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 - [할인행사]
박찬옥 감독, 문성근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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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53쪽)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한 구절이다. 이 때 시인이 말하는 ‘질투’는 부질없는 짝사랑이요, ‘나의 힘’이란 헛된 열망을 품은 어리석은 용기이다.

 

결국 사랑을 잃은 시인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떠나보낸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주인공 역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를 되뇌며 부질없는 열망을 떠나보낸다. 간혹 제목만 보고 ‘질투는 내 삶의 원동력이겠거니’ 생각하면 영화 내내 열없이 구는 주인공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간단하게 말해 한 남자에게 두 명의 여자를 빼앗긴 다른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 청년 이원상(박해일 분)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냉소적이고 냉담하다. 원상을 배반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여자가 계속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보라고 다그친다. 그에게는 정말 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다. 미련은 오히려 그를 떠난 여자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들이 걸어온 전화에 대고 그는 방 닦고 있다고 무심하게 대답할 뿐이다. 그는 순수해서 상처받기 쉬운 타입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상처를 받는 건 그의 여자들이다. 되는대로 말하고 연애를 저지르는 것 같은 일견 무책임해 보이는 중년의 편집장 한윤식(문성근 역)이 오히려 원상과 비교하면 성실하고 친절하다. 타인에게나 자기 스스로에게나...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듯한 여자 박성연(배종옥 역)의 매력에 영화를 보면서 새삼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길거리 리어카에서 어묵을 베어 물며, “우리 여관 가요.”라고 말한다.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욕구도 묻어 있지 않다. 분방한 것 같지만 사실 제일 삶에 성실하고 솔직한 사람이 그 여자이다.

 

 

 

 

 

 

에드바르트 뭉크  「질투 I」 1907년

 

 

미국의 어느 한 심리학자는 남녀가 질투를 표출하는 대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남자들이 여자의 성적 배신에 분노하는 반면 여성들은 남자의 감정적 배신에 더 분노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녀의 짝짓기 전략에서 나오는 특징인데, 남자는 여자가 다른 정자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최소화 해 자신의 종족 번식력을 높이려고 하고 여자는 남자를 오래 붙들어 놓아 아이의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나오는 원상의 명대사, ‘누나, 그 사람이랑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를 보면 문득 남자의 짝짓기 본능이 느껴진다.

 

원상은 ‘누나, 그 사람 사랑하지 마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낯선 남자의 정자를 품는 게 두려웠던 걸까. 원상은 성연과 윤식의 동침이 내내 불편하다. 그에 반해 원상이 실수로 관계를 맺는 하숙집 딸 혜옥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원상에게 차라리 돈으로 보상하라며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과 자신이 품었을 그의 아이를 원상이 거두어들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원상은 한윤식과의 정자 경쟁에서 백기를 들고 나온다.“아내한테도 잘 하고 애인한테도 잘 하면 되지. 마누라한테도 못 하고 바람도 못 피는 인간들보다 백배 낫다”는 한윤식의 말에 원상은 ‘명쾌하다’고 화답한다.

 

상당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할렘의 소유주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통사회에서처럼 원상은 윤식이 일부다처제 마냥 여성을 독식하는 데 대해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어차피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뇌까릴 뿐이다. 지배욕의 다른 표현인 질투는 어느 사이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선망으로 변한다. 결국은 삼각관계의 세 변에서 한 축이었던 성연은 사라지고 두 남자 사이의 수직관계만 남게 된다.

 

영화는 ‘질투’라고 하는 위험하고 열정적인 감정을 밋밋하고 심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에 불쑥불쑥 침투하는 ‘질투’라는 감정이 거칠고 광포한 것만은 아니다. 때론 강자에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주인공의 질투처럼 지루하고 치사하고 싱겁기까지 하다. 영화 첫 장면에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마카레나’노래처럼 유행이 사그라졌을 때 생각해보면 왠지 객쩍은 느낌이 드는 것이 이성을 되찾은 질투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원상, 윤식, 성연 세 인물들의 불완전한 삼각관계를 통해 우리 일상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투영한다. 세상은, 인간관계는 그리 명확하지도 선명하지도 않다. 누가 누구를 책임지고, 사랑하고, 질투하기엔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거센 물결을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은 그 물결에 부딪히며 조약돌처럼 서로를 닮아간다. 영화 속에서 질투와 좌절이라는 내용의 암울한 터널 같은 청년 시절을 볼 수도 있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한 중년의 속물적 삶에서 냉혹한 현실을 볼 수도 있다. 나이와 권력의 높고 낮음이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관찰기로도 읽을 수 있다. 누구의 삶을 골라보든 그 삶은 역설적이고 모순투성이다. 하지만 누구도 밉살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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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53쪽) - 

