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4_희곡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 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나 세르반테스와는 관심의 영역이 달랐다. 즉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신약, 코란 등에서 표현된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그의 수사적이고 창조적인 재능들이 야훼와 예수, 알라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 될 수 있으리라.(367쪽)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


햄릿은 호레이쇼를 찬양하는 데 있어 철저하리만큼 진지하다. 호레이쇼는 엘지노어의 법정에서 클라우디우스(햄릿의 숙부로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인물)가 조종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햄릿은 호레이쇼에 대해 "진정 허다한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마음의 동요가 조금도 없어"라고 말했는데, 이는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관객으로서 작가가 주는 모든 고통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들인가. 한 인간으로서의 호레이쇼에 대해 셰익스피어가 "격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데에는 관객 역시 보다 금욕적이고 현명해지길 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370쪽)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나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발명했다"고 말한 후로 다른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존슨 박사는 "시의 본질은 발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실용적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재발견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초연함은 『소네트』와 『햄릿』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원형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370쪽)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일곱 번에 걸친 햄릿의 독백이 나온다. 관객은 우리와 햄릿, 두 부류다. 따라서 우리는 엿듣고 그를 흉내낸다. 햄릿이든 누구든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의도와 어긋나게 그의 말을 엿듣는다. 야훼나 예수, 알라에 대해서 엿듣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품에 드러나는 기법이다.(371쪽)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


일반적으로 우리는 '천재성'을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정의한다. 때론 거기에 '창조적인 능력'이라는 은유를 덧붙이기도 한다. 햄릿은 작품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 가운데 단연 천재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지적인 힘에 대해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다. 반면 창조의 힘은 대부분 모호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극중 극에 등장하는 왕의 연설이나 무덤에서 햄릿이 부르는 광적인 노래의 경우는 예외로 볼 수 있다.


희곡 『햄릿』은 주인공의 좌절된 창의성, 즉 햄릿 왕자의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사실은 햄릿은 실패한 시인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371∼372쪽)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셰익스피어는 또한 가장 생략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 지나치게 무언가 첨가했다가 그것들을 다시 삭제함으로써 교묘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햄릿』은 대작이지만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372쪽)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


『햄릿』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4막과 5막 사이의 전환에서 하나의 정점을 건드리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햄릿』을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지극히 포괄적인 개념을 말한다.


햄릿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 의식의 고귀성과 파멸을 동시에 내포한 존재다. 또한 동서양, 남녀,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의 지성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지녔다.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였던 것이다.(372쪽)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햄릿』을 다른 문학 작품과 비교하는 일은 어렵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이나 혹은 단테, 초서,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괴테, 톨스토이, 체호프, 입센, 조이스, 프루스트 등이 쓴 뛰어난 작품과의 비교도 또한 어렵다. 『햄릿』은 그 자체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햄릿은 끝부분에 이르러서 실제로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한다. 햄릿이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몽테뉴가 아마 유일하게 유용한 비유가 될 것이다.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위대한 수필 「경험에 대하여」를 쓴 몽테뉴가 5막에 나오는 햄릿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햄릿보다 자신의 지혜에 더욱 관대하다. 5막에서 햄릿이 제 아무리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다 해도 결국 '은총'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성서에서 은총이라는 말을 쓰는데, 내가 말하는 의미는 "무한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더 많은 삶"이다.(373∼374쪽)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햄릿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가 바다에 있을 동안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덴마크로 돌아오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이는 햄릿이 후손에게 전해질 자기 '오명'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강박관념을 보여 준다. 『햄릿』의 독자나 관객은 햄릿이 자신의 추종자 호레이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을 말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서 오명을 회복하도록 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가 햄릿의 모호한 광증의 일시적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햄릿에게는 엄청난 긴장이 가해진다.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가학적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미치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햄릿은 자기가 누구를 죽이는가도 모르는 채 커튼 사이로 검을 찔러 넣어 폴로니어스를 살해했다. 이후에 그는 환희만을 표명한다. 로젠크란츠와 길텐스턴은 기회주의자들이기는 하지만 햄릿이 이유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햄릿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374쪽)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 우리는 "자, 나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 라는 햄릿의 자긍심에 가득 찬 적대감에 전율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자제된 위험은 전적으로 아이러니칼하진 않지만 우리들에게 다음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즉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밝히면서 냉정하게 말한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영국으로 향하고 있네."


햄릿은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습을 본 호레이쇼는 충격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길덴스턴과 로젠크란츠가 그곳으로 가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햄릿이 그들이 죽음에 대해 "그건 그들이 좋아서 한 짓이니까" 라고 말하며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 그들이 햄릿의 예일 대학 동창생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햄릿이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377∼378쪽)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아고처럼 햄릿은 다른 등장 인물들의 삶에 대해 글을 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우리는 이아고에게서는 이런 능력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왜 힘릿에게는 매료되는가? 모든 허구적 인물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복잡한 이 인물의 여러 가지 신비 중 하나는 그가 우리에 대해 카리스마적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념가나 청교도적 도덕주의자가 아니라면 지난 200여 년 이상 동안 보편적 병폐였던 햄릿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378쪽)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


햄릿이 자신의 '오명'을 남기는 고통을 묘사했을 때 무대 위는 그의 어머니, 클라우디우스, 레어티즈 등의 시체들이 널려 있고, 햄릿 역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폴로니어스를 살해했고, 오필리아를 미치게 해 자살로 몰아갔으며, 불쌍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에 이르게 했으므로 그의 이름에 흠집이 날 만했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여덟 명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햄릿'은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경이로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성취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놀라운 재능에 비례해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378∼379쪽)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


셰익스피어는 『햄릿』이후에는 복수극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장르를 작가가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햄릿』은 복수극이 아니라 극장성Theartricalty에 대한 극이다. 햄릿 이전의 그 어떤 서구의 희곡에서도 그토록 '극장성'에 사로잡힌 작품은 없었다. 한마디로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이다.


1막에서 2막 1장은 일종의 복수극이다. 그리고 극 중 극의 배우들이 도착하는 2막 2장에서부터 클라우디우스가 '거짓 불에 놀라서' 「쥐덫The Mouse Trap」에서 도망치는 3막 2장까지는 극장성에 관한 막간극으로 이어진다. 4막까지 계속되는 세 번째 극은 모든 이들에게 각자 의미 있는 만화경 같은 것으로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마지막 5막은 불과 몇 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햄릿이 10년이나 나이 들어 보이고, 부왕의 유령은 기억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부왕도 단지 오랜 기억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햄릿』은 복수의 비극으로 시작해 어느 순간 연극과 배우들에 대한 거친 사색으로 이어지고,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정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초월적 비극 안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새로 탄생한 인간은 죽음이란 스스로를 조롱하고 또한 조롱당하는 것이라는 절대적 자기 인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극 『햄릿』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또한 당혹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러한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379∼380쪽)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독자로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382쪽)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


『햄릿』이라는 극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주인공 자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변화무쌍하다. 모호한 전사-연인-아버지 없는 존재,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383쪽)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이러니를 구사한 작가로, 미묘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도로 지성적인 햄릿만이 존재하는 극을 남겼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 희곡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햄릿이 되고, 그래서 간혹 당혹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확대시켜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햄릿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햄릿은 우리를 그의 의식의 심연 속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에는 이아고나 『리어 왕』의 에드문드 혹은 『겨울 이야기』의 레온테스를 초월하는 허무주의가 존재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셰익스피어는 햄릿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하다. 하지만 단일한 인물로서 셰익스피어 안에 있는 허무주의적 시심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햄릿이다. 이아고는 다른 등장 인물이나 그들의 삶으로 '글을 쓰지만', 햄릿은 배우들을 위해 새로운 글을 쓰고 불가사의한 짧은 노래들을 즉흥적으로 지어 내기 때문이다. 햄릿은 '주제'와 '자세'라는 이중적 면에서 허무주의 시인이다. 독백의 언어에서, 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극들에서, 언어와 자아를 포함해 햄릿은 그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383∼384쪽)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비극이 끝난 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멋지게, 그러나 슬프게 시인이 아닌 배우로 만들었다. 독자들도 햄릿의 시에 매료되면서 그의 연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85쪽)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


200여 년 이상이나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인용되어 왔고, 때문에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낭만주의 시대의 비평가 찰스 램을 대단히 존경하는데,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 일은 제대로 만들지 못한 연극을 관람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창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햄릿의 멋진 독백과 다시금 마주친다면, 절망적인 찰스 램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독자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유명한 구절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아니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구절은 사내아이나 남자들에 의해 연설 투로 너무 거칠게 함부로 다루어지고, 그 살아 있는 장소와 극의 계속성이란 원리에서 그렇듯 비인간적으로 괴리되어 있어서 내게는 완전히 죽은 대사가 되고 말았다.


일곱 개 중 세 번째인 '사느냐 죽느냐' 독백은 지식과 행위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이 부분은 햄릿이 극에서 왕 역할을 하는 배우를 위해 쓴 대사의 절정을 이루며, 또한 다음 위대한 시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의 매듭을 지으려 하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므로

계획은 언제나 무너지게 마련이지.

생각은 우리 자신이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오.    ㅡ 3막 2장 (386쪽)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햄릿은 의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우리는 행동할 의지가 있는가?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인가? 의지의 한계는 무엇인가? 햄릿의 광대한 의식은 사고의 끝이 무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종말을 의도한 모든 관련된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충분히 인식하는가?


니체가 인식하듯이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이다. 햄릿은 예술을 향하지 않으면 진실에 의해 죽을 것이다. 햄릿은 귀족 중에서도 왕족이므로 지성적인 행위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결단의 선명한 색채가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짐으로 녹슬고 만다.

