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은 일본 소설이 워낙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미야베 미유키나 오쿠다 히데오, 츠지 히토나리, 히기시노 게이고 등의 작가 이름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등만이 활개를 치던 몇 년 전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이다. 일본 소설이 이렇게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두 나라의 사회상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촘촘이 뜯어보면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가까운 만큼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일본 작가들에게서 국내 작가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재미와 감동, 리얼리티 등을 발견할 수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솔직히 사회나 개인의 문제에 있어 비슷한 고민을 두 나라의 소설이 안고 있다고 봤을 때, 더 재미있는 쪽에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앞으로도 당분간은 일본 소설의 전성기가 더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렇게 우수한 일본 소설가들(물론 시시껄렁한 작가들도 무척 많다)의 공습 편대가 이미 서울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기리노 나쓰오라는 작가는 편대장의 자리에 조그만 손색도 없는 특출난 작가이다. 1951년 생으로 원래는 아동문학, 연애문학, 르포작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취로 봤을 때 초창기에는 먹고 살기 위해 되도록 붓을 가리지 않고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기리노 나쓰오 표' 미스터리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 쪽 데뷔작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여성 사립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시작한 그녀는 여성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선구자격인 존재가 되었다. 동 작품으로 그해 데뷔한 가장 뛰어난 미스터리 소설가에게 수여하는 신인상 '에도가와 란포상'을 탄 그녀는 몇 편의 미로 시리즈 외에도 4명의 주부가 연쇄 살인과 시체 해체와 친밀해져가는 과정을 드라이하게 그린 <OUT>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는다. 이 작품은 미국으로 영역되어 절찬을 받고,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인 '에드거 상'의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1999년에는 일본 대중문학의 최고 권위 나오키 상을, 실종된 아이를 찾아가는 과정을 인간 삶의 본질적인 여정과 빗댄 <부드러운 뺨>으로 타내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그외에도 장편만 20편이 넘고 거의 전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요즘엔 굳이 자신을 미스터리 작가로만 한정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대중 문학과 순 문학을 모두 아울러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단한 실력의 작가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 세계는 한 마디로 날카롭게 베고, 집요하게 후벼 판다가 아닐까 싶다. 거대하고 육중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부분을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듯 드러내놓고, 그 곪아터져 냄새나는 환부를 예리한 메스로 베고, 뾰족한 집게로 누런 고름을 긁어내어 우리 눈 앞에 펼쳐놓는다. 자, 보세요. 끔찍하지만 이것이 우리랍니다. 악의로 가득찬 우리의 내면이랍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렇게 말하며 왠지 웃고 있을 것 같다. 지독하고 불쾌한 경험이 되겠지만 정말 우리가 갖고 있는 모습이기에 부정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이렇듯 애써 감춰둔 진실에 결국 눈을 돌리게 만드는 기리노 나쓰오의 역량에 우리는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작품을 잡고, 허겁지겁 읽고, 탄복하고 마는 것이다.        

 

<그로테스크>에서 기리노 나쓰오는 실화를 소재로 예의 그 메스를 다시 한 번 휘두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전 일본을 떠들석하게 만든 '동경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 사건'이란다. 대기업의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밤에는 푼돈 몇 푼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매춘을 저지른다(정말로 돈은 주는 만큼 받았다 한다). 그 비밀로 가득찬 삶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리노 나쓰오는 거의 전 매스컴이 열광하다시피하는 보도 행태에 자못 의구심을 표한다.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창녀'라는 남성적인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이 세상 남성들의 이런 류의 열광이 지금껏 그녀를 괴롭혀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자인 내가 직접 이 사건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고. 물론 <그로테스크>는 충격적인 실화를 그대로 옮기는 논픽션은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과 세계관이 그대로 투영된 온전한 기리노 나쓰오만의 소설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괴물 같은 아름다움을 갖고 태어난 '유리코'와 그녀와 비교되어 늘 고통 받는 추녀인 언니 '나', 나의 동창생이자 유리코를 한 때 숭배했던 주인공 '가즈에', 당대의 엘리트였지만 결국 몰락한 인생을 사는 역시 나의 동창생 '미쓰루'라는 인물들을 창조해 소설이라는 실험관 안에 가두고 냉정하게 그 관찰 일지를 적는다. 작가의 말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는 것만으로는 주인공 가즈에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각도의 시점에서 중층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그리고 '매춘 일기'의 일인칭 시점을 이용해 주인공 가즈에의 내면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컨대 못생긴 언니인 '나'가 이야기의 주축이 되어 관찰자적-다분히 악의적인-시점에서 가즈에를 묘사하고, '유리코'의 수기를 통해 매춘과 남자들로부터 가치가 평가되는 여자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피의자 장제중의 진술서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외롭고 고달픈 삶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매춘 일기를 통해 가즈에의 붕괴 과정을 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을 읽어가며 당신 마음 속에 '괴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제 의도가 어느 정도는 전해진 셈입니다."

