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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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라는 존재. 분명 너무나도 끔찍하고 무서운 존재다. 주변의 이웃이 알고보니 사이코패스였다,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현실이다.

하지만 어느샌가 스릴러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사이코패스는 상당히 익숙한 존재가 된 것도 같다.

영미권 스릴러를 읽을 때는 더더욱. 어느샌가 책을 읽고 있노라면 살인자는, 돈, 명예, 사랑이라는 명예가 아닌 그저 '쾌락'을 추구하며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피가 낭자한 시체 옆에 서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면 나는 생각한다. '아... 또 사이코패스야?'

 

그리고 경찰은 수사망을 좁혀나가며 그 사이코패스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정체는 '옆에 있던 친숙한 인물'. 사이코패스가 존재하고, 그 흔적에서 공포심을 조장하며 그를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어느샌가 '스릴러=반전'의 공식이 세워지면서 그 '반전'을 위해서, 의외의 범인을 내세우기 위해 조금은 억지스러운 결말이 아쉬울 때도 종종 있다. 어느샌가 무감각해지고 만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지겹다고, 소설을 안 읽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재미있다.

 

 

 

어쨌든 그렇다는 것인데, 존 버든의 <658, 우연히> 역시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 좀 다르다. '누가? 왜?'와 함께 '어떻게?'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시작하는 책은, 한 통의 편지로부터 출발한다ㅡ.

 

 

퇴직 형사 거니는 뉴욕 교외에서 한적한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전직 형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다지 친하지도 교류도 없었던 대학 시절 동창 멜러리가 찾아온다. 공포에 떨고 있는 그는, 자기가 받았다는 편지를 보여준다.

 

내용인 즉슨, '난 네 비밀을 모두 알고 있다'고 멜러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암시가 담겨 있었다. 그 증거로, 1부터 1000 사이 숫자를 하나 생각해 보라고 하더니 그 순간 떠올랐던,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었던 '658'이라는 숫자를 맞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멜러리는 목이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채 끔찍한 시체로 발견된다. 그러나 범인은 타액도 체모도 그를 나타내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허공으로 사라진다. 범인이 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면, 발자국이 도중에 뚝 끊긴 채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범인은 멜러리의 생각을 알아맞혔고 멜러리를 살해한 뒤 흔적도 없이 유유히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일까. 이미 은퇴한 형사였지만, 거니는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해 범인의 시나리오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결국 사이코패스의 소행,이라는 것이지만 다른 사이코패스 소설과는 다르다. <658, 우연히> 속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흔적을 어디에도 남겨두지 않아 경찰이 그를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데이브 거니는 범인의 행적을 쫓는 게 아니라 그가 왜, 그리고 어떻게 피해자에게 접근해 살해했는지 특유의 직감과 가설을 세우며 그의 행동을 분석하는데, 그 과정이 독특하다.

 

정체를 숨긴 범인과 그를 색출해내려는 거니의 두뇌 싸움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존 버든은, 촘촘한 '논리'와 치밀한 '우연'으로 독자를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넣는 것은 아니다.

허영심이 가득한 아들 카일과의 통화를 피하는 아버지로서, 은퇴 이후 사진 보정을 통해 나름대로의 작품을 준비하면서 흔들리는 남자로서, 그리고 어린 나이에 잃어버린 어린 아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또 다른 한 명의 아버지로서.

데이브 거니는 뛰어난 수사력을 갖춘 형사였고, 또 한 번 상상력을 발휘해 특별 수사관으로서 범인을 쫓고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완벽한 대신 한없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다양한 모습과 감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한 권에 담아낼 수 있었을까!

 

 

 

범인과의 머리싸움 그리고 데이브 거니라는 한 남자의 일상 속 모습.

<658, 우연히>는 퍼즐과 미스터리, 경찰, 그리고 그저 한 명의 인간의 모습과 그가 가진 상실을 모두 한번에 그려냈다.

