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자 2
장용 지음, 양성희 옮김 / 조율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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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나 드라마 중 많은 작품들이 1930-40년대의 상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영화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인 탕웨이의 [색계]라는 영화이다. 영화가 너무 탕웨이라는 여배우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영화는 당의 시대상황과 이런 시대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혼란을 느끼는 배우들의 감정연기가 잘 드러나고 있다. 


영화에서 탕웨이의 위장 신분인 막부인이 암살하려는 대상이 친일인사인 미스터 이(양조위)이다. 당시 중국은 중일전쟁으로 인해 상해와 난징을 비롯한 대부분의 해안도시가 일본에게 점령당한다. 이  과정에서 홀로코스트에 버금간다는 끔찍한 난징 대학살이 발생한다. 난징의 인구 100만명 정도가 잔인하게 학살 당하고 20만명의 여성이 강간 당하고 살해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동족들이 끔찍한 고통을 겪는 중에서도 일부 친일파 세력과 국민당에서 장제스에게 밀린 왕위가 상해에 친일정부를 세운다. 상해에서는 이런 친일정부와 함께 국민당과 공산당의 스파이들이 활동하고, 이런 스파이들에 의한 친일인사들의 암살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영화에서의 미스터 이는 이런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막부인과 동료들은 이런 친일파를 암살하는 스파이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미스터이와 막부인은 둘 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색계]라는 영화는 사실 장아이링이라는 중국의 대표적인 여류작가의 소설이 원작이다. 그녀 역시 당시 상해의 왕위정부로 알려진 친일정부의 인사와 결혼을 하는 등 당시의 시대상황을 직접 경험한 여성이기도 하다. [위장자] 같은 시대 배경인 원작 소설을 드라마와 했다. 그리고 한국에 출간된 [위장자]라는 책은 원작소설이 아닌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인 장용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다.




[위장자]는 상해의 재벌 가문인 명씨 가족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집안의 사업을 관할하고 있는 누나 명경, 왕위 정부의 재무 장관이 되어 친일인사로 비난을 당하는 형 명루, 그리고 부잣집 막내 도령으로 한량 역할을 하는 막내 명대가 등장한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이는 역할과 달리 그들은 다른 직책을 가지고 있다. 명루는 사실 공산당 후원세력이었고, 명루는 암호명 독사로 활동하는 국민당 스파이였다. 막내 명대 역시 암호명 독전갈로 활동하는 국민당 스파이였으나, 후에 국민당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공산당으로 전향하게 된다.


1권에 이어서 2권에서는 이들의 치열한 첩보 싸움이 전개된다. 명루는 자신의 신분을 감춘채 자신의 옛사랑이자, 지금은 왕위정부의 첩보조직인 76호의 정보처장인 왕만춘을 이용해 자신의 첩보 작전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겉으로는 친일인사로 활동하고, 속으로는 옛연인인 왕만춘 뿐만 아니라 누나인 명경과 동생이 명대까지 이용해야 하는 잔혹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심한 갈등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냉혈함을 비난하는 동료에게 이렇게 토로한다.


"내가 감정도 없는 냉혈한인 줄 알아? 일본 놈들이 내 나라를, 내 고향을 수탈하고 우리 민족의 존엄을 말살하는 걸 보면서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목숨을 버리려는 전사를 어떻게 감정도 없는 놈이라고 욕살 수 있지? 생사를 넘나들며 투쟁하는 전사들에게 어떻게 냉혈한이라고 말할 수 있어? 뭣 때문에? 내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절대 버릴 수 없는 가족마저 희생시키니까? 그래, 난 동포와 가족을 희생시켜가며 이 가면을 쓰고 있지. 나도 이 가면이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꼭 그렇게 내 상처를 후벼 파야겠나? 정말 의리 있는 동지군!" (P 289)


명대 역시 자신의 형을 죽여야 하는 임무에 까지 감당할 정도로 극단으로 내 몰린다. 특히 그는 이렇게 모든 것을 내던지고 활동하고 있는 국민당 정부가 왕위 정부와 밀무역을 하고 있는 부패한 장면을 보고 낙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훈련소에서 부터 함께 했던 동료인 우만려와의 사랑 대신, 공산당 스파이이자 자신의 약혼녀인 정금운과의 사랑을 선택한다. 결국 국민당 정부가 만든 함정 임무에서 우만려는 주고, 명대까지 포로로 잡히게 된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이미 또 다른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속고 속이는 첩보전 속에서 명대는 선택의 갈등에 놓이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중국의 현대사 역시 우리나라처럼 굴곡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위장자의 삶을 살면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많은 생명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죽음이 가치가 있을까? 시대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멋진 소설이었다.


