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루주 사건 - 고전추리걸작
에밀 가보리오 지음, 박진영 엮음, 안회남 옮김 / 페이퍼하우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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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Scene #1  추리소설 탐정의 조상 

 

 

 

 

1887년에 아서 코난 도일이 발표한 『주홍색 연구』는 최초로 셜록 홈즈가 등장한 작품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상을 입고 송환된 군의관 왓슨 박사가 친구의 소개로 셜록 홈즈의 룸메이트가 된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문 탐정 홈즈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처음 만난 왓슨의 이모저모를 알아맞혀 왓슨을 놀라게 한다. 왓슨은 홈즈의 비범한 추리력을 에드거 앨런 포(1809~1849)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자 탐정인 오귀스트 뒤팽이 연상된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홈즈는 뒤팽을 수준 낮은 탐정에 불과하다며 돌직구 디스(Diss)를 시전한다. 그러자 왓슨은 에밀 가보리오(1832~1873)가 쓴 탐정 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르코크(르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 르코크 또한 홈즈의 디스를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 뒤팽보다 더 심하게 까였다.

 

 

셜록 홈즈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르콕은 형편없는 인물이지요.” 그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게 봐줄 만한 것은 그의 의욕뿐입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정말 속이 뒤집혔습니다. 문제는 죄수들 중에서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느냐는 것이었지요. 나라면 그런 문제는 24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르콕에게는 여섯 달이 걸렸습니다. 그 책은 탐정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대해 가르치는 교본으로 쓰일 수는 있겠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  『주홍색 연구』 중에서, 황금가지, 37쪽)

 

 

왓슨은 자신이 좋아하던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이 홈'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준말)에 가까운 홈즈의 독설에 만신창이 되는 모습에 속상해한다. 오귀스트 뒤팽과 르코크. 이 두 사람은 셜록 홈즈를 비롯한 추리소설 탐정의 조상님이다. 뒤팽은 『모르그 가의 살인』에 처음 등장했다. 르코크는 국내 독자에게 생소한 탐정이다. 『르루주 사건』이 첫 등장 작품이며 그 후로 르코크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이 나왔다. 발표연도는 포의 뒤팽이 빠르지만(『모르그 가의 살인』은 1841년, 『르루주 사건』은 1866년) 두 작품 다 세계 최초의 추리소설로 인정한다. 포는 세계 최초의 단편 추리소설, 가보리오는 세계 최초의 장편 추리소설을 썼다.

 

도일은 자신의 첫 탐정소설에 포의 뒤팽과 가브리오의 르코크를 이제 막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홈즈와 비교당하는 과감한 장면을 삽입했다. 홈즈 시리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포와 가브리오의 작품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아마도 이 두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면 도일의 홈즈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홈즈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는 대접을 받게 되지만, 도일은 탐정소설의 원조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홈즈의 탄생이 뒤팽과 르코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Scene #2  “나도 한때 홈즈보다 인기가 많은 시절이 있었다오.”  

 

추리소설을 즐겨 읽은 지 얼마 안 된 독자라면 르코크는 ‘듣보잡’으로 보이겠지만, 추리소설 덕후 수준의 독자라면 르코크를 기억해야 한다. 사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추리소설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홈즈가 아니라 르코르였다. 그리고 홈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인기 많은 탐정이 가보리오의 르코크였다.

 

신소설 작가 이해조(1869~1927)가 1913년에 『르루주 사건』을 『누구의 죄』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다. 그 후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1878~1926)의 아들 안회남(1910~?)이 1940년에 다시 소개했다. 조선일보사 계열의 출판사인 조광사에서 내놓은 ‘세계 걸작 탐정 소설 전집’의 첫 번째 책이었다. 르코크의 한국 정착(?)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추리 소설가 김내성이 1948년에 『마심 불심(魔心 佛心)』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작품을 썼다. 6.25 전쟁 중인 1952년에 『르루주 사건』은 재등장한다. 제목은『복면 신사』. 안회남의 번역본을 제목만 바꾼 채 그대로 재출간했는데 1960년대 초반까지 재판이 나왔다. 그런데 책은 안회남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볼 수 없고 다른 번역자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유는 그가 월북 작가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월북 작가나 예술가는 실명 그대로 공식석상에 거론될 수 없었다.

 

이렇듯, 르코크의 국내 번역 역사는 홈즈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르코크 시리즈는 가정 비극에 치우친 소재와 멜로드라마의 요소가 곁들인 이야기의 전개가 큰 특징인데 국내 독자의 취향을 저격하기에 적당한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홈즈와 그 밖의 탐정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르코크는 퇴역하는 형사가 된 것처럼 한물 간 주인공이 되었다. 조상 대접 받지 못한 르코크를 2011년에 안회남의 번역으로 되살렸으나 이 책마저도 품절되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르코크가 재평가를 받고, 더 이상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출간했다고 밝힌 머리말이 무색해지고 말았다. 

 

 

 

 Scene #3  『르루주 사건』의 주연은 타바레다

 

작품은 르루주라는 과부가 피살되면서 의문의 사건이 시작된다. 예심판사 다브롱, 제르롤 경부 그리고 주인공 르코크 형사가 이 사건을 맡는다. 사건이 점점 미궁에 빠지자 티모클레어라는 ‘경시청의 숨은 고문’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다. 티모클레어는 가명이고, 원래 이름은 타바레이다. 그는 탐정을 취미로 하는 괴짜 노인이다. 어떤 사건을 해결하면 그에 대한 금전적 대가를 받지 않는다. 괴이한 범죄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오락이다.