지극히 중요한 거대한 과업도

이 때문에 그 흐름이 틀어지고

실천의 힘을 잃고 마는구나.                                         ㅡ 3막 1장 (387∼388쪽)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햄릿은 극의 결말 부분에서 살육이 있기 전에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길 승산이 있어. 그러나 자네는 내 마음에 얼마나 악이 들끓고 있는지 모를 거야." 이는 자신의 훼손된 이름을 남기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암시한다.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지금 와 버리면 장차 오지 않고, 장차 오지 않으려면 지금 올 것일세.

만일 지금 와 있지 않다면, 결국엔 올 것이라니까. 모든 것은 각오일세.       (389쪽)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


햄릿의 영혼은 의지에 차 있으며 육신도 약하지 않다. 그는 자기의 음악에 맞춰 특이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냥 내버려 둬." 세속적인 문학에서도 이것만큼 독자를 사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왜? 햄릿이 마지막으로 "이젠 침묵이야"라고 한 말은 정신적으로 매우 모호하지만 나는 그 말은 부활이 아닌 몰락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양으로 죽는 게 아니라 훼손된 이름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채 죽는다. 몰락과 부활, 어느 쪽을 기대하든 간에 우리는 각자의 이름이나 명예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독서를 끝낼 가능성이 높다. 모든 허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 넘치고 지적인 햄릿은 누구나 겪게 될 종국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보여 주었다.(389쪽)

































 

















헨릭 입센(1828∼1906)


만일 입센이 페미니스트라면


내가 쓰는 글에는 트롤Troll이 있는 게 틀림없다. ㅡ 입센


나는 내 자신이 의식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일한다는 명예로운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ㅡ 입센


만일 입센이 페미니스트라면 나는 가톨릭 주교다. ㅡ 제임스 조이스



헤다의 자기 파괴 안에서 와일드 자신의 파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


오스카 와일드는 공연 <헤다 가블러>를 본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희랍 비극을 본 것 같은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1891년 와일드는 그 연민과 공포의 감정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그가 워낙 영민하므로 헤다의 자기 파괴 안에서 와일드 자신의 파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헤다만큼 마음에 든 인물이 있었을까


우리는 헤다가 자살을 찬양하는 가운데 클레오파트라만큼 우아하진 않지만 아름답게 목숨을 끊었으리라 확신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적인 순교자도 아니고 무대 역시 클레오파트라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 비해 훨씬 좁지만, 헤다는 입센 시대의 노르웨이에서 중산 계급의 숨막히는 도덕성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만일 그녀가 이아고만큼 우리를 놀라게 하지 못했다면 뢰브보리도 결코 오델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입센은 거친 아이러니로 헤다 주변을 이류 인간들로 둘러싸이게 했다. 그들은 헤다의 아름다운 사악함의 완전한 잠재력에 그 어떤 자극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지난 100여 년간 작품 속의 그 어떤 인물 중에서도 헤다만큼 마음에 든 인물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 체호프의 작품에 나오는 여 주인공들도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고통당하고 또 고통을 가하는 헤다는 우리 가까이에 널려 있다. 입센은 글을 쓸 때 책상 위의 컵에 전갈을 두고 멜론을 먹여 키웠다고 한다. 치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헤다 가블러는 바로 이런 작가의 감성의 산물이 아닐까.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셰익스피어의 『12야』이래 영국 최고의 희극


셰익스피어 이후, 대부분의 걸작 희극은 아일랜드 작가들의 작품이다. 윌리엄 콩그리브의 『세상의 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정복을 위한 굴복』, 리차드 브린슬리 셰리단의 『스캔들 학교』,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오스카 와일드의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존 밀링턴 싱의 『서방 세계의 플레이보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등이 그러하다.


와일드의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은 위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셰익스피어의 『12야』이래 영국 최고의 희극이다. 이 작품은 신선함이 가득한 기적 같은 작품이며, 와일드가 쓴 두 편의 수필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거짓말의 부패」만큼 훌륭하다.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의 은밀한 뜻은 '창작'


와일드는 자신의 최고의 희곡 제목을 『무관심한 것의 중요성』이라고 지을 수도 있었다. 앞서 살펴보 것처럼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의 은밀한 뜻은 '창작'이었다. 독창적이라는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을 위한 무관심한 거짓말이다. 와일드는 이 극의 철학에 대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든 사소한 일에 매우 진지해야 한다. 그리고 삶의 모든 심각한 일은 '성실하고 의도된 사소함'으로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알거논의 음식에 대한 관심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난 음식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 인간들을 증오해. 너무 가벼운 짓이거든."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이 비평의 핵심인 까닭


보르헤스는 "와일드는 언제나 옳거나 아니면 거의 언제나 옳다"고 말했다.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아더 사이먼스가 언급했듯 와일드는 희곡 작가면서 뛰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다. 그는 인용에서 언제나 독창적이었다. 또 와일드는 품위 있는 자서전 작가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이 비평의 핵심인 까닭이다.



레이디 브랙넬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만일 입센이 헤다 가블러라면, 와일드는 레이디 브랙넬이라 할 수 있다. 터무니없는 그녀의 행동은 극중 그 누구보다 앞서 있다.


레이디 브랙넬: (자신의 시계를 꺼내며) 봐라, 얘야. (그웬돌렌이 일어선다) 벌써 우린 여섯 아니 다섯 대의 기차를 놓쳤다니까. 하나만 더 놓치면 정류장에 적힌 글이나 읽고 있을 거야.


나는 이 구절을 『서구의 정전』이라는 책의 권두에 인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편집자들의 반대로 책에 싣지는 못했다. 나는 위의 구절이 2000년대의 독자들, 진정으로 정전이 될 만한 창의적 문학에 시금석이 되리라고 보았다.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읽을까? 우리는 레이디 브랙넬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류장에서 그웬돌렌과 그녀의 어머니를 보고 있는 그 누구도 모녀가 다섯 혹은 여섯 대의 기차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기차를 놓치거나 한 건지조차 알 수 없다. 레이디 브랙넬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전 세계가 자신의 관객이며 일정 관리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그녀와 희곡의 익살맞은 위대성인 까닭에 우리는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성』을 계속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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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3_장편소설


훌륭한 소설의 등장 인물은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초상화


크게 소리내어 상대에게 책을 읽어 주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앞에 앉아 있다 해도 독서는 사회적인 행위로 바뀌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읽은 이유는 수많은 등장 인물들과 스토리, 작가들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소설이 사라질 운명이라면 우리 모두 그 세계의 미학과 정신적인 가치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 지난 18,9세기에 그랬듯이 눈앞에 펼쳐질 제3의 천년에는 미학적 즐거움과 영적 통찰을 위해서 우리 모두 소설을 읽어야 한다. 훌륭한 소설의 등장 인물은 페이지를 차지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초상화다. 소설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묘한 아이러니


조이스는 『피네건의 경야』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열렬했던 관객들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한탄했지만, 내가 볼 때는 이 새로운 영상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마저도 소멸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프루스트도 사라질 것이다. 기묘한 아이러니다. 이런 지독한 시대에 소설이 많은 독자를 확보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소설들이 암울한 이 시대 상황을 짊어진다 해도, 우리는 다시 책장을 넘겨야 한다.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1547∼1616)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바스크 혈통 작가이자 세르반테스 비평가 미구엘 드 우나무노에게 『돈 키호테』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자, 하나님 그 자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걸핏하면 다투지만 늘 화해한다. 사랑과 충성심, 돈 키호테의 무지, 경탄할 만한 산초의 지혜들 속에서 둘은 관계를 유지한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는다. 리어 왕도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기울인 법이 거의 없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때로는 아주 즐거운 듯 보이지만 아예 서로의 말을 들을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 본인의 경우는 벤 존슨과 함께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자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


『돈 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금방이라도 파탄 날 정도로 싸워 대다가 곧 예의바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상대가 하는 말에서 뭔가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변화, 다시 말해 자아를 심화시키고 내재화하는 작업이 서로간에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


허클베리 핀은 짐에게서 자신의 산초를 발견했기 때문에 고독으로 시들어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허무주의적인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이아고적 속성 안에서 반反 산초 판자와 마주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시킨 왕자와 돈 키호테의 고상한 "광증"은 비슷하다. 세르반테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내게 생명을 달라!"


우나무노는 『돈 키호테』가 삶의 비극적 의미를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광증"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각각 다른 시대에 죽음을 예찬한 스페인적 기질에 대한 항거였다. 그는 터키와의 레판토 해전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비록 이런 상처뿐인 전사라도 세르반테스 내부에서는 언제나 폴스타프와 함께 이렇게 외친다. "내게 생명을 달라!" 나는 우나무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작품의 즐거움은 전적으로 산초 판자의 위대성에 있으며, 산초는 폴스타프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누지와 함께 우리 속의 죽지 않는 무엇에 대한 또 다른 예라고 볼 수 있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독자들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처럼 세르반테스도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며, 활동적인 독자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 갇힌 사자와 마주친 돈 키호테는 사자들이 공격할지 어떨지 알고 있다.


그리고 돈 키호테, 산초와 함께 여행을 해 온 활기 넘치는 독자들은 등장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의 지식을 공유한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이는 그들이 비평가가 되어서 자신의 모험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이 소설의 제2부에서 세르반테스의 이토록 비상한 이야기 솜씨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20여 편이 넘는 위대한 희곡 작품들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는 놀라운 기법을 사용했다. 독자와 관객은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2부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기법을 창안해 냈다. 그리고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을 창안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환상으로 들어가는 틈새를 잘라 버렸는데, 이는 돈 키호테와 산초가 1부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2부를 통해 다시 언급했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는 바로크적이고 지적이여서 마술사들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다. 세르반테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표절자요 사기꾼들로 자신을 대신해 소설을 끝내려는 존재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


토마스 만은 돈 키호테에 관해 말하면서 "자기 칭송에 대한 영광으로 사는" 독특한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산초는 너무나 영민한 나머지 거기까지 나갈 수는 없었다.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세르반테스라는 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으로서 권위를 가졌다. 그 권위의 궁극적인 상속자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더욱 진전시켰다.


