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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과학 수다 1~2 세트 - 전2권 과학 수다
이명현.김상욱.강양구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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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언스, 25가지 난제 선정'이라는, 사이언스지에서 인간들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각 분야의 도전 목록을 정리한 글이 꽤 오래 전부터 인터넷 공간을 떠돌아다녔던 모양이다. 우연히 얼마 전에 그 게시글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쳤을 글을 새삼 다시 살펴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그동안 과학 지식을 어마어마하게 비축한 덕분에 이제는 그 정도는 교양으로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 수다>를 읽고 있던 차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러 번 진행한 '과학 수다' 중에서도 나름대로 흥미를 끌 수 있는 주제를 선별해서 책으로 엮는 과정에 사이언스지가 선정한 난제들의 목록도 어느 정도 참고를 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팟캐스트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각 분야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채널이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러한 대화 혹은 수다를 종이에 활자로 새겨두는 것 역시 지나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일까, 과학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의 '수다'를 엮어낸 <과학 수다>가 출간되었다. '수다'라는 단어만으로 마냥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딱딱해 책을 펼치기도 전에 흠칫 겁을 먹게하는 책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과학을 '쉽게' 설명해 달라는 것은 현대 과학이 이른 시점에서 지금까지 누적된 학문의 빛나는 성취를 모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과학이라는 학문은 몇 명의 천재들의 등장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무시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성집단들의 끊임없는 의사소통과 탐구의 결과로서, 마냥 딴 세계인 것마냥 모른척 할 필요도 없다. 그 미묘한 경계에서 이루어진 수다가 책으로 엮였다. 뉴스에서 만난 '이런 기술이 가능하단 말이야?' 싶었던 3D 프린터의 등장이나 '빛보다 빠른 물체가 등장'했다는 놀라운 소식 그 이후 알지 못했던 이야기와 같이 과학과 그다지 인연이 없음에도 충분히 놀랄 만한 소재에서부터 기생충에 얽힌 오해(서민 교수님의 입담으로 또 빵 터지게 된 건 덤이다.ㅋㅋㅋ)나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황우석의 그림자와 같이 이모저모 공감할 수 있는 주제도 있었고, 정말 아예 문외한에 가까운 주제에 뭣도 모르는 무지로부터 나오는 용감함은 과학이라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낭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우주와 생명의 비밀에 대한 수다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이 과학 수다를 읽으면서 매력적이었던 것은 과학과 사회는 뗄레야 뗄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3D 프린터, 줄기세포를 둘러싼 논란, 핵융합 에너지 등)를 통해 기술의 발달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과 결국 철학자들의 질문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과학자들의 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생명이 작동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 입자들은 무엇일까?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의 상상력으로 꿈꾸어왔던 시간 여행이나 투명 망토의 가능성을 '과학적 탐구'를 통해 해명해 보려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이었다 할 수 있는 SF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다도 기다리고 있고.


  아직 수수께끼는 많이 남아 있음에도 가설을 통한 연역적 추론, 그 추론 과정을 확인해 나가는 관찰과 실험이라는 방법론이란 얼마나 매력적인지! '과학'이라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낭만은 바로 이런 식으로 발휘되는구나 싶어 그 시도를 해볼 만한 여건을 갖춘 그들이 새삼 부러워진다. 그렇기에 여기에 새삼 다채로운 '과학 수다'를 풀어놓는다는 것은 나의 이해력이 딸려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말빨 센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만나보는 즐거움을 누리시길 바란다. 아마 나처럼, 이 세상의 수수께끼를 해명하고자 하는 과학의 '낭만'을 발견하고 다음 생에는 부디 물리학자로 태어나길 꿈꾸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많은 사람은 과학 연구 결과가 어느 한순간에 탄생하는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나 뉴턴의 '사과나무'같은 건 그 상징이고요. 그런데 사실 과학 연구는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아요. 아로슈의 연구 결과도 100년에 걸친 이론과 또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실험이 축적된 상태에서 나온 것이거든요._1권, p.127~128



그러니까 당대 최고의 과학자도 양자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경망을 바꿔서 생각의 회로를 바꿀 정도의 노력이 필요했다는 거예요. 아인슈타인이 양자론을 격렬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건 그 단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이런 양자론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끔 소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 그런 풍토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이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해야 해요. 왜냐하면, 미셸 푸코의 철학을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라고 어느 누구도 요구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왜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은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얘기를 해야 하나요?_1권, p.185



이렇게 오늘날 과학은 수많은 과학자의 협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앞으로도 더욱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나올 과학 이론은 실험이 가리키는 방향에 더욱더 의존해야 할지 모릅니다. (…) 이젠, 아인슈타인을 잊을 때입니다._1권, p.190~191



