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반복하다보니 나만의 취향이 생겼다. 그 안에서도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코스가 있고, 그 코스를 위해 여행을 한다고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는 남들이 하는 것처럼 관광지를 둘러보았고 유명하다는 맛집엘 갔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 해보지도 않고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낯선 나라의 낯선 도시, 그 곳의 거리를 무작정 걷는 편을 선호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식당에 들어가는 편을 더 좋아했고. 그러다 최근에 생긴 취향은 낯선 도시의 미술관에 가는 것이었다. 그림을 잘 볼 줄 모르는 나의 눈을 그림 좀 볼 줄 아는 눈으로 키워보자, 는 생각으로 미술관에 가기 시작했는데, 웬걸, 그림을 보는 눈이 길러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 확고한 취향만 확인하게 되더라. 좋은 그림은 더 좋아지고 그렇지 않은 그림에 대해서라면 여전히 무심해지는 것. 그렇다해도 낯선 도시의 미술관에 들러 그 곳에 전시된 그림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미술관 내의 까페에 앉아 그 후의 시간을 즐기는 것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코스중 하나가 되었다. 그 시간을 기다리고 기대할만큼 내가 여행에서 참 좋아하는 시간. 그 시간은 혼자여도 좋았고 누군가와 함께여도 좋았다. 나는 그 시간을 매우 사랑한다. 이번 방콕에서도 그런 시간을 가졌다.


자, 미술관에 가보자, 그렇다면 어느 미술관에 가보면 좋을까, 해서 친구와 나는 호텔에 앉아 방콕 미술관을 넣고 검색을 해보았다. 그러다 선택하게 된 것이 <Museum of Contemporary Art> 현대미술관 이었다. 방콕에서도 외곽에 있는지라 BTS 도 닿지 않고, 기차나 차를 타고 가야했다. 친구와 나는 그랩을 불러 그 곳에 닿았다. 도착하니 가방은 매표소에 맡기고 들어가야 했다. 친구와 나는 핸드폰만 챙겨서는 표를 끊고 입장했다.



1층에는 까페와 기념품 가게가 있고 2층부터 전시가 시작됐다. 2층에 가니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작품은 <Father's Path> 라는 작품이었는데, 이 그림이 참 좋아서 친구와 이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좋다, 좋으네, 하면서 '이 그림 엽서로 있으면 잔뜩 사야지' 했는데, 관람을 마치고 기념품샵에 도착하니 이 그림의 엽서는 없었다. 서운해..





2층의 그림중에 좋은 것들이 있어서 와 여기 오길 잘했어, 이 미술관 크고 작품도 많아, 이러면서 친구랑 한껏 신나하고 있었는데, 4층과 5층에 걸쳐 내 취향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작품들이 등장해서 아아 이게 뭐야... 하게 됐다. 아주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태국 고유의 종교나 신화와 관계있는 작품들인 것 같았다. 그런 그림들이니만큼 그곳의 종교와 상관 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동떨어지고 그래서인지 사실 좀 무섭게 느껴져서... 이런 그림을 그리는 마음과, 영감과 그리고 전시하는 마음, 이 그림을 그린 예술가에게 상을 주는 마음, 그리고 이 그림들을 소장하고자 하는 마음들은 어떤 마음일까.. 여러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여러번 생각한다고 그 답을 알 수는 없었다.



3층의 한 구석에는 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좀 민속촌의 느낌이어서 그냥 둘러나보자, 하고 들어갔는데 그 집 안에는 같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그림들이 시리즈로 집안 전체를 꾸미고 있었다. 그 그림들은 모두다 'Sukee Som-Ngoen'이란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둘러보다보니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거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어어, 이것봐, 이거 태국 전통의 이야기인가봐, 하면서 우리는 그림들만으로 그 안의 이야기를 추측해낼 수 있었다. 잘생긴 놈과 부자인 놈이 한 아름다운 여인을 동시에 사랑하는구나, 이들이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구나, 여자는 잘생긴 놈을 선택했는데 부자가 그녀의 방에 침입했구나, 그래서 잘생긴 놈이 빡쳤구나, 그런데 잘생긴 놈은 영웅이구나, 아이도 낳았구나, 하면서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거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간 우리가 이야기를 짐작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 현대미술관에 따로 전시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이것은 혹시 태국에서 너무나 유명한 신화인걸까.




(실제처럼 만든 모형이었는데 힘줄도 그대로 드러난다.)


이 그림을 다 보고 바깥으로 나오니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 시리즈의 여자주인공인듯한 'Phimphilalai'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이 집은 <House Of Pimpilalai>였다. 아, 여주인공의 이름은 핌피랄라이 이구나, 이곳에 전시된 그림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구나, 우리는 미술관내의 벤치에 앉아 미술관에서 나눠준 브로셔와 구글 검색을 통해 이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쿤팬 과 쿤창'이라는 두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였고, 태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고전문학인듯 했다. 오, 그리고 검색해 알아낸 사실에 의하면 잘생남자와 못생긴부자 남자가 핌피랄라이를 사랑하는데 잘생긴 남자는 역적으로 몰렸다가 영웅이 되고 무슨 신적인 존재가 되고, 그 남자가 전쟁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핌피랄라이는 못생긴 부자랑 결혼하는데 사실 잘생긴 남자는 죽지 않았고, 전쟁에서 돌아온 후에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못생긴 남자랑 결혼했다는 사실에 잘생긴 남자는 분노하고... 그러는 이야기인 것이다. 오, 이야기를 알고 보니 더 재미있네. 친구랑 나는 재밌다 재밋다 하면서 그래서 질투란 그림이 있었나봐, 그래서 복수란 제목을 가진 그림이 있었나봐, 그림 속의 아이는 그렇다면 잘생긴 놈의 아이인가봐,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한 번 들어가서 볼까?' 내가 물었고 친구는 '그러자' 고 했다. 이야기를 모르고 봐도 재미있었는데, 알고 보면 더 재미있겠지? 그렇게 우리는 들어가서 다시 한 번 관람했고, 그 뒤로 숙소에 돌아와 와인을 마시면서 그 이야기를 책으로 읽을 순 없는지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오, 있었다. 만세!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게 다른 사람들한테는 궁금한 이야기, 아는 이야기였구나. 그러니 이렇게 책으로 나와있지!