 

 

 

이런 종류의 글을 읽고 심장이 불에 덴 듯 놀랄 때, 그때를 청춘이라고 부른다. 또 이런 종류의 글을 자신의 청춘의 면죄부 혹은 자화상이라도 되는 듯 ‘내가 읽은 글’ 따위의 글에서 요란하게 소개할 때, 그때를 속물이라고 한다. 이처럼 소년은 늙기 쉽고 청춘은 한순간이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질투를 힘으로 변용시키는 자의 자기모멸과 자기 연민의 뒤섞임은 기형도로 말해지는 한 예민한 청춘의 자의식이 아니고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정서다.

 

질투란 어느 누구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자의 유일한 무기다. 이 때 저 질투하는 자는 자신의 질투 때문에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내비치지 못한다. 그것이 저 가련한 자의 자존의 방식이다. 그는 질투 때문에 쓰고 또 질투 때문에 자신이 쓴 것을 믿지 못한다. 마치 세상이 쓰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듯 끊임없이 쓰고 또 쓰지만 그가 쓴 것은 오로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다만 ‘탄식’뿐.

 

시인의 문장에서 이 탄식의 끝에서 저 지독한 욕망, 스스로 두려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그 불멸에의 열정을 엿본 것 같다.평생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나 머뭇거릴 운명, 그러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운명, 그 어리석은 운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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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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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바람의 집 - 겨울 판화 1」중에서, 95쪽)

 

 

겨울바람의 냉기가 여전한 춘삼월이 시작되는 이 무렵, 시인 기형도와 함께 따뜻한 어머니 손길을 떠올린다. ‘겨울 판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시 ‘바람의 집’에 귀 기울이며 황량한 겨울바람 소리를 함께 듣는 것이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어머니는 보채는 아이를 달래며 말한다.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한다.’

 

어머니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시인은 봄날에 와서 봄날에 갔다. 1960년 봄날이 오는 3월에 세상에 와서 1989년 아직 바람이 차가운 3월에 세상을 떠났다. 3월 7일 만 서른 살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었고,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이었다. 새벽의 극장, 그의 가방엔 원고뭉치가 들어 있었다.가방 안에는 시작 노트와 시 원고가 들어 있었다. 안고 있던 그 시들이 바로 어머니가 말했던 그 울음소리였던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134쪽)

 

 

기형도는 참 여린 사람인 것 같다. 보통 어린 나이엔 어머니가 겪을 고통보다는 내 자신의 외로움과 불편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인데. 그의 시에는 그의 기다림이 한 칸, 어머니의 지치고 힘든 삶이 한 칸, 이렇게 하나씩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슬프던 날도 세월이 한참 흘러 돌아보면 그리운가 보다. 시장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배고프고 외롭기만 하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시선이 이렇게 다정해도 되는가. 눈물겹다. 아버지도 없고 형제들도 돈 벌러 다른 데로 가버린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소년은 오직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있어도 아랫목을 비워두는 마음을 누구라도 훔쳐본다면 다독여주고 싶으리라.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아이를 어떻게 보듬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아이가 기다린 것은 밥이 아니라 품이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시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가 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 자신의 처지와 교차되어 더욱 증폭된다. 그는 상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는 그것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못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시인이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다 느끼고 아파하니, 세상을 굳세게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이 빨리 끝나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그의 죽음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참 아쉽다. 그의 부재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 81쪽)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문구들이 애절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구애 없이 자신을 잠가버리는 완숙함. 읽을수록 리드미컬한 운율에 끌려 묘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이런 기분이 있기에 생각날 때마다 기형도를 읽는다.

