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풍경 1 파리의 풍경 1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지음, 송기형 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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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계몽사상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런데도 사회적으로는 절대군주제와 신분제도가 엄격하게 유지되는 등 봉건 잔재가 온존했다. 이런 와중에 지배계급인 성직자와 귀족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도 세금을 면제받았을 뿐만 아니라 관직을 독점하는 등 온갖 특권을 누렸다. 국가 재정을 전적으로 부담하면서도 정치적 권리를 전혀 보장받지 못한 평민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사회적 모순이 팽배해 혁명이 배태될 수밖에 없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불평등은 문명 자체, 범위를 좁히면 잘못된 체제에 주된 원인이 있다. 구조화한 불평등은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장 자크 루소는 1755년에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발표했다. 루소가 생각한 불평등 원인은 문명 그 자체였고, 그것을 정당화할 자연법은 없었다. 이는 불평등을 해결하려면 당시 사회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야 함을 내포했다. 한 세대 뒤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그 연장선에 있었다.

 

루소와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진리를 인간 사유의 결과물로 끌어내려 프랑스 혁명의 토양을 마련했다. 이런 와중에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라는 작가 겸 언론인은 혁명의 기운이 닿지 않는 파리의 땅을 한가롭게 밝으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글로 기록했다. 책 제목은 《파리의 풍경》. 1781년부터 1788년까지 총 12권으로 출판한 책(국내 번역본은 총 6권)은 위조본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책 때문에 메르시에는 파리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사실 위조본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출판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인기를 식을 줄 몰랐다. 출간 당시 《파리의 풍경》의 인기는 볼테르와 루소의 책과 맞먹을 정도였다. 이 책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이 피어오르기 전 나름대로 평화로웠던 파리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얼핏 보면 파리를 찾는 다른 유럽 관광객이나 파리에 진출하려는 지방 사람들을 위한 신변잡기 책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 책에는 화려하고 평화로운 파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메르시에는 감상에 현혹됨이 없이 파리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정면으로 읽어낸다. 그는 파리 토박이임에도 불구하고, 파리 전체를 돌며 “파리는 어떠한 곳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답을 구한다. 관찰과 사유를 통해서 얻은 결과물은 천여 개가 넘은 단상으로 정리했다. 메르시에의 글쓰기 방식은 20세기 초 근대 파리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관찰했던 것을 짧게 메모한 발터 벤야민보다 훨씬 앞선다. 메르시에가 바라본 파리는 종잡을 수 없는 곳이다. 계몽주의 사상의 나라답게 자유와 평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다. 그러나 국가가 모든 것의 중심에 있고, 지배의 타성에 젖어 무기력한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 전제 군주시대의 색채가 너무나도 짙다. 책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진 귀족들, 신분 상승을 위해서 파리 중심부로 모여든 지방의 젊은이들, 그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시민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메르시에는 점점 사람들이 모여 넘쳐나는 파리를 ‘몸에 비해 과도하게 큰 머리’를 가진 존재로 비유한다.

 

파리는 나라라는 몸에 비해 과도하게 큰 머리 같다. 하지만 이제는 이 혹을 잘라내기보다는 내버려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 번 뿌리가 내리면 근절이 불가능한 잘못된 일들이 있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파리는 인류를 집어삼키는 구렁텅이라고 볼 수 있다. (10쪽, 발췌 인용)

 

그가 걱정하는 ‘잘못된 일’이란 게 무엇일까. 메르시에는 물질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파리의 현실을 지적한다. 부자와 빈자와의 경제적 격차는 점점 커지고, 빈자를 도와주어야 할 종교인들마저도 마몬의 유혹에 사로잡혔다. 이제 파리에는 검소, 절제, 미덕을 찬양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잘못된 일’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고, 기록하지 않는다. 전제정치와 불평등은 파리지앵들을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였고, 더 이상 사회를 바꾸려는 의지조차 보이지도 않는다.

 

파리인들은 계속적인 성찰과 노력에 의해 자유를 조금 더 얻어보았자 별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다. 파리인은 도시의 불행한 일들을 금방 잊어버린다. 그들은 고통을 기록해 두지 않는다. (52쪽)

 

다행히도 메르시에가 걱정했던 매너리즘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파리의 풍경》이 출간하고 나서 일 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그래서 《파리의 풍경》은 자유와 평등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려던 혁명 직전의 프랑스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책이다.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지 않고, 부의 균등분배가 이루지 못한 파리를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기록했기에 당연히 정부는 이 책의 인기를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메르시에의 책이 불티나게 팔린 사건은 사회적 모순을 감지하는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이후부터 메르시에의 책은 파리 시민들의 기억 속에 잊혔다. 인기 작가 대열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은 루소와 볼테르였다. 메르시에가 기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그의 글은 풍속과 각종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간략하게 적은 칼럼을 연상시킨다. 그의 글은 다소 지루한 면이 있다. 그렇지만 《파리의 풍경》이 혁명 이후에 잊힌 책이라고 해서 단순히 프랑스 혁명의 등장을 예고하는 텍스트 정도로만 평가한다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한다. 메르시에는 우리의 도덕관과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율배반과 변화무쌍한 파리를 그대로 바라보고 기록했을 뿐이다.

