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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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것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나 무엇에든 '시작'이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미스터리의 왕국이라 감히 이름붙여주고 싶은 일본 미스터리들 역시 시작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일본 미스터리의 시조는 '구로이와 루이코'로 처음으로 '탐정소설'이라 할 수 있는 <법정의 미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이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그 줄기가 뻗어나기 시작한 것은 '에도가와 란포' 그리고 '요코미조 세이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의 '일본 미스터리'의 시작은, 실은 만화 <명탐정 코난>이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이 그렇게 많이 소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찾아 읽었을 것 같지도 않다. 그 때만 해도 셜록 홈스의 모험에 듬뿍 빠져 있을 때였는데,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소년과의 만남은 뒤늦게 일본 미스터리를 탐독하면서 '에도가와'라는 성을 란포에게서 따왔구나 하는 것, 그리고 뒤늦게 코난의 책 날개에 소개되고 있는 수많은 일본의 명탐정들을 발견하고는 아하, 이 때 부터 내가 이들과 이렇게 접촉(?)을 했었구나, 하고 굉장히 즐거움을 안겨주곤 했었다. 2007년 <용의자 X의 헌신>의 유가와 교수를 만나면서 일본 미스터리 그 자체에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그 때 부터 읽은 만화책에서는 꽤나 낯익은 탐정과 형사가 소개되어 우와, 나도 이 사람 알아! 하고는 괜히 뿌듯해했던 기억도 난다.ㅋㅋ

 

그리고 또 하나, 사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탐정 하면 역시 코난과 김전일(아니 최악의 연쇄살인마인가?)이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라니. 스스로 명예를 만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할아버지 실컷 팔아먹고는 내려지는 결론이란 연쇄살인마라니.ㅋㅋ 어쨌든 긴다이치 소년, <소년탐정 김전일>을 읽으며 그놈의 할아버지가 누구길래? 긴다이치 코스케가 뭐라고 이런 자식이 설치고 다니나, 하는 생각도 조금 했다. 그리고 만화책을 만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긴다이치 코스케'란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탐정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 이쯤에서 딴 소리는 그만해야겠다. 어쨌든 그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는 국내에도 이미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정작 나는 그의 작품을 단 한 권 읽어봤을 뿐이다. 그리고 이번, 전설의 시작이자 소년 김전일 그리고 긴다이치 코스케의 원점, <혼진 살인사건>을 만나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이렇듯 긴다이치 코스케의 시작을 만날 수 있게 되다니, 상당히 기쁘구만.





이번에 새로 출간된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은 이미 출간되었던 「본진 살인사건」을 다시 정식 완역본으로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두 편의 중편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 「흑묘정 사건」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거두절미하고, 요코미조 세이시는 자신의 첫 소설을 '밀실 살인'으로 시작했다.

본채와 떨어진 별채, 그 길을 막아놓은 덧문 그리고 아무도 걸어들어가지도 나가지도 않은 듯 새하얗게 쌓여 있는 눈. 게다가 굳게 닫힌 문 안에서 신랑 신부는 싸늘한 시체의 모습으로 참혹하게 발견된다. 살인 도구로 썼던 일본도는 전혀 상관 없는 낯선 장소에 툭 떨어져 있을 뿐더러, 비명과 함께 들려온 의문의 거문고 소리는 무엇인가.

 

 

이번 책에 실려있는 세 편의 소설 중 두 편은, 미스터리 소설가 Y의 시점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을 담아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소설가 Y씨라는 게 요코미조 세이시라는 것으로, 밀실 트릭을 사용한 미스터리를 쓰고 싶다,라는 욕망을 소설의 첫머리부터 강력하게 내비치며 말문을 뗀 그는, 밀실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미스터리들을 언급하며 스스로의 밀실 트릭 역시, 범인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며 자신감을 내비친다. 과연 그가 선보인 밀실 트릭은 어떤 것이었을까?

