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합니다. 

  2월 11일. 

  이벤트 1차 정산 - ☆ 

  사실, 내가 좋아하는 숫자인 13일날에 하려고 했는데,
  그럼 내가 너무 지루해져 버릴 것만 같아서..( -_-)
  일단 1차 정산은 수요일에 하고 그 이후에 들어오는
  응모작은 2차 정산 때~
  몇 차까지 정산이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중복 응모해도 괜찮아요. 

  함께 아날로그의 향수에 젖어 보자구요.(웃음) 

 
  스노보드를 멋지게~ 타보고 싶다눈~ 올해도 스키장은 구경도 못하고 가는구나 ㅜ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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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0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9-02-09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저도 참여하고 싶은데, 저는 주말에나 가능할듯. 쿨럭. ㅜ

L.SHIN 2009-02-10 07:52   좋아요 0 | URL
괜찮아요~ 2차 정산이 있는데 뭘요~ ^^
정말로 글을 쓰고 싶을 때 써야 좋은 글이 태어난다~ 주의입니다, 저는.(웃음)

stella.K 2009-02-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 좋군요!^^

L.SHIN 2009-02-10 07:52   좋아요 0 | URL
귀엽죠! ^^

chika 2009-02-09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나도 13 좋아하는데! ㅎㅎ

L.SHIN 2009-02-10 07:52   좋아요 0 | URL
ㅎㅎㅎ

Mephistopheles 2009-02-09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도 오래전 일이라서 기억이 가물가물~~ 아날로그가 뭐더라~~=3=3=3=3

L.SHIN 2009-02-10 07:53   좋아요 0 | URL
흐~ 그래놓고 멋진걸 하나 터트릴 계획이시면서~ ㅡ_ㅡ (훗)

새초롬너구리 2009-02-09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싸~하는 고양이의 포즈에 고양되어 응모하고 싶지만, 아날로그...가 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머리가 점점 나빠지는 걸까요? 삐삐도 아날로그인가요?

L.SHIN 2009-02-10 07:54   좋아요 0 | URL
네, 삐삐도 아날로그에 포함되죠. 정확히 말한다면 21세기 전의 우리 추억 속 이야기들이요.^^
지금의 모습도 10년 후엔 아날로그가 되겠지만 말입니다.(웃음)
 

 

 22년 전 가난한 대학원생 그는 입학 때 샀다던 에스콰이어 검은색 책가방을 늘 들고 다녔다. 모서리가 날강날강 닳고 코를 대면 구무렁한 가죽냄새가 풍겨나오는 그 가방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와 모종의 미래를 꿈꾸던 대학 졸업반 새초롬한 그녀는 그를 만나는 날이면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짜증이 나기도 하는, 말하자면 약간의 권태기 같은 시기에 줄을 타듯 대롱대롱 매달려 혼돈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취업 걱정도 조금 되고 결혼이라는 단어도 떠올리며, 좀 더 나은 미래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헛된 생각들도 하며 하루하루 내달리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생리통으로 몸이 좋지 않아 아랫목에 배를 대고 엎드려 누워있자니 그가 긴 골목을 걸어오는 것 같은 발자국, 분명한 환청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은 생전 처음이었고 아직까진 마지막 경험이었다.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밤에 긴 편지로 못다한 이야기를 했고 만나지 못한 날에는 스프링 노트 일기장에 만년필로 빽빽하게 뭔가 적어대기도 하며 연애 ‘감정’에 빠져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 감정의 문제였던 것 같다.  유치하고도 사랑스러웠던 그들.  

 

 그녀의 집에 그는 좀 자주 오는 편이었다. 예비처제더러 피아노를 쳐달라고 부탁하고 그 가락에 맞춰 노래를 구성지게 불러재끼곤 했는데 자주 부르던 노래제목이 바로 '철없는 아내'였다는 것. 왜 그 노래 부르길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제대로 골랐던 것 같다.  노래방의 기계음에 맞춰 기계의 박자와 음정에 끌려가야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멋대로 꺾고 늘이며 노래 부르길 좋아했다. 그는 미성을 가졌다. 그 고운 음색에 끌렸던 그녀는, 화이트데이 때 사탕 하나 사줄 줄 모르고 길가에 앉아 모종을 팔던 어떤 할머니에게서 춘란 한 촉을 사서 뿌듯해하던 그에게 서운해 속으로 울었던 때도 있었으니. 또 하루는 그가 대학원 논문 준비를 위해 수동타자기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그녀의 집에 왔다. 그날은 엄마에게 허락 받고 밤샘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먹끈을 갈아끼워가며 타닥타닥 토닥토닥 경쾌한 수동타자기 소리를 들으며 옆에 있던 그녀는 꼬박 졸기도 했던가. 그렇게 새벽이 밝아왔다.  


