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과사무실이라는 곳에 수많은 피켓과 현수막들이 널려 있었다. 사무실 캐비닛에는 오래전에 사용? 했다던 쇠 파이프까지 들어있었다. 그렇게 1학년 생활을 보내고 군대를 다녀오느라 3년간 휴학을 했었다. 3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은 정치나 공동체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취업을 위한 공부가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후 IMF가 터졌다. 나는 우리 시대의 의식구조는 IMF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理想)을 위해서 살았다. 물론 그 이상이라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광기 어린 이상도 있었고, 잘못된 판단으로 많의 사람의 고통을 강요한 이상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며 살았다. IMF 이후는 사람들은 이상을 버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현실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학생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현실만을 이야기하며, 현실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현실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개인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가고, 스스로를 거대한 자본주의 문화 속에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라는 책은 6편의 글들이 실려져 있다. 그중 마지막 글의 주제가 '기술의 합리성과 세계의 운명'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마르쿠제의 사상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의 변질된 이성인 '과학적 이성'과 '자본주의 이성'을 비판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성은 개인의 자아의식의 발현이었다. 데카르트가 '코키토 에르그 숨(cogito ergo sum)' 이라는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자아를 이야기한 후, 서구사회의 지성은 끊임없이 세계 속에서 개인의식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개인의 자아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물질문화의 가치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저자는 이 과정은 마르쿠제의 사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원시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발전 과정을 이야기했다. 자본론에서는 이 과정을 역사의 필연성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필연성은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모순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마르쿠제'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과정은 필연적이 아닌, 개인의 자아의식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마르쿠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어느 특정한 사회적 조건의 성숙으로 역사가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혁명이 사회적 혁명의 선행 조건임을 강조했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했던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결정론자였으며 그에게 사회 현실의 인식은 주어진 객관적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고, 혁명적 행위 자체도 이 인식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제와 같은 비판 이론가들에게 사회 현실의 인식은 결코 세계의 모사(模寫)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행위의 산물이고, 또한 사회적 행위는 사회적 여건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밖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에 따라서 그의 행위는 이 세계를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P206)



 

마르쿠제의 이론에 의하면 결국 사회는 저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의식이 변화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변화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인간의 과학주의적인 이성과 자본주의적인 이성이, 철학적 이성을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래 서구의 이성이라는 개념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서구의 합리성이 대두되면서 이성은 곧 합리성이 되었다. 즉 현대의 이성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보다는 수학적 합리성을 통해 물질적인 결과의 이득만을 계산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들의 자아의식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본주의적인 계산적인 이성만 남게 되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IMF 이후 한국의 어두운 자아상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이성은 계산이란 뜻을 지니는 합리성이다. 이윤 증대를 목표로 모든 자원을 계산해서 조직적으로 동원한다고 할 때, 합리적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합리성은 자본주의 발달의 불가결의 조건이다. 일상생활의 합리화는 업적을 올리는 조건이다. 쾌락 추구는 억제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모든 일과는 설정된 생산 목표의 달성에로 정향 되어야 한다." (P215)



 

저자는 이런 자본주의 이성의 합리화 과정이 이미 마르쿠제에 의해 예견되었다고 말한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성은 합리화 과정을 통해서 비이성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고도의 생산성과 자연 관리가 인간의 자기소외를 가져옴으로써 파괴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은 주어진 사회 안에서 개인과 개인 간에, 집단과 집단 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그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원 자원전쟁으로 이어져나가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성은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더 이상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이 되지 못하고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조직과 능력으로 전락해버린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이성의 비이성화다." (P215)



 

그렇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없을까? 저자는 글에서는 회의적인 느낌마저 든다. 그동안 사회가 변화되었던 것 소외계층이나 청년들이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회변혁을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까지도 사회 변화보다는 그 사회 속으로 자신을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아의식을 개발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이성에 몰입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희망은 끈을 놓지 않는다.