 

기리노 나쓰오가 그리는 괴물이란 다름 아닌 네 여성 모두일 것이다. 작가는 괴물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비교적 초기부터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네 여성이 모두 만나 관계를 맺는 사립 Q학원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급이 나뉘어짐을 확인하는 첫번째 장소는 바로 학교에서다. 모든 소녀들이 선망하는 Q학원이지만, 이미 처음부터 격차는 벌어져 있다. 부모의 재산과 지위, 혹은 미모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인 동생 유리코를 질투하고 증오하는 우툴두툴한 태양의 이면 같은 나는 독버섯 같은 악의를 키워 동생, 친구, Q학원, 세상 모두를 혐오하고 공격한다. 유리코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결국 남성의 욕망의 대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 욕망의 무게에 짓눌려서일까, 유리코는 모든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창녀가 된다. 그녀가 살해된 때는 서른 일곱 살, 이미 미모가 모두 시든 뚱뚱하고 초라한 중년 여성이 된 상태다. 미쓰루는 전교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지만, Q학원에서의 이용 가치는 노트 복사가 전부다. 공부해서 1등을 놓치지 않아야만 존재 가치를 증명받게 되는 상황이다. 볼품 없는 외모의 가즈에는 어땠을까.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학생들 사이에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음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못 이룰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몰랐다.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걸. 가즈에는 Q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지만 또 한 번 남성 위주의 기업 문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결국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려는 일념 하에 몸을 판다. 그러니까 괴물을 탄생시킨 것은 Q학원, 혹은 세상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로테스크>는 전체 600페이지가 아주 빽빽이 들어차 있는 매우 긴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나의 일인칭 시점과 유리코의 수기, 가즈에의 매춘 일기, 살인자 장제중의 진술서 등으로 서술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어 굉장히 빨리 읽히며 박력이 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인 네 여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갈등과 남성 위주의 가치관, 질투와 악의라는 이상 심리로 인해 점차 붕괴되는 과정이 압도적이며 소름끼친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히 가즈에의 매춘 일기는 외모 지상주의의 세태 속에서 소외되고,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고립된 현대 직장 여성이 느끼는 증오와 혼란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기며, 단지 다정함만을 갈구했던 한 여성의 내면의 붕괴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입을 다물게 만든다. 그토록 진짜 나를 찾고 싶었지만 결국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나라는 존재가 파멸되어 가는 과정이 가즈에의 매춘 일기가 품고 있는 비극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미스터리 소설을 어린아이의 흥밋거리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을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도도히 흐르는 현대 문학의 최일선에 위치할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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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0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하게 파내니까 더 좋은거 같아요^^

하이드 2006-10-0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사실 알고보면, 여전히 미야베미유키아 히가시노 게이고나 등등등은 우리끼리만 안다면서요? -_-a

jedai2000 2006-10-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예.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은 힘이 있죠. 끝까지 파고 드니까요. ^^

하이드님...그쪽 일을 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직 우리끼리만 아는 작가에 가깝겠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상당히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죠. ^^

oldhand 2006-10-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도적이고 소름끼치는 작품입니다.. 두 번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jedai2000 2006-10-0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말씀대로 강한 소설이죠. 그런데 전 뭐 소설은 소설이라 금방 잊혀지더라구요. 몇 년 뒤 무심코 잡았다가 또 한 번 소름 쫙 끼치고 말 것 같네여. ^^
 
범인에게 고한다 1
사즈쿠이 슈스케 지음, 윤혜원 옮김 / 마루&마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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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범인에게 고한다>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인 유괴 사건을 소재로 한 경찰 소설입니다. 바로 직전에 미국 유괴소설의 걸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를 읽어서 필연적으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범인에게 고한다>도 꽤 재미있고 괜찮은 작품이더라구요. 그다지 부족한 점이 없는 페이지터너로 비록 2권이라지만 사건이 본 궤도에 올라가는 1권 중반부 쯤에 이르면 정신없이 빨아들이더군요. 