맨 왼쪽의 책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라 읽으려고 했더니, 206쪽의 책인거다. 이거 완전 무슨 일리아스 같은 대서사시 같았는데, 게다가 운문 이야기라고 했는데, 206쪽 밖에 안돼? 너무 적은데? 하고 책 설명을 읽어보니, 아니나다를까 '발췌본' 이었다. 이 책은 태국에서 세상에, 42권짜리의 이야기라는 거다. 사람들이 보통 이 책을 우리나라의 춘향전과 비교하는 모양인데, 누군가 읽고 쓴 리뷰를 읽어보니 춘향전에 빗댈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막장 중에도 막장 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위에 쓴 검색으로 파악한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었던 것. 태국의 종교도 아마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잘생긴 놈이 신처럼 되기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자기의 어린 아이를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고, 게다가 핌피랄라이를 사랑하면서도 바람을 피우는 것. 핌피랄라이 역시 자신의 마음을 양쪽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아, 막장 중의 막장이라니! 게다가 전시된 그림을 보면 작가는 무슨 여자 가슴에 한 맺힌양 엄청 그려놨던데, 그 그림이란 것이, 아마도 태국의 전통적인 이야기를 잘 살리려고 그런 것이겠지만, 여자 몸에 완벽을 때려 박은 거다. 친구와 보면서 '여자 몸에 대한 판타지가 있네...' 라고 했는데, 짧은 검색만으로는 화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는 없었다. '수키'란 화가의 이름을 보면 여자사람일듯한데, 여자 가슴 그려둔 거 보면 남자사람일것 같고..



어쨌든 이 발췌본 206쪽 짜리를 너무 읽어보고 싶다. 사실 여혐 범벅일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태국의 현대미술관의 그림을 보면서도 여성을 성녀화 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내가 태국의 종교에 얽힌 사연을 모르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그 미술관에서도 친구와 나는 그런 얘기를 한거다. '미국의 미술관에 가면 여성 누드 모델이 많은데 여성 화가의 그림은 20프로도 안된대' 같은 이야기들. 어느 미술관을 가나 그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태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어떤 영화가 하는가 살펴보니, 오오, <쿤팬의 이야기 2> 가 있더라. 너무 졸려서 금세 잠들 것 같았지만, 어디 좀 볼까, 하고 재생했는데, 하하하하, 영화가 만들어진 것도 좀 오래전이긴 하지만 와... 심한 뻥이 그 안에 있었다. 쿤팬이 전쟁중에 적들에게 둘러싸였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무슨 ㅋㅋㅋㅋㅋㅋ 두 손을 모아 기도하니까 쿤팬을 겨냥하던 적군의 총이 그냥 다 부러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적군들이 에워싸는 가운데도 쿤팬 혼자서 적을 다 죽이고 나올 수 있는 거다. 이게 뭐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하다 진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쿤팬과 쿤창의 이야기에서 핌피랄라이는 '완통'으로 개명한다고 하는데, 마지막에는 국가로부터 처형을 당한다고 한다. 처형당하는 이유는 그녀가 '음란해서' 라고...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혐범벅일것 같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여혐이 그 안에 있을것 같은데, 그것이 태국에서 오래된 클래식한 문학이라고 하니, 미술관에 가 그 그림들을 보기도 한 터, 읽어서 그 그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고 싶다. 그 책을 읽고나면 아마 할 말이 많아지지 않을까. 이 책 읽어야겠어, 라고 친구에게 말하니, 친구도 너무 읽어보고 싶다면서, 그러나 여혐 가득한 막장일 것 같아 내가 다 읽어본 후의 감상을 듣고 읽기를 선택하겠다 한다. 그래, 친구여....





어처구니가 없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쿤팬)가 전쟁에서 돌아와보니 완통이 쿤창과 결혼해서 빡이 쳐서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데, 말리는 게 쿤팬의 두번째 여자... 이에 완통이 빡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하자는 건지 도대체 원. 어떻게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했다고 사랑하는 여자를 죽일 생각을 해?? 하아-

오늘 출근하면서 읽기 시작한 《미친 사랑의 서》가 생각나는데, 이 이야기는 따로 풀기로 하자. 아무튼 친구랑 한참이나 재미있어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갔는데, 돌아올 때는 쿤팬과 쿤창, 완통을 아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어. 하하하하. 뜻밖의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친구와 그림을 보고 기념품 샵에 들르고, 사고 싶은 엽서가 없어서 실망하고, 까페에 들러 차를 마시면서 각자 가져온 책을 읽거나 하고 싶은 걸 했다. 그러다보니 미술관 문닫을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는 그랩을 불렀다. 그러나 그랩은 응답하지 않았다. 다시 불렀다. 다시 응답하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미술관 직원에게 우리를 위해 혹시 택시를 불러줄 수 있느냐 물어보니 그럴 순 없다면서 우리에게 어디에 갈건지를 물었다. 우리는 시내의 대형 쇼핑몰을 얘기했고, 미술관 직원은 여기에서 택시를 불러서 거기에 가기는 매우 힘들거라며, 버스와 BTS 를 타고 가라고 알려줬다. 그러더니 잠깐 기다리라며 친절하게 메모지에 가는 방법을 적어주었다. 일단 나가서 왼쪽으로 쭉 가서 건너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모칫 역까지 가. 거기에서 BTS 를 타고 씨암 역에서 내리면 돼. 요금은 한사람당 20바트가 안될거야. 이걸 다 적어주었어..





매우 친절한 직원이었다. 나는 외워간 태국인사 컵쿤카를 몇 번이나 양손을 모아 외친 뒤에 메모지를 받아들었고, 그렇게 버스정류장에 가서,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버스를 탔고,


(이것이 버스티켓)


BTS 도 탔다.






쇼핑몰에 들러 밥을 먹고 서점에 들렀는데, 어디서든 서점은 참 좋다. 꽉꽉 책이 채워진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피케티의 자본도 보았고 소피 킨셀라의 책이 대세인가 보았다. 그러다가 친구가 말해줘서 알았는데, <귀신나방> 이 있는 게 아닌가. 제목이 한글로 써져있어서 확 눈에 들어온다.




오오, 제목이 한글로 되어있다니, 그렇다면 본문은? 하고 들어서 펼쳐보니 이렇게............ 네??




으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흐. 아무것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발견한 대한민국 소설이 반가워서 남동생에게 찍어 보냈다. 나와 내 남동생 모두 이 책을 읽었단 말이야? 남동생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왔다.


'그 책 별로인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이 책을 읽은 내가 좋아하는 두 남자 모두가 이 책을 별로라 말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장용민은 이 책 말고도 《궁극의 아이》, 《불로의 인형》 란 책도 썼죠.. 궁극... 궁극에 대해서라면 제가 참 할 말이 많지만 그냥 넘어갈게요.
















