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참 신기한 게, 세상에는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수 만큼의 다른 얼굴과 지문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 역시 구문체냐 산문체냐 라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한들 결국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이 모여 문장을 만들고, 문장들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 내건만, 그 익숙한 단어들의 조합이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곤 한다.

그것 역시 언어라는 도구의 굉장한 메리트인데, 작가들은 머리가 아플지라도 한낱 독자의 입장으로 이야기를 소비하는 나로서는 그 사실이 참 즐겁고 언어라는 도구에 감사하게 된다.

물론, 완전히 세세하게 파고 들어갔다는 것이 그렇지 어느 정도 문학에서 장르가 구분되면 나름대로 틀은 잡혀 있기 마련인지라, 그 구분 속에서 취향에 맞는 책을 읽게 되는 것이지만, 그런 점에서 시자키 유의 <외침과 기도>는 상당히 색다른 시도를 한 '미스터리'라 해야할지 미묘한 경계 위를 넘나드는 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책 한 권'을 만났다고 해 두자. 조금은 낯설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빚어낸 소설 속 세계를 만났다고.





시자키 유의 데뷔작이자 제5회 미스터리즈! 신인상을 안겨준 단편 「사막을 달리는 뱃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낯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과 동행하는 사이키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7개 국어에 능통한 그는 그 전공을 한껏 살릴 수 있는 직업을 택해 세계 각국을 취재하는데, 그 중에 만난 이국적인 세계에서의 사건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사막을 달리는 뱃길」위에서 사막을 횡단하는 상인들을 덮쳐버린 연쇄 살인,

「하얀 거인」들 속에서 홀연히 사라진 그녀의 수수께끼의 로맨틱한 해법,

「얼어붙은 루시」의 짙은 안개 속에 서 있는 수녀원에 안치된 썩지 않는 시신의 진정한 불빛,

너무나도 다른 아마존 밀림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을 덮친 죽음과 그의 「외침」,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어느 제도에 위치한 신비한 동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행자의 「기도」까지.

 

 

 

하다못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불어온 바람이 귓전에서 울었다.

꽃보라 치는 경치 속에서 점차 현실의 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소리 속에서 언젠가의 정경이 떠오르기를 나는 기도했다.

-p.354, 「기도」

 

 

 

사이키의 이야기는 분명 「사막을 달리는 뱃길」에서 시작되었으나 마지막 「기도」에 이르러 다섯 편의 이야기는 한 권의 연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낯선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는 사이키의 이야기는 어마어마한 트릭과 반전보다는,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의외성을 안겨 주는데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집 <외침과 기도>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사막과 스페인의 풍차마을, 러시아의 안개에 뒤덮인 수도원과 아마존의 밀림 등 세계 각지를 무대로 삼아 시자키 유가 풀어내고 있는 이야기는 그렇게 여행지라는 낯선 장소와 그 장소에 머물고 있는 낯선 문화 속에서 비춰지는 '낯선 동기'가 사이키가 맞닥뜨린 수수께끼의 의외성과 그 해답에 힘을 실어준다. '어째서 그럴 수 밖에 없었던가'에 대한 해답을, 시자키 유는 그 나름대로 탄탄한 시나리오 속에서 내놓는 것이다.





게다가 누구나 품고 있는 여행과 그 여행지에서의 모습을 상당히 낭만적인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 감성적인 문장 속에서 미스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교를 녹여내 몇 개의 단편은 그렇게 독자를 살짝 속이기도 한다. 거기에 방심하고 마는 것이다ㅡ이 글을 보고 '그래,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ㅎㅎ

그래서 이 소설은 미스터리로도 여행자의 감성을 담아낸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는 양면적인 매력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극적인 사건이 벌어져도 전혀 상관없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 그리고 너무나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시자키 유의 문장 때문일지, 미스터리와 스릴러에서 맛볼 수 있는 긴장감은 그다지 살아있지 않다. 그 긴장감을 즐기며 미스터리를 읽는 이에게는 너무나도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조금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신인 시자키 유는 1983년생으로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굉장히 젊은 작가다.