 

"후기 자본주의 문화는 하이데커가 가르치는 '본래적 존재로의 결의를 내릴 수 있는 정신적 조건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도 생산성의 논리는 자유나 자율 그리고 자발성 등의 이념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반성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느 시대고 그리고 어느 곳이든 변화를 부르짖는 세력은 나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그가 속한 사회구조로부터 분리되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르쿠제의 믿음이기도 하다." (P 242)



 

요사이 우리의 삶을 볼 때 저자가 이야기하는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경쟁만을 강요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이성이라는 먹구름이 이 사회를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 이성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닥쳐왔고, 이제는 그 파도에 저항하던 소수의 사람들마저도 그 파도에 모두 삼키움을 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와중에도 다시금 개인이 주체적 자아로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는 이런 글들이 남아 있음을 위안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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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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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추석 연휴 기간에 읽은 소설이다. 명절이면 내려가는 부모님의 집은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500미터 정도의 높이이다. 내가 20살이 넘을 무렵 아버지가 노후를 생각하며 거주하기 시작한 집이다. 그 곳에는 손님들이 오면 머물 수 있게 나무로 지은 작은 목조주택이 있다. 지은 지 10년이 넘어 허름하지만 부모님의 집에 내려 오면 항상 이곳에 머문다. 이번 추석연휴 기간동안 이 목조주택에 머물며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을 읽었다. 창문을 열면 산이 보이고, 주변은 항상 새소리들이 들렸다. 덕분에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창조한 아사마산의 아우쿠리마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책은 주인공 사카니시1980년대 초에 유명한 건축가인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사무소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라리 사무소는 여름이면 도쿄사무실에서 무라리의 별장이자 사무실로 쓰고 있는 아사마산이 있는 아우쿠리마을로 사무실을 이전한다. 무라리의 건축철학에 따라 자연 속에서 건축물을 설계하고 구상하기 위해서이다. 무라리는 속도감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현대건축과는 다르게 자연과 조화되면서도 사람을 배려하는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한 건축을 추구한다. 사카니시는 입사한 첫여름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중요한 직원들과 함께 아우쿠리마을로 향한다. 아우쿠리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늦게 흘러간다. 그 숲속에서 사카니시는 무라리의 자연적이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건축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무엇보다도 함께 일하고 있는 무라리의 조카인 마리코와 느리면서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된다. 물론 마리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키니시보다는 조금 일찍 들어 온 온화한 성격의 유키코와도 아우쿠리 마을의 여름을 배경으로 서로를 알아간다.


 

​이 책의 초반부를 읽었을 때는 느린 속도감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조금은 당황했었다. 그러나 초반부분이 지나고 무라이 사무소가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입찰을 시작하고, 주인공과 마리코의 관계가 깊어지면서도부터 이야기는 느리지만 잔잔하게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특히 저자의 절제되면서도 담백한 표현들이 매우 매끄럽다. 주변 자연을 묘사하는 시선부터, 주인공이 마리코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매우 섬세하면서도 아름답다. 마리코의 행동과 말투에 대한 묘사가 마치 무라이의 건축물과 같이 담백하면서도 섬세하다.

 

말이 저물었을 때쯤, 월요일 아침에 돌아올 예정이었던 마리코가 까만 르노5를 타고 돌아왔다. 물색 마 원피스, 종요했던 여름 별장 마루에 밝은 색 공이 굴러운 것 같았다. (P203)

 

그 풀 수 없는 의문과 별개로, 마리코하고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마리코에게 저항할 수 없이 이끌리고 있었따. 귀에 살그머니 들어와 그대로 머무는 목소리 톤, 가볍고 부드러운 손가락과 손의 감촉, 목과 어깨 움직임을 따라 물결치는 머리카락,자유로운 다리의 움직임, 강인한 성격이 반전되어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몸짓. (P275-6) 

개인적으로 좋은 소설은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장면과 이미지가 그려지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읽을 때면 아우쿠리 마을, 무라리 건축사무소, 아사마 숲속의 길들, 마리코와 유키코의 모습들이 저절로 그려졌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무라이가 의식을 잃고 입원한 병원에 주인공이 마리코와 유키코를 데리고 가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부분은 그냥 일기만 해도 하나의 영상이 보여진다. 겨울의 초입, 을씬스러운 아사마산 주변의 도로에서 의식을 잃은 무라리에게 들려주기 위해 마리코가 녹음한 피아노 음악을 듣는 장면이다.