 

언제나 그렇지만, 물리적인 밀실 트릭을 파헤치는 것은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그랬나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실은 대다수의 독자가 겪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사실 '밀실'이 등장한 사건이 벌어지면, '어떻게' 대신 '왜'가 상당히 중요해지는데, 긴다이치 코스케의 추리는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

신랑 신부를 살해한 범인은 어째서 방을 밀실 상태로 만들어 둘 수 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보수적인 명문가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이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일본적인 특색이 짙은 이 「혼진 살인 사건」은, 그렇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함께 잘 녹여낸 밀실 트릭과 더불어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미스터리 소설 문답'을 통해 요코미조 세이시의 미스터리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그러나 개인적으로 마지막은 좀 과했다. 굳이 그럴 것 까지야.). 그 모두가 요코미조 세이시의 미스터리 소설, 전설적인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의 첫 출발점으로 '밀실 트릭'을 내세우며 산뜻하게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 역시 비슷한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전쟁 이후 눈을 잃고 사람이 뒤바뀌어 돌아온 혼이덴 가문의 장남 다이스케의 몰락을 그려내고 있다.

이 중편의 경우 일반적인 서술자의 서술 대신 예리한 소녀의 편지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고 있는데, 그렇기에 섬세한 소녀가 눈을 잃은 오빠의 기이한 행동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여실히 드러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전후를 배경으로 어느 시골의 명문가 사람들의 비극을 상당히 섬세하게 그려냈다.

 

「흑묘정 사건」은 역시 또 소설가 Y씨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직접 자신의 전기를 쓰고 있다는 그의 소문을 듣고 긴다이치 코스케가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밀실 살인, 그리고 <옥문도>에서의 기이한 3중 살인(이 맞나?;;)을 경험했으니, 언젠가는 꼭 '얼굴 없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이야기를 내비친 그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흑묘'라는 술집에서 벌어진 얼굴 없는 시체 사건을 파헤치면서 숙원을 이루게 된다.

대놓고 '얼굴 없는 시체'ㅡ그러니까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바꾸어 은폐하는 등의 공작ㅡ이 등장한다고 공언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는 「흑묘정 사건」은 또다시 「혼진 살인사건」과 마찬가지로 소설가 Y씨의 미스터리에 대한 견해를 듬뿍 표현해 주고 있다. 전형적인 미스터리 트릭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조금씩 이걸 사용할테니 속지 말고 지켜보라는 듯 슬그머니 문제를 내어놓는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역시 더벅머리의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은 압도적이다.

 



그러나 역시, 확실히 예전에 쓰여진 미스터리 소설인 만큼 상당히 전형적인 트릭을 부여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탐정의 역할 역시 상당히 전형적이다.

혼자서 뭐 하나 툭, 숨겨두고는 그래그래, 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 마지막에서야 이렇게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가는 점은 특히 더더욱.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비장의 연극적인 요소를 준비해 두고 청중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Y씨는 그래봬도 꽤 연출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라고 평하고 있는데, 김전일의 피는 여기서부터 이어진 것이었나보다. 음.

 

하지만 확실히, 다양하지 못했던 '살인사건의 동기'를 일본을 배경으로 그려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후의 혼란한 사정과 그를 둘러싼 애증의 화살표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는, 바로 그 위대한 출발점이 되어준 것이다.

 

 

 

 

일본 미스터리 관련 참고 : http://blog.naver.com/morush/60008297542,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카페의 예전 게시글이네요. 그러나 원문은 없어졌습니다..T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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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도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4
다나카 요시키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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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에서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것 같은데

로마도 마찬가지고 망하는 나라들을 보면 공통점이
항상 계층간의 격차가 심화되고 기득권이 과보호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부패가 만연한 그런 것들이 항상 나라를 망하게 했던 거죠.

그런데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면 그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데,
항상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착각에 많이 빠지더라고요.