시자키 유는 <미스터리즈!>만의 후기2에서 한 편의 세계 일주를 그려낸 듯한 다섯 장소를 그려내면서도, 스페인의 풍차 마을을 제외하고는 모델이 된 여행지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데뷔작에서부터 꽤나 멋지게 여행과 미스터리라는 두 가지를 함께 녹여낸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어떻게 완성되어갈지를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히 쏠쏠할 것 같다. 그렇기에 '시자키 유'라는 작가의 등장이 반갑고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3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손진성 옮김 / 비채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발도상국은 어디든 내우외환으로 비슷한 문제를 안은 곳이 많아. 그럴 때는 사극에 비유하는 게 제일이지. "

"그럼 우리는 뭔데?"

"으음. 우리는…."

아버지는 턱끝에 자란 수염을 긁적였다.

"떠돌이 무사쯤으로 하자."

-p.182

 

 

자, 골 때리는 캐릭터 또 등장하셨다. 실은, 꽤 오래 전에 등장했으나 이제서야 우리 앞에 나타나 준 것이다.

 

'아르바이트 탐정' 시리즈로는 세 번째이자 첫 장편이기도 하다는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은 1988년 작으로, 과연 무엇을 하는 사무실인지 게임만 하다 끝난다는 소문이 무성한 사무실 '다이쿄쿠구'의 일원인 오사와 아리마사의 작품이다.

 

 

 

일본에서의 어마어마한 인기에 비해 국내에서는 인지도도 그다지 높지도 않고 많은 작품이 출간되지도 않았는데, 진즉에 사메지마 형사 시리즈의 1탄 <신주쿠 상어>가 출간된 이후 후속작은 감감 무소식(찾아보니 1993년 한 출판사에서 사메지마 형사 시리즈가 출간되었는데 지금은 절판되었다.).

그래봤자 나 역시 그렇게 책 출간 안 되냐고 독촉하지도 그렇다더라~하고 잘난척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닌 것이,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이 이 분과의 첫 만남이라는 거다.

 

 

 

 

실은 일본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소년 탐정단들이 사용하는 사물함에 의뢰가 들어온다, 그리고 소년들은 드디어 첫 임무가 들어왔으니 굉장히 설레고 두근거리지만, 찾아달라는 것은 집 나간 고양이라는 것에 굉장히 실망하곤 하는 것이 주요 패턴인데, 사실 누군가의 소중한 것에는 가벼움이란 없다. 뭐 그래도 좀 멋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싶으니 스파이 활동에 악의 무리에 맞서 싸우고 싶은 것은 모험을 즐기는 아이들의 로망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처음에는 제목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을 보고서도, 진짜 '왕녀'라고는 생각을 안 했다. 그래봤자 어느 재벌의 상속녀 정도로 오냐오냐 떠받들어지는 존재겠지, 무슨 거창하게 왕녀야.. 그 그룹의 왕녀겠지, 하고 코웃음을 쳤는데 이럴수가, 진짜 '라일 왕국'이라는 곳의 왕녀가 등장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을 소개해줘야겠다. '왕녀를 위한'은 해결되었으니 이제 '아르바이트 탐정'이 남았다. '사이키 인베스티게이션'이라는 그럴싸한 간판을 내걸고 탐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이키 부자, 그 중에서도 '알바'를 뛰고 있는 아들 사이키 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과거 스파이로서 꽤 날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버지의 동료 시마즈 씨가 고3 여름, 라일 왕국의 왕녀를 경호해 달라는 의뢰를 한다.

왜 국가 기관에서 직접 안 하고...라는 게 뻔한 이유로 여차저차해서 신분이 숨겨져 있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뭐 그런 것이다.

이번 일 잘 하면 도쿄대 정도 뒷구멍으로 입학할 수는 있겠지, 하고 시작된 아르바이트.

그러나 왕녀가 입국한 첫 날 부터, 라일 왕국 대사 대리가 독침을 맞아 살해 당하고... 어쨌든 장난이 아니다.