 둘은 버스를 타면 맨 뒷자리로 갔다. 그렇게 종점에서 종점까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아예 침묵의 대화로 어둑어둑해지는 창밖을 보며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집 앞까지 10분여를 걷고 다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나가고 그러다 캄캄해졌다. 가랑비가 오는 날이면 일부러 우산을 쓰지 않고 그 비를 맞았다.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촉촉이 젖고 등짝에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는 정도로 비를 맞고 걷는 가난한 연인의 데이트. 지금은 자동차가 있고 핸드폰이 있고 이메일이 있으니 이런 일들이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렸다. 그와 그녀는 그로부터 2년 후 결혼식을 치른 옆지기와 나.^^ 올 3월이면 20주년이 된다, 어느새?

 핸드폰! 지금은 유치원생도 가지고 있는 그게 없었던 시절의, 웃지 못 할 일화가 있다. 우리가 만나곤 했던 장소는 주로 대학교 앞 혹은 서로의 집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서면(부산의 다운타운)의 어느 찻집에서 만나고 싶었다. 지금은 그 찻집의 이름도 다 잊어버렸다. 둘은 시간약속을 했고 학과사무실에 있던 그에게 내가 정한 찻집 이름을 분명 말해 줬는데 어디선가 혼선이 생겼다. 그와 나는 각자 다른 찻집에 앉아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나는 나대로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이러며 부아가 났고 그래도 일이 좀 늦어지나 보다 하며 기다렸는데 그는 그대로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결국 그의 집으로 내가 먼저 전화를 해서 어머님께 말씀을 드렸고 우리집에도 전화해서 내가 지금 앉아있는 곳을 말해 놓았다. 찻집 카운터 전화기에 몇번을 더 불이 나게 왔다갔다, 어떻게어떻게 연락이 닿아 거의 두 시간 가량이 지난 시각에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부글부글 화도 났지만 어쩐 일인지 기다림에 지친 나는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처럼 핸폰만 있었더라면 애당초 있지도 않았을 일이다. ^^

 서로 주고 받았던 수많은 편지들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고 일기장만 한 권 서랍 맨 아래쪽에 누워있다. 손으로 깨알같이 써서 주고받았던 편지를 차곡차곡 상자에 담고, 가랑빗속을 거닐며 깔깔거리고, 약속을 해놓고도 연락이 닿질 않아 애를 태우며 동동거리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는 건 무슨 영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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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2-08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부러운 아날로그 추억이에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프레이야 2009-02-09 09:03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그런때가 가끔은 그리워요. 지금은 소 닭 보듯(까지는 아니어도) 비슷하게 ㅎㅎ

stella.K 2009-02-08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디지털 시대에도 연애편지만큼은 꼭 아날로그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메일 수신함에 차곡차곡 모아둘 수도 있겟지만 눈으로만 볼 수 있지
만질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잖습니까.
물론 혜경님 그 연애 편지 잃어버리셨다고 하시지만 그렇게 아날로그로 편지를 주고 받은 기억은
평생 안 잊어질거라고 생각합니다.^^

L.SHIN 2009-02-09 05:2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메일은 만질수도 맡을수도 없으니까. 표현이 딱이군요.^^

프레이야 2009-02-09 09:11   좋아요 0 | URL
그래요. 글자에 감정이 충분히 담겨있죠.
군에 가 있는 동안에 제가 쓴 편지에는 언젠가 눈물방울도 떨어져 마른 흔적이
있었더랬지요. 글자가 흔들리고 휘청이기도 하구요.
그것도 병장으로 갈 즈음에는 뜸해졌지만요. 그때의 맑았던 심성이
때로 그립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2-08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당분간 서재에 오지말던지 해야지~~
이 싱글의 울적함을 자극하는 얘기들로 흘러넘치는군요 흑흑

L.SHIN 2009-02-09 05:21   좋아요 0 | URL
나도 같이 ㅜ_ㅜ

프레이야 2009-02-09 09:10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반가워요. 여기서 만나네요.^^
싱글이시라면 앞으로 기회가 많을 것 같아 더 부러운 걸요.
엘신님도요.

chika 2009-02-09 11:13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말입니다...
남들 삐삐차고 다니고 핸폰 들고 다닐때도 '난 필요없어'주의로 암것도 없이 댕겼었던 저로서는 서로 어긋난 약속장소로 인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추억이 연인과의 데이트 추억이 아니라 직원과의 약속이었음을 떠올려야 함이 참으로...흑흑.