하드보일드의 감성과 퍼즐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한꺼번에 담아낸 이 소설. '완벽'이라는 말을 쉬이 쓸 수는 없지만 이 소설에는 '완벽'이란 단어의 95%정도는 할당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658, 우연히>는 작가 존 버든의 첫 번째 소설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빈틈이 없었던 데뷔작으로 후속작은 이에 미치지 못할지, 그 이상의 완벽을 보여줄지. 그의 다음 행보가 더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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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파더
이사카 고타로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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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이자 뮤지컬 영화로도 제작된 <맘마 미아!>는 실은 ABBA의 노래를 바탕으로 각색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그리스 지중해의 외딴 섬에서 낡은 호텔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아마추어 그룹의 리더싱어로서의? 과거를 그리워하는 도나와 그의 딸 소피.

남자친구 스카이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장을 발견한 소피는, 자신의 아버지 후보가 세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팜므파탈의 매력을 뽐냈던 도나는 모른 채 그녀의 옛 남자들이 한날 한시, 같은 섬에 모이게 되는데.....

 

라는 것이 대략적인 줄거리.

 

이사카 코타로의 <오! 파더>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본 순간 든 생각이 바로 오, 이런!

아들 하나에 아버지가 넷이라니. 그들의 어머니이자 아내 되시는 분, 어마어마한 매력의 소유자로 추정된다.

 

 

 

 

우리 집 사정을 알면 내가 너무 존경스러워서 날 유키오 님이라고 부를 거다.

-p.12

 

왜 우리의 주인공에게 너무 존경스러워서 유키오 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는가, 그는 한 집에서 네 명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양다리도 아닌 무려 네 다리를 들키지도 않고 연애를 이어왔던 유키오의 어머니 토모요는, 나중에 그 사실이 들통났을 때 왜 숨겼냐는 추궁에 이렇게 대답했다.

 

'안 물어봤잖아.'

 

오오, 이 분, 상당한 포스에 어마어마한 매력을 가지고 계신 듯하다.

그렇게 네 다리가 들통난 것은 바로 유키오가 생겼기 때문인데, 누가 정확히 아버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차마 그녀와 헤어질 수 없다며 네 명의 남자는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합의를 본다.

그렇게 유키오는, 진짜 '생물학적' 아버지를 DNA 검사를 통해 가려낼 수도 있을 법하지만 네 명의 아버지가 모두 상처받은 표정에, 다들 자기 닮았다며 하도 주장해대는 통에 그래, 그렇게 네 명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 아버지들, 네 명이 각기 얼마나 개성이 있는지.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도박장을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는 타키 씨, 늘 책을 읽고 있으며 박식함을 자랑하는 사토루 씨, 수려한 외모에 여자를 끌어당기는 태생적인 바람둥이이지만 유키오의 아버지로 살고 있는 아오이 씨, 그리고 중학교 체육 교사이자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이사오 씨 까지.

 

 

아무튼 말이지, 유키오가 뭐든 다 잘하는 게 난 참 이상했었는데 드디어 알았어.

유키오는 아버지가 넷씩이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물려받은 거야. 그렇지?

-p.53

 

 

 

 

네 명의 아버지에게 각기 개성을 물려받은 유키오는 그렇게 아버지들과 함께 아옹다옹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명의 '우엉 남자'들에게 둘러 싸여 삥(?)을 뜯기고(?) 있던 중학교 시절 동창을 만나고, 도그 레이스에서 우연히 '가방 바꿔치기'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유키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언제나, 아들이 위험에 처하면 구해주러 달려오는 아버지'들'이 있었으니, 오! 파더, 부디 이 아들을 보살펴주시길ㅡ.