또 다른 계승자로 『율리시즈』의 제임스 조이스를 들 수 있으며, 그와 프루스트의 사도며 『몰리』,『말론 죽다』, <무명> 3부작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있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


『돈 키호테』를 읽는 일은 즐겁다. 나는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측면을 언급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 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탕달(1783∼1842)


스탕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공범이 되고 만다.


『보바리 부인』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처럼 거대한 스케일이며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작품이다. 그러나 하워드가 지적했듯이 고정된 형식이 없는 스탕달의 작품은 다시 읽어야 한다. 아마도 스탕달보다 더욱 셰익스피어적이었을 프루스트도 스탕달을 사랑했으리라. 왜냐하면 플로베르와 달리 스탕달은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우리는 왜 스탕달을 읽는가? 내가 흠모해 마지 않는 그 어떤 작가도 우리를 공모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탕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공범이 되고 만다.


발자크는 『파르마의 수도원』을 "단 한 페이지에 책 전체를 담고 있다"고 격찬했다. 둔감한 독자들은 적잖이 당황하겠지만, 만일 당신이 어떤 풍미를 지녔다면 그 소설은 당신을 윟나 것이다.『파르마의 수도원』은 과장된 로맨티스트에게서나 가능할 법한 광기가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과 18세기 초엽 이태리로의 복귀, 즉 메테르니히가 워털루 전쟁 이후 복구하려던 셰계의 일부를 연대기화했다.



욕망의 무의식적인 진실을 찾는 형이상학자에 더 가까운 듯


스탕달은 항상 이성애적인 사랑의 심리학을 다룬다고 평가되었지만, 내가 볼 때는 욕망의 무의식적인 진실을 찾는 형이상학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열정적 사랑의 중심과 사랑에 빠졌을 때 병적인 면을 제외한 전부에는 허영심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았다. 스탕달 때문에 불안정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은 사랑에 빠지면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제인 오스틴(1775∼1817)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제인 오스틴을 능가할 작가는 없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논할 때, 단편이나 시보다는 장편소설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소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사회 개혁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제인 오스틴을 능가할 작가는 없다.



위선의 제거라는 점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오스틴은 존슨 박사만큼 현명한 작가였다. 오스틴은 존슨 박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마음에서 "위선"을 없애라고 충고한다. "위선적"이라는 것은 진부한 어투, 지나치게 경건한 표현과 집단적인 사고들을 가리킨다. 위선의 제거라는 점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오스틴의 작품을 "정치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녀를 떠나 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함께 오스틴도 여성이 창의적인 면에서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 폴스타프, 이아고 등의 남성들을 창조했고 로잘린드, 포오샤, 클레오파트라 같은 여성 인물들도 보여주었다. 따라서 나는 셰익스피어가 남녀 모두에게 영예를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찰스 디킨스(1812∼1870)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표도르 미카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영웅ㅡ악당의 살인에 우리가 공모하도록


도스토예프스키는 셰익스피어처럼 영웅ㅡ악당의 살인에 우리가 공모하도록 만들었다. 『맥베드』와 『죄와 벌』은 공포와 연민의 정마저도 없애 주지 못하는 전율적인 비극이다.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를 전도시켜서 음침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우리는 맥베드의 이 끔찍한 숭고함을 공유하기 때문에 악몽 같은 환영이 현실이 되는 음습한 페테르스부르그의 여름을 겪으면서도 『죄와 벌』을 읽으며 절망을 초월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벽들은 추악한 노란색이며 현대 대도시의 공포는 보들레르나 디킨스에 필적하는 강렬함으로 묘사된다. 마치 맥베드의 마녀들이 사는 스코틀랜드에서처럼 라스콜리니코프의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우리 역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죄와 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무엇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살인자가 되도록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성품의 젊은이로 근본적으로 품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뛰어난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라스콜리니코프는 남을 억누르기로 잘 알려진 스탈린 시대의 인민 위원들의 전례"라고 말한 사실에 감탄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악마적 패러디인 스비드리가일로프처럼 자기 처벌자이지만, 그의 매저키즘은 나폴레옹이 되고 싶다는 공언된 욕망과 일치하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가보다는 날카로운 예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죄와 벌』은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결함, 즉 어떤 특정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당파심이 강해서 맹렬한 관점이 언제나 글에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그의 계획은 나자로처럼 허무와 회의에서 독자들을 일으켜 세워 러시아 정교로 개종시키려는 것이다.


체호프나 나보코프 같이 뛰어난 작가들도 그의 그런 태토를 참을 수 없어했다. 그들이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가보다는 날카로운 예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죄와 벌』을 매번 읽을 때마다 강력하고 사악한 시련을 발견한다. 마치 맥베드 자신이 쓴 『맥베드』같은 느낌이다.


















헨리 제임스(1843∼1916)


정치적 인식은 더욱 보잘것없는 소득일 뿐


왜 『여인의 초상』을 읽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는데, 무엇보다 독서를 통해 소득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의식을 육성하는 일은 독서의 주요한 이유다.


특히 정독은 주된 소득이 될 것이다. 독서에서 열정과 통찰은 독자들이 얻는 고양된 의식의 속성이다. 사회적인 정보는 과거나 현재에 상관없이 독서의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고 정치적 인식은 더욱 보잘것없는 소득일 뿐이다.



너무 귀중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의식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여인의 초상』은 우리가 면밀히 읽고 그것과 교감해 주길 원한다. 우리는 이사벨의 선택에 대해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왜 읽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즉 너무 귀중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의식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고전의 최종적인 빛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고전의 최종적인 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의미와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드러난 절대적인 창의성과 마주친다면 어떨까?


이 광대한 소설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이 1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마르셀은 젊은 시절 프루스트의 초상으로, 19세기 마지막 10년부터 프루스트가 죽은 1922년까지 프랑스 사회의 미로 같은 회고담을 들려 준다. 이 소설의 주제는 다양하다.


미학과 아름다움, 매춘굴, 산 사람에게 들러붙은 죽은 자, 의상,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하여 우정, 습관, 남녀의 동성애적 도착, 질투, 문학, 그리고 서술자의 소설가로의 점진적 진화, 성적 질투심만큼이나 널리 퍼진 기억, 사디즘적 마조키즘, 바다, 잠, 그리고 시간 …



성적 질투심을 극화시키는 데 뛰어난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


니체는 가장 햄릿적인 진술의 하나로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말을 찾아 내면 그것은 이미 우리 마음 속에서 죽어 있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말하는 행위에는 일종의 경멸감이 들어 있다. 프루스트는 셰익스피어와 달리 이 경멸감에서 자유로웠다. 주요 인물들은 프루스트의 관대함을 나타낸다. 이기적 에고이즘은 셰익스피어만큼이나 프루스트의 성적인 질투심으로 표출하는 강한 관심이다.


감히 말하건대, 소설을 읽으면 질투가 완화된다. 그 가운데 성적 질투심이 가장 독성이 강하다. 이런 성적 질투심을 극화시키는 데 뛰어난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였다. 따라서 소설이란 '성적 질투심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고 축소해 볼 수 있다.



소설로부터의 탈피는 지혜의 문학에 대한 거부


프루스트는 우정이란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권태로움의 중간"에 있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에게 현실이 얼마나 작은가를 보여 주는 두드러진 예"라고 말했다. 니체는 거짓을 소모적이라고 경고한 반면, 프루스트는 "완벽한 거짓말"은 새로움을 여는 것이라고 찬양했다.


앞에서 진지한 소설 독자가 점차 줄어든다고 말했는데, 나는 프루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소설로부터의 탈피는 지혜의 문학에 대한 거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프루스트는 그 인물들을 시간의 신성들로 간주하며 우리에게 회고적 신성과 질투심을 보여 주는데, 이 두 감정은 실은 하나다. 프루스트의 남녀 주인공들은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성적 질투심과 투쟁에 사로잡힌 신들이다.


프루스트의 치유 능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읽은 글 안에서 길을 잃곤 했던, 50년 전 방식대로 읽을 수는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토마스 하디의 『숲속의 사람들』에 나오는 메리 사우츠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을 때 나는 지독한 슬픔에 잠겼다. 작품 속의 여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현실은 어떤 경험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프루스트의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소설을 읽을 것인가?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시간과 장소에서 한계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되면서도, 프루스트적인 삶의 축복을 보여준다면 질투에 사로잡혀 읽게 된다.



















토마스 만(1875∼1955)


우리에게는 보다 더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


『아이러니의 개념』을 쓴 덴마크의 종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논쟁의 여지없이 셰익스피어를 아이러니의 대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고의 아이러니스트라 일컫는 세익스피어조차 햄릿이라는 인물 속에서 진실하면서도 이상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전혀 없을 수도 있으리라. 독자들은 『마의 산』을 읽고 난 뒤에 카스토르프라는 인물에 대해 알 것이다. 그는 분명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마의 산』을 다시 읽으면서 만의 위대한 아이러니는 그가 카스토르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자들은 카스토르프가 매력적인 젊은이긴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장편소설 1부_요약


주요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가?


조만간 그 형태마저 사라질지도 모르는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떤 통렬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뛰어난 소설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이러한 교훈은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을 변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기-엿듣기를 통한 셰익스피어적 변화의 패턴이 지배하지만, 만의 『마의 산』에서 카스토르프는 세르반테스의 계획을 따르며 자유주의 철학자 세템브리니는 그러한 카스토르프에게 지적인 산초 역할을 한다.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 변화란 로마 시인 오비드보다 중세의 영국 시인 초서의 뒤를 잇는 위대한 발명이다. 오비드는 초서, 크리스토프 말로와 함께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햄릿, 리어 왕, 안토니, 클레오파트라 같은 인물들이 변화한 것은 남의 말을 읏듣듯이 자신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는 자신의 갑옥솨 투구를 들고 다니는 에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로스, 그대는 내가 보이는가?"