 

『르루주 사건』은 르코크의 등장을 알리는 첫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직접 작품을 읽어보면 가장 비중이 많은 진짜 주인공은 르코크가 아니라 타바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르코크는 조연에 불과하다. 르코크는 소설 초반부에 자신의 스승인 타바레를 사건 해결의 조력자로 불러들이고, 중간에 르코크가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르코크가 타바레의 조수임에도 불구하고 홈즈를 껌딱지처럼 붙어서 따라다니는 왓슨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다. 즉, 이 소설에서 르코크의 등장 횟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도일은 『주홍색 연구』에서 르코크를 언급했고, 탐정 소설의 역사를 정리하고 관련 작품들을 분석한 월러드 헌팅턴 라이트(1888~1939, 파일로 밴스를 창조한 추리소설가 S.S. 밴 다인의 원명. S.S. 밴 다인은 라이트의 필명)마저 르코크를 뒤팽을 훌륭하게 계승한 『르루주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탐정 소설』 북스피어, 49쪽) 반면 르코크 시리즈 첫 작품에서 사건을 해결한 타바레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없다. 가보리오가 쓴 범죄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은 르로크를 기억해야겠지만, 『르루주 사건』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타바레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타바레의 존재가 있었기에 그 다음 시리즈물에서 아마추어 풋내기 형사 르코크가 훌륭한 탐정으로 성정할 수 있었다. 

 

『르루주 사건』에 등장하는 타바레는 홈즈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로 완벽한 탐정형 인물이다. 아니, 도일의 홈즈가 타바레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바레가 사건 현장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라.

 

그(타바레)는 경쾌한 걸음으로 뛰어 들어가듯이 구석방으로 들어가서는 약 반 시간 동안이나 걸려 차근차근히 검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밖으로 뛰어나갔다가는 뒤로 물러서고 또 나갔다가는 들어가고 재삼재사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혹시 범인의 작은 냄새라도 남아있지 않은가 코를 쫑긋거리는 모양은 마치 짐승을 쫓아 도는 사냥개와 같았다. (『르루주 사건』 중에서, 36쪽)

 

홈즈도 정상적이지 않는 모습으로 진지하게 사건 현장을 관찰한다. 『주홍색 연구』에서 피의자가 독극물로 살해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입 냄새를 맡고, 주변 현장을 개가 기어가듯이 엎드린 채 범죄와 관련된 흔적이나 증거를 찾는다. 홈즈가 사건 현장을 살피면 그 누구도 건드리거나 말을 걸 수 없다. 분주하면서도 산만하게 보이지만, 홈즈는 경찰도 찾지 못하는 증거를 정확하게 발견한다.

 

런던 경시청은 자신들이 맡은 사건이 해결하기 어려우면 가끔 경시청의 능력을 무시하는 독설을 서슴없이 하는 홈즈를 꼭 찾는다. 그래서 간혹 그의 사건 해결을 탐탁지 않게 보는 경찰 관계자도 등장한다. 『르루주 사건』에서 제브롤 경부는 타바레를 싫어한다. 그의 사건 해결 방식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과 비교될까봐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타바레의 또 다른 취미는 범죄에 관한 문헌자료나 서적을 수집하는 것이다. 홈즈도 범죄 관련 기록을 스크랩하고 사건 기록물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타바레는 독신인데다가 하녀 마네트가 가사를 맡는다. 여자를 싫어하는 ‘차도남’ 독신 홈즈 그리고 그가 사는 하숙집 주인이자 가정부인 허드슨 부인이 연상된다. 이 정도 되면 타바레도 탐정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Scene #4  어설프지만 인간미가 느껴지는 탐정

 

르코크와 홈즈. 이 두 사람은 서로 성격은 비슷하나 사건 해결 방식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홈즈는 과학적인 수사 기법과 논리력을 동원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깔끔하게 푼다면, 르코크는 특정 인물이 연루된 스캔들이나 음모를 차분하게 하나하나씩 파헤치고 증명한다. 두 사람 간의 탐정 능력을 비교하고, 한 쪽을 더 우월하게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도 굳이 홈즈와 비교를 하자면 타바레는 사건 해결 과정 중에 헛다리 짚는 실수를 한다. 르코크도 마찬가지. 다음 작품에서 르코크는 스승처럼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잘못된 추리를 하고 만다. 냉철한 논리력과 판단을 중시하는 홈즈의 눈에는 르코크가 아마추어 탐정의 티를 벗지 못한 형편없는 수준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재수사하는 타바레의 모습에서 따뜻하고 친숙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려하는 괴팍한 노인이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도와주면서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는 현자(賢者)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 겸손하면서도 남을 돕는 착한 타바레의 성품은 ‘동방예의지국’의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정도로 세상은 몰라 볼 정도로 많이 변했다. ‘동방예의지국’은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예의’보다는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아무리 ‘예의’가 좋은 사람이더라도 ‘능력’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이 대접받는다.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의 취향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는 것 같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예의’가 있고, 조금 미숙하게 보이는 아마추어 타바레보다는 완벽한 ‘능력’을 보여주는 홈즈 같은 프로를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홈즈가 가장 먼저 떠오르고, 탐정이 되려면 홈즈와 같이 똑똑하게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점 타바레는 잊혀만 간다. 가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이웃 할아버지 같은 타바레 같은 탐정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 현실로 봐서 이루어지기가 어렵겠지만,『르루주 사건』복간과 나머지 르코크 시리즈 출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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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엘레지 -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이언 샌섬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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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70, 80년대 중고교를 다녔다면 영어사전을 씹어 먹는 친구가 한 명쯤은 있었을 것이다. 영어 단어를 다 외운 페이지를 쭉 찢어 입에 넣는 장면은 당시 청소년 드라마나 영화에도 종종 등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단어를 외울 때 사전을 씹어 먹기 위해서 종이를 찢을  수가 없다. 전자사전의 보급으로 이 우스갯소리는 옛 말이 되어버렸다. 영어 사전을 찢어 먹는 풍경이 사라진 요즘 교실에서는 전자사전 어플리케이션이 있는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꽂고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자습한다.