 

 

 

희한한게, 작가의 작품 세계를 굳이 분류하기도 하나보다. 이사카 코타로 역시 그의 작품이 <골든슬럼버>를 경계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스타일'이 달라지면서 제1기 그리고 제2기로 나뉘는 듯하다. 책 마지막의 작가 스스로가 이런 호칭이 굳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런 측면에서 이 <오! 파더>는 제1기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책으로 출간된 것은 <골든슬럼버>가 앞서지만, 그의 첫 신문연재작을 책으로 엮었다고 하는 만큼 시기적으로도 그렇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들과 네 명의 아버지라는 설정, 까칠한 듯 툭툭 내뱉는 유키오의 말투와 성격 등이 소소한 일상을 귀엽게 그려내고 있을까, 그런 기대가 머리를 살며시 내민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이 끝내 밝혀진다거나 하는 일상의 자그마한 해프닝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핸드폰을 두고 출장을 떠난 사이, 큰 사건에 휘말린 유키오는 인질로 잡혀 감금당하는 상황에 놓이고, 아버지들은 머리를 맞대 그를 구하기 위해 고심한다.

 

선거, 도그 레이스, 은밀한 가방 교환, 어린 시절 마스미 그리고 아버지들과 주고받았던 수신호 등 그저 소품의 하나로 보였던 모든 것들이 알고보니 미리 흩어두었던 퍼즐 조각이었던 데다가, 그 조각들은 이사카 코타로 특유의 전개에 따라 결말을 향해 달려가면서 조각들은 하나 둘 끼워맞추어지기 시작한다. 그래, 역시 이사카 코타로,였던 것이다.

 

 

 

맘마미아! 하고 외치지 않을까 라는, 너무 비슷한 설정에서 비롯된 것은 역시 나의 기우였나보다.

확실히 <골든슬럼버> 이후의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과 달리 개성이 확실한 등장인물들이 일상 속을 배회하며 해프닝이 벌어진다는 것은 역시 그 이전의 이야기 스타일과 흡사하다.

음모론을 기반으로 킬러와 정치인들이 등장해 거대한 기업이 배후에 있다더라, 하는 식은 분명히 아니니까.

오히려 네 아버지들이 툭툭 내뱉는 말은, '명랑한 갱들'과 '집오리와 들오리'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 그렇게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사카 코타로의 옛(?) 작품들을 읽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러나 마지막 클라이막스에 다다를수록 스케일은 커져만 간다. 흩어졌던 퍼즐 조각들이 끼워맞추어지면서 그야말로 만화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덕분에 좀 벙찌면서 이게 뭐야,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미 네 명의 아버지가 한 여자를 두고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말이 안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거짓말을 기가막히게 잡아내고, 생체 시계는 언제나 정확한 누군가도 있는데 뭐. 이 정도는 관대하게 눈 감아 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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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 1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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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전(攻城戰) : 성이나 요새를 빼앗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네이버 국어사전)

 

 

역사적으로 성(城)이라는 것은 지역의 울타리이자 보루였다. 그렇기에 전쟁이 벌어지면, 그 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농성'이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공성전이라니. 공성전이 무엇인지 일단 사전부터 검색해 본다.

그런데 이럴수가, 성이나 요새를 빼앗기 위하여 벌이는 싸움이라니. 좀 허무하기도 하다. 그럼 옛날 대부분의 전투는 공성전이었다는 소리일까. 그렇다면 굳이 내가 읽었던 이 소설의 제목이 <공성전>이라는 것도 그다지 납득이 가질 않는다. 나름대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를 거점으로 적들이 이를 공략하는 것이 소설 속의 주요한 전투의 줄기였건만. 조금 더 검색해 본다.

 

공성전(攻城戰)은 성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 기대는 적을 공격하는 것을 공성전이라 한다. 기본적으로 적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 첫 번째, 그 후 방어선에 파상공세를 가하여 약한 부분을 부수고 돌입하는 것이 두 번째가 된다. 중세에 이르면, 보급의 차단만으로도 수비측이 항복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후 성벽을 부술 수 있는 공성포가 도입되면서 포격거리까지 공성포를 끌고가면 수비측이 '명예로운 항복'을 제안하는 형태가 되기도 하였다(위키백과).