자기가 한 그 말을 스스로 엿듣게 된 안토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자신이 의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우리가 아주 좋은 책에 귀 기울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독자들도 본인에 대해 엿듣고 놀란 후에, 자신이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인식하고 반성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영어나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좋은 친구와의 밀접한 대화를 통해 쉽게 자기 반성으로 이어지며 결국 정신적 변화를 초래하는 세르반테스적 양식에 의해서 더 많이 변한다.


스탕달, 제인 오스틴, 도스토예프스키, 헨리 제임스, 프루스트 등은 셰익스피어의 패러다임을 좇았던 반면, 디킨스나 토마스 만의 경우는 모파상, 칼비노와 함께 세르반테스적 양식에 더 가까운 작가들이다.


앞서 언급했던 투르게네프, 체호프, 헤밍웨이, 보르헤스 등은 셰익스피어에게 더 큰 영향을 받은 단편 소설의 대가들이다. 또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할 미국 작가들도 토마스 핀천을 제외하고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았다.


훌륭한 독서가 세르반테스의 양식처럼 우리에게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우리가 아주 좋은 책에 귀 기울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최상의 서정시도 남에게 말하는 법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깊고 꾸준한 독서만이 자율성 있는 자아를 세워 주고 확대시켜 준다는 것


외로운 독자는 사라져가는 족속이다. 또한 더할 나위없는 고독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깊고 꾸준한 독서만이 자율성 있는 자아를 세워 주고 확대시켜 준다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 되지 못하면 남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고대 랍비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었던 힐렐의 충고를 늘 기억한다.


"만일 내가 날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해 줄 것인가? 그리고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또 그 언제인가?"



플로베르는 "내가 보바리 부인이다"라고 고백했다.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나 『율리시즈』의 조이스 같은 소설가는 등장 인물의 뒤에 있는 '수수께끼의 저수지'에 몸을 담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묘하게도 산초와 돈 키호테를 창조한 것을 드러내 놓고 찬양하는 세르반테스보다 더 깊이 인물과 동일시되어 있다. 플로베르는 "내가 보바리 부인이다"라고 고백했다. 조이스 역시 레오폴드 블룸(『율리시즈』의 주인공 이름)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고도의 기법을 구사했지만 결국에는 꿋꿋하고 인간적인 폴디와 하나가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소설을 처음 읽으면 단순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위대한 유산』이나 『파르마의 수도원』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전혀 다른, 혹은 보다 나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누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책을 읽고, 소설 속의 마음에 드는 인물과 동질성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의 『마의 산』은 그러한 동일화의 즐거움이 나이에 관계없이 독서라는 경험의 합법적 일부라고 앞서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즐거움이 비록 중년 이후에는 단순한 것에서 감상적인 것으로 될지라도 말이다.


현명한 수동성

거대한 문학을 접했을 때, 이를테면 단테의 『신곡』이나 헨리 제임스의 『비둘기의 날개』같은 작품에 미리 위축되거나 두려워하면 우리의 이해와 즐거움은 파괴되고 만다. 책을 펴는 순간 권력에의 의지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의지는 우리가 독서에 몰두하고 작가에게 관심을 빼앗긴 후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물론 잘 읽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방법에는 관심의 수용이 관련되어 있다.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워즈워스가 말한 "현명한 수동성"이 좋은 독서가 요구하는 관심과 최상의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1819∼1891)

에이허브는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 버금갈 만한 미국적 영웅

에이허브는 분명한 셰익스피어적 인물이다. 그는 리어 왕이나 맥베드와 비슷한데,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 맥베드의 영웅-악당의 모습을 동시에 지녔다. 아홉 살 때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에이허브는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 버금갈 만한 미국적 영웅이었다. 그는 자신과 모든 선원들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물론 소설을 이끌고 있는 화자는 유일한 생존자인 이스마엘이지만 말이다.


이후의 어떤 작가도 필적할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적 저항의 틀을 만들었다

에이허브는 자신의 신성한 자아를 주장하고 불을 숭배하는 일이 옳은 것이었다. 에이허브는 "만일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부셔 버리고 말겠다!" 라고 외치며 이후의 어떤 작가도 필적할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적 저항의 틀을 만들었다.

에이허브 선장에 댛나 짧은 분석으로 『백경』을 다룬 것은 이후 논의하게 될 모든 미국 작가들의 등장 인물 가운데 선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의 마음을 깊이 품었던 멜빌의 서사에 대해서 열정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핀천(1937∼2004 현재)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

독자로서 내 경험에 따르면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첫 번째 독서 어딘가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 그 의미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그 멋진 부패함에 이끌려 읽자마자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는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에 이해를 덧붙일 수 있었다.

반면『49호 품목의 경매』를 처음 읽었을 때 분노 자체였다. 그러나 두 번째 읽으면서 순식간에 그것에 사로잡혔는데 그 감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고로 나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두 번 정도는 읽었으면 한다.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




















코맥 매카시(1933∼2004 현재)


『피의 오후』는 진정한 의미의 계시적 미국 소설


『피의 오후』는 진정한 의미의 계시적 미국 소설이다. 이 작품은 발표되었던 15년 전보다 오히려 2000년에 더 적합해 보인다. 코맥 매카시는 멜빌과 포크너의 뛰어난 사도라서 『백경』이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명성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감히 말하건대, 핀천을 포함해 살아 있는 미국의 어떤 소설가도 『피의 오후』만큼 강력하고 기념비적인 소설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인내해야 한다.

나는 독자로서 『피의 오후』를 완독하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매카시가 그려 내는 잔혹한 학살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폭력은 열다섯 살의 소년이 등과 심장 아래 총을 맞는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30년 뒤 홀든 판사가 옥외 화장실에서 키드를 살해하는 순간까지 잔혹함이 이어진다. 『피의 오후』에서 보여 주는 살인과 살육은 1999년 코소보의 폭력에 대한 유엔 보고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인내해야 한다. 『피의 오후』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보편적인 '피의 비극에 대한 정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창의적인 성취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홀든 판사는 셰익스피어의 이아고처럼 교활하며 악마적인 전쟁 이론가다. 이 작품은 뛰어난 언어, 풍경, 인간과 개념들이 폭력을 넘어 멜빌이나 포크너의 셰술에 견줄 만한 잔인한 공포의 미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랠프 월도 엘리슨(1914∼1994)


의미있는 산문은 큰 소리 내며 읽을 필요가 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질감에서 『백경』이나 『내가 죽어 누어 있을 때』만큼이나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읽어야 한다. 의미있는 산문은 큰 소리 내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보상은 엄청나다. 이 소설은 정치와 이념을 초월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다. 그 의무란 미국이 아프리카 계열 아메리칸의 노예제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현대의 니네베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파괴를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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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2_시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


시란 들리는 게 아니라 엿듣는 것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 엿듣기'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특별한 독창성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글을 쓰다가 갑자기 테니슨과 동 시대인이며 철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의 글이 떠올랐다. 그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수필에서 모차르트의 아리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엿듣는다고 상상한다" 밀은 "시란 들리는 게 아니라 엿듣는 것"이라고 했다.
















월트 휘트먼(1819∼1892)


휘트먼과 디킨슨이야말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인들


테니슨, 브라우닝과 동 시대를 살았던 미국 시인은 월트 휘트먼과 에밀리 디킨슨이다. 두 시인 모두 독창적인 작가였기 때문에 영국적 전통과는 매우 느슨한 관계였다. 내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독서하는 이유가 자아를 강화시키는 데  있다면 휘트먼과 디킨슨이야말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인들이다.


에머슨이 창시한 '자립'과 관련된 미국적 종교는 휘트먼과 디킨슨의 시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에머슨은 자기 신뢰를 설파했다. 그는 자기 밖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했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는 에머슨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결과 였다. 한편 에밀리 디킨슨의 서정시들은 '자립'의 철학을 셰익스피어 이후 그 어떤 시보다도 높은 의식의 차원으로 고양시켰다.



"풀잎이 뭐죠?"



눈부시고 거대한 일출에도 나는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나 언제나 내 안에서 그 일출을 내보낼 수 있으니.


우리도 태양처럼 눈부시고 거대하게 떠올라

동틀 녘의 고요와 서늘함 속에서 우리는 오 나의 영혼을 발견했다.


이 숭고한 일출 속에서 월트 휘트먼의 인격인 '나'는 영혼과 자아 일체인 '우리'가 된다. 모든 미국의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심지어 에밀리 디킨슨과 헨리 제임스를 능가하는 휘트먼은 자기 영혼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한계까지도 넘어선다. 자연과 휘트먼 사이의 문제는 지배다. 바로 거기에서 시인은 결말에 이른다.


위의 구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지금이나 언제나"라는 표현의 대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위대한 자립의 선언이기도 하다. 나에게 "왜 읽는가"라는 질문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나의 노래」를 깊이 읽으면 우리는 "그 무언가는 알 수 없는 것이다"라는 진실에 도달한다. 한 아이가 휘트먼에게 묻는다.


"풀잎이 뭐죠?"


시인은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그 아이만큼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시인을 자극해서 그는 다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멋진 비유적 표현을 쓰게 된다.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우리 안에 깊숙이 주입된 관습들을 단절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에밀리 디킨슨은 사회적으로 상류 계층에 속해 있지만 그녀의 대표적인 시들은 서구 사상이나 문화의 계속성과는 단절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가장 위대한 동 시대 미국 작가인 휘트먼과 대조를 이룬다. 휘트먼은 그의 스승인 에머슨의 뒤를 이어 형식이나 시적 태도 면에서 근본적인 혁신을 일궈 냈다.


반면 디킨슨은 셰익스피어나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해 냈다. 따라서 디킨슨의 작품을 읽으려면 그녀의 독창적 인식을 파악해야 한다. 그 보상은 독특하다. 디킨슨은 우리가 보다 창조적으로 사고하고 우리 안에 깊숙이 주입된 관습들을 단절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식하게 해 준다.



