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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인과 아나키스트는 둘 다 데카당이다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유지하려고 거짓말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려고 거짓말하는가에 따라서.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인아나키스트는 완전히 같다고도 말할 수 있다 : 그들의 목적과 그들의 본능은 오로지 파괴로만 향한다. 이 문장에 대한 증거는 역사에서 읽어낼 수 있다 : 역사는 무서울 정도로 명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중략) 그리스도교인과 아나키스트 : 둘 다 데카당이다. 둘 다 해체시키고, 오염시키고 쇠약하게 하며, 흡혈귀처럼 작용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없다. 둘 다 세워져 있거나, 웅장하게 서 있거나, 지속적이거나 삶에 미래를 약속하는 것 전부를 아주 격렬하게 증오하는 본능이다 ······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피를 빨았던 흡혈귀이다 ㅡ 그리스도교는 시간이 소요되는 위대한 문화를 위한 지반을 얻으려는 로마인들의 거대한 업적을 밤 사이에 무효화시키고 말았다. ㅡ 이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가? (중략) 밤과 안개와 모호함 속에서 모든 개개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는 참된 것들에 대한 그들의 진지함과 실재성에 대한 본능 일반을 다 빨어먹는 이 은밀한 벌레. 비겁하고 여성적이며 달콤한 이 무리들은 점차 그 거대한 건축에서 '영혼'을 소외시켜버렸다 ㅡ 로마적인 것에서 자기의 고유한 것과 고유의 진지함과 고유의 긍지를 느꼈던 그 가치 있고 남성적이며-고결했던 본성을 말이다. 위선자의 음흉한 짓거리, 비밀집회의 은밀함, 지옥이나 죄 없는 자의 희생 또는 피를 마시면서 이루어지는 신비적 합일 등의 음산한 개념들, 특히 서서히 들쑤셔 돋우어진 복수의 불길, 찬달라의 복수의 불길 ㅡ 이것들이 로마를 지배해버렸다.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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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세계의 수고가 깡그리 부질없게 되었다

 

고대 세계의 수고가 깡그리 부질없게 되었다 : 이런 끔찍한 것에 대한 내 느낌을 표현할 말이 없다. ㅡ 그리고 그들의 수고가 하나의 준비 작업이었다는 것, 화강암같이 단단한 자기 신뢰에 의해 몇천 년간 지속될 작업을 위한 기초만이 겨우 놓여졌다는 것, 이 점들을 고려해보면 고대 세계가 갖고 있던 의미 전체가 부질없다! ······ 그리스인이 무슨 소용이며, 로마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중략) - 그리스인! 로마인! 본능과 취향의 고귀함, 방법적 탐구, 조직과 관리의 천재, 인간의 미래에 대한 신념과 의지, 만사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 로마제국으로서 가시화되고, 모든 감각에 가시화되며, 위대한 양식이 더 이상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고 진리가 되었으며 이 되었었는데 말이다 ······ ㅡ 그런데 밤 사이에 묻혀버렸다. 그것도 자연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게르만인이나 다른 멍청이들에게 짓밟힌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교활하고 은밀하고 보이지 않으며 피에 굶주린 흡혈귀에게 치욕을 당한 것이다! 정복된 것이 아니라 ㅡ 다만 피를 다 빨려버린 것이다! ······ 은밀한 복수심, 비소한 시기심이 지배자가 되어버렸다! 비천한 모든 것, 자신으로 인해-고통받는 모든 것, 좋지 않은-느낌에 의해-엄습당한 것 모두, 영혼의 게토-세계 전체가 단번에 위로 올라섰다! ㅡ ㅡ 어떤 불결한 작자들이 그렇게 해서 위에 올라섰는지를 파악하고 냄새를 맡아보려면 그리스도교 선동가, 그들 중 누구든 읽어보라. 이를테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우리가 그리스도교 운동의 지도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성을 잃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 ㅡ 오오, 그들 교부님들은 정말 영리하다. 신성하리만큼 영리하다!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5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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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이 대목에서 독일인에게 수백 배나 더 수치스러운 기억을 건드릴 필요가 있다. 독일인은 유럽이 거두어들이도록 주어진 최후의 위대한 문화적 수확물을 유럽에서 빼앗아버렸다 ㅡ 즉 르네상스의 수확을. 르네상스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이해했는가? 이해하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교적 가치의 전도이자, 모든 수단과 본능과 천재들을 가지고 수행되었으며, 그 반대되는 가치고귀한 가치를 승리하게끔 했던 시도를 ······ 위대한 싸움은 이제껏 바로 이것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의 문제 제기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 제기는 이제껏 없었다. ㅡ 나의 물음은 르네상스의 물음이다 ㅡ : 이보다 더 철저하고 직접적이며 강하게 적의 정면 전체와 중심을 돌파하는 공격 형식도 결코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결정적 지점과 본거지 자체를 공격하는 것, 거기서 고귀한 가치를 왕좌에 올리는 것, 말하자면 거기서 왕좌에 앉아 있는 자의 본능과 가장 심층적인 필요와 욕구에 고귀한 가치를 집어 넣는 것 ······ 나는 완전히 초지상적인 마력과 찬란함을 지니고 있는 가능성을 내 앞에 보고 있다 : ㅡ 그 가능성이 세련된 아름다움의 전율로 반짝거리는 것 같다. 거기서 신적인, 악마처럼 신적인 어떤 것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와 같은 두 번째의 가능성을 찾아 수천 년간을 헤매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 나는 하나의 광경을 보고 있다. 올림포스의 제 신들을 영원히 박장대소하게 할 만한 단초가 될 정도로 그렇게 감각적이고 그렇게 놀라우면서도 동시에 모순적인 광경을 ㅡ 교황으로서의 케사레 보르자를 ······ 나를 이해하겠는가? ······ 좋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오늘날 유일하게 요구하는 승리였을 것이다 ㅡ :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폐지되고 말았으니! ㅡ 하지만 무슨 일이 생겼던가? 루터라는 독일인 수도승이 로마로 갔다. 좌절당한 사제의 복수심이 불타는 본능을 죄다 지니고 있는 이 수도승이 로마에서 르네상스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났다 ······ 그리스도교를 그 본거지에서 극복하려는, 실제로 일어났었던 그 거대한 사건을 깊이 감사하면서 이해하는 대신 ㅡ 루터의 증오심은 그 광경에서 자신을 살찌울 양식만을 끄집어낼 줄 알았을 뿐이었다. 종교적인 인간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법이니까. ㅡ 루터가 본 것은 교황청의 부패였다. 바로 그 반대가 명약관화했었는데 말이다 : 옛 부패, 원죄라는 것,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은 교황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삶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도! 오히려 삶의 개가가! 오히려 높고도 아름답고도 대담한 모든 것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도 말이다! ······ 그리고 루터는 교회를 재건했다 : 교회를 공격하면서 ······ 르네상스가 ㅡ 의미 없는 사건으로, 엄청난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니! ㅡ 아아, 그 독일인들, 그들은 우리에게 벌써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던가! 헛수고 ㅡ 이것은 항상 독일인들의 작품이다 ㅡ 종교개혁 ; 라이프니츠 ; 칸트와 소위 독일 철학 ; 해방전쟁 ; 독일제국 ㅡ 매번 기존의 것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헛수고이다 ······ 고백하거니와 이런 독일인들은 나의 적이다 : 나는 이들에게 있는 온갖 종류의 개념의 불결과 가치의 불결을, 그리고 정직한 긍정과 부정 앞에서의 비겁을 경멸한다. 거의 천 년 동안 그들은 자기들이 손댄 모든 것을 엉크러뜨리고 혼란에 빠뜨렸다. 그들은 유럽을 병들게 만든 모든 반쪽짜리 것 ㅡ 아니 8분의 3쪽짜리 것! ㅡ 에 대한 책임이 있다. 또한 그들은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불결한 유형의 그리스도교에, 가장 치유하기 어렵고,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유형의 그리스도교에, 즉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책임이 있다 ······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버리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6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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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

 

 ㅡ 이것으로 나는 끝을 맺고 나의 판결을 내린다. 나는 그리스도교에 유죄판결을 내리며, 그리스도교 교회를 가장 혹독하게 탄핵한다. 그 어떤 고발자가 입에 담았던 탄핵보다도 더 혹독하게.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교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부패 중 최고의 부패이며, 궁극적이지만 실제로도 가능한 부패에의 의지를 지녔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부패의 손길을 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모든 진리를 한 가지 거짓으로, 모든 정직성을 영혼의 비열성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내게 아직도 감히 교회의 '인도적' 축복에 대해서 지껄여대다니! 여느 비상사태를 없애버리는 것은 교회의 뿌리 깊은 유용성에 어긋난다 ㅡ 교회는 비상사태를 통해 연명해왔고, 자기를 영구화시키기 위해 비상사태를 만들어냈다 ······ 죄라는 벌레가 그 예이다 : 교회야말로 비상사태를 가지고서 인류를 풍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ㅡ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것. 이 허위, 천한 성향을 지닌 모든 자의 원한을 위한 이 구실, 결국 혁명으로, 현대적 이념으로, 사회질서 전체의 몰락의 원칙이 되어버렸던 이 폭발성 개념. 이것은 ㅡ 그리스도교적인 다이너마이트다 ······ 그리스도교의 '인도적'인 축복이라니! 인류애로부터 자기 모순을, 자기 모독의 기술을, 어떤 대가를 치르든 거짓에의 의지를, 모든 선하고 정직한 본능에 대한 반감과 경멸을 길러내는 것! ㅡ 이것들이야말로 내가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ㅡ 교회의 유일한 실천으로서의 기생주의 ; 자기의 빈혈증-이상과 '신성함'-이상을 수단으로, 피와 사랑과 삶에의 희망을 전부 다 마셔버려 고갈시켜버린다 ; 모든 현실성을 부정하려는 의지로서의 피안 ; 이제껏 존재했던 것 중에서 가장 지하적인 모반을 인식하게 하는 표지로서의 십자가 ㅡ 건강과 아름다움과 제대로 된 성장과 용기와 정신과 영혼의 선의에 맞서고, 삶 자체에 맞서는 모반 ······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런 영원한 탁핵을 나는 벽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적으려 한다 ㅡ 눈먼 자도 볼 수 있게 하는 글자를 나는 가지고 있다. ······ 나는 그리스도교를 단 하나의 엄청난 저주라고 부른다. 단 하나의 엄청난, 가장 내면적인 타락이라고 부른다. 단 하나의 엄청난 복수 본능이라고 부른다. 어떤 수단도 이것에 대해서는 독성과 은밀함과 지하적임과 비소함에 있어 충분할 수 없다 ㅡ 나는 그리스도교를 인류의 단 하나의 영원한 오점이라고 부른다 ······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액운이 시작되었던 그 불행한 날을 기점으로 시간을 계산한다 ㅡ 그리스도교가 시작한 첫날을 기점으로! ㅡ 왜 차라리 그리스도교의 최후의 날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가?오늘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가? ㅡ 모든 가치의 전도! ······

 

 - 니체, 『안티 크리스트』, 제6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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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후기 철학의 결정판

 

근대를 지배했던 형이상학적 사유와 전통적 도덕의 붕괴를 통해 철학의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르짖은 니체. 그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한 듯이 1888년 한 해에 한꺼번에 여섯 작품을 쏟아낸다. 1887년 가을 무렵부터 시작된 정신병적 징후에도 불구하고 생애 최고로 생산적인 해를 보낸 것이다. 한국어판 책세상 니체전집 15《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는 바로 거센 폭풍과도 같은 니체의 마지막 정열과 사상적 결정체가 담긴 저작이다. 이 여섯 작품은 니체가 카를로 광장에서 쓰러지기 직전에 씌어진 니체 최후의 저작들로 그간의 니체가 보여주었던 현대성 비판, 반그리스도교적 고찰 등 그의 핵심 사상이 총정리되어 있다. 특히 예술(그중에서도 음악), 정치, 역사에 대한 니체의 시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니체 후기 철학의 결정판으로 평가받는다.

