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인의 항아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클라인의 항아리, 또는 클라인 병(Klein Bottle)이라 불리는 형태는 잘 알려진 '뫼비우스의 띠'의 4차원 형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는, 띠의 안쪽을 걷고 있다 생각했지만 어느샌가 바깥 쪽을 걷고 있더라, 다시 말해서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형태인데, 클라인의 항아리 역시 마찬가지다.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바깥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병의 안쪽에 있고, 안쪽이라 생각했으나 병의 바깥이었다, 그런 식이다.

 

위상기하학적으로 4차원에서는 클라인의 항아리가 완벽한 형태를 띨 수 있지만, 3차원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형태를 상상할 수 없기에 3차원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형태로 그려낸 것이 바로 병의 주둥이가 병의 안쪽을 뚫고 들어가 바닥에서 만나는 형태다. 이 4차원의 초입체를 독일의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고안했기에 '클라인 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부터 게임 속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게임이 현실이 되는 거지. 가슴이 설레.

-p.48

 

 

오카지마 후타리(岡嶋二人),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두 명이 콤비를 이루어 쓴 작품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 <클라인의 항아리>는 그야말로 클라인의 항아리 같은 소설이다.

한 남자의 독백이자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는, 1989년 이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시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우에스기 아키히코는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어드벤처 게임북의 원작을 응모했지만, 규정에 벗어난 분량으로 인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입실론 프로젝트라는 회사에서 자신들이 개발하고 있는 게임의 원작으로 삼고 싶다는 제안이 들어오면서 회사와의 인연이 생기게 된다. 덕분에 철저하게 기밀에 부쳐지고 있던 프로젝트의 일면을 어느 정도 소개받고 Klein-Ⅱ의 모니터링을 맡게 된다.

게임 사용자의 의외의 움직임을 모두 모니터하고 싶다는 뜻에서 게임 원작자인 우에스기와, 또 다른 모니터 요원 다카이시 리사는 그렇게 K-Ⅱ의 모니터링을 시작한다.

K-Ⅱ는 바로 직원들이 속칭 '클라인의 항아리'라 부르는 기계 속으로 사용자가 들어가 게임을 하는 형태로, 사용자의 몸에 완벽하게 밀착된 스펀지는 게임이 시작되면 사용자의 모든 감각을 현실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준다.

발 밑에서 흔들리는 풀도, 얼굴을 어루만지고 흘러가는 바람도 '진짜'처럼 느껴지는 가상현실 속에서 게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에스기는 순식간에 이 K-Ⅱ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게임을 하나 둘 클리어해 나가기 시작한다. 반면 다카스기 리사는, 게임의 시나리오를 따라 움직이는 대신 살육전을 벌이며 게임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시작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

하지만 어느 날,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행동을 한 리사는 그 다음부터 행방이 묘연해지고, 우에스기는 자신의 주변의 현실이 미묘하게 비틀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도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눈에 보이는 광경은 프로젝터가 망막에 비추는 영상이다.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고성능 헤드폰이 보내는 소리요, 신체가 느끼는 진동도 가짜다. 이것은 가상현실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현실과 똑같았다. 나는 K-Ⅱ가 창조한 이미지 속에 오싹할 정도로 완벽하게 갇혔다.

-p.77

 

 

굳이 미스터리로 분류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범행 동기와 범인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 모니터링이라는 소재와 '가상 현실'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그 속에서 벌어진 실종사건과 과거의 사건들이 하나 둘 어우러지기 시작하면서, 입실론 프로젝트라는 회사의 음모가 하나 둘 밝혀지는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가 상당히 쏠쏠했다.

 

 

 

가상현실에 있지만 그야말로 현실에 있는 듯 감각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게임, Klein-Ⅱ. 그 게임의 모니터링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은, 그렇게 '클라인의 항아리'에서 비롯되기 시작한 일이다. 어디까지가 가상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현실인가.

가상 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미묘하게 흐릿하게 만든 기발함과 짧게 이어지는 호흡은 이 소설에 엄청난 가독성을 부여했다. 찾아간 사무실은 상당히 수상쩍은 건물에 있지를 않나, 30분 정도의 이동을 하는 동안에도 차창을 모두 가려 철저하게 연구소의 위치를 기밀에 붙인다거나, 리사를 함께 찾아나서게 된 나나미라는 캐릭터의 등장, 그리고 '클라인'이라는 키워드와 연결이 되어 있는 과거의 사건으로 연결고리가 하나 둘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아마 이 책을 펼친 독자들을 모두 궁금증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에 끝내면 돼.

-p.232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안과 밖에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혹은 클라인의 항아리의 위를 걸으며 그 곳에서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를 영원히 알 수 없을 <클라인의 항아리>라는 소설 그 자체다.

끊임없이 이것이 현실일지 클라인의 항아리 속에서 벌어지는 가상 현실인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던 등장인물처럼, 독자 역시 결국 소설의 결말이 현실인지 가상 현실인지 알 수 없도록 클라인의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특히 결말에 이르러 과거를 되짚으며 한 시점을 가리키는 대목이라거나 입실론 프로젝트의 의도를 서술해 나가는 점에 있어서는, 작가의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야말로 소설 속 세계를 완벽하고 치밀하게 '클라인의 항아리'로 만들어낸다. 사건의 진상마저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만 것이다.

 

 

 

위상기하학에서 클라인의 항아리는 원통을 방향을 유지한 채 붙여 도넛 모양의 토러스(torus)를 만드는 대신 한 번 비틀어 원의 방향을 반대로 이어붙이면서 만들어진다. 3차원 세계에서는 그 원의 접합이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뚫고 원통의 안 쪽에서 만날 수 밖에 없는 형태가 되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 역시 마찬가지다. 직사각형의 띠를 위에서 아래쪽으로 각각을 접합하는 대신 띠를 한 번 비틀어 거꾸로 붙이면,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띠가 만들어진다.

 

 

 

오카지마 후타리는 단 하나, 치밀한 가상 현실을 보여주는 'Klein-Ⅱ'라는 게임을 소설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안과 밖, 현실과 가상 현실을 구분할 수 없도록 그 경계를 무너뜨렸다.

 

단 한 번의 비틀림이 이렇게 경계를 허물고 말다니.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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