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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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이나 영화는 그 글과 장면 속에 의미가 함축되어있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것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축에 속하기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창작자의 의도와 감정이 전해져 온다. 그렇기에 어떤 한 장면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함께 화를 낼 수도 있으며 즐겁게 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예술적 감수성은 가히 바닥을 치는 수준인지라─나의 두개골을 열어보면, 우뇌와 좌뇌의 크기가 확연하게 다를것이 틀림없다!─일상적으로 다가오는 음악에 대한 이해는 거의 못 할 정도라고 보면 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면 가사와 멜로디가 어우러져 좋다, 아름답다,라는 것은 알 수 있고 또 그렇기에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쪽으로는 영 문외한이구나, 역시 예술적인 영감은 나에게 참 부족하구나, 라는 것을 절절하게 체감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최근 상당히 열풍을 몰고 있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볼 때다.

  내가 듣기엔 똑같은 노래인데, 심사위원들은 참가자의 노래를 듣고 그 미묘한 차이를 감지해 낸다. 물론 노래를 하는 데 있어 기술적인 측면은 당연히 전문가인 그들에게 훨씬 확연하게 다가온다. 아니, 그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아닌 마음의 문제, 바로 그것을 그들은 정확하게 캐치해 내는 것이다. 참가자의 노래 속에 서려 있는 사연과 절절함,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린다. 내가 듣기엔 똑같은 노래인데, 똑같이 슬픈 가사를 노래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본다. 그 미묘한 차이를 누군가가 짚어준다면. 그 미묘한 차이를 짚을 수 있으면서 그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전해 줄 수 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1979년~2010년 동안의 미발표 에세이와 단편소설을 한꺼번에 모아 '잡문'이라는 형태로 묶어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그야말로 잡다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문집이다. 잡문의 향연이다. 크크크.




설날 '복주머니'를 열어보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입니다. 복주머니 안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는가 하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거야 뭐 어쩔 도리가 없겠죠. 복주머니니까요._p.15




  '대강 이런 느낌이 비슷하다'는 식으로 글을 다양하게 분류해 소개하고 있는 <잡문집>에는 다른 책의 서문이나 해설, 인삿말이나 메시지에서부터 음악, 번역, 인물,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글로 엮어낸 것 등등 편집자와 작가가 속닥속닥 모의를 하는 듯 풀어내고 있다. '어디까지나 잡다한 심경'이라고 머릿말에서 밝히고 있지만, 거기서 넘어가자마자 코웃음을 치고 만다. '어디까지나 잡다한 심경은 무슨! 너무 꼼꼼하잖아!'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그의 [잡문]들로 처음 만났다. 다시 말하면, 이 <잡문집>이 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만남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가 풀어놓고 있는 '썰'들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수많은, 하루키를 읽은 수많은 독자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얕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챈들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에게 재즈란 어떤 것인지 내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에게 소설이란 어떤 의미인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가는지, 당연히 모른다. 소설을 읽어봤어야 말이지. 하다못해 에세이라도.


  그렇기에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지금까지 그의 글을 읽으며 쌓아온 시간들을, 그 때의 감정들의 축적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즐거운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고 감탄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잡문'으로만, 그렇게 분류가 되어있구나, 고개를 끄덕끄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문집>에 실려 있는 '잡문'들은 그렇게 잡문으로만 분류되어 읽고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문장들이다.

  짧게 실린 에세이에도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프로 작가로서의 꼼꼼함과 치열함이 녹아 있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을 깊이있는 내공으로 쌓아왔구나,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인사를 하기 마련인 새해 인사나 결혼식 축하 메시지 등에도 깊은 연륜이 녹아 있다. 슬쩍 지나가듯 꺼낸 이야기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정이 담뿍 녹아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다시 보인다. '주변'만을 둘러보고 있는 나의 좁은 시선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넓혀 둔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음악의 그 '미묘함'을, 누군가가 짚어주길 바라고 있던 미묘한 음악 속의 감정을, 도대체 어디서 잡아내어 글로 써내려갈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글에는 독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함보다는 옆집 아저씨가 '그래, 이건 이러이러한 거야'라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포근함이 서려 있다. 해가 저물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단골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 마시는 친근함이 녹아 있다.




  그야말로 '복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을 하나 하나 꺼내보듯 문득 손에 연필이 쥐어지지 않을 때, 보고 있는 글자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을 때 한 편 한 편씩 야금야금 읽어내려갔다. 그래, 복주머니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냥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읽어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공감 못하는 것은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니까.