 

그렇다. 함락하려는 성을 포위해 다른 곳에서 물자를 공급받지 못하게 하면서 서서히 적의 숨통을 조여가는 것. 그것이 '공성전'이고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소설 <공성전>의 주요 무대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 전에, 낯선 작가인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에 대해서도 조금 소개를 해야할 듯 하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나만 낯설었는지 꽤나 국내에도 그의 작품이 많이 소개되었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 특파원이나 종군 기자로서 활동했던 경력을 가진 그는,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고 한다.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뒤마 클럽> 등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 반응 역시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특히 <뒤마 클럽>은 현지에서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에 이름>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엄청난 찬사를 받았고, 심지어 영화화까지 되었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뭐, 나는 몰랐다고 하지만....

 

 

 

그런 그의 <공성전>.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소설의 배경은, 스페인 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 카디스의 18세기다. 이전까지만 해도 신대륙을 발견하고 남아메리카를 정복하기 시작하며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스페인이었지만, 나폴레옹이 지배하는 프랑스 제1공화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슬슬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 <공성전>은 바로 이 시점에 놓여있던 카디스를 그려내고 있다.

 

크게 세 갈래의 이야기가 함께 진행되어간다.

일단은 카디스를 포위하고 있는 '공성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프랑스 군함의 데스포소 대위의 시점.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카디스라는 도시의 특성상,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하루바삐 카디스 시내 한복판에 포탄을 날려버릴 수 있는 기술을 갖춰야만 한다. 그 임무를 맡은 데스포소 대위는, 어떻게 해야 포탄의 사정거리를 늘릴 수 있을가 하루하루 고민한다.

두 번째, 카디스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형사 티손의 시점. 계속해서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건만, 티손은 범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폭탄이 떨어진 장소에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확증도 물증도 없어 안개 속을 헤매는 것만 같다.

세 번째, 카디스의 유력한 집안인 팔마 사(社)의 후계자 롤리타 팔마의 시점.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오빠를 잃은 뒤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 전쟁 중 선박을 잃고 예전만큼의 이익을 내지는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팔마 사의 오랜 파트너였던 산체스 기네아의 제안으로 페페 로보 선장이 이끄는 '합법적 해적선'인 무장선에 투자를 시작한다.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는 페페 로보 선장과 롤리타 팔마의 로맨스가, 소설 속에서 서서히 진행되어가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역사라 함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그 뒤로 대륙을 하나 둘 정복하기 시작했다는 것, 한때 강력한 함대로 '무적함대'라는 별칭과 함께 바다 위에서는 최강자의 자리에 군림했다는 것, 엘리자베스 1세와의 혼인을 성사시키려 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것. 솔직히 그 당시의 유럽 역사라함은 침략과 정복이 대부분인지라 침략당한 역사를 가진 나라의 일원으로서는 솔직히 눈꼴시려 그닥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다. 나에게 이 <공성전>을 읽기 위한 배경지식은 그것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반은 좀 많이 낯설다. 일단 이름부터가 낯설고,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상황이 낯설고, 자꾸 시점(이라기 보다는 초점)이 바뀌어가며 각기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노라면 그 방대한 스케일에, 처음에는 커다란 그림이 그다지 잡히질 않는다.

 

 