 

현대 세계와 현대성에 대한 폭발적 분노

 

그렇다면 철학자 니체는 무엇을 위해 1888년 한 해에 자신의 마지막 정열과 혼을 불태웠는가? 현대 세계와 현대성에 마지막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이미《선악의 저편》과《도덕의 계보》에서 그는 이미 퇴폐적인 근대의 여러 현상과 과학정신, 유럽 그리스도교 등을 맹렬하게 비난하는 등 모든 기존 가치의 전도를 극명하게 표명했다. 따라서 그는 이제 더 이상 현대 세계와 현대성에 대해 자신의 경멸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현대 세계의 얼굴에 대고 데카당스! 라고 부르짖는다. 그리스도교! 라고 부르짖는다. 삶을 부정할 뿐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을 억압하는 그리스도교야말로 니체가 보기에는 데카당스의 전형이었고, 음악의 연극화, 극장에서의 성공, 이상주의라는 허울 좋은 무기를 가지고 진정한 음악정신을 죽일 뿐 아니라 생을 부정하고'초월'과 '피안'이라는 낡고 날조된 가치를 보호하는 바그너야말로 음악을 병들게 한 데카당스 예술가였던 것이다. 이제 니체는 삶과 세상을 부정하고 삶의 덕을 증오하는 데카당스의 미학과 예술에 작별을 고한다. 삶을 긍정하고 주인도덕을 표현해주는 아름다운 예술로의 회귀를 위해, 고전 미학으로의 회귀를 위해, 자연과 건강함과 명랑성과 젊음으로의 회귀를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 붓는다.

 

니체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시금석

 

니체는 체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을 하나의 체계로 만들려는 시도를 조롱하며 그것을 '고결함의 결여'라고 부른다. 니체의 다양한 관찰과 통찰을 하나의 틀에 집어넣기에는 그의 사상이 갖는 매력뿐 아니라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핵심이 단일하지 않다. 니체의 잠언이나 우화를 이용한 글들은 의도적으로 특정 방향을 드러내지 않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는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를 놀라게 하며, 사태를 다른 각도, 다른 관점,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니체주의자 중 한 사람인 미셸 푸코는 단일한 니체 철학이란 없으며 우리의 질문은 "니체를 어떻게 진지하게 써먹을 수 있는가" 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니체의 전 작품을 한눈에 조망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니체가 최후까지 강조했던, 니체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현대 세계에 대한 강한 반발을 읽어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이를 위해 자신의 전 작품을 이 주제 아래에서 재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 책에서 주요 여섯 작품 외에도 자신의 거의 모든 저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그의 초기사상이 담긴《비극의 탄생》(1872)에 대해서는"몇 가지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이 끼친 영향과 심지어 이 책의 매혹도 바로 이 책의 문제점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면서《니체 15》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반(反)바그너적 시점에서《비극의 탄생》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또한《반시대적 고찰》 부분에서는 "금세기의 긍지인 '역사적 감각'이 최초로 병증으로서, 퇴락의 전형적 징후로서 간파되었다. '독일 제국', '교양', '그리스도교', '비스마르크', '성공'등으로 불리던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 경멸로 가득 차"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니체가 바그너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을 당시 썼던《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도 "불쌍한 바그너! 그가 어디로 빠져버렸단 말인가! 차라리 돼지들 쪽으로 가버릴 것이지! 하필 독일인들 사이로 가다니!"라면서 바그너를 맹렬하게 비난하기도 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후기 니체 철학이 집약돼 있는《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등의 작품을 니체는 일일이 열거해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고 재조명하는데, 이를 통해 니체 철학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출간된 책들을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이다.

 

《바그너의 경우》바그너에 대한 혹독한 비판

 

《바그너의 경우》에서 니체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오랜 침묵을 깨고 그를 공개적으로 논박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니체에게 바그너는 음악을 병들게 한 자이자, 음악이 데카당스 예술로 변질되어가는 운동을 가속시킨 주범이자 데카당스 미학의 설교자이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자연과 건강과 명랑과 젊음과 덕으로의 회귀의 정신이 없는, 하찮은 것들에 편승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래서 바그너를 질병=자유의지가 결여된 자=방울뱀의 행운을 누리는 늙은 거장=지쳐버린 약자를 유혹하는 자로 매도한다. 한때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로, 그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던 니체는 말년에 이렇듯 그를 데카당스의 주범으로, 심하게는 당대의 가장 비열한 아첨꾼으로 폄하한다. 그리고 바그너가 일반인(한때 자신을 포함해서)에게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당대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결국 니체에게 바그너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데카당스 예술가이자, 데카당스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성에 대한 총괄 개념이다.

 

《우상의 황혼》어떻게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지

 

《우상의 황혼》에서 니체는 모든 가치의 전도를 위해 우상들을 캐내고, 우상들을 망치로 부숴버리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이성=덕=행복이라는 공식, 변증법, 독일인들을 우매하게 만드는 알코올, 그리스도교, 음악 등이 우상으로 등장한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에서 니체는'내가 용인할 수 없는 자들'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덕의 투우사), 루소(자연적인 불결함으로의 자연의 복귀), 단테(무덤 위에서 시를 짓는 하이에나), 빅토르 위고(부조리의 바다에 있는 등대), 칼라일(소화 안 된 점심 식사로서의 염세주의), 졸라(악취를 내는 기쁨) 등을 지적하고 있다.< 철학에서의'이성'>에서는 철학자들의 특이 성질이 우상으로 등장한다. 역사적 감각의 결여, 생성에 대한 증오, 실제적인 것의 박제, 개념의 숭배, 감각과 육체에 대한 불신과 경시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나아가 니체는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로 세계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방식은 그것이 그리스도교이든, 형이상학이든 데카당스의 징후에 지나지 않으며, 철학자들의 참된 세계라는 것은 가상이고, 무의미한 담론에 불과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만이 유일한 실제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우상의 황혼》에서 <어떻게'참된'세계가 결국 우화가 되어버렸는지. 어떤 오류의 역사>는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여기서 니체는 아주 간결한 몇 단어와 형식으로 형이상학의 역사를 오류의 역사로서 개괄한다. 플라톤에서부터 그리스도교를 거쳐 칸트에 이르는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라는 이분법의 변천사가 제시되고, 실증주의를 거치고 니체에 이르러서 이분법 자체가 파괴되어버리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오류의 역사의 종말은 곧 형이상학적 사유의 종말이고 이 종말은 니체에게서 가능해진다.

 

《안티크리스트》모든 가치의 전도

 

후기 저작 대부분에서 니체가 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내용은 매우 불경하고 때로는 세속적이기까지 한다. 그는 신이 속 좁고 감상적인 존재로 변했다고 불평한다.《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가장 골칫거리였던 데카당스 문제를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시킨다. 니체가 이 작품을 쓸 무렵에 이미 그리스도교는 독일 내부와 외부에서 일종의 노쇠해버린 타성으로서, 옛 허섭스레기로 간주되는 경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도덕적이고도 종교적인 실천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서서히 하나의 불운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경향은 니체의《안티크리스트》를 환호하며 받아들였지만, 니체가 서문에서"이 책은 극소수를 위한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니체의 공격은 비단 종교나 도덕으로서의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현대 세계의 가치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공격한다. 바꿔 말하면 현대 세계의 가치 전체에 대한 비판이다. 니체는 현대의 철학, 현대의 정치, 정의, 인간의 평등, 민주주의 등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것을 모든 것을 통찰되고 비판한다. 그래서 니체에게 그리스도교의 멸절은 사실상 '모든 가치의 전도'가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반대법> 제6조에서 니체는 신, 구세주, 구원자, 성자라는 말들은 욕설이나, 범죄자에 대한 표지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의 무신 사상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사람을 보라》니체 자신을 보라

 

니체에 의해 씌어진 반(半)자서전적인 저서로, 겸손과는 먼 니체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왜 나는 하나의 운명인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니체는 "내 말을 들으시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이오. 무엇보다도 나를 혼동하지 마시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제자로, 자신의 작품들을 자신의 삶과 격정의 표현으로, 자신의 작품들이 높은 곳의 공기임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는 자신의 유일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니체라는 자의 본보기적인 위대함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시대에 대고 비난을 퍼부어댄다. 그가 집중하고 있던 여러 문제들이 이제 니체 개인과 그 자신의 문제들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니체는 이 작품 안에서《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아침놀》《 즐거운 학문》《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우상의 황혼》《 바그너의 경우》 등 그의 모든 저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반추하고 있다.

 

《디오니소스 송가》니체 사상의 시상 묶은 첫 시집

 

니체는《디오니소스 송가》를 출간하면서 몇 번에 걸친 시집 출간 계획을 마침내 실현시킨다. 니체는 아포리즘과 잠언 형식으로 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서 "나의 야심은 다른 사람들이 책 한 권으로 말하는 것을 열 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몇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디오니소스 송가》는 니체 최후의 합리적, 추상적, 이론적인 사유에서 떨어져서 찌를 듯한 아름다움을 갖춘, 형식과 내용을 한 가지로 확정짓지 않은 잠언집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 대 바그너》대척자로서의 바그너

 

이 작품의 핵심은 바그너와 니체 자신의 대립적인 관계이다. 바그너와의 관계에 대해 신중하게 고찰하고 있는 이 작품은《바그너의 경우》의 반향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졌다. 서문에서 니체는"우리들은 대척자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바그너의 음악은 삶과 삶의 빈곤에 고통받는 자의 작업이고, 도취와 마비를 찾는 데카당의 작업으로 다시 한번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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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3-07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르네상스에 대해서도 고민했었군요~!

그리스도교 탄핵....지금도 역시 니체의 발언은 유효한 듯합니다. 조용기가 200억 횡령 기사를 보니...기독교 대형 집회를 보니, 할 말을 잃게 되더군요...에휴~

oren 2016-03-07 17:35   좋아요 0 | URL
니체는 도대체가 모르는 것도 없고, 읽지 않은 책들도 거의 없는 듯해요. `르네상스`에 대해서도 놀라우리만치 깊은 이해와 탐구를 보여주는데, 아무래도 바젤 대학에서 예술사를 가르쳤던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이 컸던 듯합니다. 당대의 학자들 가운데 니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불렀던 인물이었지요. 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은 아직도 `르네상스`에 대해 쓰여진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한 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듯하고요. 알라딘 책소개에도 그런 내용이 나오네요..(고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이 책 이후로 `르네상스`라는 말이 역사상의 일반 용어로 쓰이게 되었을 만큼 르네상스사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명저이다...)