미술관의 그림을 보고 까페에 가는 것 못지않게 사랑하는 시간은, 호텔에서의 밤이다. 블루트스 스피커로 오래된 노래를 틀어두고서 친구와 나는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밤은 깊어갔고, 우리는 그 날 걸었던 거리와 그 날 보았던 그림에 대해 얘기했다. 그 날 먹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했고, 오래된 노래들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어느 밤에는 갑자기 영화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한참을 보냈다. 더티댄싱 정말 좋았잖아? 프리티우먼도 좋았지! 유콜 잇 러브는 어떻고! 같은 나이대라 같은 영화를 같은 시기에 보고 비슷한 감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이렇게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소중한 밤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담담하게> 를 들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얽매이는 기분이 들면 안되니까요, 를 간절하게 따라부르면서, 얽매이는 기분이 들지 않게 하려고 내가 너무 노력한걸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걸까, 지난 시간을 한참이나 후회하며 돌이켜보았다.



잘 지내는지 몇 번이나 묻고 싶은 낮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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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의 미술관 MOCA (Museum of Contemporary Art) 에서 인증하는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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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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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겟타 2019-09-13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이번 연휴를 방콕에서 보내시는군요 한국도 오늘은 방콕만큼이나 날씨가 좋네요
연휴 잘보내고 오세요- :D

다락방 2019-09-16 09:45   좋아요 1 | URL
연휴는 끝났고 월요일이 되었고 저는 변함없이 사무실에 있습니다.................... ㅜㅜ
 

주말에 있던 약속은 태풍 때문에 취소되었다. 오전에 잠깐 이비인후과와 요가를 다녀오는데 바람이 너무 심한터라 도무지 오후의 일정을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 우리 오늘 만남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 라고 친구에게 말을 거니 친구 역시 그게 좋겠다고 했다. 덕분에 토요일 오후가 내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읽고 싶었던 책 읽으며 여유로운 토요일을 보내야지, 그렇게 나는 시몬 베유의 책을 잡았다.

















그러나 다른 가족 구성원과 함께 사는 집에서 가사노동이 뻔히 일어나고 있는 걸 알면서 과연 주말의 여유로운 독서는 가능할까? 만약 내가 혼자 사는 사람이었다면 다른 모든 일들을 뒤로 미룬 채로 책 읽기에 집중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으려고 폼을 잡고 있는데, 엄마는 부엌에서 뚝딱뚝딱.. 엄마도 그저 누워있기만 하면 좋을텐데, 그러나 엄마는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다. 오전에 엄마 개인적인 약속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시장에 가 명절에 만들 음식의 재료들을 사오셨고, 이내 저녁에 먹을 반찬을 만들기에 분주하시다. 아아..차라리 모를걸, 차라리 집에 없을 걸, 그 편이 내가 편했을텐데...라며 책에 집중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엄마가 나를 부른다. 오이지를 만들건데 오이를 좀 짜달라는 거였다. 나는 내가 원했던 독서의 시간이 깨져버렸다는 아쉬움에 조금 화가 났지만, 그러나 가사노동을 엄마에게만 짐지울 순 없었다. 나가서 오이를 힘껏, 힘껏 짰다. 


눈 앞에 일거리가 뻔히 보이는데 오이를 다 짰으니 이제 방해 말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나는 빨래를 가지고 나가 세탁기를 돌렸고 다 된 빨래를 건조대에 널었다. 그 사이 엄마는 내가 먹을 저녁 반찬으로 소불고기를 만들고 동태찌기를 끓이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젼 앞에 큰 상을 펴두고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왔고 소주잔과 수저를 준비했다. 앞접시도 있어야겠지. 그렇게 엄마랑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설거지를 했다. 배가 부르다며 소파에서 쉬는 엄마에게 따끈한 차를 우려주었다. 토요일밤은 그렇게 책을 읽을 겨를도 없이 후딱 지나가고 있었다.



나랑 같은 상황에 놓인 남자들은 어떨까, 를 잠깐 생각했다.

그들도 집에 있는 주말이면 본인이 예정한 대로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대신 가사노동을 함께 할까? 부엌에서 뚝딱이는 엄마(혹은 아내)의 소리들을 넘기지 못하고 나와 무언가 도울까? 엄마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세탁기를 돌릴까? 엄마가 저녁을 차려주면 맛있게 먹고 설거지를 할까? 고단한 엄마에게 따끈한 차를 내어드릴까? 아니면, 그들은, 계획했던 그대로, 자기 방에 콕 틀어박혀 책을 읽을까? 그리고서는 이번 주말은 여유롭게 하고 싶은 일들을 했어, 라고 주말이 지난 뒤 출근해서는 동료들에게 말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속 남자가 생각났다. 밖에 나가 정의를 부르짖고 혁명을 외치지만, 집에서는 식탁 앞에 앉아 가만히 엄마나 여자친구가 차려주는 밥을 받아먹는 남자. 그들은 자기 안의 모순을 직면하고 받아들일 줄 알까?






우다얀은 혁명을 원했지만 집에서는 남들이 해주기만을 기대했다. 식사 시간에 그가 하는 거라곤 자리에 앉아서 가우리나 어머니가 그 앞에 접시를 놓아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줌파 라히리, 저지대, 203쪽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봤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당시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이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하고, 눈물을 훔치고, 이웃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어떤 식으로 시장을 바라봐도 그것은 또 하나의 경제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경제 말이다. (p.30)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가족구성원 모두가 자유로웠다. 각자 자기 몫의 외출을 하고, 나도 일찌감치 오후에 영화 <벌새>를 예매해둔 터다. 일전에 알라디너로부터 받은 커피와 케익 쿠폰도 사용할 겸, 나는 책을 들고 까페로 나갔다. 이번 여성주의책 같이읽기 도서는 <시몬베유의 나의 투쟁>이지만, 나는 시몬 베유의 다른 책도 사둔 터라, 일단 얇은 책을 꺼내 들고 나왔다. 시몬 베유의 책을 읽다보면 프랑스에 대해 궁금할 터, 몇 개월전에 읽었던 <유럽 낙태 여행>도 함께 가지고 갔다. 시몬 베유의 책을 읽다가 무언가 궁금해진다면, 그럴 때 유럽 낙태 여행도 읽어야지. 나는 그렇게 까페에 두 권의 책을 가지고 나갔고, 나란히 꺼내두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해전에 남동생이 회사에 다니는 게 전망이 밝은 것 같지 않아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며 이것저것 생각해 '이건 어떨까' 하고 내게 의견을 구할 때면, 나는 그 당시에 내가 생각하는 답들을 동생에게 들려주곤 했다. 한 번은 내가 생각하기에 전혀 도덕적이지 못한 일들, 설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어디 가서 '나 이렇게해서 돈 벌었어' 라고 말하기에 껄끄러운 일에 대해서도 '이건 어때?' 하고 묻길래, 정색을 하고 '그건 안돼' 라고 말했었다. 돈 버는 거 너무 중요하고 나 역시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그러나 어디가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동생에게 말했다. 내가 하는 일을 얼버무려야 한다면, 그 일을 하지마. 어디가서 누가 물었을 때 전혀 거리낌 없이 답할 수 있어야 해. 일에 있어서 도덕을 잃지 마. 돈을 설사 조금 덜 벌더라도, 윤리를 놓아서는 안돼. 돈을 벌 때 모럴을 꼭 가져가야 해, 그걸 염두에 두어야 해. 


