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은 일본 소설이 워낙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미야베 미유키나 오쿠다 히데오, 츠지 히토나리, 히기시노 게이고 등의 작가 이름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등만이 활개를 치던 몇 년 전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이다. 일본 소설이 이렇게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두 나라의 사회상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촘촘이 뜯어보면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가까운 만큼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일본 작가들에게서 국내 작가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재미와 감동, 리얼리티 등을 발견할 수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솔직히 사회나 개인의 문제에 있어 비슷한 고민을 두 나라의 소설이 안고 있다고 봤을 때, 더 재미있는 쪽에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앞으로도 당분간은 일본 소설의 전성기가 더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렇게 우수한 일본 소설가들(물론 시시껄렁한 작가들도 무척 많다)의 공습 편대가 이미 서울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기리노 나쓰오라는 작가는 편대장의 자리에 조그만 손색도 없는 특출난 작가이다. 1951년 생으로 원래는 아동문학, 연애문학, 르포작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취로 봤을 때 초창기에는 먹고 살기 위해 되도록 붓을 가리지 않고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기리노 나쓰오 표' 미스터리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 쪽 데뷔작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여성 사립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시작한 그녀는 여성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선구자격인 존재가 되었다. 동 작품으로 그해 데뷔한 가장 뛰어난 미스터리 소설가에게 수여하는 신인상 '에도가와 란포상'을 탄 그녀는 몇 편의 미로 시리즈 외에도 4명의 주부가 연쇄 살인과 시체 해체와 친밀해져가는 과정을 드라이하게 그린 <OUT>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는다. 이 작품은 미국으로 영역되어 절찬을 받고,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인 '에드거 상'의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1999년에는 일본 대중문학의 최고 권위 나오키 상을, 실종된 아이를 찾아가는 과정을 인간 삶의 본질적인 여정과 빗댄 <부드러운 뺨>으로 타내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그외에도 장편만 20편이 넘고 거의 전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요즘엔 굳이 자신을 미스터리 작가로만 한정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대중 문학과 순 문학을 모두 아울러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단한 실력의 작가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 세계는 한 마디로 날카롭게 베고, 집요하게 후벼 판다가 아닐까 싶다. 거대하고 육중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부분을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듯 드러내놓고, 그 곪아터져 냄새나는 환부를 예리한 메스로 베고, 뾰족한 집게로 누런 고름을 긁어내어 우리 눈 앞에 펼쳐놓는다. 자, 보세요. 끔찍하지만 이것이 우리랍니다. 악의로 가득찬 우리의 내면이랍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렇게 말하며 왠지 웃고 있을 것 같다. 지독하고 불쾌한 경험이 되겠지만 정말 우리가 갖고 있는 모습이기에 부정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이렇듯 애써 감춰둔 진실에 결국 눈을 돌리게 만드는 기리노 나쓰오의 역량에 우리는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작품을 잡고, 허겁지겁 읽고, 탄복하고 마는 것이다.        

 

<그로테스크>에서 기리노 나쓰오는 실화를 소재로 예의 그 메스를 다시 한 번 휘두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전 일본을 떠들석하게 만든 '동경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 사건'이란다. 대기업의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밤에는 푼돈 몇 푼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매춘을 저지른다(정말로 돈은 주는 만큼 받았다 한다). 그 비밀로 가득찬 삶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리노 나쓰오는 거의 전 매스컴이 열광하다시피하는 보도 행태에 자못 의구심을 표한다.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창녀'라는 남성적인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이 세상 남성들의 이런 류의 열광이 지금껏 그녀를 괴롭혀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자인 내가 직접 이 사건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고. 물론 <그로테스크>는 충격적인 실화를 그대로 옮기는 논픽션은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과 세계관이 그대로 투영된 온전한 기리노 나쓰오만의 소설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괴물 같은 아름다움을 갖고 태어난 '유리코'와 그녀와 비교되어 늘 고통 받는 추녀인 언니 '나', 나의 동창생이자 유리코를 한 때 숭배했던 주인공 '가즈에', 당대의 엘리트였지만 결국 몰락한 인생을 사는 역시 나의 동창생 '미쓰루'라는 인물들을 창조해 소설이라는 실험관 안에 가두고 냉정하게 그 관찰 일지를 적는다. 작가의 말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는 것만으로는 주인공 가즈에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각도의 시점에서 중층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그리고 '매춘 일기'의 일인칭 시점을 이용해 주인공 가즈에의 내면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컨대 못생긴 언니인 '나'가 이야기의 주축이 되어 관찰자적-다분히 악의적인-시점에서 가즈에를 묘사하고, '유리코'의 수기를 통해 매춘과 남자들로부터 가치가 평가되는 여자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피의자 장제중의 진술서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외롭고 고달픈 삶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매춘 일기를 통해 가즈에의 붕괴 과정을 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을 읽어가며 당신 마음 속에 '괴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제 의도가 어느 정도는 전해진 셈입니다."