탕기 2016-03-07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부르크하르트를 존경했군요! 보르헤스-쇼펜하우어-니체로 맞물리던, 어떻게든 저와 니체의 연결고리를 만들려고 하던 제게 `부르크하르트`라는 또 하나의 퍼즐이 있었던 것이었군요 ^^ 예술 공부를 하는 제가 부르크하르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애당초 없으니, 이것도 운명일지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마저 듭니다. 부르크하르트의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은, 어쩔 수 없이 부분 부분 읽어왔지만 모든 글들이 단편의 드라마를 연상케 합니다. `학술`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유려한 느낌이죠. 제 생각에 그런 느낌은 부르크하르트가 (다소 주관적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질 수도 있을) 수많은 형용사들을 사용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니체만큼은 물론 아니겠지만요 ^^

오늘도 니체의 구절들을 이면지에 적어가겠습니다. ˝나의 물음은 르네상스의 물음이다˝라는 니체의 선언에서 제가 부르크하르트의 글과 여태 공부한 르네상스에서 맡았던 고대의 향기가 굉장히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니체의 입장에서 보면 사제 신분으로 한 달 정도 로마에서 지냈던 루터가 교회를 뒤엎으려다가 도리어 교회를 세우고 말았으니, ˝헛수고 ㅡ 이것은 항상 독일인들의 작품이다˝라고 일갈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저 니체의 힘을 제가 감당하지 못할 뿐이지만 말이죠!

oren 2016-03-07 22:36   좋아요 0 | URL
역시 탕기 님께서는 부르크하르트가 쓴, 저는 이제서야 겨우 알게 된 저 유명한 책을 진작에 읽으셨군요! 아무튼 니체는 부르크하르트에 매료되어 그의 강의도 직접 여러 번 들었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안티 크리스트>에서는 그의 말을 단지 한 번밖에 인용하지 않았더군요. 제가 저 위에 써 놓은 인용문 61절 중간쯤에 있는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폐지되고 말았으니!˝라는 대목이 바로 부르크하르트의 언급이었던 모양입니다.(주석엔 한 줄만 나옵니다. J. 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Leipzig, 1869), 91∼95)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니체가 다른 책에서 부르크하르트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덧붙여 봅니다.
* * *
예외 중의 예외를 제외하고 보면, 교육의 첫 번째 선결 조건인 교육자들이 결여되어 있다 : 그래서 독일 문화가 하강하는 것이다. ㅡ 정말 진귀한 그 예외 중의 한 명이 바로 바젤 대학에 있는 나의 경외하는 지기인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 바젤 대학이 인문학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그의 덕택이다.
- 니체, 『우상의 황혼』, <독일인에게 모자란 것> 중에서
 


(밑줄긋기)


아담 스미스의 경우 662

아담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국부론(國富論: The Wealth of Nations)』의 저자로서 근대경제학의 창시자로서만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는 결코 인간사회의 경제활동의 측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협의(狹意)의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근대 시민사회 형성기에 있어서 인간과 사회의 기본문제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노력하였던 사회철학자(社會哲學者)였다. 그는 과학 방법론, 수사학(修辭學), 신학, 문학, 윤리학, 법학, 역사 이론, 국가론, 정치경제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하나의 거대한 학제적(學際的) 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던 철학자였다. 당시는 학문이 아직 각각의 독립분야로 완전히 분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대 사상가들의 경우 학제적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만, 아담 스미스의 경우처럼 거대한 학제적 체계수립에 어느 정도 성공한 예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하겠다.


도덕감정의 기초는 동감의 능력 672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의 기초 내지 내용은 인애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가 속한 계층이나 계급에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동감(sympathy)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의 『도덕감정론』의 서두에서, <아무리 인간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행·불행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요인·원리가 인간의 본성 속에 명백히 내재하여 있다. ······ 타인의 슬픔을 보고 슬픔을 함께 느끼는 감정의 존재는 증명을 요하지 않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고, 그 사람이 얼마나 선하냐 유덕하냐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본원적 감정의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동감(同感)이란 자기를 타인의 입장과 동일한 입장에 놓고, 타인이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 환언하면 상상에서의 역지사지(易地思之: imaginery change of situation) 능력을 전제한다.


상호동감의 즐거움 673

상호동감(相互同感)의 즐거움(pleasure of mutual sympathy)은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감정과 동일한 이웃의 동감(fellow-feeling)을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고, 그 반대로 이웃의 동감의 부재(不在)를 느끼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없다.>


보통 사람들이 정의를 판단하는 근거는 효용이 아니라 동감 681

아담 스미스는 결코 일상의 부정의에 대한 처벌을 시인하는 근거가 정의의 공공적 효용성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가장 우매하고 사려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사기·배신·부정을 혐오하고 그런 자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고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정의를 판단하는 근거는 효용(效用)이 아니라 동감(同感)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동감정의론(同感正義論)이 실은 중상주의적인 각종 정책·법에 대한 비판이라는 실천적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은 지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공공복리, 효용이 정의의 근거라고 하는 사고야말로 국가에 의해 강제할 만한 법의 범위를 부당하게 확대시켜, 중상주의적인 각종 정책·법의 존재를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고, 종국적으로 <자유의 체계>에 대한 부정을 결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부론』에 나타난 아담 스미스의 사상적 특색과 특징 689-690

『국부론』은 경제학의 고전으로서 그 내용이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상론은 피하기로 한다. 다만, 『국부론』에 나타난 그의 두 가지 사상적 특색과 특징만을 강조하고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의 사상적 특색은 『도덕감정론』에서 전개한 그의 <동감(同感)의 원리>와 『국부론』에서 전개한 그의 <교환(交換)의 원리>=<경쟁(競爭)의 원리>=<시장(市場)의 원리>가 실은 동일한 논리구조 위에 서 있다는 사실과, 두 원리가 모두 중세적 속박에서 인간의 이성뿐 아니라 본능까지 해방된 사회에서 이기심이 사회적 선(즉, 公益)이 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 내지 조건임을 밝힌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원리가 동일한 논리구조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양자가 공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하는 자연적 성향에서 출발함을 의미한다. 동감의 원리란, 이미 본 바와 같이, 인간은 상호동감(mutual sympathy) 속에서 큰 희열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고, 교환의 원리는 인간의 본성 속에는 거래·교역(交易)·교환하려는 성향 내지 충동이 내재하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스미스는 교환성향은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발견되는 성향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원인 모두 인간의 이기적 충동을 사회적 선(善)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기적 충동을 중립적 제3자 혹은 공정한 방관자의 동감을 얻어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제하려는 성향이, 상호동감이 인간에게 주는 희열 때문에 자연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동감의 원리는 곧 이기심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원리가 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행동의 동기(動機)에 있지 않고, 그 행위에 대한 중립적 제3자의 동감(同感)의 성립 여부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성에 내재하는 교환성향도 실은 그 성립의 계기가 인간의 이기적 동기에 있다. 아담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모든 동물류에서 각 동물은 성숙하면 완전 독립하며, 자연상태에서는 다른 동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그가 만약 그들 자신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휘되도록 할 수 있다면, ······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 ······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오, 하고 ······.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적 동기가 교환을 통하여 쌍방 모두에게 유리한 소위 공익(公益)으로 교환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교환성향이 없으면 공업이 성립될 수 없고, 분업이 없으면 부(富)와 재(財)의 해마다의 증대가 달성될 수 없기 때문에, 교환성향 자체는 이기적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교환과정 자체는 공익의 증대, 즉 사회적 선(善)을 결과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교환성향이 뒤에 상론할 공정·자유경쟁적 시장질서 하에서 작동할 때 공익에의 기여(자원의 효율적 배분)는 더욱 커진다. 예컨대, 교환질서가 경쟁적일수록 제조업자는 보다 양질의 상품을 보다 저가로 공급하려고 노력하게 되므로, 노력의 동기 자체는 이윤추구(利潤追求)라는 이기적 동기일지라도 그 사회적 결과는 소비자 이익의 증대라는 공익(公益)에의 봉사를 가져온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이기심, 자애심(自愛心)은 동감의 원리에 의해 인간 내부에서 견제를 받으며, 동시에 교환의 원리, 특히 경쟁적 교환의 원리에 의해 외부적으로도 공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인도되는 것이다.

두 번째의 그의 사상적 특징은, 그가 단순한 자유방임론자(自由放任論者)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아담 스미스는 자유방임론자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두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사회적 공공선(公共善)이 결과로 나온다고 주장한 듯이 이해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을 <소극적 자유방임론>이라고 부른다면, 그는 결코 소극적 자유방임론자가 아니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적극적 자유방임론자>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스미스의 <방임(放任)>은 인간과 인간 사회에 내재하는 자연법칙의 해방, 중세적 또는 중상주의적 각종 규제로부터의 인간의 활동력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오늘날 통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듯이, <현실>을 그대로 방임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오늘날 신고전학파(新古典學派)의 주류경제학자들 중에서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오해의 주된 요인은 아담 스미스의 자연법적 세계관의 배경, 환언하면 그의 체계에서의 자연신학과, 윤리학, 『도덕감정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 있다고 보인다. 또한 아담 스미스는 현실의 경제·시장행태 및 구조에 대한 자세한 관찰, 경험적·실증적 분석을 중시했는데 반하여, 오늘날의 신고전파 경제학의 주류는 다분히 현실에 대한 추상적 인식 위주로 나아가고 있는바,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에서도 위와 같은 오해가 발생하는 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의 적극적 자유방임론은 자유스럽고 공정한 경쟁시장의 메커니즘의 작동을 전제로 한 방임이고, 자유·공정경쟁이 제한·방해되는 현실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의미의 방임은 아니다. 그는 동업조합의 배타적 특권들을 보증하는 법령들을 맹렬히 공격했을 뿐 아니라, 상인의 독점이윤 추구 본능이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생기는 각종 비능률, 불공정을 크게 경계·반대하고 있다. 주의할 것은 그는 결코 이기심, 사적 이익추구의 동기에 대한 예찬론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만 그러한 동기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동기가 일정한 경우, 즉 자유·공적 경쟁시장 하에서는 공익·공적 복지의 증대로 연결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자유·공적 경쟁시장을 전제하지 않는 이기심, 환언하면 사적 이윤추구 동기는 결코 사회적 선이 될 수 없다. 그는 『법학강의』제2부에서 이미 <독점은 공공의 풍요를 파괴한다(Monopolies destroy public opulence)>, <기업의 배타적 특권을 인정하는 것도 동일한 효과가 있다>라고 주장하고, 『국부론』의 제1편 11장 결론에서도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항상 상인과 제조업자의 이익이 된다. ······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항상 공공의 이익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경쟁을 제한하면 상인과 제조업자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료 시민들에게 불리한 세금(예: 상품의 가격인상)을 부과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상인과 제조업자의 이윤은 자연적인 수준 이상으로 증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급이 제안하는 어떤 새로운 상업적 법률·규제들에 대해서는 항상 큰 경계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하며, 그것들을 매우 진지하고 주의 깊게 오랫동안 신중하게 검토한 뒤에 채택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결국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의 주장은 <반독점(反獨占)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방임은 경제에 대한 정부의 무조건적 불개입(즉, 放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개입과 불개입(不介入)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다.