내가 하는 말이 동생의 귀에 닿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 동생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자랑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 조언 '탓'일까. 돈을 크게 벌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이것이 윤리적으로 한 점 부끄러운 게 없으니,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있지 않을까, 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에 1950년대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낙태수술의 80퍼센트 이상이 의사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행하여졌다는 것. 그러나 물론, 의사들도 낙태수술을 하기도 했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수술 금지라는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산파, 간호사, 일반의나 산부인과의들이 은밀하게 수술을 했습니다. 대체로 인간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계에서 지은 의료 시설에서도 곤경에 빠진 여성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련의나 병원 경비들은 병원으로 긴급히 실려 오는 여성들을 속속 보곤 했습니다. 이 여성들은 위생 상태가 끔찍하고 어떤 의료 교육도 받은 적 없이 가장 초보적인 방식으로 산파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은밀히 찾아가 임신중단 수술을 받고 나서 만신창이가 된 채였죠. 이 산파들은 때로는 인간적인 호의로, 대체로는 돈 때문에 수술을 해 주었습니다. 무척 고급스럽고 수술 비용이 비싼 병원에서도 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 중에는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에 반대 입장을 취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음성적으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돈이 된다는 판단에서였죠. (p.72-73)




나는 이 부분에서 도덕을, 윤리를, 모럴을 떠올렸다. 돈을 더 벌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음성적으로 수술하는 상황을 바라는 의사들.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않는 사람들. 나는 만약 내가 이런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었다면, 그것이 가족이든 애인이든 친구든 어떤 형태로든, 남동생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해주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번다는 거에 취해서 도덕을 잊지 말라고, 윤리를 잃지 말라고. 어디가서 니가 하는 일들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상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랑 인연을 끊고 하던 일을 마저 하면서 임신 중단이 합법화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윤리보다 돈이 더 앞서는 사람들이. 나는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어디가서 부끄럽고 싶지 않다. 내가 버는 돈에 대해서는 출처를 분명히 밝힐 수 있기를 원한다. 어디 회사에 다니냐, 무슨 일을 하냐, 라고 상대가 물었을 때, 속이거나 거짓말을 해서 그 상황을 비켜가고 싶지는 않다. 말하기에 조금 꺼려지는 일 같은 걸 겪고 싶지 않다.



그런 의사들과 대조되는 자리에, 바로 '343 선언' 속의 여자들이 있었다. 이 선언은 343인의 여성들이 자신의 임신중단 경험을 공개한 걸 말한다. 여기에는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랑수아즈 사강, 카트린 드뇌브등이 포함된다.



이 선언은 무척이나 대담한 행동이었어요. 이 여성들은 임신중단을 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덧씌우는 오욕을 짊어짐으로써 사회에 맞섰습니다. 이들이 형법상으로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해도, 개인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결과란 무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이 선언은 아주 강력한 투쟁이자 도발적인 행위였습니다. 결국 이 행동은 소송을 진척시키고 정부로 하여금 1920년 악법 개혁을 단행할 수밖에 없게끔 했지요. (p.74-75) 



낙태가 불법인 국가적 상황에서 '나도 낙태했다'고 밝히는 일은 얼마나 용감한 일인가. 대한민국에서도 낙태가 불법이지만 그러나 많은 여자들이 낙태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이 위선적인 상황에서, 그래서 낙태한 사실을 알고 오히려 그걸 여자를 협박하는 수단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1971년의 프랑스에서 여자들은 오욕을 감수하고 낙태했다고 선언을 한다. 


일전에 메갈리아가 한창 욕을 먹을 때, 많은 여성들이 '내가 메갈이다', '나도 메갈이다' 선언했더랬다. 메갈을 후려치려는 것에 대해 '나도 그렇다'고 함으로써 여성 구분짓기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여자를 구분 짓지마, 후려치지마, 편가르지마. 분명 거기에는 메갈리아 사이트에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여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의 낙인찍기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은 스스로를 메갈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이 343 선언의 343명 모두가 '정말' 다 낙태를 했을까? 여기에는 분명 낙태를 한 사실은 없지만, 이 선언에 함께하고자, 임신중단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오욕을 뒤집어쓰는 여자들과 함께 하고자 기꺼이 나선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랬다.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 343명의 지식인 여성이 자신의 낙태 경험을 잇달아 밝히며 투쟁에 힘을 실었다. 이 여성들의 선언은 1971년 [누벨 옵세르바퇴르]라는 진보 잡지의 표지를 차지하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제2의 성]의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이 선언에 함께했는데, 프랑스가 낙태권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은 사실 낙태 경험이 없다고 밝혔다. 343선언에 동참한 여성들이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창녀 343'으로 불리던 때였으므로, 경험이 없더라도 그 멸시를 나누어 갖겠다는 뜻에서 동참한 것이었다. (유럽 낙태 여행, p.32)









여성들간의 연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에서 시몬 베유는 여성 연대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물론 믿습니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주요한 문제들 앞에서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연대를 만들어 냅니다. 직장 생활에서 일어나는 경쟁을 모른 체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서로 돕는 정신이란 무엇보다도 자연적으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성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다.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늘 좋아합니다. 유럽 의회에는 여성 의원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고, 이들은 매우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정무에 참여합니다. 그들은 여성인권위원회의 설립과 위원회가 내놓는 법안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차별과 전통 때문일까요? 여성에게 남성과 다른 가치체계, 다른 우선순위, 다른 행동, 다른 관심시가 존재하기 때문일까요? 함께 어울려 살기에 여성들은 훨씬 더 용이합니다. (p.118-119)




이 책이 끝날 때까지도 시몬 베유는 멋지다.



시몬 베유는 90세가 되기 2주 전인 2017년 6월 30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아들 장은 7월 5일 공식 행사에서 "어머니께서 제 머리에 물을 끼얹은 것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했다. 베유가 아들의 여성혐오적 발언에 넌더리를 내며 그의 머리에 물병에 들어 있던 물을 부어버린 것이다. (p.139)



하하하하. 여성 혐오적 발언이라면 아들이라고 넘어갈 수 있으랴. 물을 끼얹어 버린 어머니 시몬 베유라니. 너무나 근사하다!!



다시 한번 언급하자면, 9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는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준비 운동 차원에서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를 읽었다. 자, 다음 주에는 본격적으로 미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빠샤!!

