 

어떤 기술을 완전히 익힌다는 구실로 지방을 떠나서 멘토도 친구도 없이 이 유혹의 도시를 찾아온 순진한 풋내기는 화를 당할지어다! 뻔뻔스럽게 쾌락이라는 이름을 도용하는 방탕의 덫들이 사방에서 그를 둘러싼다. 그는 부드러운 사랑이 아니라 그 모조품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교태의 거짓말과 탐욕의 간계가 진심의 토로와 감정의 불꽃을 대신한다. 쾌락은 돈을 주고 사는 기만적인 것이다. (25쪽)

 

공교롭게도 프랑스 혁명 이후의 파리는 다시 유턴을 시작했다. 구체제보다 훨씬 빨리 부활한 것이 향락이었다. 단두대의 공포가 사라지기 무섭게 무도회장이 파리 곳곳에서 문을 열었고, 사기꾼, 투기꾼, 부패 정치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의회 의원들의 부패행위는 공공연해졌으며 처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세인의 부러움을 샀다. 메르시에는 프랑스의 최초 공화정을 무력하게 만든 나폴레옹 제정의 몰락(1814년)까지 지켜보고 눈을 감는다. 만약에 그가 십 년을 더 살았으면 물질주의에 지배된 파리를 더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대도시는 끝없이 타락할 것임을. 그래서 파리를 꿈과 성공의 도시로만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신기하게도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순진한 라스티냐크의 등장을 예고한다. 메르시에는 ‘인류를 집어삼키는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은 유일한 파리지앵이다. 이 위대한 생존자는 타락한 도시의 영혼들이 사는 시대의 천태만상을 기록하는 데 성공한다. 발자크가 생전에 해내지 못한 <인간 희극> 작업을 12권으로 정리했다. 12권의 《파리의 풍경》은 90여 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발자크의 <인간 희극> 전체와 맞먹는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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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8-25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역사적 책도 있었군요. 국내에서도 12권으로 출간된 책 중 이것이 첫 권인가요?

cyrus 2015-08-26 10:05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제가 국내 번역본 권수를 언급하지 않았군요. 총 6권으로 완역본입니다. ^^;;

프레이야 2015-08-2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권이군요. 완전히 새롭게 발견하게 된 책입니다. 리뷰 감사해요^^

cyrus 2015-08-26 10:07   좋아요 1 | URL
최근 프랑스 역사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 책이 서울대학교가 주관하는 문화연구기관 이름으로 출판되었어요. 이런 좋은 책이 알려지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국내 번역본 권수는 6권입니다. 제가 깜빡 잊고 국내 번역본 권수를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8-25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12권이라니~ 다 읽으려면 몇년이 걸릴까요? ㅎㅎ
좋은 책 감사해요~^^

cyrus 2015-08-26 10:09   좋아요 0 | URL
글을 다시 수정했습니다. 12권은 처음에 나왔을 때 권수고요, 국내 번역본은 6권으로 나왔습니다. ^^;; 한 권당 400쪽 조금 넘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 사회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꼭 알아야 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8-26 15:50   좋아요 0 | URL
확 끌립니다. 일단 책값이 후덜덜하군요 ㅎㅎ
소장가치는 있겠어요., 제가 힘들면 도서관에라도 소장하도록 하든지 해야겠어요 ~^^

cyrus 2015-08-26 15:58   좋아요 0 | URL
공공도서관에 찾기 어려운 책일지도 모릅니다. 스무 개 넘는 대구 도서관 중에 6권 모두 소장되어 있는 곳이 딱 한 군데뿐이었습니다. ^^;;


지금행복하자 2015-08-26 16:02   좋아요 0 | URL
정말요? 이런 책이야말로 도서관에 소장해줘야 하는데요~~ 희망도서로 일단 신청을 해봐야겠어요 ~ ^^

AgalmA 2015-08-26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 보면 참 부러워요. 그에 비해 한국은 참 여러모로 안타까운...왜곡하려는 자들은 득실하고...

cyrus 2015-08-26 10:1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가면 갈수록 사회의 어두운 진실을 고발하는 사람들을 자꾸 거짓으로 모함하는 세력이 있어요.

transient-guest 2015-08-26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시가 테마가 되는 책이군요. 이런 책이 나오기 힘든 한국의 풍토가 아쉽습니다.

cyrus 2015-08-26 10:15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이 번역되지 못하는 풍토도 아쉽습니다.

stella.K 2015-08-2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저작에 무한 신뢰와 존경을 보내고 싶어. 발자크도 그렇고.
현재는 6권만 번역된 거고, 앞으로 6권이 더 번역되어 완역한다는
목표겠지?
뭐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처럼 꾸준히 찾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프랑스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읽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 탐나는 책임엔 틀림없어.

cyrus 2015-08-26 15:26   좋아요 0 | URL
우리말로 번역해서 나온 책이 총 6권이에요. 이 책 번역에 참여한 사람이 7명이나 됩니다. 그만큼 국내에 덜 알려진 책을 번역한 분들이 대단해요. 그런데 책값이 대학교재 가격이랑 비슷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