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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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허 스님에게는 몇 차례 예지 적중 내력이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이들은 이미 아는 일이다. 그 하나는 6·25 직전, 스승 한암 스님의 만류도 뿌리치고 양산 통도사로 남하했던 이력이다. 그 둘은 울진, 삼척 지방에 무장공비가 몰려들기 직전 《화엄경》의 번역 원고를 월정사에서 영은사로 옮겼던 이력이다.

 

그러나 탄허 사상과 예지의 매력은 더욱 깊은 곳에 있다. 그는 예언한다. 지구에 잠재하는 화질火質이 북방의 빙산을 녹이기 시작한 것은 지구의 규문閨門이 열려 성숙한 처녀가 되는 과정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지구의 초조初潮 현상은 소멸이 아니라 성숙의 모습이라는 낙관론이다. 그는 또한 머지않아 민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믿는다. 땅의 민중이야말로 핵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역학의 산리算理로 헤아려 내는 것이다.(14쪽)

 

 

 * * *

 

6·25 동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 당시 나는 오대산에서 한말韓末 이래로 가장 존경받던 고승 한암漢岩 스님을 모시고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한암 스님을 10년 이상 모신 상좌上座가 없었는데 황송하게도 나는 22년을 모셨다. 한암 스님께 가르침을 받으면서 존경하는 마음은 날로 더해 갔다.

 

기축년己丑年인 1949년 어느 날, 개미 떼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법당과 중대 뜰에 수백 마리씩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난亂을 예감했다.

 

‘남북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지겠구나!’

 

하늘은 하늘의 상象을 보이고, 땅은 땅의 상을 보이고, 꼭 사람의 상만 보는 것이 관상이 아니다. 짐승들도 지진을 예지하는데, 하물며 그런 큰 난리는 다 미리 조짐을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통하여 얻은 역학 원리易學原理로 분석해 보니 곧 난이 일어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일단 어려운 상황을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스님, 오대산을 떠나 남행南行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암 스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30년 이상을 살아온 오대산을 떠날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당시 내 나이 서른네 살, 인생에서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여서 어떻게든 남행을 관철시키려고 애썼다. 더욱이 당시 스물셋, 스물넷이었던 젊은 상좌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닥칠 난을 피해 오대산을 떠나려는 결심을 굳혔다.

 

내 결심이 굳건하다는 사실을 안 한암 스님은 어쩔 수 없이 남행을 허락하고, 양산 통도사 백련암으로 가서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라고 하셨다. 한암 스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오대산의 중대암에 기거하다가 3일 만에 짐을 챙겨 몇몇 상좌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기축년己丑年 봄, 통도사 백련암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통도사 주지는 우리에게 암자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한암 스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말로 겨우 암자를 얻어 머물 수 있었다.

 

그러나 한암 스님은 끝내 백련암에 오시지 않았다. 30년 이상을 오대산에 머무르셨으니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신 그분의 결의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여든 살의 고령이었던 한암 스님은 오대산에서 6·25 동란을 고스란히 겪으셨다.

 

그때 상원사를 불태우려고 군인들이 들이닥쳤는데, 한암 스님은 가사 장삼을 갖춰 입으시고 법당에 의연히 앉아 그대로 태우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노승의 의연함에 놀란 군인들이 차마 불태우지 못하고 떠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한암 스님은 1·4 후퇴 무렵에야 오대산을 떠나 천리가 넘는 남행길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겪은 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다른 일을 이야기하자면 어느 해인가 동해안을 통해서 울진·삼척 지방에 공비 120여 명이 침투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월정사의 한 암자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을 번역하고 있었는데, 어떤 직감에 의해 공비 침투가 있기 한 달 전에 장서藏書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삼척 영은사靈隱寺로 옮겨 두었다.

 

갑자기 짐을 몽땅 싸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작은 소동이 일었다. 그때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여기 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모두 옮기고 난 후 15일 만에 울진과 삼척 지역에 공비 침투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거의 모든 공비가 소탕되었지만, 일부 남은 공비들이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오대산으로 도주했다. 그 바람에 월정사를 중심으로 오대산 일대에 소탕작전이 벌어졌다. 이때 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동원된 군대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하필이면 군단 사령부가 월정사에 소탕작전 본부를 설치했다.


그동안 나는 강릉에서 한달가량 머물다가 공비 소탕작전이 끝난 다음 월정사 암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살던 암자 주변에 사방으로 참호를 파 놓아 암자는 완전히 폐허 상태였다. 만약 그때 필생의 노력과 심혈을 기울여 온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들을 다른 장소로 옮겨 놓지 않았더라면 이 번역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35∼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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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당개라는 선비가 운명을 보았는데 “천정무원穿井無源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즉 “우물을 파는 데 근원이 없다”라는 뜻으로 다시 말해서 “너의 팔자는 기구해서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당개는 즉각 “천정무원穿井無源가?”라고 현토를 고쳐서 반박했다. 이 말의 뜻은 “우물을 파는 데 근원이 없을 소냐?”라는 말로 파다가 중단하면 근원이 없지만 끝까지 파면 근원의 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70년을 공부했다. 그러면서도 결코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몰라준다고 세상을 원망하는데도 그는 한 번도 원망함이 없이 꾸준히 노력했다. 대신 학문이 능통하면 내가 벼슬을 할 텐데, 학문이 부족하니 내가 이렇듯 등용 안 되었지 하면서 늘 반성하고 노력을 했다.