 

마키시마 경시에게 깊은 미련과 끝내 어쩔 수 없는 한을 남긴 유괴 사건은 7년 전에 일어납니다. 다섯 살 짜리 남자 아이를 유괴한 건 '와시'라고 자신의 가명을 밝힌 유괴범. 능수능란한 수법으로 수사진들을 따돌리며 몸값 교환을 이끌어냅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지휘하던 마키시마는 천추의 실수로 눈 앞에서 '와시'를 놓치고 다음 날 아이는 시체로 발견됩니다. 마키시마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윗선의 경찰 캐리어(간부)들은 그에게 기자 회견장에서 직격탄을 맞으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마키시마의 딸은 임신 후유증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 어제의 실수로 아이를 잃었고, 딸은 죽어가고, 그 기분이 어떨까요? 그러나 미디어는 집요합니다. 마키시마의 실수와 경찰의 무능함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비열한 미디어의 생리 앞에 그는 마침내 폭발합니다. 마키시마는 회견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마키시마는 시골로 좌천되고, '와시' 사건은 그렇게 잊혀지고 맙니다.

 

7년이 흐른 현재, 언제나 그렇듯 하나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체하듯 새로운 흉악범이 등장합니다. 이번의 범인은 더욱 끔찍한 남아 연쇄 살인 사건을 벌입니다. 이미 4명의 아이가 죽었습니다. 게다가 '뉴스 나이트 아이즈'라는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 새로운 범행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을 '배트맨'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합니다. '배트맨' 사건에 연인원 4만명이 투입됐지만 여전히 미궁입니다. 그러다 예전에 마키시마를 토사구팽했던 간부가 묘안을 떠올립니다. 이건 작품 속 구절을 그대로 발췌하면 이해하기 편하겠네요.

 

"그래. 네번째 사건에서는 범인이 TV 방송국으로 성명문을 보내와, 새로운 현장을 밝힘과 동시에 한 여자 아나운서를 협박했지. 범인은 자기주장을 내세워, 그 사건을 세간의 화젯거리로 바꾸어놓았어. 이것을 속칭 극장형 범죄라고 하네. 자네에게도 괴로운 기억이 있지?"

마키시마는 아무 대답 없이 턱을 살짝 움직여 다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여기에 대항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난 생각했어. 그리고 다다른 대답은..."

소네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극장형 수사일세."

 

그렇습니다. 극장형 범죄vs극장형 수사가 이 작품의 포인트입니다. 보통 현재 처지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극장형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죠. 주목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또 그만큼 모든 미디어가 집중하는 자신이 대단해 보일테니까요. 마치 자신이 한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신이라도 된 것처럼 우월감을 느끼고 있겠죠. 그런 범인의 심리에 기반한 극장형 수사로 새로운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경찰 관계자가 TV에 나가 범인과 대화를 시도하며 사건을 완전히 전국적인 뜨거운 감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한 편의 쇼를 만드는 거죠. 

 

자, 범인의 심리는 어떨까요? 가뜩이나 주목받고 싶었는데, 그 무대가 만들어졌다! 아무리 냉정한 범인이라도 두근두근 흥분되겠죠. 가슴이 뛸 거고, 계속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남고 싶을 것입니다. 이 흥분감과 고양감이 냉정한 범인의 주도면밀함을 흔들어 놓을테고 결국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질 것입니다. 극장형 수사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키시마 경시는 작게는 7년 전의 실패로 인한 명예회복과, 크게는 더이상 희생당하는 아이가 없기를 바라는 정의의 수호자로서 극장형 수사에 임합니다. 온갖 어려움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작품의 초반부는 경찰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커리어와 논커리어의 갈등이나 수사 과정의 불합리성, 경찰 조직 내부의 알력 등을 폭로하고 있는데 꽤 그럴싸해 학사 수준은 됩니다(이 부분의 석사는 요코야마 히데오, 박사는 다카무라 카오루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얄팍한 미디어의 본질을 역이용한 극장형 수사가 핵심으로, 미디어에게 당할 대로 당한 마키시마 형사가 결국 미디어를 이용해 복수한다는 설정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박력도 있고, 감동도 제법인 작품이지만 거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나 책 만듦새의 성의는 약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수준이네요.