과학 기술에 대한 관점의 일관성 문제도 짚고 싶어요. 핵 발전소를 옹호하는 이들의 가장 큰 오류는 '모든 문제를 과학 기술이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맹신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해도 분명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거든요. 방사성 폐기물은 그 대표적인 예죠._1권, p.216



그런데 SF에서 중요한 것은 거기서 등장하는 과학의 실현 가능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특정한 과학 기술이 등장하는 SF 속의 세계가 얼마나 모순 없이 창조되었느냐는 거예요._2권,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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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살인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4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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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 중에서도 꽤나 직관적인 영역에 속하는 기하학은 그리스 문명이 꽃을 피울 때 이미 연역적인 체계가 완성되었다. 무정의 용어와 명백히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을 공준과 공리로 상정하여 연역적으로 도형의 성질들을 추론하는 <원론>에 그 정수가 담겨 있다. 누구나 3차원 평면 세계에서 명백히 받아들여지는 다섯 개의 공준은 다음과 같다.


  1. 임의의 점과 다른 한 점을 연결하는 직선은 단 하나뿐이다.
  2. 임의의 선분은 양끝으로 얼마든지 연장할 수 있다.
  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임의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4. 직각은 모두 서로 같다.
  5. 두 직선이 한 직선과 만날 때, 같은 쪽에 있는 내각의 합이 2직각(180˚)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을 연장할 때 2직각보다 작은 내각을 이루는 쪽에서 반드시 만난다.


  그런데, 문장으로도 충분히 명백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1,2,3,4공준과는 달리 흔히 평행선 공준으로 알려져 있는 제5공준은 다른 공리들을 바탕으로 이끌어낸 정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랜 세월 수학자들은 제5공준에 대한 연구를 거듭해왔고, 그 결과 뜻밖의 결과를 이끌어낸다. 유클리드 제5공준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충분히 기하의 연역 체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입증했는데 이것이 바로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제5공준이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의 전환은 구면기하학을 비롯해 다양한 응용 가능성을 이끌어냈다.


  점, 선, 그리고 면. 2차원의 평면 위에서 가장 먼저 구성되는 도형은 무엇일까? 바로 모든 다각형의 기본 요소가 되는 삼각형이다. 점과 선을 연결하여 평면의 내부와 외부를 구별하는 첫 번째 도형, 삼각형. 그래서였을까? 3이라는 숫자는 수없이 많은 상징을 가지고 있다. 지니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세 번까지이고, 언제나 가장 현명한 것은 셋째다. '서로 다른 논리나 시점을 만나게 하는 데 가장 고전적이며 보편적인 방법은 세 가지 입장을 나열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키시모토 마시시의 만화 <나루토>에서 센쥬 일족과 우치하 일족은 끝없는 반목을 반복해 왔으나 전설의 3닌자 '지라이야, 오로치마루, 츠나데'는 서로를 견제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표본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책상 위, 정교하기 그지 없는 오로치마루의 문신.

도가쿠시야마의 깊은 산속에서 지라이야, 쓰나데히메라는 두 괴인과 요술 실력을 겨루었다는 이 요술사는 지금도 미늘 옷을 걸치고 덥수룩한 가발을 쓴 채 사람들을 비웃듯 냉소를 흘리며 토르소의 등 뒤에서 당장에라도 주문을 외울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_p.19



  그리고 여기,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에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발상과 삼각형의 완벽한 균형 속에서 자신의 완전 범죄를 그려보는 이가 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오묘한 문신 속에 감추어둔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옛부터 문신에는 몇 가지 금기가 있다고 한다. 뱀이나 이무기를 새기는 경우 겨드랑이 쪽은 꼭 비워둬야 한다거나, 지라이야, 오로치마루, 쓰나데히메의 삼자견제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 이 셋을 동시에 새기지는 않는다거나 하는 식이다. 전후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문신에 매혹된 이들을 둘러싸면서 벌어진 참혹한 밀실 살인은 그 시작부터 파격적이다.



일례로 첫 번째 살인사건은 일본의 가옥 구조상 존재할 수 없다는 밀실 안에서 펼쳐진 지옥도였다.