즉, 독점을 결과하는 기존의 각종 정부 규제에 대해선 불개입 원칙(규제철폐), 자유방임의 원칙이 준수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경쟁을 제한하는 기존의 독과점구조(즉, 동업조합의 자율규제)에 대해서는 개입원칙, 즉 반독점정책(反獨占政策)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스미스적 자유방임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질서정책론자(질서정책론자: Ordnungspolitikust)라 하겠다.


아담 스미스 이론 체계의 취약점 696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살던 시대적 상황, 역사적 발전단계에 의해 그의 인식의 범위가 규제되고 한계지어진다. 아담 스미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간 200여년의 시민사회의 변화·변모 과정을 돌이켜볼 때, 그의 체계에서 하나의 취약점이 쉽게 발견된다. 그것은 배분적(配分的)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즉, 만일 중세적 속박, 중상주의적 규제에서 해방된 자유경제가 심대한 배분적 부정의(즉, 소득분배상의 不公正)를 양산한다면 과연 시민사회의 질서·조화·발전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배분적 정의를 하나의 미덕(virtues)으로 보았고 배분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하나의 불완전한 권리(imperfect right)로 파악하고 있다. 즉, 요구는 할 수 있으나 강제할 수는 없는 권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정의론을 과정적 정의 = 교환적 정의(完全 權利)에 엄격히 국한하여 전개하고 있다.


당면 문제
698

단순상품생산 양식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본격화되면서, 한쪽에는 노동만을 가지고 생산에 참가하는 노동자와 다른 쪽에는 생산수단만을 제공하며 생산에 참가하는, 즉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資本家)가 등장하여, 자본과 노동의 완전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재화는 더 이상 노동의 생산물이라고만 보기 어렵게 되고, 노동가치설은 더 이상 자유(自由)와 공정(公正)의 양립을 증명하는 이론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게 된다. 결국 아담 스미스의 낙관론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그리하여 아담 스미스 이후 200여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공정(즉, 配分的 正義)의 양립 문제를 둘러싼 고뇌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고, 오늘날에도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자유인의 창의를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존중하고, 자유경쟁 시장질서의 조화와 효율을 믿는, 모든 <자유의 체계>의 신봉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가 바로 자유(自由)와 공정(公正)의 양립을 가능케 하는 사회구성 원리, 사회조직 원리의 제시이다. 이는 방법론적으로는 아담 스미스의 경우와 같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및 탐구, 새로운 시각의 정립에서 출발해야 하고, 사회의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실증적 연구에 기초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와 공정의 양립(兩立) 원리가 명쾌히 제시될 때,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국가독점자본주의·  탈공업화·자원 부족과 환경위기의 시대에 충분히 합리성과 현실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아담 스미스의 <자유의 체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고, 비로소 우리는 사상사적으로 근대를 극복하고 현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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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한낱 2펜스짜리 내기에 불과 534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이에 수반될 수 있는 많은 유익한 것들에도 불구하고 한낱 2펜스짜리 내기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어떤 심각한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전혀 없는 소소한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내기에 걸린 판돈의 액수가 아니라 게임의 적절한 방법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내기에 걸린 판돈을 따는 데 둔다면, 결국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원인(原因)에 맡기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영원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빈번한 비통과 수치스러운 실망에 맡기는 셈이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행복을 훌륭하게, 공평하게, 그리고 영리하고 능숙하게 게임을 치르는 데 둔다면,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행위의 적정성에 둔다면, 우리는 그것을 적절한 규율(規律), 교육, 그리고 주의력에 의해 우리의 능력과 통제 범위 내에 두는 것이 된다. 우리의 행복은 완전히 안전하고, 운(運)과는 무관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우리의 능력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되고,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 어떤 두려움이나 걱정을 할 필요도 없고, 또한 어떤 비통한 실망이나 심각한 절망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노년기의 허약함과 노쇠함 550

선량한 성격의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세계의 문명화된 지역 전체의 절대적인 통치자로서 자신의 운명(運命)에 대해 불평할 어떤 특수한 이유도 분명히 없었으며, 그는 사물의 일상적인 진행과정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는 것을, 그리고 평범한 관찰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그런 부분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꼈음에 분명하다.

그는, 노년기에도 청년 시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행위의 적정성(適正性)과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으며, 노년기의 허약함과 노쇠함은 꽃이 피어나듯 하는 청년기의 생기발랄함과 마찬가지로 천성(天性)에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Marcus Aurelius, 『명상록(Meditations)』제3장 2절, 제9장 3절), 청년이 소년 시절의 종말(終末)인 것처럼, 혹은 성년이 청년의 종말인 것처럼, 사망 역시 노년의 종말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의 쾌락과 고통 564

정신의 쾌락과 고통은, 비록 궁극적으로는 육체의 그것에서 기원하지만, 원래의 육체의 감정보다 훨씬 더 크다. 육체는 단지 현재 순간의 감각만을 느낄 따름이지만, 정신은 과거나 미래의 감각까지도 느낀다. 과거는 회상(回想)에 의해서, 미래는 예상에 의해서 그것을 느끼게 되는데, 따라서 정신은 육체보다 쾌락도 고통도 훨씬 더 많이 느끼게 된다. 우리가 최대의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우리를 주로 괴롭히는 것은 현재 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에 대한 괴로운 회상이거나 또는 더욱 무서운 미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한다.

매 순간의 고통은, 만약 그 자체만을 생각하고 이전에 있었던 고통과 이후에 있게 될 고통으로부터 단절시킨다면, 그것은 사소한 것이 되고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육체가 겪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고통은 이것이 전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최대의 쾌락을 누리고 있을 때, 우리의 육체적 감각, 현재 순간의 감각은 우리의 행복 중에서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을 뿐이며,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주로 과거에 대한 유쾌한 회상이나 미래에 대한 더욱 즐거운 기대(期待)에서 생겨나며, 그리고 언제나 쾌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인류 전체의 행복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감정 579

어느 한 거대한 공동체의 행복을 목표로 한 행동들은 더 작은 단체의 행복만을 목표로 하는 행동들보다 더욱 큰 자애(慈愛)를 표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그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큰 미덕(美德)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감정들 중에서 최대(最大)의 미덕은 모든 지적(知的) 존재, 즉 인류 전체의 행복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감정이다. 이와 반대로, 어떤 점에서든 미덕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감정들 중에서 최소의 미덕은 한 개인의 행복, 예컨대 한 아들, 한 형이나 아우, 한 친구의 행복 이외에 그 이상의 어떤 행복도 목표로 삼지 않는 감정이다.


미덕의 완전성 580

미덕의 완전성은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가능한 최대의 이익(利益)을 촉진하도록 지도하고, 우리의 모든 저급한 감정을 인류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종속시키고, 우리 자신을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우리 자신의 번영이 전체의 번영과 일치하거나 혹은 전체의 번영에 기여하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에 존재한다.


자애심 :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는 천성
580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자애심(自愛心: self-love)은 어떤 정도로도, 어떤 방면에 있어서도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는 천성이다. 그것이 공동의 이익(利益)을 방해할 때에는, 그것은 언제나 악덕(惡德)이 된다. 그것이 각 개인으로 하여금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돌보도록 할 때에는, 그것은 단지 무죄(無罪)일 따름이며, 따라서 그것은 칭찬받을 가치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떤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된다. 자애적(慈愛的)인 행동들에는, 비록 그것이 다소 강한 자리(自利: self-interrst)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이유에서 더 많은 미덕(美德)이 있다, 그들은 자애적(慈愛的)인 천성의 힘과 활력을 나타낸다.


맨더빌 박사의 철학 체계 590

악덕과 미덕의 구분을 완전히 없애버린 듯이 보이는 또 다른 철학체계가 있는데, 그 때문에 이 철학체계의 경향은 전체적으로 유해하다. 맨더빌(Mandeville) 박사의 철학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학자의 견해는 거의 모든 방면에서 틀렸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떤 특정한 태도로 인성(人性)의 일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들을 관찰하면, 처음에는 그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거칠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생동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멘더빌 박사의 말솜씨로 묘사되고 과장되어 있는 이 표면적 현상들은 그의 학설에 일종의 진실성과 가능성의 분위기를 제공해주고 있는데,
숙맥(菽麥)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속아 넘어가기 쉬운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591

그가 관찰한 바로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행복보다는 자신의 행복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며, 진심으로 자신의 번영보다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언제나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는 것이다.


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이자 속임수에 불과 591∼592

인간의 다른 모든 이기적인 격정들 가운데 허영심(虛榮心)이 가장 강렬한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의해 쉽사리 우쭐해지고 기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 그는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자애심(自愛心: self-love)에 대해 매우 유쾌하게 느껴지고, 따라서 그들은 반드시 자신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들의 만족감을 표시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의 그런 행동으로부터 기대하는 쾌락은, 그의 생각에도, 이것을 얻기 위해 그가 포기하는 이익을 능가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행동은 사실상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것이고, 또한 천박한 동기에서 나온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행동은 전혀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우쭐대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런 무사(無私)의 동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의 행동은 그 자신의 눈에나 또는 다른 사람의 눈에나 어떤 칭찬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모든 공익정신은 단지 인류에 대한 기만(欺瞞)이자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처럼 자랑을 많이 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그리고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서로 많이 갖추려고 노력하는 인류의 미덕이라는 것은, 사실은 단지 자존심에서 생겨난 아첨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허영의 과오
592∼593

나는 다만, 영예롭고 숭고한 것을 행하려는 갈망(渴望)과, 스스로를 존중과 시인(是認)의 적절한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갈망을 허영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적정성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노력할 것이다. 심지어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명예와 평판에 대한 애호, 진정으로 존중받을 만한 수단을 통해 존중받고자 하는 애호까지 허영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전자는 미덕(美德), 즉 인성(人性)에서 가장 숭고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에 대한 애호이고, 후자는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로서, 이것은 앞의 것보다는 분명히 열등하지만 그러나 그 고상한 정도에 있어서는 앞의 것 바로 다음가는 격정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허영(虛榮)의 과오(過誤)가 있다. 전혀 칭찬받을 가치가 없거나 또는 그가 기대하는 정도로 칭찬받을 가치가 있지도 않은 특성에 대해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즉 자신이 착용하는 옷이나 장신구의 시시한 장식 또는 동등하게 천박한 표현인 자신의 일상적인 행동거지에 근거하여 칭찬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확실히 칭찬받을 자격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님을 그 자신이 완전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도 허영의 과오가 있다. 자신이 어떤 일에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면서 마치 자신이 그 일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으스대는 골빈 멋쟁이(coxcomd), 자신이 결코 한 적이 없는 모험을 한 척하면서 그것에 대한 공로를 차지하려는 미련한 거짓말쟁이(liar), 자신에게 아무런 권리도 없는 책의 저자인 양 자처하는 우매한 표절자(剽竊者: plagiary), 이들 모두도 허영심이란 격정을 가진 사람들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분명히 표현되지 않는 존중과 시인(是認)의 감정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감정 자체보다는 자신에게 행해지는 시끄러운 칭찬의 표현과 환호를 더 좋아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칭찬이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직함(職銜)을 좋아하고, 인사받기 좋아하고, 방문 받기 좋아하고, 시중 받기 좋아하고, 존경받고 주목받고 있다는 모양새를 갖추어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이목(耳目) 끌기를 좋아하는 사람, 이들 역시 허영의 과오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경박한 감정들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경우(즉, 진정한 미덕에 대한 애호와 진정한 영광에 대한 애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인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위대한 격정들이라면, 이것은 인류의 가장 천박하고 가장 가져서는 안 될 격정들이다.