왕녀가 머물러야 하는 곳은 최고급 호텔이 아닌 싸구려 러브호텔에 이동을 할 때도 주변이 뻥 뚫려있을 수 밖에 없는 바이크.

 

맞술은 물론이거니와 맞담배 피는 불량 아버지와 아들, 사이키 부자의 기상천외한 경호, 그리고 처음 만난 아름다운 왕녀와 류의 상큼한 로맨스가 잘 어우러진 소설이다.

 

 

 

고등학생 아르바이트 탐정이 하면 얼마나 하겠어,라는 나의 방심와는 달리 책 속에는 본격적인 액션 씬이 상당히 호쾌하게 그려져 있다. 저격수와 폭파범의 등장과 그에 따라 목숨의 위협을 받는 등 꽤나 생생하고 쫄깃한 묘사가 함께하고, 한 동남아시아의 작은 나라만의 무기 같은 것 역시 웃기면서도 색다르다.

 

 

하지만, 역시 그게 전부다. 시원스런 액션과 상큼한 로맨스가 어우러진 적당한 분위기 속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정도. 덕분에 굉장히 뛰어난 가독성을 자랑한다.

게다가 주인공에게 닥쳐버린 절제절명의 긴박한 상황도, 뭐 어차피 주인공이니까 살아남을 수 있을거야, 라는 짐작 때문에 그닥 긴장도 안 되는, B급 액션 영화 한 편 본 그런 기분이랄까.

뭔가 모를 동남아시아 미개척지에 대한 신비함 역시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하니, 비슷한 영화 한 편 제목을 알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런 건 딱히 안 떠오르니 어떤 스타일인지 이 정도로 알아주시길 바란다. 클클.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가장 먹어주는 건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다. 결국 이야기의 패턴은 비슷비슷할 수 밖에 없는데, 관건은 그 속에서 캐릭터들이 얼마나 생생하고 매력적으로 움직이느냐다. 그런 점에서 이 <왕녀를 위한 아르바이트 탐정> 속 등장인물들은 친근하진 않지만 매력적이다.

왕녀를 따라온 가정교사 할머니는 눈에 선하다. 딱 어떤 느낌일지 말이다.ㅋㅋ

 

 

 

참 신기한 것이, 나로선 책이란 '무조건 재밌어야 돼!'라는 엔터테인먼트를 나 혼자만의(...) 기치로 삼고 있는데 그 재밌는 소설 속에서도 입맛이 다르다는 것이 묘하다.

소설 속에서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도 좋고, 소설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데 의의를 지 않고 생각없이 가볍게 읽는 것도 좋은데 그럼에도 그 와중에 조금씩 조금씩 갈리는 것을 보니 또 세부적인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

취향의 범주에는 속했으나 입맛에는 좀 맞지 않는다. 닭 요리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그 와중에 매운 것은 못 먹듯이.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지만 사람의 입맛은 제각각인 법이다. 매운 요리를 좋아하시는 분도 분명히 있으니 재밌게 읽는 분은 충분히 재미있게 읽으실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맹독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한하게도, 스티븐 킹의 작품 하나에서 무려 조세핀 테이 그리고 도로시 L. 세이어즈라는 두 여류작가의 이름을 만났다. 

역사 탐정을 언급하며 역사 소설에서는 꽤 이름이 높았던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이름일수도,ㅎㅎ)의 이름은 직접적으로 등장했지만, 도로시 L. 세이어즈의 이름은 직접적인 언급 대신 그녀의 페르소나이자 소설 속 주인공인 피터 윔지 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이 '피터 윔지 경'을 닮았다 어쩌고 저쩌고...

그 때만 해도(고작 한 달 전이다) 피터 윔지 경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고 고개만 갸웃거리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세이어즈의 작품 속 주인공이었다. 이럴 수가..ㅋㅋ

 

스티븐 킹은, 꽤나 미스터리의 황금기 시절 두 여류 작가의 활약을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도일 경도 크리스티 여사도 좋아했겠지. 큭큭.

 

어쨌든 꽤 낯선 두 여류 작가의 작품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나와 도로시 L. 세이어즈의 첫 만남은, 국내에 소개된 피터 윔지 시리즈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맹독>이다.





