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최용준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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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런 공상을 빠지곤 해. 오늘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란 공상.”

(H.G. 웰스 「기묘한 난초의 개화」 중에서, 56쪽)

 

 

 

공상과학소설은 19세기에 태어난 21세기 장르이다. SF처럼 자기 시대와 불화하며 다른 시대를 앞서 선취하는 장르는 찾아보기 어렵다. 자기의 시대로부터 망명하여 새로운 세기를 예비하는 그 특유의 선취성은 때로 경박한 오락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주류문학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허버트 조지 웰스가 타임머신이라는 황당무계한 소재를 상상했을 때, 사람들은 터무니없다고 치부했다. 하지만 불과 10년 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면서 이 황당한 상상력은 가능성이 되었다.

 

웰스는 쥘 베른과 함께 과학소설의 원조로 평가받는다. 베른이 할아버지라면, 웰스는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웰스의 영향력은 21세기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준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작가로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에 웰스의 작품들을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다. 그가 발표한 소설에 웰스가 연상되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개미』에서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저자로 나오는 천재 곤충학자의 이름이 에드몽 웰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웰스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웰스는 자신의 단편소설들이 신사의 서재보다 요양소 침대나 치과의 응접실, 기차 같은 곳에서 읽히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이 단편선집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오락성 짙은 내용만 모아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한 세기 앞선 웰스의 상상력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담장에 난 문」은 웰스의 단편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흔히 SF 단편 모음집에 ‘벽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벽 속에 현실을 뛰어넘은 미지의 세계를 아름답고 경이롭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어린아이가 우연히 집 근처 벽 안에 있는 초록색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기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는 매우 아름답고 행복하며 어린이 눈으로 봐도 현실보다 달콤하다. 벽 속에 펼쳐진 정원에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큰 흑표범 두 마리가 살고 있다. 아이는 그곳에서 행복한 산책을 경험한다. 벽 속의 신비로운 세계를 묘사한 이 장면은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요정의 섬」이나 「이른하임의 영토」에 연출된 환상적인 풍경 분위기와 흡사하다. 웰스는 포처럼 환상의 세계를 구체적 묘사를 통해 영사기처럼 보여 준다.

 

정체를 알 수 없거나 기존의 생태 방식을 뛰어넘는 괴생물체가 등장하는 작품들은 전혀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묘한 난초의 개화」는 존 윈덤의 1951년 작 소설 『트리피드의 날』에 인간을 살상한는 괴식물의 등장을 예고한다. 평범하게 보이는 난초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는 내용은 자연을 지배하면서 문명의 진보에 들뜬 인류의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바다의 침입자」는 지나가는 배를 촉수로 공격하는 두족류(오징어, 낙지가 여기에 속함)가 등장한다.

 

영화에 나오는 괴물은 3D 기술의 등장 덕분에 한층 더 실감 나게 연출이 가능하다. 요즘에 나오는 괴물영화와 비교하면 「바다의 침입자」는 괴물의 형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을 공격하는 촉수 괴물과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면서 맞서는 인간의 대결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진다. 「개미 제국」은 웰스의 단편작품들 중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시리즈가 탄생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작품이다. 여기서 『개미』 줄거리가 형성되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개미들은 ‘손가락들’이라고 불리는 인간을 정복하려고 한다. 웰스는 베르베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작은 생명체 개미가 인간의 수준이 돼서 전쟁을 치르는 장면을 상상한다.

