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책, 더 사랑할 작가가 또 나타나니 살아볼 만한 일이다. 지금 읽는 책보다 더 근사한 책을 나이 들어서도 만날 수 있다는 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출간 순서는 이와 반대지만 사실 서사적 흐름은 <이 소년의 삶> 이후에 <올드 스쿨>로 봐야 한다. 작가 토바이어스 울프가 서부의 우라늄 채굴 광풍을 좇아 어머니와 플로리다에서 유타주로 이주하며 시작하는 이 소년의 삶은 계부들과의 불안정한 동거, 잦은 이동 등으로 끊임없이 유동한다. 의붓아버지 드와이트의 가족과 결합하게 되면서는 집에서 육십키로도 더 떨어진 '콘크리트 고등학교'에 다니며 본격적인 비행 청소년의 길을 걷는다. 가슴에는 보이스카우트 배지를 달고 뒤로는 물건을 훔치고 기물을 파손하는 '소년의 삶'은 동명의 보이스카우트 교본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었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자전적 이야기는 그가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소년의 정체성을 스스로 발명하고 심지어 그것을 위장하는 도발 속에 숨어 있는 여리고 상처받은 사랑을 갈구하는 진짜 소년의 처절하리만치 아픈 모습을 엿보는 일이다. 소년은 대단히 위험해보인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건 소년의 진심을 믿어주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소수의 어른들 덕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수녀님, 드러그스토어의 여주인, 친구의 아버지는 마냥 미워하고 불신하고 비난할 수 있는 이 소년을 포기하지 않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싱글맘이었던 소년의 어머니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소년을 최악의 모습으로 가정하거나 폄하하지 않았다. 소년은 불온한 꿈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상류 사회를 향한, 사립학교 소년들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었다. 마침내 그러한 삶을 위한 자신의 페르소나 또한 위장해내는 모습은 기함할 노릇이지만 결국 우리가 오늘날의 위대한 토바이어스 울프를 만나게 되는 직접적 계기이기도 하다. 


애송이일 때, 아직 반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꿈이 옳으며, 세상은 우리의 최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그리고 추락하고 죽는 건 겁쟁이들 몫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여태껏 태어난 모든 사람 중에서 오직 우리 자신만이, 영원히 애송이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특별히 받았다는 천진하고도 기괴한 확신신을 품고 산다.

-토바이어스 울프 <이 소년의 삶>


<올드 스쿨>에서는 이 소년이 드디어 바라마지 않던 동부의 사립학교에서의 소년의 삶이 펼쳐진다. 진창에서의 소년의 삶은 급격한 반전을 겪어 드디어 손끝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그들만의 리그로 도약한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삶의 변전은 놀라울 정도의 진폭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허무맹랑한 소년의 개과천선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행하는 연극적 자아에 기반해 있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연극의 전개의 향방은 마침내 이 두 작품을 내어놓는 스케일로까지 확장되니 경이로울 정도다. 


소년의 꿈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았다. 그 한계에 속박되지 않았다. 그의 비행의 결말은 비참한 자들의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신뢰까지 박탈하는 지경으로까지 치달았기에 오히려 방향을 틀 수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어른의 잔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체험과 그들의 눈빛으로 절감한다. 그 정도로까지 추락할 수는 없었다. 그 다음 그가 나아갈 곳은 그가 걸어온 길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었다. 작가의 고백은 뼈아픈 성찰에 기반한 것이기에 더 울림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짓궂은 소년을 끝내 미워할 수 없게 된다. 그 안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묻어버리고 싶은 우리의 그 치기어린 청춘의 모습 또한 있어 더욱 그렇다. 맹목적인 믿음, 여기와 저기의 끝없는 간극, 그럼에도 버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회한. 잊어버렸던 잃어버렸던 그 모든 것들이 이 소년의 시선을 통해 가차없이 돌아와 우리 눈앞에 당도해 있다. 그것은 현재의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거기에 그렇게 천덕꾸러기 애송이가 있었기에 가능하다. 때로 그 애송이는 튀어나온다. 성장은 때로 착시인 것 같다. 우리는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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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죽는 꿈을 꿨다. 정확히 말하면 죽기 직전 무언가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유언을 남기고 평화롭게 눈을 감으려는데 너무 무섭고 도망치고 싶어하다 깼다. 실제 죽음은 더 아프고 더 두렵고 그 불가항력적 힘에 대항도 못 하는 무기력함에 발버둥치겠지 싶어 일어나고서도 한동안 입맛이 썼다. 치기 어린 이십 대에는 늙고 또 늙어 생이 연장되는 게 별로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또 쉽지 않은 일인지 깨닫는 요즘이다. 어제 동네에 앰뷸런스가 왔다. 실제 딸아이 때문에 앰뷸런스를 탄 적이 있지만 언제 봐도 우울해진다. 필립 라킨의 이야기처럼 결론적으로 앰뷸런스가 지나가지 않는 길도 삶도 없다. 





