지금은 우리가 옛날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현명하기 때문에
똑같은 바보같은 실수는 안 한다는 그런 자신감과 오만함 착각. 그런게 역사를 반복시키는 것 같아요.

지금 현재 우리나라가 지난 10년간 이런 격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벌어져 있는데요.
이 상태가 계속가면 저는 공멸할 것 같아요.

문제를 풀기 위해서 가장 선제 조건은 그 문제 인식의 공유거든요.
문제가 있다고 같이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면 문제 해결은 아예 시작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문제가 있다는 걸 함께 공유해보자는게 이런 강연의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 MBC 스페셜 : 안철수와 박경철 2 中

 

 

 

 

얼마 전 방영했던 MBC 스페셜에서 안철수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토록 가슴에 사무칠 수가 없었다.

인간은 어째서 이렇게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것인가. 역사를 알고 있으니 같은 짓은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오만 때문이다ㅡ.

다나카 요시키의 SF 소설 <일곱 도시 이야기> 속 일곱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그런 것이야. 권력이라는 녀석은 타인을 합법적으로 희생시킬 수 있는 힘이지. 따라서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거고. 

-p.162

 

 

때는 서기 2190년, 지구에서는 지축이 90도 뒤바뀌어 북극과 남극이 적도로 이동하는 '대전도'로 인해 인류의 대부분이 멸망하고 만다.

그러나 달에 머물고 있던, '월면도시'에 머무르고 있던 2백만 명의 남녀는 이 참사에 이어 지구의 다양한 문제들ㅡ인구 과잉, 빈곤층 증대 등ㅡ을 해결하고 이번에야말로 건실한 인류의 역사를 다시 써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지구에는 7개의 도시가 건설되었고, 이들로 하여금 월면도시를 넘볼 수 없게끔 지상 500미터 이상을 날아오를 수 없도록 하늘길을 막아버리고 만다.

각 일곱 도시는 나름대로의 지형을 이용해 도시를 발전시켜나가기 시작하고, 필연적으로 권력을 잡아 각 도시는 물론이거니와 군대를 이용해 각 도시를 모두 점령하려는 움직임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각 도시의 괴짜 사령관들, 그들의 지략으로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까? 그들은 끝내, 그저 정치인들의 도구로서 이용당하고만 있을까?

 

 

 

 

독재자의 망명과 그의 복수에 맞서 격돌하는 「북극해 전선」, 독재자의 지배 아래 적당한 구실로 자신만만하게 쳐들어갔으나 끝내 「폴타 니그레 섬멸전」에서 참패를 하기도 하고, 독재자의 지배에서 벗어나도록(을 핑계로 각 도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여섯 도시의 동맹국은 「페루 해협 공방전」에서 열세에 놓인 군대에게 밀려나기도 한다. 변두리의 두 도시 역시 「재스모드 전투」에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한 번의 패배를 곱씹으며 여섯 도시의 동맹국은 또다시 「부에노스 존데 재공략전」에 돌입하기도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일곱 도시 간의 싸움에서는 침공한 쪽이 반드시 패배하고 있군.

원숭이라 해도 같은 미로를 가면 세 번째에는 바른 출구에 도착한다는데, 공직에 있는 인간들은 그 수준조차 안 되는 것 같아.

-p.196

 

 

 

 

SF 소설, 이라 딱 단정짓기에는 뭔가 많이 아쉽고 부족하다.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판타지와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에서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전투 씬과 전략, 그렇게 각 전투에서 영웅이 되어가는 주요 등장 인물들은, 그렇게 각 전투에서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지만 실은 주변 인물들의 눈총을 받는 소위 '괴짜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 속에는 가시가 담긴 속시원한 한 마디씩을 내뱉으며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하다. 게다가 그 뼈 있는 한 마디가 적절한 비유 그리고 블랙 유머로 가득하다는 것도 이들의 매력이다.

