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방문해야 할 곳은 일리에 콩브레가 아닐 것이다. 프루스트에게 바치는 진정한 경의는 그의 눈으로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우리의 눈으로 그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닐 테니까.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중에서

 

 * *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다 보면 자칫 '길'을 잃기 쉽다. 우리의 의식이 끊임없이 불쑥불쑥 끼어드는 '딴 생각' 때문에 옆길로 새듯이, 꼭 그처럼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이런 불규칙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묘사가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이나 풍경 혹은 장소에 대한 묘사를 할 때도 그렇고,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개할 때도 방식은 마찬가지다.

 

화자의 눈 앞에 놓인 '어떤 장면'을 이야기하다가도 그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가 불쑥 작가의 의식에 떠오르면 그에 대한 생각을 죄다 쏟아붓고 난 다음에 또다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식이다. 그러니 프루스트가 그려내는 '의식의 미로'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확하게 따라가지 않으면 독자들은 순식간에 길을 잃고 만다. 우리의 의식이 눈 앞의 현실을 좇다가도 순식간에 머나먼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공간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듯이, 프루스트의 의식도 우리와 똑같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 담긴 기억들이 우리와 현저히 다를 뿐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화가의 그림들과 음악가의 작품들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빼곡히 차지하고 있다. 그는 그림들을 아주 좋아했고, 음악과 독서 또한 그의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그는 프랑스 사교계를 자주 드나든 덕분에 수많은 귀족 계급과 브루주아 계급의 유명 인사들을 알고 있었다.(소설 속에서 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이 게르망트 공작과 공작 부인이었고, 브루주아를 대표하는 인물이 스완과 스완 부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자는 결국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서전적 소설로도 읽힌다. 작품 속 주인공인 화자는 숱한 그림들과 음악과 문학 작품들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작가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그가 작품 속에 끝없이 펼쳐 놓은 문장들은 화자의 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을 드러내는 작가 노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작가가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치고 덧보태고 가다듬은 문장들이 결국 그 자체로 소설이 되었다고나 할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동안에 독자들이 체험하는 고통은 주로 두 가지에 연유하는 듯하다. 하나는 프루스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때때로 너무나 고차방정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구조와 그 구조물 속에 담긴 내용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움켜쥐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은 절대로 프루스트가 고의적으로 의도한 게 아니다. 실상은 독자들이 작가의 의식 속으로 정확하게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프루스트가 일부러 안개처럼 희뿌연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갈 때도 없지는 않지만 그럴 땐 도리어 독자들이 아주 쉽게 작가의 의식을 따라잡을 때가 많다.

 

독자들이 훨씬 더 자주 고통을 느끼는 때는 끝없는 미세회로 같은 '프루스트의 길'을 따라가다가 재빨리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방황할 때이다. 이런 경험은 꼭 프루스트의 책을 읽을 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경험은 있기 마련이다. 가령,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나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자주' 길을 잃고 방황한다.(굳이 이런 책들의 예시 목록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 언급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여겨진다.)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놓은 지도는 너무나 선명해서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를 확대해 보더라도 계단처럼 울퉁불퉁한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지만,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의식은 작가의 의식 속에 그려진 지도가 매번 흐릿하거나 애매모호하게 그려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놓은 고화질의 선명한 지도만을 믿고 무턱대로 따라가다가, 불현듯 작가와 차츰 동떨어져 나홀로 걷기 시작한 지점을 발견하며, 작가와의 뜻하지 않은 결별이 과연 어디서부터였는지를 되찾기 시작하고, 어렵사리 그 지점을 다시 찾는 순간 비로소 안도하며,  멈춰세웠던 작가를 다시 앞장세우며 가던 길을 계속 걷게 된다.

 

<총7편/13권>으로 구성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1부 스완 부인의 주변>과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1부에서는 첫사랑 질베르트와의 사랑을 다루고, 2부에서는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과의 사랑을 다룬다. 질베르트와의 첫사랑이 그 사랑을 경험하는 화자와 질베르트의 나이에 딱 어울릴 정도로 철없고 순수하면서도 막연하고 가슴 아픈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알베르틴과의 두 번째 사랑은 첫사랑에서의 실패를 겪은 탓인지 화자가 탐색하고 찾고자 애쓰는 대상(소녀)에 대한 극도로 세심한 관찰과 신중한 접근이 뚜렷한 특징을 이룬다. 화자는 마치 박물학자나 곤충학자와 같은 모습을 띤다.

 

화자가 알베르틴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은 550쪽에 달하는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제4권)에서도 250쪽에 가서야 겨우 등장한다. 나는 <제4권>을 읽는 동안 알베르틴이 과연 언제쯤이나 등장할까 궁금해서 가끔씩 조바심을 낼 정도였는데, 무려 250쪽에 와서야 비로소 그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녀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생루는 동시에르에 돌아가야 했다. …… 나는 어떤 특별한 사랑도 하지 않은 채 텅 빈 상태로 사방에서 ㅡ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자신이 반한 대상을 찾아 나서듯이 ㅡ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찾고 만나는 그런 젊음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 (25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밑자락을 깔고 나서도 프루스트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가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게 프루스트의 생각이 한참이나 옆길로 새다가 겨우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면 비로소 좀 더 구체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나는 그저 혼자서 그랜드 호텔 앞을 서성이며 할머니를 보러 갈 시간만을 기다렸는데, 그때 방파제 거의 끝 쪽에서 특이한 얼룩 하나가 움직이는 듯, 그 모습이나 행동이 발베크에서 늘 보아 오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대여섯 소녀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마치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날아든 한 무리 갈매기 떼가 해변에서 서로 보조를 맞추며 ㅡ 뒤처진 새들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다른 새들을 쫓아가면서 ㅡ 산책하는 것 같았는데, 그 산책 목적도 새의 정령인 소녀들에게는 분명했겠지만, 그녀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듯 보이는 해수욕객들에게는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이 낯선 소녀들 가운데 한 소녀는 손으로 자전거를 앞으로 밀고, 또 다른 두 명은 골프 '클럽'을 들고 있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은 발베크의 다른 소녀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는데, 물론 발베크 소녀들 가운데서도 스포츠에 빠진 이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특별한 옷차림을 하지는 않았다.(25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 소녀들이 비로소 화자의 눈앞에 좀 더 뚜렷하게 다가오기 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 여기서 얼마란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작품 속 프루스트의 문장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다.

 

이내 소녀들이 나와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다. 소녀들은 제각기 완전히 다른 유형이었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조금 전부터야 바라보았을 뿐인 데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으므로, 그때까지 나는 소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개별화하지 못했다.(253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여기서 프루스트는 다시 무리지어 움직이는 소녀들의 모습을 무려 다섯 쪽이나 더 할애하여 충분히 길게 설명한 다음 비로소 화자인 내가 '그 소녀'와 '눈길'을 마주치는 장면을 묘사한다.

 