- 이 책은 리뷰어스 클럽의 지원을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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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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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직면할 때가 있다.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어서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있다. 얼굴을 돌리면 그 세상은 존재하는 않는 것 같고, 눈만 감으면 그 세상은 나와 상관없을 것 같은 현실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우리에게 그 현실을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작가라는 사람들이다.

 

 

 

6.25전쟁 전후의 좌우익의 잔혹한 대립을 묘사한 조정래 작가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처참한 학살장면을 그린 한강 작가, 그리고 칠레의 굴곡진 역사와 군사정권의 학살을 가족사로 이야기 하는 이사벨 아옌데 같은 작가들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보여준다.

 

 

 

 

최순실 게이트와 촛불 정국, 그리고 대통령 탄핵으로 우리의 현실만 보기에도 숨이 가쁜 2016년 연말이다. 이런 시기에 또 다른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가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자메이카라는 나라의 끔직한 현실을 보여주는 말런 제임스의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라는 소설이다. 말런 제임스는 영어권 세계에서는 변방이나 다름없는 자메이카의 현실을 통해 영어권 최고의 작품에게 수여하는 2015년 맨부커 상을 수상했다. 무엇이 이 영어권 사람들로부터 이 작품을 열광하게 했을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이 작품을 접했지만, 사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당황스럽기가 그지 없다. 장을 열자마자 살인과 강간, 폭력, 욕설과 총질이 난무하는 1976년 자메이카의 현실로 우리는 데려간다. 정제되지 않은 욕설과 폭력적인 언어, 외면하고 싶은 끔찍한 현실들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자메이카의 역사와 정치 현실과 얽혀 전개되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를 당황시킨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배경 지식이 필요했다. 먼저는 자메이카의 역사이다. 자메이카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쿠바의 근처에 있는 중앙아메키라의 섬나라이다. 오래 전 에디오피아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거래하던 장소로 인구의 대부분 역시 에디오피아 출신의 흑인들이다. 자메이카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62년에 독립이 되었다. 독립 후 자메이카 노동당이 집권을 했으나, 1972년부터는 좌파성향이 강한 마이클 맨리가 인민해방당으로 집권을 한다. 소설에서는 노동당과 인민국가당의 갈등이 극도로 고조된 1976년 선거를 전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른 하나는 '밥 말리'라는 인물이다. 밥 말리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지만 (심지어 이름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가수'라는 익명으로 불린다), 이 소설은 1976년 일어난 밥 말리 저격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 빈민가(소설에는 게토라고 부름) 출신으로 미국 빌보드 차트까지 오른 가수이다. 그는 성공을 했지만, 자신의 출신인 빈민가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친분을 가지고 지낸다. 또한 자메이카의 극단적인 정치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한다.

 

 

 

소설은 이런 밥 말리의 평화콘서트에 위기를 느낀 노동당과 노동당을 후원하는 CIA,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게토의 폭력조직이 밥 말리를 암살하려 시도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이런 사건을 시간의 흐름으로 전개하기 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독백을 통해 당시 자메이카가 처했있던 끔찍한 현실을 보여 준다.

 

 

 

 

이야기의 과정은 13명의 인물들이 서로 독백을 통해 전개 되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의 독백을 통해 당시 자메이카가 처한 끔찍한 현실이 여과 없이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 중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사람은 소설에서 밥 말리를 저격하는 밤-밤이라 불리는 어린 소년과 데무스라는 사람이다.

 

 

 

밤-밤은 어머니는 게토에서 두당 20-25달러를 팔고 몸을 판다. 그런 아내를 비난하며 때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데리고 온 폭력조직에 의해 끔찍히 살해 당한다. -밤은 이들을 피해 반대 조직인 파파-로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총으로 사람을 죽인다.