죽음에 대한 묘사가 가장 와닿았던 책은 의외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다. 많은 죽음이 나오지만 특히나 톨스토이 자신이 투영된 레빈의 형의 죽음의 과정에 대한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실적이다. 문장 틈새로 숨이 막히는 긴장, 고통, 허무, 절망의 냄새가 배어 나온다. 톨스토이는 생전에 모든 영광, 영화를 누린 작가이지만 말년에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특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학, 의학에서 거의 필독서가 되었다. 세상은 죽어가는 당사자를 이미 사물처럼 취급하며 자신들 만의 욕망과 생을 활발하게 이어나가는 데에서 그 비정한 생의 관성, 이기심이 드러난다. 내가 눈을 감아버리면 내 안의 세계는 막을 내리지만 내 바깥의 세상은 완강하게 버티고 일말의 타격도 없이 여전히 돌아갈 것이다. 아니, 때로는 그냥 이 세계라는 것이 '나'라는 허상과 함께 태어났다 '나'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상상도 해본다. 


오전에 로쟈님의 서재에서 본 이 책 안에는 답이 있을까. 아니면 더 진한 질문들과 불확실성만 확실해지는 걸지 모르지만 빨리 읽어보고 싶다. 이러고 또 책 주문할 궁리만 하고 있는 나, 참으로 앞뒤가 안 맞는구나. 가을 냄새가 나는 바람결, 여름의 막바지면 한 살을 더 먹게 되고 나는 또 젊음에서 늙음으로 죽음으로 걸어간다. 흑, 스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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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8-13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살고 있는 신림동에는 이틀에 한번 꼴로 밤마다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요.
아버지때문에 두 번 앰뷸런스를 탄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한동안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철렁하더라구요.
주위에서 죽은 사람이, 아픈 사람이 점점 늘어갈수록 죽음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공포와 우울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네요.
저도 로쟈님 서재에서 저 책을 보고 읽어보면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으려나..... 아침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blanca 2019-08-14 10:08   좋아요 1 | URL
아, 맞아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 보면 그 특유의 생기가 참 부러워요. 그 생기를 저는 이미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늙고 병들고 이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걸 경험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9-08-16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론적으로 앰뷸런스가 지나가지 않는 길도 삶도 없다.˝ - 상당히 와닿는 글입니다.

늙음으로 가는 길로 시간을 정의할 수 있지만 반대로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고 보면 시간의 소중함이 느껴집니다.
저도 30대엔 제 나이가 많은 줄 알고 젊은 20대를 부러워하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긍정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10년만 젊기를 소망하더군요. 그러면서 저를 부러워하더군요. 저 역시 내가 10년만 젊었으면 좋겠군, 할 때가 있어요. 아마도 노인이 되고 나면 지금의 ‘나‘를 돌아가고 싶은 때로 규정할지 모릅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40대까지는 젊은 것 같습니다.ㅋ 제 사견으로는...

blanca 2019-08-16 18:15   좋아요 1 | URL
아이들 커가는 걸 보면 더욱 실감해요. 저도 30대 때 쓴 일기 보면 실소가 나옵니다. ˝오늘 서른하나가 되었다. 충격이다.˝ 뭐 이런- -;; 가소로울 따름이죠. 아, 젊은 40대를 알차게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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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차가운 별이다. 그 심장은 얼음 가시이다."로 시작하는 이야기의 배경은 1933년 2월, 독일의 슈프레 강가 국회 의장 궁전이다. 스물네 명의 그들. 