자전거를 밀던 그 뺨이 통통한 갈색 피부 소녀 옆을 지나다가 나는 한순간 그녀의 웃음기 머금은 곁눈질과 마주쳤는데, 그것은 이 작은 부족의 삶을 가둔 비인간적인 세계,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관념 따위는 들어갈 자리가 없는 접근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에서 온 시선이었다.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채로 이마까지 낮게 폴로 모자를 눌러쓴 그 소녀는, 자기 눈에서 발산된 검은 광선이 나와 마주쳤던 스 순간에 과연 나를 보기나 했을까? 만일 보았다면, 난 그녀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까? 그녀는 어떤 우주의 내부로부터 나를 구별했을까? 내게는 이를 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는데, 마치 망원경 덕분에 이웃하는 별자리의 몇몇 특징적인 요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 별자리에 인간이 살며 그 인간들이 우리를 보고, 이런 전망이 그들 마음속에 어떤 관념을 일으킨다고 결론짓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만일 우리가 이런저런 소녀의 눈빛이 동그랗게 반짝이는 운모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그녀 삶에 대해 알려 하거나 그 삶을 우리와 연관 지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짝이는 원반형 물체에서 발산되는 빛이, 단지 원반의 물질적 구성에만 달린 게 아니라, 우리는 모르지만 빛을 발하는 그 존재는 아는 사람들이나 장소들에 관해 ㅡ 내게는 페르시아 낙원의 요정들보다 더 매혹적인 그 작은 요정이 페달을 밟으며 들과 숲을 지나 나를 끌고 갔을 지도 모르는 경마장 잔디밭이나 오솔길 모래밭과 같은 ㅡ 간직하고 있는 관념의 검은 그림자들이며, 또한 그녀가 곧 돌아가려는 집의 그림자이며, 그녀가 구상하거나 누군가가 그녀를 위해 이미 구상해 놓은 계획들의 그림자이며, 특히 그녀의 욕망이나 호감과 혐오감 그리고 막연하지만 부단한 의지임을 느낀다. 자전거 타는 소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을 소유하지 않고는 그녀 역시 소유할 수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따라서 그녀 삶 전체가 내게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고 느껴졌기에 고통스러운 욕망이었으며, 그러나 이제껏 내 삶이었던 것이 돌연 내 삶이기를 그치고 내가 채워주기를 열망하는, 내 앞에 펼쳐진 작은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졌기에 황홀한 욕망이었다. 또 소녀들의 삶으로 이루어진 욕망은 자아의 연장이자 자아의 증식을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행복이란 걸 내게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사이에 어떤 공통된 습관도 ㅡ 어떤 공통된 관념도 ㅡ 없다는 점이 내가 그녀들과 사귀고 그녀들 마음에 들게 하는 걸 더욱 어렵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쩌면 또한 이런 차이에 대한 인식과 내가 알고 있거나 소유하는 요소들 중 단 하나도 소녀들의 성격이나 행동을 구성하는 데 들어 있지 않다는 인식 덕분에 내 마음속에는 포만감에 이어 삶에 대한 심한 갈증이 일었는데, ㅡ 마치 메마른 땅이 애타게 물을 기다리듯 ㅡ 이제껏 내 영혼은 이 목마름을 채워 줄 한 방울의 물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더욱더 탐욕스럽게 천천히 음미하면서 완전히 그 물을 빨아들이게 될 것이었다.(259∼260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이렇게 짧은 눈길을 서로 마주친 알베르틴과 화자는 여기서 또 '얼마나' 더 지나고 나서야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게 될까.(여기서 '얼마나'라고 표현한 건 매번 문장의 길이를 가리킨다는 점을 주목하라.) 조금 뒤에서 결국 확인하게 되겠지만, 화자와 알베르틴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여기서부터 무려 120쪽이나(!)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에 다른 특별한 얘기가 많이 끼어들어서 그렇다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화자는 끊임없이 '그 소녀들'의 무리를 생각하고, 또 가끔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기도 한다. 다음 장면처럼.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엘스티르를 별장 쪽으로 끌고 갔을 때, 난 갑자기 파우스트 앞에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길 끝에서 ㅡ 나처럼 연약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수성과 지성이 과도한 자에게는 없는, 나의 기질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거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생명력이 단지 비현실적이고 악마적인 표현으로 객관화되었다는 듯이 ㅡ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할 수 없는 정수(精髓)의 몇 방울 얼룩이, 자포동물 소녀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별들이 몇 개 나타났다. 그녀들은 나를 보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아마도 나에 대해 냉소적인 판단을 할 게 틀림없었다. 그녀들과 우리 사이의 만남이 불가피하다고 느끼면서, 또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리라고 예상하면서, 난 마치 파도를 받아 넘기려는 해수욕객처럼 등을 돌렸다. 나는 갑자기 길을 멈추고는, 나의 저명한 동반자가 계속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고 뒤에 쳐져서는, 그 순간 우리가 지나가던 골동품 가게 진열창에 갑자기 흥미를 느끼기라도 한 듯 몸을 기울였다. 소녀들에게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척해 보이는 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엘스티르가 날 소개하기 위해 부를 때, 놀란 것이 아니라 짐짓 놀라는 척해 보이고 싶은 욕망에서 일종의 묻는 듯한 눈길로, ㅡ 이 경우 우리는 각자 서툰 배우이며 또는 상대방이 훌륭한 관상학자이기에 ㅡ 또 손가락으로는 내 가슴을 가리키며 "당신이 부른 사람이 바로 난가요?" 라고 물으면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소개되느라 옛 도자기 감상을 방해받았다는 듯 짜증이 묻어나는 걸 냉정하게 감추고는, 복종과 온순함으로 머리를 굽히고 재빨리 달려가리라는 걸 나는 이미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진열창을 주시하면서 엘스티르가 소리 높여 부르는 내 이름이 마치 우리가 기다리는, 별로 위험하지 않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 소녀들을 소개받는다는 확실성이 그 결과로서 소녀들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녀들을 알게 되는 기쁨을 피할 수 없게 된 지금 그 기쁨은 압축되고 축소되어, 생루와 이야기하거나 할머니와 저녁 식사를 하거나, 근교에서 즐기는 소풍의 기쁨보다 더 하찮게 생각되었고, 틀림없이 역사 기념물 같은 것엔 관심도 없을 그녀들과의 친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풍도 소홀히 해서 후회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내가 맛보게 될 기쁨을 작아지게 한 것은 실현이 임박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그 비일관성이었다. 정수역학(靜水力學)의 법칙과도 같은 정확한 법칙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우리가 형성하는 이미지를 쌓아 올리다가 사건이 임박해지면 그 순서를 전복시킨다고 한다. 엘스티르가 나를 부르려고 했다. 소녀들을 알게 되는 장면을 해변이나 내 방에서 몇 번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이런 방식은 전혀 아니었다. 지금 일어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전혀 대비하지 못한 다른 사건이었다. 나는 내 욕망도 목적도 알아보지 못했다. 엘스티르와 외출한 게 거의 후회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전에 내가 느낄 거라고 믿었던 기쁨이 줄어든 것은 이제는 그 무엇도 내게서 그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는 확실성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기쁨이 이런 확실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탄력적인 힘 덕분에 본래 높이를 되찾은 것은,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결심한 순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소녀들과 함께 멈춰 서 있는 엘스티르가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엘스티르 옆에 가장 가까이 있던 소녀의 얼굴은 통통하고 눈빛이 반짝거려, 조금이라도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같았다. 그녀의 눈은 고정되어 있어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어 마치 강풍이 부는 날, 대기가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무척 빠르게 창공을 지나가는 모습을 인지할 때와도 같았다. 한순간 그녀의 눈길이 내 눈길과 마주쳤는데, 흡사 폭풍우가 치는 날, 조금은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에 다가가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인 듯했다. 하지만 나그네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멀리 날아가는 법. 이처럼 우리 눈길도 한순간 마주쳤지만, 작자 자기 앞에 있는 천상의 대륙이 미래에 대해 어떤 약속과 위협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 이처럼 맑은 밤, 바람이 실어 온 달은 구름 밑을 지나 잠시 그 빛을 가리다가 빠르게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엘스티르는 나를 부르지도 않은 채, 이미 소녀들 옆을 떠났다. 소녀들은 지름길로 들어섰고, 그는 내게로 왔다. 모든 게 어긋났다.(354∼35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나의 생각)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하늘이 보이게 틈을 남겨 둔 케이크 같았다'는 표현이나 '구름을 만지고 앞지르는 하늘의 나그네들'은 얼마나 시적인가! '공처럼 날 때릴 순간을 기다렸다'는 표현은 얼마나 멋지고 재치있는가! '그녀의 눈길이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정확히 내 눈길에 들어온 순간, 구름이 가볍게 그녀의 눈길을 가렸다.'라는 표현은 마치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싯구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녀들을 소개받을 절호의 기회를 바로 코 앞에서 놓쳐버린 화자는 여기서부터 5쪽 뒤에서 이렇게 불평한다. "그 소녀들을 소개받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런 화자의 말에 엘스티르는 다음과 같이 대꾸한다. "그럼,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나?" 결국 '결정적 순간'을 앞에 두고 짐짓 딴청을 부린 화자나, 그런 화자의 꿍꿍이를 훤히 꿰고 있었던 엘스티르나 헛탕을 치는 데 서로 일조한 건 매한가지였던 셈이다.

 

아무튼, 유명한 화가이자 '그 소녀들'을 잘 아는 엘스티르는 화자의 간청을 받고 '작은 낮 모임'을 주선해 준다. 엘스티르의 집에서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났을까? 여기서도 독자들은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어떤 정경들'을 참을성 있게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프루스트는 어쨌든 최대한으로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를 지닌 인물임을 우리가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엘스티르가 조금 멀리 앉아 있는 알베르틴에게 날 소개하려고 오라고 했을 때, 나는 커피 에클레르를 먹고 난 후였고, 방금 소개받은 노신사가 단춧구멍에 꽂은 장미꽃을 칭찬해주었으므로 그분에게 꽃을 드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또 노신사의 이야기가 흥미로워 노르망디의 몇몇 장날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음에 소개받은 사람이 내게 기쁨을 주지 않았다거나, 내 눈에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이 기쁨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호텔에 돌아와 혼자가 되었을 때,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왔을 때에야 비로소 실감했다. 이런 점에서 기쁨은 사진과 흡사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찍은 사진은 음화(陰畵)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출입이 '금지되었던' 그 내면의 암실을 나중에 우리가 집에 돌아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때라야 현상할 수 있다.