 

“18번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 마리코가 치는 피아노 소나타가 흐르기 시작했다. 터치는 부드럽고 막히는 곳이 없었다. 교양이라고 할 레벨이 전혀 아닌 것에 대한 놀라움은 이내 사라지고 그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것도 아닌, 하물며 애인에게 들려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자기하고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선울이었다. 슈베르트는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백미러에는 유키코가 비춰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떨어질까 봐 고래를 숙이지 않고 앞을 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P 381-2)

   

 

지금은 비교적 한가한 도시의 외곽에 살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서울 중심의 한복판에 살았다. 집 주변으로는 지하철 공사 중이여서 일년 내내 길을 막고 땅을 파고, 트럭들이 다녔다. 또한 집 맞은편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빌딩을 짓는다고 한참 공사중이었다. 소음과 먼지, 사람과 차량, 모든 것이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공사현장들을 지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콘크리트 더미들을 쌓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건축과 사람, 그 자연과 우리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느리지만 마음 속에 깊이 남는 올해 내가 읽는 최고의 감동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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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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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저녁이면 베란다 창문을 통해 건너편의 아파트를 바라본다. 반듯한 네모상자같은 집 안에는 서로 다른 가구와 사람들이 있다. 저들의 삶은 어떨까? 행복할까? 그리고 이 시대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이 시대에 행복하다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에, 광고에서 나오는 가구와 가전제품을 갖추고, 가끔씩 패밀리레스토랑에서 가족끼리 식사하는 정도? 너무 소박할까? 시대마다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행복의 틀에 자신을 넣으려 한다. 마치 미니어처집의 인형처럼 자기를 스스로 속박한다.

 


제시 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의 배경은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다. 17세기는 이전까지 대서양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을 장악하던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지고, 영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던 시기였다. 영국으로 대서양의 패권이 넘어가기 전에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잠시나마 최고의 번영을 누린다.

 

이 소설은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의 가문으로 시집 온 18세 소녀 '페트로넬라'의 이야기이다. 넬라라고 불리는 이 소녀의 집안의 네덜란드 시골에서는 꽤 이름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은 후 집안은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넬라의 어머니는 당시 여성의 행복이 부유한 상인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넬라에게 주입한다.


"자고로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남자하고 결혼해야 해." 그녀의 엄마가 펜을 들며 말했다.

"하지만 전 내세울 게 없잖아요." 넬라가 대답했다.

엄마를 혀를 찼다. "네 자신을 봐. 여자들이 가진 게 뭐가 있니?"

그 말에 넬라는 얼어붙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자신으 폄하하자 낯선 불안감이 엄습했고, 아버지로 인한 슬픔은 어느덧 자신에 대한 슬픔으로 바뀌었다. (P32-3)


"누군가의 부인이 되지 않으면 삶이 고달파져." 그녀의 엄마가 언젠가 말했다. "왜요?" 넬라라 물었다.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짜증이 사후에 남긴 빛 때문에 분노를 변해가는 것을 목격한 그녀였기에, 오트만 부인이 왜 딸을 자신과 똑같은 위험에 빠뜨리지 못해 안달하는지 물은 것이었다. 넬라의 엄마는 미친 사람 보듯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이번에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왜냐하면 시뇨르 브란트는 도시의 양치기이고 네 아버지는 한 마리 양이었으니까." (P38)

넬라는 당시 네덜단드 동인도 회사의 간부이자, 부유한 상인인 요하네스 브란트라는 30대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녀가 시골집에서 암스테르담의 요하네스의 집으로 오던 날, 넬라의 기대와는 달리 넬라를 맞아준 것은 요하네스가 아닌 그의 여동생 마린이다. 어머니의기대처럼 부유한 상인에게 어울리는 현숙한 아내가 되고 싶었던 넬라의 기대는 처음부터 무너진다. 집안의 분위기 역시 어둡고, 무언가 비밀에 쌓여 있는 것 같다. 하녀답지 않게 당돌하며 참견을 좋아하는 코넬리아, 당시로서는 드물게 흑인 하인인 오토, 그리고 집안에서 모든 것을 명령하는 시누이 마린, 정작 남편이며 집주인인 요하네스는 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요하네스는 어린 신부보다 집안의 개들을 반겨준다. 넬라는 집안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던 중 요하네스는 넬라에게 결혼선물로 아름답게 장식된 미니어처 집을 선물해 준다. 당시 네델란드에서는 어린소녀들이 이런 미니어처 집을 가지고 노는 것이 유행이었다. 넬라는 자신을 어리게 취급하는 남편에게 실망하지만, 정교한 미니어처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리고 미니어처를 만드는 미니어처리스트를 찾아서 미니어처 집에 들어갈 장식품들 주문한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들이 발생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넬라가 주문하지도 않는 집안의 물건들이나 사람의 모양들을 보낸다. 그런데 그 모양이 너무나 정교하고, 마치 직접 보고 만든 것처럼 실제 집에 있는 물건이나 사람과 똑같다. 심지어 시누이 마린의 속옷모양까지 똑같이 만들어 보낼 정도이다. 넬라는 누군가 자신의 삶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까지 든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내 온 미니어처들에게는 넬라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특이한 모습들이 담겨져 있고, 그것들을 앞으로 일어날 불행한 사건들을 예언하고 있다. 과연 브란트 집안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이고, 미니어처리스트는 이것을 어떻게 그대로 알고 미니어처를 만든 것일까?