  어느 정도 하루키를 알 것 같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까마득하게 멀기만 해 보였던, 중학생 시절 친구가 읽고 있던 <상실의 시대>를 함께 읽다가 '이게 무슨 소리야!' 한 이후로는 가까워질 수도 가까워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친숙해졌다고 내 맘대로 정해보면 안 되려나.


  그렇게 또 한 명의 작가를 알아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즐겁게 읽었던 [잡문]은 「좋을 때는 아주 좋다」는 결혼 축하 인사, 그야말로 미묘한 예술의 세계를 글로 잡아내어 나에게 보여준 「빌리 홀리데이 이야기」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번역론을 펼치고 있는 『번역하는 것, 번역되는 것』의 챕터. 복주머니 속 수많은 선물 중에서도 보석같은 잡문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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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여우 발자국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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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내가 뭘 또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이상한 광경이었다. 사람의 발자국은 저렇게 동그란 나뭇잎 모양을 남기지 않는다. 더욱이 매번 잉크병에 발을 담갔다 빼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선명한 검은 자국을 남길 수 있나._p.23

 

 

  단 한 번 비틀어도, 안과 밖은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 현실과 허구는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가, 클라인 병이, 에셔의 그림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조선희의 <거기, 여우 발자국> 역시 비슷한 맥락에 놓인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마주보고 붙어 있는 거울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 모습을 찾아보는 것 같은.

 

 

  그는 실체가 환상으로, 환상을 실체로 본다. 환상이라 생각했던 어떤 여인을 따라 발길을 이어온 곳에는, 서른 두 개의 구멍창을 가진 건물이 있었다. 그에 매혹된 '태주'는 기묘한 나뭇잎 모양 발자국을 따라 건물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는 기이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에 '거기, 눈구멍 뒤에'라는 이름의 카페를 연다.


  그러나 소문이 사실인 것인지, 혹은 태주가 여지껏 보던 환상과 똑같은 것인지 카페에는 기묘한 발자국이 남는다. 게다가 불쑥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소녀 '노라'와 늘 홍우필이라는 여자가 녹음했다는 테이프 속 이야기를 듣는 '동오'형 그리고 연인인 '소정'과 카페의 종업원으로 고용된 '윤원'이 그 건물에 머물면서 태주는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아닐까 하는 의문과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한편, 또 다른 주인공이 한 명 있다. 이야기를 실체로 불러들이는 기묘한 목소리를 지닌 여자 '우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학창시절 자신의 목소리에 휩싸여 사라진 친구가 있었고, 이야기 속에 휩쓸린 자신의 고용주가 있었다. 자신이 머물던 하숙집에서 묘한 발자국을 발견한 그녀는 그 발자국을 스케치했고, 그 스케치를 연인이자 친구였던 재곤에게 빼앗겼으며, 그 이후 '여우 발자국을 내놓으라'는 정체가 불분명한 4인조에게 시달린다.


  그리고, 꼭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며 절박하게 녹음을 부탁하는 박현의가 건네준 책 『거기, 눈 구멍 뒤에』를 조금씩 읽어나가는 우필은, 박현의가 그 이야기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지 의문을 품는다. 그 이야기 속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들어있기에?




나는 네가 말하는 너고 너는 내가 말하는 너야. 우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다고 여기는 세상을 보며 살아. 하지만 말이야, 사람들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 네가 보는 내가 내가 보는 내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보는 네가 네가 보는 네가 아닐 수도 있잖아?_p.108




  그렇다. 이 소설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이야기고 현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허구인가,라는 것이다.

  우필 그리고 태주가 주인공이 되어 병렬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이야기는, 처음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그 두 이야기의 바깥에 있는 독자로서는 각자 그들의 '현실'에서 바라보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서로임을 발견한다. 우필이 매 주 조금씩 녹음하는 이야기 속에는 '홍우필'이라는 여자가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있는 태주가 등장하고, 태주가 듣는 테이프 속에는 홍우필이라는 여자가 책을 녹음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허구인지 골라보라며 말문을 연 이야기이건만, 정답은 없다. 태주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태주의 현실에 있는 것이고, 우필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우필의 현실에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쪽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다음 번에서는 아니, 저쪽이 이야기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고 생각한 찰나 출발점에 서 있었고, 떨어지는 물을 바라본 찰나 그 물은 다시 폭포를 이루기 위한 물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사실적 뼈대에 허구의 살을 발라 만들지. 그냥 그런 거라고._p.138