 

이처럼 기쁨의 인식이 내게서 몇 시간 지체되었다면, 이 소개의 중요성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소개받는 순간, 우리는 몇 주 전부터 탐색해 온 미래의 기쁨에 대해 유효한 '통행증'을 갑자기 얻었다고 느끼지만 실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런 통행증의 취득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탐색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동시에 ㅡ 우리를기쁨으로 채워줄 수 있는 ㅡ 우리 상상력으로 변형된 존재, 결코 알 수 없다는 불안한 두려움으로 확대된 그런 존재의 실존에도 종지부를 찍는다. 소개하는 사람 입에서 우리 이름이 울리는 순간, 특히 엘스티르가 지금 하듯이 칭찬으로 그 이름을 에워쌀 때는 ㅡ 마치 요정 이야기에서 요정이 누군가에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할 떄와 흡사한 이런 성사 의식의 순간에는 ㅡ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기를 열망하던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 우선 어떻게 그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ㅡ 미지의 여인이 우리 이름을 듣고 우리라는 인간을 보면서 나타내야 하는 관심으로 ㅡ 우리가 찾고 있는 의식적인 시선이나 알 수 없는 상념이 어제만 해도 무한한 곳에 위치했던 눈길 속에서(방황하는 다양한 우리 시선이 초점을 잘못 맞추어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절망하는 눈길에서) 기적적으로 단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어 마치 환하게 웃는 거울에서처럼 그 눈길 속에 그려졌는데? …… (379∼381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중에서

 

화자의 두 번째 사랑인 알베르틴은 <제2편 꽃핀 처녀들의 그늘에서>에서도 무려 250쪽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지만, 이처럼 한없이 더디게만 다가설 수 있다. 어쨌든 그녀의 존재는 <제5편 갇힌 여인>과 <제6편 사라진 알베르틴>에서 끊임없이 환기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이런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은 콩브레의 산사나무 아래서 질베르트에게 첫눈에 반했던 사랑과는 달리 산호초와도 같은 미분화된 그룹에서 개별화로 넘어가는 긴 결정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스탕달에 따르면 평범한 한 존재가 상상적인 것의 조명을 받으며 예외적인 특별한 존재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어떤 우연이, 즉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나 결핍이 필요하다. 이처럼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도 두 번의 실패를 통해 공고해진다.(542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알베르틴에 대한 화자의 사랑이 어떤 실패와 고통을 겪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문장들의 밀림을 헤쳐나가야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1,000쪽 내지는 2,000쪽 정도쯤? 그러니 그런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차츰 살펴보기로 하고, 역자의 친절한 작품 해설을 통해 훨씬 더 빠른 지름길로 빠져나가 보자.

 

프루스트에게는 이런 연인의 거부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으로 대체되면서 사랑의 조건이 성립되고, 그리하여 사랑의 대상은 더 이상 쾌락의 대상이 아닌 탐색과 고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욕망과 동일시하거나, 대상도 목적도 없는 탐색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대신하며, 사랑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질투에 의해 현존한다.

 

이처럼 프루스트적인 사랑이 '대상 없는 탐색' 또는 주제의 내면에서 야기되는 거대한 '질투'의 울림으로 정의된다면, 그것은 레비나스의 말처럼 프루스트의 사랑이 결코 합일을 이룰 수 없는 타자의 이타성을 체험하는 질투와 고통의 담론임을 말해 준다. 타자의 세계는 나 없이 생겨난 것이며 그러나 이 배제됨이 내 사랑을 존속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로부터 계속 빠져나갈 때에만, 그리하여 그의 부재나 결핍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한에서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완전한 소유는 사랑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랑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사랑과 고통을 통해서만 무지에서 성숙으로, 오인에서 진실로 나아갈 수 있으며 『갇힌 여인』과 『사라진 알베르틴』의 그 긴 고통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화자는 드디어 글쓰기를 통한 삶의 가능성이라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만 존재의 해체와 소멸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충실과 망각을 보충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쾌락의 직접적인 추구가 아닌 상상의 매개에 의해 타자와의 합일이라는 그 불가능한 꿈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543∼544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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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정확하진 않지만 프랑스어로 '버릇없이 자란'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블로크의 결점이었는데, 따라서 그는 자신의 결점을 깨닫지 못했고, 남이 그 때문에 마음 상하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모든 인간에게서 동일한 미덕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결점의 다양함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 가장 널리 퍼진 것'은 상식이 아니라 착한 마음씨일 것이다. 우리는 아주 먼 외딴 곳에서도 착한 마음이 스스로 피어나는 걸 보면서 감탄하는데, 이는 마치 외진 산골짜기에서 나머지 다른 곳에 핀 꽃과 마찬가지로, 이따금 그 외로운 붉은 모자를 파르르 떨게 하는 바람밖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홀로 피어 있는 개양귀비와도 같다. 설령 어떤 이해관계로 마비되어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 때에도 그 착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어떤 이기적인 동기로 방해받지 않을 때에도, 이를테면 소설이나 신문을 읽는 동안 그 착한 마음은 실제 생활에서는 살인자지만 대중소설 애호가인 한 마음씨 다정한 사람의 마음에까지 꽃을 피워, 약자와 의인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 편으로 기운다. 그러나 결점의 다양성도 미덕의 유사성 못지않게 경이롭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상대방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언짢게 하는 결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지성이 뛰어나 만사를 고상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험담하는 법이 없지만, 자청해서 직접 건네주겠다고 한 중요한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잊어버려 그 편지에 적힌 당신의 약속을 망쳐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으며 단지 시간관념이 없다는 점만을 자랑으로 내세우며 미소를 짓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매우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자상해서 당신에 대해 당신이 기뻐할 말만 하지만, 실은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숨기고 침묵하고 있어 그 점이 당신을 화나게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 자신은 당신과 만나는 기쁨을 너무도 소중히 여겨 당신을 놓아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진력나게 한다. 세 번째 사람은 보다 진지하지만 그 진지함이 지나쳐 당신에게 모든 걸 알리지 않고는 못 배기며, 이를테면 당신 건강 상태가 그를 만나러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극장에 있는 당신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느니, 당신 안색이 좋아 보인다느니, 아니면 당신이 그를 위해 한 노력이 별 도움이 되지 않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친구라면 당신이 극장에 갔다는 사실과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같은 일을 해 줄 수 있다고 하는 두 경우에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친구로 말하자면 당신을 매우 불쾌하게 하는 말을 누군가에게 되풀이하거나 폭로하지 않고는 못 배기므로, 자신의 솔직함에 만족해서는 힘주어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또 다른 친구들은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거나, 반대로 아예 호기심이 없어 당신을 귀찮게 하는데, 당신이 그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사건에 대해 말해도 무슨 말인지 짐작도 하지 못하거나, 당신이 쓴 편지가 당신과는 관련이 있지만 그들과는 관련이 없는 경우 당신을 몇 주나 기다리게 하기도 하고, 또는 부탁이 있어 찾아오겠다는 편지를 보내온 친구를 헛걸음시킬까 봐 외출도 못 하는 데도 찾아오지도 않고 몇 주일이고 기다리게 하는 일도 있다. 그러고는 답장을 받지 못해 당신이 화난 줄 알았다는 이유를 대는데, 사실 그들의 편지는 답장을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 또 몇몇 사람은 자기 생각만 하고 당신은 전혀 배려하지 않아, 자기 기분이 좋아서 만나고 싶을 때는 당신에게 할 급한 일이 있어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떠드는 반면, 자신은 날씨나 좋지 못한 기분 탓에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무기력하고 지친 모습만 보여 주면서,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당신 말에 짧은 음절로도 대답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친구들에겐 이처럼 저마다 여러 결점이 있기에 그런 친구들을 계속 좋아하려면 ㅡ 그들의 재능이나 선함과 다정함을 생각하면서 ㅡ 그 결점을 받아들이거나, 우리 모든 선의를 다해 그 결점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한다. 친구의 눈이 멀거나 친구가 상대방 눈이 멀었다고 여기면서 끈질기게 결점을 버리지 않는 집요함은 불행하게도 친구의 결점을 보지 않으려는 우리의 관대한 집요함을 능가한다. 친구는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하며 또는 상대방이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위험은 특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는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데서 연유하므로, 적어도 우리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자신에 관해서는 결코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야말로 다른 사람의 견해와 우리 견해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게 해 준다.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집 안에 들어가 보면 보물이나 자물쇠를 열 때 쓰는 지렛대와 시체로 가득한 집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놀라움이 눈에 보이는 세계 아래서 다른 사람의 진정한 삶과 실제 세계를 발견할 때의 놀라움 못지않다면, 사람들이 우리가 없는 데서 지껄이는 말로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만들어 내는 이미지와 사람들이 우리나 우리 삶에 대해 가진 이미지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 때의 놀라움도 이에 못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할 때마다 우리가 하는 무해하고도 조심스러운 말을 그들은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어 동의하는 척하며 듣지만, 이러한 말이 가장 과격한 평이나 가장 듣기 좋은, 또는 어쨌든 가장 덜 호의적인 비판의 빌미가 되는 건 확실하다. 이러한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에 대한 관념과 우리가 사용하는 말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으로 상대방을 짜증 나게 하는 것인데, 이 불균형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말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게 하는 것으로, 마치 가짜 음악 애호가가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콧노래로 부르고자 불분명한 속삭임의 부족함을 활기찬 몸짓과 감탄하는 표정으로 보충하면서도 그 찬사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은 채 우리 귀에 들리게 하는 것과도 같다. 또 자신과 자신의 결점에 대해 말하는 나쁜 습관에 그것과 짝을 이루는, 자기 결점과 유사한 결점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다는 걸 지적하는 또 다른 나쁜 습관을 덧붙여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는 항상 타인의 결점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자신에 대해 우회적으로 말하는 방법으로서, 죄를 용서받는 기쁨과 죄를 고백하는 기쁨이 합쳐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성격을 특징짓는 데만 늘 관심 있는 우리 주의력은 타인에게서도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특징에 주목한다. 눈이 나쁜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그분은 겨우 눈만 뜰 수 있을걸요."라고 말하고, 폐결핵 환자는 건강한 사람의 온전한 폐에 대해 의심을 품으며, 더러운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목욕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냄새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악취를 풍긴다고 우기며, 배신당한 남편은 도처에서 배신당한 남편만 보고, 바람기 많은 아내는 바람기 많은 아내만을 보며, 속물은 속물만을 본다. 게다가 각각의 악덕은 각각의 직업처럼 전문 지식을 요하고 발전시키는 법이어서 사람들은 그 지식을 과시하는 걸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도착자는 성도착자를 알아보며, 사교계에 초대받은 양재사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벌써 당신이 입은 의상의 질감을 높이 평가하고 손가락으로 만져 보고 싶어 애를 태우며, 치과 의사와 조금 대화를 나눈 후에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는 당신 충치가 몇 개인지만을 말한다. 치과 의사에게야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겠지만, 그의 이런 점을 주목하는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다. 게다가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얘기할 때만 타인을 장님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타인이 장님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 각자는 어떤 특별한 신이 존재해 우리 결점을 감추어 주어서 남들 눈에 그 결점이 띄지 않는다고 약속하는데, 이는 씻지 않은 사람에게 그들 귀지와 겨드랑이에서 발산되는 땀 냄새에 눈과 코를 막게 해 주고, 사교계에서 별 탈 없이 그 냄새를 끌고 다닐 수 있게 하여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주는 것과도 같다. 가짜 진주 목걸이를 하거나 선물로 주는 사람들은 그 목걸이가 진짜로 보이리라고 상상한다. 블로크는 버릇없이 자랐고 신경증 증세가 있는 데다 속물이며, 거의 존경밪지 못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마치 바다 밑바닥에서처럼 무한한 압력을 버텨 왔는데, 표면에 있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그의 집안보다 신분이 높은 겹겹이 쌓인 유대 계급이 바로 아래 있는 계급을 경멸로 짓누르면서 압력을 행사해 왔다. 따라서 이 유대인 가문에서 저 유대인 가문으로 상승하며 그 자유로운 대기권까지 뚫고 들어가려면, 블로크에게는 몇천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으리라. 그러니 그보다는 차라리 다른 쪽에서 출구를 개척하는 편이 나았다.(171∼176쪽)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2부 고장의 이름 ㅡ 고장>