 

거의 파편화되다시피 한 현대의 개인주의 속에서, 마치 톱니바퀴 돌아가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경찰 조직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들의 마음에 일정 부분의 안정감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경찰 소설이 사랑 받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싶네요. 왜 독무도 멋있지만, 집단 군무도 그 나름의 웅장한 멋이 있으니까요. 이 책에도 마키시마를 정점으로 한 '경찰 조직'이 배트맨을 포위해가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더구나 경찰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 현대의 기사나 다름 없습니다. 하기야 경찰소설이 많이 나와 그 책을 보고 경찰을 지망하는 사람도 생기고 그러면 그거야말로 소설이 사회에 줄 수 있는 순기능이겠죠. 앞으로도 진짜 '좋은' 경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경찰소설이 더 많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키시마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테이블에 팔꿈치를 붙이고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빨간 램프가 들어온 정면 카메라를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배트맨에게 고한다."

의식적으로 살기를 발산시켰다.

"너는 포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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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4-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내내 하루빨리 범인이 제발 잡히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힘을 가진 소설이네요....후반부로 갈수록 정말 재밌고 감동적입니다.

jedai2000 2007-04-2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디1229님...그렇죠. 뒤로 갈수록 정말 박력있고, 재미있죠. 제발 잡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 작품이었어요 ^^
 
가라, 아이야, 가라 1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이틀 전만 해도 난 아니라고 대들었을 거야. 그래, 난 경찰이야. 하지만 운 좋은 경찰이지. 좋은 아내와 좋은 집, 지금까지 투자도 괜찮게 했고 말이야. 20년만 채우면 난 옷 벗고 떠날 거야. 하지만 달라지는 게 뭐가 있지? 빌어먹을 지하실엔 여전히 난도질당한 아이가 있을 거 아냐? 그럼 이렇게 말할 건가? '그래, 좋아. 세상은 개똥 같아. 그래도 내 인생은 쓸 만하잖아? 세계는 어떻든 난 괜찮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보스턴 시를 떠들석하게 만든 유괴 사건이 벌어진다. 유괴당한 아이의 이름은 아만다 맥크레디로 고작 네 살 먹었다. 사건에 개입하게 된 사립탐정 콤비 켄지와 제나로(둘은 파트너이자 연인이다)는 아만다의 엄마 헬렌을 만나고 헤아릴 수 없는 환멸감을 느낀다. 완벽한 백인쓰레기인 헬렌. 술과 마약과 TV에 절은 창녀에 불과한 그녀는 딸 아이를 데리고 해변에 갔다가 뜨거운 모래밭에 아이를 몇 시간이고 방치에 둬 전신화상을 입힐 정도로 생각없는 엄마다. 딸아이의 실종 사건을 조사하러 온 두 탐정에게 한 말이라고는 '화면 가리니까 TV에서 비켜요.' 정도.

 

켄지와 제나로는 아동범죄팀의 베테랑 형사들인 풀레와 브루사드와 함께 유괴 사건을 조사해나간다. 그날도 헬렌은 남자랑 술을 마시러 술집에 갔었고, 자물쇠로 잠기지도 않은 집에 혼자 자고 있던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고도 열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아이가 없어진 걸 알았다니 하늘은 왜 이런 여자에게 아이를 준 것인지 모르겠다. 간절히 원해도 아이를 얻지 못하는 부부도 많은 터에...

 

사건을 조사해나가다 보니 헬렌은 뜻밖에 거물 범죄자와 연루되어 있음이 밝혀지고, 켄지와 제네로는 어려서부터 친구인, 마피아도 함부로 못 건드릴 정도로 무지막지한 부바의 도움을 요청한다. 마침내 유괴범 측에서 연락이 오고 보스턴의 모든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인질금 교환 장소인 채석장을 포위한다. 그러나 돈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켄지, 제네로, 풀레, 브루사드의 앞에 나타난 건 인형을 든 아이가 아닌, 수백 발의 총탄이었다. 함정에 빠진 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끝까지 집중하기 바란다. 저리도록 가슴 아픈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미스틱 리버>와 <살인자들의 섬>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다. 두 작품 이전에 쓰고 있었던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네번째 이야기로 역시 대단한 필력을 보여준다. 데니스 루헤인의 강점은 역시 오감을 모두 만족시키는 글을 쓴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때때로 등장하는 돌발적인 폭력 장면은 근육을 모두 긴장시킬 정도로 강렬하고, 주의깊게 배치된 단서를 두 탐정이 하나씩 깨닫는 대목은 머리를 팽팽 돌아가게 만든다. 찰진 대사의 윤기 역시 대단하고 다소 신경질적인 느낌이 드는 시니컬한 유머 감각도 제법이다.