 

 

 

데무스의 사연은 더 끔찍하다. 어느날 데무스는 샤워할 곳이 없어 옥상의 물탱크에서 샤워를 한다. 그때 마침 경찰이 한 여성을 강간한 강간범을 잡으러 왔다. 그리고 무조건 벌거벗은 데무스와 몇 명의 사람들을 잡아간다. 경찰은 데무스에게 온갖 성적인 모욕과 고문을 한다. 그리고 몇 일 후 무죄라고 석방한다.

 

 

 

이들을 사주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위퍼'라는 인물도 끔찍한 사연이 있다. 무조건 총질을 하는 위퍼는 원래는 선량한 사람이다.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을 읽는 지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경찰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한다.  사건으로 위퍼는 끔직한 괴물로 변해버렸다.

 

 

 

"경찰은 위퍼의 안경 왼쪽 렌즈를 깨뜨렸다. 위퍼는 안경을 바꿔 쓸 여유가 생긴 지금까지도 그날 망가진 안경을 그대로 쓰고 다닌다. 경찰은 위퍼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감옥에 그를 가뒀다. 옷 다 벗겨. 속옷까지 벗기고 간이침대에 묶어. 경찰이 말했다. 쌍년아, 너 일렉트릭 부기라는 게 뭔지 아냐? 놈들 중 한 명이 토스트 기계에서 뜯어낸 전기 코드를 가지고 왔다. 놈들은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한 놈이 위퍼의 자지를 잡고 한쪽 전선을 귀두 부분에 감자 다른 놈이 말했다. 사람들이 너를 바티만이라 불러도 이해해라. 그러디니 놈들이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그때는 별일이 없었다. 하지만 놈들이 반대쪽 전선을 위퍼의 손가락과 잇몸, , 젖꼭지와 똥꾸멍에 갖다 댔을 때는 달랐다. 이 일에 대해 위퍼는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지만, 난 알고 있다." (P 137)

 

 

 

이렇게 자메이카의 현실이 만들어낸 괴물들이 밥 말리의 저격 사건에 가담한다. 이들은 자메이카의 인민국가당이 쿠바나 주변의 공산국가와 급격히 가까워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미국정권과 자메이카의 보수정권인 노동당, 파파-로라는 게토를 장악하고 있는 폭력조직의 두목, 그리고 파파-로 밑에서 실권을 차지한 조시 웨일스의 사주로 밥 말리의 저격을 시도한다. 결국 저자는 밥 말리의 저격을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로 보기에 앞서 자메이카라는 현실이 만들어 낸 부산물로 본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소설을 쓴 자메이카 출신의 작가 말런 제임스는 소설에 등장하는 자신이 접한 그 끔찍한 자메이카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자메이카라는 자기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밥 말리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왜 그 끔찍한 자메이카에 남아서 평화콘서트를 개최하며 자메이카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그는 정말 이런 상황에 있는 자메이카가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질문을 하다보니 다시 2016년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매주 촛불을 들고 모인 100만명의 시민들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그들은 매일같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몸서리치는 정치현실을 왜 외면하지 않았을까? 왜 굳이 그 끔찍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과 맞서고 있을까?

 