프레이야 2009-02-09 19:55   좋아요 0 | URL
치카님 흐흑 ㅜㅜ

L.SHIN 2009-02-09 0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동타자기! 덕분에 기억이 나는군요. 저는 16살경에 수동 타자기를 주로 쳤었는데,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 컴퓨터도 일반화 되어 있었지만, 저는 그 특유의 소리를 좋아했거든요.
한 편의 짧은 연애 소설을 읽는 듯 했습니다. 결혼하신지 20년이 되었다는데 그렇게 선명히 기억하시다니.
예전엔 커피숍이나 가게에서 전화를 빌려 쓰는 모습이 흔했죠. 요즘이라면 점원의 표정이 이럴겁니다.
"핸드폰 없나?"
추억이란 역시 아름답습니다.(웃음)

자, 혜경님의 아날로그에는 ☆☆☆☆☆☆

프레이야 2009-02-09 09:07   좋아요 0 | URL
와와!! 엘신님도 수동타지기 좋아하는군요. 저도 무지하게 좋아해요.
당시 옆지기는 언더우드 것이었는데 무척 아껴서 이사를 몇번 하면서도 들고 다녔어요.
그런데 언제가부터 사라졌어요. 지금도 집에 하나 있는데요, 스미스-코로나 것으로..
그건 시댁에서 우연히 줍다시피해서 집에 장식으로 갖다놓았죠. 아마 먹끈만 구할 수
있다면 타자가 가능할 거에요. 가끔 지나가면서 토닥토닥 쳐보기도 해요. 묵직하니
손끝에 와닿는 느낌이 참 좋아요. 소리도 그렇지만요.^^

전호인 2009-02-0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하게 겹치는 사연이 있어 공감 백배로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아련한 아름다움이었지요.
가끔 허스름한 재래시장 뒷골목의 족발집에서 소주를 같이 기울이기도 했던 무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가난한 남자와 그것도 행복이라고 마냥 신나했던 여자도 있었지요.
결혼 20주년! 陶婚式(도혼식)
서로 사기그릇을 선물로 주고받고, 질그릇은 깨져도 다시 붙여 쓸수 있다는 의미라네요
축하드립니다.

프레이야 2009-02-09 09:10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 감사합니다. 도혼식, 도자기혼식이라고 하더군요.
그 이름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군요.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네요.
행복,이란 세월따라 의미가 달라져가기도 하지만 본래의 그 마음만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많이 무뎌졌다고나 할까요.
무드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가난한 남자, 전호인님이요?ㅎㅎ

순오기 2009-02-0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랑은 추억입니다. 20년이 지나든 30년이 지나든...
공연히 남의 아름다운 연애사에 눈물이 글썽~~ ㅠㅜ

프레이야 2009-02-09 20:48   좋아요 0 | URL
눈물을 글썽였던 적이 정말 있었지요.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날들에 그랬어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었네요.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색깔의 사랑이니까요.

Mephistopheles 2009-02-0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지를 쓸 틈도 없이 만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 여기 있어요~~

프레이야 2009-02-09 21:04   좋아요 0 | URL
만나고 돌아와서도 썼다니까요 ㅎㅎ
군에 가 있는 동안 많이 썼지만 그것도 상병 달고부턴 뜸해지기 시작했죠.
결혼 후에도 가끔 화장대 위에 편지가 올려져있곤 했는데 그것도 뜸해지고
이젠 아예 서로간에 없지요.ㅋㅋ

니나 2009-02-09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뜻해~ 냐~옹! (괜히 고양이가 되고 싶은 기분이 드네요ㅋ)

프레이야 2009-02-09 19:58   좋아요 0 | URL
니나님, 여기서 만나 반가워요.^^ 냐옹~

BRINY 2009-02-09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같아요~
저희집에도 수동타자기가 있었어요. 아주 무겁고 낡은 사무실용 미제 영어타자기가 있었는데, 중학생때 엄마가 아주 날렵하고 휴대용케이스까지 있는 한글타자기를 사다 주셨죠. 힘을 꽉 줘야 글자가 뚜렷하게 찍히던 낡은 타자기에 비해 얼마나 터치도 부드럽던지...대학1학년경까지도 그 타자기로 리포트를 작성하곤 했었는데, 곧 PC에 자리를 내주곤 말았네요.