  그렇게 에셔의 그림을 보는 것 마냥, 마주본 거울 속에서 어디 쯤부터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지를 지켜보는 것 마냥 한없이 이야기 속에 빨려들어갔다.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렇게 쭉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불어 두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그마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그 진상은 무엇일지를 나름대로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발자국을 찾는 이들이 그토록 여우 발자국을 바랐던 이유는 무엇인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우필과 태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뒤틀린 시공간 그 곳에는 무엇이 있을지 말이다.


  그렇게 무한한 순환의 궤도에 나를 올려놓은, 한 번의 비틀림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냥 그런 거라며 툭 비틀린 이야기를 선보인 조선희 작가의 또 다른 비틀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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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브레이크 호텔
서진 지음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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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인데, 가장 부끄러워지는 순간은 바로 나 혼자만 알고 싶었던 기억, 생각, 마음을 들켜버렸을 때가 아닐까 싶다.


  나는 일본 영화 <사토라레>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이 여과 없이 남에게 노출될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이 안타까웠고, 그의 은밀한 속내까지 견디며 인내해야 했던 마을 주민들이 안쓰러웠다. 물론 희대의 천재,를 보호해주는 명목에서 꽤나 지원금을 받은 것 같았지만.


  영화의 설정일 뿐이니 뭐 그건 그렇다고 하자. 확실한 건, '기억'이란 나만이 가지고 추억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오직 나만의 세계에서, 내 마음껏 추억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변형하고, 그것을 간직한다.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것을 만들어간다.




야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_p.361, 작가의 말




  그렇기에 서진 작가의 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의도대로 꽤나 '야한' 소설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그가 말하는 '야한 소설'이란 에로 소설도, 로맨스 소설도 아니다.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자가 끄집어낸 기억의 한 조각에 순간 아찔해져 버리고 마는 것, 가장 은밀한 무언가를 나도 모르게 엿보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그런 것이다.




  총 여덟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편들을 잇는 매개는 바로 '하트브레이크 호텔'이다.



그대 나를 버린 지금, 새로운 거처를 찾아냈어요. 쓸쓸한 거리의 끝에 있는 핫브레이크 호텔(상상 호텔)을. 너무 쓸쓸해서 죽을 것만 같아요. 언제나 붐비고 있는 호텔이지만, 방을 얻을 수 있었다오. 나는 어두운 그 곳에서 울고 있다오…._Elvis Presley, Heartbreak Hotel



  그러나 그러한 '사랑의 기억' 그리고 '하트브레이크호텔'을 매개로 삼고 있지만, 그들을 매개로 하고 있는 소설의 색채는 상당히 다채롭다. 각기 다른 도시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일곱 명의 화자는 저마다 독특한 기억을 안고 있는 것이다.

  「황령산 드라이브」를 즐기며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 아내를 잃은 뒤 혼자 「두 번째 허니문」을 떠난 남자, 사랑이 어느덧 「당신을 위한 테러」가 되어버린 여자, 「구원의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위태롭게 살아가는 남자, 채팅 대화방 속에서 「미래귀환명령」을 받은 여자, 끊임없이 「휠 오브 포춘」을 돌리며 현실을 두려워하는 남자, 「내 머릿속의 핸드폰」소리에 끊임없이 시달린다는 소설가 서진과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여자까지.