말런 제임스라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자메이카의 끔찍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조국 자메이카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메이카의 현실을 보여주고, 그럼에도 그 자메이카를 버릴 수 없는 작가의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끔찍한 자메이카의 현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아마 자메이카의 현실은 작가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마치 2016년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우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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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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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은 있다. 너무나도 행복하고 달콤해서 마치 신들의 품 속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있다. 내게는 어린 시절 언덕 위의 작은 집에 살던 기억이 바로 그 기억이다. 그곳은 시골의 작은 집으로 기억한다. 마을을 통과하는 작은 길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가면, 마을 맨 끝 집이 내가 살던 집이었다. 날씨가 따스한 봄날이면 어머니는 도시락을 만들고, 나와 형제들을 데리고 뒷산 언덕으로 올라갔다. 코스모스가 만발하던 날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놀았던 기억들이 아직도 내 의식 속에 남아있다. 이미 그 공간은 재개발이 되어 다 사라지고 없다. 그 당시의 집도, 그 당시의 언덕도 다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 기억만은 여전히 내 의식 속에 남아 있다. 결국에 내가 죽고, 내 의식이 사라져야 비로서 그 기억도 끝날 것이다. 그 전까지는 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계속 그 기억을 좇아가며 살아갈 것이다. 내게는 그 기억이 가장 따스한 신들의 품 속에서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들의 품속에 있었던 따스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났다. 아일랜드 작가인 존 밴빌이 쓴 [바다]라는 소설의 주인공 맥스이다. 나이가 든 맥스는 아내 애나가 암으로 죽은 직후 어린 시절 자신이 자랐던 고향 마을의 바닷가를 향한다. 그곳에는 시더빌이라는 별장과 그 별장을 지키는 베베수어라는 나이 든 여성이 있다. 맥스에게 시더빌과 베베수어는 자신의 기억 속의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신들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은 맥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맥스에게 신들의 장소와 신들의 시기를 선물한 사람들은 그레이스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의 맥스는 시더빌에서 여름휴가 차 내려 온 그레이스 가족을 보았을 때, 마치 그리스의 신화의 신들을 만난듯한 착각을 느낀다. 가난한 시골에서 항상 거칠고 폭력적인 부모님과 살던 맥스에게 여유롭고 신사적인 그레이스 가족은 신들, 그 자체였다. 포세이돈을 닮은 듯 권위가 있는 아버지 칼로 그레이스, 여신과 같은 그레이스 부인, 그리고 그의 딸 클로이와 쌍둥이 동생 마일스, 이들은 맥스가 살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어린 맥스는 그 신들과 만나고 싶었고,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 중에 가장 처음 맥스가 동경했던 여인은 마치 여신과도 같았던 그레이스 부인이었다. 나이가 든 맥스는 시더빌 근처를 지나는 차 안에 있던 그레이스 부인을 처음 보았던 날의 어린 맥스를 회상한다.

 

 

옆에 앉은 여자는 내린 창문 밖으로 팔꿈치를 내밀었는데, 그녀의 머리 역시 뒤로 젖혀져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강한 바람에 노르스름한 머리카락이 흔들렸지만, 그녀는 소리는 내지 않고 그냥 웃고만 있었다. 그 남자만을 위한 웃음이었다. 회의적이고, 관용적이고, 나른하면서도 즐거운 듯한 웃음, 여자는 하얀 블라우스에 하얀 뿔테가 달린 선글라스를 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어디 있었을까? 어느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숨어 차를 보고 있었을까? 나 자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곧 사라졌다. (P 17)

 

 

맥스는 그레이스 부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그레이스 부부의 딸 클로이와 아들 마일스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다닌다. 맥스의 기억 속에서 그들과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스 신화의 그림들처럼 황홀하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어머니뻘 여성에게 가졌던 환상이 모두 그렇듯 맥스의 환상은 곧 깨어진다. 어느 날 그레이스 가족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그레이스 부인의 품에 안겼을 때, 그 모두 동경과 환상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제 그 동경과 환상은 다시 클로이에게 향한다.

 

조금은 자기 중심적이고 멋대로인 클로이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이 처한 누추한 현실을 벗어나 신들의 세계 속의 일원이 된듯한 환상을 느낀다. 그녀와 함께 극장도 가고, 수영도 하면서, 적극적인 클로이의 육체적 접촉에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우연한 사고로 클로이와 마일스는 맥스를 남겨둔 채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소설은 성인이 되고, 이제는 늙은 맥스가 황량해진 바닷가 별장인 시더빌에서 죽은 아내와 클로이를 회상하는 부분으로 전개된다. 맥스가 그리워한 것은 죽은 아내일까? 아니면 아내의 이마고였던 클로이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레이스 가족과 보냈던 달콤했던 신들의 시절에 대한 기억뿐이었을까? 그레이스 가족도, 아내였던 애나도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신들에 대한 기억만 남은 맥스는 자신이 쫓던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간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품에서, 또는 자신이 신뢰하던 사람들의 품에서 따스하고 달콤한 경험을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진다. 우리는 이렇게 어린 시절의 그 따스하고 달콤해서, 마치 신들의 세계 속에 있었다는 환상을 일으키는 기억을 평생 좇아 다닌다. 고향 마을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맥스에게 맥스의 딸인 클레어가 비꼬듯 말한 것처럼, 우리는 과거 속에 사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과거 속에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아이 말이 옳았다.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한,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아늑함, 그런 것들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들어가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과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도 아니다. 그래도. (P 62)

 