 

 

인간들이 책과 기록으로 지식을 모았듯이 개미들이 곧 지식을 모으기 시작하고 무기를 사용하고 거대한 제국을 만들고 계획적이고 조직화된 전쟁을 치른다면? (「개미 제국」 중에서, 554쪽)

 

 

웰스는 과학의 진보가 이루어낸 문명의 위대함을 예찬하면서도 그에 대한 인류의 맹목적인 믿음 또한 경고한다. 「발전기의 왕」은 기계가 작동되는 문명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상을 암시한다. 「도둑맞은 세균」은 생물학 무기와 세균전이 초래하게 될 위험성을 경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웰스의 작품은 비관주의 성향으로 짙어졌는데 189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에 발표된 단편에서도 언젠가 다가오게 될 과학 문명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웰스의 유명 장편 『타임머신』『투명 인간』을 재미있게 읽어 본 독자라면 단편소설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웰스의 SF 문학 세계에 입문하는 독자는 단편소설을 먼저 읽어보면 좋다. 작품을 읽고 나서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든 독자가 있다면 웰스 본인에게는 무척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단, 책에 아쉬운 점 하나가 있다면 독자에게 생소한 용어나 인명에 대한 주석이 없는 것이다. 간혹 글에 과학 관련 용어나 웰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 언급된다. ‘크레오소트’(「아르피니오스 섬」), ‘두족류’(「바다의 침입자」), ‘섭동’(「별」), ‘블라바츠키 부인’(「기적을 행하는 남자」)은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상세한 주석은 독자가 백 년 전에 나온 글을 읽으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루한 이야기라도 독자가 전혀 거리감 없이 재미있게 읽히기 위해서는 주석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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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독서 -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근본적 읽기의 기술
에밀 파게 지음, 최성웅 옮김 / 유유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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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밀란 쿤데라, 『느림』 중에서)

 

 


 Scene #1  속독의 시대 

 

바야흐로 속도의 시대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빨라졌고, 그에 걸맞게 간편해졌다. 그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도태되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수십 가지 정보가 쏟아지는 요즘, 한 장 한 장 교감해야 하는 책은 낡고 지루한 것으로 여겨질 뿐이다. 수많은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는 쓸 만한 정보를 얼마나 빨리 입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성공의 성패를 좌우한다. 필요한 정보를 제때 얻지 못한다면 뒤처질 것이 자명하다. 바쁜 직장인들에게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 가장 간편하고 좋은 방법은 독서를 통한 공부이며, 독서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속독법이다. 속도의 시대는 곧 속독의 시대인 셈이다.

 

올해 초, 미국에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면 두꺼운 책을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천천히 단어를 읽으면서 시선을 아래로 이동하게 된다. 애플리케이션은 이런 동작을 세분화시킨 것인데, 이용자들에게 단어를 한 번에 하나씩 빠르게 보여준다. 1분에 250단어에서부터 천 단어까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 기술은 삼성의 갤럭시 기어가 이미 베타버전으로 선보였다. 만약 최고 속도인 1분당 1000개 단어의 속도로 읽을 수 있다면 해리포터를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은 77분,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는 단 하루다. 우리나라도 전자북을 읽을 수 있는 속독 애플리케이션이 나왔다.

 

그런데 속독을 하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예전에 속독으로 일주일에 다섯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수필이나 가벼운 소설 한 권 정도는 세 시간이면 볼 수 있었고, 어렵고 두꺼운 책이라도 넉넉잡아 너 다섯 시간이면 충분했다. 별생각과 준비 없이 줄거리 위주로 속독했는데 며칠 지난 후에 그때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이나 줄거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 서평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책에 대해서 조금만 깊은 내용을 물었다면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Scene #2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기의 즐거움  

 

그렇다면 속독의 시대 속에 효과적으로 책을 읽는 지름길이 없을까. 요즘처럼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속독과 다독이 효과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둘 다 일리가 있다. 마음의 양식인 책도 질과 양의 조화가 맞아야 '영혼의 보약'이 된다는 뜻에서 보자면 먼저 천천히 음미하면서 깊이 있게 책을 읽는 방식도 좋다.