인간의 덕행은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 598

맨더빌 박사는 경박한 허영의 동기를 통상 유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행위의 근원으로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덕행이 기타 많은 점에서도 불완전함을 지적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덕행은 그것이 자칭(自稱)하는 바의 완전한 자아극복(自我克服:self-denail)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 격정의 정복이 아니라 통상 우리 격정의 감춰진 방종(放縱)에 불과하다고 한다. 쾌락에 대한 우리의 자제(自制: reserve)가 최고의 금욕적 절제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그는 그것을 순수한 사치(奢侈)와 육욕(肉慾)으로 취급한다. 그에 의하면 인성(人性)의 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초과하는 모든 것은 사치이며, 따라서 깨끗한 셔츠나 편리한 주택의 사용도 일종의 악이라는 것이다. 남녀가 가장 합법적으로 결합되는 경우의 성욕(性慾)의 충족까지 그러한 격정을 가장 유해(有害)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경우의 육욕(肉慾)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는 이처럼 아주 저렴하게 실행될 수 있는 절제나 정결(貞潔)을 비웃는다.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의 설명 속에 들어있는 교묘한 궤변은 언어의 애매모호함에 의해 은폐되어 있다.


『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 599∼600

맨더빌 박사의 저서(『꿀벌들의 우화(The Fable of the Bees)』)의 큰 오류는, 모든 감정들은, 그것의 정도 및 그것이 향하는 대상 여하를 불문하고, 전부 악덕(惡德)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제의 감정, 혹은 다른 사람들의 당위적 감정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 허영심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결론, 즉 개인의 악행은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을 확립한 것은 바로 이러한 궤변에 의해서이다. 장엄(壯嚴)한 것에 대한 애호, 우아한 예술품과 생활수준을 제고하는 것들에 대한 취향, 복장과 가구와 마차 등 사람을 유쾌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취향, 건축·조각·미술과 음악에 대한 취향이, 어떤 불편도 없이 이러한 격정에 빠져들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사치·육욕(肉慾)·겉치레로 간주된다면, 분명히 사치와 육욕과 겉치레는 공공의 이익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상스러운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그가 생각한 이러한 특성들이 없으면 우아한 예술은 결코 장려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그것은 쓸모가 없어서 틀림없이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맨더빌 시대 이전에 유행했던,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격정들을 완전히 근절시키고 없애버리는 데 미덕이 있다고 본 일부 금욕주의 학설들은 이 방종적(放縱的) 체계의 진정한 기초였다. 맨더빌 박사가 다름과 같은 명제(命題)를 증명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첫째, 인간은 결코 실제로 이러한 격정을 완전히 정복한 일이 없었다. 둘째, 만약 인간이 그 자신의 격정을 보편적으로 정복하게 되면, 그것은 모든 산업과 상업을 종지(終止)시키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인류생활의 모든 업무를 종지시킴으로써, 그것은 사회에 대하여 유해(有害)하다.

그는 이 두 가지 명제 중에서 첫 번째 것을 통해서, 진정한 미덕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소위 미덕이라는 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기(詐欺)이자 기만(欺瞞)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을 통해서는, 개인적인 악행이 없으면 어떤 사회도 번영할 수 없으므로, 개인적인 악행은 공중의 이익(利益)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맨더빌 박사의 체계이다. 비록 이 체계 때문에 이것이 없었을 경우에 비해 더 많은 악행이 야기되었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적어도 다른 원인에서 생겨난 악행들로 하여금 더욱 뻔뻔스럽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그리고 이전에는 결코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함으로 그 부패한 동기(動機)를 공개적으로 선언(宣言)하도록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 602∼603

자연철학을 연구하는 저자가(이하는 맨더빌 박사를 지칭한 말이다. 맨더빌은 본래 의사로서 자연과학자이다-역자) 우주의 위대한 현상들의 원인을 규명한다고 자처하거나,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설명한다고 자처하는 경우, 그런 것들에 관해서는 그는 자기 좋을 대로 이야기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그럴 듯한 범위 내에 있는 한, 그는 우리가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갈망(渴望)과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이나 우리의 시인(是認)과 부인의 감정이 생겨나는 근원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하겠다고 제안하는 것은 마치 그가 우리가 살고 있는 교구의 여러가지 사정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겠다고 자처하는 것과 같다.

비록 이런 경우에조차, 게으른 주인이 자신을 속이는 집사(執事)를 믿는 것처럼, 우리 역시 속아 넘어가기 쉽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의 설명을 그대로 다 믿고 넘어갈 수가 없다. 적어도 그 중의 일부 내용들은 정당해야 할 것이고, 매우 과장된 내용들마저 약간의 근거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에 늘 그래 왔듯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슬쩍 한번 살펴보는 정도의 관찰에 의해서도 그의 사기행각(詐欺行脚)은 들통 나고 말 것이다.
천연적인 감정의 원인으로서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천성(天性)이나 또는 그것과는 어떤 유사성도 전혀 없는 원리(原理)를 제시하고 있는 저자는, 가장 분별력도 없고 가장 경험도 없는 독자에게까지도 황당하고 가소롭게 보일 것이다.


배반(背叛)과 기만(欺瞞) 641

배반(背叛)과 기만(欺瞞)은 극히 위험하고 극히 두려운 악덕이다. 그리고 동시에 매우 용이하게, 그리고 많은 경우 매우 안전하게 빠져들게 되는 악덕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악덕들보다 이것에 대해 더 많은 경계심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모든 사정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들에 대하여 치욕의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여성에게 있어서의 정절(貞節)의 상실과 유사하다. 정절은,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하는 미덕이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양쪽 모두에 관해서 똑같이 민감하다. 정절의 파기는 회복할 수 없는 불명예를 준다. 어떤 상황이나 어떤 유혹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떠한 슬픔이나 또는 어떠한 후회도 그것을 속죄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민감하기 때문에, 심지어 강간(强姦)당한 것까지도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음속으로 스스로 무고(無辜)함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 더럽혀진 육체를 씻어 주지는 못한다.


맹세의 위반, 신의의 파기
641

맹세(faith)의 위반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 맹세가 엄숙하게 선서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가장 무가치한 인간에 대하여 이루어진 것일지라도 그렇다. 신의(信義: fidelty)는 너무나도 필요한 미덕이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어떤 것도 빚진 일이 없는 사람이나, 우리가 합법적으로 죽여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조차 신의는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이다. 신의를 파기한 사람이, 자신이 약속을 했던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거나, 그 약속을 지키는 것과 다른 어떤 존경할 만한 의무의 이행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파기했다고 주장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이러한 사정들은 그 불명예를 경감시켜 주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완전히 씻어 주지는 못한다. 그는 어느 정도의 수치심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어떤 떳떳치 못한 행동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엄숙하게 지키겠다고 공언(公言)했던 약속을 어겼다, 그리고 그의 성격은, 비록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오점을 갖게 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조롱거리가 되는데, 그것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의 모든 본능적인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들 중의 하나
648

신뢰를 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고 지휘하고 싶은 욕망은 우리의 모든 본능적인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한 것들 중의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욕망들은 아마도 본능(本能)으로서, 이 본능 위에 언어(言語)의 관능(官能), 즉 인성 특유의 관능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동물도 이런 종류의 관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다른 어떤 동물들에게서도 자기 동류(同類)들의 판단과 행위를 지도·지휘하고 싶어 하는 어떤 욕망도 발견할 수 없다. 위대한 야심, 남들보다 우월하고자 하는 욕망, 남들을 지도·지휘하고자 하는 욕망은 전적으로 인류 특유(特有)의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언어는 야심을 위한, 남들보다 우월하기 위한, 남들의 판단과 행위를 지도·지휘하기 위한 위대한 도구이다.


대화와 교제의 큰 즐거움
651

대화와 교제의 큰 즐거움은 감정과 의견이 어느 정도 일치하고 속마음들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는 데서 생겨나는데, 그것은 수많은 악기(樂器)들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고 또한 서로 박자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쾌한 조화는 감정과 의견의 자유로운 교류(交流)가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모두는 서로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자 하고, 서로의 가슴속 깊이 들어가서 그 진실한 감정과 정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천연의 격정에 탐닉하게 하는 사람, 자신의 가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해 주는 사람, 말하자면 자신의 가슴의 문을 활짝 열어 주는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후한 대접을 베풀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양호한 기질(氣質)을 가진 사람은, 만약 그가 자신이 느끼는 진실한 감정을, 그리고 그가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용기가 있다면,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밖에 없다.


고대의 도덕철학자들 659

고대의 도덕철학자들 중에서는 정의(正義)의 준칙(準則)들을 일일이 열거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을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다. 키케로(Cicero)는 그의 『의무론(Offices)』에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Ethics)』에서, 기타 모든 미덕들을 다룬 것과 동일한 일반적인 방식으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키케로와 플라톤의 법학 중에서 우리는, 그들은 모든 나라의 실정법(實定法)에 의해 강제로 실행되어야 할 천연적 공평(公平: equity)의 준칙들을 열거하려고 어느 정도는 시도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법학 중에서는 이런 종류의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의 법률은 치안법(治安法: laws of police)이지 정의의 법률(laws of justice)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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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와 명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신중 409

요컨대, 개인의 건강, 재산, 지위와 명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신중(愼重)은, 비록 대단히 존중할 만하고, 심지어 온후하고 유쾌한 성품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모든 미덕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거나 또는 가장 고상한 미덕은 아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존중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격정적인 사랑이나 감탄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살가운 정을 덜 느끼는 경향
418-420

어렸을 때 어떤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떨어졌다가 성인이 된 후에야 돌아온 자식에 대하여 그 아버지는 살가운 정을 덜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 아버지는 그 자식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따뜻한 애정이 덜하고, 그 자식은 부모에 대하여 자식으로서의 효경심이 덜하기 쉽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교육을 받은 형제자매들도 서로 간에 느끼는 애정의 정도가 이처럼 감소되기 쉽다.