 

(나의 생각)

 

이토록 미세한 감정의 결들을 낱낱이 파고 들면서 - 6페이지에 걸쳐서,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 욕심껏 나열하는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솔직히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화자의 친구인 '버릇없이 자란' 블로크의 결점 하나를 두고 이토록 '다양한 인간의 감정들'을 여느 철학자 못지 않게 세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하다.

 

이 대목을 읽는 동안에 여러 인물들이 떠올랐다. 내 주변에서 자주 마주치는 인물에서부터 그저 익명 속에 숨어 지내면서 얼굴조차 모른 채 지내 온 다른 많은 인물들까지도. 그 많은 인물들 가운데서도 '책 속에서 만난' 인물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몽테뉴를 내세울 만하다. 몽테뉴만큼 '남을 비난하는 결점'을 프루스트처럼 정확하게 지적한 인물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분명 몽테뉴를 읽었을 법한데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4권까지 읽는 동안에도 그런 흔적이 '주석' 등을 통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혹시나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프루스트와 함께 하는 여름』이라는 책자의 목차에 이런 게 나온다.  제7장 프루스트와 철학자들 … 1. 독자의 초상 | 2. 프루스트와 몽테뉴 | 3. 프루스트와 쇼펜하우어 | 4. 프루스트와 니체 | 5. 프루스트와 카뮈 ……  내 예감과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듯해서 기쁘다.)

 

몽테뉴가 '타인의 결점에 대한 비난'에 관해 남겼던 문장들을 찾아내어 '프루스트의 생각들'과 비교해 본다.

 

멈출 줄 모른다

사람은 어떤 일에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정도에서 멈출 줄 모른다. 탐락이건 재산이건 권력이건, 그는 자기가 품어 안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의 탐욕은 절제가 불가능하다. 알고자 하는 욕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가 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스스로를 위해 끌어 내며, 지식의 유용성을 그 재료가 있는 한 확대시킨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연구에도 무절제 때문에 고생한다."(세네카)

아그리콜라의 모친이 그 아들의 맹렬한 학문 연구 의욕을 억제하였다고 타키투스가 칭찬한 것은 옳은 일이다. 확고한 눈으로 보면, 학문은 다른 재물과 같이 인간이 타고난 고유의 약점과 허영이 많이 섞여 있는 값비싼 것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나의 생각)

 

몽테뉴도 정말 말이 많았지만 그에게는 꼭 필요한 말만 골라 쓰는 절제미가 있었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솔직히 프루스트에게 '절제미'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도리어 그를 모욕하는 말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는 조그마한 티끌이라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속에 모조리 끌어담으려고 애쓴 느낌이 든다.

 

 

자신을 안다는 문제

어느 학문에서나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과 어둡고 어려운 성질은 그 학문을 닦는 사람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까지에는, 역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이 닫혀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문을 밀어 보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는 자는 알기 때문에 물어 볼 필요가 없고, 모르는 자는 무엇을 물어 보아야 할까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물어 볼 거리가 없다는 플라톤식의 묘한 논법이 나온다. 그래서 자신을 안다는 문제에서, 각자가 자기를 만나고 혼자 단정하고 만족하는 것, 각자가 자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고 소크라테스는 크세노폰의 문장에서 에우티데모스에게 가르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너무 명령조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나는 진리가 어느 누구의 손에서 발견되었다 해도 기꺼이 환영하며, 그것이 아무리 멀리서 오는 것일지라도 마음 편하게 항복하고 무기를 그 앞에 내놓는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식으로 너무 명령조로만 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내 문장에 대해서 하는 비평에 한 팔 빈다. 글을 고쳐야 할 필요에서가 아니라 예절상의 필요에서 고쳐 본 일도 흔히 있다. 쉽사리 양보해서 남에게 좋은 일도 해 주어, 아무라도 내게 알려 주고 싶은 일을 자유로이 알려 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정히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그렇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그렇게 하도록 끌어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생각을 고쳐 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남을 고쳐 줄 용기도 갖지 못하고 서로 늘 숨겨 가며 말한다. 나는 남의 판단을 받아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기 때문에, 내 판단이 두 형태 중의 어느 편에 있어도 무방하다. 내 생각 자체가 나의 생각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남이 반대하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하기는 나는 그의 책망에 대해서 내가 주고 싶은 권위밖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자기 의견을 좇아 주지 않으면 모욕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믿어 주지 않으면 자기가 일을 공연히 알려 주었다고 후회하는 자들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너무 고압적으로 나오는 자와는 인연을 끊는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수작을 나는 날마다 말하고 대답하는 것인가! 그러니 남의 생각을 따라서는 얼마나 더 자주 할까! 내가 그 때문에 꿍꿍 앓고 있다면 다른 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개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그리고 뻔뻔스럽고 부끄럼이 없는 그들의 일에 놀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격에 맞지 않는 분노

사람들은 대개 힘이 부족하면 얼굴빛과 목소리가 달라진다. 그리고 격에 맞지 않는 분노는 앙갚음보다 자기 약점과 참을성 없음을 한꺼번에 폭로한다. 우리는 가끔 침착한 기분으로 모욕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이라도, 이 흔쾌한 잡담에서 상대편의 불완전하고 숨겨진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다. 그래서 피차 유익하게 우리의 결함을 서로 알려 준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나는 확실하지 않은 일을 누구건 비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는 아무도 비평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내 말은 우리의 판단력이 당장 문제에 오른 자를 공격해 본다고 해서, 그것이 내적 비판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의 책임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속의 악덕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자가, 다른 사람의 악덕에는 그 근본이 덜 모질고 덜 악질이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없애 주려고 애쓰는 일은 자비로운 봉사이다.

그런데 내 잘못을 보고 알려 주는 자에게, 그도 역시 그 결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격에 맞는 대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하여튼 알려 준 일은 진실하고 유익하다. 우리 코가 멀쩡하다면 우리 은 그것이 우리 것인 만큼 더 구려야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와 자기 아들과 다른 한 사람이 어떤 폭력이나 부정 행위로 죄를 지었을 경우, 자기가 맨 먼저 재판소에 가서 형 집행인의 손으로 자기 죄를 씻어 달라고 간청할 것이고, 둘째는 자기 아들을 내보내고, 마지막에 다른 사람을 내보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이 교훈은 그 어조가 매우 고매한 것으로서, 적어도 자기 양심이 하는 처벌에는 자기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강인한 귀, 특별한 우정의 표시