 

프랑스 인문학자 에밀 파게(1847~1916)는 온전히 독서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느리게 읽을 것을 강조한다. 책을 느긋하게 꼼꼼히 읽어내는 ‘슬로 리더(slow reader)’가 되는 것이다.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는 『L'Art de Lire』를 번역한 책이다. 프랑스어 원제를 우리말로 풀어내면 '독서술'이다. 1959년에 '독서술'이라는 제목으로 에밀 파게의 책이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되었다. 번역자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한사전을 편찬한 故 이휘영 선생(1919~1986)이다. 최근에 새로운 제목으로 『L'Art de Lire』 완역본이 처음 선보였다.

 

『단단한 독서』는 에밀 파게가 65세 때 쓴 책이다. 그러니까 1912년에 출간되었다. 세상에 나온 지 무려 100년이나 지난 이 책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인문학 열풍과 함께 '독서법'을 소개하는 책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지고 있는데, 속독의 시대 속에서 '슬로 리딩'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슬로 리딩'을 올바른 독서법으로 정립하고, 제시한 사람은 에밀 파게였다.

 

책 읽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선 책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뒤로도 계속 천천히,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게 될 소중한 책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야 한다. (17쪽)

 

『단단한 독서』는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특별한 비법 몇 가지 나열한 자기계발 도서가 아니다. 속독의 시대 속에서 잊고 있던 독서의 즐거움을 떠올리게 한다. 되도록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속독 콤플렉스' 때문에 점점 책을 꺼리는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읽기'는 잊힌 책에 대한 애정을 되살려준다. 독서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친근한 행위로 만들 수 있다. 책과 좀 더 친해지려면 느리게 읽을수록 좋다. 수박 겉핥기식의 속독은 책의 가치를 제대로 판별하지 못한다. 저자가 책에서 말하는 생각을 무턱대고 믿어버리고, 텍스트의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린다. 오히려 이런 속독이 책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는 나태한 독서법이 된다.

 

천천히 책을 읽었다면, 이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듭 읽어야 한다. '생각을 담은 책' 즉 철학자가 쓴 책의 경우, 책 속 내용과 자기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철학자의 생각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책 속에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는 문체를 즐기는 데 좋다. 우리가 글을 쓰게 되면 교정을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이 좀 더 나은 글로 독자의 마음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문체와 언어를 교정해야 한다. 거듭 읽기도 마찬가지다. 책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맨 처음에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묵상해야 하는 책들을 급하게 읽어버리면 이건 좀 낭비다. 천천히 생각하면서 읽다가, 불현듯 깨닫게 되는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되는 그 기쁨을 놓쳐버린다니,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Scene #3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깨달음의 깊이는 읽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깊은 깨달음은 깊은 읽기에서 나온다. 천천히 깊이 읽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천천히 깊이 읽을 때 우리는 독서의 깊은 맛을 경험하게 된다. 독서의 기술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영혼의 양식인 책을 소중히 여기는 독서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 딱 한 권이라도 있다면, 처음의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라.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하라. 오래 사귄 친구처럼 진정으로 속 깊은 정을 나누듯이.

 

그렇지만, 세상에 나온 모든 책이 다 완벽하고 똑똑하다고 볼 수 없다. 파게는 책을 자신의 오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친구이면서도 그의 결점을 숨기는 것을 경계한다. 느린 속도로 거듭 읽는 것은 단지 책에 대한 감동의 즐거움을 느껴줄 뿐만 아니라, 독자가 책의 결점을 꼼꼼하게 검토하여 저자를 비판할 수 있도록 무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파게가 독자에게 강조하는 ‘단단한 독서’다.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돼야 한다. 이해하고자 할 때는 올바른 방법으로 자신의 무장을 해제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다시 갑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최종적으로 비판적 검토 아래, 작품이 지닌 진실과 아름다움에 애당초 토론이 불필요했음이 입증됐을 때 다시 자신의 갑옷을 내려놔야 한다. (189쪽)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게 다가와 저자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힘. 그것이 제대로 된 '단단한 독서'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단단히 무장한 독자가 되고 싶다면, 에밀 파게의 독서술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느릿느릿 거듭거듭 읽어야 한다. Iterum quae digna legi sint. 『단단한 독서』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의 의미처럼 다시 한 번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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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僧은 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十 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 '여승')