 

오랜 역사를 자랑했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종이로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 브리태니커 종이사전은 1768년 첫 선을 보인 지 244년 만인 2012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등 인터넷 혁명에 밀려난 결과다. 1년에 70달러만 내면 각종 정보와 휴대전화용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운영 중이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상징적 유산이었던 브리태니커 종이사전의 쓸쓸한 퇴장은 모바일 시대의 빅뱅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종이신문 시대도 종말을 맞았다고 말한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실제 대다수 젊은 세대는 인터넷,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의 기기를 통해 각종 정보를 습득하고 소통한다. 그 결과 출판 산업과 신문 산업은 어려움에 처해 있고, 저마다 전자책과 인터넷신문 발행 등의 신사업으로 활로를 개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이는 인류가 기록을 남기고 정보를 전달하며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발명한 최고(最古)의 기록 재료이다. 종이의 역사는 매우 길다. 중국의 갑골문자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의 점토문자 같은 종이 발명 이전의 기록매체들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현대 종이의 원형은 5000년 전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시작 하였으며 종이는 기원전 108년에 중국의 채륜에 의해 발명된 이후, 2000년 동안 인류문명과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면 종이없는(paperless) 사회가 올 것이다.” 1990년대 초 앨빈 토플러를 비롯한 미래학자들이 미래 인류사회의 변화상 가운데 가장 큰 특징으로 예견한 말이다. 과연 종이책이 사라진다면 종이의 시대도 종말을 고할까?

 

그러나 현재까진 이 예언이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종이에 글을 쓰는 소설가가 직업인 저자는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종이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의 발달로 종이의 사용이 줄고 있지만, 종이는 여전히 지식 전달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책 맛’이라는 게 있다. 검지에 침을 약간 묻혀 책장을 넘길 때 느껴지는 종이 질감. 밑줄이나 낙서, 접힌 부분 등 각 장의 여백에 남겨 있는 여러 순간의 다양했던 삶의 모양새들. 면지에 적힌 책에 얽힌 짤막한 메모 등은 종이책만이 줄 수 있는 별도의 선물이다. 여전히 책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종이책 종말론’에 대한 비블리오필(bibliophil)의 걱정은 조금 사라졌다. 종이책의 종말을 재촉할 것으로 예상되던 전자책의 등장은 오히려 종이책이 지닌 매력을 극대화해주는 계기가 됐다.

 

종이책의 진화에서 결정적이지만, 유독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바로 종이다. 종이는 책의 얼굴이자 1차 광고라 할 수 있는 표지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며 질감과 색감, 두께와 무게 등으로 책의 기본 내용과 컨셉트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흔히 연상되는 종이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서류문서나 책 혹은 신문지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종이는 상상 이상으로 일상의 훨씬 더 많은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돈거래에서 가장 환영받는 현금 지폐. 재료는 당연히 종이다. 그 밖에도 영화 필름, 포스트잇 메모지, 복권, 영수증 둥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대부분 종이로 만들었다. 

 

『페이퍼 엘레지』에서 보여주는 종이의 존재는 단순한 물질이나 기록의 도구를 넘어 인류 문명과 역사 그 자체다. 저자 이언 샌섬은 종이를 ‘궁극의 인공물’이라고 부르며, 종이와 인간 문명의 관계를 넓고 깊게 파 들어갔다. 그의 책은 종이 자체의 역사만 다루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종이가 만들어 낸 문명에서 탄생된 물건들의 박물관이다.

 