프레이야 2009-02-09 23:19   좋아요 0 | URL
다 못한 이야기가 참 많아요. ㅎㅎ
저도 처음 타자를 배울 때 수동타자기로 시작했어요. 그 묵직하고도 경쾌한 느낌이 참 좋았어요.
그 다음 전동타자기 그리고 컴이 자리를 차지했죠. 갈수록 힘 덜 들이고 가능한 세상이 되는 것
같아요.^^
 

 그 아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아요. 우린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고, 가끔 전화 통화를 했으며 한 두번 만나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 아인 늘 짧은 머리를 하고 있어 정수리 부근이 파르스름했던 기억이 나요. 그 아이를 생각하면 속엣말을 못하는 사람의 머뭇거림과 이제는 재생을 할 수 없는 테이프가 기억이 나요. 그리고 여전히 가끔씩 머리에 꽂는 큐빅달린 머리핀도. 

 우리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제 생일인적이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생일 축하한다는 전화를 했어요. 전화를 받고 며칠이 지나자 불룩한 편지봉투가 배달됐죠. 편지 봉투 속엔 자신이 고른 노래들이 빼곡하게 담겨진 테이프가 있었어요. 미안하게도 전적으로 내가 다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테이프의 속지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제목과 가사를 적고, 다시 한번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을때는 투박한 맘이 정해져 가슴이 찡해지고 말았지요.  

 어느 날엔가는 자신이 직접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가 실려있기도 했고, 시를 녹음하기도 했고,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두서없이 들어있기도 했죠. 상큼하거나 톡톡 튈 정도로 센스있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맘이 참 예뻤어요. 상큼하고 톡톡튀는걸 해줄 수 있다는 자의식 과잉인 저도 가끔씩 그 아이에게 테이프를 선물하기도 하고, 시나 노랫말을 편지지에 빼곡히 적어 보내기도 했죠. 그 아인 그것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모은 테이프가 5개. 남녀관계의 일반적인 패턴대로라면 우린 몇번을 더 만나 서로의 맘을 끌어보려고 하거나 상대의 맘이 어떤지 궁금해 했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 아인 그 아이대로 난 나대로 서로 평행선만 긋고 있었어요. 테이프를 다섯개 보내고 난 뒤 그 아이는 이제 연락을 못한거 같다는 말을 했어요. 그렇게 짧게 끝난 편지 속엔 돌돌말린 종이가 있었어요. 그 속에 머리핀이 들어있었구요. 머리핀은 여전히 내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카세트 역시 뽀얀 먼지를 먹으며 서랍 한켠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때의 그 아이는 조금 특이했던 이름 말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컴퓨터에 있는 노래를 간추려서 굽고, 자판을 튕겨 평하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데도 요새는 이런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지금보다 어렸던 내가 자, 아날로그식으로 살아볼까 했던 것도 아닌데 속속들이 느리고 한번씩 숨을 참고 있다 훅하고 내뱉는 느낌이 드는건 그 당시의 소통 방식때문이었겠죠. 지금은 그때보다 즉각적이고 신속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서랍 속을 채우며 먼지를 먹고 자랄만한 것도 없고, 배달이 안 되는 편지로 애가 타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죠. 무형의 파일이 왔다갔다하고, 메시지는 숨찰 정도로 짧죠. 가끔씩은 자신의 취향을 곤고히 해주는 물건들을 위풍당당하게 짊어지고 등장하는 사람의 옆에서 '왜 나를 만나는걸까.'란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혹은 각각의 네트워크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밥을 먹는 사람들이 신기하기보다는 좀 딱하단 생각도 들구요.

 뭐가 좋다, 옳다란 기준은 없지만 왠지 난 그때가 좀 그리워요. 지문이 잔뜩 묻은 편지봉투를 끈적거리는 손으로 뜯는 순간이, 지웠다 돌렸다 다시 녹음해댄 테이프를 빨리감기, 되감기, 정지, 다시 재생을 해대며 들었던 순간이, 삐삐 전에 있던 사서함(혹시들 알아요?)에 시를 녹음해주고 조용히 고백을 했던 순간이, 고백을 한 다음 날 부리나케 다시 사서함으로 달려가 지우려다 들었단 그 한마디에 얼굴이 시커먼 다크서클로 뒤덮이던 순간이, 무전기처럼 생긴 무선 전화기를 어떻게 하면 내 방에 숨겨서 전화통화를 할까 고민했던, 그게 그런대로 내 세상을 덮은 색이 되던 그 순간이 가끔씩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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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2-08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저도 기억이 나는군요.
저도 어릴 때는..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선곡해서, 일일히 10여장의 CD에서 하나의 테이프로 더빙한 후,
정성스럽게 손으로 제목과 가수를 적어서 선물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죠.
공테이프도 최고급만 사고..그렇게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선물하는 것에 자부심도 느끼고요.^^
그랬던 내가..요즘은 정말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이젠 테이프 데크가 있는 오디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아서 그 선물도 힘들겠죠?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삐삐 소리,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자, 아치님의 아날로그에게는 ☆☆☆☆☆