이 시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비상한 '자립' 정신


그대 떠나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니

제 아무리 절대적이어도 나는

그대가 지나 온 길을 바라보려네ㅡ


죽음은 종말이어라,

처음 일어나는 일이라도.

이 순간이여 멈추어라

죽음을 넘어서서


살아 왔음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했음은

신이라 할지라도

파괴할 수 없으리니


영원, 추정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그대, 존재였으나

이제 사는 법을 잊었노라ㅡ


"현재의 삶"은 이렇게 되리라

내가 몰랐던 어떤 것ㅡ

거짓된 낙원

그대의 왕국이ㅡ


"미래의 삶"은, 내게,

너무도 소박한 집

내 구원자의 얼굴에서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대 자신의ㅡ


그가 나와 맞바꾸려는

의심 많은 불멸성과

그대의 어두운 얼굴로

그 외의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천국과 지옥에 대해 나는 또한

비난의 권리를

이 얼굴을 그의 귀중한 친구와

교환하려는 아무에게나 주고자 하네.


그가 인정하듯 만일 "신이 사랑이라면"

울는 그러함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질투심 많은 신"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듯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다면

그가 시인하듯이

그는 결국 우리에게 반환하리라.

우리의 빼앗긴 신들을ㅡ



그녀는 죽어가는 자기 연인에게 그 시를 쓰는 순간 "멈추어라/ 죽음을 넘어서"라고 요구한다. 그녀는 죽음이나 신과 다투는 게 아니라 이제 떠나려는 연인과 다투는 것으로 이어서 상실을 위로하는 전통적인 지혜와 맞서게 된다.


이 위대한 시(「시 1260」)를 큰 소리로 읽으면 디킨슨의 신비로운 힘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설익은 위안을 거부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비상한 '자립' 정신에 있다. 이 점에서 디킨슨과 휘트먼의 스승인 에머슨에 필적할 만하다. 파괴적 신의 힘을 넘어서서 마치 찬송가처럼 위의 「시 1260」은 네 줄로 된 10개 연들을 통해 사랑이 찾아 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햄릿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말은 세익스피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뜻


보르헤스가 이야기했듯이 세익스피어는 모든 사람인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닌 까닭에 그의 소네트 역시 자전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개성적이면서 비개성적이며,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양성애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애적이고, 상처입었으면서도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더욱 쓸모없는 문학적 도그마, 즉 한 편의 시를 말하는 '나'는 한 인간이기보다는 언제나 가면 혹은 페르소나라는 믿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증장하는 '나'는 극작가이면서 배우인 셰익스피어, 폴스타프, 햄릿, 로잘린드, 이아고, 클레오파트라 등의 인물을 창조한 세익스피어 자신이다. 그의 소네트를 읽으면 우리는 햄릿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어떤 극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햄릿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말은 세익스피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작가라 해도 자신이 완전한 창조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네트 속의 셰익스피어와 햄릿, 폴스타프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는 자기 모습을 완전하게 느러내지는 않아도 대충이나마 자신을 보여 준다.



이 시의 맹렬한 에너지는 계속되는 욕망과 욕정의 파멸을 예언한다.


「소네트 129」에서 분노는 통제된 열정으로 나타난다. 소네트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거무스름한 여인의 배신을 암시하는 개탄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황폐한 수치심 속에 소모된 정신은

끓어오르는 육욕의 결과; 그처럼 끓어오르기 전에는

거짓되고, 살인적이며, 잔인한 수치덩어리.

야만적이고, 극렬하며, 무례하고, 잔인하며 믿을 수 없는 것;

즐기자마자 멸시받는 것;

정신없이 쫓다가 잡자마자,

정신없이 미워지는 것, 삼킨 자 더욱 미치게 하려고

일부러 놓아 둔 미끼를 삼킨 것처럼;

쫓을 때도 미친 짓, 얻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

차지했을 때, 차지하고 있을 때, 차지하려 할 때, 언제나 극렬한 것;

할 때는 황홀경, 하고 난 뒤에는 비애감.

전에는 눈앞의 행복, 후에는 허망한 꿈.

이 세상 사람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은

남자를 이 지옥으로 이끄는 천국을 피하는 일.


이 시의 맹렬한 에너지는 계속되는 욕망과 욕정의 파멸을 예언한다. 시에는 등장하는 인물이 없다. 잘생긴 젊은이는 먼 곳에 있고 거무스름한 여인은 암시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 소네트에서는 욕망이 암흑의 정신을 지닌 주인공이자 악당인 셈이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부분에 지옥에 대한 남자들의 욕망을 묘사하는데, 지옥Hell은 엘리자베스와 자코비언 시대에는 여성의 성기인 '질'을 뜻하는 은어였다.



















존 밀턴(1608∼1674)


밀턴은 우리에게 명상을 요구한다. 그는 학식 있고 암시적이며 심오하다.


사탄은 혼재된 에너지와 활력의 화신이지만 둘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신이여 그대가 악이오!"


우리는 이단적 프로테스탄트의 환상적이고 급진적인 종파에 속했던 밀턴이 교묘하게도 사탄을 영웅적이며ㅡ고전적인 방법이 아닌 셰익스피어적인 방식으로ㅡ동시에 인간적이고 천사적 본성에 대한 저열한 관점을 지닌 교활한 교황주의자로 만들 것을 기대할지 모른다. 이 멋진 사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거대한 과학 소설로 보일지도 모른다. 영화로 만들어진 <실낙원>을 보는 핵심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영화 감독 세르게이 마카일로비치 에이젠스타인은 「실낙원」이 얼마나 예언적인 작품인가에 대해 지적했다. 아주 멋지게 몽타주 기법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실낙원』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오날날의 시각 정보화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 시대는 셰익스피어와 디킨스, 제인 오스틴만이 텔레비전과 영화로의 변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밀턴은 우리에게 명상을 요구한다. 그는 학식 있고 암시적이며 심오하다.


밀턴의 『실낙원』은 우리 시대의 제임스 조이스와 보르헤스처럼 바로크적 언어의 풍부성과 시각적 명료성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두 개의 특성을 쉽사리 스크린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시대 영화의 희미한 몽타주들은 『실낙원』을 수용하기 힘들 것 같다.


밀턴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독자들에게 근본적인 명상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적인 색채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처럼 인식 가능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디킨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기괴함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 인물들은 신이나 천사, 이상화된 사람, 예를 들면 아담, 이브, 삼손 등이다. 이곳에는 가장 인상적인 모습의 사탄이 있다. 사탄은 지옥의 불타는 호수에서 깨어나 겁먹고 상처입은 추종자들에 둘러 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탄은 그들과 더불어 천국의 전쟁에서 그리스도에게 패했다.


밀턴의 그리스도는 마치 패튼 장군처럼 장갑차로 무장한 천사 군단을 이끌고 현대 이스라엘군의 머카바 전차라고 할 수 있을 아버지 하느님의 불타는 전차에 올라 불과 분노로 반역의 찬사들을 심연으로 몰아넣었다. 불 붙은 그들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 충격으로 지옥이 더 불타올라 혼돈의 영역으로 변한다.


만일 독자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사탄과 파멸한 그의 군단과 함께 눈을 뜨면 어떤 느낌이겠는가?



그대가 혹 그라면 ㅡ 아 그러나 어찌 떨어졌느냐.

어찌 변했느냐! 행복한 광명의 세계에서

그대는 찬란한 섬광의 옷을 떨쳐 빛났거늘.

만일 그라면 일찍이 서로 손을 잡아 생각과 뜻을 한데 묶어

한 희망과 모험 속에서 영광의 큰 계획을

일찍이 함께 나누었건만 지금은 비참한 재난이

똑같은 파멸로 우리를 함께 묶어 놓았구려.

어느 구렁으로 어느 높이에서 그대 떨어졌는지를 그대는 안다.

그토록 그는 천둥을 가지고

자기의 위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기 전에야 그의 흉한

무기의 힘을 뉘 알리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아니 또는 강대한 승리자가 노하여 달리

또 벌을 가할 것 같기에 내가 뉘우침도 아니오.

또 겉모양은 변했을망정 이내 굳은 마음

내 상한 공적 때문에 드높은 모욕의 뜻은 더욱 변하지 않았도다.

이런 뜻 있어 내 감히 전능자와 힘을

겨루었고 무섭게 힘을 겨루어 싸우기에

수없이 많은 정령의 군세가 무장을 갖추어

합세했으니 이들 역시 그의 지배를 싫어하고 나를 따라

반항의 위력으로 그의 지상의 세력을 거슬러

하늘의 벌판에서 승산 모를 전화를 일으켜

그의 옥좌를 흔들었도다. 그렇거늘 패전인들 어떠리?

모두를 잃은 건 아니로다 ㅡ 난공불락의 의지.

불타오르는 복수심에, 식을 줄 모르는 증오,

또 여기 굴하지도 넘어가지도 않는 용기가 있도다.

그 무엇에도 결코 정복되어지지 않을.

이 영예는 그의 분노도 또 위력도 감히

내게서 빼앗지 못하리. 애걸하여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은사를 빌다니, 조금 전에는 이 팔의 위력으로

그의 지상의 권세마저 위태롭게 했던

그의 힘을 우러러보다니 ㅡ 참으로 비루할진저.

이는 이 추락의 수모보다도 더 수치스럽고

또 창피한 일. 원래가 신들의 세력과 영적인

본질은 멸하지 않음이 운명 아닌가.

또 이 거창한 대사의 경험을 통해 배운 바 있도다.

즉 우리가 무력에 뒤지지 않고 또 선견에도 앞섰기에

다시금 성공의 희망을 걸고 결의할 수 있는 것은

힘이나 또는 속임수로 영원한 전쟁을 걸어

위대한 적에게 결전의 판가름을 할진저.