 

 


지아비는 집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어린 딸은 돌무덤이 되고 옥수수를 팔던 파리한 여인은 여승이 되었다. 속세의 인연을 끊는 마지막 장면이 처연하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에 비극적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가난 때문에 가족을 잃고 여승이 되기까지의 일생을 서사적으로 잘 그려 내고 있다. 먼 그 시절에도 가족 해체의 슬픔이 있었다. 백석 시가 보여준 애잔한 정서는 일제 강점기 발붙일 곳 없이 떠돌아야 했던 유랑과 상실의 소산이지만 그 원천은 사실 시인된 자가 가진 원형적인 고독과 비애의 결과물이다.

 

이 시가 쓰인 시기는 일본의 착취와 억압이 심했다. 그때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식민지 현실에 희생당한 민족의 삶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시를 단순하게 보면 한 여인의 비극적인 인생사를 압축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힘겨운 현실 속에 좌절하는 우리나라 여성의 한(恨)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백석 시에 나오는 여승은 속세를 떠나도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을 것이다. 과부가 기구한 운명을 끝내기 위해 속세와의 단절을 결심하게 된 그녀의 사연을 불경처럼 서러워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여승이 된다는 것은 유교 이념이 강한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여성을 사회통합의 구성원으로 수렴되기 위해서는 만든 것이 삼종지도(三從之道)다. 유교 사회에서 여자는 어렸을 때 지아비를 쫓고, 출가해서 혼인하면 남편을 따라야 하며, 노후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 이렇듯 조선의 여성들은 삼종지도를 숙명으로 여기며 자신의 욕망을 꾹꾹 봉인해야 했다. 과거 여성들에게 최고의 출세와 신분상승은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진 남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삼종지도의 숙명을 거스르거나 따르지 못한 여성은 국가가 강조하는 유교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로 간주하였다. 결국, 이들에게 억압과 차별의 시대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같은 곳이 바로 절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국가 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이었다. 남성 사대부들이 혼인을 피하고 여승이 되는 여성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그래서 불교와 여성 둘 다 억압할 수 있는 제재와 제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승이 되려는 여성이나 절에 다니는 부녀자에게 '실행죄'(失行)가 적용되었다. 여기서 '실행'이란 '성적인 방종'이라는 의미가 있다. 조선 시대 최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에 보면 여승이 되어 절에 들어가는 여성은 절개를 잃은 것으로 해석했다. 심지어 중이 과부의 집에 출입하거나 만나는 것조차도 실행의 사례로 봤다. 당시 관료들과 사대부들의 기본적인 사고가 이러했다. 절이 문란한 풍습을 조장하고, 부녀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곳이다. 그곳에 출입을 잦거나 여승이 되는 여자는 여성의 정절을 해치는 범죄로 바라봤다.

 

"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백석 시에 나오는 여승은 과거에 어떤 남편의 아내이자 어린 딸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가정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녀는 과부가 되었다. 평생 수절하면서 인고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원망에 가을밤 같이 차게 울어야 했다. 가난한 생활 그리고 과부를 향한 차별과 편견 어린 시선은 그녀가 짊어져야 할 이중고였다. 그나마 유일한 핏줄인 딸마저 저 세상을 먼저 떠나보냈다. 모든 것을 상실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승이 되는 것뿐이었다. 운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불가에 귀의한 여인. 그녀의 모습은 유교의 엄격한 도덕에 의해 억압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성들의 삶이기도 하다. 고달픈 조선 여성들의 삶을 알고 나서 오랜만에 백석 시를 읽으니까 나도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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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의 역사 - 조선 지식인의 성 담론
이숙인 지음 / 푸른역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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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숙  「신부」  2007년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알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알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잡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 ‘신부’)

 

 