그렇기에 꽤나 긴 호흡을 가지고 읽어가야 하는 소설이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가제본을 받아 읽게 되었으니 완벽하게 편집이 된다면 페이지수가 더 늘어날 것이라 예상하는데, 그렇다면 무려 900페이지에 육박하는 소설이 되고 만다. 그 많은 페이지 속에 그려낸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카디스와, 그 와중에도 벌어지는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이 상당히 빽빽하게 밀집되어있다. 그 와중에 다른 인물과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그 하나하나가, 작가의 펜끝에서 세세하게 표현되고 있다보니,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도 조금 난해하다. 로맨스인가, 미스터리인가, 혹은 전쟁 그 자체인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하며 읽어나가지만서도, 소설은 점점 꽤나 명확하면서도 각자의 상황이 잘 맞물려지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천혜의 요새를 바탕으로 프랑스 군함에서 발사하는 포탄의 사정거리 밖에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카디스 시민과 바다를 무대로 이윤을 창출해내는 기업가들의 모습, 그리고 전쟁과는 상관없이 살인사건을 수사하지만 묘하게도 전시상황에 맞아떨어져가는 듯한 단서들. 그 당시의 카디스의 모습이 정말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하나 둘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발견되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이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무래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나의 특성상, 이 세 갈래 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가지며 읽게 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살해된 소녀의 미스터리'를 그려내고 있는 티손 형사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는 데 이 곳에만 오로지 집중하고 있다면, 조금은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리 언급해둔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아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카디스의 전체적인 모습을 함께 조망하며 읽다보면 이 <공성전>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안개에 싸인 듯 묘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곱씹어보면 상당히 멋진 구성으로 이야기가 흘러감을 알 수 있다. 프랑스측과 스페인과 영국 연합군 측의 싸움이 끝내 어느 곳의 승리로 이어졌는지, 소녀들을 살해한 범인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그리고 '어떻게'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을 예측해 살인을 저질렀는지, 부유한 상인인 롤리타 팔마와 결코 '신사'라 할 수는 없는, 그러나 매력이 넘치는 페페 로보 선장과의 로맨스는 이루어질 수 있을지.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그 모습들을 하나하나 예상해보며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역시 미스터리 팬으로서라고나 할까, 범인을 쫓는 티손 형사의 집념과, 왠지 모를 로망이 있는 항해를 그대로 보여주는 페페 로보 선장의 모습이 상당히 크게 다가왔지만. 게다가 결코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정의로운 경찰 대신 자백을 위해 가혹한 고문도 서슴지않고 뇌물을 받아 챙기는 '바른' 모습 대신 '현실적인' 모습 역시 굉장히 생생했고.

 

게다가 종군기자로서의 작가의 경력 역시 상당히 소설 속에 잘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과거의 한 사건이 되었지만 그래도 전쟁은 전쟁. 작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대립으로 그들 사이의 알력 싸움이라거나 스페인 내부에서, 그러니까 카디스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유주의에 대한 바람과 움직임, 그에 따른 의원들과 성직자들의 행동 변화 등 전시(戰時)에 보여질 법한 다양한 모습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결코, 쉽게 읽을 수는 없는 소설이었다. 꽤나 집중력을 가지고 긴 호흡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해야한다. 잠깐잠깐 짬을 내어 읽다가는 소설의 틀이 잡히질 않으니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바짝 집중하며 소설을 온전하게 읽어보려 노력해야만 했다. 책을 읽는 동안도 꽤나 힘들었지만, 그랬던 소설을 이 자리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도 상당히 어렵고 곤혹스러운 일이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만큼 생생하게 묘사되어있는 스페인의 어느 항구도시의 옛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읽는 만큼이나 읽고 난 뒤의 성취감도 꽤나 상당하리라는 예상을 조심스레 하게된다.

 

이 소설만으로는,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헉헉...)라는 작가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치면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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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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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좋은 공부죠. 역사탐정이 될 수도 있지. 너, 조세핀 티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니?

-p.466, 「타락의 여름 : 우등생」, 스티븐 킹,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 스티븐 킹의 사계 봄·여름> 중

 

 

왜 뜬금없이 스티븐 킹의 소설 한 자락을 인용했느냐, 그것은 오늘 이 책을 읽는 도중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조세핀 티'. 아마 영어 발음은 [테이] 혹은 [티], 그 중간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찰 리들럼은 우등생 토드 보던과 이야기를 나누며 최근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에 이어 조세핀 티, 아니 조세핀 테이의 이름이 언급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얼마 전에 읽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의 작가를 뜻하기도 했다. 어쨌든 조세핀 테이, '역사탐정'(근데 역사 탐정이 뭐지? 역사 속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직업인가?)과 조세핀 테이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역사 소설 그리고 미스터리 소설에 꽤나 조예가 깊었구나 싶다.

 

 

 

 

바로 얼마 전,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읽으며 추리소설의 고전, 그 클래식을 읽는 즐거움에 한동안 빠져 있었는데 그 책 속의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에 이어 또 하나의 클래식, 게다가 여류 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미스터리 작가 중 여성은 누가 있었나 생각해보면,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이름만 들어봤지 정작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못한 도로시 세이어즈 정도일까. 조세핀 테이는 도로시 세이어즈, 마저리 앨링엄, 나이오 마시(누구신지..?;;)에 견줄 만한 여류 작가라고, 아마존의 한 독자는 평가를 하고 있다.