그러나 책임감과 도덕심으로 앞에서 말한 일반법칙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러한 자연적 감정과, 비록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비슷한 감정을 만들어낼 것이다. 부모나 자식, 형제자매들은 그들이 비록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서로에게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 그들은 그처럼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그런 우애를 누릴 때가 언젠가는 오리라는 기대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서로 만나게 될 때까지 떨어져 있는 자식이나 형제는 종종 특별히 좋아하는 자식이나 좋아하는 형제가 된다. 그들은 서로를 헤친 적이 결코 없으며, 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억할 가치가 없는 어린 시절의 장난으로서 잊혀진 지 이미 오래다. 그들이 서로에 대해 듣는 소식들은, 만약 그 소식들이 상당히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전해진다면, 모두 매우 듣기 좋고 호의적인 것들이다. 곁에 있지 않은 아들이나 형제는 항상 가까이 있는 아들이나 형제들과 같지 않지만, 여전히 모두 완전한 아들이고 완전한 형제들이다. 가장 낭만적인 희망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그런 사람들과의 대화와 우애 속에서 누리게 될 행복이다. 그들이 서로 만났을 때에는, 그들은 가족들의 애정을 구성하는 요소인 습관적 동감(同感)을 인식하는 성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 역시 마치 그들 사이에는 실제로 그러한 동감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우려하는 것은, 시간의 경과와 실제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더 친밀하고 서로를 잘 알게 됨에 따라 그들은 흔히 서로에게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습관, 기질, 성향 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습관적 동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가족들 간의 애정이라 불리는 그런 진실한 본성과 그 기초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쉽사리 적응할 수 없다. 그들은 그동안 서로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상황에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지금은 진지하게 서로 적응하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빈번한 일상적인 대화와 교제가 그들에게 주는 기쁨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들은 서로 간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그리고 겉으로는 서로를 점잖게 대하면서,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친근하게 함께 살아온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나 자연히 생기게 되는 것들, 즉 진심으로 만족하고 감미로운 동감을 느끼고, 서로 믿는 바탕 위에서 마음을 터놓고 편안함을 느끼는 것, 이러한 것들을 그들이 완벽하게 누리는 일은 거의 없게 된다.

(나의 생각)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난히 극성스럽게 확산되었던 '한국사회의 해외조기유학 열풍'과 그에 따라 파생된 '기러기 아빠'의 문제점을 갈파한 대목이다.


자기 가정에서 교육시켜라
421

아들을 멀리 있는 귀족학교에 보내서 교육시키고, 젊은 사람들을 멀리 있는 대학에 보내서 교육을 시키고, 젊은 딸들을 멀리 있는 수도원이나 기숙사제 학교에 보내서 교육시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상류층 사회의 가정윤리와 도덕을 손상시키고, 따라서 양국의 상류층 사회의 가정의 행복을 손상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당신도 당신의 자녀들이 부모에 대하여 효도하고 형제자매에 대하여 친절하고 깊은 우애를 가지도록 교육받기를 원하는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친절하고 우애하는 자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교육받도록 하라. 그렇게 하려면 자기 가정에서 교육시켜라. 부모의 집에서 살면서 편리하고 적절하면 공립학교에 매일 통학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항상 집안에서 살도록 하라. 당신에 대한 그들의 존중은 언제나 그들의 행위에 매우 유용(有用)한 제약을 가할 것이 틀림없고, 그들에 대한 당신의 존중은 가끔 당신 자신의 행위에 쓸모없지 않은 제약을 가할 것이다. 소위 공공교육을 통해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으로 인해 거의 확실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한 어떤 종류의 보상도 해줄 수 없다. 가정교육은 일종의 자연적 교육기관이며, 공공교육은 일종의 인위적 교육기관이다. 어떤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정이라는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이름
427

젊은이들의 성급하고 맹목적이며 어리석은 친교(親交)는 통상 상격상의 사소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고, 품행과는 전혀 관계없이 서로 같은 학습, 같은 오락, 같은 취미, 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특이한 원리나 관점에 대한 같은 의견에 근거하고 있다. 변덕이 죽 끓듯이 반복되는 이러한 친교들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비록 그것들이 아무리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우정(友情: friendship)이라는 신성하고 존경할 만한 이름으로 불릴 가치가 없다.


황금률
428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비루한 행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분개는 심지어 때로는 시혜자(施惠者)의 공로에 관한 보편적인 감각을 증대시키기까지 한다. 은혜를 베푼 사람은 자신이 베푼 은혜의 결실을 전부 다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 만약 그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그 사람에게서 그 결실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열 배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자혜(慈惠)는 자혜를 낳는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최대 목적이라면, 그것을 획득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
442

인도주의나 인자(仁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공익정신을 가진 사람은 이미 확립된 권력이나 특권을, 심지어 그것이 개인들의 특권이라 하더라도, 존중할 것이고, 만약 그 특권이 국가를 구성하는 주요 계층이나 사회단체의 것일 때에는 더욱 존중할 것이다. 그 중의 일부 특권들이 어느 정도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되더라도, 만약 그가 그러한 특권들을 거대한 폭력의 행사 없이는 없앨 수 없을 때에는, 그는 자기 스스로 절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이성(理性)과 설득(設得)을 통해서는 사람들에게 뿌리박힌 편견을 없앨 수 없을 때에도, 그는 그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고,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箴言)이라고 키케로(Cicero)가 정확하게 부른 것, 즉 자기 부모에 대해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기 조국에 대해서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말을, 경건하게 준수할 것이다. 그는 공적인 일들을 가능한 한 국민들 속에 이미 단단히 뿌리내려져 있는 습관(習慣)과 편견에 적응시키려 할 것이고, 또 국민들이 복종하기 싫어하는 규제가 없음으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불편들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는 옳은 것을 건립할 수 없을 때에는 틀린 것을 개선하는 것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솔론(Solon)이 그랬듯이, 최선의 법률체계를 세울 수 없을 때에는 국민이 참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것을 세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군주들이 가장 위험한 인물 444

정치가의 관점을 지도하는 데에는 자신들이 제안하는 정책과 법률의 완전성에 대한 일종의 보편적이고 심지어 체계적이기까지 한 관념이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러한 관념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립하려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것도 즉각 수립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 최고도의 오만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판단을 최고의 표준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총명하고 고상한 사람이며, 따라서 동포들이 자기에게 맞추어야지 자기가 동포들에게 맞출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 군주(君主)들이 가장 위험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오만에 매우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이 무한히 우월하다는 것에 대하여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혁적인 황제나 국왕들이 자신들의 통치하에 있는 국가의 체제에 대해 생각할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행하는 데 반대되는 장애물들만큼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플라톤의 신성한 잠언을 경멸하면서,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자신들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449

최대의 국가적 재난(災難)을 당해서도 개인적 재난을 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총명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즉, 자기 자신과 친구들 및 동포들은 우주에서 생환(生還)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가장 절망적인 진지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리고 만약 전 우주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에게 그러한 명령이 내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자신들의 임무는 이러한 지시를 체념하고 감수할 뿐 아니라 가볍고 기쁜 마음으로 이를 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총명한 사람이라면 훌륭한 병사가 언제나 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생각)

'리더가 보여야할 태도'라고 생각된다.


인간에게 배당되어 있는 일
450

그러나 우주(宇宙)라는 이 거대한 체계를 관리하고 모든 이성적이고 지각 있는 생물들의 보편적 행복을 돌보는 것은 신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다. 인간에게 배당되어 있는 일은 훨씬 하찮은 부문이지만, 그의 미약한 능력이나 편협한 이해력에 견주어 보면, 이러한 배당은 매우 적합한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행복, 자기 가족과 자기 친구와 자기 나라의 행복을 돌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가 더욱 숭고한 것을 사색하는 데 빠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사소한 부문의 일을 무시해도 된다는 핑계는 될 수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하여 아비디우스 카시우스(Avidius Cassius)가 했다고 전해지는 아마도 부당한 질책에,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 명상에 깊이 빠져 우주의 번영을 사색하면서도 로마제국의 번영은 무시했다고 하는 그러한 질책에, 자신을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명상적인 철학자의 가장 숭고한 사색도 가장 하찮은 현행 의무(義務)를 소홀히 하는 것을 보상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의 존엄과 지위를 지킬 필요가 있다.
463

질투(嫉妬)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우월한 것을, 그들이 정말로 그처럼 우월할 자격이 있는 경우에도, 그들의 우월함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혐오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격정이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에서, 어떤 우월함을 누릴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능가(凌駕)하거나 자기보다 앞서 가도록 순순히 용인하는 사람은, 비열한 소인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나약함은 통상 태만에 기원(起源)하고, 때로는 선량한 성품에, 싸우기 싫어하고 소란 떨고 사정하기 싫어하는 성품에 기원하며, 그리고 때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일종의 아량(雅量)에 기원하기도 하는데, 이런 아량은, 그 당시에 무시하는 이익들을 언제나 계속 무시할 수 있으며, 따라서 쉽게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약함에는 통상 많은 후회와 회한이 뒤따른다. 그리고 처음에 보여주었던 어느 정도의 아량은 흔히 끝에 가서는 극도로 악의적인 투기(妬忌)로 변하게 되고, 그리고 자신이 아량을 베풀어 주었던 자의 우월함에 대한 증오로 변하게 된다. 일단 그의 아량 덕에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된 사람은, 그의 아량에 의해 양보를 받아냈던 바로 그 환경에 의해, 정말로 그 우월한 지위를 누릴 자격을 갖추게 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필요가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존엄(尊嚴)과 지위(地位)를 지킬 필요가 있다.


인간생활의 쾌락, 오락 및 환락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
467

인간생활의 쾌락, 오락 및 환락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도 마찬가지로 그것이 과도(過度)하거나 혹은 부족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중에서 부족한 것보다는 과도한 것이 감정을 덜 상하게 하는 것 같다. 방관자에게 있어서나 당사자에게 있어서나, 환락(歡樂)에 대한 강한 성향은 오락과 기분전환에 대한 무감각보다는 분명히 더욱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청년의 쾌활함에,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쾌활함에 매혹되지만, 그러나 노년에 너무나도 자주 수반되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장중(莊重)함에는 곧 싫증을 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성향들이 적정성에 대한 감각에 의해서 억제되지 않을 때, 시간, 장속, 자기의 연령이나 상황에 부적합할 때, 그것들을 마음껏 발산하기 위해 자신의 이익이나 의무를 소홀히 할 때에는, 그것은 너무 지나치고 개인이나 사회 모두에 대하여 유해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의 대부분에서 사람들이 질책(叱責)하는 것은 주로 기쁨에 대한 성향이 강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적정성이나 의무에 대한 감각이 약하다는 것에 대해서이다. 젊은이가 그의 연령에 자연스럽고 적합한 오락이나 유흥(遊興)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자기 책이나 일에 대한 것 이외에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는 딱딱하고 유식한 체하는 사람으로서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가 이처럼 오락이나 유흥거리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좋게 보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가 부적절한 유흥에 빠지는 것을 (그런 성향은 별로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절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조차 우리는 좋게 보지 않는다.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 469

우리 자신의 장점(長點)을 평가하고 우리의 성품과 행위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가 자연히 이것들과 비교하게 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각자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통상 도달할 수 있는 이 관념에의 접근(接近) 정도(程度)이다. 이 접근 정도는 또한 대부분의 우리 친구와 동료, 경쟁자들이 과거에 실제로 도달했을 수도 있는 그런 기준이다.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 470

총명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람은 그의 주요 관심을 첫 번째 기준, 즉 엄밀한 적정성(適正性) 및 완미성(完美性)의 관념에 둔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이러한 종류의 관념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관념은 장기간 자기 자신의 행위와 성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성품과 행위에 대하여 관찰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형성되는 것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위대한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 즉 우리 행위의 위대한 재판관이자 조정자의 완만하고 점진(漸進)하고 부단히 진전(進展)되는 작업이다. 이러한 관찰을 할 때 각 개인들이 투입하는 조심성과 관심, 각 개인들의 감수성의 섬세하고 예민한 정도에 따라서 다소 간에 차이는 있지만, 각 개인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이 관념을 정확히 묘사하고, 그 관념을 정확히 채색하며, 그 관념의 윤곽을 정확하게 그리게 된다.