  소설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고 있는 「황령산 드라이브 Part.1」과 「황령산 드라이브 Part.2」는 처음부터 '동성애'라는 파격적인 코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내를 잃고 홀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신혼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노인은 준비해간 'Chew-X'라는 알약을 먹고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으로 빠져들고,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채팅 상대의 말에 워싱턴 DC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엘리사는 서서히 상대의 말에 설득당하기 시작한다. 라스베이거스에서 행운을 거머쥐고 싶은, 다가오는 현실이 너무 두려웠던 한국인 유학생은 카지노에서 좀비와 맞닥뜨리는 등 각기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하트브레이크 호텔' 밖에는 그만큼 다양한 배경과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하트브레이크 호텔'에는 바로 각자 등장인물들의 '사랑의 기억'이 머무르고 있다. 아니, 꼭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그들은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한 발 내딛는 순간 간직하고 싶었던 가장 은밀한 기억과 조우하게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른다. 물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미남이냐 혹은 벌레들로 우글거리느냐에 따라 체감하는 속도는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은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기억의 속도는 제각기 다르다.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행복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과거 그대로 고요히 재생될 수도 있고, 잊고 싶지만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 당시 상황 하나하나가 쉴 새 없이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그런 기억들을 재생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 그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들은 '하트브레이크 호텔'로 연결되어 미로를 헤맨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지워버린다. 단편 하나 하나에 다양한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굉장히 '의외'의 모습을 하면서 그려내고 있는 주제는 생각보다 보편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보편성' 속에서 내 모습을 찾아내고 그 보편적인 '나'를 독특한 상황 속에 밀어넣는다. 그리고 나는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대신 같은 상황에 처한 '나'의 모습을 다시 상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상상 속 나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되어, 나만의 은밀한, 그래서 '야한'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시공간에서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나는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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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의 유령 작가정신 청소년문학 5
베라 브로스골 지음, 공보경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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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가 있다. 이란인인 작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서 타국인들은 이란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단편적인 조각만을 가지고 판단하는가를 깨닫고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삶을 만화로 그려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리주의자들과 테러, 혁명으로 뒤흔들렸던 이란은 이란이었고, 이란인으로서 이방인으로서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혼란과 고뇌에 빠진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이란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조금 특수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고, 타국에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은 의외로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냐의 유령>이라는 책 소개를 보자마자 떠오른 것이 바로 이 <페르세폴리스>였다. 자국을 떠나 타국에 머무르는 소녀의 시선을 만화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참 닮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사춘기 소녀 아냐는 무슨 일을 겪게 될까.

 

 

  나는 살이 쪄서 고민인데, 어머니는 계속 기름진 음식을 먹으라고 권한다. 옆에 있는 남동생은 누나 속도 모르고 눈치 없이 떠들고 있다.

  나를 보고 웃어주나 했더니, 뒤에 있는 아이를 보고 있는 거였다. 오르지 못할 것 같은 농구부 남학생 숀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노라니 하나뿐인 친구 시오반은 옆에서 속을 박박 긁는다. 실없이 담배나 한 대 피워물고 있노라니 몇 안되는 개수로 시오반과 이러쿵저러쿵 말다툼을 한다.

  모든 것이 갑갑해진 그녀는, 학교 대신 시내 외곽의 외진 곳을 향한다. 딴 생각을 하며 걷다가 그녀는 우물 구멍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그 우물 구멍에는 90년 전 살해당해 죽었다는 소녀의 유령이 살고 있었다. 유령은 아냐가 우물 구멍 안에서 자기와 만난 것이 퍽 기쁘고 즐거운듯 했지만, 아냐는 그 모든 것이 시큰둥하기만 하다. 오히려 죽은 소녀의 해골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무사히 우물 밖으로 구출되어 일상을 보내던 것도 잠시, 아냐의 가방 속에 들어있던 작은 뼛조각 덕분에 유령 소녀는 아냐의 옆에 머물게 된다. 아니, 오히려 아냐를 돕겠다고 나선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도 안고 있었던 아냐는 조용히 학교에 따라와 자신을 돕는 유령 소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냐는 유령과 친구가 되고, 매일매일 그녀와 함께 보내는 하루는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유령 소녀의 모습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애정어린 조언과 충고였던 유령 소녀의 속삭임은 걷잡을 수 없는 집착과 방황으로 변해가고, 그에 더불어 아냐는 90년 전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유령 소녀의 진실에 이르게 된다.

 

  급기야 아냐의 동생까지 위협하기 시작한 유령소녀. 아냐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번쯤 초능력이 생겨 누군가가 답을 알려주기를 바라거나, 아무에게나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나만 보이는 친구가 있었으면, 이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봤으지도 모른다.

  베라 브로스골의 <아냐의 유령>은 분명 러시아 출신인 작가 스스로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을 미국 적응기를 바탕으로 그 상상력을 상당히 깔끔하고 공감가는 캐릭터 아냐와 유령 소녀를 등장시킴으로써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낸 그래픽 노블이다.