이전에도 누명을 쓴 사람들은 항상 있었잖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땐 제가 없었기 때문이죠.

-p.77

 

 

 

그런데 또 희한하게도, 우연의 일치인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과 <맹독>은 상당히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을 썼다는 것, 그리고 이번 작품 속에서 '탐정'이 할 역할은 '누명을 벗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맹독> 속에서는 어떻게 누명을 벗길지, 이야기를 들여다봤다.

 

 

 

이야기는 법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추리소설 작가인 해리엇 베인은 '자유연애'를 했던 전 애인 필립 보이스를 비소로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다.

추리 소설 자료 수집을 위해 비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헤어진 뒤에도 필립은 구질구질하게(?) 그녀에게 계속 매달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악랄하게도 독살이라는 방법으로 남자를 살해했다는 범행의 잔혹성 등을 근거로 판사와 배심원들의 마음은 상당히 그녀의 유죄로 마음이 기울어 있다.

그러나 피터 윔지 경의 충실한 친구가 배심원단 속에서 다른 이들을 설득하며 끝내 보류 판결을 내린 뒤, 피터 윔지 경은 해리엇 베인의 누명을 벗겨주리라 결심한다.

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누명을 벗기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면, 진범의 범행과 그 증거를 찾아내도록 경찰을 설득해야 하고, 경찰 역시 해리엇의 혐의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 윔지 경은, 강력한 용의자로 보이는 인물의 주변에 스파이를 심어 그의 범행 동기 그리고 필립 보이스를 독살한 방법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해리엇 베인은 정말로 무고한 피해자일까? 그녀의 누명은 벗겨질 수 있을까?

 

 

 

못 보고 지나친 게 있을 거야. 그게 다네. 어쩌면 아주 명확한 뭔가가 있어.

-p.371

 

 

 

도로시 L. 세이어즈는 당대 애거서 크리스티와 이름을 나란히 하며 추리 소설 작가로서 명성을 높였다고 한다. 1930년 추리 소설의 황금기를 이루었던 주요 작가들이 모여 결성한 추리 클럽(The Detection Club)에 도로시 L. 세이어즈 역시 참여했다고 하는데, <맹독>은 클럽에서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당시 클럽의 회원들은 추리소설을 쓰는 데 있어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고, 이를 준수하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핵심은 '독자와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당시 런던 탐정 클럽(추리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선서를 했다고 한다.

 

 


귀하는 자신이 쓰는 추리 소설의 탐정이 의뢰받은 사건에 대하여 기술적이고 성 실한 자세로 추적할 것이며, 하늘의 계시, 여성의 직감, 맘보잠보의 신, 야바위, 우 연의 일치 등에 절대 의존하지 않을 것을 맹세 합니까?

 

귀하는 갱, 음모, 살인광선, 유령, 최면술, 초능력, 중국인, 광인 등에 의존하지 않으며, 영원히, 절대로 비과학적이거나 미지의 독약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맹세 합니까?

또한 킹스 잉글리쉬를 사용하며, 매상을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이 맹세를 저버리 는 일이 절대로 없다는 것을 서약합니까?


 

그리고 이 <맹독>에서는 그 방법을 거의 철저히 따라가고 있다. 독극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 조금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ㅡ개인적으로 나도 그랬다. 아니 힌트를 주면서 이건 어떻게 알아! 하고.ㅎㅎ







실은, 범인의 윤곽은 초반 사건의 개요 이후 피해자의 주변을 둘러싼 상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이 범인이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과연 어떤 방법으로 독살을 했는가? 가 이 소설의 최대 과제다. '누가'가 아닌 '어떻게'를 파헤친다는 것 역시 추리소설의 초창기에 갖춘 덕목이기도 하다.

작가가 조금씩 보여주는 힌트와 함께 피터 윔지 경을 따라 읽는 재미는, 바로 황금기에 쏟아져나온, '추리소설의 정석'을 그대로 따르는 미스터리를 읽는 즐거움과 같았다. 그 전형적인 영국 소설에서 엿볼 수 있는 대화라니!

