 1991, p.44.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째서 도쿄를 탈출하려고 하는 것인가? 작품을 읽고, 그 감상을 생각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하루키가 이야기했던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요”(무라카미 하루키, 앞의 작품, p.21.)라는 구절에 해당하는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히데오와 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현해탄만큼이나 넓고, 깊다. 동경에 사는 사람이 아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거리 때문은 아니다. 나는 하루키가 “아무데도 출구 따위는 없는 것이다”라고 중얼거렸을 때, 동감했다. 맞다. 도쿄가 아닌 서울에 사는 나에게도 출구는 없었다. 그리고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문장을 읽은 뒤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서울을 빠져나왔다. 이런 점에서 하루키는 히데오보다 좀더 보편적이라고 하겠다. 하루키의 도쿄는 서울이기도 하고 뉴욕이기도 하지만, 히데오의 도쿄는 오직 도쿄일 뿐이었다. 


  하루키가 ‘중국인’이라는 계층을 통해서 모든 소외 받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다면, 히데오는 이를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국한시키고 있다. 아마도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바다를, 바다 건너의 또 다른 중국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긴,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가장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아닌가. 그러니 그 둘 사이에 건너기 힘든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는 설정이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바다는, 비단 이런 경우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바다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불만이 생긴다. 그가 바다, 즉 단절의 상황을 인식하는 관점에도 문제가 있다. 리믹스소설의 주인공은 항상 빼앗긴다. 처음 좋아했던 누나를 그녀의 부모가 빼앗아가고, 두 번째 좋아했던 대학 동급생은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여자 아이와의 공간은 난데없는 우박으로 가게가 무너지면서 빼앗긴다. 그는 항상 수동적이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그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상황이 그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저열한 변명이고, 자기만족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도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요컨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그렇다. 그가 만났던 두 번째 중국인, 그 여자아이에게 주인공은 상처를 입힌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리믹스된 노래에는 피할 수 없는 굴레가 지워진다. 원작과의 비교가 그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원작에 비해 좋은 평을 받기 힘들다. 리믹스곡을 듣는 사람 중의 많은 수가 원작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에 애착을 가지게 되면, 가능한 그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나는 나이를 먹어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군살이 붙어버렸을 지라도, 그때 그 노래를 부른 가수만은 여전히 청춘이기를 바란다.

  알고 있다. 그것은 욕심이다. 시간이란 것은, 지독하게도 공평하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리고 리믹스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했던 노래는 언젠가 잊혀져 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이 어다 사랑인가? 이런 점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작 <중국행 슬로보트>에 더 많이 눈이 가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행 슬로보트 Remix : 도교 탈출기>에게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서평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하긴, 내가 이 책을 읽은 시선부터가 곱지 않지 않았던가.



[ 3 ]


  리믹스소설이라는 기법은 제법 활용해볼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법을 적용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Remix>나 이문구의 <관촌수필 Remix>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나는 다시 한번 애증이 섞인 눈으로 그 작품을 읽어치울 것이다.

  또한 이 기법은 소설 창작을 연습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긴 습작기에는 꼭 이렇게 ‘리믹스’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아도, 선배 작가들의 냄새를 강하게 피우지 않는가.


아무튼, ‘리믹스’라……  지속적인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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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싸이월드 클럽 [책빵]의 <도서관소년성장기> 게시판 http://book-bbang.cyworld.com 

  - 리더스가이드 RG리뷰 게시판 http://www.readersguide.co.kr

  - 인터넷서점 알라딘 <서재에서 세상 엿보기> http://my.aladin.co.kr/rah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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