그런데 주말이 다 가버린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나는 이제 자야한단 말인가...



낙태 수술을 즐겁게 받는 여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그저 여성의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성에게 낙태는 비극이고,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 P26

저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들은 우리와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하곤 합니다. 우리 역시 우리가 길러지던 방식과 다르게 그들을 길러냈습니다. 젊은 세대는 다른 세대와 같이 용감하고, 열정과 헌신을 다할 줄 압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부디 신뢰합시다. - P53

여성이 위험을 무릅쓰고 위협을 감수하며 문제를 해결할 때, 이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거나 다른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늘 그랬습니다. 여성들은 임신 중단을 하는 다른 여성을 도왔습니다. 때로는 도움에 금전적인 보답이 따르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가 순전히 연대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습니다. - P59

법조계에 여성들이 진입한 덕분에 임신중단을 둘러싼 논쟁이 발전할 수 있었어요. 피임에 대한 논쟁도 떼어놓을 수 없지요. 1920년 피임 관련 법조항을 보면 정말 믿을 숙 없을 정도로 말이 안됩니다. 의사를 포함한 그 누구라도 여성에게 피임에 대해 조언을 하는 일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었어요. 월경주기를 계산하는 오기노 법이나 기초 체온 피임법 같은 것도요. - P65

오랫동안 이 문제를 교회와 전통의 영향이라 설명해 왔지만 저는 임신중단보다도 피임약의 발명이 남성들을 더 불안케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섦명하면 좋을까요? 모성의 역사에서 피임이란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할 때 아이를 낳는다‘ 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새로운 발상 이었던 겁니다. 피임약 덕분에 여성은 자립할 수 있게 되었고, 재생산을 결정하고, 심지어는 남성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아이를 낳을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있어 역사상 큰 전회라 할 만 했어요. 오랜 과거부터 재생산을 주도하는 쪽은 남성이었는데 피임약의 등장으로 이 문제에서 단절된 거니까요. 많은 남성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했습니다. 박탈감을 느꼈고, 불안에 휩싸였어요. 피임약이 남성에게서 남성성을 앗아갔기 때문이죠! 이는 남성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 P66

당시 무척이나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했던 제 부처에서 두 명의 탁월한 여성 법률가와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한 명은 최초의 여성 파리고등법원장인 미리암 에즈라티였고, 다른 한 명은 유능한 국가 고문이었던 콜레트 멤이었습니다. 우리 셋은 무척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셋의 입장은 같은 선상에서 만났습니다. 그건 바로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이 오로지 여성 자신에게 돌아가야 하며, 임신중단 수술이 반드시 의사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기준을 충족하고, 실질적인 적용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적합한 전략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처 간 긴밀한 협업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죠. - P84

임신중단을 선택한 여성들이 안도한다고 하더라도 임신중단 수술은 본디 심리적 외상을 유발합니다. - P89

임신중단 수술을 유대인 학살에 비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습니다. 남성으로 가득했던 회의장에는 위선이 넘쳐났습니다. 회의장에 있는 일부 남성들은 은밀하게 자신의 애인이나 지인이 임신중단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시술소의 주소를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 P93

베르나르 퐁은 농촌에서 의사 일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외젠 클로디우스-프티는 기독교적 인도주의 정신으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에 다른 의원들은 이 법안이 방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위선에 종지부를 찍고 실질적인 고통을 경감하는 조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P95

이렇게 부적절하고 민주적이지 못한 역할극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면 당사자라고 해도 수치스럽게 여기리라고 생각합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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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9-09-1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석 같은 페이퍼다. 역시 내 친구! ♡

다락방 2019-09-11 14:14   좋아요 1 | URL
히히 고마워 ♡

단발머리 2019-09-1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 같은 페이퍼에요 2.
전 이제야 봐서요.
숨겨져 있다가 이제서야 발견한 보석 같은 페이퍼에요!!

다락방 2019-09-16 09:45   좋아요 0 | URL
어릴적에 한 동네 사는 친구가 오래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거든요. 하루는 저의 엄마랑도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제 친구가 낳은 아이를 데리고 잠깐 놀러오셨더랬어요. 그 때 그 아이가 세 살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 아이는 눈이 보석이야, 참 보석같아.˝

단발머리님 댓글 읽으니 그 날이 생각나요.
:)
 
















나는 본성이 오만한 사람이다. 베이스가 오만이야. 어제 아침에도 친구와 이에 관해 얘기했지만, 본성이 오만한 자인데 가끔 겸손을 배울 때가 있다. 수시로 겸손을 배워서, '아아 내가 오만했구나 이렇게 오늘도 겸손을 배운다' 하지만, 허구헌날 그 겸손을 배우다가만 끝난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오만했는데, 내가 오만했다는 사실을 또 잊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 책이 그리고 이 저자가 매우 좋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왔지만, 사실 이 저자와 이 책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책을 펼쳐서 언제나 그렇듯이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읽었다. 작가소개에서 그가 서울대를 나오고 현재 변호사이며 장애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 그런 사람이구나.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초반부터 참 좋구나, 읽으면서 60쪽쯤 읽었을 때였나,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러니까 내가 다 아는 이야기, 내가 늘 생각하는 이야기, 내가 늘 말하는 이야기들 이었다. 특별할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저 부끄러웠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읽고 넘겼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오만한 나를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구나, 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나 역시도 '오, 장애인인데 (장애를 극복하고) 서울대도 가고 변호사도 했구나, 치열하게 살았네' 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자각했다. 내가 그랬다. 그가 서울대를 나온 것 그리고 변호사를 하게된 것에 '장애인인데도 불구하고' 를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그랬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약자의 편에 서고자 말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자고 말하면서 그러나 내 안에 약자에 대한 혐오감과 얕봄이 있었던 게 아닌가. 오늘날의 나를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부끄럽지 않을지 물어본다고 하지만, 실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해 내가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질문한 적이 있던가. 나 역시 시혜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책을 읽는 일은 이래서 좋고 이래서 필요하다. 나는 자꾸 내 본성대로 돌아오려는 인간이지만, 이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아니야, 라고 나를 채찍질할 수 있다. 아니야, 겸손해져, 겸손해져, 겸손해져야해.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나의 옳음이 모두의 옳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책이 알려주곤 한다.



이 책은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좋은 책이었다. 생각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인용문을 가져오자면 페이퍼가 아주 길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아쉬운 지점도 있다. 이건 저자의 성격이나 성향에 관한 것이니 그것이 '단점'이 될 수는 없겠지만, 또 독자로서 작가에게 갖는 아쉬움과도 거리가 좀 있지만, 나는 이 책이 그리고 이 저자가 지나치게 선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옳은(politically correct)것을 지향하는 것이야 아마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그리고 선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뭐랄까, 이렇게까지 선할 필요는 없잖아, 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거다. 사회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 모두들 이렇게 깊게 생각할 수 있는걸까, 싶을 만큼 저자의 사고는 매우 깊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너무 선하다. 이것은,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단점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내가 느끼는 다른 인간의 선함에 대한 아쉬움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선하다고 믿고 인간이 인간을 결국 구원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선한 건 좀 .. 음.. 답답하단 말이야.