 

 

 

뭐, 사실 구구절절 이야기하기엔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다. 피해자는 나타났고, 그 범인을 쫓아가는 추리소설 그 자체의 양식을, 그것도 독자와의 페어플레이를 위해 공정성을 띠며 전개를 해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외인 것은, 이토록 치명적이고도 끔찍한 <맹독>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소설 속에는 유머와 낭만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피터 윔지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당시의 보헤미안적인 자유 연애를 즐기던 여성 추리 소설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귀족의 신분인 피터 윔지,라는 구도에서 이미 그 낭만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야말로 '신분을 뛰어넘은 로맨스'가 시작된 것이다.







실은 대부분은 피터 윔지 경의 충실한 하인 번터와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스파이용' 직원들 중 한 명의 활약,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추리라는 활약을 그려낼 뿐이고, 마지막에 이르러서 해리엇 베인은 그 모습에 흔들린다,라는 것 뿐이지만. 피터 윔지와 해리엇 베인의 본격적인 연인으로서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다고 한다.^^

 

사실 그것이 아니라 가짜 강령술로 결정적인 정보 수집을 위해 남의 집에 숨어 들어간다거나, 속성으로 자물쇠 따는 법을 배워 스파이로 숨어든 사무실의 기밀 문서를 몰래 지켜보는 등의 활약이 훨씬 돋보인다. 그것도 여성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역시 쏠쏠한 재미 중 하나다. 게다가 누가 봐도 '도로시 L. 세이어즈' 본인을 모델로 했음이 틀림없을 '해리엇 베인'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본인과 비슷한지는, 해설에서 친절히 만나볼 수 있다.







치명적인 '독살'이라는 사건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 그리고 그 못지 않게 40대의 중후한 중년의 매력을 내뿜고 있는 피터 윔지 경에게 찾아온 로맨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치명적인 맹독'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로맨스', 그 둘을 적절히 아울러 시작된 탐정의 활약을 그려낸 깔끔한 미스터리다.

 

더불어 또 하나의 클래식 작가와의 만남을 가졌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도로시 L. 세이어즈의 피터 윔지 시리즈는 또 나의 욕심 채우기 목록에 오를 듯하다.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P.G. 스토리콜렉터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생을 나비만을 쫓았던 누군가는, 나비의 창백한 잔해만을 움켜쥔 채, 팔이 꺾이고 말았다.

 

주변에 머물고 있는 가족을 대신해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보여줬던 누군가는, 끝내 그것을 목숨과 맞바꾸고 말았다.

 

한 가족의 아버지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한 남자의 죽음, 그 범인을 찾기 위한 경찰의 수사, 그리고 끝내 팔이 꺾여버린 또다른 배우.

'Role-Playing Game'의 약자이자 현재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가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그리고 인터넷상에서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 누군가를 그려내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R.P.G.>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보이는 외면과 그러한 내면, 어느 쪽이 진실일까?

도코로다 료스케에게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었을까?

-p.80

 

 

 

공사 현장에서 인근에 살고 있는 한 가장이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또 한 명, 젊은 여성이 목이 졸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두 개의 살인사건이 별개의 사건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시작했지만, 사건현장에서 물증이 발견되면서 두 사건이 연관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수사 본부 내부의 지배적인 의견은 두 피해자와 연결된 A코가 용의자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피해자는 인터넷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며 '어머니', '가즈미', '미노루'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이들과 함께 '가족놀이'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이에 따라 경찰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들을 심문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상부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끝내 그 '계획'을 밀고 나가는 경찰.

취조실의 매직 미러 너머로, 피해자 생전의 낯선 목적을 목격한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터넷 상에서의 피해자의 '또 다른 가족'이었던 이들이 차례로 심문을 받는다.

경찰이 세운 계획은 어떤 것이었을까? 경찰은, 범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

 

 

 

2001년의 작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터넷 문화의 그늘과 그리고 그 그늘이 현실에까지 미쳐버린 한 가족의 비극을 상당히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피해자의 또 다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 사이에 오간 대화를 경찰의 수사가 전개되는 도중도중에 삽입되어 그들 사이에서는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던 것인지, 경찰 수사의 실마리는 어디에 숨어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을 상당히 증폭시킨다.