읽는 내내, 이런 표현에 감탄하고 신나게 웃어가며 소설을 실컷 즐겼다.

 

 

 

 

뿐만 아니라, 아무래도 도시 간의 전쟁을 그려내고 있다 보니 이야기의 중심은 그 전투의 묘사로 이어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상당히 통쾌하다. 예전에도 어디선가 이야기 한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전쟁에는 결코 찬성하지 않지만서도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즐겁다. 각자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에서 어떤 유리함을 내세워 적군들을 격파해 나가는지, 그 장면 하나 하나가 상당히 세세하게 묘사되어있어 이를 상상하며 소설을 읽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것이 정작 2190년의 미래를 그려내고만은 있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씁쓸해져 오는 것이다.

 

 

 

 

실은 이런 표현 역시 좋아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상당히 '남성적'인 소설이다. 섬세한 감정 묘사나 심리적인 면모를 그려내기보다는, 상당히 직설적인 대화와 전투를 묘사하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굵직굵직하게 미래 지구의 한 단면과 전투, 그리고 그 곳에서 벌어지는 머리싸움이나 전략은 역시 남자들의 로망에 가깝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것은 역시 나의 편견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이야기, 굉장히 좋아한다.).

 

 

지축이 뒤바뀜으로써 인류는 멸망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새롭게 기반을 다니며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일곱 도시'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실은 이 <일곱 도시 이야기>는 SF 소설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정치를 향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정치인들, 독재자의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우둔한 대중들, 정치인의 도구로서 이용되고 있는 군대까지.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나로서도 노골적이면서도 우회적으로 권력에 물든 노예가 되어버린 이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니까.

 

 

 

놈들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은 놈들의 자유야. 하지만 우리들이 거기에 말려들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p.204

 

 

 

 

지구의 지축이 그대로 기울었기 때문에, 일곱 도시가 세워진 지구의 대륙 역시 지금과 상당히 비슷한 형태다. 다만, 불모지였던 사하라 사막이 어느샌가 풍요로운 아열대 기후의 비옥한 토지로 바뀌었다는 식으로 각 대륙의 풍토가 상당히 달라졌는데, 그 와중에도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할지, 단지 귀찮음 때문이었을지.

지금의 유럽 대륙에 해당하는 '뉴 카멜롯' 시는 과거의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륙의 열강들과 상당히 흡사하다. 여전히 유럽 대륙의 '뉴 카멜롯'과 러시아의 '아퀼로니아'는 아웅다웅한다. 패권 싸움의 중심에 모여 있지 않았던 동남아시아의 섬을 근간으로 하는 도시 '산다라'는 이번에도 역시 한쪽 끝에서 다만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중남미에 해당되는 '부에노스 존데'에는 독재자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는데, 이것 역시 남미에서 벌어진 쿠데타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뛰어난 정치가이자 지략가였던 귄터 노르트와 류 웨이가 망명해 살아가고 있는, 고요함이 조금 엿보일 것 같은 도시 '쿤론'은 인도 대륙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로마인들이 그랬고 서구 열강들이 그러했고 지금의 어느 국가가 그러한 듯한, '역사의 반복'을 또 한 번 그려내며 그 모든 것을 통렬하게 꼬집고 비판하고 있는 다나카 요시키의 <일곱 도시 이야기>.

미래의 지구를 그려내는 SF 소설, 영웅들이 지략을 펼치며 전투를 벌이는 영웅소설, 부패한 권력자를 꼬집고 비판하는 정치소설 등, <일곱 도시 이야기>는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어떤 얼굴을 만나도,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또 한 번 새롭게 기반을 다진 도시의 권력자들은 또 다시 부패하고 대중들은 현실을 외면하는 우매한 모습으로 그려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대중 속에 내가 있는 듯한, 비슷한 역사를 반복해나가는 모습이 참 씁쓸하면서도 그 현실을 꼬집는 시니컬하기 짝이 없는 블랙 유머가 통쾌하고 유쾌하게 다가왔다. 다양한 색채를 비추어주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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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의 항아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클라인의 항아리, 또는 클라인 병(Klein Bottle)이라 불리는 형태는 잘 알려진 '뫼비우스의 띠'의 4차원 형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는, 띠의 안쪽을 걷고 있다 생각했지만 어느샌가 바깥 쪽을 걷고 있더라, 다시 말해서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형태인데, 클라인의 항아리 역시 마찬가지다.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바깥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병의 안쪽에 있고, 안쪽이라 생각했으나 병의 바깥이었다, 그런 식이다.