수준낮은 예술가들 472

모든 문학예술의 영역, 즉 미술, 시, 음악, 웅변, 철학 등에서 이 위대한 예술가들은 항상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도 정말로 불완전함을 느끼며, 그것들이 자신이 생각한 이상적인 완미함에 비해서 얼마나 모자라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더 민감하게 느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그 완전성을 모방은 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것과 동등하게 되려는 기대는 포기한다. 자기 자신의 성취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는 것은 수준 낮은 예술가들뿐이다.


통상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는 보통 정도의 탁월성(卓越性)에 쏟는 사람들 473

자신의 장점을 평가하고 자신의 성품과 행위를 판단할 때 자신의 관심의 거의 대부분을 두 번째 기준, 즉 통상 다른 사람들이 도달하는 보통 정도의 탁월성(卓越性)에 쏟는 사람들 가운데는, 실제로 그리고 정당하게 자신들이 이 정도의 탁월성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을 느끼며, 또한 모든 이성적인 그리고 공정한 방관자들에 의해서도 그렇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주로 언제나 이상적인 완미성의 기준이 아니라 일반적인 완미성의 기준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이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또 겸허하지도 않고, 잘난 체하고, 거만하고, 뻔뻔스럽고, 자신들에 대해서는 커다란 찬사를 보내면서 다른 사람들은 매우 경멸한다.

그들의 성품은 일반적으로 매우 비뚤어져 있고, 그들의 공적(功積)은 진실하고 겸허한 미덕을 지닌 사람들에 비해 훨씬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과도한 자화자찬(自畵自讚)에 근거한 과도한 자만심(自慢心)이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흔히 일반 군중들보다 지적 수준이 훨씬 높은 사람들까지 기만하기도 한다.

가장 무지한 돌팔이의사, 사이비교주 등 사기꾼들이 보통의 시민생활에서나 종교적인 신앙에서나 자주 그리고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하는 것을 보면, 군중들은 얼마나 과장되고 근거 없는 허풍(虛風)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허풍이 대단히 고도의 진실하고 구체적인 공적에 의해 뒷받침되고, 그러한 허풍이 자신들에게 부여하는 모든 화려한 광채를 띠고 나타나고, 거기에다 그것이 지위가 높고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의 지지를 받고, 그 허세(虛勢)가 종종 성공적으로 발휘되어 대중으로부터 커다란 환호를 받게 될 때에는, 심지어 냉정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조차 흔히 그것을 찬탄하는 일반 군중들의 대열에 함께 휩쓸리게 된다. 이 어리석은 군중들의 요란한 갈채(喝采) 소리 자체가 종종 그의 판단력을 헷갈리게 함으로써 그가 그러한 인물(사기꾼)들을 어느 정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에는 그는 언제나 그들을 진지하게 숭배하게 되는데, 심지어 그들이 자기 스스로를 숭배하면서 보여주는 찬탄보다 더욱 강한 찬탄을 보내게 된다. 이러한 경우, 만약 시기심(猜忌心)만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인물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찬탄하고, 그 때문에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많은 측면에서 매우 감탄을 받을 가치가 있는 그들의 성품을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의 과도한 자화자찬은 그들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총명한 사람들에 의해 잘 이해되고, 그리고 아마도 어느 정도의 비웃음으로 간파되기도 한다. 이 총명한 사람들은, 그 인물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군중들이 흔히 존경심과 심지어 거의 숭배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거만한 행동을 속으로 조소한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있어서 가장 떠들썩한 명성과 가장 널리 명예를 얻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러하였고, 아주 먼 후손에게까지 전해진 그들의 명성과 명예 역시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과도한 자만심과 자화자찬 때문
475

어느 정도 과장된 이러한 자화자찬이 없다면 세상에서의 대성공, 인류의 감정과 의견을 지배하는 위대한 권위(權威)를 획득하기 매우 어렵다. 가장 걸출한 인물들, 가장 빛나는 업적을 성취한 사람들, 인류가 처해 있던 상태(狀態)와 사상에 최대의 변혁을 가져온 사람들, 그리고 가장 성공한 장군들, 위대한 정치가와 입법자들, 소속된 사람 수가 가장 많고 가장 성공적인 종파나 정당의 언변(言辯)이 뛰어나 창시자와 지도자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뛰어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그들의 위대한 공로 그 자체 때문이기보다는, 그들의 위대한 공로와는 전혀 비례하지 않을 정도의 과도한 자만심(自慢心)과 자화자찬때문이다.

이러한 자만심은 더욱 냉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엄두도 내지 못할 사업들을 시작하도록 촉구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업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의 복종와 순종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마침내 결실을 거두어 성공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자만심은 그들로 하여금 거의 광기(狂氣)와  어리석음에 가까운 허영에 빠지도록 한다.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비판
476

알렉산더 대왕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자기 자신을 신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임종(臨終) 시에, 모든 상황들 중에서 불멸의 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상황에서,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의 노모(老母) 올림피아(Olympia)를 신들의 명단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자신의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그 명단에 올려 놓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
476

자기 추종자들과 제자들의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찬사를 받고, 대중들의 보편적인 갈채를 받으면서, 아마도 이러한 갈채에 뒤따라 나왔을 신탁(神託: oracle)에 의해 최고의 현인으로 선언된 후에도,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지혜는 그 자신을 신으로 환상하는 것은 용인(容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으로부터 종종 은밀한 계시를 받도 있다고 환상(幻想)하는 것까지 못하게 막을 정도로 그렇게 충분히 위대하지는 못했다.


시저에 대한 비판
476

시저(Caesar)의 건전한 두뇌도 충분히 완전하게 건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비너스(Venus) 여신으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가계의 한 사람이라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자칭 증조모(曾祖母)라는 비너스 여신의 신전 앞에서 그가 로마 원로원들을 접견할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로마 원로원은 저명한 기구(機構)로서 당시 그에게 찾아온 것은 그에게 가장 존귀한 영예를 수여하는 법령을 증정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러한 오만(傲慢)은 아주 유치한 허영의 다른 행위들과 결합된 것으로, 이러한 오만은 사물을 한 순간에 아주 에민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오만은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猜忌心)을 격화시킴으로써 그의 암살자들을 대담하게 만들었고, 또 그들의 암살음모를 서둘러 실행하도록 촉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위대한 사람의 머리까지 상당히 돌아버리게 만듦으로써
477

현대의 종교와 풍속은 우리 시대의 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신이나 예언자로 환상하도록 고무(鼓舞)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커다란 민중적 환호와 결합되어, 흔히 이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의 머리까지 상당히 돌아버리게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인물이자 유능한 인물인 것으로 착각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자만심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경솔한 모험에, 때로는 파멸적인 모험에, 뛰어들도록 한다.

(나의 생각)
카다피, 김정일, 문선명, 조용기 등과 같은 인물들이 생각난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 480

진정으로 자신에게 속한 공적(功積)이 아닌 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은 창피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신의 실체가 발각(發覺)될까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의 성품의 진실성과 견고성(堅固性)에 대하여 만족하고 느긋해할 뿐이다. 그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고, 그렇게 요란하게 갈채를 보내는 것도 아니지만,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그를 가장 잘 아는 총명한 사람은 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에게는 총명한 한 사람의 사려 깊고 신중한 시인(是認)이 수천 명의 무지한 열광자들의 요란한 갈채보다 더욱 충심(衷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만족감을 준다. 파르메니데스가 아테네의 군중집회에서 한 편의 철학논문을 읽을 때, 플라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그것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플라톤 혼자만 들어줘도 자기는 충분히 만족한다고 했다.


성공에 도취된 알렉산더(파르메니오 장군의 경우)
482

성공에 도취된 상태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업적보다 자기 부친 필립(Philip)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는 이유로 클리투스(Clytus)를 죽였고, 자신을 페르시아 식으로 숭배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칼리스테네스(Calisthenes)를 고문해서 죽였다. 또한 그는 자기 부친의 위대한 친구였던 덕망 있는 파르메니오(Parmenio)를 살해했는데, 그에 앞서서 이 노인의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아들에게 전혀 근거 없는 혐의를 덮어씌워 처음에는 고문하다가 나중에는 교수형에 처해 버렸다. 그의 다른 아들들은 파르메니오가 아직 봉직하고 있을 때 이미 죽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필립은 항상 말하기를, 아테네인들은 매년 10명의 장군을 발굴해낼 정도로 매우 운이 좋았으나, 자신은 전 생애를 통해서 파르메니오라는 장군 한 명밖에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언제나 마음 놓고 안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파르메니오의 경계(警戒)와 세심한 주의 덕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즐거운 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기를, '친구들이여 마시자! 파르메니오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우리는 안전하게 즐겨도 된다'고 했다. 바로 이런 파르메니오가 있었기에, 그리고 그의 헌책(獻策)이 있었기에, 알렉산더도 그의 모든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며, 만약 그가 없었고 그의 헌책이 없었다면 자신은 단 하나의 승리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라고 알렉산더 자신도 말한 적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을 알렉산더는 성공에 도취해서 살해하였던 것이다.

알렉산더 사후에도 권력의 자리에 남아서 제국을 다스리도록 하였던 저 비천하고, 찬양을 일삼고, 아첨하던 그의 친구들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을 분할해서 나눠 갖고, 알렉산더 대왕의 가족과 그의 친족들의 유산(遺産)을 강탈한 후, 그들 중 요행히 살아남은 유족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모두 죽여 없애버렸던 것이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 481

그러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매우 총명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가장 적게 감탄한다. 그가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 총명한 사람들의 그에 대한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는 그의 자기 자신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대평가에 비해 너무나 낮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를 단지 악의(惡意)와 질투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들을 의심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는 그들이 자기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내쫓고, 또는 흔히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그들에게 보은(報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잔인(殘忍)하고 불의(不義)하게도 은혜를 원수로 갚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아첨꾼과 배신자들을 신뢰하게 되는데, 이들은 그의 허영(虛榮)과 허세(虛勢)를 숭배하는 척 가장한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어떤 면에서는 결함이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친근감도 있고 존경할 만하기도 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가서는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 인물로 변해 버린다.