그들의 이름은 바스프, 바이엘, 아그파, 오펠, IG 파르벤, 지멘스, 알리안츠, 텔레풍켄이다. 우리는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을 알고 있다. 심지어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 사이에, 우리 속에 그렇게 존재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자동차, 세탁기, 세제, 라디오 시계, 화재 보험, 그리고 건전지의 이름이다. 그들은 사물의 형태로 도처에 존재한다. 우리의 일상이 그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p.26


심지어 구천 킬로도 더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까지 익숙한 이름들이다. 그들은 나치에 부역했다. 이 날 대기업 총수들의 비밀 회동에 히틀러와 괴링이 참석하고 현장에서 나치를 위한 모금 협작이 이루어진다. 이 풍경이 그저 요약된 역사석 사실로 기술될 때 그것은 죽은 과거가 된다. 뉘른베르크의 법정이 명쾌한 청산의 마침표는 아니다. 저자 에리크 뷔야르의 역사 다시 쓰기는 이 어처구니없는 대참사의 촉발과 그 허구를 현실의 우리 눈앞에 재연함으로써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 취약하고 허무맹랑하고 빈약한 폭력이다. 문제는 그것에 철저히 수많은 사람들이 기만당했고 놀아나서 서로를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연대별 나치의 만행을 줄줄 외는 것으로는 결코 그들의 편에 가담한 수많은 침묵한 자들이 결과적으로 빚어낸 참사의 성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도 승승장구하는 심지어 마치 사회 공헌 역할을 수행하는 듯 기업 윤리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일거에 묻어버리는 작태에서 우리는 다시 비윤리적 폭력의 씨앗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리크 뷔야르의 서사는 그 지점을 예리하게 조준한다. 


나치가 오스트리아에 입성하며 남긴 탱크 전격전의 묘사도 놀랍다. 나치스가 자랑했던 판처 탱크는 사실 허술한 깡통이었다. 절대 다수가 고장나 국경을 넘지 못하고 멈춘 것을 억지로 끌어다 진군시키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위용도 당당한 소위 전격전과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환영 인사 필름이다. 자신들의 나라가 병합되는 현장에서 소녀들은 꽃을 흔들며 히틀러에게 열광한다. 심지어 고향에 금의환향하는 히틀러의 도착이 늦어지자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해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소름끼치게 괴이한 굴복의 풍경이다. 그들 사이에서 어두운 기운을 감지하고 많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자살한 기록은 주류의 진실이 아니므로 회자되지 않는다. 역사는 이렇게 왜곡되어 남는다. 


베를린과 빈 사이에 벌어진 영국 정보국에 도청된 화기애애한 대화만 해도 그렇다. 괴링은 그것이 도청되어 역사적 기록이 될 것임을 의식했다. 오스트리아의 침략은 아름다운 날씨에 이루어진 총통의 귀향으로 가공된다.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그 녹음을 들은 괴링은 미친듯이 웃는다. 과장된 자신의 연기의 완전무결함에 대하여 조소하며. 그것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을 조롱하며. 괴링은 재판관들 앞에서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날의 비밀>은 이렇게 얄팍한 사기와 허풍과 기만의 공모였다. 그러한 것들로 세계사가 흔들렸다는 이 가혹한 진실 앞에서 아연 말을 잃게 된다. 선동과 협박의 정치에서 정작 희생되는 것은 대다수의 무고한 국민들이다. 우리는 그러한 폭력을 용인하고 심지어 조장하기까지 한 기업가들이 여전히 승승장구하며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며 만들어 내는 일상의 소비재들의 브랜드를 여전히 친근하게 인식하고 사용한다. 이 이야기는 일본과의 지금 상황에서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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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12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쿠르상 수상작이라고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정보들의 취합
이라...

blanca 2019-08-13 10:42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의 말씀 듣고 보니 그런 면이 있네요. 공쿠르상은 저는 픽션만 주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역사적 사실들을 재구성해도 받을 수 있구나 싶더라고요.
 