과거의 세계경제는 실물의 가치에 기반을 두어 모든 거래가 이뤄졌다. 그러다가 경제가 커지면서 종이 돈, 즉 지폐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가상의 지폐를 중앙은행의 컴퓨터가 창조해 내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종이는 여전히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고 있다. 문명과 문명 간의 교류, 각종 탐험과 교역, 전쟁을 가능케 한 지도 역시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보급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다양한 분야의 역사적 사실과 문헌 속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씨줄 날줄로 엮어가며 종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끝없이 감탄한다. 장인이 기술과 정성으로 만들어낸 종이 제품들에 대한 깊은 애정도 곳곳에서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종이의 시대 속에 살고 있었다.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는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종이가 이 세상에 완전히 사라진다면 기계처럼 작동되는 문명이라는 기계에 중요한 나사 하나가 풀려서 빠진 것과 같다. 그만큼 종이는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생활, 아니 문명의 필수품이다. 앞으로 종이의 시대는 저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좀 슬프다. ‘엘레지(Elegy)’는 죽음 사람에 대한 애도의 시를 의미한다. 종이에 대한 저자의 낙관적 전망과 정반대로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랫말처럼 종이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고, 종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종이는 분명 우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종이의 혜택을 마음껏 누릴수록 푸르른 나무들이 한 그루씩 쓰러져 간다.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 예측했던 시대적 분위기와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무분별하게 산림을 파괴시켰다. 세계 종이 소비량은 점점 늘어난다. 하루에 전 세계 사람들은 100만 톤 정도의 종이를 사용한다. A4 용지 한 장을 만드는 과정에 전구 하나를 한 시간 동안 켤 때만큼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물 한 컵이 필요하다. 환경 파괴 문제가 대두되면서 제지업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종이의 위상 또한 흔들린다. 저자는 숲과 종이가 함께 공존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이러한 근심이 깊어질수록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종이를 너무 쉽게 사용한다. 우리 몸의 일부나 다름없는 것을 한 번 쓰고 버린다. 저자의 생각대로 종이가 정말 영원할 것 같은가?만약에 종이 생산에 필요한 나무가 지구상에 사라진다면, 종이의 운명도 멈추게 된다. 종이의 가치를 확실하게 알게 된 이상, 지금부터라도 종이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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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비밀 컬렉션~( ͡° ͜ʖ ͡°)

 

 

 

 

 

 

 

 

 

 

 

 

 

 

 

 

 

만약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작가가 ‘야설’을 썼다고 상상해보자. 기존에 썼던 작품들과 다르게 작가의 ‘야설’은 포르노에 가까울 정도로 노골적인 성 묘사로 가득하다. 책 표지 앞에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글씨가 박혀 있다. 작가의 작품을 즐겨 읽었던 열혈 독자라면 상당히 난감하다. 작가의 문학성을 믿고 야설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일부 독자는 삼류 작가의 펜에 나오는 졸작이라고 비난하면서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미라보 다리’라는 시로 유명한 프랑스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무명시절에 야설을 쓴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하는 소설을 5편이나 썼는데 현재 전해내려 오는 것은 단 두 작품이다. 이 두 편의 소설은 아폴리네르가 작가로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에 출간된 것이다.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Les Onze Mille Verges)과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은 아폴리네르가 26살 때 썼고, 이듬해에 ‘G.A.’라는 익명으로 비밀 출판되었다. 두 작품 다 내용이 파격적이다. 등장인물들의 섹스 장면은 수없이 나온다. 인물들 간의 대화에 남녀 성기를 지칭하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의 표현과 묘사가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보다 강도가 세다. 사디스트, 매저키스트, 남색, 레즈비언 심지어 시체선호증, 분뇨선호증까지 하드코어한 섹스의 향연이 펼쳐진다.

 

 

 

 

 

 

 

아폴리네르는 이 두 작품을 집필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무명시절에 비밀 출판된 야설은 소수의 독자만 읽을 수 있는 한정판이었기에 작가 본인은 작가 이력에 남을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인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작가로서의 명예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언급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은 모니 비베스퀴라는 비도덕적인 주인공이 등장해 자신의 애욕을 마음껏 발산한다. 얼핏 사드 후작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당시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어느 비평가가 사드 후작을 능가하는 작품이라고 평을 할 정도로 정상적이지 않은 섹스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사실 아폴리네르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사드 후작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아폴리네르가 처음으로 사드의 작품을 발굴하고 다시 출간했다. 그만큼 이 작품도 사드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이 작품에서 열차 안에서의 난교 파티 장면은 가장 충격적이다. 사디즘, 시체선호증, 분뇨선호증 묘사가 나오는데 이 장면은 쪽수만 해도 열 페이지 정도 된다. 작가가 직접 광기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것처럼 표현 수위가 높다. 소설 중간에 아폴리네르는 짤막한 시를 넣기도 하는데 ‘미라보 다리’의 시인답지 않게 야한 표현이 가득하다. 열차 난교 파티 장면을 단 두 줄의 시로 표현한 내용이 있는데 상상은 여러분 독자에게 맡기겠다.

 

기차는 기분 좋게 덜컹거리고
우리네 골수(骨髓)까지 욕망은 밀려오네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은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에 비하면 표현 수위가 낮은 편이다. 로제라는 소년이 성적인 성숙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겪은 욕정의 순간들을 옛이야기 들려주듯이 방식으로 독자(특히 남성 독자)에게 들려준다. 어린 소년 로제는 벌써 섹스에 눈을 떴다. 벌거벗은 여체만 보면 환장을 한다. 자기보다 열 살 이상 많은 하녀부터 친척 큰누이까지 모든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고, 심지어 임신한 여성도 로제의 대범한 불장난을 피하지 못한다. 여기서 로제가 유일하게 성관계를 맺지 않은 여성이 있으나 그의 어머니다. 이 소설에서 로제의 어머니 또한 색을 엄청 밝힌다. 일본 에로물 소재이기도 하는 모자(母子) 간의 근친까지 묘사되었더라면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무튼 로제는 여성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씨앗을 널리 퍼뜨린다.

 

소설은 막장으로 전개하다가 막장으로 끝난다. 마지막에 로제는 자신의 여자 정복을 조국의 인구를 늘리는 애국 활동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더 만들 거라고 다짐한다. 여성 권리가 많이 신장된 요즘, 이런 소설이 나왔다간 비난의 몰매를 맞았을 것이다.

