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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가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직면할 때가 있다.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어서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있다. 얼굴을 돌리면 그 세상은 존재하는 않는 것 같고, 눈만 감으면 그 세상은 나와 상관없을 것 같은 현실이 있다. 그럼에도 굳이 우리에게 그 현실을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작가라는 사람들이다.
6.25전쟁 전후의 좌우익의 잔혹한 대립을 묘사한 조정래 작가나, 광주 민주화 운동의 처참한 학살장면을 그린 한강 작가, 그리고 칠레의 굴곡진 역사와 군사정권의 학살을 가족사로 이야기 하는 이사벨 아옌데 같은 작가들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보여준다.
최순실 게이트와 촛불 정국, 그리고 대통령 탄핵으로 우리의 현실만 보기에도 숨이 가쁜 2016년 연말이다. 이런 시기에 또 다른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작가의 작품이 출간되었다.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자메이카라는 나라의 끔직한 현실을 보여주는 말런 제임스의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라는 소설이다. 말런 제임스는 영어권 세계에서는 변방이나 다름없는 자메이카의 현실을 통해 영어권 최고의 작품에게 수여하는 2015년 맨부커 상을 수상했다. 무엇이 이 영어권 사람들로부터 이 작품을 열광하게 했을까?
이런 기대를 가지고 이 작품을 접했지만, 사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당황스럽기가 그지 없다. 장을 열자마자 살인과 강간, 폭력, 욕설과 총질이 난무하는 1976년 자메이카의 현실로 우리는 데려간다. 정제되지 않은 욕설과 폭력적인 언어, 외면하고 싶은 끔찍한 현실들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자메이카의 역사와 정치 현실과 얽혀 전개되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를 당황시킨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배경 지식이 필요했다. 먼저는 자메이카의 역사이다. 자메이카는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쿠바의 근처에 있는 중앙아메키라의 섬나라이다. 오래 전 에디오피아에서 잡아 온 노예들을 거래하던 장소로 인구의 대부분 역시 에디오피아 출신의 흑인들이다. 자메이카는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62년에 독립이 되었다. 독립 후 자메이카 노동당이 집권을 했으나, 1972년부터는 좌파성향이 강한 마이클 맨리가 인민해방당으로 집권을 한다. 소설에서는 노동당과 인민국가당의 갈등이 극도로 고조된 1976년 선거를 전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른 하나는 '밥 말리'라는 인물이다. 밥 말리는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지만 (심지어 이름도 언급되지 않고 다만 '가수'라는 익명으로 불린다), 이 소설은 1976년 일어난 밥 말리 저격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 빈민가(소설에는 게토라고 부름) 출신으로 미국 빌보드 차트까지 오른 가수이다. 그는 성공을 했지만, 자신의 출신인 빈민가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친분을 가지고 지낸다. 또한 자메이카의 극단적인 정치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평화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한다.
소설은 이런 밥 말리의 평화콘서트에 위기를 느낀 노동당과 노동당을 후원하는 CIA,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게토의 폭력조직이 밥 말리를 암살하려 시도한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이런 사건을 시간의 흐름으로 전개하기 보다는, 주변 인물들의 독백을 통해 당시 자메이카가 처했있던 끔찍한 현실을 보여 준다.
이야기의 과정은 13명의 인물들이 서로 독백을 통해 전개 되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의 독백을 통해 당시 자메이카가 처한 끔찍한 현실이 여과 없이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 중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사람은 소설에서 밥 말리를 저격하는 밤-밤이라 불리는 어린 소년과 데무스라는 사람이다.
밤-밤은 어머니는 게토에서 두당 20-25달러를 팔고 몸을 판다. 그런 아내를 비난하며 때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데리고 온 폭력조직에 의해 끔찍히 살해 당한다. 밤-밤은 이들을 피해 반대 조직인 파파-로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총으로 사람을 죽인다.
데무스의 사연은 더 끔찍하다. 어느날 데무스는 샤워할 곳이 없어 옥상의 물탱크에서 샤워를 한다. 그때 마침 경찰이 한 여성을 강간한 강간범을 잡으러 왔다. 그리고 무조건 벌거벗은 데무스와 몇 명의 사람들을 잡아간다. 경찰은 데무스에게 온갖 성적인 모욕과 고문을 한다. 그리고 몇 일 후 무죄라고 석방한다.
이들을 사주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위퍼'라는 인물도 끔찍한 사연이 있다. 무조건 총질을 하는 위퍼는 원래는 선량한 사람이다.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을 읽는 지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경찰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한다. 그 사건으로 위퍼는 끔직한 괴물로 변해버렸다.
"경찰은 위퍼의 안경 왼쪽 렌즈를 깨뜨렸다. 위퍼는 안경을 바꿔 쓸 여유가 생긴 지금까지도 그날 망가진 안경을 그대로 쓰고 다닌다. 경찰은 위퍼가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감옥에 그를 가뒀다. 옷 다 벗겨. 속옷까지 벗기고 간이침대에 묶어. 경찰이 말했다. 쌍년아, 너 일렉트릭 부기라는 게 뭔지 아냐? 놈들 중 한 명이 토스트 기계에서 뜯어낸 전기 코드를 가지고 왔다. 놈들은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한 놈이 위퍼의 자지를 잡고 한쪽 전선을 귀두 부분에 감자 다른 놈이 말했다. 사람들이 너를 바티만이라 불러도 이해해라. 그러디니 놈들이 코드를 콘센트에 꽂았다. 그때는 별일이 없었다. 하지만 놈들이 반대쪽 전선을 위퍼의 손가락과 잇몸, 코, 젖꼭지와 똥꾸멍에 갖다 댔을 때는 달랐다. 이 일에 대해 위퍼는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지만, 난 알고 있다." (P 137)
이렇게 자메이카의 현실이 만들어낸 괴물들이 밥 말리의 저격 사건에 가담한다. 이들은 자메이카의 인민국가당이 쿠바나 주변의 공산국가와 급격히 가까워지는 것에 위협을 느낀 미국정권과 자메이카의 보수정권인 노동당, 파파-로라는 게토를 장악하고 있는 폭력조직의 두목, 그리고 파파-로 밑에서 실권을 차지한 조시 웨일스의 사주로 밥 말리의 저격을 시도한다. 결국 저자는 밥 말리의 저격을 정치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로 보기에 앞서 자메이카라는 현실이 만들어 낸 부산물로 본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소설을 쓴 자메이카 출신의 작가 말런 제임스는 소설에 등장하는 자신이 접한 그 끔찍한 자메이카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런 자메이카라는 자기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밥 말리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왜 그 끔찍한 자메이카에 남아서 평화콘서트를 개최하며 자메이카의 변화를 위해 노력했을까? 그는 정말 이런 상황에 있는 자메이카가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질문을 하다보니 다시 2016년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매주 촛불을 들고 모인 100만명의 시민들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그들은 매일같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몸서리치는 정치현실을 왜 외면하지 않았을까? 왜 굳이 그 끔찍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과 맞서고 있을까?
말런 제임스라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 자메이카의 끔찍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조국 자메이카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메이카의 현실을 보여주고, 그럼에도 그 자메이카를 버릴 수 없는 작가의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끔찍한 자메이카의 현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아마 자메이카의 현실은 작가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마치 2016년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우리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