 

그러나 역시 데니스 루헤인은 우리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는 작가가 아닐런지. 그의 소설에서 살아 숨쉬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전작 <미스틱 리버>에서 살해당한 여자의 장례식 장면은 굉장히 길고 자세하지만 사실 플롯과는 무관해 빼버려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빼버리면 작품의 맛이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장례식 장면을 통해 살아 남은 가족들의 절절한 슬픔과 인생과 죽음의 허망함 등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봉사하고 지키는 일을 너무도 하고 싶었던 두 형사의 절절한 토로나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선택을 해야 하는 켄지, 제나로의 심경에 나는 진실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 재미있고 놀라운 작품의 정보를 무심히 누설하는 것은 일종의 범죄일테니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게 유감이다. 다만 이 작품 결미의 '선택의 문제'에 대해 많은 토론을 나눠보고 싶다. 켄지의 선택, 제나로의 선택 중 무엇도 쉽사리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하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윤리적인지를. 세상에 옳은 일이란 무엇일까, 누가 그걸 판단할 수 있을까. 선택의 문제에 어쩔 수 없는 주인공은 결국 깊은 좌절에 빠지고, 그 좌절감은 내 마음까지 흠뻑 적셔놓고 말았다.

 

흔한 범죄소설이 절대 아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깊은 회한과 탄식이 비어져나온다. 데니스 루헤인은 이 작품으로 자신이야말로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임을 입증해보였다고 생각한다. 올해 책을 한 권만 읽을 수 있다면 이 작품을 택하기 바란다. 그만큼 대단한 걸작이다.

 

"그는 광장의 반짝이는 형광빛과 기상등대와 무선송신기의 붉은 펄스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름답군. 하나 알려줄까?'

'뭘요?'

'난 아이들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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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9-2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0여쪽 두권으로 나눠져 있어서, 일찌감치 보관함에서 빼버린 책이에요. 흑. 아마존에나 가봐여지요. ( --)

날개 2006-09-2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강력한 뽐뿌질을......^^

상복의랑데뷰 2006-09-2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왕~기대가 됩니다. ^^

물만두 2006-09-27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팍팍 밀어보아요^^

jedai2000 2006-09-27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뭐 그러시다면 원서로라도 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날개님...이거 읽고 불만족하시면 저를 패 죽이셔도 좋아요. ^^

상복의 랑데뷰님...당장 읽어보세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물만두님...여력이 되는 대로 결사적으로 이 작품을 띄울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

oldhand 2006-09-2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다이 님이 밀면 뜹니다. 떠요. ^^

Koni 2006-09-2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굉장히 강력한 추천이군요. 하지만 jedai2000님의 추천은... 그냥 넘기기가 어려워요.ㅠ_ㅠ

jedai2000 2006-09-2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먼저 올드핸드님에게 띄워야겠네요 ^^ 사서 읽어 보실거죠? ^^

냐오님...오랜만에 강력하게 추천할 작품을 만났습니다. 이번 만큼은 꼭 그냥 넘어가지 마시고 한 번 넘어가주세요. 후회 안 하실 거예요. ^^

비연 2006-09-2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이러면 안되는데...또 지르게 되었군요...보관함에 쏘옥~

Apple 2006-09-2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밀어보아요~^^

jedai2000 2006-09-28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연님...보관함에 넣어두셨다 나중에 꼭 주문하셔야 해요. ^^

애플님...넵~ 함께 잘 밀어보아요. ^^

paviana 2006-10-04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제다이님도 만두님도 둘다 무서워요...이렇게 강력한 뽐뿌라니....
제목좀 보세요..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말씀이시죠? ㅠㅠ

jedai2000 2006-10-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뽐뿌에 넘어가주세요. ^^ 한 번만 믿어주세요. 현재까지는 올해 최고의 재미와 감동, 슬픔이 있었던 소설이었답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

라이더 2006-10-21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을 알게 되어 '아임소리마마' 읽게 되었는데, 여기까지 흘러오게되었습니다. 저두 밀어 드릴께요.

jedai2000 2006-10-2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분을 알게 되셨군요. ^^ <아임 소리 마마>는 재미있게 읽으셨나 모르겠네요. 이거 많은 분들이 밀어주셔서 든든하네요. 반갑습니다. 라이더님..^^
 