 

그러다 일흔이 되던 해에 역시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당개, 당개!” 하고 불러서 밖으로 나가보니 허공은 공적하고 부르는 소리만 있지 모양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당개가 “무엇이 나를 찾느냐” 하니 공중에서 귀신이 하는 말이 “너의 운명을 어찌하겠니?” 물었다. 듣고 보니 젊었을 때 말과 같았다. 우물을 파서 근원이 없다는 말이나 지금의 “운명을 어찌하겠니?” 이 두 문장은 말만 다르지 뜻이 같으니 당개가 다시 반박을 했다. 

 

“야, 이놈아 운명인들 당개를 어찌하겠느냐?”

 

“당개가 밀고 나가는데 어찌 운명이 당개를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이렇게 호통을 쳤다. 그리고 그 해에 등과를 했다. 이렇게 운명은 당개처럼 자기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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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8-12-14 11: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제 짝꿍은 고교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 감옥에도 다녀왔는데요. 그 친구가 어느 날 친구따라 점집엘 갔었대요. 그 때 점쟁이가 제 친구를 보자마자 그러더래요. ˝당신은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라 이런 데 올 필요가 없소.˝라고요. 아주 당찬 친구였는데 늘 경제적인 문제로 어려워했어요.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지만 가끔 마음이 약해질 때 이 친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지곤하지요. 그리운 친구입니다.

oren 2018-12-14 12:05   좋아요 0 | URL
그런 친구분이 계셨군요. 사람들 중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경우도 능히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지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 또한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사실 <탄허록>에 보면 오늘날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개인의 운명을 훨씬 뛰어넘는) 굵직굵진한 예언들이 아주 많고, 오늘날의 현실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부분들도 적잖아서 꽤나 놀라운 책인데, 가끔씩 곁들여 놓은 ‘개인의 운명‘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까지 있어서 금세 다 읽게 되더군요.^^
 
탄허록 - 미래사회를 이끌어 갈 주인공들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탄허 지음 / 휴(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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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이 부인을 왜 소박했습니까?

강태공은 생활이 어려울 때 소 잡는 일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강태공이 80년을 수조垂釣, 즉 ‘낚시’를 하니 이를 답답해하던 부인이 도망갔다. 견디기 어려워서 떠난 것이다.

 

강태공은 훗날 문왕에게 발탁되어 부귀공명을 누렸다. 문왕은 그를 존위사부尊爲師傅 라고 높여서는 사부라 했다. 또 호위상부號爲尙父라 하여 호를 높은 아버지라 했다. 그래서 사상부師尙父라는 별호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왕에게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던 어느 날 떠났던 부인이 태공을 다시 찾아왔다. 이때 태공은 부인에게 물을 한 동이 가져오게 한 다음 그 물을 땅에 쏟으라고 했다. 그리고 부인에게 물을 다시 쓸어 담으라고 했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다.

 

“못 담겠습니다.”

 

이에 태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거절했다.

 

“당신과 나는 바로 이와 같소.”

 

이 말은 들은 부인은 자살을 했다고 한다.(235∼236쪽)

 

 

 * * *

 

 

주매신周梅臣은 강태공과 반대로 떠난 부인을 다시 맞아했다는데 사실입니까?

주매신의 표맥漂麥이란 유명한 말이 있다. 보리멍석이 떠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주매신의 일화다. 그는 일생을 무릎이 썩을 정도로 글만 읽은 선비인데 부인이 하루는 이웃 마을에 가면서 검은 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올 것 같아 남편 주매신에게 부탁했다.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데 만약 비가 오면 보리멍석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매신은 “그렇게 하리다”라고 대답을 하고서 글을 계속 읽었다. 그런데 소나기가 내려서 보리멍석이 다 떠내려 가버렸다. 부인이 돌아와서 이 광경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남편을 책망하며 개가해 버렸다.

 

얼마 후 주매신이 대과에 급제해서 군수로 발령받아 가는 길에 도망간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가난한 집에 개가를 했던지 산에서 나물을 뜯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주매신은 옛날의 고생을 위로하면서 부인을 데려와 다시 재결합해서 살았다고 한다. (236∼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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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2003.10.1∼2017.9.30)

 