나는 비행기 공포증이 있다. 특히 이륙시 그 고도가 아직 불안정한 상태에서 흔들릴 때, 혹은 착륙하려고 고도를 급격하게 낮출 때 아, 정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한 분위기. 그렇다면 나만 홀로 이렇게 온갖 최악의 상상은 다 하며 심지어 '이대로 바다 위로 추락해 지금 죽는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며 마음을 추스리는 것일까? 비행기 타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건만 나 같이 비행기가 흔들리면 꼭 잡을 좌석 팔걸이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그 와중에 김연수의 책을 읽었다. 왠지 좀 안심이 됐다. 

모든 연령이 다 힘든데, 인생에서 골짜기처럼 꺼지는 나이대가 있죠. 그게 마흔 살에서 쉰 살 사이에 있는 것 같아요. 그 시기에 아이는 성인이 되고, 부모는 돌아가시죠. 그 두 가지 중요한 일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오히려 모두가 나에게 기대는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죠.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중




















사십 대에 들어와서 김연수의 마흔 이후의 삶에 대한 예고가 정확했음을 실감했다. 골짜기 같이 꺼지는 나이. 어떤 기대, 어떤 꿈들도 이제는 정말 현실 앞에 제자리를 찾을 시점이다. 더 이상 계속 성장할 수도 꿈꿀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절감하는 지점이었다. 스물아홉이 서른 살이 되는 것과 서른아홉이 마흔이 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낭만을 가지고 아직은 흔들리며 삼십 대에 진입할 수 있다면 마흔이 되는 일은 진지해지고 숙연해지지 않으면 닥쳐올 일들에 땅을 제대로 딛고 서 있기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제 쉰 살에 다가가고 있는 그가 이야기하는 마흔 이후의 삶에 대한 그만의 시선이 궁금했다. 그건 나의 미래이기도 하니까. [시절일기]에서 [청춘의 문장들]의 종일 시를 쓰던 청년 시인 김연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세상과 삶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의 그늘이 문장 속에도 드리워져 있다. 그 특유의 생기, 낭만이 그리웠다. 그건 내가 잃어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어떤 보편성은 결국 모든 것을 장악하는 것같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이십여 년이면 충분했다. 그 이십여 년 동안 세상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둔 것도 아니고, 그토록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상 속의 우리를 만나게 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 명백한 실패를 경험하고 나서야 나는 이 실패는 인류가 존재한 이래 수없이 반복되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이 멈춰 있지 않은 한, 청춘의 푸른 꿈에게 실패는 예정된 것이라는 사실을.

-김연수 <시절일기> 중


어린 시절 수영을 일찌감치 배우지 못한 채 깊은 수영장 물 속에 빠졌던 순간이 남긴 트라우마와 크게 다쳤던 교통사고가 오늘의 비행기 공포증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누군가인지도 모를 사람, 상황에게 화를 내본들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이제 어떤 설렘, 기대로 잠드는 밤 같은 나날은 더이상 없다는 사실에 서글퍼한대도 결국 그 시간도 견뎌야 어른이라는 것을, 내가 유별나지도 특별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읽으며 체감한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고 애태우며 살아도 실망스러운 현재는 언제나 눈앞에 먼저 와서 나를 바라본다. 예정된 실패를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는 이야기. 그것은 예습할 수도 복습할 수도 없는 인류의 숙명이라는 것을. 김연수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다. 


다시금 살아서 땅위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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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8-03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김연수의 새 책을 읽었습니다.

blanca님이 남기신 의미와 비슷할수도, 아일수도 있는데 계속 읽으면서 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더군요.

blanca 2019-08-04 17:44   좋아요 0 | URL
아, 서점에서 읽으셨군요. 맞아요. 저도 이 책 읽으며 왠지 제 나이를 실감하게 되더라고요. 순리이겠지만요. 그래도 때때로 과거의 그 생기, 무모함이 참 그리워져요.