여인이 불 켜진 방안에 혼자 앉아있고, 댓돌 위에 고무신이 한 켤레만 가지런히 놓여있다. 문틈으로 나와 있는 옷자락은 첫날밤을 앞두는 아리따운 신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말았다.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신부는 평생을 그대로 앉아 있다. 먼 훗날 신랑의 손길이 닿자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

 

이 시를 읽으면 슬픔과 외로움이 느껴진다. 한 편의 전설과 같은 시 속에 외롭고 슬픈 신부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기다리다 한 줌 재가 된다는 것. 이 시 속에는 우리나라 옛날 여인들의 한(恨)이 있다.

 

수절을 미덕으로 삼았던 한국 여인의 애틋한 삶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이 시는 유교적 열녀의 이미지를 신화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조선 시대 여성의 정절(貞節)은 남성의 충절(忠節)과 더불어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적 규범이자 인간적 덕목이었다.

 

농촌 마을을 지나다 보면 마을 어귀나 도로 주변에서 문 모양의 나무 건축물들이 보호 울타리 속에 서 있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아마도 우리가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일 것이다. 이런 건축물이 '정려'(旌閭)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마을 입구나 집 앞에 세우는 문을 말한다.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 대해 국가에서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삼국시대에도 나오지만, 이를 정려와 같은 사회제도로 정비한 것은 조선 시대였다. 태조는 조선을 세워 왕이 된 다음, 충신이나 효자, 열녀의 행실을 널리 권장하고, 정려를 세워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는 각 고을 수령의 추천을 받아서 연초에 국가 차원에서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결정했다. 충신이나 효자, 열녀로 인정되면 그 집안사람들은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를 ‘복호’(復戶)라고 한다.

 

정려가 오늘날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를 가문의 영예로 여겨 잘 보존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려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구실을 했다. 가족윤리가 강조되는 5월에 정려는 전통 윤리의 상징으로 되새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정려가 가지는 의미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려를 통해 지키고자 했던 윤리들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기도 했다. 정려가 세워진 집안의 후손들은 알게 모르게 그와 같은 삶을 따라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특히 이러한 압력을 강하게 받았던 것은 여성이었다. 정려가 내려진 인물 중 다수는 여성이었는데, 이는 남편에 대한 정절의 대가였다. 이는 평민이나 노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정절은 정려가 요구하는 여성이 지켜야 할 가장 우선적인 덕목이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사회적인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재혼한 여성의 자식은 벼슬길에 오르는데 제한을 받았다.

 

남녀 문제와 부부의 문제가 결합한 정절은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상호 개념이지만 조선에서는 여성 일방의 의무개념으로 전개되었다. 소복을 입고 언제든 가슴에 찬 은장도를 꺼내 들 준비가 된 여인. 서정주의 시에 나오는 신부처럼 평생 한 남자, 즉 한 남편만을 섬기는 여인. 전란 통에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인. 그 연원을 따져보면 조선 시대 여성의 잔혹한 역사를 탄생시킨 내밀한 국가의 의도와 만나게 된다. 신하의 충절과 아내의 정절이 한 쌍을 이루는 유교적인 정치체제에서 정절은 가족을 유지하고 충절은 국가를 지탱하는 이념이었다. 즉 정절은 국법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부부 사이의 개인적 도덕인 정절을 국가가 관리했다는 뜻이다. 이 시기 정절을 지킨 아내에게는 국가 차원의 보상이 이뤄졌고, 반대로 개가한 과부 등 ‘정절을 해친’ 아내는 국가가 나서서 분노하고 응징하기까지 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정절을 어긴 이른바 실행녀(失行女)의 남성 가족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관직 진입 자체가 어려웠다. ‘자녀안'(姿女案)이라 하여 양반 출신으로 부정한 짓을 하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여성의 소행을 적어 그 자손의 관직 등용을 제한했다. 이러한 정절과 관련된 법과 제도는 국가 차원에서 정절 여성을 발굴하는 동시에 여성의 음란행위를 감시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정절 이데올로기’는 순수혈통을 지켜내기 위해 여성들의 성을 구속하였고, 이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들에게는 유·무형의 가혹한 처벌이 주어졌다. 가부장적 사회의 잣대로 이분화한 순결한 여성과 타락한 여성으로 재단한다. 우리는 후자에 속하는 여성에 대한 경멸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뭔가 당할 만했겠지’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심지어 가슴이 파인 상의에, 허벅지가 훤하게 드러나는 짧은 치마 같은 야한 느낌이 드는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식의 여성책임론이 나온다. 이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내려오는 여성의 정조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여성이 열녀라는 타이틀을 받으면 그 여성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에도 영광이었다. 하지만,  한 여성이 여성으로 사는 삶을 희생하는 조건으로만 사회적 출세를, 그것도 다 늙은 다음에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성 개인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조선 시대를 절대적으로 지배한 유교라는 사상과 잦은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조선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장벽 ‘정절 이데올로기’에 부딪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선 시대 여인들은 수천수만 명이 훨씬 넘게 존재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열녀의 죽음이 과연 그 시대에 타인에 의해 정당하게 칭송될 수 있는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는지 역사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희생된 이름 없는 여인들의 넋을 기리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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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가자, 지구의 중심으로!”