테디를 보낸지도 어언 1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오늘 문득 그 녀석이 사무치게 그리워 또다시 사진을 들춰봤다. 십수 년 동안 내가 찍은 사진들 가운데 오로지 테디의 모습만을 찾아 모든 사진 폴더를 다 뒤지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맨 처음 뒤진 때는 테디가 죽은 바로 그날, 따사로운 가을 오후였다. 그날 저녁 예약 시각에 맞춰 화장하기로 했고, 그 때 모니터에 띄울 '영정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어미곁을 떠나 우리집으로 입양된 테디는 꼬박 14년을 우리와 함께 살다 떠났다. 죽을 때까지 크게 앓은 적도 없을 만큼 내내 건강했지만, 죽기 일주일 전쯤에 심장이 마비되어 졸도한 적은 있었다. 거실에서 쓰러진 그날 저녁에 곧바로 돌연사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거실에서 쓰러져 버둥거리다가 의식조차 희미해진 테디를 부여 안은 채 아내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동네 동물병원을 알아보느라 핸드폰을 든 손이 너무 와들거려서 검색할 단어조차 두드릴 형편이 안 됐다. 이미 똥오줌까지 싸면서 정신이 가물거리는 녀석을 데리고 뛰다시피 동물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갑자기 녀석이 다시 정신을 차렸고, 품에서 내려 놓으니 어그적거리면서 제 발로 멀쩡히 걷는 게 아닌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맙던지.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약까지 타 왔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심장이 안 좋다고 했다. 죽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은 호흡할 때 힘겨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14년 동안 오로지 '테디와 함께' 살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던 아내는 테디가 죽기 하루 전날 친구들과의 약속 때 통음을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는데도, 9시도 안 된 시각에 전화를 걸어 보니 이미 집까지 걸어올 수 없을 정도로 만취 상태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 나홀로 테디를 돌보다가 아내를 데리러 집을 나섰다. 아내의 전화기를 바꿔들고 통화한 아내 친구의 말인 즉슨, 저녁 내내 아내는 "테디 없이 어떻게 살라고..." 라는 말만 수없이 되뇌이면서 연신 눈물 범벅으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아내를 만나 집까지 데려 오는 동안에도 아내는 몇 번이고 공원의 턱끝마다 주저 않아 '테디 없인 못 살아'를 반복하며 슬퍼했다. 몇 번씩이나 토하는 바람에 등을 두드려주기도 바쁠 정도였다. 테디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내가 이렇게나 괴로워 하다니,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싶은 생각 뿐이었다. 막막했다.

 

아내를 부축해서 간신히 집으로 들어왔지만, 환자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 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내내 호흡에 힘들어 하던 테디와 과음 탓에 술병이 날 정도로 몹시 괴로워 하는 아내는 둘 다 힘에 겨워 서로를 돌 볼 힘조차 없었다. 아내는 입밖으로 '테디야, 테디야'를 연신 내뱉지만, 그뿐이었다. 거실 바닥에 퍼져 엎드려 숙취로 끙끙 앓았다. 그토록 아내를 따르던 테디 또한 '엄마의 이상한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볼 뿐, 아내에게 다가설 기운도 없이 색색거리기만 했다. 그런 두 환자를 바라보는 나는 그저 '테디야, 많이 아파? 제발 아프지 마'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지켜보다가 나도 잠에 들었다. 당장에 큰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곤하게 늦잠을 잤다. 열시쯤이나 됐을까,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여보, 테디가 또 이상한 거 같아." 일어나 보니 테디는 첫 번째 심장 마비때 보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보다 '훨씬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만 다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게 끝일 듯했다.

 

딸까지 깨웠다. 테디와의 마지막 이별이 목전이었다. 녀석은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듯이 차분하면서도 고요하게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 시간이 무려 15분에서 20분쯤 지속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녀석의 눈은 한 번도 엄마의 눈을 떠나지 않았다. 그토록 발랄하던 녀석이 이토록 고요하게 우리와 작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엄마, 아빠, 언니의 눈물 젖은 눈으로 건네는 수많은 작별 인사를 한번이라도 더 듣고 떠나겠다는 듯이, 녀석은 아주 오래도록 미세한 호흡을 멈출 줄 모르고 이어 나갔다. 그리곤 멎었다.

 

 

 

2007_08_01, 다섯 살 때, 사람의 나이로는 스무 살쯤 될 터이지만, 테디의 겉모습은 어린 개구장이일 뿐이다.

 

 

2011_02_08, 둘째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천연덕스레 중간에 끼어들어 '앨범 구경' 중이다.

 

 

2011_02_08, 거실 바닥이 매끄러운 게 테디에겐 늘 불편했다. 그래서 늘 미안했다.

 

 

2011_03_29,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는 테디

 

 

2011_04_25, 이 녀석은 엄마가 외출하고 없을 땐 어김없이 내 방문을 긁는다. "아저씨, 뭐해?"

 

 

2013_11_23, 아침 햇살이 따사로운 늦가을 어느 날, 어김없이 양지바른 데를 골라 햇살을 즐기고 있다.

 

 

2013_11_23, (비록 테디는 안 보이지만) 녀석이 주로 머무는 거실, 테디가 없는 지금과 그때는 얼마나 다른가.

 

 

테디가 떠난 빈 자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컸다. 테디가 죽은 날, 오후 늦게 학교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 녀석은 체온이 다 빠져나간 테디를 말없이 쓰다듬고 나더니, 자기 방에 홀로 틀어박혀 눈이 벌개지도록 울었다. 테디가 엄마 다음으로 좋아했던 게 오빠였고, 아들 녀석도 테디를 몹시 사랑했다. 테디가 일통을 저지른 게 발각되어 엄마나 아빠한테 꾸중을 듣고 혼이 나면, 녀석은 어김없이 오빠 품으로 기어들어가 다음날 아침끼지 나올 줄을 모를 정도였다.