 

 

  그녀의 모습은 다만, 미국에서 살고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살, 남자아이, 친구관계, 성적 등등 전 세계 어디에 있든 아이들의 고민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다.ㅎㅎ

 

  그렇게 아냐를 둘러싼 고민은 한없이 그녀를 가라앉게 만드는데, 그것을 작가는 '우물 구멍'이라는 것으로 구현해낸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부터 다시 아냐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그 계기는 90년 전 살해당한 유령 소녀로 인한 것이다.

 

  아냐는 그야말로 언제나 다이어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러시아에서 이민을 온 것 때문에 소위 '잘 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학교 생활을 적응하기도 힘들 뿐더러 성적도 좋지 않은 자신이 지겹기만 하다. 그리고 그녀는 우연한 유령 소녀와의 만남을 통해 사춘기 소녀의 감성으로서는 상당히 클지도 모르는 몇몇 사건들을 겪는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모두 겉모습에 불과한 것이었어,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이야,와 같은 청소년 소설의 전형적인 깨달음을 겪고 조금은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 날까?

 

 

  의외로, 이 그래픽 노블은 그 전형적인 성장의 코드를 녹여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아냐는 아주 조금 '철이 든' 소녀일 뿐이다.

  유령의 등장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한결같이 현실적인 설정과 캐릭터 그리고 결말까지 소설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거창한 깨달음 대신 오히려 그래, 어느 정도 갈등을 겪고나면 저런 모습일지도 몰라,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성장이 의외로 독특하게 다가온다. 상당히 전형적인 메시지를 던질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 속에서 의외로 탄탄한 현실을 만난 당혹스러움이라 할지 반가움이라고 할지.ㅎㅎ

 

  미스터리를 너무 많이 읽어서일까, 실은 그보다는 유령 소녀가 왜 살해당했으며 우물 바닥과 함께 가라앉아버린 90년 전의 진실은 무엇이었을지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졌는데 그보다는 역시 '아냐'라는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보니 유령 소녀의 사연은 내 상상만으로 채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오랜만에 사람다운 삶을 모방해 가면서 삶을 더욱 갈구하게 되어버려 점점 난폭하게 변해간 '아냐의 유령'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한 번 만나보고 싶구나.

 

 

  같은 이민자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아냐의 유령>이지만, 상징과 풍자가 절묘하게 녹아있는 <페르세폴리스>와 달리 <아냐의 유령>은 사회보다는 한 소녀의 성장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정신의 청소년 문학으로 출간된 시리즈인 만큼, 스토리를 기대하는 나보다는 아냐 또래의 소년소녀들이 읽으면 조금 더 즐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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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
코바야시 야스미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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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서명』에서 셜록 홈즈는 이렇게 말했어. '아무리 그럴듯하지 않아도 모든 조건 중에서 불가능한 것을 제거하고 남는 것이 진실이라고.'_p.240



  어린 시절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추리소설은 거의 대부분이 셜록 홈즈 시리즈이다보니 그 책을 읽고 있노라면 종종 셜록이 책 속에서 툭 하고 던져놓는 '이렇게 탐정을 찾아봐!'라는 복선과 암시를 주며 독자에게 수수께끼를 풀어보라고 하기는 커녕 셜록은 혼자서 신나서 북치고 장구치고 사건 해결하고 땡끝!


  아, 이게 아니고. 셜록은 그 와중에 자비(?)를 베풀어 '도대체 자네 머리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게 틀림없는 존 왓슨 박사에게 이러저러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독자는 그 때 이러저러했다, 하고 밉살맞지만 설명을 해 주는 명탐정의 말씀을 새겨듣는 것이다.


  나 역시 <네 개의 서명>에서 소거법을 언급하며 아닌 걸 다 보여주면 남게되는 하나가 바로 진실이다라는 이야기를 처음 접하고 오호라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난다. 후후후.

 

 

 

소거법을 적용할 때에는 먼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나씩 지워 가다 마지막에 남은 것을 진실이라 보지. 하지만 정말 모든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소거법을 추리에 이용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 말한 점들을 명심해 둘 필요가 있지. 아니면 소거법은 무척 위험한 방법이 되어 버리니까._p.19~20





  코바야시 야스미의 <밀실·살인>은 '소거법을 과신하면 위험하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그러한 소거법으로는 풀기 힘들 수 있을 사건을 풀어나가려 하니 한 번 맞춰보세요~라는 듯 느긋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리카와 탐정 사무소에서 조수로 일하고 있는 요츠야는 선생님께 이런저런 탐정으로서의 자질을 배움과 동시에 '정체가 많이 알려지면 탐정 일을 할 수가 없다'는 핑계로 언제나 손님 접대에서부터 주변 탐문 등 잡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암묵적으로 종종 요리카와 탐정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하는 타니마루 경부는 ''소거법'에 대해 이런저런 논리를 펼치고 있는 요리카와 탐정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요츠야에게 손님을 보낸다.