우리는 자기를 솔직하게 비판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강인한 귀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속이 쓰리다고 느끼지 않고 남의 비판을 참고 듣는 자는 드문 까닭에, 우리에게 감히 비평을 시도하는 자는 특별한 우정의 표시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좋게 해 주려고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모욕을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은 건전하게 사랑해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못된 소질이 착한 소질보다 강한 자를 비판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플라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하는 자에게 지식과 호의와 과감성이라는 세 가지 소질을 가지라고 명령한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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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스완이 그토록 좋아하던 소악절이 포함된 뱅퇴유 소나타 일부를 그녀가 내게 연주해 준 것도 바로 이런 날들 가운데 하루였다. 그러나 약간 복잡한 음악을 처음 들을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나중에 이 소나타 연주를 두세 번 들었을 때, 나는 그 곡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처음 듣는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첫 번째 듣기에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다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처음과 같을 것이므로, 열 번 들었다 해더 더 잘 이해하리라는 법은 없다. 아마도 첫 번째 듣기에서 결핍된 것은 이해가 아니라 기억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이란 상대적으로 우리가 듣는 동안 마주치는 인상들의 복잡성에 비하면 아주 미미해서, 잠을 자며 수많은 걸 생각하고는 즉시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만큼이나, 또는 이제 막 들은 것을 조금 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반쯤은 어린애로 돌아간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짧기 때문이다. 이런 다양한 인상에 대한 추억을, 기억은 즉시 제공해 주지 못한다. 하지만 추억은 점차적으로 우리 기억 속에서 두세 번 들었던 작품에 의해 형성된다. 마치 중학생이 자러 가기 전에는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학과를 여러 번 읽어서 다음 날 아침에 암송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나는 그날까지 소나타의 어떤 부분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스완과 스완 부인이 뚜렷이 알아본 악절은 내 명료한 지각과 거리가 멀었다. 마치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만 대신 빈 허공만을 발견하게 되는 이름처럼, 그러나 이 허공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그렇게도 헛되이 찾던 이름의 음절은 단번에 스스로 떠오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드문 작품이란 우리가 즉시 기억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그런 작품들 가운데서도 내가 뱅퇴유 소나타를 들었을 때처럼,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부분을 먼저 인지한다. 스완 부인이 가장 유명한 악절을 연주했으므로(그래서 오랫동안 소나타를 들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나는 이 작품에 나를 위해 남아 있는 건 거의 없다고 잘못 생각했다.(이 점에 있어 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 앞에 섰을 때 이미 사진을 통해 돔 지붕을 잘 안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소나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을 때에도, 이를테면 거리감이나 안개 탓에 어렴풋한 부분밖에 들어오지 않는 역사 기념물처럼 내게는 소나타 전체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시간 속에서 구현되는 다른 작품도 다 마찬가지지만, 이런 작품의 인식과 관계된 우수가 연유한다.(183∼185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제3권의 182쪽에서 시작된 문단은 189쪽까지 한 호흡으로 길게 이어지는 '하나의 문단'이다. 굳이 이 부분을 '읽는 흐름'을 살리기 위해 통째로 한꺼번에 인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 멋대로' 중간 중간에 끊어서 인용할려니 그게 도리어 고역이다. 아무튼 이 문단에 담긴 프루스트의 생각들은 음악, 미술, 철학, 작품, 천재 등등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들을 담고 있어서 몹시 흥미롭다. 이 문단에서 프루스트가 펼쳐 놓은 생각들은 특별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비록 프루스트가 직접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소나타 안에 가장 깊숙이 감추어졌던 부분이 내게 드러나면서 내가 처음 알아보고 좋아했던 것이 습관에 의해 내 감성 영역 밖으로 끌려가면서 나로부터 빠져나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나타가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만, 난 한 번도 소나타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었다. 소나타에는 우리 삶과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삶보다 덜 환멸스러운 이 위대한 걸작은 처음부터 작품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지는 않는다. 뱅퇴유 소나타에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아름다움도 가장 빨리 싫증 나는 아름다움으로, 아마도 그런 아름다움이 우리가 이미 아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동일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멀어지면 그 구조가 너무도 새로워 우리 정신에 혼란을 야기하며, 그래서 우리가 식별하지도 못하고 손도 대 보지 못한 채 그대로 간직해 왔던 악절을 좋아하는 일만 남는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채 매일 그 앞을 스쳐 가던 악절, 그 유일한 아름다움의 힘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던 악절이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악절을 떠나는 것도 우리가 맨 마지막일 것이다. 그 악절을 좋아하는데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렸으므로 다른 악절보다는 바로 그 악절을 더 오래 좋아할 것이기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보다 더 심오한 작품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란 ㅡ 이 '소나타'에 대해 내게 필요했던 시간처럼 ㅡ 일반 대중이 진정으로 새로운 걸작을 좋아할 수 있을 때까지 흘러가는 수십 년 혹은 수 세기의 축소판이자 일종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중의 몰이해를 피하려는 천재는, 어쩌면 동시대인들에게는 작품 이해에 필요한 거리가 부족하므로 후대를 위해 쓰인 작품은 후대에 의해서만 읽혀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마치 너무 가까운 시대의 그림이라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몇몇 그림들처럼. 그러나 현실에서 잘못된 평가를 피하려는 모든 비겁한 노력은 헛된 짓이며 이런 평가는 피할 수 없다. 천재의 작품이 즉각적인 찬미를 자아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을 쓴 자가 예외적인 인물로서 그와 비슷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185∼187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프루스트는 음악가들 가운데 특별히 바그너와 슈만, 그리고 베토벤을 좋아했다고 한다. 바그너는 한때 니체와 절친이었고, 니체와 바그너 모두 쇼펜하우어를 열렬히 추종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프루스트는 뱅퇴유의 소나타를 여러 곳에서 자세하고도 길게 묘사하는데, 마치 쇼펜하우어로부터 방금 '음악 수업'을 받고 돌아온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느낌이 든다. 천재의 작품이 후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원리 또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을 빼닮았다. 191쪽의 주석에 딸린 설명처럼, 프루스트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연과 인생에서 직접 이끌어 낸 참다운 작품만이 자연이나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젊고 언제까지나 근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참된 작품은 특정한 시대의 것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은 그 시대에 영합하는 것을 경멸하고 시대로부터는 냉담한 대우를 받으며, 그때그때의 잘못이 그 작품에 의해 간접적이고 소극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나중엔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또 이러한 작품은 진부해지지 않고, 시대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신선하고 언제나 새롭게 사람의 마음에 호소한다. 이렇게 인정받은 이상, 이제는 무시되거나 오인받을 염려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판단력이 출중한 소수의 사람들의 칭찬으로 영광의 왕관을 쓰고 진가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 소수의 출중한 사람들은 백 년 동안에 아주 적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견은 점차 권위가 확립되는데, 이 권위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이 작품들의 진가를 후세에 호소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잇따라 나타나는 위대한 개인이야말로 이 유일한 전거이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대중이 언제나 어리석고 우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후세의 대중도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위인들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한 말을 읽어 보라. 인간은 언제나 같기 때문에 위인들의 탄식도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또 어떠한 예술에서도 작풍이 정신을 대리하며, 정신을 소유하는 것은 언제나 위대한 개인뿐이다. 그러나 작풍이란 모든 시대에 존재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정신의 현상이 벗어 버린 낡은 의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후세의 갈채는 동시대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며, 또 동시대의 갈채는 후세의 갈채를 희생하여 얻는 것이다.(764쪽)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 中에

 

 

니체는 '정선된 귀'를 갖지 못한 동시대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후대 사람들을 위해 쓴다고 말했다.

 

하나의 정신이 이해되는 데는 몇 세기가 필요한 것일까?

 

가장 위대한 사건과 사상은 ㅡ 그러나 가장 위대한 사상이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ㅡ 가장 늦게 이해된다. 동시대의 세대는 그러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다. ㅡ 그들은 그것을 스쳐 지나가며 살아간다. 거기에서는 별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 가장 멀리 떨어진 별빛이 인간에게 가장 늦게 이른다. 그 별빛에 이르기 전에는, 그곳에 별이 있다는 것을 인간은 부정한다. "하나의 정신이 이해되는 데는 몇 세기가 필요한 것일까?" ㅡ 이것 역시 정신과 별에게 필요한 순위와 예법을 만들어내기 위한 척도인 것이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지성을 생산하고 또 배양하고 증식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다. 베토벤의 사중주곡(12번, 13번, 4번, 15번 사중주곡) 자체가 오십 년이나 걸려 그 작품을 이해하는 청중을 낳고 길렀으며, 그리하여 모든 걸작이 다 그렇듯이, 예술가의 가치가 아니라면 적어도 지식인 사회에서(걸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폭넓게 구성된, 즉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발전해 나간다. 우리가 후대라고 부르는 것은 작품의 후대를 말한다. 작품 자체가 이런 후대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이야기를 간단히 하기 위해 동시대에 배출된 몇몇 천재들이 함께 더 나은 미래의 대중을 준비하고 그러한 대중으로부터 다른 천재들이 혜택을 받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기로 하자.) 그러므로 작품이 보존되었다 후대에 가서야 알려지는 경우, 그 후대는 작품의 후대가 아니라, 단지 오십 년 뒤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ㅡ 바로 뱅퇴유가 그랬던 것처럼 ㅡ 자신의 작품이 제 갈 길을 가기 원한다면, 작품을 아주 깊은 곳으로, 아주 먼 미래의 한복판을 향해 내던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미래의 시간, 걸작의 진정한 전망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시간을 참조하지 않는 것이 서투른 비평가들이 범하는 실수라면, 미래의 시간을 지나치게 참조하는 것 역시 훌륭한 비평가들이 범하는 위험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187∼188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베토벤의 사중주곡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마르셀 프루스트와 엇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현대소설의 쌍벽을 이루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생각난다. 소설도 현악 4중주처럼 난해할 수 있다는 게 묘하게 닮았다. 