그는 지금 승리에 취하여, 기쁨을 가누지 못하고

하늘의 독재를 도맡아서 행세하고 있는 모양.


(나의 코멘트)


이 시의 앞부분을 찾아보기 위해 밀턴의『실낙원』을 펼쳐 봤다. 내가 가진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후에 팔레스타인에서 바알세붑(블레셋 사람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자에게, 하느님의 적장, 하늘에서 사탄이라고 불리는 자, 대견스러이 무서운 침묵을 깨뜨리고 이렇게 지껄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헤럴드 블룸이 인용한 시구절은『실낙원』의 주인공인 '사탄'이 방금 하늘에서 '감히 당신께 싸움을 걸어온 그를 불붙여 무서운 타락과 파멸을 가하여 바닥 없는 지옥으로 거꾸로 내던진' 직후에, 쫒겨난 사탄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 부하 장군에게 말을 붙이는 장면인 셈이다.



우리가 밀턴의 진정한 독자라면


그의 장엄한 화법 중 최상의 것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 여기 굴하지도 넘어가지도 않는 용기가 있도다.

그러니 무엇인들 극복하지 못할 것인가?


다시 말해 비록 전투에는 패했지만 여전히 용기는 남아 있으므로 굴복을 인정하지 않는 한 문제가 될 게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밀턴이 그려낸 신의 지지자라면 사탄의 영웅주의를 절대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턴의 진정한 독자라면 아마도 그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밀턴 스스로도 사탄이 "허풍스럽게 떠벌리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또한 그 배교의 천사가 고통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탄의 "상한 공작"이라는 표현은 이아고보다 더 비웃음을 살 일은 아니다. 사탄은 이아고가 가진 천재성은 없지만 보다 큰 범주에서 볼 때, 그는 장군 한 사람이 아닌 인류 전체를 파괴하려 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실낙원』을 보다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독자들에게는 명사잉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는 대단히 슬픈 일이며 엄청난 문화적 상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어렵고 현학적인 시를 읽는가? 단지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테가 가톨릭의 중심 예언자였던 반면에, 밀턴은 신교의 주요 시인이다.


오늘날 미국은 우리의 문화, 감각, 심지어 종교까지 많은 면에서 탈신교적인데, 이것들은 명료한 신교 정신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 신교 정신이 『실낙원』에서 극치를 이룬다. 의욕적인 독자라면 어렵더라도 진지하게 이 위대한 시를 읽어보기 바란다.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


시의 숭고성은 독자가 쉬운 즐거움을 버리고 어려운 즐거움을 택하도록 설득하는 경험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인내와 이해가 필요한 한편, 아울러 즐거움의 훈련도 필요하다. 워즈워스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셸리는 "시의 숭고성은 독자가 쉬운 즐거움을 버리고 어려운 즐거움을 택하도록 설득하는 경험"이라고 정의했다. 최상의 시와 단편 및 장편소설, 희곡을 읽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텔레비전이나 영화, 비디오게임 등 시각 매체가 제공하는 의미들보다 훨씬 어려운 즐거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볼 때, 셸리의 정의는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있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1772∼1834)


셰익스피어의 이아고나 밀턴의 사탄이 늙은 수부의 조상


콜리지 이전의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이아고나 밀턴의 사탄이 늙은 수부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콜리지와 카프카 사이에는 포우의 핌, 멜빌의 에이허브, 도스토예프스키의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스타브로긴 등이 있다.


콜리지의 이 놀라운 웅변적 발라드가 이유 없는 범죄를 다룬 서구의 문학적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카프카 이후에는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보르헤스 등의 작가들을 들 수 있다.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콜리지는 이아고의 행위를 "동기 없는 악행"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늙은 수부가 탄 배는 폭풍에 밀려서 남극 쪽으로 가다가 얼어붙은 바다에 갇히게 된다. 그때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가 그들을 구출하러 오고 선원들은 환호하며 새에게 먹이를 던져 준다. 마술과도 같이 얼음이 갈라지고 선원들은 구조된다.


온순한 알바트로스가 배를 뒤따라오는데, 늙은 수부는 아무 이유 없이 석궁을 쏴서 은혜의 새를 죽이고 만다. 이후 수부와 선원들은 지옥의 고통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요약은 예술적 독창성으로 가득한 이 작품의 시적 중요성을 훼손할 뿐이다.


















시_요약


시를 암송하는 일은 매우 즐겁고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현대 시인들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하트 크레인을 좋아한다. 그는 서른두 살에 카리브 해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래 의도하지는 않은 듯한데 죽음에 대한 그의 시 가운데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무너진 탑」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시의 한 연은 내가 열 살이 된 그해 이후 거의 60년 동안 매일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무너진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환영 속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찾으러, 그 목소리

잠시 바람 속에서 (어디로 불어가는지 나는 모른다)

잠시 동안 매 순간의 필사적인 선택을 취하고자.


이 시는 놀라운 미학적 품위를 지녔다. 크레인이 자신의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 우리를 주문 속에 가두었기 때문인데, 이는 시가 지닌 분명한 힘의 하나다. 무너진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은 자아의 창조이며 하나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크레인은 평생 동안 사랑하는 친구들을 추적하고 묘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크레인에게 그 환영 속의 친구들은 블레이크이고 셸리였으며 키츠였다. ……


크레인의 시는 다른 어떤 시보다도 암송할 때 그 비밀과 가치를 잘 깨달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시를 암송하는 일은 매우 즐겁고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기억 속에 붙잡아 둠으로써 시가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가 시를 더욱 가까이 하여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또 우리에게 주는 보상이기도 하다.


크레인의 시를 처음 읽으면 아름다운 소리와 리듬이 몰려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무너진 탑」혹은 「시:브룩클린 다리에게」를 반복해서 읽으면 우리는 그 시를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나는 끊임없이 시를 암송하면서 시가 나를, 내가 시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로써 삶에 도움을 얻은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도 우리에게 그런 도움을 주는 시인이다. 그녀의 지적인 독창성은 독자들의 내부에 깊이 침투된 상투적인 반응들로부터 절연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사도다.



일종의 폭력


휘트먼의 전성기 작품을 읽으면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는 그 최상의 상태에서 우리에게 소설에서는 시도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일종의 폭력을 가한다. 낭만주의 시인들의 경우는 이것을 시의 적절한 작용으로 이해했다. 즉 놀라게 함으로써 우리를 죽음과 같은 잠에서 깨워 삶에 대한 더 큰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시를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이유로 이보다 더 큰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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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1_단편소설

 

 

이반 세르게비치 투르게네프(1818∼1883)


허구적 인물의 네 가지 유형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사랑했던 투르게네프는 모든 인류를 '햄릿형'과 '돈 키호테형'으로 나누었다. 존 폴스타프(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희극적 인물)나 산초 판자(『돈 키호테』에 나오는 인물)까지 포함한다면 허구적 인물의 네 가지 유형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운명의 취약성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우리의 현실과 운명의 취약성을 잘 이해하고, 투르게네프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초연함 등을 미학적으로 음미하기 위해서 읽는다. 그의 글에 아이러니가 있다면 그것은 풍경이나 아이들, 사냥꾼 자신만큼이나 순수한 운명에 대해서일 것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


체호프와 톨스토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평론


지금까지 내가 읽은 글 중에서 체호프와 톨스토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평론은 막심 고리키의 『회상들』에 나온다:


"체호프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단순해지고 진실해지며 보다 더 본연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느끼게 된다."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내면적 삶의 기록이 알려진 모든 작가 가운데 체호프와 베케트가 가장 친절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내면적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희곡을 읽으면 셰익스피어가 체호프, 베케트와 더불어 세 번째 친절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폴스타프, 햄릿, 로잘린드(셰익스피어의 『좋으실 대로』에 등장하는 인물)라는 인물들을 창조한 셰익스피어는 더욱 본연의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며,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



체호프의 위대한 힘


고리키는 체호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체호프는 평범의 바다에서 비극적 유머를 드러냈다."


체호프의 위대한 힘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일상적 불행과 비극적 환희가 끊임없이 혼재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느끼게 해 준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적 환희라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의 익살맞은 패러디와 소극에서조차 체호프의 평범함을 찾아 볼 수 없다.




















기 드 모파상(1850∼1893)


평범함을 표현하는 법


체호프는 모파상으로부터 평범함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모파상은 평범한 표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구스타프 플로베르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모파상은 이야기꾼으로서 체호프나 투르게네프의 천재성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모파상은 대단히 '인기 있는' 작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파상은 대단히 '인기 있는' 작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오 헨리보다도 뛰어나며 혐오스러운 인기 작가 애드거 앨런 포우도 그에 비견될 만한 작가가 못 된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도 괄목할 만한 성취다. 오늘날 미국에는 그런 작가조차 없는 실정이니까.



쇼펜하우어의 렌즈


모파상은 플로베르로부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른바 '긴 인내가 재능이다'라는 사실을 배웠다.


모파상은 독자들이 그가 없었으면 보지 못했을 무언가를 보게 해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셰익스피어나 체호프의 천재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모파상 역시 모든 것을 '생의 의지'로 주장하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쇼펜하우어의 렌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안경과 거의 비슷하게 모든 것을 확대 왜곡시킨다.



왜 모파상의 작품을 읽는가?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독자를 사로잡을 줄 안다. 그리고 독자는 그의 목소리를 충분히 받아들인다. 절대 다수는 아니겠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특히 모파상보다 훨씬 탁월하고 미묘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전해 주는 난해한 즐거움의 기초가 되고 있다.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1899∼1961)


헤밍웨이는 작품에서 가장 야심적일 때 셰익스피어적이었다.


헤밍웨이는 작품에서 가장 야심적일 때 셰익스피어적이었다. 이는 작가의 자전적 작품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잘 드러난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실패한 작가 해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너무 많이 사랑했기에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말았다."