인상적인 구절들을 밑에 밑줄긋기로 올릴테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였다.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것.



예를 들어 현오는 X라는 축구팀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X팀이 실력은 별 볼 일 없어도 경기 중에 절대로 반칙을 하지 않고, 늘 상대팀과 팬들을 존중하며, 주어진 조건하에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현오는 자신이 X 축구팀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이유인 그 태도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가급적 일관되게 유지하려 할 것이다. 티 나지 않아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수는 고득점을 맞거나 최고 연봉을 받지 못해도 반칙을 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삶에 무게를 두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현오는 세상에 관한 여러 가치관, 대응 방식, 태도를 가능한 한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 자기 서사self-narrative를 만든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본래 불공정을 싫어하고 성과보다는 과정에 중심을 두는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에서 비롯한 것이니 삶의 모든 면에서 같은 태도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 데이빌 벨레만J. David Velleman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과거 인생을 돌아보며 구축한 가상의fictional 자아는 그 이야기의 일관성,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래의 우리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자기 서사의 신뢰성을 위해 그에 맞춰서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가상으로만 존재하던 자아는 실재reality 가 된다. 현오는 자신의 아들이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지만, X팀을 좋아하면서 자신이 일관되게 유지해온 특정한 가치관, 지향, 삶의 태도와 그에 근거해 지금까지 만들어온 이야기(자기 서사) 때문에 절대로 아들의 컨닝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실제로) 된다.

이런 자기 서사 만들기는 별 생각 없이 선택하고 행동한 것들을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며 진행되기도 한다. 나는 장애를 중심에 놓고 내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내가 연극을 좋아하고,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즐겨 보고, 2006년 가을쯤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져 있던 이유는 내 장애와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관련이 있다 해도 아주 적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일어났던 개별 사건들을 장애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한다(연극을 좋아하는 건 어차피 장애인으로서 이질적인 시선을 받는 처지라면 그 삶을 주체적으로 관객의 시선 앞에 두고 싶기 때문이다 등등). 이런 해석을 통해 내 인생에 등장했던 각각의 순간들, 사소하거나 중요했던 하루하루를 커다란 의미의 줄기 아래 재배치하여 나만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간다. 이 인생 이야기는 앞으로 내가 취할 선택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p.180-182)




위의 글에 동의하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제이슨 스타뎀'과 '안젤리나 졸리'가 생각났다. 나에게는 멘토도 없고 딱히 누군가를 멘토로 삼고 싶은 생각도 없으며 누군가의 빠가 되는 성질도 내게는 없다. 워낙에 티비를 잘 보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좋아하는 연예인이랄 것도 딱히 없다. 그런데 제이슨 스타뎀과 안젤리나 졸리는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또 오래 좋아하고 있다. 제이슨 스타뎀에 대해서라면 영화에서 다른 등장인물에게 다치지 않았냐고 묻는 장면에서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완전 쑝 가는 장면이었지. 오래전에 알라디너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날 때면 왜 안젤리나 졸리를 좋아하냐는 물음을 받곤 했다. 그 때마다 '강해보여서', '남자가 없어도 저 혼자 잘나고 잘 살 것 같아서' 라는 답을 했더랬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는지가 나를 말해줄 수 있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지도 나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일테다. 현실속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로 판단하는 영화배우들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점들을 딱히 좋아한다, 그 점에 끌렸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제이슨 스타뎀의 약자를 보호하려 하는 강인함, 안젤리나 졸리의 저 혼자 잘난 강인함. 나는 그런 것들에 끌리고 그런 것들에 끌린다는 건, 필연적으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나는 쭉, 강함을, 강인함을 보고 있구나.


이것이 나의 결핍이요 이상이구나. 나는 쭉 강인함을 목표로 살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구나. 내가 어떤 이미지로 누구를 좋아하느냐가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겠구나,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겠구나. 내가 약자를 보호하는 강인한 매력에 끌려 제이슨 스타뎀을, 스스로의 강함이라는 매력에 끌려 안젤리나 졸리를 좋아하는 것은, 나만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는데 어떤 줄기로 배치가 되는 것이겠구나.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가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큰 일은 아니겠지만, 그 배우들을 '왜'좋아하는 지는 큰 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처럼 내가 그들을 왜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테니까. 바로 그 지점들이 내 안에 있어서 나를 형성하고, 나를 형성하는 또 다른 것들과 한데 묶이고 섞이고 엉켜서 지금의 내가 되었겠구나. 내가 현실에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할 때는 '왜' 사랑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댈 수 없을 때가 많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어떤 팀을 좋아하고 어떤 배우를 좋아할 때 그 이유를 명확하게 댈 수 있는 지점은 나를 말해줄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런 내가 걸어와 쌓아둔 모습일테다.





어제는 다정한 알라디너를 만났다. 오래 이곳에서 알고 지냈던 친구.

그 친구는 나의 글을 아주 오래전부터 보아왔는데, 내가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글에 좋아요와 댓글이 확 줄어든 것에 대해 언급했다. 내 눈에도 보였으니 네 눈에도 보였겠지? 친구는 내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댓글들도 많이 달려서 지금은 비로그인 댓글 막아둔 상태고, 친구취소를 한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요와 댓글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고. 나를 오래 보아온 친구들 또 알아왔던 친구들은 시간이 갈수록 나의 글쓰기가 더 좋아진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내 글의 좋아요 갯수는 이제 아주 적다고. 예전의 나는 대부분이 좋아하는 글을 써서 좋아요를 잔뜩 받는 알라디너였는데, 지금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좋아요 갯수에 대해서는 버리고 가야할 것 같아, 라고 나는 말했다. 왜냐하면,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러자 친구는 내게 말했다.


"돌아갈 수 없지, 너는 이제 너무 멀리왔지."

"응, 나 너무 멀리 왔지."