 우리는 그것을 오만 혹은 허영이라 부른다 483

인류의 보통 수준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러한 걸출한 인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훌륭한 성품을 과대평가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철저히 공감(共感)할 뿐 아니라 동감(同感)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용감하고, 관대하며,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러한 말들 속에는 상당한 정도의 칭찬과 찬사의 뜻이 들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 두드러지게 뛰어난 면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는 공감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과도한 자아평가(自我評價)에 혐오감과 반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양해하거나 참아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만(傲慢) 혹은 허영(虛榮)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 단어 중에서, 후자는 언제나, 전자는 대부분, 그 속에 어느 정도의 비난의 뜻이 들어 있다.


오만(傲慢)한 사람 483

오만(傲慢)한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마음속 깊숙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알아맞히기는 흔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바라볼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공정(公正)함이다. 만일 그가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것만큼 당신이 자기를 존경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는 모욕(侮辱)을 당한 것 이상으로, 마치 그가 정말로 어떤 침해를 당한 것처럼 화를 내고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당신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에게 존경을 간청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런 행동을 경멸하는 척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우월함을 당신으로 하여금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비천함을 스스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상정(想定)한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신의 존경심을 자극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이 굴욕감을 느끼도록 자극하기를 더욱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 484

그러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자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우월성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에게 그런 우월성이 있다고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당신이, 그가 당신의 입장에 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알고 있을 때, 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런 색채보다 더욱 찬란한 색채로 자기를 보아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그것과는 다른 색채로 그를 보거나 또는 그가 지닌 본래의 색채로 그를 보아주게 되면, 그는 모욕을 당한 것 이상으로 침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은 당신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거짓되고 가장 불필요한 수법들까지 동원하여, 때로는 그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또는 심지어 그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까지 거짓으로 자랑함으로써,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있는 양호한 성품과 재능들을 자랑한다. 그는 당신의 존경을 경멸하기는커녕 당신의 존경을 얻으려고 전전긍긍한다. 그는 당신의 자아평가를 폄하(貶下)하여 상처를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기꺼이 존중해 주면서, 그 대신에 당신도 자신의 그것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그는 아첨을 받기 위해 아첨을 한다. 그는, 공손하고 정중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리고 때로는 당신에게 실제로 중요한 도움을 줌으로써(비록 흔히 그것을 쓸데없이 자랑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당신의 환심을 사려고 연구하거나 당신을 매수해서 당신이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에 487

오만(傲慢: proud)한 사람은 자기와 지위가 동등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마음이 편치 못하며,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자리에서는 그는 고상한 자기과시를 할 수 없으며, 그들의 얼굴표정과 대화가 그를 압도하기 때문에, 그는 감히 고상한 체 할 수가 없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자기보다 비천한 사람들과의 교제인데, 자신은 그들을 존경하지도 않고, 그들과 교제하고 싶어한 것도 아니므로, 그들은 결코 그를 유쾌하게 하지 못한다. 그와 교제하는 자들은 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 그에게 아첨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에게 의지하려는 사람들뿐이다. 그는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찾아가는 일이 거의 없는데, 만일 찾아간다고 하더라고 그것은 그들과의 교제에서 누리게 될 진정한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그들과 교제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클라렌돈 경(Lord Clarendon)이 애런델 백작(Earl Arundel)에 관해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애런델 백작이 때때로 궁정에 갔던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비로소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 그곳에 거의 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에서 자기보다 위대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허영심이 많은 사람 487

허영심이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그는 오만한 사람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피하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교제할 기회를 찾는다. 그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내뿜는 빛은 그들의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몸에도 빛을 반사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궁정의 모임과 대신들의 접견에도 자주 참석하여, 마치 자신이 부(富)와 출세(出世)의 후보자라도 된 듯이 으스댄다. 그러나 그가 행복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안다면, 그가 실제로 훨씬 더 값진 행복을 가지고 있을 때, 그런 일로 으스대서는 안 된다.

그는 상류층 사람들의 연회에 참석하도록 요청받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영광스럽게도 그곳에서 상류층 사람들과 친하게 사귄다는 것을 남들에게 자랑하기를 더욱 좋아한다. 그는 가능한 한 사교계 인사들, 여론을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재치 있는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인기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단 매우 불확실한 대중들의 호의(好意: favour)라는 조류(潮流)가 어떤 면에서건 그와 절친한 친구에게 불리하게 흐를 때에는 언제든지 그는 그 친구와의 교제를 회피한다.

그가 호감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들이 아낌없이 동원되는데, 불필요한 과시(誇示), 근거 없는 허세, 끊임없는 부화뇌동(附和雷同), 그리고 아첨(대부분 즐겁고 명랑한 아첨이고, 식객이나 어릿광대의 조잡하고 지겨운 아첨인 경우는 거의 없지만) 등 모든 수단들이 총동원된다.

이와는 반대로, 오만하거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결코 아첨을 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오만과 허영심의 결합 492∼493

오만과 허영심이 각각 그 자신의 특성에 따라서 행동할 때,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그러나 오만한 사람은 흔히 허영에 차 있으며, 허영에 찬 사람은 흔히 오만하다.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며,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신이 정당하게 받을 자격이 있는 것보다도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결점은 흔히 동일한 성품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양자의 특징들도 필연적으로 서로 혼동되고 있다. 우리는 이따금 허영심의 천박하고 주제넘은 과시(誇示)가 오만의 가장 악독하고 유치하고 가소로운 무례함과 함께 결합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어떤 특정한 성품을 어떤 것에 귀속시켜야 할지, 즉 그것을 오만으로 간주해야 할지 아니면 허영심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흔히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하(卑下)보다는 약간 지나친 오만(傲慢)이 어떤 면에서든 더 좋다
 497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지나친 비하(卑下)보다는 약간 지나친 오만(傲慢)이 어떤 면에서든 더 좋다. 그리고 자아평가의 감정에서는 어느 정도 과도(過度)한 것이 어느 정도 부족한 것보다 그 자신과 공정한 방관자 모두에게 덜 불쾌한 것으로 보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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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그들 자신의 결핍과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387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편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비참한 상황이 우리 자신을 극도로 괴롭히고 있다면, 우리는 이웃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모든 미개인들은 그들 자신의 결핍(缺乏)과 필요가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필요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개인은 그의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이건 간에, 이 고통에 관하여 그의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떤 동정(同情)도 기대할 수 없고, 이런 이유로 남들에게 자신의 약함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이게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의 격정이 아무리 거칠고 난폭하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표정의 태연함 또는 그의 행위 및 태도의 침착함을 어지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북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은 어떤 일을 당해서도 완전히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취하며, 그리고 만약 그들이 어떤 점에서라도 애정이나, 비탄이나, 분개의 격정에 의해 압도된듯이 보인다면, 그들 자신의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담대(膽大)함과 자기 통제는 이런 면에서는 거의 유럽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나의 생각)
'울지마 톤즈'에 나왔던 톤즈 사람들(아프리카 미개인)이 생각난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애정에 약하다는 것 388

신분(身分)과 재부(財富)에 있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수준에 있는 나라(즉, 야만상태)에서는, 남녀 간의 상호간의 애정만이 결혼에서 고려되어야 할 유일한 사정이며, 그리고 이 애정은 어떤 종류의 구속도 받지 않고 향유(享有)될 것으로 기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나라에서는 모든 혼인이 예외 없이 부모들에 의해 결정되며, 그리고 만약 어느 한 청년이 한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어느 여성보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또는 자신이 어떤 때 어떤 인물과 결혼해야 할지에 관해서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이 일에 대해 평생 동안 부끄럽게 생각한다.

인간애와 정중함이 존중되는 시대에는 사람들은 애정에 잘 빠지는데, 애정에 약하다는 것은 미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용서할 수 없는 연약한 행위로 간주된다. 심지어 결혼한 후에도 양 당사자는 성욕에 기초한 관계를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함께 살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남들 몰래 만날 뿐이다. 그들은 계속 각자 자기 부모의 집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나라에서는 공공연히 허용되고 있는 남녀의 동거생활은 거기에서는 가장 추하고 가장 남자답지 못한 호색(好色) 행위로 간주된다.


죽음과 고문에 대한 경멸
389

모든 야만민족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은 가공할 종말(終末)에 대한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 소위 죽음의 노래(the song of death)를 만든다. 이 노래는 자기가 적들의 손에 붙잡혀서 적들의 고문을 받아 죽어갈 때 부르려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고문자들에 대한 모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죽음과 고통을 극단적으로 무시하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 노래를 모든 특별한 경우에 부른다. 즉, 전장에 나갈 때에도 이 노래를 부르고, 전장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에도 이 노래를 부르며, 혹은 자신ㅇ느 이미 가장 무서운 불행을 만났을 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리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큰 사건도 자신의 결심을 흔들거나 자신의 최초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른다.

죽음과 고문에 대한 이러한 경멸(輕蔑)은 기타 모든 야만민족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지배적이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온 흑인들은 모두, 이런 측면에서, 탐욕으로 더러워진 그들의 주인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아량을 지니고 있었다. 운명의 여신이 인류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 지배권을 가장 잔인하게 행사한 것은, 저 영웅적인 아프리카 민족들을 유럽의 감옥에서 나온 쓰레기들에게, 자신이 떠나온 본국의 미덕도 자기가 찾아온 나라의 미덕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인간쓰레기들에게, 굴종(屈從)하게 만들었을 때이다. 이 인간쓰레기들의 경박함, 잔인함, 천박함은 그들에게 정복당한 자들의 경멸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한 마디 말만 남긴다고 한다
393

문명한 민족은 천성(天性)을 존중하고 그 요구에 따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민족은 솔직하고 개방적이고 성실하다. 반대로 야만인은 각종 격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감춰야만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짓을 말하고 위장(僞裝)하는 습관을 획득하게 된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또는 아메리카의 야만민족들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의 관찰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그리고 그들이 진실을 숨기려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아무리 알아내려고 해도 그들로부터 진실을 알아낼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가장 교묘한 질문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고문을 하더라도 그들이 말할 마음이 없는 것을 고백하도록 할 수는 없다. 야만인들의 격정 역시, 비록 이 격정들이 외부로 드러나는 어떤 감정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고, 그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분(激憤)은 최고조에 도달한다. 그가 분노의 어떤 징후를 보이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그러나 그가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고 이를 실천하려고 할 때에는, 그것은 항상 살벌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다. 아주 작은 정도의 모욕도 그를 자포자기로 몰고 간다. 그의 용모와 말투는 정말로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며, 마음의 가장 완전한 평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은 흔히 매우 격렬하고 난폭하다.

북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여성이 그 어머니로부터 단지 가벼운 질책을 받았다는 이유로 물에 빠져 자살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데, 이런 경우에도 그들은 아무런 격정의 표현도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당신의 딸은 더 이상 없습니다"라는 한 마디 말만 남긴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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