 

테디가 죽고 난 뒤 아내의 슬픔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처음엔 아파트 주변의 공원을 나서는 것조차 겁낼 정도였다. 14년 동안 사귀었던 애완견 부모들을 마주칠 때마다 눈물부터 왈칵 쏟아냈다. 그런 현상이 몇 달씩이나 지속되었다.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테디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쏟았다. 몇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테디의 무덤'을 찾았고, 그때마다 눈물을 바가지로 쏟았다. 1년이 다 되도록 테디를 잃은 슬픔은 누그러질 기색조차 안 보일 정도였다. 적어도 '3년은 간다더라'는 말을 위안 삼아 내뱉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또다른 강아지를 키워 볼까 고심했지만, 테디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도저히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나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볼까, 지금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옆에서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싶었다. 나도 아내와 함께 테디를 묻은 '호숫가 양지 바른 무덤'을 자주 찾지만, 아내에 비하면 나의 감정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아내는 거길 찾을 때마다 온갖 종류의 꽃잎을 따다 주거나, 꽃이 시든 계절이 되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쁜 열매라도 기어코 따다가 얹어 준다.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다. 지난 겨울엔 눈이 잔뜩 쌓인 날에 테디한테 찾아갔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눈을 감고도 찾아낼 만한 위치인데도, 눈을 파헤쳤더니 표식으로 얹어 놓은 돌맹이가 나타나지 않아 한참이나 헤맸다는 것이다.

 

이런 아내의 모습을 너무나 자주 지켜 보고 나니,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과연 얼마만큼 클 것인가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저 말 뿐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런 아픔이 결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살아서 오래도록 함께 했던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아픔과 슬픔은 나이가 들수록 무뎌질 법도 하다. 몽테뉴가 『수상록』의 마지막에 특별히 배치했던 <경험에 대하여>에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갑자기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얼마만큼 살고 나면 생명체는 그만큼 살아 있는 부분이 줄어 들고, 죽어 가는 부분이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그러니 살 만큼 살다가 따사로운 가을날 아침에 아내와 함께 '산책'까지 마무리하고, 북어포를 섞어 넣은 특식까지 실컷 배불리 먹고 난 뒤, 고통없이 깔끔하게 가족들과 기나긴 이별의 시간을 차분히 함께 한 끝에 고요히 죽음으로 옮겨 간 테디는 정말로 행복한 녀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삶의 에너지를 실컷 분출해 보기도 전에 갑작스레 맞는 죽음은 얼마나 사람들을 미치도록 만드는가. 우리에게 초월주의 철학자이자 유니테리언 목사로만 알려진 랄프 왈도 에머슨 같은 젊잖은(?) 사람도 '상실의 고통' 때문에 광기어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 행복을 만끽하기도 전에 아내가 급작스레 병사하고 나자,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아내의 무덤'을 파헤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향한 광풍 같은 열정과 집착을 보여준 히스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여주인공 캐서린이 신분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딴 남자와 결혼하지만,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는다. 캐서린이야말로 히스클리프에겐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캐서린이 병들어 죽자 더욱 거세진다. 히스클리프는 복수에 불타고, 캐서린을 향한 광적인 집착 때문에 결국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두껑까지 열어젖힌다. 한창 불타올라야 할 생의 에너지가 급작스럽게 중단되면서 초래되는 생명의 반발력이 그만큼 강렬했던 셈이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젊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또한 얼마나 가슴 시린가. 한껏 피어보지도 못한 채 한 순간에 폭삭 스러져 땅 속에 묻히고 만 아들의 무덤을 찾는 부모의 가눌 수 없는 슬픔을 그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슬픔을 가슴 서늘할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나마, 가까스로.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들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러시아의 한 벽촌에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묘지가 다 그렇듯이, 이 공동묘지도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에워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잡초로 뒤덮였다. 잿빛 나무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예전에 한번 페인트칠을 했던 십자가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다. 돌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밀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러나 그 무덤들 가운데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고 동물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저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철책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고, 어린 전나무 두 그루가 양쪽 끝에 심겨 있다. 이 무덤에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묻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이미 노쇠한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오곤 한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오랫동안 서럽게 울면서 말 못하는 비석을 빤히 바라본다. 그 비석 아래 그들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고 전나무 가지를 다듬어주다가 다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에 있으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아들과 관련된 추억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이 헛된 것일까? 정말로 사랑, 그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무력한 것일까? 오, 아니다! ……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315∼316쪽)

 