 

기형도의 ‘빈집’이 그것이다. 이 시는 거창하게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우리 삶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젊은 날의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므로 더욱 열정적이다. 길지 않았던 사랑에의 기억은 그 열정으로 인하여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러한 사랑을 잃고, 사랑을 하던, 그 짧았던 밤들에게,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에게, 아무 것도 모르며 타오르던 촛불에게, 눈물에게, 열망에게 아픈 작별을 고한다.

 

시인은 사랑을 잃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신이 이 시를 쓴다고 한다. 이어서 나오는 시구들이 모두 자신의 때(더러움 혹은 먼지)를 의미한다. ‘짧은 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 ‘내것이 아닌 열망’ 등이 모두 그것이다. 살면서 고통스러워했던 대상물이다.

 

시인은 이 대상물을 그가 있던 빈집의 좁은 방에 가둬놓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방을 나온다. 시인이 그 대상물과 함께 방에서 나와 ‘장님처럼’ 어렵사리 문을 잠그자 그 방은 빈집이 된다.

 

우리가 함께 울고 웃던 삶을 버린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과감히 그 대상을 버리고 나와 문을 잠근다. 그러면서 더러움과 고통을 털어낸다. 물론 이 시는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일을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젊은 시절, 그 사랑에의 열망은 이와 같이 우리에게 혹독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진실한 것이다.

 

기형도는 실제의 삶에서는 매우 유쾌하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왜 그는 이런 고독하고 절망적인 시들을 남겼을까.

 

그가 세상을 떴지만 사람들이 더욱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의 시가 누구나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고 그를 생각 할 때마다 뒤흔드는 허무와 절망에서 솟음 치는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절망에서도 아름다움이 솟다니. 기형도는 왜 절망을 선택했을까. 누군가가 말했다. 인생을 살면서 결코 벗아 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죽음과 선택이라고. 죽음은 알겠는데 선택은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겸손과 오만, 용서와 원망, 정직과 속임수 등 우리에게는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선택이라고 했고 선택을 회피하는 것도 선택이라고 했다. 오늘도 우리들은 선택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라 넋도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39쪽)

 

 

시에서 그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날은 오늘보다 더 추운 날이었던 것 같다. 그는 도시를 걸으며 참 외로워했다. 이 뼈아프고 아름다운 시를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도 참 많은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빈 트럭이 서있는 어두운 골목의 일상을 지나오면서 많이 지치고 많이 때묻어왔다.

 

도시에서 한 개인이란 늘 이렇게 소외되고 무능력한 존재다. 이것이 바로 도시 삶의 법칙이다. 모여 있으되 따로 있는 것. 그리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초라할 정도로 미미한 것. 그는 이런 삶을 원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돌아보게 되는 사람들의 아픔이 다 느껴지고 보였다. 그러나 이걸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것이 사람 간에 진정한 교감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의 시를 읽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과연 무엇인가. 그가, 그의 시가 우리들의 삶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역시 기형도의 시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깊이가 있다. 그래서 시인의 문장이 끌린다.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램프와 빵 - 겨울 판화 6」, 119쪽)

 

 

기형도의 시는 언제나 겨울이다.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이다. 언제나 겨울이다. 아직도 추운 늦은 겨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현실을 도피한 자가 만나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끝끝내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성의 보루이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유년시절의 가난과, 사랑을 얻지 못한 절망과, 시대에 대한 허무와,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곧 우리 자신의 아픔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문장을 마주치면 당연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의 시는 언제나 우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준다. 특히 시인의 생이 멈춰진 3월 7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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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생각, 만들어진 행동 - 당신의 감정과 판단을 지배하는 뜻밖의 힘
애덤 알터 지음, 최호영 옮김 / 알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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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이유, 피겨 드레스 색깔로 알 수 있다?