게다가 오로치마루 문신이 사라진 뒤에 홀연히 나타난 거대한 민달팽이가 이 사건의 끔찍한 진상을 음산하게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_p.24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개구리는 민달팽이를 잡아먹고, 민달팽이는 뱀을 녹여버려요. 이걸 이른바 삼자견제라 하죠._p.78


뱀과 개구리와 민달팽이, 이것을 한 사람의 몸에 새기면 그 세 마리가 서로 싸워 죽고 만다는 거지. 부탁을 받더라도 절대 새겨주지 않아. 문신사라면 절대 못 할 짓이야._p.84




  문신사로서는 꽤 이름을 날린 자의 딸로 태어난 노무라 기무에라는 여성은 등 전체에 오로치마루의 거대한 이무기를 새기고 있다. 법의학을 연구하고 있는 마쓰시타 겐조는 학술적인 목적으로 참석한 파격적인 문신 대회에 참석했다가 노무라 기무에의 문신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윽고 그녀를 둘러싼 참혹한 밀실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밀실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본식 전통 가옥에서 단 한 군데, 완벽한 밀실 상태에 놓인 욕실에서 몸통이 사라진 토막난 시체 조각이 발견된다. 마치 뱀을 녹여버리기라도 한 듯 욕실에 나타난 민달팽이 한 마리는 이 사건을 더더욱 기괴하게 만들고,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빈틈이 없어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카기 아키미쓰의 충격적인 데뷔작이자 일본의 3대 명탐정으로 일컬어지는 가미즈 교스케의 첫 등장은 과연 비유클리드적 발상으로 범인의 속내를 밝혀낼 수 있을까?




나는 괴담 자체보다 괴담을 만들어내야만 할 정도로 절박한 인간의 심리가 훨씬 무서워. 이 사건도 에도 시대의 이야기 속 세상에나 나올 법한 분위기인 만큼, 이런 예스러운 포장을 두르고 있는 만큼, 오히려 범인의 의도를 추측할 수가 없어. 마치 박보 장기처럼.

그래. 난 이런 범죄 수사와 박보 장기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 완전한 판이라면 박보 장기의 올바른 풀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그 외의 방법으로는 풀리지 않고, 상대의 왕을 놓치고 말지._p.180




  그렇다. 분명히 범인은 밀실을 만들어냈고, 수사를 미궁에 빠지게 함으로써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완벽하게 마련했다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올바른 풀이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면 틀림없겠지만 그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설의 데뷔작이라 일컬어지는 전대미문의 밀실 트릭을 독자에게 제시하며 도전장을 내밀고, 이에 모자라 문신 콜렉터 하야카와 박사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이용해 풀어야 한다'는 말로 노골적인 힌트를 주고 있음에도 발상의 전환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평행선은 절대로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진리 앞에서 두 평행선이 한 점에서 만날지도 모른다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발상은 밀실로 이루어진 욕실의 토막난 시체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문신이라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요염한(?) 특성은 사건을 바라보는 눈을 흐릿하게 만들고,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덧씌워지는 밀실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감은 더더욱 밀실을 더더욱 밀실답게 만들고 있으니, 결국 해결사를 부르는 수밖에 없다. 바로 가미즈 교스케를 말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떤 일이든 나중에 돌이켜보면 신과 같은 지혜가 나오는 법이지._p.397




  그리고 가미즈 교스케의 풀이는 명징하다. 처음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연역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모순이 없는 체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물론 쉽지 않지만 처음 만큼의 어려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밝혀진 다음 되돌아보면 이 이상의 해답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신 살인사건>의 결말 역시 그렇다고 일단 밑밥을 깔고, 조금의 사족을 더 덧붙인다면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난 작품이라는 점에서, 물리적 트릭을 사용하는 점에서 늘 느끼곤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아마 직접적으로 말하진 못해도 다들 어떤 기분인지 아시리라 믿는다.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밀실 트릭과 달리 이중 장치를 둠으로써 최근의 신본격 미스터리에서 맛볼 수 있는 밀실 트릭의 짜릿함이 그 아쉬움을 조금 덜어주고, 비유클리드 기하학과 삼자견제의 팽팽한 균형, 그리고 그 기괴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문신이라는 소재가 전후 일본의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와 어우러져 마쓰시타 겐조가 헤매는 거리를 실감나게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덧붙여 작가 후기에 덧붙여진 소설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과정을 읽어보는 것 역시 훌륭한 지침이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미즈 교스케 시리즈에서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해 색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단편도 실려있으니 어느 5층 주택에서 떨어진 시체의 행방을 (조금은 비현실적이게 느껴지는 트릭일지라도) 찾아보는 재미도 기다리고 있다.