순오기 2009-02-08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내가 잘가던 클래식 다방의 디제이 친구가 내가 원하는 곡만 6개의 카세트네이프에 담아준 걸 아직도 갖고 있어요. 아마도 L.SHIN님의 아나로그 이벤트에 올라온 사연의 종합편을 내가 다 갖고 있을 듯... 더구나 인증샷이 가능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죠.^^

L.SHIN 2009-02-09 05:10   좋아요 0 | URL
인증샷 요청입니다.(웃음)
그러니까, 오기님의 아날로그도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어서어서~

Arch 2009-02-0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그그 최고급 공테이프 나도 알아요. 속지 자체의 질감부터가 달랐죠. 삐삐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불편했는데도 그때는 세상과 연결된 끈같았죠. 엘신님이 아무 생각없이 사는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기술이 불편할 틈을 안 주는 것 같아요.

순오기님, 제가 감히 상상컨대 우리 순오기님은 이벤트에 응모되는 작품의 면면을 살피다 아날로그 종합편 사진전을 떡하니 열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인증샷으로 이벤트계를 평정, 저같은 피래미들은 달나라로 보내버릴 강력한게 있을거란 짐작. 아님 말구요~ ㅡ,.ㅜ; 좀 더 자야겠어요.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

L.SHIN 2009-02-09 05:1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불편할 틈을 안준다라..그렇다해도 요즘, 전 너무 게으르다구요. ㅜ_ㅡ

참, 내가 말했던가요? 아치님의 지금 이미지 무척 마음에 든다는거.(웃음)

순오기 2009-02-09 11:25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역시 아치님은 똑똑해!
글발로 따라 잡을 수없으니 인증샷으로 평정할랍니다!ㅋㅋㅋ

Arch 2009-02-09 13:05   좋아요 0 | URL
저도 열게으름 해요^^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자기 좋으라고(웃음)

순오기님 2년만에 처음으로 똑똑하단 소리 듣고 우쭐해져있어요. 히히 아마 곧 평정될 듯.ㅋ
 

전화도 있고, 이제는 전화 문자 메시지도 있고, 이메일도 있고, 심지어 동영상 편지까지 있지만. 

그래도 역시 비뚤거리는 글씨일지언정 펜으로 틀린 글 벅벅 지워가며 쓴 편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건... 

아날로그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당연한 거였던가요? 

 

내 책장 어느 구석에는 지금도 신발상자 세개가 먼지를 수북이 쌓아놓으며 처박혀있네요. 

그걸 들춰보면 폴폴 떠오르는 먼지뭉치보다도 더 강하게 추억이 뭉턱뭉턱 떨어질겁니다. 

고등학교 때 힘든 집안사정과 고민을 털어놓던 친구들의 편지도 있고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선배를 따라 데모를 하러 나가고 철거지역의 집에 들어가 부서지는 집안에서 목숨을 걸고 철거반대를 외치던 선배의 모습에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던 친구의 수십장에 걸친 편지도 있고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며 가출한 후 십년이 넘게 소식이 없는 형소식이 궁금해지고 있다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던 후배녀석의 기나긴 편지도 있고.... 

그리고 또... 인생의 고비와 갈림길에서 주고받았던 편지들. - 하, 뭔가 거창해지려고 하지만, 어쨌거나 지극히 사적이며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한 것들이어서 내용을 밝히기는 힘든. 

 

 

갑자기. 

그냥 생각났어요. 

오늘은 그래서 집에 처박혀 옛편지들을 읽고 싶지만..... 퇴근하면서 바로 성당 교리교사 피정준비를 하고 저녁부터 프로그램 진행을 해야돼서 시간이 없군요.

대신 저한테 손편지 한 통 보내시면, 무지 기쁘게 읽을 수 있겠는데 말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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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2-07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몇 년만에 우편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답니다. 어찌나 설레든지 눈물이 찔끔났지 뭐예요. 그 편지를 쓰고, 보내고 받는 그 시간이 바로 그 설레임을 만드는 거 같아요. 별별별별별 ^^

L.SHIN 2009-02-08 07:02   좋아요 0 | URL
역시, 아무리 이메일이 있다 해도 크리스마스 카드는 아날로그가 최고죠! ^^
ㅋㅋㅋ 휘모리님, ☆을 하는게 얼마나 귀찮았으면, '별별..' 이라니.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센스 있는데요? (찡긋)

chika 2009-02-09 11:15   좋아요 0 | URL
별별별별별 댓글이 참 감사하군요.
그나저나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꼭 사랑고백의 카드를 받으시기를 ^^

Mephistopheles 2009-02-0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나이 들고 나 손으로 직접 쓰는 글자조차도 하루에 백자를 안넘기는군요.
그런데 태그가..제주 소를 잡으셨나요..?? 고기라면 저도 좀 주세요.

