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디(2003.10.1∼2017.9.30)
테디를 보낸지도 어언 1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오늘 문득 그 녀석이 사무치게 그리워 또다시 사진을 들춰봤다. 십수 년 동안 내가 찍은 사진들 가운데 오로지 테디의 모습만을 찾아 모든 사진 폴더를 다 뒤지기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맨 처음 뒤진 때는 테디가 죽은 바로 그날, 따사로운 가을 오후였다. 그날 저녁 예약 시각에 맞춰 화장하기로 했고, 그 때 모니터에 띄울 '영정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어미곁을 떠나 우리집으로 입양된 테디는 꼬박 14년을 우리와 함께 살다 떠났다. 죽을 때까지 크게 앓은 적도 없을 만큼 내내 건강했지만, 죽기 일주일 전쯤에 심장이 마비되어 졸도한 적은 있었다. 거실에서 쓰러진 그날 저녁에 곧바로 돌연사 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거실에서 쓰러져 버둥거리다가 의식조차 희미해진 테디를 부여 안은 채 아내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동네 동물병원을 알아보느라 핸드폰을 든 손이 너무 와들거려서 검색할 단어조차 두드릴 형편이 안 됐다. 이미 똥오줌까지 싸면서 정신이 가물거리는 녀석을 데리고 뛰다시피 동물병원으로 가는 동안에 갑자기 녀석이 다시 정신을 차렸고, 품에서 내려 놓으니 어그적거리면서 제 발로 멀쩡히 걷는 게 아닌가.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맙던지.
온갖 검사를 다 하고 약까지 타 왔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심장이 안 좋다고 했다. 죽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은 호흡할 때 힘겨운 모습을 자주 보였다. 14년 동안 오로지 '테디와 함께' 살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던 아내는 테디가 죽기 하루 전날 친구들과의 약속 때 통음을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는데도, 9시도 안 된 시각에 전화를 걸어 보니 이미 집까지 걸어올 수 없을 정도로 만취 상태로 곤죽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 나홀로 테디를 돌보다가 아내를 데리러 집을 나섰다. 아내의 전화기를 바꿔들고 통화한 아내 친구의 말인 즉슨, 저녁 내내 아내는 "테디 없이 어떻게 살라고..." 라는 말만 수없이 되뇌이면서 연신 눈물 범벅으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아내를 만나 집까지 데려 오는 동안에도 아내는 몇 번이고 공원의 턱끝마다 주저 않아 '테디 없인 못 살아'를 반복하며 슬퍼했다. 몇 번씩이나 토하는 바람에 등을 두드려주기도 바쁠 정도였다. 테디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아내가 이렇게나 괴로워 하다니, 앞으로 어쩌면 좋을까' 싶은 생각 뿐이었다. 막막했다.
아내를 부축해서 간신히 집으로 들어왔지만, 환자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 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내내 호흡에 힘들어 하던 테디와 과음 탓에 술병이 날 정도로 몹시 괴로워 하는 아내는 둘 다 힘에 겨워 서로를 돌 볼 힘조차 없었다. 아내는 입밖으로 '테디야, 테디야'를 연신 내뱉지만, 그뿐이었다. 거실 바닥에 퍼져 엎드려 숙취로 끙끙 앓았다. 그토록 아내를 따르던 테디 또한 '엄마의 이상한 모습'을 안타깝게 쳐다볼 뿐, 아내에게 다가설 기운도 없이 색색거리기만 했다. 그런 두 환자를 바라보는 나는 그저 '테디야, 많이 아파? 제발 아프지 마'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도록 지켜보다가 나도 잠에 들었다. 당장에 큰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곤하게 늦잠을 잤다. 열시쯤이나 됐을까,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여보, 테디가 또 이상한 거 같아." 일어나 보니 테디는 첫 번째 심장 마비때 보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보다 '훨씬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다는 느낌'만 다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게 끝일 듯했다.
딸까지 깨웠다. 테디와의 마지막 이별이 목전이었다. 녀석은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듯이 차분하면서도 고요하게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 시간이 무려 15분에서 20분쯤 지속되는 듯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녀석의 눈은 한 번도 엄마의 눈을 떠나지 않았다. 그토록 발랄하던 녀석이 이토록 고요하게 우리와 작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엄마, 아빠, 언니의 눈물 젖은 눈으로 건네는 수많은 작별 인사를 한번이라도 더 듣고 떠나겠다는 듯이, 녀석은 아주 오래도록 미세한 호흡을 멈출 줄 모르고 이어 나갔다. 그리곤 멎었다.