 

 

 

 

 

 

 

 

 

 

 

 

 

 

 

 

 

자신의 성적 욕구 충족을 인구를 늘리기 위한 의무로 자기 합리화하는 로제의 인식을 옹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폴리네르가 살았던 유럽의 인구 비율을 생각한다면 그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가벼운 유머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폴리네르의 출산 장려 생각은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희곡 작품 『티레시아스의 유방』(연극과 인간, 2004년)에서도 출산을 권장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러한 텍스트의 유사성은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이 아폴리네르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에 에공이라는 잘 생긴 남자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몸에 말뚝이 박히는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엽기적인 장면은 훗날 아폴리네르의 또 다른 작품에 재등장한다. 『이교도 회사』(문학수첩, 1999년, 절판)의 세 편으로 구성된 단편 「세 개의 천벌 이야기」 중 제1편(제목: 미소년)에 미소년이 쇠창살에 박힌 채 성적 희열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폴리네르의 야설은 성귀수의 번역으로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이 함께 수록된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문학수첩, 1999년, 절판)으로 출간되었다. 『이교도 회사』와 함께 아폴리네르의 소설이 소개되었는데 재미있게도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에 4편의 서평이 있고, 『이교도 회사』는 서평이 단 한 편도 없다. 역시 '19세 미만 구독불가'라는 표시가 적힌 책에 더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문학수첩의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이 출간되었을 때 『신역 돈쥬앙』(픽션뱅크, 1999년, 품절)도 나왔다. 이 작품도 '19세 미만 구독불가' 표시가 있고, 제목만 봐서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은 단편소설인 반면, 『신역 돈주앙』은 세 권짜리 분량이다. 여기서 두 가지 판본에 대해서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1995년에 보람이라는 출판사에서 『완역 돈쥬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이 있었다.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구성이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우연한 로맨스', 제2부는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 제3부는 '여자의 환상에 마침표를 찍을 때'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다.

 

 

 

 

 

 

『완역 돈쥬앙』 1권 목차. 2부는 2권에도 계속된다. 목차만 보면 2부 전체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읽어본 결과, 2권에 '에디스의 이야기'라는 소제목으로 시작되는 나머지 2부의 이야기는 1권에 소개된 2부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런데 제2부는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두 편의 이야기가 같이 묶어 있다. 책의 목차에서 보면 2부의 내용이 중간에 끊기고 2권으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야기 전개상 서로 다른 내용이고 주인공도 다르다. 1권에 수록된 2부는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의 로제와 비슷한 인물이 주인공이지만, 2권에 수록된 남은 2부의 이야기는 '에디스'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책의 이야기가 조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자면,『완역 돈쥬앙』이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장편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이 두 권의 책 속에 네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은 어디에 수록되어 있는 걸까? 『완역 돈쥬앙』1권 제1부가 아폴리네르가 쓴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이다. 나머지 2부, 3부 이야기는 아폴리네르가 쓴 것이 아니다. 어째서 아폴리네르가 쓰지 않은 이야기가 같이 수록되어 있는 것일까?

 

이유는 문학수첩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에 수록된 미셸 데코댕의 해설에서 알 수 있다. 미셸 데코댕은 아폴리네르 연구의 권위자로서 아폴리네르의 야설 출간과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있다. 

 

아폴리네르는 원래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과 『사랑스런 검둥이 여자』라는 작품을 함께 묶어서 출판하기로 생각했다. 그는 출판사에게 자신의 출판 계획을 약속했으나 출판사 측은 그가 제출하는 원고가 지나치게 간결하다는 이유로 실망스러워 한다. 게다가 아폴리네르가 『사랑스런 검둥이 여자』의 제출 약속을 미루게 되자 출판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결국, 출판사는 자기 임의로 다른 야설모음집에 수록된 「햐안 에르민느」라는 작품을 첨가해서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과 같이 출간시켜버린다. 이런 엉뚱한 출판은 한동안 '햐얀 에르민느'를 아폴리네르의 작품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완역 돈쥬앙』의 번역자는 제1권 제1부 '우연한 로맨스'가 아폴리네르가 직접 쓴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이라고 언급하지 않은 채 2부와 3부 이야기 모두 아폴리네르가 쓴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2부와 3부를 쓴 작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2부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가 「햐안 에르민느」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 중반에 주인공을 유혹하는 러시아 여인 '이르마'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에르민느와 이르마. 이름의 발음도 유사하다. 비록 추정에 불과하지만 이르마가 「햐안 에르민느」의 등장인물 에르민느의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다.

 

『완역 돈쥬앙』의 번역자는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과 「햐안 에르민느」를 아폴리네르가 쓴 것이라고 착각한 채 이것을 '완역'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2부에 '에디스'가 주인공인 이야기와 3부는 누가 쓴 것인지 도무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분량을 더 채우기 위해서 출판사가 단․〮중편 분량의 야한 소설을 끼워 출간할 것일까?