 -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이런 모든 경우를 두루 헤아려 보면, 테디는 살아 있는 동안에 온갖 누릴 거 실컷 누리고 떠난 행복한 녀석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늙어 죽을 때까지도 병치레는 좀처럼 겪지 않았고. 그러니 이제는 테디를 잃은 슬픔보다 그 녀석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추억할 때도 되었다. 나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은 시간을 테디와 함께 보냈던 사람은 언제나 '테디 엄마'로 불렸던 아내다. 그녀의 슬픔은 나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나 큰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테디 엄마도 오랫동안 테디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만큼, 이제는 테디를 아름답게 추억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까지도 내가 이토록 담담하게 테디에 대한 추억담을 길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런지도 모르겠다. 테디에겐 테디 엄마가 세상의 거의 전부였고, 그런 테디와 다시는 영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녀석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겪는 아픔이고 슬픔이며, 그 아픈 상처가 다 아물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새 너무 길어졌다. 이쯤에서 가만히 테디를 다시 떠나 보내야겠다. 그 녀석과 헤어지는 마당에,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괜한 부탁 하나 해보고 싶다.

 

"테디야, 제발 꿈속에서라도 자주 나타나 주렴.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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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8-12-11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 2018-12-11 0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외국 생활을 하던 몇년을 제외하고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반려견과 떨어져 생활해본 적이 없답니다.
이별도 몇번 경험했고요.
글을 어찌나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잘 쓰셨는지 마치 제가 키우던 테디를 보낸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읽었습니다.
사진 속의 테디, 너무나 사랑스럽고 착해보여요.

oren 2018-12-11 12:21   좋아요 1 | URL
저희는 반려견을 딱 한 번 키워보고도 사별의 슬픔이 너무 커서 다시 키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hnine 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몇 번씩이나 겪으셨다니, 그런 멘탈이 너무 부럽습니다.^^

사실, 테디를 보내고 나서 몇 차례나 ‘다시 키워 볼 생각‘을 안 햇던 건 아닌데, 아직까지는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한때는 아들 녀석이 ‘주인 잃은 강아지‘를 길거리에서 발견해서 꼭두새벽에 집으로 데려온 적도 있었고요. 엄마가 너무 크게 상심하는 걸 보고 꾀를 낸 셈인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주인을 찾아주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테디는 겉모습은 몹시 착해 보이지만, 주인 말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만져볼 수도 없을 만큼 성격이 까칠한 녀석이었어요. 오로지 주인에게만 사랑받고 싶어 했던 녀석이었지요.^^

겨울호랑이 2018-12-11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지금도 테디를 이처럼 잊지 못하고 계신 것을 보니, 테디가 얼마나 사랑받고 지냈는지 알겠습니다. oren님 마음이 잘 전해졌으리라 생각합니다...

oren 2018-12-11 12:35   좋아요 1 | URL
저희 가족들도 테디를 사랑했지만, 테디가 가족들한테 보여준 사랑과 놀라운 충성심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죠. 아내와 둘이서 함께 산책을 나갔다가 어느 한 사람이 잠깐씩 다른 일이라도 볼라치면, 테디는 결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버티면서 도통 움직이질 않아서, 그때문에 자주 곤란을 겪을 지경이었죠.^^

qualia 2018-12-11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좀 엉뚱한 생각입니다만, 가희(개)들도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리라 봅니다.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터무니없는 공상이나 SF가 아닙니다. 현재 개의 진화 단계는 인간처럼 음을 또박또박 끊어서 발음할 수 있는 성대 구조가 아니죠. 해서 개가 주인인 인간한테 아무리 말을 하고 싶어도 왈왈, 멍멍, 우우우~ 하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게 돼 있죠. 한데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개도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전자 조작이나 다른 뭐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반영된 끔찍한 시나리오말고요. 개뿐만 아니라 다른 애완동물들, 반려동물들도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할 수 있는 때가 아주 먼 원미래지만 오리라 확신합니다. 주인님,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나요? 왈왈, 멍멍, 우우우~ 제가 주인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인님은 절대 모르실 겁니다. 왈왈, 멍멍, 우우우~

oren 2018-12-11 12:46   좋아요 1 | URL
개들이 생각보다 영리해서 자주 들려주는 몇 가지 말들은 꽤나 정확하게 이해하더라고요. 가령, ˝테디, 산책?˝ 하면 금세 ‘아이, 좋아라~‘ 하고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아저씨도 같이?˝ 라고 한 마디 덧붙이면, 제가 따라 나설 때까지 졸라대면서 몹시 완강하게 버티는데, 이 정도는 아주 약과지요. 청각과 후각은 그토록 발달된 녀석이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인간의 언어‘를 조금도 구사할 줄 모른다는 건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말 한 마디 못하는 동물이 보여주는 ‘주인에 대한 무한대의 충성심‘만큼은 사람도 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랑만큼 못된 천사도 없지."