지금의 내가, 너무 멀리와버린 내가,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도 돌아갈 마음도 없는 내가, 내가 바랐던 나일 것이다. 내가 추구했던 나, 내가 되고자 했던 나. 나는 결국 이 방향으로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아마 그 방향으로 계속 걸을테고. 그러고보면 참 한결같았다. 오래전부터 글에 대한 대화를 지인들과 나눌 때면 '모두가 읽고 좋아할만한 베스트셀러를 쓰기 보다는 소수라도 나를 찾는 고정적인 사람들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나는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있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참 뭐랄까, 잘 살아... 나는 내가 썩 마음에 든다. 오늘 먹겠다고 어제 앙버터 사서 사무실에 둔 것도 너무 마음에 들어. 어제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텀블러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와서 앙버터랑 먹고 있으니, 크- 이 순간이 천국이다. 만세!!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을 이번 9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로 선정해놓고서는, 시몬 베유 책 세 권 쓸어담아 버린 나도 너무 멋지다. 일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을 읽을 생각이지만, 얇은 시몬 베유로 기초를 다지고 가야지. 아, 너무 멋져. 난 다 계획이 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막간 공지를 하자면, 10월-11월에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시도할 계획이고, 11월에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계속했던 회원들과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 일단 참석이 확정된 멤버는, 꾸준히 참여해주고 계신 쟝쟝님과 블랙겟타님. 아 진짜 이 두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속도는 다르지만 계속 꾸준히 자신들의 속도로 따라오고 계신다. 진짜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랑 같이 열심히 페미니즘 책 읽고 글 써주고 계시는 단발머리님. 사랑합니다. 나의 구원... ♡



목요일이고, 오늘 핫요가 갈까 말까, 왜냐면 어제 친구 만나고 늦게 들어가서 오늘 피곤해... 가지말까? 앙버터와 커피를 마시고 있고, 책 읽는 거 글 쓰는 거 너무 좋다고 진짜 오천번쯤 생각하고 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제이슨 스타뎀과 안젤리나 졸리 너무 좋아! 꺅 >.<





우리가 오믈렛을 좋아한다고 해서 오믈렛이 우리에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이끌릴 때 그 사람이 나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에게 이끌리고, 내가 더 크게 이끌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상대방도 나에게 더 강하게 이끌린다. 이처럼 서로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반응은 더더욱 크게 확장되고, 각자의 반응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나하로 수렴된다. 이러한 인간적 상호작용의 특징을 성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 P68

2014년 서울변방연극제에 오른 연극 <독립사건>은 짧고 코믹하지만 의미심장한 상황을 설정한 작품이다. 공연이 시작하면 무대 위에 휠체어를 탄 여성 물리학 교수가 등장한다. 천재 물리학자인 이 교수는 아직 그 존재가 이론적으로만 가정되는 자기단극자라는 입자를 찾기 위해 평생을 연구하지만 실패한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론이 완전하지 않다는 좌절감에 자살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살하기 직전, 사람들이 결국 자신이 "장애를 비관하여" 죽었다고 평가할까 봐 걱정한다. - P82

저는 생각랬습니다. 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명성과 부, 학자로서의 업적, 나를 존경하는 제자들, 내 저서들 ……. 이런 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아무리 교수라도 장애를 극복해낼 수는 없구나. 그리고 신문과 찌라시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명문대 장애인 교수, 장애를 비관하여 자살." 똑똑히 들으세요. 제가 자살하는 이유는 나의 장애, 내 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고층 빌딩 위에서 나체로 자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알몸을 보고 사람들은 내가 내 몸에 대해 어떤 열등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나체로 서 있는 사실을 전혀 불안해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길 바라면서. - P82

뉴욕대 로스쿨 교수 켄지 요시노Kenji Yoshino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同化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린covering‘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생리나 출산 등)을 티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예다. 켄지 요시노는 커버링에 대한 법적인 대응 방법을 고민하면서, 그중 하나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reasonforcing conversation‘를 제안한다. 나는 이것으로 개인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법체계를 다소나마 개선할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199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는 간단한 개념이다. 한마디로 "네가 가진 장애, 성별 등을 티 내지 말라"고 커버링을 요구하는 쪽에서, 왜 그것을 티 내면 안 되는지 엄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청기를 좀 가려줬으면 좋겠어요"라고 어떤 부서의 과장이 청각장애인 부서원에게 지시했을 때, (보통은 과장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겠지만)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마 "사내 분위기에 위하감을 주니까"라거나 "고객들이 불편해하니까"등의 막연한 이유를 들 것이다.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요구를 할 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원래 여기서는 이렇게 해"라고 말하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 P200

하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에서는 다수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그것을 말한 ‘주류 집단‘ 쪽에서 그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철저히 제시해야 하는데, 켄지 요시노는 법이 이를 강제하거나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까지 선생님들은 추운 겨울에도 교복 위에 겉옷을 못 입게 하거나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거나 묶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반감을 가진 아이가 문제를 제기하면 "너는 꼭 그렇게 하지 말라는데도 머리를 그런 스타일로 길러야겠어?"라는 질책이 돌아왔다.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원칙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뒤바꾸라고 요구한다. 즉 선생님이 학생의 질문에 답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선생님한테는 내 머리 스타일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 P200

활동지원서비스를 받고 싶은 장애인이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 팔과 다리를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어 밥을 먹거나 용변을 처리하는 일 정도는 가능하다고 하자. 그렇지만 그는 "머리에 제품을 바르고 넥타이에 짙은 회색 슈트를 입고 외출하고 싶어서"활동지원인을 신청했다. 그의 손과 발은 넥타이를 맬 정도의 작업을 하기에는 장애가 심하다. 법은 의사와 국민연금공단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아니, 왜 꼭 그렇게 넥타이에 슈트를 고집하십니까? 그 정도에 활동지원인을 제공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활동지원인 보조를 받아 넥타이를 매고 슈트를 입겠다는 게 국민연금공단에게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 P201

‘장애 극복‘, ‘불굴의 의지‘ 같은 말은 작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장애인을 언론이 보도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식어이다(그렇기 때문에 앞서 보았듯이 정신장애인이나 중증 발달장애인은 ‘장애 극복‘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살아라‘, ‘희망적으로 생각하라‘며 현실을 넘어설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장애인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어줄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팔다리가 업이 태어나 세계를 돌아다니며 ‘동기 부여‘ 전문가로 활동하는 호주의 장애인 닉 부이치치Nick Vuijicic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아무리 낙관적이고 강인한 정신을 가진 이라도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고, 화장실을 가지 못한다면 삶에 ‘동기 부여‘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루종일 오줌을 참으면서 희망을 가질 수는 없다. 오줌을 참을 때 필요한 건 희망이 아니라 화장실이다. - P211