 

사실 3부 '여자의 환상에 마침표를 찍을 때'는 딱 읽어봐도 아폴리네르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캔디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내용 중간에 '라디오', '트럭'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과 『황무지』를 쓴 영국의 시인 '엘리엇'이 언급된다. 그렇다면 1907년에 아폴리네르가 썼을 이야기가 아니다. 그 시대에 라디오는 없거니와 시인 엘리엇은 태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 글을 쓴 작가는 20세기 중후반에 활동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누가 썼는지 모르겠다. 이것을 증명해 줄 언급의 단서도 없고. 책과 출판사가 사라진 이상, 책의 비밀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가끔 알라딘 중고샵이나 헌책방 사이트에 아폴리네르의 야설이 높은 금액으로 판매된다. 『섹스 도사』라는, 대놓고 노골적인 제목을 내건 책이 있으며 1989년에 을지출판사라는 곳에서 낸 『천사와 춤을』 이라는 제목의 책도 있다. 교모문고 장터에 들어가면 『애욕의 밤』이라는 책이 무려 50000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되었다. 『섹스 도사』와 『애욕의 밤』은 삼산당이라는 같은 출판사에, 1987년에 같이 나왔다. 아마도 이 두 권의 책은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과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을 옮긴 책일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사실은 『천사와 춤을』은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을 옮긴 책이라는 점이다. 시집을 제외한 국내에 발간된 아폴리네르의 소설을 정리해본다.

 

 

 

 

 

『섹스 도사』 (삼신당, 1987년, 절판)
『애욕의 밤』 (삼신당, 1987년, 절판)
『천사와 춤을』 (을지출판사, 1989년, 절판) ⇒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과 동일 작품
『완역 돈쥬앙』 (보람, 1995년, 전 2권, 절판) ⇒ 1권 1부가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
『신역 돈주앙』 (픽션뱅크, 1999년, 전 3권, 절판)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 (문학수첩, 1999년, 절판) ⇒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 수록
『이교도 회사』 (문학수첩, 1999년, 절판) ⇒ 단편, 콩트 모음집

 

 

혹시 아폴리네르의 야설을 읽고 싶은 독자가 단 한 명이라고 있다면, 절대로 중고샵이나 인터넷 헌책방에 비싼 돈을 내면서 사지 않았으면 한다.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은 알라딘 중고샵에 주문해서 15000만으로 구입했다. 『완역 돈쥬앙』은 내가 즐겨 다니는 대구 헌책방에 싼 가격으로 구입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판매되고 있는 절판된 아폴리네르의 야설은 절판본의 희귀성 때문에 가격이 높게 책정된다. 야설을 읽고 싶은 충분히 이해하나 책 한 권 때문에 배송료까지 붙는 3만 원 이상의 돈을 지불하면 아깝지 않은가. 차라리 그 돈으로 야동 사이트에 접속해서 야동을 결제하는 것이 더 낫다.

 

 

 

 

 

 

 

 

 

 

 

 

 

 

 

 

 

 

 

이제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 과 『어린 돈 주앙의 무용담』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사서 안 읽어도 된다. 이 두 작품을 전자북으로 만나볼 수 있다. 예문출판사에서 '밤의 문학'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성(性)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시리즈 세 번째, 네 번째 도서로 『돈 주앙: 소년 돈 주앙의 회상』『돈 주앙: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단행본이 아닌 전자북으로 나온 점이 특이하다.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라서 출판사 입장에서는 단행본으로 내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전자북으로만 나온 것 같다. 전자북이 나온 지 얼마 안 됐다. 이 사실을 아는 독자는 얼마나 될까? 최근에 아폴리네르를 알게 되면서 검색하다가 뜻밖에도 전자북으로 다시 나온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북이라 가격도 저렴하니 그동안 아폴리네르에 관심이 있다거나 혹은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야설을 제목으로만 알고 있었던 독자들에게는 희소식이다. 그러니까 재차 강조하지만, 문학수첩 번역본이나  『완역 돈쥬앙』을 비싼 돈 내면서 사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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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금 비밀 컬렉션~( ͡° ͜ʖ ͡°)
    from factory 2014-10-29 18:49 
    다치바나 다카시는 책방에 한번 나가면 3만 엔(당시 우리나라 월급쟁이 몇 달 치 월급) 정도의 ‘거금을 들고’ 사냥하듯 책을 사들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책을 산다기보다는 포획 하다는 말이 적절하다. 그래서 사들여서 잔뜩 쌓인 책을 보관할 수 있는 ‘고양이 빌딩’을 짓고, 수만 권의 책 속에 파묻혀 학문의 모든 영역을 넘나들며 지난 시절보다 더 왕성하게 글을 썼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청어람미디어, 20
 
 
하건일 2014-10-10 13: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자책...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cyrus 2014-10-10 20:16   좋아요 1 | URL
건일님이 쓴 댓글 바로 위에 책 두 권 보이시죠? 구입하시려면 책 표지에 마우스로 클릭하면 새페이지가 열리면서 구입할 수 있는 장바구니 기능이 보일겁니다.
 
숫타니파타 - 불교 최초의 경전
법정 옮김 / 이레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저마다 위로가 되는 것들이 따로 있겠지만 경전의 좋은 구절도 그 중의 하나이다. 법정 스님이 옮긴 『숫타니파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읽다보면 주옥같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34쪽)

 

사자처럼 칭찬이나 비난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바람처럼 인연 따라 오고 가는 사람이나 물질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순수한 마음으로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아, 무소처럼 오직 집중된 마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가기. 이 게송은 삶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부처의 일대기 가운데 악마와의 한판 승부 장면을 읽을 때면 머릿속에 멋진 무대가 만들어진다. 악마 나무치가 수행중인 부처 앞에 등장한다. 그는 수행을 완성하려고 정진하는 자를 방해해서, 쾌락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악마는 부처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척하면서 어른다.