 

위상기하학적으로 4차원에서는 클라인의 항아리가 완벽한 형태를 띨 수 있지만, 3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형태를 상상할 수 없기에 3차원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형태로 그려낸 것이 바로 병의 주둥이가 병의 안쪽을 뚫고 들어가 바닥에서 만나는 형태다. 이 4차원의 초입체를 독일의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고안했기에 '클라인 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부터 게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게임이 현실이 되는 거지. 가슴이 설레.

-p.48

 

 

오카지마 후타리(岡嶋二人),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두 명이 콤비를 이루어 쓴 작품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 <클라인의 항아리>는 그야말로 클라인의 항아리 같은 소설이다.

한 남자의 독백이자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1989년 이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시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우에스기 아키히코는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어드벤처 게임북의 원작을 응모했지만, 규정에 벗어난 분량으로 인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입실론 프로젝트라는 회사에서 자신들이 개발하고 있는 게임의 원작으로 삼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오면서 회사와의 인연이 생기게 된다. 덕분에 철저하게 기밀에 부쳐지고 있던 프로젝트의 일면을 어느 정도 소개받고 Klein-Ⅱ의 모니터링을 맡게 된다.

게임 사용자의 의외의 움직임을 모두 모니터하고 싶다는 뜻에서 게임 원작자인 우에스기와, 또 다른 모니터 요원 다카이시 리사는 그렇게 K-Ⅱ의 모니터링을 시작한다.

K-Ⅱ는 바로 직원들이 속칭 '클라인의 항아리'라 부르는 기계 속으로 사용자가 들어가 게임을 하는 형태로, 사용자의 몸에 완벽하게 밀착된 스펀지는 게임이 시작되면 사용자의 모든 감각을 현실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준다.

발 밑에서 흔들리는 풀도, 얼굴을 어루만지고 흘러가는 바람도 '진짜'처럼 느껴지는 가상현실 속에서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에스기는 순식간에 이 K-Ⅱ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게임을 하나 둘 클리어해 나가기 시작한다. 반면 다카스기 리사는, 게임의 시나리오를 따라 움직이는 대신 살육전을 벌이며 게임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시작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어느 날,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행동을 한 리사는 그 다음부터 행방이 묘연해지고, 우에스기는 자신의 주변의 현실이 미묘하게 비틀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도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눈에 보이는 광경은 프로젝터가 망막에 비추는 영상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고성능 헤드폰이 보내는 소리요, 신체가 느끼는 진동도 가짜다. 이것은 가상현실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과 똑같았다. 나는 K-Ⅱ가 창조한 이미지 속에 오싹할 정도로 완벽하게 갇혔다.

-p.77

 

 

굳이 미스터리로 분류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범행 동기와 범인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 모니터링이라는 소재와 '가상 현실'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그 속에서 벌어진 실종사건과 과거의 사건들이 하나 둘 어우러지기 시작하면서, 입실론 프로젝트라는 회사의 음모가 하나 둘 밝혀지는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가 상당히 쏠쏠했다.

 

 

 

가상현실에 있지만 그야말로 현실에 있는 듯 감각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게임, Klein-Ⅱ. 그 게임의 모니터링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은, 그렇게 '클라인의 항아리'에서 비롯되기 시작한 일이다. 어디까지가 가상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인가.