실제로 본명을 두고 다양한 필명을 사용해 작품을 발표한 그녀는 '고던 대비어트'라는 남자 필명으로 역사 희곡을, '조세핀 테이'라는 필명으로는 미스터리를 주로 발표하며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런 작가의 능력을 반증하기라도 하는듯한 작품,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그야말로 실화에 작가만의 해석이 덧붙여진 '미스터리'다. 프랜차이즈 저택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것인가?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는 변호사 로버트 블레어는 언제나 틀에 박힌 듯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만족하며 일상을 즐기고 있는 이다.

이 날도, 단 1분만, 몇 초만 일찍 사무소를 나섰더라면, 그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잠깐의 찰나에 걸려온 전화는, 그의 일상을 뒤바꿔놓기 시작했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인근 지역의 외진 곳에 세워진 프랜차이즈 저택에 살고 있는 매리언 샤프.

그녀의 말로는, 하지도 않은 유괴 사건의 범인으로 몰리고 있으니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샤프 모녀가 유괴 사건의 범인이라 주장하는 이는 열 여섯 살 소녀 엘리자베스 케인.

도중에 차를 얻어 탔으나 저택에서 납치, 감금한 뒤 옷을 빼앗고, 시트를 깁게 강요를 하고, 채찍으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주장하는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기억하기를 자신이 납치되었던 장소는 프랜차이즈 저택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샤프 모녀는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를 생전 처음 본다고.

샤프 모녀의 변호를 맡게 된 로버트 블레어는, 베티 케인이 주장하는 시간에 '프랜차이즈 저택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었음'을 증명해줄 수 있는 목격자를 찾아야만 한다.

베티 케인과 샤프 모녀의 엇갈린 진술. 진실은 무엇일까? 그들 사이의 진실 게임이 시작되었다!

 

 

 

 

 

베티 케인은 어떻게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었던 프랜차이즈 저택의 구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묘사할 수 있을까.

실제 구금되었다고 주장하는 기간 동안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도대체 어디에서 시간을 보낸 것인가.

그것을 밝히는 것이 샤프 모녀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기에, 로버트 블레어는 소녀들이 시간을 보낼 만한 카페를 중심으로 탐문을 시작하고, 그와 더불어 그녀의 증언의 허점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건의 냄새를 맡은 언론은 선정적으로 샤프 모녀의 범행을 기사로 발표하고, 인근 주민들은 하나같이 프랜차이즈 저택을 찾아와 담벼락에 낙서는 기본이요, 돌을 던져 창문을 깨고 방화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아직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단 말이에요?

우리 쪽 증거는 조그만 것 하나 없고 그 애 쪽 증거는 막 쏟아지는데도 말이에요?

그건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때문인가요, 아니면 선이 승리함을 본질적으로 믿는다거나 뭐 그런 건가요?

모르겠군요. 전 진실은 그 자체로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p.261

 

 

누가봐도 모범적인 소녀로 보이는 베티 케인과, 오붓하고 조용히 지내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그다지 없는데다 조금은 황량해 보이는 저택에서 살아가는 샤프 모녀. 둘 사이의 진실 공방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으니 어느 한 쪽이 진실이라는 결말은 그다지 큰 반전이나 임팩트를 안겨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물론 열 여섯 살의 한 소녀가 처참하게 폭행을 당한 채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체 한 구,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소설은 요즘 쏟아져나오는 자극적인 미스터리에 비하면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와중에, 샤프 모녀와 블레어 진영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탐문과 알리바이를 확보해 논리적으로 사건을 검토해 보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은 클래식. 고전의 반열에 올라 오랜 시간 사랑받는 소설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밝혀내는 진실 공방이 전부이건만, 이 소설, 상당히 몰입된다.

 

누가 봐도 너무나도 얌전하고 귀여운 소녀 베티 케인을 납치 감금해버린 샤프 모녀는 대중들에게 어느샌가 '적'으로 몰리고 말았다.