 

내게 하늘의 거친 바람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고 피할 수 있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따뜻한 기억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기억 속을 쫓고 있는 것일까? 존 밴빌의 [바다]를 읽으며 외롭고 거친 삶을 산 한 남자의 따스한 기억 속을 여행하다 온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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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자 1
장용 지음, 양성희 옮김 / 조율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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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 드라마 [랑야방]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었다. 그리고 그 인기에 힘입어 원작 소설까지 출간이 되었었다. 최근에 다시금 [위장자]라는 중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며, [위장자]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다. [라야방]이 가상국가인 대량이라는 가상국가를 배경으로 한 무협적인 역사소설이었다면, [위장자]는 중국 근대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 나라 역사에서든지 격동기는 존재한다. 구체제가 무너지고, 신체제가 들어서면서 극심한 이념의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제강점기과 해방 후 6.25전쟁의 기간간까지 좌우이념으로 갈라지면 치열하게 싸운 시기가 격동기였다. 이 시기에는 자신이 믿는 이념때문에 가족과 형제 사이에도 총을 겨누어야 하는 가슴 아픈 일들이 벌어졌다. 그러기에 이런 시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 등이 많이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조금 오래 되었지만,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던 장하림(박상원), 최대치(최재성), 윤여옥(채시라)이라는 세 인물이 해방 후 각자의 이념으로 인해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이다. 장대한 스케일과 뛰어난 극본으로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김성종 작가의 원작까지 읽었다. 원작에서는 드라마보다 잔인하고 선정적인 묘사가 많이 등장해 조금 더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중국에도 이런 격동기가 존재한다.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무너지고, 군벌들이 난립하고,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과 함께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중국대륙을 침략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면서 다시금 중국 대륙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치열한 내전이 발생한다. [위장자]는 이런 중국 역사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명씨 가문의 세 남매가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소설은 1939년 상해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남경까지 점령한 후 잔인한 남경대학살을 일으키고, 한때 국민당에서 장계성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왕정위라는 인물을 내세워 친일 괴뢰정부를 수립한다.(중경정부, 또는 왕위정부라고도 부른다.) 내전 중이었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위기를 느끼고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에 대항한다. 결국 당시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상해는 일본세력뿐만 아니라 국민당첩자, 공산당첩자, 괴로정부 인사들이 모여 있었고, 서로의 신분을 속인채 암살과 공작이 난무했었다.

이 소설의 시작은 이런 상해에 명씨 가문의 장남인 명루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명루는 새로운 왕위정부의 경제장관이자, 첩보조직인 76호 책임자로 부임해 온다. 명루는 겉으로는 왕위정부의 핵심 관료이자 친일분자이잔, 제로는 국민당의 첩자로서 일본의 정보를 빼내어, 국민당에게 전해 준다.


명루의 누나이자, 명씨 가문의 사업을 이끌고 있는 여장부인 명경은 사업가이자만 실제로는 공산당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명대 역시 아무도 모르게 국민당의 군사훈련을 받고 상해로 잡입한다. 세 남매는 서로의 진짜 신분을 모른채 각자의 신념으로 일본에 맞써 조국을 위해 싸운다.


이런 치열한 싸움 과정에서도 항상 그렇듯 사랑은 꽃핀다. 이 소설에서 인상이 깊게 등장하는 세 명의 여인이 있다. 첫 번째 여성은 왕만춘이다. 한 때 명루와 사랑했으나 누나 명경의 반대로 해어진 후 독기를 품고 76호의 정보 책임자가 되었다. 그녀는 친일정부를 위해 항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색출해 잔인하게 처형을 한다. 그러나 그 잔임함 속에서도 명루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여성은 우만려이다. 명대와 함께 국민당 군사학교에서 만난 그녀는 명대와 함께 첩보 작전에 뛰어들면서 명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명대와는 너무나 다른 신분과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로 인해 명대를 사랑하지 못하고, 명대가 다른 여성을 사랑하는 것을 지켜 보기만 한다.


세 번째 여성은 정금운이란 여성이다. 공산당 첩보활동을 하던 그녀는 우연히 명대와 같은 작전에서 만나 명대의 도움을 받는다. 그 후 계속되는 인연으로 서로의 생명을 구해 주면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1권에서는 일본 정부와 괴뢰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탄 기차를 폭파하기도 하고, 명대의 활약으로 일본의 중요한 군사 기밀을 빼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명경과 명루, 명대 세명 모두 신분이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이 세 남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2권을 읽어봐야 알 것 같다.