가상 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미묘하게 흐릿하게 만든 기발함과 짧게 이어지는 호흡은 이 소설에 엄청난 가독성을 부여했다. 찾아간 사무실은 상당히 수상쩍은 건물에 있지를 않나, 30분 정도의 이동을 하는 동안에도 차창을 모두 가려 철저하게 연구소의 위치를 기밀에 붙인다거나, 리사를 함께 찾아나서게 된 나나미라는 캐릭터의 등장, 그리고 '클라인'이라는 키워드와 연결이 되어 있는 과거의 사건으로 연결고리가 하나 둘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아마 이 책을 펼친 독자들을 모두 궁금증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끝내면 돼.

-p.232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안과 밖에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혹은 클라인의 항아리의 위를 걸으며 그 곳에서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를 영원히 알 수 없을 <클라인의 항아리>라는 소설 그 자체다.

끊임없이 이것이 현실일지 클라인의 항아리 속에서 벌어지는 가상 현실인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등장인물처럼, 독자 역시 결국 소설의 결말이 현실인지 가상 현실인지 알 수 없도록 클라인의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특히 결말에 이르러 과거를 되짚으며 한 시점을 가리키는 대목이라거나 입실론 프로젝트의 의도를 서술해 나가는 점에 있어서는, 작가의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야말로 소설 속 세계를 완벽하고 치밀하게 '클라인의 항아리'로 만들어낸다. 사건의 진상마저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만 것이다.

 

 

 

위상기하학에서 클라인의 항아리는 원통을 방향을 유지한 채 붙여 도넛 모양의 토러스(torus)를 만드는 대신 한 번 비틀어 원의 방향을 반대로 이어붙이면서 만들어진다. 3차원 세계에서는 그 원의 접합이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뚫고 원통의 안 쪽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 역시 마찬가지다. 직사각형의 띠를 위에서 아래쪽으로 각각을 접합하는 대신 띠를 한 번 비틀어 거꾸로 붙이면,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띠가 만들어진다.

 

 

 

오카지마 후타리는 단 하나, 치밀한 가상 현실을 보여주는 'Klein-Ⅱ'라는 게임을 소설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안과 밖, 현실과 가상 현실을 구분할 수 없도록 그 경계를 무너뜨렸다.

 

단 한 번의 비틀림이 이렇게 경계를 허물고 말다니.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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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와 매 제우미디어 게임 원작 시리즈
전민희 지음 / 제우미디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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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나의 판타지는 '해리 포터' 그리고 '전민희'로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이모가 우연히 선물해 준 해리 포터는, 이미 읽게 된 이상 끝을 보지 않을 수 없었고, 무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 마법사의 돌로 시작한 호그와트 탐험은 무려 대학교 1학년, 죽음의 성물이 출간되면서 완결이 된다.

그리고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독서는 그야말로 판타지 범벅이라고 말해도 할 수 없을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책 대여점에 있는 모든 판타지 소설을 독파했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닌데, 그 중심에 바로 '전민희'와 '아룬드 연대기'와 '룬의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친구가 읽던 걸 이어 펼친 책이 바로 <세월의 돌>. 아, 나는 한국 판타지 소설을 이렇듯 치밀하고 촘촘히 짜여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만난 바람에 웬만한 판타지 소설에는 꿈쩍도 하지 않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판타지 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한 작품의 일독에 이은 다독이었지, 온갖 소설들을 이리저리 탐독했던 것은 아니다.







실은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역사와 현실에 기반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판타지만큼이나 기반을 다져놓고 그 위에서 빈틈 없이 그 세계를 펼쳐나가야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우리의 현실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는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좋다. 그래서, <세월의 돌>의 아룬드 연대기와 게임 테일즈 위버의 근간이자 <룬의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이어 세 번째로 새로운 세계를 가지고 찾아온 전민희 작가님의 신작, <전나무와 매>가 너무 반갑다.