 

"당신은 여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공덕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힘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151~152쪽)

 

악마는 좋은 말로 해서는 먹혀들지 않으니 겁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무리들을 부른다. 대도(大道)를 걷는 부처는 홀로이지만, 소인배 악마는 늘 무리를 거느리고 다닌다. 악마의 공격 속에서 부처는 차분하게 저들의 정체를 밝혀낸다.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굶주림, 넷째 군대는 집착이다.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의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나무치여, 이것들이 바로 너의 군대이다." (153~154쪽)

 

그런데 수행중인 부처를 공격한 악마의 군대치곤 그 이름이 흥미롭다. 이것은 바로 홀로 결가부좌한 부처가 내면의 마지막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수행을 방해하는 온갖 번뇌들을 말끔히 털어내 보니 바로 저런 번뇌들이었음을 은유로 밝혀낸 것이다.

 

부처가 털어낸 이들 번뇌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나타나 평온한 마음을 뒤흔드는 번뇌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저 열 가지 몹쓸 녀석들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하루하루를 근심에 떨며 살아간다. 그리고 저들 때문에 어떤 일을 완성하려 해도 도중에 주저앉는다. 저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괴로울 일을 반복하고, 다시 아등바등 살아가게 된다.

 

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을 없앤다면 삶이 더 풍성해질 것이다. 우리는 뭔가를 버릴 때 과연 그 물건이 쓸모가 없는지 따진다. 근심의 원인인 집착을 제거해야 한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25쪽)

 

부처가 살던 시대가 오늘과 너무 다르다는 게 주저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집착을 끊어 근심을 없애려면 사랑과 우정의 행복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부처는 사랑과 같은 인간의 기쁨과 행복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집착'이라는 불순물이 끼어 사랑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다. 물론 부처는 출가한 수행자들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초월해 보다 큰 진리를 지향하기를 바랐다. 출가자의 길과 재가 신자의 길에는 차이가 있었다. 출가자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해탈이다. 해탈을 위해서는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번뇌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듯 밀려들어와도 담담하게 물리친 부처처럼, 휘말리지 말고 어떤 번뇌인지 잘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번뇌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우리들을 생존에 얽어매는 것은 집착이다. 그 집착을 조금도 갖지 않은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버리듯이. (19쪽)

 

그러나 부처의 설법을 향해 마음을 열면 오늘의 문제에도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모든 애착과 잡념과 집착을 놓아버린다면 삶이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진다.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내 안의 아집과 탐욕, 기만과 이중성을 마주할 때 나는 『숫타니파타』를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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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동안 자살에 관한 연구를 해 온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자살』(2002년, 새움출판사, 품절)은 인간의 역사와 자살의 모든 양상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감정적 자살, 가미카제의 자살, 희생자살, 저항자살, 모방자살, 집단자살, 종교적인 자살 권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자살을 소개하고 있다. 아마 지금까지 이 분야에 관하여 출간된 모든 저작들을 집대성한 역작일 것이다. 세계 각국의 살인 범죄 사건을 범죄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콜린 윌슨의 『현대살인백과』(종합출판범우, 2011년, 품절)와 짝을 맞출 수 있는 ‘현대자살백과’이다.

 

 

 

 

 

 

 

 

 

 

 

 

 

 

 

 

 

모네스티에의 책은 1999년 『자살, 도대체 왜들 죽는가』라는 제목으로 첫 선을 보였다. 출판사는 올해 초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 번역 논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새움출판사’다. 그러나 1999년에 출판된 책은 원서 일부를 발췌 번역한 것이었다. 완역본은 총 9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999년 판에 소개된 내용은 6부에 불과했다. 2002년에 『자살』이라는 새로운 제목과 표지로 완역본이 나왔고, 이듬해 양장본이 나왔다. ‘자살’이라는 책의 제목이 독자 입장에서는 꺼림칙하게 느껴질 법하고,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된다. 완역본 표지에 있는 그림도 꽤 충격적이면서도 분위기가 으스스하다. 15~16세기 유럽으로 추정되는 그림 속 여인은 젖가슴을 훤히 보일 정도로 옷을 반쯤 벗은 상태에서 자신의 복부에 칼을 찌르고 있는 중이다. 이제 막 목숨을 끊으려는 여인의 표정은 상당히 멜랑콜리하다.

 

 

 

 

 

 

 

 

 

 

 

 

 

 

 

 

최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2002년 완역본을 발견했을 때 횡재했다. 2008년에 나온 개정판인 『자살백과』도 품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책을 사기 위해 카운터로 계산했을 때 점원의 눈치가 신경 쓰였다. 아마도 책의 제목과 표지 때문에 점원은 놀라면서도 이 책을 사는 고객이 조금은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자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인데...

 

이 책에 대한 독자서평을 보게 되면 자살에 대한 사례와 유형만 나열되어 있을 뿐,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이 부족하다는 평이 대체로 많았다. 다양한 기록에 대한 저널리스트적인 호기심과 수집은 칭찬해줄만 하나, 백과사전 수준의 나열에 그친 ‘자살백과’가 되었다. ‘자살이 과연 나쁜 것인가 ’하는 명제를 철학적으로 파고들려는 시도는 하고 있지만, 몽테스키외, 뒤르켕, 몽테뉴 등 유명 명사들의 말을 단순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다.