또 다른 나 - 시드니 셀던 자서전
시드니 셀던 지음, 최필원 옮김 / 북앳북스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또 다른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 시드니 셀던이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스스로 자신의 지난 인생을 돌아본 자서전입니다. 시드니 셀던이 무슨 간디처럼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인도 아니고, 헤밍웨이처럼 존경 받는 작가도 아닌데 웬 자서전? 하실 분도 분명히 계시겠지만 꼭 역사책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위인만이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시드니 셀던은 1970년 <벌거벗은 얼굴>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18권의 소설로 전세계에서 3억부를 팔아치웠다지만 분명히 후세에 길이 남을 문호라고는 부를 수 없는 작가입니다. 당대 대중의 기호를 정확히 읽어 잘 팔릴 만한 대중소설을 기획해 충실하게 소설화해낸 상업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위에도 말했듯이 꼭 위인만이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기나긴 인생의 여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만한 교훈을 줄 수 있다면 누가 쓴들 어떻겠습니까. <또 다른 나>는 적어도 저에게만은 큰 교훈을 주었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많은 힘을 준 작품이므로 당당하게 추천합니다.

 

시드니 셀던은 1917년 시카고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이 시드니 샥텔인 그는 가난한 이민자 부모의 장남으로 그의 가족은 대공황 때 극심한 빈곤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인 그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과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대학교를 어쩔 수 없이 그만 두고 열일곱 살에 호텔 카지노 휴대품 관리소, 약국 점원, 공장 직원 등으로 살아갑니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작가의 꿈은 멀어져가기만 하자 그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일하던 약국에서 수면제를 몰래 빼돌리고 자살을 결행하려 하는 순간, 아버지에게 발각된 시드니 샥텔. 아버지는 절망에 빠진 아들과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시드니, 넌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건 어제 얘기였어요."

"그럼 내일은?"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인생이란 원래 소설 같은 거 아니겠니?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있잖아. 페이지를 넘기기 전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지? 하루하루가 새로운 페이지인 거야, 시드니. 곳곳에 깜짝 놀랄만한 일이 숨어 있다고.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진 그 누구도 알 수 없어."

 

과연 그렇습니다. 인생은 기나긴 장편소설.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앞페이지가 우울했다고 해도 뒷장까지 절망적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요?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소설을 보고 우리가 크나큰 희망을 느끼는 것처럼 이 자서전에는 마술 같은 희망과 용솟음치는 용기가 가득합니다. 더구나 결말을 알 수 없어 가슴 졸이며 보게 되는 소설과 달리 우리는 이 자서전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온갖 좌절과 고난을 넘어 결국 성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되는 시드니 셀던의 현재 모습을 익히 알고 있기에 편안히 페이지를 넘기면 되는 것이지요. 참으로 간만에 하게 되는 흐뭇한 독서인 셈입니다. 

 

시드니는 발음하기 어려운 성을 셀던으로 고치고 헐리우드로 날아갑니다. 물론 어떤 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는 MGN이나 20세기 폭스 등의 거대한 스튜디오들의 전성기. 스튜디오 안에 광대한 촬영지와 150여명의 전속 작가 등을 갖추고 영화를 생산해냈습니다. 실로 미국 영화의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죠. 시드니는 먼저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시나리오 리더로 일하게 됩니다. 그럴싸한 소설을 읽고 대강의 내용 요약과 느낀 점들을 정리하면 되는 일이었죠. 이 일자리를 잡는 과정 역시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타이프라이터도 버스비도 없는 그에게 저녁 6시까지 4백 페이지 소설을 읽고 30장짜리 페이퍼를 작성해오라고 요구하는 스튜디오. 그는 무조건 말합니다. "물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근처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사촌의 전부인을 무작정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사촌이 바람펴서 끝난 사이기 때문에 사실 거기 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사촌의 전부인은 그의 불굴의 의지를 높이 평가해 점심도 굶고 타이프를 쳐줍니다. 시드니 셀던은 당연히 채용되었죠.

 

그 다음부터 시드니 셀던의 부침 많았던 인생이 재현됩니다. 추간판 탈출증으로 며칠씩 쓰러져있는가 하면, 브로드웨이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뮤지컬을 올리기도 하고, 조울증으로 비정상적인 언동을 보였으며,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두 번의 결혼으로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를 얻었고, 누구보다 소중한 첫째 딸을 낳았으며,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죽은 둘째 딸을 가슴에 묻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아흔에 가까운 노작가의 인생을 깊이 있게 볼 수 있으며, 그가 가졌던 꿈과 희망에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이런 장면도 있으니까요.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시나리오 리더로 일하고 싶어 찾아갔을 때, 문전박대 당한 그가 나중에는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사장 자리를 제의받게 되는...