이는 헤밍웨이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경애하는 '리어 왕'에 대한 뛰어난 비평적 언급일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짧은 글에서 비극을 시도해서 그 뜻을 달성했다. 행위의 묘사보다는 죽어가는 한 인간에 대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가장 강렬한 자기 응징으로, 내 생각엔 그러한 양식에 경도되었던 체호프도 감명받았으리라 여겨진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만일 '표범의 시체'를 ㅡ상실되었지만 아직 조금은 남아 있는 ㅡ해리의 작가로서의 야심 혹은 미학적 이상과 동일시한다면, 이는 헤밍웨이의 작품을 거짓 감상했거나 괴기스러운 것으로 비하하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에서는 헤밍웨이가 그런 오류를 범했지만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


"작가가 아닌, 이야기를 믿으라."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 D.H.로렌스는 간결한 단 한 줄로 독자들에게 영원한 지혜를 제공했다.


"작가가 아닌, 이야기를 믿으라."


내가 볼 때 이 말은 헤밍웨이 이래 미국 작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을 읽는 근본적인 원리라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89∼1977)


에머슨의 '투명한 눈동자'


나보코프의 「베인 가의 자매들」은 짧지만 에머슨의 '투명한 눈동자'*와 콜리지의 '폴록에서 온 사람'* 등에 대한 문학적 암시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강령술 모임에 나타난 듯한 오스카 와일드, 톨스토이의 생생한 체현들, 그리고 문학적 괴팍스러움의 일반화된 기분을 엿볼 수 있다.


* 에머슨의 저서 「자연」중 '나는 투명한 눈동자가 된다. 나는 무無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우주의 존재의 흐름이 내 몸 속을 순환한다"라는 문장에 나오는 말.


* 콜리지의 대표적인 시 「쿠불라 칸」의 구성을 방해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


보르헤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그에 앞섰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그것이 보르헤스를 체호프와 비교할 때 재미나 계몽적인 면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르헤스를 매우 다른 존재로 부각시킨다.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는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다.


체호프는 셰익스피어를 강박적일 정도로 햄릿의 작가로 인식한다. 그리고 왕자 햄릿은 체호프가 항해하는 배다. 체호프의 이름으로 출반된 최초의 단편 「바다에서」처럼 말이다. 보르헤스의 상대론은 절대적이며 체호프의 상대론은 조건적이다.


체호프와 그의 제자들에 매료된 독자는 이야기에 대한 개인적 관계를 누리지만, 보르헤스는 독자를 매혹시켜 비개성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셰익스피어의 추억은 거대한 심연이고 독자들이 이야기에 빠지면 남아 있던 자아의 전부를 상실하게 된다.
















이탈로 칼비노(1923∼1985)


우리가 왜 책을 읽고 어떠한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1974년 윌리엄 위버가 번역한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제대로 평가한다면 우리가 왜 책을 읽고 어떠한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꾼으로 등장해 중국 원나라의 시조 쿠빌라이 칸 앞에서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상상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불과 한두 페이비밖에 안 되잠,ㄴ 체호프적은 아니라도 보르헤스나 카프카적인 면에서는 단편소설이라 할 만하다.


마르코 폴로가 말하는 도시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들은 원한다면 그곳을 여행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나오는 열한 개의 집단은 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 추억, 욕망, 신호, 눈, 이름, 죽은 자, 하늘의 도시, 얇은 도시, 무역 도시, 연속의 도시, 숨은 도시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모두를 마음에 담으려면 혼란스럽겠지만 도시 하나하나가 실제 같은 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도에 노선을 그릴 수 없거나 착륙 날짜를 정할 수 없기 때문


쿠빌라이와 마르코 폴로 사이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쿠빌라이가 약속의 땅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또한 뉴 아틀란티스, 유토피아, 태양의 도시, 뉴 하모니 그리고 다른 모든 구원의 땅들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지 않는가 묻는다.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한 땅들에 대해서는 지도에 노선을 그릴 수 없거나 착륙 날짜를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지도를 뒤적이다가 바빌론, 야후랜드, 용감한 신세계 등 '악몽과 저주'의 도시들을 발견한다. 절망에 빠진 늙은 황제는 결국 항해의 끝은 '지옥의 도시'일 뿐이라는 허무감을 드러낸다. 쿠빌라이의 이 마지막 한탄은 마르코 폴로에게 전해지지만 그는 독자들을 향해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지옥"에 빠져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그것을 받아들이고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더 나은 길은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이탈로 칼비노의 작가적 지혜다:


"(…)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이 아닌 자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인식하고자 노력하고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만들며 그것들에 공간을 제공한다."


칼비노의 충고는 우리가 책을 어떻게 읽고 왜 읽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있다: 주의하라, 그리고 선善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인식하며 그것이 지속될 수 있게 하고 우리의 삶에 그것들에 대한 공간을 제공하라.



 

















단편소설_요약


전통적으로 희곡은 행위를 모방하지만 단편은 그렇지 않다.


훌륭한 단편은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을수록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헨리 제임스는 단편을 "시가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 미묘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결국 단편소설은 시와 장편소설 중간에 있으며, 등장 인물은 헨리 제임스의 말대로 "매력적이고 특별하지만, 또한 인식 가능할 만큼 일반적"이다. 전통적으로 희곡은 행위를 모방하지만 단편은 그렇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미국 작가라 할 수 있는 유도라 웰티는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D.H.로렌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언어를 서로 대화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분수처럼 뿜어 내고 달처럼 빛을 뿌리며 바다처럼 몰려온다. 그리고 심술궂은 바위처럼 침묵한다."



체호프는 진실을 추구하고, 카프카-보르헤스는 전도된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


왜 단편소설을 읽으며 또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치고자 한다.


체호프-헤밍웨이적 양식과 보르헤스적 양식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없다. 독자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전자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후자는 현실을 넘어서 보이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갈증을 느끼는가를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양식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체호프는 진실을 추구하고, 카프카-보르헤스는 전도된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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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한길그레이트북스 58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지음, 이기숙 옮김 / 한길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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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이해하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전도이자, 모든 수단과 본능과 천재들을 가지고 수행되었으며, 그 반대되는 가치고귀한 가치를 승리하게끔 했던 시도를 ······ 위대한 싸움은 이제껏 바로 이것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의 문제 제기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 제기는 이제껏 없었다.
 - 니체, 『안티 크리스트』중에서

 * * *


이 책의 저자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에 관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역사가다. 그는 개신교 성직자 집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학 공부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이내 역사학 분야로 눈길을 돌렸고, 주로 역사학, 예술사, 문헌학, 고전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원 클럽 맨'처럼 학자로서의 경력 대부분을 바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바쳤다.


1858년에 역사학 정교수로 부임한 그는 10년 후 고전문헌학 교수로 처음 그 대학에 부임하는 청년 니체를 만났고, 저자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어렸던 니체는 저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니체는 교수 생활 10년 만에 철학에 전념하기 위해 바젤 대학을 미련없이 떠나지만, 저자는 니체가 떠난 후로도 오랫동안(1893년까지) 그 대학에 남아 역사 강의에만 몰두했다. 저자는 니체로부터 '야콥 부르크하르트 때문에 인문학이 발전했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정말 진귀한 그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 바젤 대학이 인문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이 책은 저자가 바젤 대학의 역사학 정교수로 부임한지 불과 2년 만인 1860년에 발표한 책이지만, 저자가 이미 오랜 기간 이 책의 저술을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에 발표 즉시 기념비적 대작이 되었다. 이 책은 제목에 이미 세 가지 범주가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때는 르네상스이고, 장소는 이탈리아이며, 다루는 주제는 문화사다. 르네상스가 무엇이며, 그것이 왜 하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는지, 또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문화, 더 나아가 유럽 전체와 근대 세계를 어떻게 광범위하게 변화시켰는지가 이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이다.


이 책과 저자에 대한 명성은 굳이 니체의 몇몇 철학책 후미진 구석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 위해 애쓸 필요가 정도로 광범위하게 계속 확산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르네상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창조물이다."(독일에서 편찬된 『세계사 대계』)라는 웅변적 문장이 단적으로 말해주듯이, 저자가 이 책에서 펼쳐놓은 르네상스 연구는 학계에서 하나의 정설로 통념화된지 오래다.


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최초의 생각'을 떠올린 건 1847년에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였다. '고대의 부활'을 통해 '중세의 미망'에서 깨어나 '인간의 재발견'으로 이어진 문예부흥이 르네상스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저자가 '로마'에서 '르네상스'를 떠올렸던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오래 전부터 '폐허의 도시 로마'는 숱한 시인들과 역사가들에게 '특별한 명상'에 잠기게 만든 도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인 페트라르카와 단테는 물론, 훗날『로마제국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나 니부어에 이를 때까지도 '폐허의 도시 로마'를 휘감던 공기와 저녁 노을은 '불현듯' 천재들로 하여금 웅편거작들을 쓸 결심들을 계속 불러일으켰다. 단테의 말대로, "로마 성벽의 돌들은 당연히 경외심을 품고 대해야 하고, 이 도시를 떠받치고 있는 대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귀중하다."