그와 별개로, 다케가미 형사와 취조실에서 '가족'들을 상대하고 치카코 형사가 취조실 밖 매직미러 뒤에서 '유족'을 상대하면서 계속되는 심문은 경찰의 의도가 무엇이며 이러한 대화를 통해 무엇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 역시 갈수록 커져가기만 한다.

 

 

 

그것이 요즘 유행인 걸까? 자아, 자아, 자아.

모두가 남의 시선이야 어떻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세상이다.

찾을 필요도 없이 이미 확고한 자아가 있다고 자부하는 이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을 고르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심정을 돌아보지도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p.272

 

 

 

인터넷 공간에는 '익명성'이라는 가림막에서 비롯되는 빛과 그늘이 혼재한다. 미야베 미유키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 속에서는 인터넷 공간에서의 가족 놀이에 빠졌다가 끝내 살해당하고 말았던 한 남자를 통해 그 빛과 그늘을 함께 풀어내고 있다.

그 역할놀이는 자신의 죽음을 가져온 사신이기도 했지만,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한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다.

게다가 이처럼 가림막 뒤에 놓여 있는 양면성 뿐만 아니라, 그 가상 공간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의 인물들이 느끼는 또 다른 형태의 소외 역시 놓치지 않았다.

두 개의 역할 놀이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했던 한 남자에게 벌어진 비극은, 그렇게 현실과 가상 공간 각각에서의 역할놀이라는 게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 많이 읽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난 그녀의 현대 사회파 미스터리가 좋다.

그야말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10년 전의 작품이 되었지만, 이 <R.P.G.> 역시 마찬가지다. 어찌보면 가장 밀접하다고 할 수 있을 가상 공간을 주제로 그 가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뿐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친 '두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그들만의 역할놀이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했다.

 

자신의 '정의'라는 나비만을 쫓았으나 끝내 손에 잡힌 것은 그 나비의 '잔해' 뿐이었던 누군가의 비극을,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사회파 미스터리다.

미야베 미유키 답다,라고 말하기에는 나는 아직 그녀의 작품을 많이 알진 못한다. 그러나 이 소설 속의 그들만의 역할놀이는 나에게 꽤나 반향을 일으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마가 비웃으면 어떻게 되는데?" 

어렸을 때 할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온 대답은 한 마디.

"끝…."

-p.41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 그렇게 당해놓고 이번에는 기필코 혼자 깨어있는 밤에는 이 소설을 읽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결국 마지막에는 이미 펼친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고, 마침 바람마저 스산하게 불며 덜컹거리는 창문, 그리고 그 밖의 어둠과 마주하며 버틸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책 속의 아리따운 여인네 대신, 일본 원서 표지에 실려있던 씩, 비웃는 여인의 얼굴이 눈 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무서워선, 그 상상을 피해 베개 앞에 얼굴을 들이댄 채, 하지만 궁금하니까 도중에 덮기는 커녕 또 혼자 떨면서 책을 끝까지 읽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겁쟁이의 슬픈 이야기다.

 

 

이번에는 <산마처럼 비웃는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산마처럼 비웃지는 않더라도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결말을 내놓으며 거기에 당하고 있는 독자를 생각하며 웃음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작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설과 지벌 그리고 그 마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가에서 벌어진 비극, 그리고 그것을 파헤치는 환상 소설 작가 도조 겐야의 활약을 치밀한 복선, 구성으로 담아내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밀실을 만들었나' 하는 건 물리적인 수수께끼입니다.

한편, '왜 구태여 밀실 같은 번거로운 상황을 만들었을까'는 심리적인 수수께끼죠.

-p.148

 

 

 

이야기는 고키 노부요시의 기묘한 체험담이 담겨 있는 원고에서부터 시작된다. 환상 소설가 도조 겐야는 그 원고에 담겨 있는 어떤 '일가 증발'의 수수께끼를 풀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그 체험담에 담겨 있는 기담에 대한 조사도 할 겸 구마도로 향한다.