(『지구 속 여행』 중에서, 157쪽)

 

 

 

 

호기심이 많은 열한 살의 소년 쥘은 동갑내기 사촌누이를 무척 좋아했다. 고운 빛깔이 나는 산호 목걸이를 누이에게 선물로 준다면 누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산호 목걸이는 무척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쥘은 산호 목걸이를 얻을 수 있는 인도에 가기로 했다. 마침 마을 주변에 있는 항구에 가면 인도로 가는 원양선을 볼 수 있었다. 쥘은 그 배를 타서 인도로 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동양의 세계로 향하는 쥘의 모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쥘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이때부터 쥘은 아버지에게 “앞으로는 상상 속에서만 여행하겠다”고 약속한다. 어른이 된 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되고, 평범한 법률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쥘은 어린 시절에 활짝 펴지 못한 모험의 동경을 잊지 않았다. 무한한 상상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음껏 탐험했다. 상상의 여행 속에서 그려지는 신비로운 장면 그리고 여행의 생생한 감동을 잊지 않으려고 쥘은 펜을 잡았다. 그가 처음으로 여행을 한 곳은 아프리카.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얻고 있던 열기구를 탔다.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Voyages extraordinaires) 시리즈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만약에 쥘 베른이 인도로 떠날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항해사(Navigator)가 되었을 것이다. 베른은 상상의 여행을 하는 항해사가 되었고, 그가 쓴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꿈속에서 여행하는 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내비게이션(Navigation)이 되었다. 베른이 없었다면, 모험심이 가득한 소년 쥘과 같은 어린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꿈속에서 여행하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실감 나게 소개하고 있다.

 

『지구 속 여행』(Voyage au centre de la Terre)은 ‘경이의 여행’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TV 드라마, 영화를 통해 약 10회 정도 영상으로 재탄생되었다. 2008년에 개봉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의 원작도 『지구 속 여행』이다. 아이슬란드의 사화산 분화구를 통해 지구 중심을 여행하며 지질시대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원작과 영화는 지구 속으로 여행을 한다는 점에서 줄거리는 같지만,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는 지질학자인 주인공 트레버와 그의 조카 션이 모험의 주인공이다. 오래전에 실종된 트레버의 형이 남긴 상자 속에 <지구 속 여행>이라는 고서를 발견하게 된다. 트레버는 조카인 션과 함께 암호를 해독하는데 그것은 지구 속 세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암호에 적힌 대로 트레버와 션은 사화산 분화구가 있는 아이슬란드로 향한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트레버와 션은 지구 속 여행에 합류하게 되는 산악가이드 한나를 만나게 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원작에서도 지질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광물학 교수 오토 리덴브로크와 그의 조카 악셀이 등장한다. 리덴브로크 교수는 희귀본 수집광이다. 아이슬란드의 고대 학자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쓴 책을 읽다가 암호가 적힌 양피지를 발견한다. 양피지를 쓴 사람은 아이슬란드의 연금술사이자 학자인 아르네 사크누셈. 아이슬란드의 연금술사는 자신이 지구 속으로 여행한 사실을 기묘한 암호 형태로 남긴 것이다. 리덴브로크 일행과 함께 지구 속 여행을 함께하는 안내인은 한스 비엘케라는 남성이다. 과묵한 성격이지만, 무모하고도 위험한 여행에 끝까지 동행한다.