 

저자가 아무리 자료 수집이 탁월한 저널리스트라고 해도 사실을 날조한 내용을 진위 여부를 하지 않은 채 소개한 점은 옥에 티다. 저자는 희생적 집단 자살의 사례로 든 ‘칼레의 시민’은 후대에 왜곡, 과장된 내용이다.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를 구한 영웅들을 말한다. 칼레 시민군은 영국군의 집중 공격에 끝까지 저항하지만 끝내 함락되어 모두가 몰살될 위기에 처한다. 백기를 든 칼레 시장 비엔은 영국 왕의 선처를 호소했다. 칼레의 저항으로 악전고투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조건을 내걸었다. 시민을 대표하는 6명이 스스로 나서 처형을 받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살려주겠다는 것. 가혹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시민들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분열과 자멸을 의도했을 게다. 그러나 칼레 시민은 달랐다. 최고 갑부가 먼저 자원했다. 이어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따라 나섰다. 이런 식으로 6명은 채워졌다. 영국군 진지 앞에 선 그들에게 마침내 교수형 집행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임신 중이던 왕비가 간청했다. 뱃속의 왕자를 위해서라도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에드워드 3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왕비의 뜻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달리 칼레 항복에 관한 기록들에 의하면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 대표를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한다. 칼레 시민 대표는 처형받기 위해서 나섰다기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죄인이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와 유사한 행위로 추정한다. 또 이 이야기는 프랑스인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되었고,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던 19세기부터 칼레의 시민들은 민족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그래서 칼레 시민 대표의 행위를 집단적 자살의 사례로 보기 어렵다.

 

 

 

 

 

 

 

 

 

 

 

 

 

 

 

 

 

책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또 다른 주범은 오탈자의 등장이다. 특히 영문 표기법을 따르지 않은 듯한 인명(人名)의 오탈자는 번역자(두 명의 번역자가 공동 번역했다)의 상식을 의심케 한다.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탈자를 소개해본다.

 

아베라르는 종교의 길로 들어가면서 로이즈에게 편지를 써서 그녀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126쪽)

 

중세 유럽을 발칵 뒤집은 유명한 스캔들의 주인공. 철학의 대가이자 성직자였던 아벨라르와 그보다 16살 어린 엘로이즈를 언급하고 있다.

 

“임신 중이던 쟌느 에뷰텔느는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 5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126쪽)

 

이탈리아의 화가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쟌느 에뷔테른(또는 ‘잔 에뷔테른’)가 자살한 사건을 소개했다.

 

타시가 쓴 「연대기」에는 텔 식스트가 어머니의 애무를 거부하고 자살한 것으로 되어있다.” (136쪽)

 

아우구스투스에서 네로까지 네 황제에 걸친 로마의 치세를 정리한 『연대기』의 저자는 ‘타키투스’이다.

 

“전기작가 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옥타비아누스는 부르터스의 머리를 잘라 로마로 보내 케사르 동상 아래에 던지게 했다고 한다.” (153쪽)

 

‘부르터스’(브루투스), ‘케사르’(카이사르)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12명의 로마황제의 전기를 쓴 고대 로마의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를 ‘에토니우스’로 표기한 점은 너무 심했다.

 

 

2008년 개정판이라면 2002년 완역본의 오탈자를 바로 잡을 줄 알았건만, 2008년 개정판 100자평에 오역, 오타를 지적한 내용이 있다. 개정판이 아니라 책 표지와 제목만 살짝 바꾼 것뿐이다.

 

 

 

 

 

 

 

 

 

여러 모로 내용과 편집 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책이지만, 결국 이 책을 읽으면서 딱 하나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자살한다. 사랑, 부끄러움, 중상모략, 불명예, 이타적인 희생, 명령, 신념, 정치적 위기, 빈곤과 파산, 정신 질환, 부당한 대우, 미신과 주술 등이다. 쉽게 말해서 삶의 모든 관념과 행위가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평범함을 거부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살하는 과정은 죽기 위해 온갖 기발한 방법을 시도하는 토끼가 나오는 앤디 라일리의 만화 『자살토끼』(거름, 2004년)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자살들은 신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헤어날 수 없는우울의 자기 도덕적인 표현에 가까운 것이다. 미셸 푸코의 지적처럼 자살은 ‘상상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다. 자살이 전면화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길들이 사회 내부적으로 폐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가 막다른 골목일 수밖에 없을 때, 그것처럼 우울한 일이 또 있을까. 막다른 골목의 우울이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면,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 막다른 골목의 우울을 살아간다. 따라서 우울은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모두의 것이 된다. 자살이 단발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자살 신드롬으로 이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자살에도 문화적인 요인, 달리 말하면 모방과 유행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자살만큼은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삶의 고유성과 죽음의 숭고함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절이다.

 

 


 

 

 

 

 

 

 

 

 

 

 

 

P.s  마르탱 모네스티에는 독특한 주제에 관심이 많은 언론인이다. 그는 자살뿐만 아니라 심지어 ‘똥오줌’에 관한 역사를 집대성하기도 했다. 문학동네에서 『똥오줌의 역사』(2005년, 품절)로 번역, 출간되었다. 우리가 더럽게 생각하는 똥오줌도 역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다니. 지저분한 내용이 많겠지만, 실로 흥미로운 책이 아닐 수 없다. 『자살』만큼 독자들을 확 끌어당길 정도로 책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책도 중고샵이나 헌책방에 발견된다면 꼭 구입하리라. 그런데 이 책도 정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책정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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