 

기리노 나쓰오가 그리는 괴물이란 다름 아닌 네 여성 모두일 것이다. 작가는 괴물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비교적 초기부터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네 여성이 모두 만나 관계를 맺는 사립 Q학원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급이 나뉘어짐을 확인하는 첫번째 장소는 바로 학교에서다. 모든 소녀들이 선망하는 Q학원이지만, 이미 처음부터 격차는 벌어져 있다. 부모의 재산과 지위, 혹은 미모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인 동생 유리코를 질투하고 증오하는 우툴두툴한 태양의 이면 같은 나는 독버섯 같은 악의를 키워 동생, 친구, Q학원, 세상 모두를 혐오하고 공격한다. 유리코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결국 남성의 욕망의 대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 욕망의 무게에 짓눌려서일까, 유리코는 모든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창녀가 된다. 그녀가 살해된 때는 서른 일곱 살, 이미 미모가 모두 시든 뚱뚱하고 초라한 중년 여성이 된 상태다. 미쓰루는 전교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지만, Q학원에서의 이용 가치는 노트 복사가 전부다. 공부해서 1등을 놓치지 않아야만 존재 가치를 증명받게 되는 상황이다. 볼품 없는 외모의 가즈에는 어땠을까.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학생들 사이에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음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못 이룰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몰랐다.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걸. 가즈에는 Q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지만 또 한 번 남성 위주의 기업 문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결국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려는 일념 하에 몸을 판다. 그러니까 괴물을 탄생시킨 것은 Q학원, 혹은 세상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로테스크>는 전체 600페이지가 아주 빽빽이 들어차 있는 매우 긴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나의 일인칭 시점과 유리코의 수기, 가즈에의 매춘 일기, 살인자 장제중의 진술서 등으로 서술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어 굉장히 빨리 읽히며 박력이 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인 네 여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갈등과 남성 위주의 가치관, 질투와 악의라는 이상 심리로 인해 점차 붕괴되는 과정이 압도적이며 소름끼친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히 가즈에의 매춘 일기는 외모 지상주의의 세태 속에서 소외되고,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고립된 현대 직장 여성이 느끼는 증오와 혼란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기며, 단지 다정함만을 갈구했던 한 여성의 내면의 붕괴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입을 다물게 만든다. 그토록 진짜 나를 찾고 싶었지만 결국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나라는 존재가 파멸되어 가는 과정이 가즈에의 매춘 일기가 품고 있는 비극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미스터리 소설을 어린아이의 흥밋거리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을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도도히 흐르는 현대 문학의 최일선에 위치할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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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0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하게 파내니까 더 좋은거 같아요^^

하이드 2006-10-0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사실 알고보면, 여전히 미야베미유키아 히가시노 게이고나 등등등은 우리끼리만 안다면서요? -_-a

jedai2000 2006-10-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예.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은 힘이 있죠. 끝까지 파고 드니까요. ^^

하이드님...그쪽 일을 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직 우리끼리만 아는 작가에 가깝겠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상당히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죠. ^^

oldhand 2006-10-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도적이고 소름끼치는 작품입니다.. 두 번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jedai2000 2006-10-0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말씀대로 강한 소설이죠. 그런데 전 뭐 소설은 소설이라 금방 잊혀지더라구요. 몇 년 뒤 무심코 잡았다가 또 한 번 소름 쫙 끼치고 말 것 같네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