단발머리 2019-08-05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크 초콜릿처럼.... 아주 고급의 다크 초콜릿처럼요.
blanca님 글은 인생의 씁쓸한 맛을 전해주는데 그게 넘 달콤해요.
너무 좋아 여러번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blanca님^^

blanca 2019-08-05 10:52   좋아요 0 | URL
댓글이 더 좋네요. 더운데 단발머리님 덕분에 시원해졌습니다. 감사해요.

2019-08-11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1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7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 나라를 의인화하거나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국경의 경계로 나누는 것이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미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 인도 사람. 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친구의 이름보다는 국적이다. 개인적으로 만난 몇몇의 일본인들은 예의바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기민하게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의 손으로 뽑은 정권이 하는 일은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을 대체 어떻게 인식하고 앞으로 만날 일본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다른 나라의 사람을 대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국경이 민족이 나를 규정짓는 범위와 깊이는 어디까지 미치는가. 나는 내 이름 석자를 가지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존재하는 걸까. 미국에서 미국 사람들은 나의 고국을 마치 내가 떠나온 고향 마을인 것처럼 규정하고 궁금해했다. 나를 알기 이전에 내가 있었던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자기식의 선입견과 해석을 예비하고 있었고 내가 거기에 부응하고 호응해주기를 바라 나를 놀래켰다. 나는 나의 나라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나는 나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먼저 존재했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S. 게일은 선교사로 1888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보낸 자신의 10년 경험을 [Korean Sketches]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한다. 그는 최초의 '한영사전'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심지어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만큼 그냥 슬쩍 이방인의 위치에서 서양의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겉핥기로 우리나라의 풍광을 묘사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양반의 노동현장에서 유리되어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폐습이나 제사의 허례허식 같은 대목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깊은 이해도와 균형감 있는 비판 의식을 보여주어 놀랍다. 조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우리 민족 특유의 습속에 대한 외부인의 관찰은 유머러스하고 예리하다.


이곳에서 가장 흔한 작별인사는 "Nail do orita"인데, 대부분은 오지 않았다. 친구들 대부분이 이런 약속을 하고 돌아갔기에 나는 곧 내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나는 조선 사람들의 이런 말이나 약속은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인사치레임을 알게 되었다. 

-p.234


"내일 또 오리다" 는 "언제 한번 만나 밥 먹자"로 변형되어 현재진행형인 것을 보면 이러한 언어 습관의 역사는 오랜 것이었나 보다. 일제 침략과 특히 민비시해에 대한 그의 공분은 조선 사람 이상이었다. 연금 상태에 처한 조선 왕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한 흔적도 있다. 쓰러져가는 타국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의 시선 못지 않게 그들에 대한 예우와 애정을 잊지 않는 균형감이 인상적이었다. 군데군데 산업화와 개방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우리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비하가 뒤섞인 감정 토로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 정서다.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하릴없이 당하고 분열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일신의 영달과 개인적 소망들, 목숨까지 바치며 조상들이 지켜낸 오늘날의 진보와 번영 앞에서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일본과의 상황에 분노가 치민다. 아마 저자 게일이 살아 있었다면 그도 한마음으로 성토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그의 방문이지만 그가 머물렀던 시간은 조선의 격동의 시간을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증언하고 서구에 우리나라 고전 문학을 번역하여 전파하고 기독교 성경의 중요 어휘를 우리의 언어와 정서에 맞게 다듬는 등 한국학자로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룬 시간으로 남았다. 또한 이렇게 자신이 남긴 저작으로 후손들이 선조들의 눈물과 땀으로 되찾은 자신의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따뜻하고 뭉클하고 아름다운 글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다시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일 또 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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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7-22 0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제가 알라딘 서재에 활동했을 때 다른 분의 리뷰를 읽고나면 댓글로 인사치레로 하는 말을 남겼어요.

˝oo님이 소개한(추천한) 책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그 말을 한 100번 이상 했을 거예요.. ㅎㅎㅎ 물론 제 취향에 잘 맞아서 읽은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 수가 많지 않다는 게 함정이죠.. ^^;;

blanca 2019-07-22 11:0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읽고 싶은, 읽어야 할 책은 많으니까요.