 

초창기 미국의 연예 비즈니스계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도 유용한 책입니다. 데이비드 셀즈닉 같은 타이쿤 프로듀서가 활개를 쳤던 스튜디오 전성기부터, TV의 도래로 연예계의 무게추가 TV로 옮겨갔던 시대까지 두루 현장에서 활동했던 사람답게 뛰어난 기억력으로 당대 명사들의 흔적을 재현해놓고 있습니다. 마릴린 먼로와 데이트했던 이야기와 벤자민 '벅시' 시걸의 애인과 데이트하다 죽을 뻔했던 일들은 아주 재미있고, 프레드 아스테어, 버스터 키튼, 세실 B 드밀, 주디 갈란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의 유명인들도 다수 출현합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시드니 셀던의 집 파티에서 설거지를 도맡았다는 이야기는 그 아니면 누구도 말하지 못할 일화겠죠. 시드니 셀던이 그 유명한 캐리 그랜트를 감독했던 것도 정말 몰랐던 일로 우리 생각보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연예계 종사자였나를 깨닫게 만들어줍니다.

 

웬만한 소설보다 이 이야기들이 훨씬 재미있는 건 역시 실화기 때문이겠죠. 자서전이 보통 용비어천가가 되기 쉬운데 반해 이 책은 비교적 균형적입니다. 그가 받았던 온갖 혹평도 가감없이 실려 있고, 그가 행했던 선행들(예를 들어 작가 생활 초창기에 그는 일을 잡으면 비슷한 처지의 가난한 시나리오 지망생과 항상 공저를 했습니다), 매커시 선풍을 맞아 용기있게 저항했던 일들을 그다지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정작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70년대 이후의 인생은 그리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18편의 책을 어떻게 구상했으며, 어떻게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는가를 공개한다면 작가지망생들에게 참 도움이 될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게 바로 제가 속편을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짐작컨대 "물론 할 수 있습니다"일 것입니다. 시드니 셀던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네버 기브업 정신으로 많은 문제들을 헤쳐나가 왔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성공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일테죠. 나약한 정신 상태로 '나는 안 돼', '못 해'만 일삼는 저같은 사람에게 깊은 반성과 귀감을 준 책으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만약 작가지망생이라면 시드니 셀던의, 영화에서 갈고 닦인 듯한 뛰어난 장면 전환 기법이나 진지함과 유머를 어떻게 황금비율로 조화시키는가 등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작가로서의 정신 자세를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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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9-23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겠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감사.

jedai2000 2006-09-2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와 소설에 관심 많은 저에게는 최고의 자서전이었지만 사마천님이 보시기에 어떨지 몰라 조심스럽네요. 아마도 분명히 재미있어 하실 거라 믿습니다. ^^

sayonara 2006-12-2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드니 셀던이 최근에는 건강문제로 모든 글을 구술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도 시드니 셀던이 팔팔하던 10년 전쯤에 직접 썼다면 얼마나 더 흥미진진했울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저에게도 가장 재미있는 자서전이었습니다.