 

 

* 참고 : 위키피디아(유클리드 기하학), 요네하라 마리, 유머의 공식,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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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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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팬덤을 보유(?)하고 있는 '무언가'는 많고, 세상에는 덕후가 많고도 많다. 세상에 이 어(린오)빠가 어디 있다 이제서야 나타났는지는 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이미 오랜 세월을 거쳐 탄탄한 팬덤을 보유하고 대형 떡밥을 한껏 투척해놓은 채 이를 야금야금 소비해온 세월만 해도 내가 산 세월을 채 따라가지 못할 존재가 있으니, 그는 바로 셜록 홈즈!

  [빨간 머리 연맹]으로 내 어린 시절을 조지기(?) 시작했던 그는 오랜 숙적이었던 모리어티 교수와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추락해 사망한 듯 했으나, 내가 슬퍼할 새도 없이 많은 이들이 그를 다시 살려내라고 반발하며 청원한 끝에 어느샌가 뿅 다시 살아나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의 캐릭터를 그 곳에서 끝장내려 했으나, 그마저도 이루지 못한 채 셜록 홈즈가 가지고 있는 그 능력껏 알아서 살아났겠거니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로 하자. 그리고 그 '공백의 시간'이야말로 대형 떡밥 중의 떡밥으로 이 시기를 추측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쏟아져 나오는 셜록 홈즈의 패스티시가 이를 반증하는 것이, 게으른 덕후는 금손님께서 연성해 주시기만을,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능력자가 많아 마냥 손빨고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위안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한 번, 앤터니 호로비츠가 새롭게 쓴 셜록 홈즈의 두 번째 이야기, <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역시 모리어티의 죽음이라고 하면 가장 최근의 BBC 드라마 [Sherlock]의 시즌2를 떠올리게 된다. 시즌2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며 뭣이? 벌써 라이헨바흐 폭포가 등장한다고? 하며 두근두근 하며 충격의 결말을 맞이한 다음, 그 직후 다시 나타난 셜록의 빈 공백기를 나름의 추측과 함께 되살려 내는 에피소드로 시즌3를 흥겹게 시작했으나 말도 안 되는 캐릭터 붕괴로 실망감만 가득한 채 시즌3를 보낸지도 벌써 시간이 흘러 내년이면 시즌4를 볼 수 있겠다한들 그래도 역시, 셜록의 추락 이후 그가 다시 나타나기까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물론 애초 시작부터 작가의 재해석이 있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앤터니 호로비츠의 <셜록 홈즈 : 모리어티의 죽음>은 그야말로 라이헨바흐 폭포에서의 추락의 시점을 기준으로 정확히 며칠 뒤부터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맞는 것은 존 왓슨 박사가 아닌 낯선 목소리. 그는 미국의 탐정 프레더릭 체이스로, 미국의 모리어티라 할 수 있는 클래런스 데버루를 좇아 유럽으로 건너온 참이었다. 데버루와 모리아티가 손을 맞잡는 순간, 유럽 역시 악의 소굴에게 잡아먹힐 것이 틀림없으리라 확신하는 그는 모리어티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의 행선지를 추적하기로 한다. 그리고 역시 사건 현장을 방문하고 있었던 영국의 경관 애설니 존스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 셜록 홈즈는 죽었거나, 혹은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그를 만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미국의 탐정과 영국의 경관의 콜라보레이션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다.