로버트 블레어는, 모녀의 무고함을 밝힐 뿐 아니라 대중들의 마음까지 되돌리기 위해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의 실체를 재판정에서 낱낱이 까발리려고 결심한다.

그 근거를 논리적으로 준비하는 한편, 재판 과정에서 벌어지는 증인과 피고와 원고 사이의 대립을 지켜보는 것은 웬만한 법정스릴러 못지 않았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 '조세핀 테이'이자 '고던 데비어트'로 역사와 미스터리 두 곳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녀의 진가를 만나볼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실제 18세기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캐닝'이라는 소녀가 유괴되어 하녀로 일할 것을 종용받았다고 주장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유괴범으로 몰린 이는 그녀를 본 적도 없었다고.

그들 사이의 진실 공방은, 끝내 무엇이 진실인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 역시 제시되고 있다고 하는데(영어라 제대로 못 읽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시고 영어를 소화하겠다! 하시는 분은 여기 그리고 여기를 참고하세용:), 조세핀 테이 역시 엘리자베스 캐닝을 엘리자베스 케인,으로 바꾸어 실제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해 그녀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다.

 

 

 

 

엄청난 반전도, 시체의 산도 없다. 자극적이지도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지도 않지만,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상당히 매력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논란을 불러 일으킨 실화를 바탕으로ㅡ이게 현실의 사건이라 생각해보라. 사람들은 얼마나 이 사건을 입에 오르내리며 진실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까!ㅡ재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로버트 블레어와 누구나 자기 편으로 이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샤프 모녀, 그리고 그 밖의 개성있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이 소설의 재미를 한껏 높여준 것 같다.

 

 

 

 

클래식,으로 배경은 분명 옛날이지만, 지금 읽기에도 그다지 손색이 없는 멋진 추리소설이었다.

이미 오래 전의 작가라 한들, 나에게 새로운 미스터리 작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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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2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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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말입니다, 선생. 어딘가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다만 그것을 행복으로 느낄지 어떨지에…달린 것이겠지요. 사람은 모두 꿈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몽만 꾸는 것은 아니라고, 소생은 그리 생각하지요. 전부 꿈이라면 거짓도 거짓임을 알기 전까지는 진실.

하지만 거짓이 진실로 변해…

-p.229

 

 

 

 

요괴의 소행,으로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를 새로운 해석으로 내놓은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의 후속작, <속항설백물어>가 드디어(라고 하지만 벌써 한 달이 되었다만;) 출간되었다. 이미 진작에 <항설백물어>를 읽었던 이에게는 몇 년 만의 후속작이 반가울 것이었고, 출간 소식과 함께 <항설백물어>를 읽고 애태울 것도 없이 바로 속편을 펼칠 수 있다는, 여차저차 반가운 소식인 것이다. 전편만한 속편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 다음 작품인 <후항설백물어>로 나오키상을 수상한 만큼, 갈수록 더 재미있어지리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쁜 기대감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시리즈에 맞게, 통일성 있는 표지가 매력적이다. 여섯 편의 이야기로 지난 편에 비해 이야깃수는 하나 줄어들었지만, 두께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난 듯하다. 이번에는 또 어떤 설화를 재해석했을지, 모모스케와 모사꾼 마타이치와의 접선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들이 벌이는 연극은 또 얼마나 변해있을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밀도있게 담겨있기에, 이런 두께가 되어버린 것인지. 이리저리 기대를 하면서 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마에 돌멩이가 그대로 '박혀' 죽는 괴이한 사건을 그려낸 「노뎃포」, 목을 베어도 몇십년에 걸쳐 다시 살아나는 불사신 요괴 기에몬의 정체를 파헤치는 「고와이」, 가는 곳마다 불을 부르는 한 여인의 정체를 쫓는 「히노엔마」, 표주박을 건네주면 바닷물을 계속 퍼올려 배를 침몰시키는 유령 「후나유레이」, 한 고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끔찍한 연쇄살인의 주범 「사신 혹은 시치닌미사키」, 그리고 죽은 영주의 유령이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한 무사의 이야기 「로진노히」까지. 이번에도 역시 인간의 어둠에서 비롯된 사건을 잔머리 모사꾼 마타이치와 그 일당인 인형사 오긴, 지헤이 영감까지. 게다가 새로운 인물이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는 '무사 우콘'도 등장하게 된다.