 

 

- 이 책은 리뷰어스 클럽의 도서 지원을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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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수업 - 하루에 하나, 나를 사랑하게 되는 자존감 회복 훈련
윤홍균 지음 / 심플라이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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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더 건강을 생각하게 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주변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면서,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건강이 약해지면 이것들을 감당해 내지를 못한다. 건강이 소중한 이유이다. 그런데 최근에 드는 생각은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마음의 건강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육체가 건강해야 가족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사랑을 줄 수 있듯이, 마음이 건강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수가 있다. 마음이 병들면, 그래서 마음이 어두워지면 주변 사람들에게 그 영향이 미친다. 결국 육체와 함께 마음의 건강까지 돌봐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건강관리일 것이다.


이런 마음의 건강관리의 최고 중심에는 '자존감'이라는 것이 있다. 자존감은 우리 육체에서 심장과 같은 것이다. 심장이 약하면 모든 장기에 영향을 미쳐 병이 걸리듯이, 자존감이 약해지면 모든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


[자존감 수업]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면서 자존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는 자존감은 주위의 환경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의해 자주 변하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자존감을 지키는 사람이 인간관계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고 말한다.


"자존감은 자신을 어떤 높이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느낌이다. 이 느낌은 생각이며 판단이지만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유동적이고 시시때때로 변한다. 게다가 자존감 정도가 변할 때마다 그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올라갈 때는 흥분되지만 내려갈 때는 그만큼 공포감도 커진다.

자존감을 회복한 사람은 이 속도감을 비교적 잘 견뎌낸다. 내려갈 때도 안전띠를 매고 있으며, 실제로 추락할 확률은 극히 낮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다. 곧 다시 내려갈 것을 알고 미리 대비한다.

자존감을 회복하면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주위에 비난을 들어도 그 충격이 오래가지 않는다. 잠깐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해서 죽기 살기로 예민하게 굴지 않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건강하면 좋은 평판은 저절로 따라온다." (P 21)


저자는 자존감이 무너지면 타인과의 관계,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존감이 무너진 사람은 연애나 결혼에 힘들어한다고 말한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성과의 사랑에 자신감을 잃게 된다. 또는 부부사이에도 상대방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거나, 상대방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간구하게된다.


저자는 이렇게 병든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보는 법을 이야기한다. 글을 통해 자신에 대해서 적어보거나, 일기를 통해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보는 것이다. 특히 감정일기를 쓸 때는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만 보고, 그 원인을 추궁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선 감정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감정은 눈앞에 펼쳐진 파도와 같다. 파도에 휩쓸릴 게 아니라 그 파도를 탈 준비를 해야 한다. 오랫동안 파도에 휩쓸려온 사람이라면 파도를 바라보기만 해도 두려울 것이다. 따라서 감저으이 파도를 타기 위해선 눈을 뜨고 연습부터 해야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난하나 떠올리고 그때마다 떠올랐던 감정들을 적오보자. 그러면 공통된 감정이 나올 것이다. 만약 세 번 이상 반복된 감정이 있다면 그것과 관련되 사건이나 생각을 적어보자.

나는 그것을 '감정일기'라고 부른다. 감정 일기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마무리이다. 무조건 '나는 오늘 이러이러한 감정을 느꼈구나!'로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왜 이런 감정을 느겼을까?'로 끝내면 다시 한 번 감정을 격화시켜 자기 비난이나 우울감에 빠지기 쉽다. 일부러라도 물음표를 지우고 무조건 감탄사로 끝내자." (P 153)


이 중에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감정들이다. 우리 안에는 내가 정의하지 못하는 온갖 감정들이 생기고, 그 감정들이 나의 자존감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저자는 먼저 이런 감정들의 정체들을 명확히 하기를 권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자존감이 얼마나 변하기 쉽고,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또한 이런 자존감이 자신 안의 감정들에게 얼마나 쉽게 좌지우지 되는지도 깨닫게 된다. 결국 건강한 자존감을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과 정직히 맞서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이런 연습의 과정에 좋은 코치가 되어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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