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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평점 :
과거에는 ‘남자는 바깥 일, 여자는 집안일’로 부부의 역할이 또렷하게 구분돼 여성은 ‘가정주부’라는 이름으로 집안에 묶였었다. 남자가 설거지나 빨래 등 가사 일을 거들거나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서게 되면, 주위 눈치를 살펴야 했고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슈퍼마켓에서나 부부가 함께 시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됐다. 남편이 집 안 청소를 하거나,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하고, 또 부엌을 들락날락하며 접시를 나르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맞벌이 부부 뿐만 아니라 전업주부의 가정에서도 더 이상 집안일은 여성만의 몫은 아니다. 부부가 가사 노동을 함께하는 인식이 생기고 있지만, 외국과 비교하면 아직도 멀었다. 특히 남성은 남편이 가사 노동을 하는 것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열악해지는 기혼 여성의 근로조건 문제를 외면한다.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은 아내의 노동 문제에 대한 이중적 인식을 짚는다. 성인 대다수는 ‘일하는 여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면서도 바람직한 아내상은 ‘가족의 뒷바라지를 잘하는 여성’이라고 여긴다.
퇴근하고 집에 와도 쉬지 못하고 집안일에 매달리는 맞벌이 아내들은 가사노동의 양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과의 가사 분담률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아직도 많은 맞벌이 아내들은 자신이 직장을 가졌기 때문에 집에 남아있는 어린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걸음이 바쁘다. 어머니는 마땅히 집에서 자식을 돌봐야 한다는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일을 하도록 허락한 남편에게 고마워서 늘 반찬도 제대로 하려고 애쓴다. 여성들과 함께 일한 남성들은 기혼 여성이 직장에서도 집 생각하는 것에 못마땅해한다. 이러한 남성들은 여성의 일차적 역할을 가사와 양육노동의 담당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직장을 가졌던 여성도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에 안착한다.
1980년대 말, 일하는 엄마들의 이중역할 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한 대안으로 ‘마미 트랙(mommy track)’이 거론되었다. ‘마미 트랙’은 출산과 양육을 전담하는 여성 인력의 특수성을 십분 고려해, 직업을 갖는 순간부터 임금 수준은 물론 승진 배치 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자들과 경쟁하지 않는 엄마들만의 트랙을 의미한다. 엄마에게 ‘마미 트랙’을 제공해줌으로써 일과 가족의 양립을 위한 선택지를 제공해주자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마미 트랙’은 일과 가족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상적인 대안이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엄마들이 편하게 걷을 수 있는 ‘꽃길’이 되지 못했다. ‘마미 트랙’은 ‘여성은 일차적 양육자’라는 가부장적 성별 분업구조 인식을 강화한다. 여기서도 가사 및 양육을 여성의 일차적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마미 트랙’에 향한 대중의 관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자 또다시 여성의 가사 노동 가치를 인정해주길 촉구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거세졌다. 여기서, 애너벨 크랩은 이러한 반응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녀는 사회가 남성들에게 가사 노동을 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저 여성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서 주어진 과업을 적절히 잘하라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결국, 아내는 자신에게 자꾸만 눈치 주는 사회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그녀들은 일과 가정,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노력을 강요받는다. 이것은 그녀들의 심각한 ‘선택의 문제’가 된다. 둘 중 하나라도 놓치면 죄책감을 느낀다. 일을 못 하면 ‘무능력한 여성’, 집안일을 소홀히 하면 ‘아주 무능력한 여성’으로 비난받는다. 여성이 겪는 이중고의 진통을 남성은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은 집안일 못한다고 해서 여성처럼 욕먹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집안일에 열중하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데 반해 남성의 가사노동 참여율이 저조하다면 여성에게는 결혼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출산이 여성에게 전통적 역할로의 복귀를 의미하거나 육아와 직장의 이중부담을 감내해야 한다면 누가 여성에게 출산을 권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중부담 상황에서 여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너무나도 크다. 일과 가족의 균형이 일하는 아내에게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상식적으로는 남편에게도 필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남편 입장에선 선뜻 내키지 않는다. 회식과 야근이 일상화돼 있는 조직문화에 획기적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남편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일 중심 이데올로기’에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 남편들도 살림과 관계된 경험담을 술자리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이 상상만 해도 부끄럽다거나 혹은 여성이 득세하는 말세적 현상이라고 느낀다면 그런 남편은 어떤 형태로든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맞벌이 아내들이 남성과 똑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직업의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만큼 남편들도 살림을 잘하기 위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부부 모두 함께 걸으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꽃길’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