 

‘약물 복용은 금지하면서 레슬링, 태권도, 권투 종목에서 두 선수 중 한 명에게만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43쪽)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무패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레슬링의 정지현, 이스트반 머요로스, 아르투르 타이마조프, 권투의 알렉산데르 포벳킨, 오들라니에르 솔리스, 태권도의 문대성 선수는 모두 파란색이 아닌 빨간색 유니폼을 착용하도록 배정받았다. 당시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자유형 레슬링, 태권도, 권투 종목의 모든 경기 결과를 분석한 결과, 사소한 요인으로도 승패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 수 있는 경우에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전체 시합의 62%를 이겼다. 이쯤 되면 빨간색이 ‘심리적인’ 스테로이드 약물처럼 작용한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빨간 옷을 입은 선수가 상대 선수보다 더 우월한 느낌을 받는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스포츠심리학에서는 선수들의 복장 색깔과 경기 판정과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경기를 판정하는 심판도 선수들의 복장 색깔에 영향을 받아 편견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42명의 태권도 심판들을 대상으로 빨간색 보호장비와 파란색 보호장비를 각각 착용한 두 선수 갑과 을의 경기 비디오를 여러 번 보여준 뒤에 채점을 하는 실험을 했다. 여기서 21명의 심판은 원래 경기 비디오를 보면서 채점했고, 나머지 심판은 선수들의 보호장비 색깔이 반대가 되도록 디지털 기술로 조작한 경기 비디오를 보고 채점했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 빨간색 보호장비를 착용한 갑은 조작된 비디오에서는 파란색 장비를, 반대로 파란색 보호장비를 착용한 을은 빨간색 장비를 착용했다.

 

보호장비의 색깔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인 채점 규정으로 판정을 내린다면 갑과 을은 똑같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 심판은 전혀 다른 판정을 내렸다. 원래 경기 비디오에서 갑이 을보다 1점 많은 8대 7로 승리했다. 반면 조작된 경기 비디오에서 빨간색 장비를 착용한 것으로 조작된 을(원래 비디오에서는 파란색 장비 착용)이 8점을 받아 승리했다. 결국 심판들은 똑같은 경기를 보면서 빨간색 복장의 선수에게 더 많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래도 실험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한동안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란의 소치 동계 올림픽 이슈를 다시 언급할 수밖에. 지금도 러시아의 소트니코바의 금메달 수상에 대해서 전문가와 해외 언론들은 심판들이 개최국인 러시아 선수에게 과도하게 높은 점수를 줬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국민도 그렇고, 전 세계 사람들(러시아를 제외한)은 소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종목의 금메달은 소트니코바가 아니라 김연아라고 주장한다. 개최국으로서의 홈 어드밴티지, 거기에다가 러시아 피겨 연맹 회장의 부인이 피겨스테이팅 여자 싱글 경기의 심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올림픽이 끝난 지금도 편파판정 의혹이 싹 가시지 않고 있다.

 

심판진 구성의 문제도 있었지만, 여기서 선수들의 복장 색깔이 심판 판정에 영향을 주는 실험 결과를 김연아 대 소트니코바 경기에 대입해보면 판정의 부당함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소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쇼트 프로그램에 참가한 소트니코바와 김연아 선수이다. 이 두 선수가 입은 피겨 드레스 색깔은 주목하시라. 소트니코바는 빨간색, 김연아는 옅은 노란색이었다.

 

경기 후 소트니코바의 쇼프 프로그램 점수는 74.64점으로 전체 2위, 김연아는 74.92점으로 근소하게 앞선 점수를 받아 1위에 올랐다. 쇼트 프로그램 경기가 끝난 뒤에 해외 언론들은 소트니코바의 쇼트 점수가 거품이라고 주장했다. 소트니코바의 기술 기본점수는 김연아보다 1점 낮았지만 가산점이 9점대로 더 많았다. 경기 전까지 그리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던 소트니코바는 소치 올림픽 전까지 자신의 쇼트프로그램 점수가 70.73점이었지만 이날 자신의 최고 점수 기록을 무려 4점 가까이 끌어올린 것이다.

 

선수 복장 색깔 실험 결과를 생각한다면 러시아 출신 심판들은 자국 출신에, 그것도 ‘빨간색’ 피겨 드레스를 입었고, 30명의 선수들 중에서 29번째로 출전한 소트니코바에 후한 가산점을 준 셈이다. 다만 소트니코바처럼 빨간색 계열의 피겨 드레스를 입고 출전한 선수들도 있을 것이다. 쇼트 프로그램 전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소트니코바가 나오기 전에 몇 명의 선수들이 빨간색 계열의 피겨 드레스를 입었다면 복장 색깔과 판정의 연관성을 설명하기에는 타당성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포츠심리학계에서도 빨간색 복장이 불공정한 판정으로 유도하는 결과에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Scene #2  난폭한 주정뱅이를 온순하게 만든 색깔은?