 

"그 모태가 되는 『오뒷세이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낸다."(클리프턴 패디먼)

 

 

 

아마도 지평선 위로 모든 물체를 균등하게 만드는 착시 현상과도 유사한 현상에 따라 그림이나 음악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혁명은 그대로 어떤 일정한 규칙을 존중하며, 그러나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인상파나 불협화음의 추구, 중국 음계의 배타적 사용, 입체파, 미래파는 전 시대 것과 완연히 다르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전 시대 것을 우리 정신이 오랜 시간의 동화작용을 통해 동질적인 실체로 ㅡ 물론 다양하기는 하지만 19세기의 위고가 17세기의 몰리에르와 나란히 하는 ㅡ 전환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 올 시간과 그 시간이 가져다줄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어린 시절에 치는 별자리 점이 보여 주는 성인이 된 우리 모습처럼, 어떤 충격적인 괴리감이 나타날지 한번 상상해 보라. 단지 별자리 점은 모두 사실이 아니며 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시간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일은 우리 판단에 뭔가 우연성을 부여하여 그 결과 모든 예언처럼 진정한 흥미를 반감하겠지만, 그러나 예언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예언자의 초라한 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 가능성을 불러들이거나 배제하는 일은 반드시 천재의 능력에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재이면서도 철도나 비행기의 미래를 믿거나 믿지 않을 수 있으며, 위대한 심리학자이면서도 자기 정부나 친구의 위선을 ㅡ 가장 평범한 사람도 그들의 배신을 예측할 수 있는데 ㅡ 깨닫지 못할 수 있다.(188∼189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여기까지가 길게 이어지던 문장들이 하나의 문단으로 끝맺는 종착점이다. 이토록 긴 장광설을 늘어놓은 다음에 프루스트는 또다시 태연스레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속으로 옮겨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소나타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완 주인이 연주하는 걸 들으며 황홀해했다. 그 연주는 그녀의 실내복처럼, 그 집 계단의 향기처럼, 그녀가 입은 망토처럼, 그녀의 국화처럼, 이성으로 재능을 분석할 수 있는 세계보다 무한히 높은 세계에서 개별적이고 신비로운 전체를 이루는 듯했다.* "이 뱅퇴유 '소나타',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스완이 내게 말했다. "나무들 밑에 어둠이 깃들고 바이올린의 아르페지오가 싱그러움을 떨어뜨릴 때면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지 인정하게나. 거기에는 달빛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정태적인 면이 있네. 내 아내가 받는 광선치료가 근육에 효과를 보이는 것도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닐세. 달빛이 나뭇잎의 움직임을 가로막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네. 소악절에 그토록 잘 묘사된 것도 바로 그 점이라네. 마비 상태에 빠진 불로뉴 숲. 바닷가라면 더 인상적이지. 왜냐하면 나머지 다른 것은 전혀 움직이지 않아 미세한 바다 물결의 파동이 더 잘 들리니까. 파리에서는 이와 반대라네. 기껏해야 역사 기념물 위에 비치는 기이한 미광, 빛깔도 위험도 없는 불길로 밝혀진 듯한 하늘, 우리 모두가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삼면기사 같은 것뿐이라네. 그러나 뱅퇴유 소악절, 더욱이 소나타 전곡을 통해 묘사된 것은 그런 게 아닐세. ……"(189∼190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주석)

 

* 음악에 대한 쇼펜하우어적 성찰의 영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의 무한한 언어로 의지를 표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

 

음악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성찰은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자세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 가운데 프루스트의 생각과 비슷한 대목이라 여겨지는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음악은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

음악이 모든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해 갖는 이러한 긴밀한 관계에서 다음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행위, 사건, 환경에서 적절한 음악이 울리면, 그로 인해 우리는 이것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가 명백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음악을 가장 옳고 명백한 해설로 생각한다. 또 교향악의 인상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기 앞의 인생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사상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음악과 자기 눈앞에 떠오른 사상 사이의 유사성은 무엇 하나 열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음악은 현상,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계의 모든 형이하학적인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나타내고, 현상에 대해 물자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의지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음악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음악이 어떻게 실제 생활과 세계의 모든 양상과 장면을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이것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음악의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인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러한 작용은 증가된다. 시를 노래로, 또는 직관적인 모사를 무언극으로, 또는 이 양자를 가극으로 음악에 맞추어 만들 수 있는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795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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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어느 날 우편물 오는 시간에 엄마는 내 침대에다 편지 한 통을 두고 갔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열었다. 내게 행복을 안겨 줄 유일한 서명, 샹젤리제 외에는 어떤 교류도 없었던 그 질베르트의 서명이 씌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구 쓴 기사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 '페르 위암 렉탐(Per viam rectam)'이라는 경구로 둘러 싸인 은색 봉인이 찍힌 종이 하단에 커다란 필체로 쓰인 편지 아래서, 거의 모든 t자의 가로획이 단어 사이가 아니라 바로 윗줄에 있는 단어 밑에 놓여 있어 모든 문장에 밑줄이 쳐진 것처럼 보이는 편지 아래서, 내가 본 것은 바로 질베르트의 서명이었다. 하지만 내게 온 편지 중 질베르트의 서명이 든 편지가 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아, 편지를 봐도 전혀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동안 이 서명은 날 에워싼 모든 것에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 사실 같지 않은 서명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속도로 내 침대, 내 난로, 내 벽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나는 말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모든 게 흔들거리는 듯 느껴졌고 내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 내가 아는 것과는 모순되지만 진정한 삶이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닌지, 마치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조각가들이 다른 세계의 문턱에서 깨어난 망자들에게 주었던 그런 망설임과 더불어 날 채워 준 게 아닌지 묻고 있었다. "사랑하는 친구에게."라고 편지는 말했다. "네가 많이 아파 더 이상 샹젤리제에 오지 못한다는 걸 알아. 나 역시 그곳에 환자들이 너무 많아 이제는 거의 가지 않아. 하지만 내 친구들이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간식 먹으러 우리 집에 온단다. 네 몸이 회복되는 대로 방문해 주면 아주 기쁠 거라고 엄마가 전해 달라고 했어. 그럼 우리가 샹젤리제에서 나누던 즐거운 이야기들을 집에서도 다시 나눌 수 있을 거야. 안녕, 내 사랑하는 친구, 네 부모님이 우리 집에 간식 먹으러 자주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내 우정을 전하면서, 질베르트."(133∼134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첫사랑의 연인으로부터 받은 첫 번째 편지만큼 우리의 정신을 잃게 만드는 대상도 드물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 속 화자'를 순식간에 '독자인 나 자신'으로 뒤바꾸고, '소설 속 첫사랑인 질베르트의 필체' 대신에 까마득한 옛날 나에게 부쳐진 편지 봉투의 겉면을 온통 신비롭고도 희귀한 보석처럼 장식하던 '첫 사랑 그녀의 이름과 필체'를 떠올리지 않을 독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동안 내 신경계는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내게 큰 행복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 영혼, 즉 나 자신, 요컨대 주 당사자인 나는 아직 이 소식을 깨닫지 못했다. 행복, 질베르트를 통한 행복이야말로 내가 줄곧 생각해 왔던, 내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회화에 대해 '코사 멘탈레(cosa mentale)'라고 했던 것 아닌가. 우리 생각은 글자로 덮인 종이 한 장을 단번에 소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나는 이내 편지를 생각했고 편지는 내 몽상의 대상이 되었고 또한 '코사 멘탈레'가 되었으며, 그래서 오 분마다 다시 읽고 어느새 키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편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내 행복을 깨달았다.(134∼135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내가 첫사랑을 만난지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어느 봄날이 생각난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했던 터라,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교의 학과 우편함에는 늘상 다른 대학교에 다니던 고교 동창들이 보내준 '대학 학보'가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비교적 잘 아는 과친구가 불쑥 내 앞에 내민 건 그저 따분하기만 했던 '다른 학교의 학보'가 아니라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첫사랑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이제 막 파릇파릇한 새싹을 내민 잔디밭을 내려다 보며 봄이 오는 캠퍼스의 계단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민끽하던 나는, 그때 느닷없이 내 턱앞까지 디밀어진 편지 탓인지 그날따라 잔디밭 위로 유난히 어지럽게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마냥 정신이 어지러웠다. 물론 그 편지는 오래도록 거듭 읽혀졌으며, 이듬해 여름에 내가 몸을 실었던 '입영열차' 안에서도 내 품을 떠나지 않았고, 입대한 그해 가을에 유난히도 자주 내 귓가를 스치던 <잊혀진 계절>이나 <바람, 바람, 바람>과도 늘 함께 했다. 아, 그런데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하고 눈물까지 흩뿌렸던 그 편지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우리 삶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늘 소망하는 이런 기적이 곳곳에 뿌려져 있다. 이 기적은 어쩌면 며칠 전부터 살아야 할 이유를 완전히 상실한 나를 보고 어머니가 질베르트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부탁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마치 내가 수영을 처음 시작했을 때 숨이 막혀 무척이나 하기 싫었던 잠수에 재미를 붙이게 하려고 어머니가 몰레 수영 교사에게 멋진 조가비 상자와 산호 가지들을 가져다주어 내가 그것들을 물 바닥에서 스스로 발견했다고 믿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의 여러 대조적인 삶과 상황에서 사랑과 관계되는 사건에 대한 최선의 태도는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은 피할 수 없는 뜻밖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마법의 법칙에 지배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부자인 데다가 매력적이기까지 한 남자가 함께 살던 어느 가난하고 매력 없는 여인에게서 이별을 통보받고 절망한 채 자신의 모든 재력과 지상의 온갖 영향력을 행사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애인의 완강한 고집 앞에서 논리적인 설명을 찾기보다 차라리 '운명'이 자신을 짓누르며 마음의 병으로 죽이려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최선이다. 연인들이 맞서 싸워야 하는 장애물, 고통 때문에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상력이 헛되이 간파하려고 애쓰는 이러한 장애물은, 때때로 자신의 품에 다시 불러들일 수 없는 여인의 어떤 성격적인 특징에, 그녀의 어리석음에, 얼굴조차 모르는 이들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과 넌지시 불어넣은 정의감에, 그녀가 일시적으로 삶에 대해 요구하는 쾌락인 연인도 연인의 재력도 충족해 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쾌락에 있다. 어쨌든 연인은 여인의 술책이 그에게 숨기고, 또 왜곡된 판단력 때문에 정확히 식별할 수 없는 이런 장애물의 속성을 알아내기에는 나쁜 위치에 있다. 이런 장애물은 의사가 끝내 그 원인을 모른 채 작게 만드는 종양들과도 비슷하다. 종양처럼 이 장애물은 신비롭지만 일시적이다. 다만 이 장애물은 일반적으로 사랑보다 오래 지속된다. 또 사랑이란 비타산적인 열정이 아니므로, 더 이상 연인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 가난하고 경박한 여인이 어째서 자기로부터 부양받기를 여러 해 동안 완강하게 거절해 왔는지 그 이유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135∼136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프루스트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매번 이런 식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이에 아주 조그마한 틈이라도 엿보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으로 아낌없이 채워넣는다. 소설 속 이야기가 '개별화'라면, 거기에 덧붙여지는 프루스트의 설명은 '일반화'인 셈이다. 개별화에서 일반화로, 일반화에서 다시 개별화로, 끊임없는 변전이 일어나는 게 프루스트 소설 읽기의 매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치다가 느닷없이 '자신의 철학'을 아주 길게 늘어놓은 작가 가운데 『전쟁과 평화』의 톨스토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철학은 '삶과 죽음'이나 '우연과 필연' 혹은 '전쟁과 평화'처럼 너무나 묵직한 주제를 '소설 속 이야기' 사이사이에 펼쳐 놓음으로써 독자들을 지치게 하지만, 프루스트의 방식은 훨씬 더 경쾌하고 날렵하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즐겁게 만드는 듯하다.