 

 

실은, 지난 연말 단편 중 하나인 「눈의 새」가 네이버캐스트를 통해 공개되었다. MMORPG게임 '아키에이지'의 세계관을 담당하셨다 하더니, 게임의 정식 출시에 앞서 단편 하나, 그리고 그 세계의 출발을 담아낸 단편집 <전나무와 매>가 출간된 것이다.

 

 

하지만 게임을 즐기지도 않고 앞으로 게임이 시작되어도 그다지 할 것 같지 않은데, 그래서 게임 속 세계가 어떻게 되어있든 그것은 실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냥 한 편 한 편, 우리의 이야기 같으면서도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면 된다.







한 여자가 도주 중 낯선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랜 세월 자식을 보지 못한 에페리움의 왕은 신탁에 따라 가장 낮은 신분의 무희와의 사이에서 드디어 아들을 출산한다. 하지만 질투심에 불타고 있는 왕비 사비나는 그들의 안위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도주 끝에 무희 티나와 왕자 폴리티모스이자 진의 긴 여정이 그려져 있다.

반면, 남쪽에서 그들의 도주가 이루어지는 동안 북쪽 전나무 성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떠난 자로 인해 남아서 지키는 자들이 고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설환조'라 불리는 눈의 새를 잡아 온 키프로사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눈의 새를 가두어 놓은 채 세상 밖으로 떠나고 만다. 로사의 아버지 역시 마법을 공부하기 위해 떠나버렸고, 그렇게 남은 키프로사는 할머니 로지아의 냉대를 받으며 찬밥신세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전나무(키프로사)와 매(진).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ㅡ.







하지만 '현재'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채, <전나무와 매>는 그저 담담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분명, 소년과 소녀의 앞에는 가혹하고 험난한 길이 놓여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이들 사이를 연결하며 게임 속에서 앞으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해 나갈 것인가를 상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그저 단편 한 편 한 편을 음미하는 것도 꽤나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일국의 왕자는 꿈에서 낯선 문에 맞닥뜨리고, 한 성의 영주의 손녀는 찬밥신세이나 언제든지, 어디든지 떠날 수 있다는 듯 채비를 하고 성큼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세계의 출발점에 놓인 이들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상당히 인간적이며 우리의 역사 속 어딘가 만날 수 있을 법하다. 모두를 통솔할 수 있는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를 표현하는 등 신화적 인물의 비범함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들은 '용기'를 안고 첫 걸음을 내딛는다. 그 '용기'에서 비롯된 세계의 시작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실은 상당히 신화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게임을 즐기고 싶은 이에게는 게임의 탄탄한 세계관을 통해 다음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그저 판타지로 소설을 즐기고 싶은 이에게는 여운이 남는 '전나무'와 '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의 앞날을 상상해 보는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렇게 그들의 모험을 상상해 본다.

 

하나의 단편으로 <전나무와 매>이자 게임 아키에이지 속 세계를 느껴보고 싶다면, 「눈의 새」가 공개되어 있으니 한 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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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서유리 옮김 / 뿔(웅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간에게는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이라는 오감, 그리고 '어떤 무언가'를 감지하는 직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역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시각에 많은 의존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순간에도 시각을 이용한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며, 하다못해 불을 다 끄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앞을 보지 못해 잠깐의 옅은 빛이라도 이용하려 핸드폰을 들고 살금살금.

 

암흑이 두려운 이유는, 바로 그래서이다. 시각을 잃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주변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위협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충분조건이다.

공포영화에서는 왜 어둠 속에서 으스스한 소리만 들리게 하는 것인가. '안보이면 무서우니까',라는 것이다.




독일 심리 스릴러 소설계의 신동(그런데 왜 신동인지 의문,ㅋㅋ)으로 평가받는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사라진 소녀들>에서 시각의 상실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를 그려내고 있다.