 

다음과 같은 스포츠 종목 사례 이외에도 인간의 행동, 감정, 판단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외부의 힘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붉은색 복장 선수가 유리한 판정을 받는 것처럼 사소하게 보는 색깔이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분홍색 주정뱅이 유치장(Drunk Tank Pink)’이라는 것이 있다. 분홍색이 미국의 소도시 구치소에서 난폭한 술주정뱅이를 가두는 유치장 벽면에 칠해지면서 나온 말이다. 분홍색 유치장에 주정뱅이들을 가두자 놀랍게도 온순해졌다고 한다. 분홍색이 사람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색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까. 색깔뿐만 아니라 시선, 공간, 온도, 편견, 문화,·상징, 이름, 명칭도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다. 더운 날씨에 우리가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짜증나는 이유도 온도의 영향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국가에 대한 일종의 공포증과 반감을 가진 미국인들은 터번을 두른 사람만 보면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인식했는데 이것은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한다는 내용의 ‘나비효과’ 이론이 있다. 사소한 힘들이 복잡한 연쇄반응을 거쳐 우리의 마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과 그 영향을 인지하면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수 있다.

 

 

 

 Scene #3 사소한 것이 당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

 

의외의 조건들이 인간에게 미치는 과정의 사실을 다양한 심리 실험과 자료 조사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혀진다. 그러나 책에서 소개된 모든 실험과 사례들이 다 설득력이 높더라도 일부는 실생활에 적용하면 실험 결과대로 그대로 재현될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심리학적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명하다.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소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지배받는다는 것. 몇 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미국의 심리상담 치료사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처럼 우리는 사소한 것에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근심에 가까울 정도로 목숨까지 걸 수준이 아니라면 이제는 사소한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이성의 힘을 빌리는 합리적인 동물에 가까울 수는 있어도, 절대로 신에 가까운 완벽한 합리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외부적인 조건은 간혹 냉철한 이성을 조종하여 우리 삶에 조용하게 다가와서 장난칠 때도 있으니까. 이런 갑작스럽고 짓궂은 장난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외부적인 힘을 세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외부적인 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과 행동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신문 속 ‘오늘의 운세’에 나오는 내용만으로 우리 삶을 결정할 수 없다. 운세 내용대로 100% 똑같이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도 내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인 조건을 살펴보자. ‘오늘의 운세’ 대신 오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사소한 주변을 둘러보자. 혹시 아나? 오늘 외출할 때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 밖의 날씨 상태 심지어 당신의 이름까지도 당신의 하루 운세를 결정짓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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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확실히 스포츠 선수들은 유니폼의 색깔에 따라 눈에 잘 띄기도 하고,
잘 안 띄기도 하는 것 같아요.
심판들이 빨간색 유니폼의 선수에게 더 눈이 가는 것이
남성들이 빨간 립스틱, 드레스, 구두 등에 끌리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cyrus 2014-03-06 22: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실 이 책, 일상 속 심리학 사례를 설명한 책이긴한데 일부 내용은 우리가 이미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많아요. 남성이 빨간 립스틱, 옷에 끌리는 것처럼요. 이 책에서도 은빛님이 언급하신 내용이 유사하게 소개되고 있어요.
 

 

 

 

 

 

 

 

 

 

 

 

 

 

 

 

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내다본 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었다. 괜히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였을까? 문득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네는 살면서 사랑을 많이 해봤나?”

 

원칙주의자로 일만 알고 살아온 항공 책임자 리비에르는 상대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는다. “자네도 나랑 같군. 시간이 없었단 말이지.” 이 작품 속에서 리비에르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됐을 것이다.

 

그래, 그도 나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들을 언젠가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미뤄 왔을 것이다. 그러나 늙어서 삶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그런 여유를 얻는다면 그때는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도 있는데.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난 그녀의 미소 때문에, 그녀의 모습 때문에,

그녀의 상냥한 말씨 때문에, 그녀의 사고방식이

나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언젠가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런 것들을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맺은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 모르니,

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그대의 애정 어린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도 마세요. 그대의 위로를 오래 받은 나의 사랑이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로써 그대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그러니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대가 영원한 사랑으로 나는 늘 사랑할 수 있도록.