 

 

 

그런데 자주 파국의 원인을 우리 눈앞에 숨기는 것과 같은 신비로움이 사랑의 경우에는 종종 느닷없는 행복한 해결책으로 감싸이기도 한다.(질베르트의 편지가 내게 가져다준 것처럼.) 행복한 해결책이라고?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일 뿐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에 부여하는 만족감이란 그게 어떤 종류든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잠시 비켜 가게 할 뿐, 실제로는 결코 행복을 주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잠시 유예기간이 주어지면 우리는 얼마 동안 치유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136쩍)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질베르트가 보유한 편지지 시리즈가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몇 주가 지나자 나는 그녀가 처음으로 보내왔던 편지지와 같은, 그은 은메달 투구를 쓴 기사 위에 '페르 위암 렉탐'이라는 경구가 새겨진 편지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각각의 편지지가 이런저런 날에 알맞게 어떤 의식에 따라 선택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질베르트가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또는 적어도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가능한 시간 차를 많이 벌려 같은 편지지를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으려고 이미 사용했던 편지지를 애써 기억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41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나의 생각)

 

그토록 색깔과 재질과 느낌이 서로 조금씩 달랐던 그 수많은 편지지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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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 꿈을 다시 나타나게 하려면, 단지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발베크,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름 안에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장소들이 불러일으킨 욕망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봄에도 발베크라는 이름을 책 속에서 발견하기만 하면, 폭풍우와 노르망디의 고딕 양식에 대한 욕망을 내 마음속에 눈뜨게 하는 데 충분했고, 폭풍우가 부는 날에는 피렌체 또는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내게 태양과 백합, 총독 궁전 ,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대한 욕망을 일깨웠다.(340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발베크라는 이름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 도시엔 여태껏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다르다. 고작 반나절 아니면 하루쯤 머무른 기억밖에 없지만 그 두 도시는 단 한 번의 방문만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도시가 된다.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영화나 TV 등을 통해 영상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잠깐식 스쳐가는 아름다운 영상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차분히 책을 읽는 동안에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이 두 도시에 대한 특별한 감동을 뛰어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만큼 이 두 도시는 문학적인 도시로도 손색이 없다.

 

 

그 두 도시가 아무리 뛰어난 역사가들, 가령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를 장식하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다채롭게 빛낸 '르네상스'의 핵심 무대였다고 하더라도, 단테의 『신곡』이나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오셀로』,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문학 특유의 그윽한 향기를 더하지 못했더라면 이들 도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평범한 도시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이름들이 그 도시들에 대한 내 이미지를 영원히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만, 그 이미지의 출현을 내 마음속에서 이름 고유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름들은 이미지를 더 아름답게 만들긴 했지만, 노르망디나 토스카나 지방 같은 도시들을 실제와는 아주 다르게 만들어, 내 상상력이 주는 기쁨은 커졌으나 미래 여행에서 받을 내 실망 역시 더 크게 했다. 이름들은 내가 몇몇 지상의 장소에 대해 품고 있던 관념들을 자극하면서 그 장소들을 보다 특별한 것, 따라서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도시들, 풍경들, 유적들을 동일한 질료에서 여기저기 오려 낸, 다소 마음에 드는 정경이라 상상하지 않고 그 각각을 내 영혼이 열망하고 내 영혼이 알면 유익한, 다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알 수 없는 것이라 상상했다. 그 장소들은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름, 인명과도 같은 이름으로 지칭됨으로써 얼마나 많은 개별성을 획득했던가!(340∼341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몽테뉴가 유별나게 강조하고 집착했던 대상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장소'와 '이름'이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서 그 특이한 프랑스적 경향(?)이 고스란히 반복되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다.

 

 

『파르마의 수도원』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가 된 파르마라는 이름은 내게 조밀하고 매끄러우며 보랏빛을 띤 부드러운 이미지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내가 머무를지도 모르는 파르마의 한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게는 조밀하고 매끄럽고 따뜻한 보랏빛 저택에서 지내리라고 생각하는 기쁨이 생겨났다. 그 저택은 이탈리아 어떤 도시의 저택과도 관계가 없었지만, 단지 내가 파르마-파름이라는 이름의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무거운 음절과, 스탕달의 부드러움과 보랏빛 반사광을 흡수한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그 저택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마치 경이로운 향기를 풍기는 화관과도 흡사한 도시로 피렌체를 떠올렸는데, 피렌체가 백합의 도시라 불리고, 그곳 대성당 이름이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발베크의 경우, 노르망디의 옛 도자기가 그것이 발굴된 흙의 색깔을 간직하듯이, 이제는 폐지된 어떤 관습이나 봉건 제도, 고장의 옛 모습,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음절로 구성되어 옛날 식으로 발음되는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발베크에 도착해서 성당 앞 맹위를 떨치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안내받았을 때, 나는 그곳에서 카페오레를 내 앞에 가져다줄 호텔 주인으로부터 그런 말투를 다시 들으리라는 것을, 그 주인이 우화 시에 나오는 인물처럼 입씨름하기 좋아하고, 점잔 빼고, 풍모가 중세적이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341∼342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니체가 탁월한 작가로 손꼽아 마지 않았던 스탕달의 작품을 프루스트도 무척이나 좋아했나 보다. 스탕달의 작품은 『적과 흑』 이후로는 영영 재회한 적이 없었는데, 『파르마의 수도원』을 염두해 놓아야겠다...