L.SHIN 2009-02-08 07:03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하!!!!
나는 소불고기!

chika 2009-02-09 11:17   좋아요 0 | URL
흠,흠흠,,, 다들 흑도새기가 맛있다던디...

어르신들에게 들은 얘긴데, 예전에 제주에 소가 귀할땐 소도 함부로 도축못했다다군요. 소 주인조차!
그래서 소 등록번호가 있고(우민등록증? ;;;;) 병들어 죽어도, 도축을 해야할때도 다 관청에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 했답니다. 흠, 흠흠;;;;

L.SHIN 2009-02-08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펜팔을 했었을 때, 한 번은, 1미터짜리 편지지에다 3장이나 걸쳐 장문의 편지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지로울 정도이죠. -_- 지금은 한 장만 써도 손이 마비될 것 같은..;;

저도 수기 편지들을 모아놓습니다. 언젠가 하나씩 하나씩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
참, 저는 답장 안해주시면 편지 안보냅니다.(웃음) 주소는 비밀글로 남겨주세요.

자, 치카님의 아날로그와 치카님 과거의 용감했던 사람들을 위해 ☆☆☆☆☆

2009-02-09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2-08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2때 촌에서 인천으로 전학한 제게 연서를 보냈던 녀석들의 편지를 아직도 갖고 있어요. 나이 마흔이 넘으니 동창회라는 이름으로 만남이 시작되었고 카페가 개설되고...P군, K군이란 이니셜로 그 편지의 일부를 스캔받아 공개했더니 엉뚱한 녀석들이 자기 아니었나 하더라는~~~ ㅋㅋㅋ 그걸 보고 정말 손편지가 쓰고 싶다며 주소를 물어온 미국에 있는 친구가 여행하면서 휘날려 쓴 엽서를 보내며 10년 후에나 공개하라는 부탁을 했더군요. 이제 그 엽서를 공개하려면 몇년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아요.ㅋㅋㅋ
하여간 1974년부터 1989년 첫딸 낳아 키울때 조카들과 주고 받은 편지까지 보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의 아니로그 편지는 1980대로 마감됐답니다.ㅜㅜ

L.SHIN 2009-02-09 05:06   좋아요 0 | URL
와~ 타임머신 엽서라니!
궁금할텐데도 잘도 참으셨군요! 몇 년 후엔, 어떤 내용이었는지 살짝 알려주세요.(웃음)

chika 2009-02-09 11:21   좋아요 0 | URL
오오~ 역시 순오기님은!!

근데 정말 그때 그 친구들의 편지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궁금해하는 그 기분 아시죠? ^^

순오기 2009-02-09 11:28   좋아요 0 | URL
녀석들의 편지 뿐 아니라 결혼을 앞둔 친구들이 보낸 편지, 혹은 애낳고 산후우울증에 빠진 친구가 보낸 편지도 있답니다.^^동창회방에 공개했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ㅋㅋㅋ
 

  대학 시절 우리 동아리에서는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시전을 열었다. 회장이 시전 준비합시다, 라고 공표하면 캐비닛 위의 묵은 나무판들을 내려 색지를 뜯어내고 물감을 닦아냈다. 총무가 회비를 걷어 새 재료를 준비하면 일주일 쯤 전부터 시전 준비에 들어간다. 선배들은 주섬주섬 꼬불쳐 둔 습작시를 내밀며 속삭인다. 깐따삐야, 네가 한번 잘 써봐. 당시 나는 그것을 무슨 영광쯤으로 생각하고 없는 재주 발휘해가며 정성을 기울였다. 평소 따르던 선배가 손수 내 시를 시판에 옮겨주고 어울리는 그림까지 그려주면 그것만큼 황송한 일도 없었다.

  시판을 꾸미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요철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나무판을 깨끗이 청소해야 하는데 귀차니즘의 극을 달리던 남자 동기들은 대개 종이를 덧씌우는 방법을 택했다. 쓰다가 틀리면 덧씌우고, 틀리면 또 한 장 덧씌우고 하느라 종이만 낭비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도 두꺼워서 나중에는 총도 못 뚫을 지경이 된다. 그처럼 한지나 색지를 덧씌우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나뭇잎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도 고전적이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다.

  나는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 나무판에 포스트칼라로 연하게 색을 칠하고 그 위에 글씨를 쓰곤 했다. 자칫하면 지저분해질 수도 있어 조마조마 했는데 선배들은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멋이 있다고 했다. 다만 가급적이면 글씨는 직접 붓으로 쓰고 프린트를 해서 붙이거나 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때는 컬러프린트로 출력하자거나 주문 제작된 판넬로 하자거나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준비하느라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도 들었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자발적 고통이자 즐거운 노동이었던 까닭이다.