 

 

 

  다짜고짜 탐정 사무소를 찾아온 니시나 부인이 꺼낸 말은 '아들의 결백을 밝혀달라'는 것. 살인인지, 자살인지, 사고인지조차 판별할 수 없는 기묘한 상황에 맞닥뜨린 타니마루 경부는 요리카와 탐정에게 SOS를 요청한 것이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요리카와 탐정은 슬슬 출발할테니 일단 현장을 최대한 빨리 살펴보기 위해 요츠야는 사건 현장에 먼저 달려갈 수 밖에 없다.




"밀실이 있고 살인이 발생했으니, 밀실 살인이겠죠."

"밀실 살인의 정의는 뭔가? 밀실 안에서 시체가 발견된 살인사건인가? 그렇다면 이 사건은 밀실 살인이라 할 수 없겠군. 시체는 밀실 밖에서 발견되었으니까." 타니마루 경부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

"'밀실 살인'은 법률 용어도 아니고 경찰 용어도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엄밀히 따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꼭 구분을 하고 싶으시면, '밀실'과 '살인' 중간에 가운뎃점을 찍는 게 어떨까요? '밀실'이 하나 있고, 살인사건도 발생했으니까요."_p.123




  확실히 참으로 기묘한 상황이다. 밀실은 밀실이고, 살인은 살인일 수 밖에 없는 상황. 밀실 그리고 사건이 분리되어버려 밀실 속에서 살인이 벌어진 건지, 단순한 추락으로 인한 사고사인지, 자살인지조차 헷갈리는 상황. 코바야시 야스미는 소거법을 위해 '모든 가능성'을 생각해 보라 했는데 사건에 있어서도 '어떤 가능성을 지닌 사건'을 만나볼 수 있을지 상상을 해 보라는 듯 도전장을 내민다.


  더불어 사건이 벌어진 별장 부지라 할 수 있는 '아지 산'에 얽힌 기묘한 소문들이 계속 요츠야의 주위를 맴돌며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와 함께 전직 경찰이었던 요츠야의 트라우마의 실체가 서서히 밝혀지며 오싹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요리카와 탐정이 상당히 능청스럽게 소거법 등 미스터리의 요소라고 할지 기법이라 할지에 대한 이런저런 논평을 보면서 그 상황들이 적용되기 어려운 사건을 만들려고 하는가보다 하고 짐작하게 만들고, 책의 가장 처음과 중간에 삽입된 기묘한 독백과 문득문득 요츠야를 덮치는 과거의 트라우마 그리고 본디 신사(神社)였던 산의 본체를 깎아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의 별장, 이를 둘러싼 저주에 관한 소문 등이 뒤섞이며 이야기는 상당히 독특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결말에서는 사건의 전모와 더불어 또 다른 진실이 하나 밝혀지는데 그제서야 나는 뭔가 기묘했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수많은 요소들이 책 속에 녹아있는 것이 자연스럽기 보다는 이질적인 것을 뒤죽박죽 섞어놓은 기분이다.


  요리카와 탐정의 입을 빌려 작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미스터리에 대한 이야기들─앞서 말한 소거법과 같은─은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산만해 이야기의 흐름이 잘 따라가지 못했고(심지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모든 가능성'을 주장했던 요리카와 탐정은, 정작 자신이 펼쳐놓은 가능성은 한계에 부딪힌다), 도중도중에 나오는 요츠야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도 호기심을 유발하기 보다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등장에 나를 당황시켰다. 게다가 뭔가 묘하고 흐릿한 결말까지……. 현재 이 책을 읽은 분들 사이에 결말에 대한 논란이 이리저리 벌어지고 있어 나도 살짝 의견을 피력해 보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 책 속에서 작가의 회심의 유머도, 본격 추리에 대한 애정도, 호러의 요소도 책 속 군데군데에서 느껴지지만, 그것을 단지 물리적으로 섞어두기만 했다. 그 속에서 화학 작용이 일어나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밀실 그리고 살인이 분리된 것 만큼이나 소설 속 작가의 의도와 욕심은 모두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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