그러나 도조 겐야가 일가 증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부름산의 외딴 집을 방문했을 때, 밀실 상태로 놓인 방 안에서 얼굴이 화로에 처박힌 채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고, 그 이후 가스미 가의 일원들이 하나 둘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구마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섯 지장에 관련된 옛날 동요를 따른 듯한 상태로 발견된다.

범인은 어째서 연쇄 살인을 저질렀으며, 동요에 맞추어 가스미 가의 사람들을 하나 둘 살해하는 것일까?

 

 

 

지난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는, 분명 도조 겐야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사람은, 제일 마지막이 되어서야 생뚱맞게 등장하고는 그 얽히고 설킨 미스터리를 훅 풀고는 불쑥 사라졌더랬다. 그래서 상당히 아쉬웠는데, 이번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서는 처음부터 전면에 드러나 본격적으로 '해결사'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그렇게 직접 얽혀있다보니 도조 겐야의 배경이나 주변 인물 등에 대한 요소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소설의 볼거리 중 하나다. 물론 가장 반가웠던 점 중 하나이기도 하고.

 

게다가 여전히 '산마처럼 비웃는 것' 같은 '호러'를 접목시킨 본격 미스터리의 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삼산과 흉산으로 일컬어지는 부름산. 부름산에 등장한다는 산마 혹은 산녀의 전설과 그들과 마주치면 결코 질문에 대답을 해서는 안된다는, 그 마을에 살았던 구성원들이 어린 시절에 할머니께 들을 법한 이야기와 관련지어 불가사의한 무대를 꾸며낸다는 점. 기담에는 사족을 못 쓰는 방랑 환상소설과 도조 겐야를 위한 무대로는 정말 안성맞춤이다.

 

 

 

어쨌든 덕분에 앞에서 언급했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말 귀신의 소행이자 산마의 소행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묘한 미스터리와 사람의 '악'에서 출발했음이 틀림없는 연쇄살인사건을 결합시켜 그 모든 수수께끼를 풀어놓는 미쓰다 신조의 능력은 그저 대단하다고밖에.

'기묘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해명을 해 보고 그렇지 않고서야 '불가사의'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말하는 도조 겐야는, 그렇기에 여섯 지장님에 얽힌 동요를 따르고 있는 살인사건을 해결해내는 것이다.

 

 

 

어쩌면 공포 한가운데에 있을 때보다 그 공포를 향해 나아갈 때가, 그 과정이, 실은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p.290

 

 

 

특히 압권은 고키 노부요시의 기묘한 흉산에서의 하룻밤 사이의 체험을 담아낸 수기, 그리고 마지막, 범인이 몰아넣는 상황의 공포다. 이건 내가 등장인물인지, 등장인물이 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포로 나를 몰아넣었다. 흑흑..ㅠㅠ

그러나 훨씬 무서운 것은, 도조 겐야가 말했듯 공포스러운 상황의 실체가 하나 둘 벗겨져나가는 과정과 그 결과 등장하는 이면이다. 범인은 그것을 잘 알았기에, 더더욱 독자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아이고.. 이거 읽는다고 내가 정말 어찌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는지. 덮고 내일 밝을 때 읽어야지 하기엔 수수께끼가 끝을 달하면서 덮을 수도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맞이한 결말은, 정말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실마리가 되어 연결되는 순간 무릎을 치고 말았다. 도조 겐야의 추리가 계속 되면서 앞에서 조금은 미심쩍게 느껴진 질문의 해답들 역시 명쾌하게 모두 해결해 준다.

그렇게 모든 장면, 모든 대사가 버릴 것 하나 없이 맞추어 떨어지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기괴한 '호러'에서 출발해 '본격 미스터리'의 풀이의 정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미쓰다 신조의 명성은 계속해서 이어져 갈 듯하다.

 

 

자, 얼른 책을 펼쳐보시지요.^^ 하지만 주의하시길. 겁이 많으신 분은 이 소설, 밤에 읽는 걸 권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