   

 


​이 소설의 작가 제시버튼은 영국에서 평범한 직장을 다니고, 저녁이면 배우로 무대에 섰다고 한다. 그녀는 네덜란드 여행 중 물관에서 고급스러운 미니어처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미니어처 속에 담긴 삶을 상상한다. 그렇게 [미니어처리스트]는 출간되었고, 영국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책이 되었다.

현대의 박물관에 유품으로 간직한 미니어처는 작가의 상상을 통해 패쇄적이고, 종교적 위선과 물질적 탐욕이 가득한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어느 상인의 집에 장식된다. 그리고 그 미니어처를 통해 작가는 당시 여성의 삶을 보여 준다.

 

이 소설은 마치 넬라의 성장소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성장소설과 다른 면이 있다면, 보통의 성장소설은 어린 소녀나 소년의 이야기이지만, 이 소설은 18세에 결혼한 넬라가 당시의 전형적인 네덜란드 상인 가정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넬라는 미니어처를 부수고, 스스로 그 미니어처에서 나와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다.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자녀를 나아 대를 잇고 전형적인 당시 여성의 삶이 아닌, 남편 대신 상인의 삶을 살면서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려 한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과연 넬라가 소설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갈까라는 생각이었다. 종교적 위선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서 과연 넬라가 상인으로서 한 가정을 이끌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은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에게도 드는 생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만만치 않은 시대이다. 그럼에도 세상이 만들어준 미니어처 속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넬라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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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에 유난히 관심을 가진 인문학 분야가 윤리학이었다. 그 시절 윤리학은 내게 너무나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울타리 안에서 자라다 보니, 때로는 종교적이라는 것이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종교 없이 도덕의 기초를 세우겠다는 현대 윤리학자들의 거창한 포부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었다. 그때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탐독했던 책이 두 권이 있었다.

한 권은 H.J.페이튼의 [칸트의 도덕철학]이란 책이었다. 신이나 영혼의 언급 없이 이성의 범위 안에서 인간 안에 보편타당한 정언명령을 통해 도덕의 기초를 세워가는 칸트의 글들을 읽으면서, 마치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세우는 거장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른 한 권은 실천윤리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책이었다. 피터 싱어는 현대의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종교 없이 합리적인 생각만으로도 윤리를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책들을 읽어가며 결론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 결론을 통해 과연 종교 없는 도덕이 가능한가를 물었을 때 대답의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처럼 무언가 대단한 것을 소개하는 것처럼 수많은 이론과 체계를 제시했지만, 결론은 너무 초라해서 과연 이런 결론으로 현대의 복잡한 세상에서 윤리가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들게 되었다.

 

 


니콜라스 웨이드의 [종교 유전자]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 시절 생각이 났다. 저자는 종교를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즉 인간이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서 종교를 만들었고, 종교가 유익하기에 유전자를 통해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인원 사회의 특징은 철저한 계급주의인 반면, 처음 유인원에서 진화한 인류의 수렵-채집 사회의 특징은 평등주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평등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인간에게 종교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물사회처럼 힘으로 지배하는 우두머리가 없는 사회에서 개인들이 집단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교성이 자손들을 통해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3장 종교적 행동의 진화 참조)

그렇다면 이런 종교성이 없는 도덕적인 사회는 가능할까? 존 로크나 막스 베버와 같은 학자들은 종교성이 경제적이 도덕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들에게 신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존 로크는 종교가 사회의 작동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관용에 대한 편지]에서 사회가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를 허용할 수는 있지만, 무신론자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무신론자의 서약과 약속은 무가치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의 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한 서약과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에 대한 로크의 생각은 역사적으로 유지됐고 지금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P349)