  시전 준비의 또 하나의 재미는 뭐니뭐니해도 출출한 저녁, 야식을 사다먹는 일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기숙사 근처 가게를 이용하곤 했다. 비좁은 골목 옆에 자리 잡은 몇 평 안 되는 작은 슈퍼였는데 주로 자취생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순대와 떡볶이, 어묵 같은 것을 팔기도 했다. 특히 주인아주머니가 상당한 미인이었다. 친절하고 고상한 분이었는데 뭐랄까. 나 같은 여자가 왜 여기서 순대나 썰고 있나, 가 아니라 순대 하나를 썰어도 또박또박 참하게 썰어 주시는, 그런 분이었다. 구멍가게이긴 해도 항상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언젠가부터 우리 얼굴을 기억하고 덤을 얹어주시기도 했다. 나는 여자인데도 그런 아내와 사시는 주인아저씨가 부러웠다.

  그렇듯 복작복작 준비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날. 몇 점은 이젤에 얹고 이젤이 부족하면 나무나 돌에 기대놓거나 끈을 끼워 나뭇가지에 매달아놓기도 한다. 대략 2주에 걸쳐 아침 일찍 널었다가 오후 늦게 걷어오느라 귀찮을 법도 했으련만 그땐 뭐가 그리 마냥 즐겁고 신이 났었는지. 전시된 작품들 한켠에는 책상 위에 방명록 노트와 펜, 음료수도 놓아둔다. 공강 시간 틈틈이 친구들이 구경 오면 부끄부끄하며 소개해주기도 하고 모르는 이들이 적어놓고 간 방명록을 읽어보며 아무개 시가 좋다, 아무개 시를 보면서 공감했다, 내내 번창하시라는 흔적들 속에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선배들에게 악평을 받았던 시가 인기를 끌기도 하고 비교적 호평을 받았던 시가 외면당하는 의외의 경험도 하면서 한껏 들뜬 봄과 가을을 보냈다.

  그리고 숨은 연정의 대상, D선배. 수업을 마치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편에서 어슬렁어슬렁 한 남자가 걸어온다. 눈과 입가에 장난기가 그득한데 나는 그를 못 본 체 한다. 그는 나무에 숨어서는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는 끝내 눈길을 주지 않고 다른 동기들과 계속 수다를 떤다. 결국 다른 동기가 어머, 선배님! 언제 오셨어요? 하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앉는다. 방명록을 쭉 읽고 나서는 나랑 볼펜 바꾸자, 나랑 끝말잇기 하자는 둥 유치한 대화를 걸어온다. 나는 그럼 정말로 볼펜도 바꾸고 끝말잇기도 하면서 선배와 놀았다. 선배의 매력은 상대방이 질릴 때까지 뭉개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한참 재밌게 놀다가도 어느 순간 반짝 엉덩이를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와는 전혀 대조적인 선배도 있었다. 좋은 것도 오래 하면 질리기 마련이고 나쁜 것도 짧기만 하면 아주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지금도 동아리 후배들은 꽃이 피고 낙엽이 질 때면 시전을 연다. 해마다 가을에는 졸업한 선배들을 초대해 추억을 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도 마련하고 있다. 동아리를 떠올리면 나로서는 항상 빚진 느낌이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잘못했던 것만 후회로 남는다. 선배들한테는 뭣도 모르고 까불기만 했고, 동기들한테는 솔직하게 대한답시고 간혹 상처를 주었고, 후배들은 별로 잘 챙겨주지 못했다. 내가 그곳에서 수강료 한번 지불하지 않고 배운 것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특히 수험 준비 제대로 해보겠다고 한 마디 얘기도 없이 칩거했던 일은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다. 다시 만난 선후배들은 하나같이 이해한다고, 나였어도 그랬을 거라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지 내가 정말 잘했기 때문은 아니다. 내 그릇의 크기가 딱 그 정도뿐이었던 것이다. 그저 사람은 있을 때 잘해야 한다. 나의 지금이 앞으로 내가 힘들 때, 허전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이 된다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 내 곁의 사람들이 더 소중한 느낌이다.  

