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에게 고한다 1
사즈쿠이 슈스케 지음, 윤혜원 옮김 / 마루&마야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범인에게 고한다>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인 유괴 사건을 소재로 한 경찰 소설입니다. 바로 직전에 미국 유괴소설의 걸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를 읽어서 필연적으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범인에게 고한다>도 꽤 재미있고 괜찮은 작품이더라구요. 그다지 부족한 점이 없는 페이지터너로 비록 2권이라지만 사건이 본 궤도에 올라가는 1권 중반부 쯤에 이르면 정신없이 빨아들이더군요. 

 

마키시마 경시에게 깊은 미련과 끝내 어쩔 수 없는 한을 남긴 유괴 사건은 7년 전에 일어납니다. 다섯 살 짜리 남자 아이를 유괴한 건 '와시'라고 자신의 가명을 밝힌 유괴범. 능수능란한 수법으로 수사진들을 따돌리며 몸값 교환을 이끌어냅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지휘하던 마키시마는 천추의 실수로 눈 앞에서 '와시'를 놓치고 다음 날 아이는 시체로 발견됩니다. 마키시마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윗선의 경찰 캐리어(간부)들은 그에게 기자 회견장에서 직격탄을 맞으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마키시마의 딸은 임신 후유증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 어제의 실수로 아이를 잃었고, 딸은 죽어가고, 그 기분이 어떨까요? 그러나 미디어는 집요합니다. 마키시마의 실수와 경찰의 무능함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비열한 미디어의 생리 앞에 그는 마침내 폭발합니다. 마키시마는 회견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마키시마는 시골로 좌천되고, '와시' 사건은 그렇게 잊혀지고 맙니다.

 

7년이 흐른 현재, 언제나 그렇듯 하나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체하듯 새로운 흉악범이 등장합니다. 이번의 범인은 더욱 끔찍한 남아 연쇄 살인 사건을 벌입니다. 이미 4명의 아이가 죽었습니다. 게다가 '뉴스 나이트 아이즈'라는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 새로운 범행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을 '배트맨'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합니다. '배트맨' 사건에 연인원 4만명이 투입됐지만 여전히 미궁입니다. 그러다 예전에 마키시마를 토사구팽했던 간부가 묘안을 떠올립니다. 이건 작품 속 구절을 그대로 발췌하면 이해하기 편하겠네요.

 

"그래. 네번째 사건에서는 범인이 TV 방송국으로 성명문을 보내와, 새로운 현장을 밝힘과 동시에 한 여자 아나운서를 협박했지. 범인은 자기주장을 내세워, 그 사건을 세간의 화젯거리로 바꾸어놓았어. 이것을 속칭 극장형 범죄라고 하네. 자네에게도 괴로운 기억이 있지?"

마키시마는 아무 대답 없이 턱을 살짝 움직여 다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여기에 대항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난 생각했어. 그리고 다다른 대답은..."

소네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극장형 수사일세."

 

그렇습니다. 극장형 범죄vs극장형 수사가 이 작품의 포인트입니다. 보통 현재 처지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극장형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죠. 주목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또 그만큼 모든 미디어가 집중하는 자신이 대단해 보일테니까요. 마치 자신이 한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신이라도 된 것처럼 우월감을 느끼고 있겠죠. 그런 범인의 심리에 기반한 극장형 수사로 새로운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경찰 관계자가 TV에 나가 범인과 대화를 시도하며 사건을 완전히 전국적인 뜨거운 감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한 편의 쇼를 만드는 거죠. 

 

자, 범인의 심리는 어떨까요? 가뜩이나 주목받고 싶었는데, 그 무대가 만들어졌다! 아무리 냉정한 범인이라도 두근두근 흥분되겠죠. 가슴이 뛸 거고, 계속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남고 싶을 것입니다. 이 흥분감과 고양감이 냉정한 범인의 주도면밀함을 흔들어 놓을테고 결국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질 것입니다. 극장형 수사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키시마 경시는 작게는 7년 전의 실패로 인한 명예회복과, 크게는 더이상 희생당하는 아이가 없기를 바라는 정의의 수호자로서 극장형 수사에 임합니다. 온갖 어려움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작품의 초반부는 경찰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커리어와 논커리어의 갈등이나 수사 과정의 불합리성, 경찰 조직 내부의 알력 등을 폭로하고 있는데 꽤 그럴싸해 학사 수준은 됩니다(이 부분의 석사는 요코야마 히데오, 박사는 다카무라 카오루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얄팍한 미디어의 본질을 역이용한 극장형 수사가 핵심으로, 미디어에게 당할 대로 당한 마키시마 형사가 결국 미디어를 이용해 복수한다는 설정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박력도 있고, 감동도 제법인 작품이지만 거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나 책 만듦새의 성의는 약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수준이네요.

 

거의 파편화되다시피 한 현대의 개인주의 속에서, 마치 톱니바퀴 돌아가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경찰 조직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들의 마음에 일정 부분의 안정감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경찰 소설이 사랑 받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싶네요. 왜 독무도 멋있지만, 집단 군무도 그 나름의 웅장한 멋이 있으니까요. 이 책에도 마키시마를 정점으로 한 '경찰 조직'이 배트맨을 포위해가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더구나 경찰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 현대의 기사나 다름 없습니다. 하기야 경찰소설이 많이 나와 그 책을 보고 경찰을 지망하는 사람도 생기고 그러면 그거야말로 소설이 사회에 줄 수 있는 순기능이겠죠. 앞으로도 진짜 '좋은' 경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경찰소설이 더 많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키시마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테이블에 팔꿈치를 붙이고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빨간 램프가 들어온 정면 카메라를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배트맨에게 고한다."

의식적으로 살기를 발산시켰다.

"너는 포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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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4-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내내 하루빨리 범인이 제발 잡히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힘을 가진 소설이네요....후반부로 갈수록 정말 재밌고 감동적입니다.

jedai2000 2007-04-2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디1229님...그렇죠. 뒤로 갈수록 정말 박력있고, 재미있죠. 제발 잡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 작품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