 

반면 마크 하우저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은 인간이 신의 존재를 생각해야 도덕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나 낮게 보는 형태라고 말한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역시 도덕적 판단을 하는데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하우저의 주장을 지지한다. 도킨스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이 없다고 악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의 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 생각을 비웃는다. 신의 감시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신에 대한 신앙이 일순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인간은 모두 친절함, 자비심, 관대함 등 인간의 모든 미덕을 버리는, 자각 없는 이기적인 쾌락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대단히 낮은 수준의 인간적 자존심을 가지는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P 377)



 

저자는 종교인이 모두 도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로만 구성된 사회에서 도덕이 가능하다는 주장에는 회의를 제기한다.



 

"전적으로 무신론자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공동체로서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도덕과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흥미진진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사회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대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나 불경기 등으로 인해 긴박한 상황에 처했을 대에도, 공동체는 질서와 시민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P 379)

 

 

서양의 윤리는 근대 이후 신의 존재 없이 인간의 이성이 가진 합리성만으로 도덕적 기초를 쌓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 윤리학은 수많은 도덕적인 이론을 제시해가며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 공동체에게 모두 유익하다는 것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예가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이론들이다. 결국 진화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서양 윤리학의 핵심은 피터 싱어의 책의 결론과 같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젊은 날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문득 섬뜩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었다. 만약 이것이 현대 윤리학의 기초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것도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원인이라면, 만약에 자신이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궁지에 몰려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최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리고 얼마 전부터 이런 내 섬뜩한 생각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행동이 뉴스나 신문에서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과 같이 종교적인 타락과 광신자들에게 의한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종교적인 믿음이 딱히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희망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현대 윤리학이 인간의 이성을 너무나 신뢰하며, 리처드 도킨스처럼 인간이 도덕적 존재임을 너무 과신하는 것은 분명히 착오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처럼 평화시에는 이런 인간은 종교없이도 도덕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인이 궁지에 몰리거나 사회적인 재난이 접했을 때,  자신을 제어할 아무런 신념이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은 광기와 공포의 수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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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 법 - 거대한 그린란드상어를 잡기 위해 1년간 북대서양을 표류한 두 남자 이야기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가끔 영상을 통해 심해의 환경을 보면 경탄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바다 깊은 곳, 그 광활하고 어둠의 세계를 대면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이런 두려움을 피하는 편이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 이런 두려움을 오히려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를 하고, 미지의 생물들을 만나기 위해 탐사를 한다.


이런 원시의 바다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은 오랜 동안 인류의 마음 속에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리워야단같은 바다괴물을 이야기하고, 세계의 많은 나라의 전설 속에서도 바다에서 나오는 괴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미지의 바다생물에 대한 도전과 광활한 바다에 대한 탐험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노르웨이 사람이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후고'에게서 그린란드 상어를 잡자는 제안을 받는다. 그래서 둘은 엉성한 준비(물론 그들은 나름대로 준비를 했지만)와 작은 고무보트를 타고 일년 가까이를 노르웨이 피오르해안을 곳곳을 상어를 잡기 위해 헤매인다. 이 책은 바로 엉뚱한 두 남자가 상어를 잡기 위해 노력한 허접한 여행기이다.


두 남자가 상어를 잡기 위해 계획하고 낚시를 하는 과정은 허접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인공이 글로 남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노르웨이의 지역이나 역사에 대한 이야기, 바다와 관련된 노르웨이의 전설 등은 절대로 허접하지 않다. 때로는 여행기나 탐험기라고 보기에는 심각한 인간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심오한 사색 등이 담겨져 있다.


어째서 저자는 무모하게 보이는 그린란드 상어를 잡자는 후고의 제안에 그렇게 빠져들었을까? 그것은 자신 안에 인류의 조상때부터 가지고 있던 바다의 미지에 생물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그런 바다의 미지생물과 심해와 같이 인간의 영역에 벗어난 지역에 대한 동경이 담겨져 있다.