  그리고 뜻밖에도, 셜록 홈즈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존스 경감의 추리다. 애설니 존스는 (미처 몰랐지만) 존 왓슨 박사에 의해 무능한 경관으로 종종 묘사되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추락 사건이 일어난 바로 며칠 뒤의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히 존스 역시 스코틀랜드 야드에서 다른 경관들과 마찬가지로 셜록 홈즈의 무신경한 핀잔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을테다. 하지만 역시 남의 일을 알 수는 없고 남의 일은 시간이 빠르게도 흘러간다.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에 언급할 필요는 없을테니 그냥 지나치는 바이나, 어쨌든 프레더릭 체이스 역시 해외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유럽에 건너온 탐정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그의 능력은 어디 숨어있나 싶을 정도로 어벙한 와중에 존스 경관은─홈즈의 논문을 공부한 것을 토대로─숨겨진 실마리를 추론해낸다. 그리고 모리어티의 죽음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풀고 클래런스 데버루를 소탕하기 위해 런던으로 향한다. 시체의 품 속에 있던 편지의 암호를 풀어 만나게 된 것은 또라이임이 틀림없는 어린 소년이었고, 소년을 쫓아 데버루의 수하로 추정되는 블레이드스턴 하우스의 스코치 라벨을 만난 다음날 그들은 블레이드스턴 하우스의 일가가 모두 살해된 현장을 맞닥뜨린다. 그렇다, 그들은 셜록 홈즈와 존 왓슨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시선에 보이는 음산한 런던의 거리를 함께 헤매게 된 것이다……. 과연 그들이 단서를 쫓아 맞닥뜨리게 되는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앤터니 호로비츠는 코난 도일  재단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셜록 홈즈의 이야기를 집필한 작가라고 한다. 이전 작품이었던 <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을 먼저 읽어볼 기회가 있었으나 여태 미루고 있는 와중에 두 번째 작품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역시, 셜록 홈즈의 마지막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소재는 매혹적이기 짝이 없었으니까. 사실, 프레더릭 체이스의 이야기는 조금은 어색하고(미국식 억양은 느낄 수 없지만 왠지 그렇달까), 애설니 존스는 셜록 홈즈의 까칠함을 따라가기에는 꽤 다정하고 조급하다. 그러나 주인공이 없는 자리에, 악당의 죽음을 마저 뒤쫓기에는 나름대로 어울리는 콤비가 아닌가 싶었다. 평화로운 런던의 거리를 전쟁터로 바라볼 수 있었던 셜록과 존처럼 말이다. 그렇게 익숙한 듯 낯선 시선으로 셜록 홈즈가 없는 런던 거리를 함께 헤매는 분위기도 역시 완벽할 수는 없으나 꽤나 그럴싸하다. 수많은 패스티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공식 인정'이라는 말 한 마디가 공신력을 가지는 것 같은 착각은 나 같은 귀 얇은 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간격이 크지 않다는 점, 그리고 숨어있던 진실이 강렬한 인상과 함께 등장하는 순간을 맞이하면 누구나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그렇다, 결국은, 여기 또 하나의 모리어티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다. 추락 이후의 모리어티의 행방을 둘러싼 이야기를 만나고 보니 [Sherlock] 시즌3 직전의 모리어티의 행방도 궁금해지는구나.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그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실제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그 사건을 둘러싸고 수많은 기록이 난무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있다. 그러니까 진실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_p.11




_20150624~2015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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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 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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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족을 자처하는 나로서는 부정할 것도 없이, 책표지는 책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표지요, 그 책을 들고 살펴보면 손에 촥 감기는 감각까지, 책 내용을 다 훑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역시 자꾸자꾸 눈이 가는 표지가 있고, 그래서 서점을 가면 갈 때마다 봤던 책을 또 들춰보곤 하는 것이 나의 일과이니, 책표지는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꽤나 중요한 신스틸러(그렇다, 그야말로 시선강탈자!)라 할 수 있겠다.


  책을 펼치면 항상 책날개 아래쪽에 조그맣게 적혀있는, 표지 디자이너의 이름을 살펴보곤 한다. 물론 없는 경우도 있고, 표지 일러스트, 표지 디자인, 본문 디자인 등 여러 명의 디자이너의 이름을 만나기도 한다. 디자인이란 실용성을 겸비해야 하는 것이랬던가, 당연히 책을 읽는 동안에도 글을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디자인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다보면 사실 낯이 익은 이름을 자주 마주치게 되곤 하는데 특히 한 쪽으로 쏠려있는 나의 독서 생활을 생각하면 이쪽 동네(?)의 작업을 자주 하는 디자이너의 표지를 괜시리 더 꼼꼼히 살펴보곤 한다. 왜냐하면 표지에 책 속의 상징성이라거나 포인트가 되는 것들이 디자이너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즐거움과 함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디자인을 그저 소비할 뿐인 입장에서 디자이너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없는데, 북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 <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이 출간되었다. 그래도 책 디자인이니, 그냥 지나치긴 아쉽지! 일곱 명의 현역 북디자이너들이(아무래도 작업이 작업이다보니 대부분이 출판사 내 디자인실에 있는 분보다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분들이다.) 자신들의 작업물과 작업과정에서 등장했던 B컷을 함께 소개해주며 표지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나 작업 과정을 소개해준다. 서점에 진열되어있는 눈에 익은 책표지 대신 하마터면 다른 얼굴로 만날지도 몰랐을, B컷들을 만날 수 있었다.