"우리나라에서는 너희가 버스랑 지하철을 못 타잖아. 이게 당연한 걸까?" 라고 물었다.
"장애인이니까 못 타죠."
어느덧 호기심이 사라진 시큰둥안 대답으로 아이들이 맞섰다.
"버스는 대중교통이잖아. 장애인은 대중이 아니야?"
"……."
"대중교통이면 휠체어를 탄 사람이든 목발을 짚은 사람이든 모두 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일본은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냐는 ‘현실주의자‘의 반론도 나왔었을 법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10대의 장애 청소년들에게 그 말은 꽤나 타당하게 들렸던 것 같다. 우리는 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이 대화를 한동안은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에 갈 무렵 ‘장애인은 대중이 아니야?‘라는 의문이 슬며시 다시 떠올랐다. 어떤 생각은 순식간에 마음 전체를 점령하지 않는다.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꺼낸 말도 그 시기 우리 사회 여러 곳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채 때를 기다리던 어떤 생각의 일부였다. - P216

아이들이 별 반응을 못하자, 선생님은 수업 내용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너희가 버스를 못 타는 게 너희 잘못은 아니야."
특정한 세계관은 내밀하고 조용히 세상에 퍼져가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권리의 언어로 결정結晶되어 사람들의 말에 담긴다. 말은 흐르고 흘러 눈앞에 등장하고, 몸에 감촉되는 ‘물질‘이 된다. - P217

장애인들은 상징적인 헌법 소송을 제기하고, 거리로 나와 휠체어를 서로 연결해 서울의 시내버스를 점거하고, 지하철 선로에 휠체어를 묶어 전동차를 세웠다.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에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TV에 나오는 장애인을 보며 불쌍하다고 집을 열던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병신‘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동권운동의 가장 전면에 나섰던 중증 장애인 교육기관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의 교장 박경석은 그날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 P228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P228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발명하고, 이를 법제도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 했던 것이다. 이는 권리가 법제도 안에서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인정되어야만 실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 P231

그러나 단지 페티시즘에 그친다면 그 욕망은 꽤나 자극적일지언정 우리를 개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김원영의 다리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다리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저 욕망의 대상을 교체하면 그만이다. 우리의 ‘몸‘을 상대방이 열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몸을 가진 존재 그대로, 개별자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 타인의 몸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출발해 그 욕망이 어디로 나아가는가이다. 몸에서 시작해 그 몸을 가진 개별자에 대한 사랑으로 에로스가 확장될 때 그것은 우리가 닿고자 하는 ‘사랑‘의 이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 P267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그 사람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서 그가 보여준 미세한 떨림과 다양한 표정, 긴장했을 때 움츠러들던 어깨, 해질 녘 그림자가 진 옆 얼굴, 지쳤을 때의 목소리, 들떴을 때면 쭉 펴지던 목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힘껏 들어 올릴 때의 팔뚝 등이 하나로 밀도 있게 통합되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 내 눈에 들어오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덧씌워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홥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 P276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 P261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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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9-05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사랑스러운 글이네요. 여기 저기 뭉클한 지점이 있어 비도 오는데 마음이 더 촉촉해 지는 것 같아요.


지금의 내가, 너무 멀리와버린 내가,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도 돌아갈 마음도 없는 내가, 내가 바랐던 나일 것이다. 내가 추구했던 나, 내가 되고자 했던 나. 나는 결국 이 방향으로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아마 그 방향으로 계속 걸을테고.


우리 삶이 가끔은 우리의 예상과 달라서 당황스러울 때도 조금 걱정스러울때도 있지만, 바랬던 자신의 모습을 찾은 다락방님을 응원합니다. 너무 멋지고 너무 근사하고.... 폼 납니다^^

다락방 2019-09-06 16:59   좋아요 0 | URL
아이고, 단발머리님. 이렇게 아름다운 댓글이라니요. 단발머리님이 알라딘에 계셔서 제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도 함께 해주셔서 참 감사드리고 말이죠. 우리 계속 열심히 합시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순간 순간 더 끌렸던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겠지요. 그것이 자기 삶의 방향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단발머리님과 좋은 친구가 된 것 역시, 제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만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보여집니다. 헤헷 :)

공쟝쟝 2019-09-06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아요! ( 근데 좋아하는 책은 닳아질까봐 다 안읽고 아껴두는 타입) 그래서 읽다 말앗지롱요~!
다락방님이 매번 겸손을 되뇌이신다는 말이 왤케 귀엽죠???ㅋㅋ 그리구 저는 다락방님이 페미니즘 글 올리기 시작한 무렵부터 글을 봐와서 이처럼 핵인싸(!!)신지는 몰랐지만, 더할나위 없이 솔직하고 때로는 흥분(!)하는 글들 정말 좋아합니다! (읽는 소수)
마지막으로 갑자기 제 아이디 나와서 깜놀!!!!ㅋㅋㅋㅋㅋㅋ 11월에 만나요~ 히힛

다락방 2019-09-09 15:46   좋아요 0 | URL
핵인싸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저랑 좀 동떨어진 단어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또 흥분하면 대마왕 아니겠습니까. 흥분이 바로 저를 말하는 것이지요. ㅎㅎ

11월에 만나요, 우리. 만나서 실컷 먹고 마시도록 합시다! 꺅 >.<

2019-09-0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9-09-1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꽤 예전부터 눈팅족으로서 다락방님 글을 같은데.. 하지만 그때는 북플자체를 거의 안 들어올때라 기억이 잘.. (죄죄송함니다ㅠ)
오히려 집중(?)해서 본것은 페미니즘대한 글을 쓰기 시작할때려나요.. 그 소수중에 저도 한명이 되겠네요. (๑◔‿◔๑)

아! 맞다 그리고요. 어제 학교도서관에 <여자는 인질이다>책 반납하려고 있었는데 반납된 책 쌓인곳에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가(두둥!) 보이더라구요. ‘어떤 훌륭한 학생이 빌린거야?’ 라고 잠시 생각했었네요
( ˃̶᷇ ‧̫ ˂̶᷆ )

다락방 2019-09-10 11:29   좋아요 1 | URL
아니, 그게 왜 죄송합니까, 블랙겟타님! ㅎㅎ

도서관 반납된 책 중에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가 있었다니, 아아.. 정말이지 훌륭한 도서관이요 훌륭한 대출자였습니다. 누가 그렇게 훌륭한 책을 읽고 반납했을까요? (읽고... 반납한 거 맞겠죠? ㅎㅎ)

자자, 9월 도서는 준비해두셨습니까? 저는 연휴부터 읽을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 마음은 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하하. 빨리 읽어서 9월 도서도 9월 안에 마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블랙겟타 2019-09-10 21:41   좋아요 0 | URL
9월도서는 아직 못샀는데여.. ㅠ 추석지나고 신청하려구요. 그래도 학교도서관에 빌릴수는 있을 것 같아서 추석동안 우선 빌려서 읽어볼 예정입니다! (๑•̀ㅂ•́)و✧
네! 저도 9월안에 읽을수있도록 ^^

허랜드는 도서관에두 없구 오늘 서점 갔는데도 없었는데요. 추석지나구 알라딘에서 사서 읽을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