"육지의생활은가로로 펼쳐진다. 거의 모든 일이 땅에서 일어나고 높아봐야 나무 꼭대기 정도다. 새들은 높이 날지만 이들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땅에서 보낸다. 반면 바다는 세로로 이루어졌다. 평균 슈심이 3.700미터에 달하낟. 수면에서 밑바닥까지 매 층마다 온갖 생물들이 산다. 땅에 있는 모든 생활공간이 바다에도 있다. 바닷속 풍경과 비교하면 우림을 비롯한 다른 모든 풍경은 시시하다." (P51)


"상어는 인기투표에서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판다, 고양이, 강아지, 돌고래, 새끼 침팬지가 상위에 있고, 상어는 맨 아래에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상어에게 공격을 받으면 우월한 과학기술로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던 아주 오래전 메아리가 우리 안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몇 초간 통제력을 잃는다. 순간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이 된다. 사실 사람이 상어에게 잡아먹힐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기 차가운 심해에서 우글대는 생물에게 잡혀 살점을 모두 뜯어 먹힐까 겁낸다. 언젠가 우리는 사라질 것이다. 물고기와 수많은 기어 다니는 동물들이 기다리는 어두운 바다 밑바닥에서, 상상만으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분해될 것이다." (P 302)


저자는 상어를 잡는 중간 중간에 노르웨이의 역사와 전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특히 바다괴물, 바다인간, 물개인간과 같은 다양한 전설이 언급되고, 이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 위대한 노르웨이 학자인 올라우스 마구누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올라우스 마구누스는 노르웨이 해안의 수심이 아주 깊기 때문에 특히 이곳에 괴물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썻다. 노르웨이 어부들은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먼 바다로 과감히 나갔다. 후고와 내가 상어를 잡는 곳에서 멀지 않은 로포텐의 남쪽 어딘가에 어쩌면 가장 기이한 괴물이 살지 모른다. 그것은 새빨간 바다뱀으로 길이가 최소한 60미터는 되는 거대한 괴물이다. 거대한 뱀이 큰 범선을 휘감고 남자 한 명을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이 마그누수의 해양지도에 그려져 있다. (P170)"


이런 방대한 사색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후고의 1년 가까이 된 노력에도 그린란드 상어는 잡히지 않는다. 서서히 이들 사이에는 갈드이 생기고, 이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의 프로젝트에 어두운 면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프로젝트는 구름이 반사되는 텅 빈 수면 위에서 진행된다. 물속에는 절벽과 암초가 있고 우리의 눈은 그곳을 볼 수 없다. 또한 괴물이라고 부르는 피조물이 바다 밑바닥 진흙에서 회오리를 일으킨다. - 중략 -  그러나 이 얼마나 어리석고 흉악한 프로젝트란 말인가!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혹은 두려움을 직면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가장 큰 사냥감을 잡으라고 부추기는 사냥 본능이 우리 안에 꿈틀대는 걸까? 넓은 바다에서, 야생에서 짜릿한 사냥을 즐기려는 걸까? 지금은 멸종되고 없는 매우삭 아직 인간을 잡아먹던 시절, 마타이로돈티네 호랑이가 실신한 인간을 동굴로 끌고 가 어둠 속에서 뜯어 먹던 시절, 그때의 괴물 신화가 우리 유전자 속에 잠복해 있는 걸까? 인간을 물속으로 낚아채 살점을 뜯어 먹는 악아와 싸우던 시절? 그러고 보니, 그린란드 상어의 회전 기술은 정말로 악어를 닮았다." (P 300)


결국 이 책 끝에서 주인공과 후고는 천신만고 끝에 그린란드 상어를 발견한다. 상어가 후고의 낚시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냥 걸렸을 뿐이다. 상어는 후고와 배를 끌고 가고, 위협을 느낀 후고는 결국 천신만고 끝에 온 기회를 칼로 끊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 후 이들이 다시 그린란드 상어를 잡으려고 시도했는지, 아니면 포기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둘은 노르웨이의 추운 북쪽 바다에서 그린란드 상어를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 계속되는 전세폭등에, 월세나 활부, 직장상사나 주변 사람과의 사소한 다툼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우리에게 노르웨이 북쪽 해안에서 한가하게 상어를 잡고 있는 주인공과 후고의 이야기는 신선노름같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에 가슴이 뛰는 이유는 이런 미지의 세계와 생물에 대한 동경이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직접 상어를 잡으러 가지는 못하지만, 책을 통해서라도 답답한 마음에 조금의 위안을 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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