원고의 내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독자의 취향이나 수준을 고려하는 것은 쉽게 공감을 얻고 객관적인 결과를 낼 거라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디자인의 지향점이 늘 그것에만 머물러 있다면 다양성과 유니크한 효과를 포기해야 하는 위험도 있다. 출판 디자인은 낯설고 독창적인 해석보다는 정보의 안정성에 의존하는 부분이 크지만, 디자인이 기여할 수 있는 효과는 그것을 포함해 다양하고 규정할 수 없는 범위까지 확장이 가능하다._p.30, 김태형 님



우리는 책의 인상을 정하는 사람들이다. 단순한 텍스트의 반영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각언어로 재해석해 얼마든지 작가적인 입장이 될 여지가 많은 직업이다._p.93, 김형균님



  책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보수성과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책 속의 텍스트라는 사실은 책이 말하는 내용을 마냥 숨겨둘 수도 실험적인 표지를 내놓기도 애매할 수 있다는 것이 북디자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게끔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독자에게 첫 인상을 강렬하게 제시하면서도 책이 말하는 바를 알 수 있도록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 철학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북디자이너 김태형님과 김형균님. 특히 김형균님은 북폴리오에서 꽤나 깜찍한(?) 일러스트를 이용한 표지로 사랑을 많이 받았던 가네시로 가즈키의 책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고. 역동적인 '더 좀비스'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 일러스트인데, 그 시각적인 디자인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날 수 있었다.

 



아직도 온라인 독자보다는 오프라인 독자를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은 서점에 직접 가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손끝으로 촉감을 느끼고 시작적으로 바라보고 구매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으로 책을 보면 종이의 질감과 재질, 두께를 느낄 수가 없고, 후가공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표지 종이를 고르는 것 하나에도 샘플을 수도 없이 만져보고 들여다보며 몇 시간씩 고민을 한다._p.147~148, 박진범 님




  한때 일본미스터리 신간의 표지를 휩쓰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중정원 박진범 님이다. 늘 책의 텍스트를 다 읽은 다음 표지 디자인을 신중하게 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었는데, 그럼에도 일관성 있게 같은 서체를 이용해 제목을 표현한다거나 그 옆에 궁서체로 작가 이름 및 번역자를 표기하는 등등 나름의 정체성(?)이 있어 혹시나, 하고 책 날개를 넘겼다 하면 발견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받고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분과 함께 작업도 많이 하셔서 더더욱. 원체 많이 뵌(?) 분이다 보니 디자이너 본인이 소개하는 B컷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실제 오프라인에서 책을 봤을 때 책 만듦새를 살펴보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표지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도 몇 개 있어 괜히 더 친숙하다. 물론 익숙한 만큼 이건 왜 이러셨어요... 하고 묻고 싶은 표지도 있다. ㅋㅋㅋ;;





안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직접 텍스트에서 힌트를 찾아야, 설득력 있는 이미지를 제일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된 소중한 경험이 됐다.

『브리다』 같은 경우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다는 독자평이 많았다. 그리고 코엘료의 에이전시를 통해 전 세계 번역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표지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_p.186, 송윤형 님



  책 그 자체의 파워보다 표지만 보고 홀린듯이 책을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북디자이너로서 그 이야기를 실제로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싶은데 여기 주인공이 있었다. 일찌감치 사진을 표지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하는데,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감각적인 표지를 많이 만나볼 수 있었던 송윤형 님의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B컷이 가장 많은 디자이너였다. 작업물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A컷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아, B컷으로 책이 나왔더라 해도 색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아 그 실물을 제일 많이 보고 싶기도 했다. 여심을 사로잡는 디자인을 꽤 많이 하시지 않나 싶다.





뿌리에서 양분을 얻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나무를 더 풍성하고 보기 좋게 만들듯이 북디자이너 역시 원고에서 뽑아낸 양분으로 풍성한 가지와 잎사귀를 책에 선사한다. 그러나 뿌리가 약하면 나무가 병드는 것처럼 원고가 근간이 되지 못한 디자인은 생명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좋은 북디자인이란 '북디자인의 본질적인 의미에 얼마나 충실한가'가 관건이다. 그리고 좋은 북디자이너는 나무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하는 디자이너다. 그렇다고 심미적 요소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북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_p.278, 엄혜리 님



  작업량이 많이 있는 만큼 북디자인에 관한 썰을 많이 풀어준 이는 엄혜리 디자이너. 작업한 분야도 다양하고 그에 맞춰 스타일을 바꾸듯 굵직한 표지에서부터 섬세한 감성이 녹아있는 표지까지 분야별로 각각의 특색을 살리는 작업물을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고수의 풍모를 책디자인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는데, 특히 캘리그라피를 활용해 제목을 디자인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탐정 회사의 건물을 책의 형태로 구현해보겠다는 다소 복잡한 작업이었다. 분명한 콘셉트가 있었으므로 별도의 시안이 없이 바로 건물을 구현하는 작업에 에너지를 쏟았다. (…) 그 과정에서 편집자는 출판사 내부에서 조율을 하느라 고생했고, 나 역시 찾아오기 힘든 기회를 잘 살리고 싶어서 수많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후가공 교정을 네 번이나 봤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처음 의도한 대로 책이 나왔다. 디자인에 대한 외부의 반응도 좋은 편이어서 정말 뿌듯했다._p.321, 이경란 님