jedai2000 2006-12-30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구술이었군요. 머 지금도 충분히 재미있긴 한데 본인이 직접 썼으면 더 좋았겠죠. 구술이라도 좋으니 작가생활을 다룬 속편이 꼭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스텝파더 스텝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1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일본 소설이 시쳇말로 대세다.  자고 일어나면 신간들이 줄줄이 쏟아지는데, 이건 뭐 생전 듣도보도 못한 작가서부터 전일본을 떠르르하게 울리는 대형 작가의 작품까지 그 장르도 다양하다. 이런 비상시국(?)일수록 작가와 작품을 잘 선택해야 지갑에 위기를 초래하지 않고 좋은 작품만 쏙쏙 골라 즐거운 독서 생활을 할 수 있는 법이니 독자들의 제대로 된 안목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미야베 미유키야말로 독자의 안전한 선택에 한 치의 위험도 주지 않는 보증수표 격의 작가다. 7년 연속 일본 유수의 출판 잡지 '다빈치'의 여성 인기작가 순위에서 1위를 했다거나, 평단에서 받은 온갖 상들을 줄줄이 열거하는 건 이제 입이 아플 지경이 됐다. 독자한테 사랑 받고, 평자에게 인정 받는 행복한 작가가 바로 미야베 미유키인 것이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화차> <모방범> <이유> <용은 잠들다> 등의 명실상부한 대표작이 이미 번역되어 나왔고,  <스나크 사냥> <마술은 속삭인다> 등의 초기 수작들도 나올 예정이고, <누군가>와 <이름 없는 독>같은 완전 최신작도 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녀의 팬이라면 정말 즐거울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 어디서 미유키 책을 안내줄까 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하던 것도 벌써 옛일이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인기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책이 재미있다는 거다. 부동산, 신용카드 남용 같은 현실적인 문제부터 초능력, 염력 등의 낯선 소재, 시대소설부터 판타지까지 관심사도 무궁무진한데 그 다양한 소재를 미스터리 터치를 섞어 흥미진진하게 잘 풀어내는 감각이 있다. 적어도 미야베 미유키는 자신이 추리소설가라는 자각을 갖고 있고,  어떤 장르의 작품을 쓰더라도 미스터리 특유의 수수께끼 푸는 맛을 살리려 노력한다. <스텝 파더 스텝>도 다소 가벼운 유머 소설에 가깝지만 이런 미야베 미유키만의 특징은 여전해 추리소설적인 재미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한 마디로 일반 독자와 미스터리 독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줄 아는 영리한 작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두들 공감하는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온기야말로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미스터리 소설가다. 작품에서 사람도 죽고, 범죄도 일어나고, 도둑질도 벌어진다. 하지만 모든 작품의 결말에는 비록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용서하고, 동정하며, 이해하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담하게 배어 있다. 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라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는 긍정적인 작가의 마음에 결국 우리도 깊이 공감하고 만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든 작품에는 작가 특유의 인간애와 사랑이 녹아들어가 있어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갈증으로 목이 타는 사람이 물을 계속 찾게 되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관계에 대한 갈증을 느껴본 사람이 미야베 미유키 책을 찾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스텝 파더 스텝>은 작가의 휴머니즘(?)을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우연히 가짜 부자 관계가 된 도둑과 쌍둥이가 서로의 필요를 넘어 진짜 아버지와 아들로 환골탈태한다는 내용은, 핏줄을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야말로 진짜 가족의 조건이 아닐까, 하는 소박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하기야 남보다 못한 가족도 많은 터에 과히 틀린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이런 거창한 이야기는 관두고 단순하게 봐도 굉장히 재미있다. 7편의 단편들은 모두 유쾌하고 소박한 코지 미스터리로 손색이 없다. 다루고 있는 사건들도 끔찍한 게 아니라, 난데없이 전혀 관계 없는 지방신문이 집에 투척되는 사건(?) 등의 일상적인 이야기들이다. 본격적인 미스터리 소설로 보기엔 트릭이 약한 감이 많지만 가벼운 미스터리 풍의 유머소설로 본다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의 화자인 도둑이 약간 시니컬하게 내뱉는 현대 사회와 일그러진 가족 관계에 대한 (그다지 맵지 않은) 풍자를 보면 아주 가볍지는 않은 작품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아봐야 헛수고이고 우물가에서는 우물물을 찾아야 하듯이, <스텝 파더 스텝>에서는 작가가 공들여 준비한 유머를 찾아 즐기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 같다. 특히 중학생 쌍둥이가 한 마디씩 말을 번갈아가며 하는 버릇을 보여줄 때가 아주 귀엽고 재미있다. 흉내내고 싶어질 정도다. 때로는 배꼽을 간지르는 듯한 가글가글한 유머부터 천장을 날려버릴 대폭소까지 웃고 즐길 구석이 많은 작품으로 무료한 시간을 그닥 골머리 썩여가며 보내고 싶지 않은 분들께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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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9-2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요즘 일본 작가의 책이 무지 많이 나오고 있어요. 따라잡기 벅찹니다. @@

jedai2000 2006-09-22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더 나올 것입니다..-_-;;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인지 모르겠네요. 독자 입장에서야 재미있는 책이 많아지는 거니까 좋긴 하지만, 직업적으로는 일본 소설 판권료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썩 좋지만은 않네요. -_-''

하이드 2006-09-2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베 미유키.가 이렇게 웃기게 쓸 수도 있다는걸 안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어요 ^^ 어여어여 나머지 작품들도 다 소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jedai2000 2006-09-2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안에 2권 정도 더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다재다능한 작가죠. <스텝 파더 스텝>이야 다소 가볍지만, 작가가 다양한 걸 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