 - 셰익스피어, 「사랑의 헛수고」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가와바타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때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 『설국』이었다. 지금도 사정은 변치 않았다. 이 소설은 분량이 짧은 데다가 뚜렷한 플롯이 없을 정도로 스토리가 모호한 느낌이 들지만,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특이한 매력을 지녔다. 그것은 눈으로 가득 찬 산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덧없는'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애틋하거나 허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쿄에서 놀러 온 무위도식하는 여행자에 불과한 시마무라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게이샤 신분의 고마코 사이에는 산골 마을이라는 비교적 좁은 공간과 짧은 틈새 시간밖에 없다. 그런 시공간을 매번 다양한 빛과 소리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자연이자 드넓은 우주의 일부분으로 능수능란하게 확장시키는 재주야말로 가와바타에게 특유한 재능이었다. 『설국』은 계절이 바뀌면 눈처럼 녹아 없어지고 마는 덧없고 허무한 '사랑의 헛수고'를 그리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인 자연 공간에 대한 작가의 아름답고도 슬픔 가득한 묘사를 빼놓고선 결코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그만큼 설국의 무대는 아주 협소하지만 읽는 사람들에게 그곳 자연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설국』은 일본에서만 특유한 게 아니라 작가에게서도 동시에 특유한 서정으로 가득하다. 일본 소설이 아니라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단어들, 이를테면 게이샤, 기모노, 오비, 가부키, 유카타(浴衣), 다다미, 샤미센, 지지미 등의 용어만 들어도 그렇다. 가와바타는 특히 빛과 소리에 아주 예민한 감각을 지닌 작가였다. 해마다 겨울이면 눈이 스무 자나 쌓이는 한적한 산골 마을의 다채로운 풍경들은 작가가 바라보는 시점마다 매번 그 모습을 달리한다. 그 눈 마을은 가을 한철엔 단풍객들이 더러 찾지만, 눈이 내리는 한겨울엔 온천욕과 스키를 즐기려는 여행객들로만 잠깐식 붐빌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작은 마을이다. 그 마을을 외부와 연결하는 통로는 기차였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처럼 소설은 독자들을 단숨에 눈의 고장으로 이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사뭇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인 시마무라는 기차 안에서 홀로 여행 중인데, 기차가 멎자 아까부터 은연중에 그의 관심을 끌던 처녀가 다가와 시마무라 앞의 유리창을 열어젖히고 (그녀와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한) 역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를 듣고 나서 시마무라는 그 처녀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갑자기 주인공의 내면 속으로 빠져든다. 서사는 잠시 뒤로 밀려나고, 어느새 습기 찬 기차 유리창에 비친 풍경을 묘사하는 작가의 독특한 미의식(美意識) 속으로 깊숙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독자들에겐 생경스러운 것이다.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뿐이었다. 밖은 땅거미가 깔려 있고 기차 안은 불이 밝혀져 있다. 그래서 유리창이 거울이 된다. 하지만 스팀의 온기에 유리가 완전히 수증기로 젖어 있어 손가락으로 닦을 때가지 그 거울은 없었다.

 

그렇다. 시마무라가 지금 기차를 타고 찾아가려는 눈 마을엔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가 살고 있었고, 지난 봄 등산철에 우연히 그 마을을 찾았다가 처음 만났던 그녀를 잊지 못해 이번에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시마무라의 건너편 좌석에서 병든 젊은 남자를 간호하는 처녀가 아까부터 그의 주의를 끌었다. 기차에 올라탈 때부터 내내 안색이 파리한 그 남자를 극진하게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던 그 처녀의 이름은 요코였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 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커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12쪽)

 

기차가 그 신호소를 지나고 나서 30분쯤 뒤에 시마무라는 기차역에서 내리는데, 뜻밖에 요코 일행도 같은 역에서 내린다. 이제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는 한적한 눈 마을이 거의 전부다. 여기까지만 소개해도 소설의 무대와 등장 인물은 거의 다 밝힌 셈이다. 그만큼 소설은 단촐하다. 주인공 시마무라와 게이샤로 일하는 여주인공 고마코와 눈 마을에서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 댁의 아들과 그 아들을 간호하는 처녀인 요코가 등장인물의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시마무라는 오랜만에 다시 찾은 그 마을에서 반갑게 고마코를 만난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는 정식 게이샤는 아니었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뚜렷한 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남자다. 한때는 일본춤을 연구하다가 서양무용 쪽으로 방향을 바꾼 뒤, 서양무용에 관한 서적들과 사진을 수집하거나 서양무용에 대해 글을 쓰는 게 고작이었다.

 

지난 봄, 산이 제일이라면서 혼자 눈 마을로 찾아와 산행을 즐기다가, 이레 만에 온천장으로 내려와서 게이샤를 불렀는데, 그 때 만난 여자가 고마코였다. 그녀는 샤미센과 춤을 가르치는 선생님 댁에서 살고 있다. 정식 게이샤는 아니지만 큰 연회가 있는 경우 더러 부탁받아 춤 두어 가지만 보여주고 돌아오는 처지로 지내는 여자였다.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시마무라는 화들짝 놀라 앉음새를 고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는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9쪽)

 

둘이서 처음 만난 때는 신록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녀는 도쿄에서 동기(童妓)로 있을 때 몸값을 치르고 나와 일본무용 선생으로 성공할 작정이었는데, 겨우 1년 6개월만에 남편이 죽고 말았다고 했다. 나이는 열아홉 살이라 했다. 시마무라는 그녀와는 '친구 사이로 남고 싶으니까' 다른 게이샤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 양심의 가책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끝낼 수 있는 여자를 원했다. 그녀는 너무 깨끗했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를 다른 게이샤와 달리 생각했다.