 

 

-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20쪽) - 

 

 

이 시를 쓴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8세 때 호메로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읽고, 14세 때 서사시 『마라톤의 전쟁』을 쓸 만큼 조숙한 소녀였다. 그러나 소아마비에 척추병, 동맥파열 등이 겹쳐 늘 자리에 누워 지내야 했다. 유일한 즐거움은 독서와 시 쓰기. 그녀가 두 권의 시집을 펴낸 뒤,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당신의 시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시집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당신을.’ 여섯 살 연하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보낸 연서였다.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이들은 주위의 반대 때문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가서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그곳에서 사랑의 힘으로 병을 극복한 그녀는 네 번의 유산 끝에 훗날 조각가로 활약하는 아들까지 낳았다. 15년 동안 ‘옛 슬픔에 쏟았던 정열’과 ‘어릴 적 믿음’을 아우르는 행복 속에 살다가 남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헤아려 보죠. 존재와 은총을 베푸는

이상적인 존재의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느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햇빛과 촛불 곁에서,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용한 필요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이, 나는 그대를 자유로이 사랑해요.

사람들이 칭찬으로부터 돌아서듯이, 나는 그대를 순수하게 사랑해요.

옛날에 내가 슬픔에 쏟았던 정열로, 내 어린 시절의 신앙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가 잃어버린 성자들과 함께

내가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랑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 평생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오로지 그대를 더욱더 사랑할 거예요.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58쪽)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는 그녀가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온전히 사랑한 남편에게 바친 연애시다. 병석에 누워 지내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준 남편을 통해 ‘잃은 줄만 여겼던’ 열정을 되찾고 한없이 큰 사랑 속에서 삶을 마감한 그녀의 생애를 생각하면 더욱 애틋하다.

 

 

 

 

 

 

 

 

 

 

 

 

 

 

 

사랑은 꼭 이렇게 해피엔드로 끝나지 않더라도 아름답다. 『시라노』는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사랑처럼 말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무적의 검술가인 시라노는 재기 넘치는 록산느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만 흉물스러운 코를 가진 추남이라는 생각에 선뜻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못한다. 반면 록산느는 그저 잘생겼을 뿐인 크리스티앙에게 반한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써주고, 그의 영혼을 담아낸 편지 덕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곧 전쟁터에 나가 죽고 록산은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시라노는 그 후 14년간 매주 록산을 찾아가 위로해준다. 괴한의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은 날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록산느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준다. “록산느, 부디 안녕히, 난 곧 죽을 것이오!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지금도, 저 세상에 가서도 당신을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당신을….”

 

어느새 황혼의 어둠이 짙게 깔리지만 시라노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간다. 록산느는 시라노가 지켜 왔던 숭고한 침묵의 진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죠, 이렇게 어두운데? 아! 너무나 많은 것들이 죽고 태어나는군요! 왜 지난 14년 동안 입을 다무셨나요? 이 편지에 남은 이 눈물은 당신이 흘린 것이었나요?”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항상 너무 늦게 온다. 시라노는 칼을 치켜든 채 죽음의 여신을 향해 마지막 대사를 외친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고?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늘 성공할 거라는 희망으로 싸우는 건 아냐! 헛된 명분을 위해 의미 없는 싸움을 해왔으니까!”

 

에드몽 로스탕은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이 주인공에게 기형적으로 거대한 코라는 외적 장애를 준 대신 더욱 헌신적인 사랑을 구현토록 했다. 게다가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당당한 정신은 시라노를 더욱 멋진 인물로 만들어 준다. 처음부터 록산느가 사랑했던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고귀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에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라는 구절처럼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절대적 사랑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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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도 코가 큰 것이 컴플렉스였다고 하더라구요.
시도 잘 쓰고, 칼도 잘 쓰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니~ 부럽네요.
저도 한때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부질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4-03-05 21:52   좋아요 0 | URL
저도 건강을 위해서 운동 하나쯤은 해봐야하는데.. 엄청 돌아다니면서 사람 만나는 것은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몸 움직이는 운동은 하기 싫은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