 

 

내 건강이 나아져서, 비록 발베크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한번은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건축물과 경관을 보기 위해 그처럼 상상 속에서 여러 번 탄 적 있는 1시 22분 기차를 타는 것을 부모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나는 우선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내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번 그 도시들을 비교해 보았지만,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그 개별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더 아름다운 도시를 고를 수 있단 말인가. 불그스름하고 우아한 레이스 안에서 그렇게도 높이 솟아 있고 꼭대기가 마지막 음절의 오래된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이외(Bayeux). e 모음 위 방점이 오래된 유리창을 검정 나무 같은 마름모꼴로 나누는 비트레(Vitré). 달걀 껍질의 노란색에서 진주 빛 회색에 이르는 희끄무레하고 부드러운 랑발(Lamballe), 기름지고 노르스름한 마지막 이중모음이 버터로 만든 탑을 장식하는 노르망디의 대성당 쿠탕스(Coutances), 마을의 고요 속에 역마차의 소음과 함께 파리가 뒤따르는 라니용(Lannion),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가 강물이 흐르는 시적인 장소의 길 위에 흩어져 있는 그 우습고도 소박한 케스탕베르(Questambert)와 퐁토르송(Pontorson), 해초 한가운데로 강물을 끌어들이려는 듯 밧줄에 겨우 매인 듯한 베노데트(Benodet),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천 모자의 옅은 분홍색 날개가 운하의 초록빛깔 물속에서 떨리며 반사되는 퐁타벵(Pont-Aven), 중세 이래로 시냇물에 보다 단단히 매어 있고 그 사이를 졸졸 노래하며 검게 그은 옷의 무딘 점으로 변한 햇살이 유리창 거미줄 너머로 그림을 그리듯 아주 섬세한 잿빛 진주 방울로 아롱지는 캥페롤레(Quimperlé).(342∼344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역자 주)

 

문체론적으로 유명한 이 문단은 프랑스 시인 랭보의 『모음(Voyelles)』 이라는 시 못지않게 주목을 받아 왔다. 문화적, 음성학적, 문자적인 함의로 가득한 이 문단에서 우선 장식 융단으로 유명한 바이외(Bayeux)의 yeu는 고풍스러운 금색을, 마름모꼴 유리창이 연상되는 비트레(Vitré)의 é는 검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랑발(Lamballe)에는 하얀색(blanc)이란 음소가 들어 있으며, 쿠탕스(Coutances)의 an은 버터의 노란색을 환기한다. 라니용(Lannion)은 마부의 끈(laniére)과 라퐁텐의 우화에 연유하며, 케스탕베르(Questambert)는 이 고장의 카망베르 치즈에서, 이밖에도 퐁토르송(Pontorson)의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는 이 도시 문양이 백조인 데서, 베노데트는 수초로 불리는 이 고장 수생식물에서 비롯되었다. 퐁타뱅의 모자 날개는 고갱의 그림 『브르타뉴의 네 여인들』에 나오는 하얀 천 모자와 연결되며, 플로베르를 매혹했던 '들판과 모래톱'의 투명한 시냇물 이미지는 캥페를레(Quimperlé)의 진주 빛(perlé) 방울로 표현된다.

 

(나의 생각)

 

프루스트의 문장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같다.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비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얼마나 괴벽스럽지 않으면서도 매혹적인가. 『댈러웨이 부인』의 버지니아 울프가 이런 문장들을 읽고 어찌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두고 <실패작, 천재성은 있지만 질이 낮다. 산만하고 찝찔하고 젠체하며 상스럽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마르셀 프루스트를 두고 <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다.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 *

 

책을 무려 여덟 권이나 사 놓고 여태껏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않았던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1권을 슬슬 읽어 나가다가 특별한 문장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루스트의 소설을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불쑥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문장이란 이 기나긴 소설의 첫 문장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은 다음 대목에서였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짦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86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1부_콩브레

 

이런 독특한 느낌들이야말로 프루스트를 읽는 독자들만이 맛보는 경이로운 체험이 아닐까 싶다. 프루스트의 소설엔 문학이 우리의 의식을 얼마만큼 폭넓고도 깊숙하게 자극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그런 수단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화자의 지나간 기억만이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는 건 아니다. 도처에 널려 있는 그림과 음악, 연극과 오페라도 중요한 매개체다. 그밖에도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화창한 날씨, 비, 바람, 브리오슈빵, 마로니에 그늘, 라일락 향기, 시냇물, 저녁놀, 구름, 빗방울 등등등. 그렇게 다소 어리둥절하게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는 수많은 덩어리들'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장편 소설의 제1권이 뚝딱 끝난다.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 콩브레>의 배경이 전원풍의 시골이었다면, <2부 스완의 사랑>의 주된 배경은 프랑스 사교계 인물들이 밤마다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는 파리의 화려한 살롱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최고급의 귀족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대저택의 현관을 가득 메울 만큼 화려한 마차들이 잇따라 등장하는 식은 아니다. 극히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소수의 핵심 멤버들이 거의 매일 저녁에 삼삼오오 만나 고급 만찬과 음악 연주와 이야기를 즐기는 식이다. 거기서 우리의 주인공 스완은 '과거가 의심되지만' 보티첼리의 그림 속 미녀를 연상시키는 오데트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2부 스완의 사랑>에서는 <1부 콩브레>에서 이야기를 이끌던 화자는 아주 가끔씩 어쩌다가 등장하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가 이끄는 '스완의 사랑'에만 집중된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오데트를 만났으며,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어떻게 '금전적으로' 얽히게 되었고, 어떻게 질투 때문에 괴로워하는지가 숨막히게(?) 펼쳐진다. 스완의 사랑은 어느날 저녁 살롱에서 연주되는 뱅퇴유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갑자기 솟아오른다.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윤곽을 분명히 구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갑자기 매혹된 그는, 마치 저녁나절 습기찬 공기 속을 감도는 장미 냄새가 우리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듯이, 지나는 길에 그의 영혼을 크게 열어 준 악절 또는 화음을 ㅡ 그는 어느 것인지 알지 못했다. ㅡ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내적인,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런 인상이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말하자면 '시네 마테리아'인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듣는 음은 그 높이와 부피에 따라 우리 눈앞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표면을 감싸고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며 우리에게 넓이, 미묘함, 안정감, 변화에 대한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은 뒤이어 또는 동시에 나타나는 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들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절들의 복사본을 만들어 그것들을 다음에 오는 악절들과 대조하고 구별하게 하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액체성'과 '뒤섞임'으로 계속 모티프들을 감쌀 것이고 그리하여 모티프들은 거의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이따금 솟아오르다 이내 가라앉고 사라지면서 그것이 주는 특별한 기쁨에 의해서만 지각될 뿐 묘사할 수도 기억할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즉 '말로 펴현할 수 업는 것'이 된다. 이처럼 스완이 느꼈던 감미로운 감각이 사라지자 마자 그의 기억은 곧 그 감각에 대해 간략하고도 일시적인 복사본을 마련해 주었지만, 악절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지나치게 그 복사본에 눈을 던지고 있었으므로, 똑같은 인상이 갑자기 되돌아왔을 때에 이미 그 인상은 포착할 수 없어지고 말았다. 스완은 그 인상의 넓이와 대칭적인 배열, 문자, 표현적인 가치를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 앞에 이미 순수 음악이 아닌 데생이나 건축, 사상과도 흡사한 그런 것을 보았다. 이제야 그는 음향의 파도 위로 잠시 솟아오른 악절을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다. 악절은 금방 그에게 특별한 쾌락을, 그것을 듣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쾌락을 주었는데, 악절 외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쾌락을 맛보게 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악절에 대해 미지의 사랑과도 같은 그 무엇을 느꼈다.((44∼47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2부_스완의 사랑​  

 

스완의 사랑은 가파른 호흡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다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결여와 공백 때문에 갑작스레 방황하다가, 느닷없는 의심과 질투와 이별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또다시 마주친 뱅퇴유의 소나타에서 '사랑이 끝났음'을 절감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거기서 이어지는 대목이 앞서 일부 문장들을 인용했던 <3부 고장의 이름 ㅡ 이름>이다.

 

여기까지 읽고 보니, 문득 뒤늦게 붙잡고 읽기 시작한 프루스트의 엄청나게 긴 소설에 뜻밖에도 빨리 적응된 느낌이 든다. 전체 <7편 13권>으로 구성된 책 가운데 현재로서는 (민음사판 기준으로) <4편 8권>까지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틈틈이 읽다 보면 8권까지는 충분히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까지 읽고 나서도 여전히 후속 번역판이 출간되지 않는다면 그땐 과연 어떤 느낌이 찾아들까. 오래도록 이어지다가 갑자기 뚝 멈춰버린 음악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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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13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지리산을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리산을 오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듯, 그리고 각자 길이 서로 다른 매력을 준다는 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다르게 보이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 호흡으로 읽어야 할텐데 좀처럼 진득하게 한 작품만 파는 편이 아니라, 볼 때마다 새로워집니다. oren님께서는 그런 면에서 같은 시선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실 수 있기에 oren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oren 2019-10-13 14:30   좋아요 2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오솔길을 선택하고,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물들과 상념들에 따라 콧노래를 부르거나, 또는 힘에 겨워 잠시 땀을 닦으며 바위 위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쉬어 가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독자들마다 무수히 다른 산행 경험과 다리의 감각과 삶의 다양한 기억들을 서로 다르게 지녔을 테니까요.

저는 뜻밖에도 산행을 하는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마치 하나의 미술 작품이나 음악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이렇게도 해석하거나 저렇게도 달리 해석하는 예술가적 취향에서 프루스트를 읽는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어차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가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고자 애쓰는 ‘작가의 의식‘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이 작품을 읽게 되면서 느끼게 된 안도감은, 10년 전이나 20년 전과는 달리, 생소한 작가나 작품들이나 이야기들이 과거보다 적잖이 줄어들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 * *
프루스트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소설을 읽을 것인가?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시간과 장소에서 한계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되면서도, 프루스트적인 삶의 축복을 준다면 질투에 사로잡혀 읽게 된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중에서

2019-10-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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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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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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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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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0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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