결론은, 결국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의 마음 속 어둠일 뿐, 이라는 것이다. 그 연극을 지켜본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더라도, 독자에게는 세상에서 진정으로 이상한 일은 없을 것이며, 그 모든 혼란은 사신도 유령도 저주도 아닌 인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작 <항설백물어>와 여전히 같은 계보를 잇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속항설백물어>는 전작과는 분명히 다르다.

 

<항설백물어> 속 일곱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독립성이 강했지만, <속항설백물어>는 여섯 개의 이야기가 독립성을 띠고 있는 동시에 전체적으로도 연결된다. 단편 하나하나로도,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적인 이야기로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나 '연극의 주역'이었으나 '이야기의 주역'은 되지 못했던 일당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던 찰나에, 그들의 과거 역시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옛날 이야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해 이리저리 기담을 수집하러 여행을 훌쩍 떠나곤 하는 모모스케는 도대체 무슨 수입원을 가지고 있기에 한량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지헤이 영감과 인형사 오긴, 그리고 마타이치에게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무숙인'의 신분에 놓이게 된 것일까.

 

어디선가 의뢰를 받아 훌쩍 연극을 벌이기 위한 물밑작업을 하는 일당들과, 자기도 모르는 새 일당의 연극에 참여하게 된 모모스케. 그들의 겉모습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항설백물어>와는 달리, 이번 <속항설백물어>는 그렇게 모모스케의 출생의 비밀이라던가 지헤이 영감의 과거, 오긴의 가족사 등 일당들이 '이야기의 주역'이 되어 그들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가, 새로운 등장인물 방랑 무사 '우콘'의 등장 역시 이야기에 활기를 더해준다.  첫 이야기 「노뎃포」에서부터 이리저리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모모스케를 위해 이야기를 수집해오곤 하는 책장수 헤이하치의 한 마디에서 출발된 '시치닌미사키'의 저주는 각 단편의 전반에서 불쑥불쑥 배경처럼 등장하다 끝내 「사신 혹은 시치닌미사키」에 이르러 그 저주의 실체를 파헤치는데 이른다. 우연찮게도 헤이하치 뿐 아니라 지헤이 영감, 오긴과 단 둘의 여행길에 오르게 된 모모스케는, 그 '시치닌미사키'의 다양한 소문의 원류를 쫓아 오긴과 동행하던 중 낯선 무사에게서 미행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인연이 닿게 된 '우콘'과의 만남과 그가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은, '시치닌미사키'의 저주를 파헤치는 데 몰입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설 전체의 흐름에도 잘 녹아들어 소설의 완성도를 높였다.







어떤 이야기의 속편, 이라는 것은 전작에 잇닿여 있을 뿐 아니라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속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살포시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속항설백물어>는 속(續)의 의미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극 배우'였을 뿐 정작 자신들의 이야기는 그다지 들을 수 없었던 전작과는 달리, 그들의 속내를, 그들의 과거를 들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항설백물어>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설백물어> 속 작품 하나 하나 사이를, 신출귀몰하는 일당들의 여정을 이어준다. <속>을 읽는 도중도중 전작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사건이 또 다시 언급되거나, 또 다른 사건 해결을 위해 떠나는 여정의 목적지가 전작에 이미 등장하는 등 전작을 읽은 독자는 반가운 이야기 역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속편은 속편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는 '출간 순서' 그대로, <항설백물어> 그리고 <속항설백물어>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일본에서는 그에 이어 나오키상 수상작 <후항설백물어>, 마타이치 일당이 모모스케를 만나기 이전의 활약이 담긴 <전항설백물어> 그리고 2010년 최신작 <서항설백물어>까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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