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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행 슬로 보트 Remix
후루카와 히데오 지음, 김현희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1 ]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영화 업계에서는 고전적인 명제로 자리 잡은 그것, “전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맞다. 분명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중국행 슬로보트>보다 떨어진다. 구성상의 밀도도 부족하고, 작품에 제시된 이미지도 선명하지 못하며, 심지어 주제의식까지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주목한다. 아니 이 표현은 잘못되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러한 시리즈물을 생각해낸 기획력이다.
“리믹스소설”이라는 용어는 낯설다. 물론 ‘리믹스’라는 용어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음악, 특히 대중음악에 있어서는 이제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을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라고 해서, 이를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가? 나는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상념은 보다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으로 이어진다. (근원이나 추상과 같은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독자들은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을 건너뛰고 이 글을 읽는 것이 좋다. 뭐, 상관없다. 그런 상념을 하는 나 역시도, 남들의 상념을 읽는 일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생각을 조금만 이어가자.)
문학은 대중음악과 다른가? 결국 내 생각은 이 질문으로 국한된다. 만일, 다를 것이 없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일만한 기법이다. 그렇지만 만일, 다르다면?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고전적인 명제에서부터 시작하자.
문학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작가의 세계관이나 사회의식이 분명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표절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작품을 토대로 창작을 시작했을 뿐이라면, 그리고 원작과는 분명하게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를 통해서 작가의식은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 문학 각 장르에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스타일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그건 다른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예술, 그리고 단순한 창작자 이상인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다. 더구나 리믹스음악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원곡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경향에 따라 새롭게 창작된다. 그렇다면, 이 역시 나름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대중예술 장르와는 달리 문학의 창작자는 ‘작가’라도 호칭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작가’라는 호칭에는 그의 권한에 대한 절대성이 내포되어 있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도 창작활동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고주의 요구를 치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창작활동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투자자와 관객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 비해 문학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창작품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물론 출판사나 잡지 편집자의 견해가 제시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예술에 비한다면 그 영향력은 지극히 미비하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작품의 창작자에게 ‘작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단어 속에는 작가라면 온전하게 독창적인 창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맞다. 내가 ‘리믹스’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는데 주춤거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리믹스 기법을 사용한다면, 작가의 창조력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을 떠올린다. 과연 작가의 지위가 그렇게 절대적일 필요가 있는가? “태양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명제처럼, 어떤 작품도 앞선 작가들, 그리고 작품들과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공간, 서로 다른 개성의 작가들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것은 때로 동감(同感)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반감(反感)이 되기도 하지만,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요컨대, 너무 어깨에 힘을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작가라는 명칭에 부여된 전지전능한 창작자로의 무게를 조금만 덜어낸다면, ‘리믹스소설’이라는 용어는 충분히 사용가능하다.
[ 2 ]
무라카미 하루키가 <중국행 슬로보트>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의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된다”는 다소 선언적인 내용이라고 나는 읽었다. 하지만 이 리믹스소설의 저자 후루키와 히데오는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중국행 슬로보트>를 읽었다, 라고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리믹스 작업을 통해서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제목에다 “도쿄 탈출기”라는 설명을 달았다. 하지만 왜 그곳을 탈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탈출을 시도한다고 하면서도, 각 연도별로 당시 도쿄에 대한 기억을 모으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다소 천박해진 느낌까지 있지만,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완전한 탈출”이 아니던가.
아마도 ‘탈출’과 관련되는 상상력은 하루키의 작품 끝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계기가 된 것이리라.
오류……, 오류라는 것은 그 중국인 여자 대학생이 말했던 것처럼(혹은 정신 분석의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은 역설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아무데도 출구 따위는 없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중국행 슬로보트」,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모음사, 1991, p.44.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째서 도쿄를 탈출하려고 하는 것인가? 작품을 읽고, 그 감상을 생각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하루키가 이야기했던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요”(무라카미 하루키, 앞의 작품, p.21.)라는 구절에 해당하는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히데오와 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현해탄만큼이나 넓고, 깊다. 동경에 사는 사람이 아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거리 때문은 아니다. 나는 하루키가 “아무데도 출구 따위는 없는 것이다”라고 중얼거렸을 때, 동감했다. 맞다. 도쿄가 아닌 서울에 사는 나에게도 출구는 없었다. 그리고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문장을 읽은 뒤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서울을 빠져나왔다. 이런 점에서 하루키는 히데오보다 좀더 보편적이라고 하겠다. 하루키의 도쿄는 서울이기도 하고 뉴욕이기도 하지만, 히데오의 도쿄는 오직 도쿄일 뿐이었다.
하루키가 ‘중국인’이라는 계층을 통해서 모든 소외 받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다면, 히데오는 이를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국한시키고 있다. 아마도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바다를, 바다 건너의 또 다른 중국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긴,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가장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아닌가. 그러니 그 둘 사이에 건너기 힘든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는 설정이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바다는, 비단 이런 경우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바다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불만이 생긴다. 그가 바다, 즉 단절의 상황을 인식하는 관점에도 문제가 있다. 리믹스소설의 주인공은 항상 빼앗긴다. 처음 좋아했던 누나를 그녀의 부모가 빼앗아가고, 두 번째 좋아했던 대학 동급생은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여자 아이와의 공간은 난데없는 우박으로 가게가 무너지면서 빼앗긴다. 그는 항상 수동적이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그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상황이 그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저열한 변명이고, 자기만족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도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요컨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그렇다. 그가 만났던 두 번째 중국인, 그 여자아이에게 주인공은 상처를 입힌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리믹스된 노래에는 피할 수 없는 굴레가 지워진다. 원작과의 비교가 그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원작에 비해 좋은 평을 받기 힘들다. 리믹스곡을 듣는 사람 중의 많은 수가 원작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에 애착을 가지게 되면, 가능한 그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나는 나이를 먹어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군살이 붙어버렸을 지라도, 그때 그 노래를 부른 가수만은 여전히 청춘이기를 바란다.
알고 있다. 그것은 욕심이다. 시간이란 것은, 지독하게도 공평하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리고 리믹스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했던 노래는 언젠가 잊혀져 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이 어다 사랑인가? 이런 점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작 <중국행 슬로보트>에 더 많이 눈이 가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행 슬로보트 Remix : 도교 탈출기>에게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서평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하긴, 내가 이 책을 읽은 시선부터가 곱지 않지 않았던가.
[ 3 ]
리믹스소설이라는 기법은 제법 활용해볼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법을 적용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Remix>나 이문구의 <관촌수필 Remix>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나는 다시 한번 애증이 섞인 눈으로 그 작품을 읽어치울 것이다.
또한 이 기법은 소설 창작을 연습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긴 습작기에는 꼭 이렇게 ‘리믹스’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아도, 선배 작가들의 냄새를 강하게 피우지 않는가.
아무튼, ‘리믹스’라…… 지속적인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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