2007_08_01, 다섯 살 때, 사람의 나이로는 스무 살쯤 될 터이지만, 테디의 겉모습은 어린 개구장이일 뿐이다.
2011_02_08, 둘째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천연덕스레 중간에 끼어들어 '앨범 구경' 중이다.
2011_02_08, 거실 바닥이 매끄러운 게 테디에겐 늘 불편했다. 그래서 늘 미안했다.
2011_03_29,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는 테디
2011_04_25, 이 녀석은 엄마가 외출하고 없을 땐 어김없이 내 방문을 긁는다. "아저씨, 뭐해?"
2013_11_23, 아침 햇살이 따사로운 늦가을 어느 날, 어김없이 양지바른 데를 골라 햇살을 즐기고 있다.
2013_11_23, (비록 테디는 안 보이지만) 녀석이 주로 머무는 거실, 테디가 없는 지금과 그때는 얼마나 다른가.
테디가 떠난 빈 자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컸다. 테디가 죽은 날, 오후 늦게 학교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 녀석은 체온이 다 빠져나간 테디를 말없이 쓰다듬고 나더니, 자기 방에 홀로 틀어박혀 눈이 벌개지도록 울었다. 테디가 엄마 다음으로 좋아했던 게 오빠였고, 아들 녀석도 테디를 몹시 사랑했다. 테디가 일통을 저지른 게 발각되어 엄마나 아빠한테 꾸중을 듣고 혼이 나면, 녀석은 어김없이 오빠 품으로 기어들어가 다음날 아침끼지 나올 줄을 모를 정도였다.
테디가 죽고 난 뒤 아내의 슬픔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처음엔 아파트 주변의 공원을 나서는 것조차 겁낼 정도였다. 14년 동안 사귀었던 애완견 부모들을 마주칠 때마다 눈물부터 왈칵 쏟아냈다. 그런 현상이 몇 달씩이나 지속되었다.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테디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쏟았다. 몇 달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테디의 무덤'을 찾았고, 그때마다 눈물을 바가지로 쏟았다. 1년이 다 되도록 테디를 잃은 슬픔은 누그러질 기색조차 안 보일 정도였다. 적어도 '3년은 간다더라'는 말을 위안 삼아 내뱉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또다른 강아지를 키워 볼까 고심했지만, 테디를 잃은 트라우마 때문에 도저히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나면 그 때 다시 생각해 볼까, 지금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옆에서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 싶었다. 나도 아내와 함께 테디를 묻은 '호숫가 양지 바른 무덤'을 자주 찾지만, 아내에 비하면 나의 감정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아내는 거길 찾을 때마다 온갖 종류의 꽃잎을 따다 주거나, 꽃이 시든 계절이 되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이쁜 열매라도 기어코 따다가 얹어 준다.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다. 지난 겨울엔 눈이 잔뜩 쌓인 날에 테디한테 찾아갔다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눈을 감고도 찾아낼 만한 위치인데도, 눈을 파헤쳤더니 표식으로 얹어 놓은 돌맹이가 나타나지 않아 한참이나 헤맸다는 것이다.