 

어느 평화로운 여름날,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가 그네에 앉아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살그머니 다가온 낯선 그림자의 기척은, 소녀를 흔적도 없이 데리고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10년 뒤, 또 한 명의 시각장애인 소녀 사라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소녀의 흔적을 쫓아 관련 사건을 찾아보던 형사 프란치스카는, 10년 전 비슷한 사건을 발견하고 실종된 소녀의 가족이자 헤비급 유럽 챔피언 복싱 선수인 막스 웅게마흐를 찾아간다. 막스는 프란치스카에게 동생을 잃어버린 과거와 심경을 털어놓고, 경찰과는 별개로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납치된 소녀 사라와 납치한 범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해가며 사라의 공포는 더더욱 커져만 간다. 프란치스카와 막스는 사라를 구해낼 수 있을까?





독일,이라 하면 역시 아무래도 스릴러보다는 고전 문학들이 많이 떠오른다.

그래서 독일 스릴러? 하고 의구심이 생겼는데 작년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 시작된 유럽발 스릴러 열풍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직 만나보지 못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압도한 심리 스릴러라는 <사라진 소녀들>로, 독일 스릴러와 첫 만남을 가졌다.

 

중간중간에 삽입된 범인의 시점은 당연하다는 듯이 물망에 오른 용의자를 찾아가는 프란치스카의 시점으로 이어진다. 독자는 범인이 이 사람일까? 하고 의심하는 일은 없다.

앞서 <658, 우연히>에서 이야기했듯 범인은 언제나 그렇게 뻔히 보이는 사람 대신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이 하나의 패턴이자 공식으로 자리잡았다. 계속적인 반복은 어느샌가 공식으로 자리잡는 법이다. 덕분에 조금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또 아예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고 있느냐, 또 그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예측 가능한 패턴은 범인의 정체에 대해 의외성을 안겨주지 않는다.

 

그 의외성은 조금 아쉬울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납치된 소녀 '사라'가 아닌 10년 전에 납치되었던 막스의 동생 지나의 이야기 속에서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오빠의 고뇌라거나, 그로 인해 망가져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나, 소설의 초반 사라에게 다가온 낯선 그림자나 끌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지나의 이야기는 상당히 오싹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밤에 침대에서 읽다가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렸으니까.





주인공들의 사연이나 적당한 때에 딱 전개되는 장면 덕분에 실은 굉장히 잘 짜여진 스토리라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필요한 시점에서 딱 나타나는 전개는 좀 뻔하게 느껴져 도중도중에 허를 탁 하고 찔러주는 것이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그러고 보니 허를 찌르는 부분이 있긴 했다. 그 때는 나도 모르게 아!하고 말았으니. 그러나 한 번에 그치고 만 것 같아 좀 아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녀가 범인에게 납치당한 뒤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작가는 상세한 잔인함과 끔찍함을 그려내는 대신,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소녀가 '정체 모를 무엇'ㅡ이라고 하지만 소녀는 시각이 아닌 예리한 다른 감각으로 대강 알아채지만ㅡ에 의해 공포를 떨듯 독자들에게 역시 상상의 여지를 남겨둔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여전히 '어둠'을 테마로 그 공포를 자극하기를 멈추지를 않는데, 지하실의 어둠 속에 거미와 함께 있다거나, 닫힌 방에 치명적인 동물과의 대치를 그려내는 등, 아마 나처럼 거미를 비롯해 벌레 등등을 싫어하시는 분에게는 그마저도 함께 공포심을 자극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어둠 그리고 곤충으로 좁혀들어오는 공포에 좀 무서웠다. 하필 읽는 도중에 주변에서는 또 모기가 날아다니며 나를 괴롭히기까지 했으니 나에게는 제대로 먹힌 셈이다.

 

덕분에 독일 스릴러와의 첫 만남은 썩 만족스럽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과 함께 독일에서 시작된 스릴러의 열풍 역시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을지, 앞으로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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