  네, 여기 반응 좋았던 외부인 한 명요! 표지만 보고 홀린듯이 책을 사게 된 것은, 정작 나는 이경란 디자이너의 디자인에 낚인 뒤였다. 표지와 제목의 완벽한 콜라보레이션으로 홀린 듯이 책을 읽었으나 예...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어 재미없다는 얘기를 쓰면서도 관계자분 모두에게 죄송하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경란 님, 죄송합니다. 흑흑. 이것은 무슨 책이게요..? ㅎㅎ...

  그러나 최근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표지도 마음에 쏙 든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닷쿠 & 다카치 시리즈의 표지를 담당한 이 역시 이경란 디자이너다. 닷쿠 & 다카치 시리즈의 후속작도 아름다운 표지로 만날 수 있게 여러분, 닷쿠 & 다카치 시리즈를 읽읍시다.




당시, '선'을 제목으로 단 도서가 워낙 많았고 표지들도 평온함, 맑음, 고요함 등의 단어가 연상되는 이미지로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이 책은 맥락이 다르다고 판단했다. 정교하게 들어맞는 너트와 볼트처럼 의미심장함이 배제된 분명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 시안에 확신이 있었지만 중요한 책이니, 갈라진 사막 위에 수선화 한 포기 떠 있는 사진을 넣어서 시안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아뿔싸, 편집자가 그걸 택해서 순간 철렁했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의 표지로 결정되었고, 그후론 들러리 시안을 만들지 않았다._p.377, 정은경 님



  디자이너들은 책 디자인을 하면서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표지를 만들지만 만약을 대비해 들러리 시안을 만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확신이 있는 경우 출판사 측에서도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아 아찔한 순간도 있는 듯. 정은경 디자이너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정말 가슴이 철렁하게 된다. 그야말로 'B컷'인데, A컷 표지 시안이 선택되지 않았더라면 그 책에는 절대로 눈길조차 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의 표지는 정말 매혹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은경 디자이너가 작업한 책은 읽어본 적이 거의 없음에도, 정말 감각적이라고 감탄한 표지가 여러 권 있었다. 특히 원저자인 무라카미 류의 극찬을 받았다는 무라카미 류 전집의 표지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무라카미 류의 책을 읽으시는 분이라면 한 번 책을 이리저리 놓아보시는 게 어떠신지.





  B컷은 B컷 나름의 이유가 있다. A컷이 A컷으로 선택되는 이유가 있듯이 말이다. 북디자이너들의 B컷을 살펴보다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컷이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B컷도 꽤 있다. 화보의 B컷이 뒤늦게 공개되듯, 책 표지의 B컷 역시 한정 제작 등의 이벤트를 통해 북커버를 하나 만들어준다거나 하면 재미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출판사 차원의 조그마한 이벤트랄지(라고 쓰는 것은 역시 출판사가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는 독자가 마음대로 조그맣다고 한 소리긴 합니다.).

  책의 훌륭한 텍스트와 아름다운 책 장정의 콜라보레이션이야 말로 이 책이 내 책장에 꽂히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무작정 중요한 것은 내용이야, 라고 하지 말자.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한없이 구린 표지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외면하고 말지니. '북디자인은 소로가 깜빡한 연필과 같다. 모든 것을 기록했으되 없는 것처럼 있었던, 있으면서 사라졌던 연필 말이다.(p.402)'라고 북디자이너 리차드 헨델이 말한 것을 정은경 디자이너가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북디자인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이쯤에서 궁금한 것 하나. <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은 누가 디자인했을까? 그리고 'B컷의 B컷'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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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실이 만들어지는 주된 이유는 범인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어서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밀실 상황을 만들어두고 교묘하게 알리바이의 덫에서 빠져나간다. 반대로 말하면, 밀실을 만들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을 찾아내면 그가 바로 범인이다.

  시체를 토막내는 주된 이유는 '운반의 편의성'을 위해서이다. 범인의 입장에서 눈 앞에 놓인 시체가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는 시체를 그대로 범행 장소에 내버려두기보다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겨둔 채 범행 자체를 은폐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다. 최대한 발견을 늦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통째로 옮기려면? 남의 눈에 띄기도 쉽고 무엇보다 너무 무겁지 않은가. 시체를 해체하는 것 역시 그 못지 않게 힘든 일이지만, 자신의 범행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나을테니 힘든 일을 무릅쓴다.