 

소문을 들으니 고마코는 그녀가 묵고 지내는 선생님 댁의 아들이 장결핵을 앓게 되자 게이샤로 나서서 요양비를 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 댁 아들의 약혼녀라는 소문이 나 있었다. 간호사 지망생이던 요코는 바로 그 병약한 선생님의 아들을 데리러 먼 길을 다녀오던 터였다.

 

고마코가 아들의 약혼녀, 요코가 아들의 새 애인, 그러나 아들이 얼마 못 가 죽는다면, 시마무라의 머리에는 또다시 헛수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고마코가 약혼자로서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것도, 몸을 팔아서까지 요양시킨 것도 모두 헛수고가 아니고 무엇이랴.(55쪽)

 

 

등산을 마치고 온천욕이나 즐기고 떠날 요량이었던 시마무라는 고마코라는 뜻밖의 여자를 만나 금세 친근한 말동무로 가까이 지내지만, '사랑의 헛수고'에 대한 자각 때문인지도 모를 묘한 자제심을 발휘한다. 고마코는 외지에서 찾아든 젊잖은(?) 시마무라에게 몹시 이끌리지만 더는 가까워지지 못하고, 결국 어정쩡한 상태로 기약없이 헤어진다.

 

정확히 199일 만에, 겨울이 되어 눈 마을을 다시 찾은 시마무라는 그 겨울의 풍경에 매료되고, 시도때도 없이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방을 들락거리는 고마코를 차츰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을 두고 있는 남자가 외딴 시골 마을에서 게이샤로 일하는 고마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갈래요」

 

「갈 필요 없어」

 

힘들어요. 당신은 이제 도쿄로 돌아가세요, 힘들어요」 하고 고마코는 고다쓰 위에 얼굴을 묻었다.

 

 힘들다는 건 여행자에게 깊이 빠져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럴 때 꾹 참고 견뎌야 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여자의 마음이 여기까지 깊어졌나 보다 하고 시마무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70쪽)

 

 

맺지 못할 사랑 때문에 서로가 힘겨워할 때 이별 말고 무슨 해결책이 있단 말인가. 시마무라는 다음날 오후 3시 기차로 떠나기로 하였고, 고마코는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간다. 출발 시각 20분을 남겨 놓고 요코가 헐레벌떡 나타난다. 선생님 댁의 아드님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전하러 온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요코와 시마무라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고마코는 한사코 시마무라를 끝까지 배웅한다. '배웅'은 중요하다면서. 그녀가 동기 생활을 위해 도쿄로 팔려갈 때 배웅해 준 유일한 인물이 선생님 댁 아드님이었는데도.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 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寒村)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눈 온 아침의 거울 속에서와 똑같은 새빨간 뺨이었다. 시마무라에게는 또 한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75쪽)

 

 

시마무라가 다시 그 마을을 찾은 때는 억새가 한창일 무렵이었다. 그 사이에 선생님 댁 아들은 죽었고, 고마코는 거처를 다른 데로 옮겨서 여전히 게이샤로 일하고 있었다. 시마무라가 그 마을에 발을 디딘지도 벌써 3년째였고, 고마코가 그 마을에서 일한 지는 벌써 5년째였다. 요코는 결핵으로 죽은 젊은 남자의 무덤으로 성묘만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고마코와 시마무라 사이는 한층 허물없이 가까워졌지만, 늦은 밤이든 이른 새벽이든 시시때때로 내집처럼 시마무라의 방을 찾는 고마코의 발길은 늘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마을이 너무나 좁기 때문이었다. 나쁜 소문이 나더라도 그 마을을 떠나 딴 데로 옮겨 일하면 그만이지만.

 

어느날 문득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 고백한다. "힘드니까 돌아가줘요. 이제 입을 옷이 없어요. 당신한테 올 때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지만 이젠 남은 게 없어요. 이건 친구에게 빌린 옷이에요. 나쁜 애죠?" 라면서. 둘 사이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여러 장벽은 하나도 변하는 게 없었고, 둘은 차츰 또다시 이별을 예감하기 시작한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 고마코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이 시마무라는 이해가 안 되었다. 고마코의 전부가 시마무라에게 전해져 오는데도 불구하고, 고마코에게는 시마무라의 그 무엇도 전해지는 것이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공허한 벽에 부딪는 메아리와도 같은 고마코의 소리를, 자신의 가슴 밑바닥으로 눈이 내려 쌓이듯 듣고 있었다. 이러한 시마무라의 자기 본위의 행동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는 없었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리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産)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133∼134쪽)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따돌리고 홀로 이웃마을을 구경하고 돌아온 날 밤, 마을에서 느닷없이 화재 경보 종소리가 울린다. 평소에 극장으로 쓰던 누에고치 창고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마침 그날 저녁에 영화 상영이 있었던 모양이다.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여관에 머물던 사람들과 함께 불구경을 하다가 서둘러 화재 현장으로 내달린다. 그 와중에도,

 

 