사실 부르크하르트 이전에도 르네상스라는 용어와 개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이 개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은 바사리, 마키아벨리, 에라스무스, 클로드 졸리, 볼테르, 괴테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 볼테르와 괴테는 거의 '르네상스의 역사'를 쓸 뻔했던 인물로 꼽힐 만큼 '르네상스 개념'에 정통했던 인물들이다. 훗날 네덜란드의 역사가 호이징가는 볼테르가 『르네상스의 시대』또는 그와 유사한 제목의 역사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테르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정적으로 '이탈리아'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는, 부르크하르트야말로 르네상스 개념을 가장 먼저 학술용어로, 또 일반적인 교양언어로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부르크하르트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사와 문화사를 결합하고자 하는 웅대한 구상을 품고 방대한 연구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야심찬 연구 작업이 끝내 완결에 이르지 못찬 채 교착 상태에 머물던 중, 그는 결국 예술사 부문(회화,건축,조각)을 따로 떼어내고 문화사를 다룬 책으로 체계를 바꿔 이 책의 출간에 이른다. 그 과정이 몹시도 지난했던 모양이다. 저자 스스로 이 작품을 두고 '역경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별칭으로 부를 정도였다. 그는 이 작품에 특별히 시론(試論)이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언제나 스스로 비전문가임을 자처하면서 전체에 대한 조망 능력을 지닌 '딜레탕티즘'을 강조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이 작품 초판본을 두고 고교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표현한 대로, '기존의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마치 거친 들에 피어난 야생화와도 같으며, 저자가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가졌고 사료의 기록을 멋지게 활용하고 있다고 믿을 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은 지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역사서라고까지 내세우는 듯한 태도를 취할 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르크하르트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은 자신의 사후 출간된 작품인『세계사적 고찰』에서 제시한 포텐츠론(Potenzenlehre)으로 설명된다. 즉 역사는 국가 · 종교 · 문화라는 세 개의 잠재력들(Potenzen) 사이의 규제 · 견제 · 대립 · 포괄 · 보완 등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인 상을 형성해간다는 내용의 역사이론이다. 이 책에서 크게 6부로 나눈 구성 또한 저자의 역사 서술 방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정치 상황은 '제1부 '인공물로서의 국가'에서 다루고, 문화 상황은 제2부에서 제5부에 이르는 '개인의 발전' '고대의 부활' '세계와 인간의 발견' '시교와 축제'에서 다룬다. 당시의 사회 풍습과 종교 상황은 제6부 '관습과 종교'에서 다룬다.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들은 주로 '문화'를 다루는 장들에 담겨 있다. 고전과 고대의 부흥을 통한 인간의 자아와 세계의 발견, 그에 따른 개성의 성장, 자유주의와 인문주의의 발전 등은 우리가 흔히 르네상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 개념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부르크하르트의 서술이 빛나는 점은 '르네상스의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 상황과 도덕적 풍조와 윤리 관념을 포함한 '관습과 종교'를 함께 고려하여 입체적으로 세세히 조명한다는 점이다. 수많은 교황과 황제가 끊임없이 반목과 견제를 주고 받으며 대립하는 당시 이탈리아의 특수한 정치 상황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연구와 묘사는 독자들을 단번에 르네상스 시대의 궁전과 교황청 안으로 바싹 끌어당길 만큼 자세하고 생생하다. 굳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나 단테의 『신곡』가운데 유명한 대목들을 따로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당시 이탈리아의 극도로 혼란스럽고 드라마틱한 정치적 격변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숱한 암살 음모, 교황의 사생아였던 체사레 보르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잔악무도한 학살극, 온갖 잔혹한 군소국가 폭군들의 횡포와 만행, 용병대장들의 천인공노할 배반과 찬탈 등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르네상스의 문화가 봄을 맞은 자연처럼 사방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던 시대에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정신적인 풍토와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도 중요하다. 언어와 관습, 사교와 축제, 가족과 결혼, 음식과 질병 등 아주 디테일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듯한 저자의 설명은 '관습과 종교'에 더없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배우자의 부정에 대한 복수극, 수도사와 참회 설교사들의 타락, 점성술과 마법이 만연하던 풍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확산, 갈수록 타락하는 종교에 대한 불신과 세속화 등은 숱한 풍속화와 전기(傳記) 또는 문학 작품 속 묘사 등에 대한 설명과 전거 자료를 통해 탄탄하게 뒷받침되어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핵심으로 내세우는 주제는 '이탈리아인들의 내면 세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주로 도출된다. 왜 하필 이탈리아 사람들이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유럽의 근대를 탄생시킨 원동력'으로 이어졌느냐 하는 문제를 단순히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몇몇 천재들, 가령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문예활동을 적극 지원한 몇몇 탁월한 교황과 군주들의 존재 덕분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극도로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은 개인이 권력을 얻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환경을 만들었다. 전통적 기준이나 권위로부터의 해방이 곧바로 개인주의가 싹트고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개인의 가치가 중시되면서 수많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과 개성 넘치는 다양한 인간들이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기회와 자극이 그들에게 비로소 주어졌던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내면 깊숙하게 자리잡은 '개성 강한 민족성'이 이런 경향을 다른 인접국가 사람들보다 더욱 예민하게 자극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중세 암흑시대에 교회 건축물의 무게에 깔려 땅속에 묻히고 질식했던 수많은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재발견 만으로도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라틴어가 광범위하게 학습된 점도 이점이었다. 빛나는 로마 시대를 장식했던 인물들, 가령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키케로, 리비우스 등이 남긴 탁월한 작품들도 '개성의 발견'에 중요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고대 로마'가 그들의 영광스러운 과거였다는 '끈끈한 유대감'부터 남들과 달랐던 셈이다. 제노바 사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일로 대표되는 지리적 탐험 외에도 갈릴레오로 이어지는 자연 과학의 진보 또한 이탈리아에서 유독 눈부셨다.

부르크하르트의 '세계와 인간의 발견'은 일견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쓴『총·균·쇠』의 일부 대목들을 연상시킬 때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국민들의 '세계와 인간의 발견'에 대한 선구자적 역할을 다이아몬드 교수와 유사한 방식으로 쉽게(?)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점은 도리어 매력적이다. 주로 '이탈리아의 지리적 이점'에 힘입어 이탈리아인들이 그런 식으로 움직였던 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가령 베네치아와 나폴리, 피렌체와 제노바 등이 지중해를 가까이 끼고 있는 덕분에 일찍부터 드넓은 세계와 활발히 접촉할 수 있었다는 점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부르크하르트는 줄곧 이탈리아 사람들의 내면 세계에 자리잡은 독특한 민족성과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심리 등을 보다 더 근본적인 '르네상스의 원동력'으로 예민하게 포착한다.

사실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 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방대하고 세세한 문헌 자료까지 모조리 들춰보는 방식으로 치밀하게 이뤄졌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 대한 예비 지식을 미리 어느 정도 갖추지 못한 일반 독자들에겐 저자가 쓴 평범한 문장들을 읽을 때조차 편안한 호흡으로 따라가기 벅찰 때가 많을 정도로 전문적이다. 그래서 저자가 경쾌한 속도로 가볍게 서술하는 문장들을 읽을 때조차 우리에게는 몹시 생경한 인물이나 지명 혹은 낯선 용어들 때문에 방해받고 당황할 때도 많다. 또한 문장들과 행간 곳곳에 숨겨진 의도적인 생략과 압축뿐 아니라 다양한 함축과 비약들도 독자들이 쉽게 흡수하기 벅찰 때가 있다. 이런 측면들은 아무래도 독자와 저자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지식 수준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니 결국 어쩔 수 없는 문제다. 때로는 저자가 수십 권 혹은 수백 권의 책들을 샅샅히 찾아 읽고 연구한 내용들조차 불과 몇 줄의 문장 속에 뭉뚱그려 간략하게 짚고 넘어갈 때도 적지 않은 듯하다. 숱하게 옆길로 샐 수 있는 '군더더기 설명의 유혹들'을 저자는 매번 단호하게 뿌리치고 잘도 넘긴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우리에게 친절한 안내를 덧붙이곤 한다. 그런 부분들까지 세세하게 탐구하고 분석하는 일은 이 책의 과제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저자가 읽은 책이 족히 수백 권을 넘어 수천 권에 이를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고 저자의 끝모를 탐구심과 놀라운 상상력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독자가 몇이나 될까.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만사를 이룰 것이니, 그는 수고도 위험도 손해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나 자신을 통해 시험해본 결과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강렬한 원동력에서 출발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은 헛되고 무의미하다고." 물론 구이차르디니의 일생을 기록한 다른 문헌들을 읽어볼 때, 그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명성이 아닌 명예심이라는 점을 덧붙여두어야 하겠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 어떤 이탈리아인보다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은 라블레이다. 물론 나는 이 이름을 우리의 연구에 끌어대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이 비상하고 언제나 괴이쩍은 프랑스인이 남긴 글들은 형식과 미가 없는 르네상스가 어떤 모습일지를 대략이나마 알게 한다. 하지만 텔렘 수도원의 이상향을 그려낸 그의 글은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서, 여기에 들어간 최고의 상상력이 없었다면 16세기의 모습은 불완전했을 것이다.

라블레의 작품에 나오는 자유의지의 수도회 남녀들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규칙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친구와 사귀는 자유로운 사람들은 덕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본능과 충동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켜 그들은 명예라고 불렀다."

이것은 18세기 후반기를 고무하여 프랑스 혁명에 길을 터준, 인간 본성의 선함에 대한 바로 그 믿음이었다. 이탈리아인도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고귀한 본성에 눈을 돌렸다. …… (519∼520쪽)

결국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일반화해서 얘기하자면 '무엇에 대해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몹시 전문적인 책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인 '르네상스'가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한번쯤 심각하게 고려해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르네상스'에 대해 충분히 방대한 연구와 예리한 관찰들을 놀라운 필치로 그려낸 작품이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전문적이면서도 방대하고 예리하지만 읽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는 점은 이 책의 단점이자 또한 장점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생각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놀라운 시기였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숱한 놀라운 이야기가 이 책에 거의 다 담겨 있다고 봐도 좋다. 무려 1,167개에 달하는 방대한 주석은 부르크하르트의 연구의 깊이를 방증하고도 남는다.(이처럼 방대한 주석이 딸린 책으로는 막스 베버의『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 빼놓기 어렵다. 그 책에 딸린 저자와 역자의 주석을 모두 합하면, 내가 읽은 번역본으로는 1,242개다. 막스 베버도 그 책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이 책을 인용했다. 베버는 '이 한 줄이 너의 해석을 천 년 동안 기다려 왔다, 라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학문을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물론 그 말은 부르크하르트에게 적용해도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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