 

 

 

 

 

 

  그렇다면 그 이외에 시체는 왜 토막나는 것일까?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시체가 해체된 9개의 원인을 선사한다. 도대체 그 시체는 왜 토막났을까?


  양쪽 팔다리가 토막난 채 장난감 수갑에 채워져 기둥을 껴안고 있는 듯한 모양새로 발견된 시체, 34개의 조각으로 발견된 시체, 잠깐의 마법처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엘리베이터에서 홀연히 사라진 여자 대신 나타난 토막난 시체와 같은 엽기적인 사건의 원인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어떤 부인이 누드 잡지를 대량으로 구매한 이유가 해체 원인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고 곰인형의 팔이 잘렸다 다시 손수건에 꽁꽁 싸매어져 제자리로 돌아간 깜찍한 이유를 추측하기도 한다. 그냥 시체를 내버려둬도 될 일을 굳이 시체가 발견되기 좋은 장소에 토막난 채 발견된 이유는 무엇이며, 전단지 속 모델의 얼굴만을 집요하게 '해체'하는 일도 일어나고, 머리만 사라진 시체가 발견된 다음부터 다른 시체와 함께 이전 피해자의 머리가 함께 발견되는 '슬라이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추리극도 등장한다.



  시체 토막을 퍼즐로 치환하면 너무 잔인한 소리가 아닌지, 사실 예전 같았으면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 했지만 요즘 본격 미스터리를 별로 안 읽은 건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벌렁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 벌렁거림을 잠깐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써 보자면, 이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퍼즐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흥미로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퍼즐을 만든 사람과 푸는 사람 사이에 규칙을 합의한다면 충분히 연역을 해 나가면서 실마리를 발견하겠지만, 이 책이 더 매력적인 이유는 합의된 규칙 대신 퍼즐을 푸는 이가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한다는 점이다. 시체의 해체 원인에 일반론이 있을까? 사람 사는 세상사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가득한 것을, 상상을 초월하는 이들의 사고 과정을 일반적인 상식으로 메울 수 없을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그 상상력을 적절한 블랙 코미디와 버무린 연작 단편집이다.


  무엇보다 압권인 것은, 앞선 이야기를 한데 묶어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결말을 내놓는 최종인 「해체 순로」다. 힌트는 충분히 주어졌으니 바른길을 한 번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결국 나는 못 풀었다.)




  <치아키의 해체 원인>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데뷔작이다. 데뷔작부터 '시체의 해체'라는 과감한 퍼즐을 도입한 것을 생각해 보면 현재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본격 미스터리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뿐만 아니라 이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한 시리즈에 대한 길잡이가 주어져 있다는 것도 <치아키의 해체 원인>을 한 번쯤 읽어볼만한 이유이다.


  작가 후기에 등장하는, 자신을 해체로 이끈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트릭으로 평가받는 <점성술 살인사건>과 최근에 만나본 가사이 기요시의 <바이바이, 엔젤>이 반갑다. 특히 현상학적 직관을 통해 시체가 토막난 현상을 분석하는 야부키 가케루의 추리도 '토막'의 다양한 해석을 흥미롭게 만날 수 있다. (다만 후기에 '카사이 키요시의 <바이바이 에인절>이라고 번역을 해 두다니, 그래도 나름 국내 출간작인데요...ㅠㅠ)


  또 하나, 데뷔작에서 창조된 캐릭터 다쿠미 치아키와 헨미 유스케, 다카세 치호는 '닷쿠 & 다카치 시리즈'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시리즈 속 등장인물들이 다듬어지기 이전의 모습을 한 번 만나보는 즐거움도 숨어있다. 경찰이 범죄를 해결하고 말고를 떠나 시체가 처하게 된 상황(?)에 대하여 각자의 이유로 궁금증을 가진 이들이 나름대로 그 원인을 찾아나서는데, 그냥저냥 프리터로 연명하며 책 읽기에 몰두하며 시체의 해체 원인에 대해 골몰하는 '다쿠미 치아키'와 나름대로 건실한 교사로 생활하고 있는 듯한 '헨미 유스케'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대학생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다카세 치호', 그들의 '명정' 추리는 술이 빠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건재한 모양이다.

 

 

 



"농담이야, 농담. 사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마츠우라 야스에의 시체였어."

"시체?"

"그래. 왜 이렇게 토막을 낸 걸까 싶어서. 그 이유 말이야."_p.21~22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렇게 되뇌었다. 시체를 해체하는 것은 시간과 수고가 드는 작업이다. 그것은 어쩐지 바보 같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진리였다._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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