「은하수예요. 예쁘죠?」

 

고마코는 중얼거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달려나갔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 뿐 아니라, 군데군대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142∼143쪽)

 

 

불길이 이는 쪽으로 달려가면서도 둘은 어디까지 함께 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불난 곳까지 당신을 데려가면' 마을 사람들한테 놀림을 받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불길이 치솟는 고치 창고로 함께 내달리는 동안에도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여전히 은하수가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발 밑이 땅으로부터 살짝 들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마무라는 "매일 밤 이런 은하수인가?" 하고 고마코에게 묻는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당신이 가고 나면 전 성실하게 살 거예요」 라고 말하며 걸음을 옮긴 고마코는 흐트러진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대여섯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싫어요」

 

시마무라는 그저 서 있기만 했다.(145∼146쪽)

 

 

서로 떨어진 채 마을 사람들 틈에 섞여 타오르는 불을 구경하는 동안, 불길 속에서 여자의 몸이 '인형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고치 창고는 극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2층에 나즈막한 객석을 갖추고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여자가 실신한 채 아래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추락한 여자가 요코라는 사실을 시마무라가 안 것도, 사람들이 앗 하고 숨죽인 것도, 고마코가 아앗 하고 외친 것도 거의 동시였다.

 

요코는 하늘을 보며 떨어졌다. …… 시마무라는 왠지 죽음은 떠올리지 않았으나, 요코의 내부에서 생명이 변형되는 순간임을 느꼈다.

 

요코가 떨어진 2층 관람석에서 나무기둥이 두세 개 무너져내려 요코의 얼굴 위에서 타올랐다. 요코는 그 찌르듯 아름다운 눈을 감고 있었다. 턱을 내밀어 목선이 길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지나갔다.

 

몇 해 전인가, 시마무라가 이 온천장으로 고마코를 만나러 오는 기차 안에서 요코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커졌을 때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고, 시마무라는 다시 가슴이 떨렸다. 일시에 고마코와 함께한 시간들이 환히 비쳐진 것 같았다. 뭔가 애절한 고통과 비애도 여기에 있었다.(150∼151쪽)

 

 

고마코는 게이샤의 긴 옷자락을 끌며 비틀거리듯 달려들어 요코를 끌어안는다. 정신없이 울부짓는 고마코에게로 다가가던 시마무라는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떠밀려 휘청인다. 그때 발에 힘을 주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시마무라는 쏴아 하고 은하수가 자신의 가슴 속으로 쏟아져 흘러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소설은 마무리된다.

 

『설국』이라는 소설은 사실 제목만 들어도 누구나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러브 스토리'를 떠올릴 만큼, 그 자체로 이미 비현실적이거나 일종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설국』은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의 배경이 된 온천장 여관에 머무르며 집필했고, 무려 13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생각날 때마다 이어 쓴 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킨 만큼 플롯이 모호할 뿐 핍진성이 부족한 작품은 아니다.

 

한 번만 읽고서는 소설을 온전히 체감하기 어려워 잇따라 두 번째로 읽는 동안에, 가와바타 특유의 '아름다움과 슬픔이 절묘하게 혼재된' 느낌이 소설 속에 얼마나 알알이 박혀 있는지를 새삼 느꼈다. 어떤 비평가는 『설국』에 짙게 스며있는 '아름다움과 슬픔이 혼재된 느낌'을 두고 '성욕과 상실감 사이의 긴장'이 느껴진다고도 보았다. 본질적으로 '헛수고'일 수밖에 없는 남녀 사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로맨스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눈의 고장'에서 펼쳐진다는 건 생각할수록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긴긴 겨울이면 스무 자씩이나 눈이 쌓여 기차도 다니지 못할 정도로 아득한 별천지로 변모했다가, 온갖 생명이 약동하는 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마는, 마법처럼 놀라운 힘을 지닌 새하얀 눈이야말로 '허무한 아름다움'의 상징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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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 2018-12-1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가운 겨울날,

그랜드슬램 2018-12-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춥다는 것은 세상의 편견,

그랜드슬램 2018-12-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편견을 건너 글의 행간을 생각해봅니다.

그랜드슬램 2018-12-1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알고있는 게 과엔 본질을 뚫고 정확히 바라보는건지를오ㅡ?

그랜드슬램 2018-12-1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맥주가 나오고 치킨이 준비되는 재건축 건물앞에서 한해의 무언가를 곱씹어 보는데 투명한것은 단 한가지뿐입니다.,터널을 지나 눈 다음에 나올 그무엇인가를 홀로 생각해봅니다. 문학이 아름다운건 이토록 다양한 각도로 보는 귀한 독자가 있는 것은 아니지 ... 독서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죄송한 말씀은 취중이라 글에 두서가 없어서,미안하지만 이런 제가 조금 귀엽군요 글 감사합니다^^

oren 2018-12-10 22:45   좋아요 0 | URL
마침, 가와바타의 『설국』에서도 ‘두서없는 대화‘가 엄청 많이 등장한답니다. ㅎㅎㅎ
그리고, 취중댓글이라 그런지 느낌이 확실히 귀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