이런 아내의 모습을 너무나 자주 지켜 보고 나니,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과연 얼마만큼 클 것인가를 희미하게나마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저 말 뿐이다. 그런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그런 아픔이 결코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경험해 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살아서 오래도록 함께 했던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아픔과 슬픔은 나이가 들수록 무뎌질 법도 하다. 몽테뉴가 『수상록』의 마지막에 특별히 배치했던 <경험에 대하여>에서 말했던 것처럼, 삶은 갑자기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옮겨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얼마만큼 살고 나면 생명체는 그만큼 살아 있는 부분이 줄어 들고, 죽어 가는 부분이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그러니 살 만큼 살다가 따사로운 가을날 아침에 아내와 함께 '산책'까지 마무리하고, 북어포를 섞어 넣은 특식까지 실컷 배불리 먹고 난 뒤, 고통없이 깔끔하게 가족들과 기나긴 이별의 시간을 차분히 함께 한 끝에 고요히 죽음으로 옮겨 간 테디는 정말로 행복한 녀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삶의 에너지를 실컷 분출해 보기도 전에 갑작스레 맞는 죽음은 얼마나 사람들을 미치도록 만드는가. 우리에게 초월주의 철학자이자 유니테리언 목사로만 알려진 랄프 왈도 에머슨 같은 젊잖은(?) 사람도 '상실의 고통' 때문에 광기어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운 아내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 행복을 만끽하기도 전에 아내가 급작스레 병사하고 나자,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아내의 무덤'을 파헤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향한 광풍 같은 열정과 집착을 보여준 히스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여주인공 캐서린이 신분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딴 남자와 결혼하지만,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는다. 캐서린이야말로 히스클리프에겐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였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캐서린이 병들어 죽자 더욱 거세진다. 히스클리프는 복수에 불타고, 캐서린을 향한 광적인 집착 때문에 결국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두껑까지 열어젖힌다. 한창 불타올라야 할 생의 에너지가 급작스럽게 중단되면서 초래되는 생명의 반발력이 그만큼 강렬했던 셈이다.
창졸간에 사랑하는 젊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은 또한 얼마나 가슴 시린가. 한껏 피어보지도 못한 채 한 순간에 폭삭 스러져 땅 속에 묻히고 만 아들의 무덤을 찾는 부모의 가눌 수 없는 슬픔을 그 누가 감히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 그런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만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슬픔을 가슴 서늘할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한 문학 작품을 통해서나마, 가까스로.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들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러시아의 한 벽촌에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공동묘지가 다 그렇듯이, 이 공동묘지도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다. 공동묘지를 에워싼 도랑은 오래전부터 잡초로 뒤덮였다. 잿빛 나무십자가들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예전에 한번 페인트칠을 했던 십자가 지붕 밑에서 썩어가고 있다. 돌비석들은 마치 누군가가 밑에서 떠밀어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 그러나 그 무덤들 가운데 사람의 손길도 닿지 않고 동물의 발에도 짓밟히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그저 새들만이 그 위에 앉아서 노래를 부를 뿐이다. 철책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고, 어린 전나무 두 그루가 양쪽 끝에 심겨 있다. 이 무덤에 예브게니 바자로프가 묻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이미 노쇠한 부부가 자주 이 무덤을 찾아오곤 한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온다. 울타리에 가까이 다가가서는 무릎을 꿇고 쓰러져 오랫동안 서럽게 울면서 말 못하는 비석을 빤히 바라본다. 그 비석 아래 그들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들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면서 비석에 앉은 먼지를 털고 전나무 가지를 다듬어주다가 다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에 있으면, 아들에게 더 가까이 있고, 아들과 관련된 추억에 더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말로 그들의 기도, 그들의 눈물이 헛된 것일까? 정말로 사랑, 그 성스럽고 헌신적인 사랑이 무력한 것일까? 오, 아니다! ……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 (315∼316쪽)
-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이런 모든 경우를 두루 헤아려 보면, 테디는 살아 있는 동안에 온갖 누릴 거 실컷 누리고 떠난 행복한 녀석이 틀림없다. 더군다나 늙어 죽을 때까지도 병치레는 좀처럼 겪지 않았고. 그러니 이제는 테디를 잃은 슬픔보다 그 녀석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추억할 때도 되었다. 나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은 시간을 테디와 함께 보냈던 사람은 언제나 '테디 엄마'로 불렸던 아내다. 그녀의 슬픔은 나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나 큰 게 틀림없다. 그렇지만 테디 엄마도 오랫동안 테디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만큼, 이제는 테디를 아름답게 추억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까지도 내가 이토록 담담하게 테디에 대한 추억담을 길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런지도 모르겠다. 테디에겐 테디 엄마가 세상의 거의 전부였고, 그런 테디와 다시는 영영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녀석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겪는 아픔이고 슬픔이며, 그 아픈 상처가 다 아물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새 너무 길어졌다. 이쯤에서 가만히 테디를 다시 떠나 보내야겠다. 그 녀석과 헤어지는 마당에,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괜한 부탁 하나 해보고 싶다.
"테디야, 제발 꿈속에서라도 자주 나타나 주렴. 네가 너무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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