  아직도 어둑어둑하던 동아리방, 코끝에 은은히 스미던 물감 냄새, 나무 냄새를 잊을 수 없다. 물감과 종이를 바르고 그 위에 손수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던, 쉽게 찍어낼 수 없는 기억. 바늘이 가리키는 아날로그 시계의 4시 30분은 디지털 시계의 4:30과는 분명 다르다. 30분에서 31분으로 움직이는 그 공간을 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시간의 흐름을 탈 줄 아는 아날로그의 세계. 그것은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분절적인 생활의 편의, 그 이상이리라. 그때 내가 직접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햇살 아래서 낙엽을 밟으며 벗들의 작품들을 하나씩 세워놓는 노동을 마다했다면, 나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외롭고 못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의 기억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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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2-0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야 원....공대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이런 낯설은 분위기...

L.SHIN 2009-02-07 06:01   좋아요 0 | URL
공대에서는 저런 것을 안하나요?

Mephistopheles 2009-02-07 13:38   좋아요 0 | URL
막걸리 더럽게 마시기는 했어도 시전같은 건 안했답니다.
(근데 왜 꼭 결슴에선 건축과와 토목과가 만나는지 그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L.SHIN 2009-02-08 06:57   좋아요 0 | URL
결슴은 무엇인가요?
(분명,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내가 물어볼 줄 알고 쓰신게야..-_-)

깐따삐야 2009-02-08 14:36   좋아요 0 | URL
참고로 D선배도 공대생이었습니다. 메피님. 모든 공대생이 다 그렇게 막걸리만 열라 잡수시는 건 아니라구욧! 하긴... 과에서는 그랬는지도? 흠흠.


Mephistopheles 2009-02-08 14:49   좋아요 0 | URL
결슴은 결승의 오타입니다..^^

L.SHIN 2009-02-09 05:09   좋아요 0 | URL
메피님도 오타를 낸다. 오타를 낸다. 오타를 낸다. 흐흐흐흐...

Mephistopheles 2009-02-09 09:37   좋아요 0 | URL
그래도 엘신님처럼 ㄱ ㅕ ㄹ ㅆㅆ스 ㅇㅇㅇ 우히히~! 같은 오타는 아니네요.=3=3=3=3

L.SHIN 2009-02-07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에- 잠깐, 그 따뜻한 햇살 아래에 함께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할 뻔 했습니다.(웃음)
덕분에 저도 기억이 났어요. 저도 14~15살 즈음에 저런 것을 한 기억이 납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자작시를 써서 판넬에 끼우고 멋을 내었던.^^
어떤 시를 썼는지도 기억이 안납니다. 하지만 즐거웠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나 역시 아날로그 시계를 좋아합니다. 가끔, 심심할 때면 혼자 바닥에 누워서 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며,
초 사이마다 시간을 얼마나 더 쪼갤 수 있는지 손가락으로 바닥을 딱딱딱 치곤 하지요.(웃음)

자, 깐따님의 아날로그에는 ☆☆☆☆☆

순오기 2009-02-07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리땐 시화전이라고 했어요.
판넬에 물바래기로 종이 붙이고 포스터칼라로 색칠하고 글씨 잘 쓰는 친구가 쓰고...내게도 추억이예요!^^
특히나 연정의 대상에 취하는 태도~ 공감^^ ☆☆☆☆☆

L.SHIN 2009-02-08 06:58   좋아요 0 | URL
물바래기는 무엇인가요? (갸우뚱)
아날로그 모으기 하면서 새로운 단어도 덤으로 수집하네요 ㅎㅎㅎ

순오기 2009-02-08 07:41   좋아요 0 | URL
물바래기는 판넬에 종이를 붙일때 종이 전체에 물을 펴바른 후 판넬에 붙이는 거죠. 그 물이 마르면서 종이를 팽팽하게 당겨주니까 울지 않아요. 그렇게 팽팽해진 종이에 색칠하고 그리고 글씨를 쓰죠~~^^

L.SHIN 2009-02-09 05:08   좋아요 0 | URL
와~ 새로운 단어를 알았다! +_+ (나중에 그렇게 해봐야지~)

hnine 2009-02-0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 학교 다닐 때에도 '시화전'이라고 불렀는데.
중학교 때 저도 내본적 있어요. 손이 많이 가더군요.

L.SHIN 2009-02-08 06:58   좋아요 0 | URL
아항~ 시와 그림이 함께 있어서 그렇게 부르나보군요. ^^
저것은 정말 오래 걸리는 작업이죠!

무해한모리군 2009-02-07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화전 저도 고등학교 때 문학동아리를 해서 해본적이 있어요..
사실 제 첫사랑과의 첫데이트도 시화전 초대장을 들고 여학교로 처음 온 그 친구와 둘이 학교앞 떡뽁이집에서 였는데 하하하
어쨌든 제 시는 저희 어머니만 좋아하셨다는 ㅎㅎ

L.SHIN 2009-02-08 06:59   좋아요 0 | URL
으헤헤~ 하나의 주제가 나오면, 모두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이 아날로그!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