 

 

 

 

 

 

 

리덴브로크는 지구 속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척 궁금해 한다. 그 곳을 진짜로 발견하면 과학의 역사에 새롭게 한 획을 긋는 동시에 기존의 학설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 된다. 하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지구 속을 여행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 속으로 들어갈수록 마그마로 인해 지열의 온도가 높아진다. 지열은 인간과 기계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그렇지만, 베른은 지구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상상력을 펼친다. 베른이 활동했던 당시 유럽은 ‘지구공동설’(地球空洞說)이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지구 속은 텅 비어 있는 공간이며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남극과 북극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가설이 되었지만, ‘지구공동설’도 한 때 주류 과학의 화제였다. ‘핼리 혜성’의 등장을 예측했던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헬리가 지구 속 구조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수학자 오일러는 지구 중심에 1000km 직경의 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구공동설은 과학이 발달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새롭게 변형되어 대중 앞에 나타난다. 20세기 들어 지구공동설 학자 레이먼드 버나드 박사는 1969년에 쓴 『The Hollow Earth』를 통해 UFO가 지구 안에서 나오며, 고리 성운이 지구 속이 비어있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에 전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사칭한 트위터  UFO에 대한 극비 문서를 폭로하며 지구공동설을 주장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만약에 베른의 소설 속 내용처럼 지구 속에 또 다른 지구가 있다면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리덴브로크 일행은 지중해와 비슷한 넓은 바다와 구름이 떠 있는 대기 그리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고대 동식물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지구 속의 또 다른 지구’는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람도, 동물도 살 수 없는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또, 리덴브로크 일행은 절대로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 없다. 뉴턴의 구각정리에 의하면 지구 속 공간에 작용되는 중력의 합이 0이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간 인간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중력이 없는 세계는 곧 인간과 동식물마저 살 수 없는 죽음의 세계다. 

 

그렇다고 베른이 과학적 이론에 문외한 통속소설 작가 수준은 아니다. 지금도 베른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영화나 드라마도 재탄생되는 이유는 근대 과학적 지식에 모험과 판타지를 결합한 소설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독자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흥미로운 관심사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첨가하는 스토리텔링이 만난 환상적인 작품이다. 독자는 베른이 창조한 세계가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짜 같은 허구’의 세계에 매료된다. 소설 속 세상을 마치 실존의 세상으로 믿는 ‘베르니안’(그의 넘치는 상상력에 심취되어 소설 속 세상을 마치 실존의 세상으로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라 불리는 독자들까지 생겨날 정도이다.

 

『지구 속 여행』에 당대의 과학자 이름이 실명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지리적 환경과 화산 분화구 주변의 풍경을 장황하게 느껴질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기상천외한 지구 속 모험이 얼른 시작되기를 바라는 독자라면 이 내용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베른의 뛰어난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읽었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전 4권 / 열린책들, 2013~2014년)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제3인류』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이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SF 소설과 과학소설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지금도 새롭게 변용되는 쥘 베른의 영향력은 경이적이다.

 

 


P.S. 다음 ‘경이의 여행’ 목적지는 달이다. 거대한 포탄을 타고 달에 가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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